창세기 15-1장 | 의가 된 믿음 | 선행은총, 노력, 구원

개요

창세기 15장 강의를 시작하겠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비로소 의로 인정받았다.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경해석가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매우 좋았던 것처럼 설명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믿음이 창세기 15장에서 비로소 ‘의’로 인정받았다면, 그전에는 아브람의 믿음이 ‘의’가 아니었다고 해석해야한다. 그전에는 아브람의 믿음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다. 앞의 설명과 모순이 된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믿음이 ‘의’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창세기 12장에서 15장 5절까지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 아브람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말이다. 이게 가능한?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가능하다. 이걸 현대에 적용하면, 신앙생활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 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서에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6:15절을 보자.

마태복음 16:15-16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 정도 함께한 시기이다. 예수님 돌아가시기 6개월 전이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졸업시험이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잘못된 대답을 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단순히 뛰어난 선지자가 아니라 창세기 3:15에서 예언된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이심을 맞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들은 이후 비로소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6:21을 보자.

마태복음 16:21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인류를 위해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죽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제자들은 이때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3년 간 예수님과 동행했고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 의에 이른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이 온전해진 건 예수님의 부활 이후이다.

우리는 흔히 복음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는 걸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은총을 받았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가진 상태가 아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다.

‘나는 예수님 영접했고, 구원의 확신도 있어. 예배 안빠지고, 성경공부 많이 하고, 전도도 열심히 했어.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은게 확실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구원받은 단계가 아니라 선행은총의 단계에 있는 걸 수 있다. 이론만이 아니라 경험을 보아도 그렇다. 많은 교인이 바른 믿음 혹은 구원의 체험을 갖지 못한채 착각에 빠져있다. 음식 냄새를 오래 맡으면 마치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른다. 구원받았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 실제와 상관 없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교인을 이용하고 속이려는 무리가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들 때문에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하게 막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문제부터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는 개혁주의를 배우지만, 교회에서는 인본주의를 가르친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이 인본주의인 것도 모른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상황을 선행은총의 단계라고 가르쳤다. 주의할 점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르치는 선행은총은 인본주의적 선행은총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인본주의적 선행은총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도 있고 안받을수도 있다는 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선행은총은 인간이 구원을 추구(seeking)해야 한다는 말일 뿐,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적으로 인도하고 주도하신다는 말이다. 구원을 추구하는 단계가 선행은총의 단계이다. 정리하면, 선행은총이라는 단어를 ‘인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신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구원을 확신하지 말기 바란다. 선행은총의 단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의로 인정받았다는 구절에 이런 주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강의를 들으면 좋겠다. 창세기 15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따라서 요절도 두 절을 택했다. 15:4-6과 17이다. 먼저, 4-6을 보자.

요절 1. 창세기 15:4-6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인정받은 이유를 알아보자.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 아브람은 앞장에서 큰 사건을 겪었다. 소돔 지역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납치된 조카 롯을 구출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물리쳤다. 완벽한 승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복의 위협을 느꼈야했다. 삶이 불안정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후계자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물려줄 자식이 없다는 사실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안심시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이런 추측의 근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안심시키셨다. 또, 아브람의 몸에서 난 자식이 후계자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실감나게 설명하셨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왜 이 상황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을까? 이유는 한 가지이다.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비약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문맥에 명시적으로 아브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보면 비약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면 그건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 구절이 어떻게 아브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까?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2장과 13장에서 아브람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아브람은 창세기 3: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을 믿고 있었다. 또, 그분이 셈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신에게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단순히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자손으로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이 이해된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올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이해되었다. 아브람은 자신이 자식을 갖게 되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사건임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만 한다.

아브람은 현재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낳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오실 수 있다. 즉, 아브람은 자식이 태어날 것을 믿는 것과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을 믿는 것이 중첩된 상황에 놓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식이 많아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있다. 지금까지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던 아브람이 이제서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따라서 아브람의 믿음이 의롭게 여겨진 것이다.

요절 2. 창세기 15:7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지난 시간에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인정받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브람은 구원계시의 핵심인 ‘구원자의 대속’을 믿었다. 객관적 진리에 관한 믿음이다. 이것이 주관적 믿음으로 완성된 순간이 15:6이다. 아브람은 생명과 재산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 몰렸다. 자식이 없어 허무감이 커졌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순간 아브람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믿음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내면화되는 것을 느꼈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다. 구원의 순간이다.

구원에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다. 좁은 의미의 구원은 구원의 순간을 의미한다. 구원의 순간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전적으로 유효하다. 인간의 공로가 구원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넓은 의미의 구원은 구원의 순간을 둘러싼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구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아브람 언약에 관해서 알아보겠다. 아브람 언약에 관한 내용은 자료가 많다. 중복되는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이 강의의 목적대로 핵심 세가지만 짚어보겠다. 첫째, 언약을 왜 하는가? 둘째, 왜 이 시점에 언약을 했는가? 셋째, 이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언약을 왜 하는가?를 알아보자. 예전에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었다”, “이 언약은 어떤 의미가 있다”라고 배웠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깨달았다. 애초에 왜 언약을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애초에 하나님은 왜 언약을 하는 것일까? 창세기 2장 강의에서 설명했으니 그것도 참조하기 바란다. 언약을 하는 이유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아무리 친해도 계약관계에 있지 않으면 남남이다. 죽고 못살것 같은 연인사이도 헤어지면 남남이다. 영원히 우정이 변치 말자던 절친도 사이가 틀어지면 남남이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갑자기 사라져도 찾을 방법이 없다. 휴대폰 위치추적을 하려고 경찰서에 찾아가도 남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렇다. 사람은 결국 남남이다. 남이 남이 아니기 위해서는 계약이 필요하다. 계약의 종류에 따라 관계가 결정된다. 결혼계약을 하면 부부가 된다. 채무계약을 하면 채무관계가 된다. 노동계약을 하면 고용관계가 된다.

계약이 있어야 남의 생활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계약이 없으면, ‘너나 잘하세요, 남이사 무슨상관이요’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둘째, 왜 이 시점에 언약을 맺었을까? 어렵지 않다. 특별한 시기라서 그렇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념일을 ‘시간에 매듭을 짓는 것’이라고 했다. 밋밋한 밧줄은 붙잡기 어렵지만, 중간에 매듭이 있는 밧줄은 붙잡기 쉽다. 시간이라는 것도 밧줄처럼 이어진다.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매듭이 있어야 의미있는 시간을 기억으로 붙잡아 둘 수 있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매듭을 지어놓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 시점에 아브람과 언약을 맺은 이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영적 생일잔치를 벌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낭만이 있다. 당연하다. 낭만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니까. 잊지 말아야할 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나님과 풍성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이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모두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언약이다. 그중에서 본문의 언약은 그 방법으로 가나안이라는 땅을 특별하게 구별한다. 앞으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가나안 땅은구원계시의 배경이 된다. 이 땅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즉, 가나안 땅은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앞으로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과 언약을 하신다. 그때는 범위가 넓어져서 가나안 땅이 아니라 전세계가 배경이 된다. 가나안 땅을 배경으로 가르친 내용이 전세계에 확장해서 적용된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창세기 15장의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하고, 17장의 언약을 ‘할례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경륜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계획표이자 진도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구원계획, 다시 말해서 여자의 후손이 어떻게 오실 것인지 설명하신다. 한꺼번에 설명하지는 않고, 점진적으로 설명하신다.

언약식에서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원래는 계약의 당사자가 다 지나가야한다고 한다. 하나님과 아브람이 둘 다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횃불 즉, 하나님만 지나가셨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 언약을 이루겠다는 의미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신본주의이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 감사하자.

정리

두 가지를 알아보았다. 첫째, 아브람이 삶의 위기 순간에 회심했다. 롯을 구출하면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물리쳤지만, 보복의 걱정해야 했다. 생명과 재산이 위태로웠다. 하나님은 당신이 방패와 상급이라고 하시며 위로하셨다. 상속자가 없어 인생의 허탈해하는 아브람에게 자식을 약속하면서 별을 보여주며 실물교육하셨다. 아브람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곧 여자의 후손이 오시는 것과 중첩되는 사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식이 태어날 것을 믿으면서 동시에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을 믿었다. 객관적 진리가 주관적 믿음으로 심어졌다.

둘째, 이 날을 기념해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생일잔치처럼 이 날을 축하해주신 것이다. 언약은 관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부르는데, 가나안 땅이 장차 복음의 배경이 될 특별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창세기 15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자

적용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힘든데 내가 왜 살아야 되지?”라는 고민을 하게될 수 있다. 극단적인 얘기인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당신이 바르게 복음을 향해 간다면 이런 순간까지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이 말을 기억하라. ‘나는 바르게 가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필자도 그런 순간을 겪었다. 그때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 아닌 번영주의였다. 번영주의자는 ‘니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니까 그렇게 힘든 거야’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자는 신앙생활을 평균은 했다. 성경공부, 예배출석, 기도, 금식, 전도 등등 중간 이상은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주장에 반박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까? 신앙생활 잘하면 복받는다는 거짓을 의심없이 믿으며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제자들이 바닥까지 내려간 일을 기억하기 바란다. 제자들은 능력이 봉인된 채 자기 불의가 폭로되는 걸 보게 된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조롱과 멸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고통하게 된다. 그들은 그 바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인생은 고해이지만, 인생이 고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조금만 견디기 바란다. 홀연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영혼에 각인되고, 기쁨이 항상 고통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은 아브람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길지 않으니까 창세기 12장에서 15장까지를 읽으며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개요

창세기 14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한다.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다. 내용은 단순한데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설교하기 좋은 장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전투에서 승리했고, 십일조까지 드렸다고 하니 얼마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설교하기에 얼마나 좋은 내용인가? 설교하기 좋은 내용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할까?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서 말한대로 아브람의 일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믿음의 승리, 십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겪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사건을 겪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다행히 아브람은 납치당했던 조카 롯을 무사히 구출했다. 조카가 납치당하는 일을 겪는 것도 흔하지 않겠지만, 무사히 구출하는 것은 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흔하지 않다는 건 곧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창세기 14장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잃은 해석이 된다. 14장은 어떻게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다른 장과 연결이 안된다. 체계 없는 파편적인 해석이 된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은 교회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잘 다니면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돈 문제, 집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계속 몰려온다. 교회 잘 안다녀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기도 많이하고, 예배 잘 참석하고, 전도하고, 방언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하는 목회자들부터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교인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때문에 교인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제는 이런 비현실적인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세기 14장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내용에서 보편성을 찾는다면 그건 무엇일까? 답을 말하겠다. 환난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도 환난을 피할 수 없다. 환난은 믿음이 좋거나 안좋거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교회를 잘 나가거나 잘 안나가거나 상관 없이 모두에게 닥쳐온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환난을 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14장을 살펴보자.

요절 1. 창세기 14:16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의 조카 롯은 소돔에 살았다. 소돔처럼 풍요로운 지역은 탐내는 세력들이 있다. 세력들 간에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분쟁 중에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브람은 이런 분쟁이 생길 걸 미리 예상했던 것 같다. 분쟁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병사 318명을 훈련시켜 놓았다. 그리고 멋지게 롯을 구출했다.

간략하게 기록해서 그렇지 아브람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소돔 지역에서 분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랐을 것이다.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내려 앉았을 것이다. 병사들을 이끌고 뒤쫓을 때는 초조하고 긴장되었을 것이다. 기습해서 적을 물리치고 조카를 구출했을 때는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건 단순히 믿음으로 성공하는 내용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는데, 그걸 믿음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 내용은 인생의 환난에 관한 것이고, 환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을 예상했고 대비했다. 그래서 환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기독교 작가인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 첫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이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33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환난을 안 당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다. 단, 환난을 당하면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담대하라고 하셨다. 교회 잘 다니면 환난을 안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그 생각을 버려라. 내가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안해서 전도를 안해서 봉사를 안해서 이런 환난이 닥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려라. 비성경적이고, 불필요하고, 어리석고, 틀린 생각을 버려라.

앞서 말한 스캇 펙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왜 한국교회 교인들의 삶이 더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거꾸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자기 배를 불리려고 성경을 왜곡한다. 쓸데 없이 죄책감을 일으킨다. 죄책감은 죄의 각성과 다르다. 죄책감은 바깥에서 찌르는 것이고, 죄의 각성은 안에서 풀리는 것이다. 죄책감은 파괴적이고 죄의 각성은 건설적이다. 죄책감은 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환난이란 건 개인의 믿음의 정도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문제이다. 이걸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성실히 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어떤 모양으로든 찾아올 수 있다. 아브람처럼 환난이 올 걸 예상하고 준비하고 대비하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요절 2. 창세기 14:18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은 적을 물리치고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다.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히브리서 7:3

3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한마디로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등장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한 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비중있는 배우가 다른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걸 까메오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이 까메오로 출연한 것이다. 아브람은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아브람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근거는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8:56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또 만나게 된다. 그건 다시 설명하겠다. 안타까운 건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십일조에 맞춰해석하려는 경향이다. 중요한 건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 보자. 아브람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롯을 무사히 구출해도 돌아왔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분을 만났다. 자신이 말로만 들었던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말이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승리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드리고 싶었다. 십일조를 드린 이유이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전체를 드렸다는 의미가 된다.

왜 예수님은 여기에 나타나셨을까? 환난 가운데 함께 하고 돕기 위해서이다. 환난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다. 스포츠 경기장에 관중이 들어찬 것과 같다. 마라톤 경기 결승선에 응원하는 관중이 기다리는 것과 같다.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의미이다. 조금만 참고 견디라는 말이다. 그만큼 환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눈물 흘리게 한다. 예수님이 여기서 깜짝 등장하신 이유는 그만큼 이 과정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망을 갖자. 뜻밖의 동행,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환난은 왜 찾아 올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성경에서 환난은 에덴동산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인생에서 환난은 필수과목이다. 너무나 큰 환난을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환난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환난이 필수라는 말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많은 경우, 환난이 나를 성장시켜준다는 것이다. 환난을 통해 성장하게 되면, 환난은 일종의 수업료가 된다. 좋은 수업은 수업료가 비싸다. 배움이 크면 수업료가 아깝지 않듯이 크게 성장하면 환난도 아프지 않게 된다.

환난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환난을 가장 잘 극복하는 방법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것은 환난 중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이걸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 요한계시록 7:14이다.

요한계시록 7:14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큰 환난’은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큰 환난’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이걸 종말에 있을 ‘대환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셀 수 없을만큼 많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대환난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그 큰 환난’을 ‘인생’이라고 해석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큰 환난’이다. 인생이라는 큰 환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바란다.

정리

창세기 14장의 주제는 “믿음이 좋으면 형통한다, 십일조 잘내자”가 아니다. “인생에는 환난이 있다”가 주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이 찾아올 걸 알고 대비했다. 미리 훈련시킨 병사를 데리고 조카 롯을 구출했다. 인생에 환난이 반드시 있고, 그걸 대비하는 것이 인생을 대하는 바른 태도이다. 환난은 신앙의 정도와 상관 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대비하면 잘 극복할 수 있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으로 등장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롯을 구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감사드렸다. 환난은 큰 고통을 주지만, 환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환난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면 그를 도우신다.

적용

누구나 평온하고 형통한 인생을 원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환난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 환난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다. 환난은 성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필수코스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울 수도 있다. 두려워서 피하려고 싶다. 신앙생활 잘하면 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환난은 에덴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점이다. 피해갈 수 없다.

환난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 환난 당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라. 환난에 맞설 때 예수님이 도우신다. 환난 가운데 예수님이 깜짝 등장하신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응원하기 위해서. 환난 가운데 소망을 갖자.

창세기 13장 | 헤어짐과 만남 | 방향을 정하면 동행이 생긴다

개요

창세기 13장 강의하겠다. 아브람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의해야할 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아무거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아무거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브람에 관한 기록을 보면서 제대로된 해석을 못한다. 제대로된 해석을 못하니까 억지로 해석하거나 자기마음대로 해석한다. 잠시 영상을 멈추고 창세기 13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구나로 해석되는가 아니면 이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해석되는가?

아브람에 관한 기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다. 아브람 개인의 경험이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12장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불의가 드러나는 사건을 겪었다.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윗도 블레셋으로 망명했다. 이것은 배교에 해당하는 심각한 불의이다. 불의가 드러나는 사건 이후에 아브람은 어떤 일을 겪을까? 답을 말하겠다. 결별의 단계이다.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지고, 멀었던 혹은 몰랐던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나아갈 방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함께 갈 사람과 함께 못갈 사람이 나누어진다.

롯은 아브람과 인간적으로 가까웠다. 롯와 아브람은 함께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롯과 아브람은 목표가 달랐다. 목적지가 다르면 같은 차를 타고 갈 수 없다. 부산으로 가는 사람과 광주로 가는 사람이 같은 열차를 타고 갈 수는 없다. 어느 정도는 함께 가다가도 갈라서야 할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 이것은 믿음을 향해 나아갈 때 반드시 겪어야 할 단계이다.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는 목적지가 어딘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요절 1. 창세기 13:9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앞장의 내용을 잠시 돌이켜보자.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바로에게 빼앗겼다. 자신이 지레 겁을 먹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핑계댈 사정도,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하나님이 바로의 꿈에 나타나 경고했기에 아내를 되찾고 보상금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아브람이 치사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누구나 치사하고 나약해질 때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중요한 건 자기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부분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모든 구도자가 이 과정을 거친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의 예들 들었다. 이번 시간에는 레위기를 예로 들겠다. 레위기에서는 독특하게도 나병에 관한 규례가 자세하게 소개된다. 나병은 신경세포가 마비되는 병이다. 신경세포가 마비되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손가락이 잘려도 아프지 않다. 등에 불이 붙어도 태연하게 걸을 수 있다. 나병은 불의한 인간의 상태를 비유이다. 인간은 당연히 해야할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한다. 불의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해도 태연하다.

레위기에서는 피부에 반점에 생기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제사장은 시간을 두고 상태를 살펴야 한다. 반점이 퍼지면 환자를 부정하다고 판정한다. 그런데, 놀라운 규정이 있다. 반점이 온몸에 퍼지면 정하다고 판정해야 한다.

레위기 13: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의하다는 것을 알면 정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이걸 이렇게 표현하셨다.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임을 알아야 복음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자기 불의를 발견한 사람은 의를 찾게 된다. 영양이 결핍되면 몸이 필요한 음식을 찾는다. 내 안에 의가 없기 때문에 바깥에서 의를 찾는 것이다. 영혼이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찾는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방향을 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 오면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게 된다.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가 다투었다. 롯과 아브람의 마음이 멀어진 결과이다. 근본 원인은 롯과 아브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롯은 번영을 추구했고, 아브람은 그리스도를 추구했다. 이것은 롯이 선택한 땅을 보면 알 수 있다. 롯은 소돔을 선택했다. 이것으로 왜 롯과 아브람이 헤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했다면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하기를 기도하자.

요절 2. 창세기 13:16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타국으로 떠날 때 함께했고 외로울 때 의지했던 조카가 떠났다. 쓸쓸하고 힘이 빠질 상황이다. 하나님은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위로하신다. 조카와 힘을 합쳐야 자손이 번창하기 쉬울 것 같지만, 하나님 생각은 달랐다. 단순히 육신의 자손이 복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육신의 자손도 복을 받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자손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자손이라는 말씀은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앞으로 자손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아브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둘째, 육신적인 자손과 그들이 받을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복을 받아야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아브람 한 사람에서 비롯한 아브람 가문은 이스라엘이라는 큰 나라를 세우게 된다. 셋째, 영적인 자손과 복을 가리킨다. 물질적인 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려는 궁극적인 복이 아니다. 진정한 복, 영원한 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복을 아브람처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주신다. 자손에 관한 설명은 15장에서 다시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겠다.

한 가지 더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미 여러차례 설명한 요약적 서술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브람이 믿음을 가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이 순식간에 믿는다고 하면 믿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요약적 서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매우 긴 시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요약해서 서술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2을 보자.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구절은 요약적으로 서술된 구절이다. 왜냐하면,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구원을 주신 사건을 짧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는 걸 보여준다. 요약해서 서술했으니까 풀어서 보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이걸 반대로 해석한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구원받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한다.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고 말만하면 구원받는다는 황당한 교리를 만든다.

창세기 12장부터 기록된 아브람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개입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이걸 알고 성경을 보자.

정리

창세기 12장부터는 믿음을 향해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단계를 알려준다. 12장에서는 불의가 폭로되었고, 13장에서는 결별이 찾아왔다.

현대 용어로 설명하면 이렇다. 아브람은 교회를 다녔고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경 공부도 했고, 기도 생활도 하고, 예배도 잘 드렸지만,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용기를 내서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출발한다면 말이다.

여행을 떠나게 되면, 헤어짐과 만남이 시작된다.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새롭게 동행하는 사람도 생긴다. 하나님은 자손이라는 말로 아브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오래 알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알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다 보면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 헤어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남도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같은 사람과의 만남은 알고 지낸 시간과 상관 없이 즐겁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신다. 새로운 만남과 관계를 기대하도록 소망을 주신다.

적용

죽고싶을만큼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연락처를 싹 지워보시라. 죽고싶을만큼 힘든데 아무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오래알고 지냈다고 친구가 아니다. 알게 된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친구이다.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나면 어색할 때가 있다. 대화가 겉돌고 마음을 나눌 수 없다. 대화를 계속할수록 좋았던 과거 얘기를 반복할 뿐이다. 과거는 나눌 수 있지만, 미래는 나눌 수 없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가야할 방향을 알게 되면 반드시 동행이 생긴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고민하자. 그리고 그 길을 가자.

창세기 12장 |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개요

창세기 12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람 가문의 이야기가 기록된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어떻게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믿음을 갖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아브람을 통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지 알아보자.

먼저, 창세기 12장부터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창세기 1~11장까지는 한장에 수백년이 압축되었지만, 12장부터는 수년으로 바뀐다. 기존의 성경해석과 다르게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큰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아브람은 15:6에 의를 얻었다. 아브람은 12:1에서 15:6절 사이에 아브람은 어떤 상태인가?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브람이 의에 이른 믿음을 가진 건 15:6이다. 아브람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아보자.

요절 1. 창 12:1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 이야기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땅을 옮기는 것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알고지내던 사람들, 익숙해던 환경과 이별해야 한다. 아이들이 그런 이유로 이사하고 전학하는 걸 싫어한다. 또, 통치자가 달라지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경선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자유로웠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통치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세상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이사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것을 보이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아브람이 이사간 것이 그 예이다.

기존에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난 것이 큰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아브람은 큰 믿음을 가진 상태로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믿음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다. 근거는 창세기 15:6이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비로소 의에 도달한다.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은 다른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어설프게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모든게 다 이루어지는 줄로 이해한다. 믿음을 자기 확신, 자기 세뇌, 할수있다는 신념, 긍정적 사고방식 정도로 이해한다. 믿음을 생각의 힘을 발동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시작도 안한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기만하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있어야 한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문제의 근원이 ‘의’에 있다고 설명한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다운 걸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데, 인간답지 못하다. 인간다운 게 ‘의’니까 인간답지 못한 건 ‘불의’이다. 성경에서 ‘불의’는 ‘죄’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죄’를 ‘나쁜 짓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죄가 맞다. 성경에서는 ‘나쁜 짓하는 것’도 죄고,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부모가 부모답워야한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 있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그게 ‘의’이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의’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아무짓도 안하면 ‘죄’를 안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자식도 부모에게 당연히 해야할 도리가 있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부부로서, 친구로서, 직원으로서 등등 모든 분야에서 당연히 해야할 ‘의’가 있다. 하다못해 강아지에게도 지켜야 할 의가 있다. 강아지와 놀아주는 게 의이다. 안놀아주면 불의이다. 죄를 불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왜 지옥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살기 싫어질 때가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했을 때이다. 언제 상처받고 실망하냐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이다. 불의의 문제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근본문제가 된다. 불의가 인간 문제의 근본 문제라고 동의할 때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해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한 건 아는데 자기가 불의한 건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감각이 죽어 있다. 자기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시작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기독교 믿음을 시작조차 못했다. 기독교 밖에서 기웃거린다. 기독교 밖에 있는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믿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요절로 돌아오겠다. 아브람도 자기가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믿음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믿음 교육을 시작하신다.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 가보지 않았던 여행의 출발, 하나님의 인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큰 믿음의 결단이 아니라 작은 믿음 혹은 아주 가냘픈 기대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어쩌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시작하게 되는 상황에 서게 될 수도 있다. 실망하지 마시라. 그것도 충분히 믿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떠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요절 2. 창 12:8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앞에서는 무조건 피의 제사를 지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긴 기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시현상이다. 멀리서 보면 점선이 실선처럼 보인다. 철길도 중간중간 떨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연결되어 보인다. 피의 제사를 지낸다고 무조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내는 기간도 있다. 피의 제사를 계속 지내면 믿음으로 인도되는 시점이 있다.

본문 뒤에는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아브람의 실수 중 한가지가 아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엄선된 이야기이다. 아브람이 자기의 불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아브람 뿐만 아니라 성경의 위인이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의 예가 극적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이스라엘 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지쳐서 결국에는 블레셋에게 망명한다. 불의를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망신을 주려고 불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사무엘상 27:1-2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불의가 드러나야 한다면 의롭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 그런 사람은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의를 위해 핍박받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 의를 추구할 때 역설적으로 불의한 자신을 보게 된다. 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을 찾을 수조차 없다.

그 예를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날 교회는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일제를 찬양하고, 독재 시대에 독재 정권에 아부했다. 그 결과 교회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통하고 있을 때, 안좋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쓴다. 의를 추구하지 않을 결과 불의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단순히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믿음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의를 추구해야 믿음에 다가서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는 이유이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믿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정리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갈 때 믿음이 크고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믿음은 방향성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큰 믿음이 있으면 좋겠지만, 크기보다 중요한 게 방향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 그것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이 안내자를 따라갈 때 홀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적용

예배에 안 빠지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나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가정이 불화하고 직장에서 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교회에 최적화되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몸만 피곤할 뿐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실제적인 것이 다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는 반드시 실제적이다. 당신이 교회에 최적화되었을 뿐 진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기 바란다. 그것이 아브람이 간 길이다.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의를 추구하기 바란다. 누구 덕 볼 생각하지 말고, 옳은 행동을 하기 바란다. 교회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분노하신다. 세상보다 못한 윤리의식을 가진 교회가 교회일 수 없다. 비교인보다 불의한 교인이 교인일 수 없다. 정신차리자.

창세기 11-2장 | 바벨탑과 셈 족보 | 역사와 구원계시

개요

창세기 11장 강의 시작하겠다.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창세기 11장에서 일단 마무리한다. 창세기 11장까지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에 성경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구원계시와 구원계시를 상속하는 방법 등 중요한 내용이 다 소개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의 서술 구조 를 살펴보면, 많은 곳에서 요약과 설명의 구조로 되어 있다. 요약을 숲을 보는 것이 비유할 수 있고, 설명을 나무를 보는 것이 비유할 수 있다. 숲도 보고 나무도 본다는 건 전체적인 모습도 보고 개별적인 모습도 본다는 말이다. 전체도 보고 부분도 보아야 오류가 없다.

부분을 알고 전체를 모르면 오류에 빠진다.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맹인의 비유를 한 번 더 들어보겠다. 맹인 여러 명이 코끼리를 만졌다. 어떤 맹인은 꼬리를 만졌고, 어떤 맹인은 다리를 만졌고, 어떤 맹인은 코를 만졌다. 꼬리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뱀처럼 가늘다고 말했다. 다리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기둥처럼 굵다고 했다. 코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속이 빈 통나무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부분적으로는 코끼리를 바르게 알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코끼리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대로 전체를 알고 부분을 몰라도 문제가 생긴다. 저희는 고양이를 키우는데, 고양이가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다 같은 고양이라고 생각하지 쉽다. 하지만, 고양이라고 다 같은 고양이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성격이 다 다르다. 옛날 양을 키우는 목자들의 말에 따르면 양마다 성격이 다 다르다고 한다. 목자들은 양 수백 마리의 이름을 알고 성격을 알아서 그 성격에 맞게 다뤄야 된다고 한다. 말 잘 듣는 양은 칭찬해주고, 먹이에 약한 양은 먹이로 유혹하고, 고집 센 양은 고집을 꺾어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구제에 관한 교훈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고 요약을 덧붙이신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기도에 관한 교훈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는 요약도 알려주신다.

청교도가 이러한 성경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요약과 설명의 구조로 되어있다. 크리스찬이 죄의 각성을 하고, 고향을 떠나 십자가 체험까지가 요약이다. 그 뒷 부분은 구체적인 설명을 기록했다.

주제로 돌아가겠다. 창세기 11장은 요약이 것까지 말씀드렸다. 그럼 어떤 요약이냐? 인류 역사와 구원계시 역사를 대조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인류 역사를 일반 섭리라고 하고, 구원계시 역사를 특별 섭리라고도 한다. 인류 역사는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거다.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이다.

구원계시 역사는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거다. 인간이 하나님되려는 욕망은 주류 즉, 메이저리티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니님을 섬기려는 마음은 비주류, 즉 마이너리티이다. 이걸 요절을 통해서 설명하겠다. 첫번째 요절은 창세기 11:4입니다.

요절 1. 창 11:4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늘에 닿겠다는 건 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신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는 거다. 이름을 내자는 건 명성을 떨치고 싶다는 것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건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갖고 싶다는 말이다. 신이 되고 싶은 욕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 명성을 떨치는 것, 이걸 모아놓으면 바로 역사상에 등장하는 제국이 된다.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은 제국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제국을 건설한 예가 서양에는 로마가 있고 중국에는 여러 왕조가 있었다. 남미에는 잉카, 아즈텍 제국이 있었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을 신이라고 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을 신의 아들, 즉 천자라 했다. 황제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이 될 수 없으니까 욕망을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제국이 생기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역사를 보면 제국은 대부분 잔인하게 통치해서 세상을 고통스럽게 했다. 역사상 강력한 제국들이 있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앗시리아나 바벨론이 매우 강력한 제국이었다. 이런 제국들은 대부분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이런 제국보다 덜 잔인했던 페르시아 제국도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부패가 늘어나고 불필요한 전쟁으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로마 제국이 그나마 다른 제국보다 덜 잔인해서 오래 지속되었다. 다른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덜 잔인했다는 것이지 잔인한 건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오랜 기간 고통 받다가 제국이 무너지고 해방되는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역사의 교훈은 제국이 백성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국을 분열시키신다. 왜냐하면, 제국은 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은 집단이기 때문이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다. 놀랍게도 당시에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제국들이 대부분 허무하게 멸망했다.

다음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을 언어를 혼란하게 해서 흩으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좋은 예가 현대 중국이다. 현대 중국은 일종의 제국이다. 공산당이 13억 명의 인구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13억 명의 인구를 마음대로 조종하니까 전세계에 골치덩어리이다. 군사적으로 주변 나라를 침범하고, 바다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긴다. 경제적으로도 패악질을 한다. 나쁜 기업을 후원해서 흥하게 한다. 좋은 기업을 불매운동으로 망하게 한다. 아무리 미미한 숫자도 13억을 곱하면 엄청난 숫자가 된다. 아무리 큰 숫자도 13억으로 나누면 미미한 숫자가 된다. 경제적 인해전술을 실천하고 있다.

중국이 더 악한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언어를 혼란하게 해서 흩으셨지만, 중국은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흩으실 수 있다. 제국을 만드는 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시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흩으신 내용과 대조되는 것이 사도행전의 언어통일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언어가 통일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류를 통일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에서 알아보겠다.

국가나 민족적으로만 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제국을 만든다. 로마 카톨릭이 교회로 제국을 만든 예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도 제국을 만들려고 한다.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회자는 자기가 훌륭한 목회자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깨달았다는 연구자는 자신을 뛰어난 학자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제국의 황제처럼 여긴다. 스스로 가치있다 평가한다. 착각이다.

지난 시간에 말했다. 내재적 가치 혹은 본질적 가치는 관계적 가치에 비하면 미미하다. 내재적, 본질적 가치가 우월하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서 잘생겨서 재능이 많아서 우월하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보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재능 많아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훌륭한 업적을 쌓아서 이뻐하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식이니까 귀한 것이다. 관계가 우선이고 절대적인 가치 평가의 기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사람을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신다. 가치있다고 평가하신다.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받으려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면 안된다는 걸 알게 된다. 자기가 하나님은 커녕 다른 사람만 못한 불의한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코 제국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공로를 생각하면서 공로에 따라 자신과 남을 평가한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오늘날 한국의 큰 교회에는 큰 제국이 있고 작은 교회에는 작은 제국이 있다. 큰 교회에는 큰 교주가 있고 작은 교회에는 작은 교주가 있다. 교회가 교인이 목회자가 평신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요절 2. 창 11:31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창세기 11장 셈 족보 끄트머리에 아브람이 등장한다. 아브람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수박겉핥기식으로 지나가던 성경이 자세하게 기록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금까지 누가 구원계시의 상속자이고 구원계시의 어떻게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는지를

아브람을 생각하기 전에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구원계시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던 시대에 아버지가 구원계시를 상속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들이 상속할 수 있었을까?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데라의 우상 숭배(수 24:2-3)
2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숭배를 했다. 아브람은 어떻게 신앙을 상속했을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신앙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몇 십년 전만해도 3대가 모여 사는 집이 흔했다. 백 년 이상을 살았던 아브람 시대도 3대 4대가 모여살거나 근처에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11에서 데라는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아브람이 데라를 떠날 때 데라는 살아있었다. 데라뿐만 아니라 훨씬 윗 조상들도 살아있었다. 따라서,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으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홍수 이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매우 길었다.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나타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중간에 구원계시를 믿지 않는 자식이 있어도 손자, 증손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아브람이 아버지인 데라가 믿음을 받지 못했지만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인간의 수명을 갑자기 줄이지 않은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복음이 끝어지지 않도록 여유를 주신 것이다.

요즘은 기술을 대부분 학교에서 배우지만, 예전에는 부모에게 배웠다. 아버지가 목수면 아들이 부모에게 목공기술을 배웠다. 아버지가 대장장이면 아들이 대장장이 기술을 부모에게 배웠다. 이런 방식의 장점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르치니까 세밀하게 가르친다는 점이다. 단점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 기술을 못배운다. 아버지가 재능이 없으면 적게 배운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은 이런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한다.

홍수 후에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구원계시 즉, 복음을 전달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3대가 동시대에 사는 기간이 길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공동체를 통한 전달을 준비하신다. 공동체를 통한 전달은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실현된다. 이게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차이이다.

출애굽기 시대에는 공동체를 통해서 복음이 전달된다. 공동체를 통한 복음전달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성막과 율법이다.

정리

창세기 11장까지가 성경 전체 내용의 요약이다. 성경은 인류 역사가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나누어진다고 가르친다. 일반 섭리는 주류 역사로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특별 섭리는 비주류 역사로 구원계시를 상속하는 상속자의 역사이다.

바벨탑같은 거대 건축물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욕망을 눈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만리장성,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을 만들려면 재료를 살 돈과 일꾼을 동원할 권력이 있어야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대 건축물은 돈과 권력으로 만든다. 거대 건축물을 보면 보통 사람은 기가 죽는다.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기가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낀다.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바벨탑을 주로 제국으로 설명했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집단적 욕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이 모여서 집단이 됩니다. 개인도 욕망이 있고, 집단도 욕망이 있습니다. 목표를 이루고, 경쟁에서 이기고,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그런 단체가 다 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국은 부패합니다. 영국의 역사가 존 달버그 액턴은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집단의 권력이 강해지면, 하나님은 그 집단을 해체하십니다. 집단이 해악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해체시키는 방법은 언어를 다르게하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을 막으십니다. 같은 말을 써도 전달이 안되게도 하십니다.

셈 족보는 아브람에게 이어진다. 아브람은 바벨탑을 쌓은 주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아브람은 주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특징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성경은 왜 평범한 아브람에게 주목하는가? 아브람을 특별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계시 때문이다.

적용

초고층 빌딩에 가면 위축된다. 첨단 기술과 권력, 돈의 위력을 느낀다. 질투하거나 부러워하지 말자.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을 살면 된다. 그들은 바벨탑 이후로 인간이 추구하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추구하는 노력을 폄하하지 말자.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것은 다르다. 구원계시를 추구한다. 구원계시는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 길을 담담하게 가자.

바벨탑은 초고층 빌딩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천주교의 대성당, 개신교의 대형 예배당도 마찬가지이다. 바벨탑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로 뭉쳐 제국이 되는 것을 막으시기 때문이다. 고립되고 사회에서 뒤쳐진다. 오늘날 대형교회가 사회에서 도태되는 모습이다. 사회와 소통되지 않는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아직은 건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하다.

창세기 11-1장 | 바벨탑과 셈 족보 | 역사와 구원계시

개요

창세기 11장 강의 시작하겠다.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창세기 11장에서 일단 마무리한다. 창세기 11장까지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에 성경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구원계시와 구원계시를 상속하는 방법 등 중요한 내용이 다 소개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의 서술 구조 를 살펴보면, 많은 곳에서 요약과 설명의 구조로 되어 있다. 요약을 숲을 보는 것이 비유할 수 있고, 설명을 나무를 보는 것이 비유할 수 있다. 숲도 보고 나무도 본다는 건 전체적인 모습도 보고 개별적인 모습도 본다는 말이다. 전체도 보고 부분도 보아야 오류가 없다.

부분을 알고 전체를 모르면 오류에 빠진다.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맹인의 비유를 한 번 더 들어보겠다. 맹인 여러 명이 코끼리를 만졌다. 어떤 맹인은 꼬리를 만졌고, 어떤 맹인은 다리를 만졌고, 어떤 맹인은 코를 만졌다. 꼬리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뱀처럼 가늘다고 말했다. 다리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기둥처럼 굵다고 했다. 코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속이 빈 통나무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부분적으로는 코끼리를 바르게 알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코끼리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대로 전체를 알고 부분을 몰라도 문제가 생긴다. 저희는 고양이를 키우는데, 고양이가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다 같은 고양이라고 생각하지 쉽다. 하지만, 고양이라고 다 같은 고양이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성격이 다 다르다. 옛날 양을 키우는 목자들의 말에 따르면 양마다 성격이 다 다르다고 한다. 목자들은 양 수백 마리의 이름을 알고 성격을 알아서 그 성격에 맞게 다뤄야 된다고 한다. 말 잘 듣는 양은 칭찬해주고, 먹이에 약한 양은 먹이로 유혹하고, 고집 센 양은 고집을 꺾어놓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구제에 관한 교훈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고 요약을 덧붙이신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기도에 관한 교훈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는 요약도 알려주신다.

청교도가 이러한 성경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요약과 설명의 구조로 되어있다. 크리스찬이 죄의 각성을 하고, 고향을 떠나 십자가 체험까지가 요약이다. 그 뒷 부분은 구체적인 설명을 기록했다.

주제로 돌아가겠다. 창세기 11장은 요약이 것까지 말씀드렸다. 그럼 어떤 요약이냐? 인류 역사와 구원계시 역사를 대조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인류 역사를 일반 섭리라고 하고, 구원계시 역사를 특별 섭리라고도 한다. 인류 역사는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거다. 이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이다.

구원계시 역사는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거다. 인간이 하나님되려는 욕망은 주류 즉, 메이저리티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니님을 섬기려는 마음은 비주류, 즉 마이너리티이다. 이걸 요절을 통해서 설명하겠다. 첫번째 요절은 창세기 11:4입니다.

요절 1. 창 11:4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늘에 닿겠다는 건 신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다. 신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는 거다. 이름을 내자는 건 명성을 떨치고 싶다는 것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건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갖고 싶다는 말이다. 신이 되고 싶은 욕망,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 명성을 떨치는 것, 이걸 모아놓으면 바로 역사상에 등장하는 제국이 된다.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은 제국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제국을 건설한 예가 서양에는 로마가 있고 중국에는 여러 왕조가 있었다. 남미에는 잉카, 아즈텍 제국이 있었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을 신이라고 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을 신의 아들, 즉 천자라 했다. 황제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이 될 수 없으니까 욕망을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제국이 생기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역사를 보면 제국은 대부분 잔인하게 통치해서 세상을 고통스럽게 했다. 역사상 강력한 제국들이 있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앗시리아나 바벨론이 매우 강력한 제국이었다. 이런 제국들은 대부분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이런 제국보다 덜 잔인했던 페르시아 제국도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부패가 늘어나고 불필요한 전쟁으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로마 제국이 그나마 다른 제국보다 덜 잔인해서 오래 지속되었다. 다른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덜 잔인했다는 것이지 잔인한 건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오랜 기간 고통 받다가 제국이 무너지고 해방되는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역사의 교훈은 제국이 백성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국을 분열시키신다. 왜냐하면, 제국은 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은 집단이기 때문이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다. 놀랍게도 당시에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제국들이 대부분 허무하게 멸망했다.

다음 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을 언어를 혼란하게 해서 흩으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좋은 예가 현대 중국이다. 현대 중국은 일종의 제국이다. 공산당이 13억 명의 인구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13억 명의 인구를 마음대로 조종하니까 전세계에 골치덩어리이다. 군사적으로 주변 나라를 침범하고, 바다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긴다. 경제적으로도 패악질을 한다. 나쁜 기업을 후원해서 흥하게 한다. 좋은 기업을 불매운동으로 망하게 한다. 아무리 미미한 숫자도 13억을 곱하면 엄청난 숫자가 된다. 아무리 큰 숫자도 13억으로 나누면 미미한 숫자가 된다. 경제적 인해전술을 실천하고 있다.

중국이 더 악한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언어를 혼란하게 해서 흩으셨지만, 중국은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흩으실 수 있다. 제국을 만드는 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언어의 혼란시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흩으신 내용과 대조되는 것이 사도행전의 언어통일이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언어가 통일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류를 통일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에서 알아보겠다.

국가나 민족적으로만 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제국을 만든다. 로마 카톨릭이 교회로 제국을 만든 예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도 제국을 만들려고 한다.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회자는 자기가 훌륭한 목회자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깨달았다는 연구자는 자신을 뛰어난 학자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제국의 황제처럼 여긴다. 스스로 가치있다 평가한다. 착각이다.

지난 시간에 말했다. 내재적 가치 혹은 본질적 가치는 관계적 가치에 비하면 미미하다. 내재적, 본질적 가치가 우월하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서 잘생겨서 재능이 많아서 우월하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보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재능 많아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훌륭한 업적을 쌓아서 이뻐하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식이니까 귀한 것이다. 관계가 우선이고 절대적인 가치 평가의 기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사람을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신다. 가치있다고 평가하신다.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받으려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면 안된다는 걸 알게 된다. 자기가 하나님은 커녕 다른 사람만 못한 불의한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코 제국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공로를 생각하면서 공로에 따라 자신과 남을 평가한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오늘날 한국의 큰 교회에는 큰 제국이 있고 작은 교회에는 작은 제국이 있다. 큰 교회에는 큰 교주가 있고 작은 교회에는 작은 교주가 있다. 교회가 교인이 목회자가 평신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요절 2. 창 11:31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의 우상 숭배(수 24:2-3)
2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숭배를 했다. 아브람은 어떻게 신앙을 상속했을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신앙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몇 십년 전만해도 3대가 모여 사는 집이 흔했다. 백 년 이상을 살았던 아브람 시대도 3대 4대가 모여살거나 근처에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11데라는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다. 하지만, 아브람이

정리

창세기 11장까지가 성경 전체 내용의 요약이다. 성경은 인류 역사가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로 나누어진다고 가르친다. 일반 섭리는 주류 역사로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특별 섭리는 비주류 역사로 구원계시를 상속하는 상속자의 역사이다.

바벨탑같은 거대 건축물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욕망을 눈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만리장성,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을 만들려면 재료를 살 돈과 일꾼을 동원할 권력이 있어야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대 건축물은 돈과 권력으로 만든다. 거대 건축물을 보면 보통 사람은 기가 죽는다.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기가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낀다.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셈 족보는 아브람에게 이어진다. 아브람은 바벨탑을 쌓은 주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아브람은 주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특징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성경은 왜 평범한 아브람에게 주목하는가? 아브람을 특별하게 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계시 때문이다.

적용

장세기 10장 | 노아의 자손 | 노아 족보의 역할과 교훈

개요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자손의 족보가 나온다. 이 족보를 통해서 성경에 가끔 나오는 족보의 역할과 교훈을 알아보겠다.성경에는 족보가 가끔 나온다. 족보는 어떤 역할을 할까? 족보는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다. 구약시대는 역사를 글이 아니라 기억으로 담아두는 시대였다. 기억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떠올릴 실마리를 잘 마련해 두어야한다. 실마리를 생각할 수 있으면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기 쉽다. 실마리를 생각할 수 없으면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기 어렵다. 족보는 매우 좋은 실마리가 된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은 이름만 읽어도 구약 성경의 내용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강의를 들으면 여러분도 그렇게 될 것이다.

노아 족보는 아담 족보와 비슷하다. 창세기 5장에 아담 족보가 나오고, 창세기 10장에는 노아가 나온다. 노아는 제2의 아담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관심은 아담 때도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누군가에 있다. 구원계시,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은 자손이 누구인지, 어떻게 믿었는지에 관한 교훈을 기록한다.

성경의 족보는 구원계시에서 멀어진 족보를 먼저 기록한다. 구원계시의 상속자는 나중에 기록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아들들, 즉 셈, 함, 야벳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11장에서 셈 족보가 상세하게 기록된다. 요절을 통해서 창세기 10장을 알아보자.

요절 1. 창세기 10:1

1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노아의 자손 중에서 중요한 인물은 셈과 함이다. 먼저, 셈은 구원계시를 계승한다. 여기서는 셈의 자손에 관한 일반적인 소개가 나온다. 창세기 9장에서 함은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함 족보를 보면 자손들이 세속적으로는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성공과 저주가 세속적인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 좋다고 성공하고 잘산다거나 믿음이 없다고 실패하고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아니다. 성경은 축복과 저주를 구원계시 중심으로 가르친다. 이 사실은 함의 자손 니므롯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니므롯은 함이 받은 저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이다. 하지만, 니므롯과 그의 자손은 구원계시에서 멀었다.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지 못했다. 협적적이지도 않아다. 적대적이거나 위협적인 역할을 했다. 악역을 맡았다.

성경의 축복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다.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구원계시 중심으로 살아야한다.

노아는 의롭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실수했다. 의인이 잘못을 범하기도 하는가? 당연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내 안의 의가 아니라 내 밖의 의이다. 내 안의 의보다 내 밖의 의가 더 크다. 예를 들어보겠다. 야구공 가격이 1만원이 안된다. 원가는 그것보다 적을 것이다. 그런데, 이승엽 선수의 KBO리그 55호 홈런볼이 1억 2500만원에 낙찰되었다. 새 야구공보다 1억 2500만 배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야구공에 내재한 가치보다 야구공 외적인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

더 쉬운 예가 있다. 사람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 사람마다 지능, 재능, 건강이 다를 것이다. 잘난 사람이 있고 못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해도 자기 부모나 자녀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능, 재능, 건강같은 건 사람에게 내재하는 가치이다. 그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란 의미이다. 부모, 자녀, 형제자매라는 건 그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가 아니다. 나와의 관계에 의해서 생긴 관계적인 가치이다. 어떤 게 더 중요한가? 본질적인 가치인가, 관계적인 가치인가?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보다 외연적이고 관계적인 가치가 훨씬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개념도 비슷하다. 내가 율법을 잘 지켜서 얻게 되는 의는 나의 본질적인 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라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아주 조금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구원을 얻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는 외연적이고 관계적인 의이다. 내 바깥에 있는 의이다. 한 없이 큰 의이다.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다. 성경은 내 안의 의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내 바깥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으라고 가르친다. 노아가 실수했지만, 의로운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 나오겠지만, 구원계시의 상속자는 스스로 의롭게 되는데 실패한다. 자기 안의 의로 의롭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의롭게 살 필요가 없는가? 아니다. 의로운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의를 추구하는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의를 추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셈 족보는 창세기 11장에 다시 나온다. 거기서 셈부터 아브람까지의 족보가 소개된다.

정리

성경은 구원계시의 상속자에게 관심을 갖는다. 구체적으로 누가 구원계시를 상속하는가? 어떻게 구원계시를 상속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는 이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경을 볼 때 이 관점을 이해해야 맥을 잡을 수 있다.

셈 자손은 축복을 받았고, 함 자손은 저주를 받았다. 성경의 축복과 저주가 세속적 관점에서는 반대로 보인다. 축복받은 셈 자손보다 저주받은 함 자손이 성공했다. 함 자손은 제국을 건설했고 명성을 떨쳤다. 일부러 가난하고 실해한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세속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이다.

적용

성경을 왜 공부하는가? 필자는 구원받기 위해서 한다. 목회자들의 성경해석이 못미더웠었다. 구원이 그렇게 간단할까? 립서비스가 믿음일까? 교회 다니면 이상해지는데 왜 그걸 모를까? 성경대로 살면 성공할 수 있을까?

성경은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성경은 성공방법을 가르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배우라. 그것을 체험하라.

창세기 9-2장 | 무지개 언약 | 세상과 신앙의 관계

개요

창세기 9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무지개 언약과 노아의 실수이다. 간단한 내용같지만 해석을 위해서 알아야 할 개념이 많다. 성경을 생각 없이 통독하면 그냥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성경은 별 거 아닌 일도 기록했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성경의 기록이 신중하게 선별되고 정밀하게 배열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 성경은 쉬워보이지만 끝을 알 수 없을만큼 깊다.

다행히 성경은 친절하다. 친절하게 주제가 하나이다. 시작부터 주제를 알려주고 시작한다. 그 주제를 요약하고 비유하고 반복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은 사람, 믿는 방법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일단 창세기 11장까지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다. 매우매우 압축되어있다.

이제 창세기 9장이다. 창세기 9장은 요약, 비유, 반복이 나온다. 그러면서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고, 전진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설명하겠다. 먼저 첫번째 요절을 알아보자. 창세기 9:26-27이다.

요절 1. 창세기 9:26-27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의 실수를 알아보자.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자기 장막에서 옷을 벗고 잤다. 옷 벗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아들 함이 다른 아들들에게 알렸다. 다른 아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다. 이것이 노아의 실수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읽으면 네 가지 정도 의문이 생긴다. 첫째,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함의 잘못이 그렇게 큰가? 셋째, 함이 잘못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 넷째, 셈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배운 것을 적용해서 해석해보자. 28절에 보면,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다. 삼백오십 년 동안 일어난 일 중에서 하나를 선별한 게 이 사건이다. 홍수 후 삼백오십년을 이 사건에 압축했다. 요약된 기록이다. 에피소드나 해프닝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비유를 담고 있을까? 아담에 비유하고 있다.

홍수 후에 성경의 최대 관심은 무엇일까? 노아가 상속한 구원계시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이다. 노아는 아담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아담이 구원계시를 아벨/셋에게 전달한 것처럼 노아도 구원계시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노아는 실수했다. 아담도 실수했다. 아담이 실수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벗은 것을 누가 알게 했느냐고 물으셨다. 뱀이 그렇게 했다. 벗은 몸을 누가 가려주었나? 하나님이 가려주셨다. 본문에서 노아가 벗은 것을 알게한 사람은 함이고, 가려준 사람은 셈이다. 비유적으로 창세기 9장과 창세기 3장이 비슷하다. 구원계시를 받는 상속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둘째, 함의 잘못이 그렇게 큰가? 이 사건이 단순한 에피소드나 해프닝이라면 큰 잘못이 아니다. 압축된 사건이기 때문에 큰 잘못된다. 압축된 건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유적이란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 기록하기 어려우니까 한 가지 사건에 뭉뚱그려서 표현했다는 말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일은 큰 잘못이 아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알린 사건은 함이 노아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무엘하 6:16 다윗이 춤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긴 미갈과 비슷하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사람은 노아 밖에 없었다. 노아는 파이다고고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안내자란 의미이다. 안내자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만나지 않겠는가?

주의할 점은, 현대의 목사를 파이다고고스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오직 성경만이 파이다고고스이다. 목사, 성전, 율법 등 어떤 것도 파이다고고스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용납치 않으신다. 목사들이 은근히 자기를 파이다고고스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심각한 죄라는 걸 몰라서 하는 행동이다.

성경을 구원계시를 담은 책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존중해야 한다. 만약 목사가 자기 잘못을 보고도 떠벌리지 말라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함이 했던 태도이다. 구원계시를 자기 합리화에 이용하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행동이다.

셋째, 함의 잘못이 큰데 왜 가나안에 저주받았을까?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 가나안의 아들들은 순서대로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다. 넷째 아들 가나안이 함의 잘못에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나안은 나중에 극히 죄악이 심해서 심판받는 가나안 민족의 조상이다. 역사에는 가나안 민족처럼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극악한 죄를 범하는 개인, 단체, 민족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절하게 제거하셨기 때문에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었다. 노아 언약의 실현이다.

노아가 가나안이 저주 했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이 미래에 악한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아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개념이라서 기회가 되면 기독교 과학관을 설명하겠다. 간략하게 말하면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고 가르친다. 창조와 동시에 종말이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종말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이 이미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책을 출판할 때 이미 결말이 쓰여져 있는 것과 같다. 영화도 개봉할 때 엔딩이 정해져 있다. 이 세상이 책이나 영화와 다른 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현재, 미래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현재 행동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오차 범위가 있을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저주가 가나안 민족에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 있을 가나안 민족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보고 말한 것이다. 에서를 생각해 보자. 에서는 태중에서 선택받지 못했다. 동시에, 에서는 자기 스스로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겼다. 에서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에서에게는 잘못이 없다.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서가 선택받지 못한 것과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긴 것은 시간적으로는 선후가 있지만 섭리적으로는 순서가 없다. 자세한 것은 신비에 속한다.

함의 아들들 이름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이라고 한다.

넷째, 셈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의 하체를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셈은 함과 반대로 노아를 존중했다. 파이다고고스를 존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 자른 것을 회개했다. 사울 개인은 악한 자였지만, 그가 받은 왕의 기름부음은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다윗은 그가 받은 기름부음을 존중했다. 다윗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것은 이런 존중때문이다. 셈도 마찬가지로 노아의 역할을 존중했기 때문에 상속자가 되었다.

요절 2. 창세기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있지 아니하리라

무지개 언약의 의미는 창세기 8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8장을 다시 들어보기 바란다. 조금 덧붙이겠다. 무지개 언약은 노아가 언약의 중심이므로 노아 언약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생물이 언약의 대상이기 때문에 무지개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도 타당하다. 그렇다면, 노아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무엇일까? 구체적인 설명은 베드로후서 3:6-9을 보면 알 수 있다.

베드로후서 3:6-9

6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노아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보장하는 근거가 된다. 성경의 다른 구절과 종합해서 해석하면, 복음이 전세계에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을 보존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보존된 세상은 구원계시를 상속한 상속자가 사라지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노아 언약, 다른 말로 무지개 언약에서 세상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세상과 신앙은 대립관계가 아니다.

물질에 무슨 생각이 있겠는가? 세상은 중립적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돈이 나쁘다는 말씀이 아니다. 돈은 교환수단이다. 중립적이다. 돈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쁘다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비슷하다. 여기서 세상은 물질세상이 아니다. 물질세상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물질세상은 중립적이다. 사탄의 영향을 받은 생각, 마음을 가리킨다. 그런 생각, 마음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과학이나 의학이 문제인가? 과학이나 의학은 잘못이 없다. 과학자나 의사 중에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홍수 이후 보호막이 사라졌다. 인간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과학과 의학 발전을 허용하셨다. 과학과 의학 발전이 안좋은 면이 있다. 지구 오염, 온난화, 전염병 등이 생긴다. 반대로 좋은 점도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시간 여유가 생긴다. 의학이 발전하면 아프지 않게 된다. 시간 여유가 있어야 성경을 볼 수 있다. 아프지 않아야 교회 나갈 수 있다. 과학이 발전해서 남는 시간을 오락으로 낭비할 수 있다. 의학이 발전해서 아프지 않으면 간절함을 잃을 수 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은 인간이 물질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면서 복음을 듣기를 원하신다는 점이다.

무지개 언약에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있다. 과학, 의학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 신앙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지 말자. 은혜를 악용하는 잘못을 주의하자. 과학, 의학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 사용하자.

정리

창세기 9장에서 두가지를 알아보았다. 먼저, 노아의 실수는 홍수 후 350년 기간을 요약한 사건이다. 단순 해프닝이 아니라 중요한 교훈이다. 교훈은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려면 그 전달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목회자를 존중하라는 말이 아니다. 당시 노아는 살아있는 성경이었다. 성경을 존중하라는 말이다. 성경에 관한 합리적 의심, 문맥적 공부, 논리적 해석은 가능하다. 악의적인 왜곡, 비합리적 멸시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은 노아을 중심으로 세상의 모든 생명과 맺은 언약이다. 하나님은 나빠진 세상에서 인간과 생물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신다. 구원계시를 들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이다.

적용

사람은 자기만의 관점이 있다. 책, 영화, 뉴스를 자기만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자기만의 관점은 공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잘못 보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잘못 해석하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다.

어떤 목사는 자기 잘못을 퍼뜨리지 말라고 설교한다. 어떤 교인은 절에다 불을 지른다. 어떤 부흥사는 헌금 많이 하면 돈 많이 번다고 장담한다. 어떤 전도왕은 스토킹을 전도라고 억지 부린다. 성경을 자기 관점에서 보고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한 예이다.

성경을 구원의 길을 찾는 관점에서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

시편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창세기 9-1장 | 셈의 하나님 | 그리스도를 존중하라

개요

창세기 9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무지개 언약과 노아의 실수이다. 간단한 내용같지만 해석을 위해서 알아야 할 개념이 많다. 성경을 생각 없이 통독하면 그냥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성경은 별 거 아닌 일도 기록했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성경의 기록이 신중하게 선별되고 정밀하게 배열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 성경은 쉬워보이지만 끝을 알 수 없을만큼 깊다.

다행히 성경은 친절하다. 친절하게 주제가 하나이다. 시작부터 주제를 알려주고 시작한다. 그 주제를 요약하고 비유하고 반복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은 사람, 믿는 방법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일단 창세기 11장까지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다. 매우매우 압축되어있다.

이제 창세기 9장이다. 창세기 9장은 요약, 비유, 반복이 나온다. 그러면서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고, 전진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설명하겠다. 먼저 첫번째 요절을 알아보자. 창세기 9:26-27이다.

요절 1. 창세기 9:26-27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의 실수를 알아보자.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자기 장막에서 옷을 벗고 잤다. 옷 벗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아들 함이 다른 아들들에게 알렸다. 다른 아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다. 이것이 노아의 실수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읽으면 네 가지 정도 의문이 생긴다. 첫째,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함의 잘못이 그렇게 큰가? 셋째, 함이 잘못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 넷째, 셈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배운 것을 적용해서 해석해보자. 28절에 보면,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다. 삼백오십 년 동안 일어난 일 중에서 하나를 선별한 게 이 사건이다. 홍수 후 삼백오십년을 이 사건에 압축했다. 요약된 기록이다. 에피소드나 해프닝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비유를 담고 있을까? 아담에 비유하고 있다.

홍수 후에 성경의 최대 관심은 무엇일까? 노아가 상속한 구원계시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이다. 노아는 아담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아담이 구원계시를 아벨/셋에게 전달한 것처럼 노아도 구원계시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노아는 실수했다. 아담도 실수했다. 아담이 실수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벗은 것을 누가 알게 했느냐고 물으셨다. 뱀이 그렇게 했다. 벗은 몸을 누가 가려주었나? 하나님이 가려주셨다. 본문에서 노아가 벗은 것을 알게한 사람은 함이고, 가려준 사람은 셈이다. 비유적으로 창세기 9장과 창세기 3장이 비슷하다. 구원계시를 받는 상속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둘째, 함의 잘못이 그렇게 큰가? 이 사건이 단순한 에피소드나 해프닝이라면 큰 잘못이 아니다. 압축된 사건이기 때문에 큰 잘못된다. 압축된 건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유적이란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 기록하기 어려우니까 한 가지 사건에 뭉뚱그려서 표현했다는 말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일은 큰 잘못이 아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알린 사건은 함이 노아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무엘하 6:16 다윗이 춤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긴 미갈과 비슷하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사람은 노아 밖에 없었다. 노아는 파이다고고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안내자란 의미이다. 안내자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만나지 않겠는가?

주의할 점은, 현대의 목사를 파이다고고스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오직 성경만이 파이다고고스이다. 목사, 성전, 율법 등 어떤 것도 파이다고고스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용납치 않으신다. 목사들이 은근히 자기를 파이다고고스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심각한 죄라는 걸 몰라서 하는 행동이다.

성경을 구원계시를 담은 책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존중해야 한다. 만약 목사가 자기 잘못을 보고도 떠벌리지 말라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함이 했던 태도이다. 구원계시를 자기 합리화에 이용하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행동이다.

셋째, 함의 잘못이 큰데 왜 가나안에 저주받았을까?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 가나안의 아들들은 순서대로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다. 넷째 아들 가나안이 함의 잘못에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나안은 나중에 극히 죄악이 심해서 심판받는 가나안 민족의 조상이다. 역사에는 가나안 민족처럼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극악한 죄를 범하는 개인, 단체, 민족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절하게 제거하셨기 때문에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었다. 노아 언약의 실현이다.

노아가 가나안이 저주 했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이 미래에 악한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아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개념이라서 기회가 되면 기독교 과학관을 설명하겠다. 간략하게 말하면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고 가르친다. 창조와 동시에 종말이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종말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이 이미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책을 출판할 때 이미 결말이 쓰여져 있는 것과 같다. 영화도 개봉할 때 엔딩이 정해져 있다. 이 세상이 책이나 영화와 다른 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현재, 미래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현재 행동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오차 범위가 있을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저주가 가나안 민족에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 있을 가나안 민족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보고 말한 것이다. 에서를 생각해 보자. 에서는 태중에서 선택받지 못했다. 동시에, 에서는 자기 스스로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겼다. 에서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에서에게는 잘못이 없다.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서가 선택받지 못한 것과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긴 것은 시간적으로는 선후가 있지만 섭리적으로는 순서가 없다. 자세한 것은 신비에 속한다.

함의 아들들 이름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이라고 한다.

넷째, 셈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의 하체를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셈은 함과 반대로 노아를 존중했다. 파이다고고스를 존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 자른 것을 회개했다. 사울 개인은 악한 자였지만, 그가 받은 왕의 기름부음은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다윗은 그가 받은 기름부음을 존중했다. 다윗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것은 이런 존중때문이다. 셈도 마찬가지로 노아의 역할을 존중했기 때문에 상속자가 되었다.

요절 2. 창세기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있지 아니하리라

무지개 언약의 의미는 창세기 8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8장을 다시 들어보기 바란다. 조금 덧붙이겠다. 무지개 언약은 노아가 중심이므로 노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노아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무엇일까? 노아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보장하는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세상을 보존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심판은 반드시 온다. 그 심판은 대홍수처럼 전세계적인 다운그레이드가 아니다. 어떤 식인지 알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종말이 될 것이다.

정리

적용

시편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창세기 8장 | 홍수 심판의 의미 | 세상을 다운그레이드하다

개요

창세기 8장은 대홍수에 관한 기록이다. 대홍수에 관해서 날짜와 기한 등 세부적인 내용에 관한 해설은 기초 강의를 끝낸 후에 고급강의에서 하겠다. 기초 강의를 듣지 않고 세부적인 해설에 관심을 기울이면 방향을 잃기 쉽다. 근거 없는 억지 주장에 끌려서 비상식적인 사람이 될 뿐이다. 성경을 세세하게 강의하는 강의의 대부분이 근거 없고, 성경 전체의 통일성, 일관성과 거리가 먼 엉뚱한 해석이다. 기초 강의를 들어야 성경 전체의 체계를 알 수 있다. 체계를 알아야 스스로 어떤 해석이 바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대홍수는 한마디로 세상을 다운그레이드한 사건이다. 다운그레이드란 성능을 낮추는 것이다. 업그레이드라는 말의 반대이다. 업그레이드는 기본적인 것은 그대로 둔 채 성능이 안 좋은 부품을 좋은 부품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성능 향상이다. PC를 예로 들면, 부품 중에서 cpu, ram, hdd 등을 좋은 것으로 교환한다. 다운그레이드는 반대로 부품을 안좋은 부품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다운그레이드하는 경우가 있을까? 있다. 성능이 좋아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다운그레이드한다. 예를 들면, cpu가 성능이 좋으면 열이 많이 난다. 열이 많으면 배터리가 빨리 닳고 고장이 잘난다. 오래쓰고 고장나지 않게 하려고 성능을 낮춘다. 자동차가 충격을 받으면 소리가 나는 센서가 있다. 너무 성능이 좋으면 바람만 세게 불어도 소리가 난다. 도난을 경보하는 게 아니라 잠을 깨우고 귀찮게 한다. 이런 경우 성능을 줄인다. 그래야 적당한 충격에만 소리가 난다.

대홍수는 세상을 다운그레이드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에 세상이 바뀌었다. 지구를 둘라싼 궁창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자연 환경이 나빠졌다. 자연환경이 나빠지자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도 달라졌다. 거칠어지 사나와졌다. 경쟁하고 다투는 관계가 되었다. 다른 생물을 잡아먹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다. 수명이 줄어들었다는 건 인간의 능력이 전체적으로 안좋아졌다는 말이다. 체력도 지능도 영적인 능력도 나빠졌다. 천년을 살 수 있었던 인간이 백년을 살게 되었다. 능력이 1/10로 줄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왜 다운그레이드 하셨을까? 앞에 말한 다운그레이드의 이유와 같다. 성능이 너무 좋아서 생기는 부작용을 없애려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이 너무 성능이 좋아서 생긴 부작용이 있다. 타락한 인간이 너무 오래 사니까 세상이 너무 빨리 타락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해야 하는 시기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못된 사람이 오래 살게 되면 세상이 지옥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수 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이 오래살면 종말이 빨리 찾아온다. 창세기 8장이 그 사실을 알려준다.

종말을 늦추려면 인간의 수명이 줄어야 했다. 인간의 수명이 줄었기 때문에 인류의 고통도 줄었다. 세상이 덜 지옥이 되었다는 말이다. 역사에는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뻔한 인물이 있다. 중국의 진시황같은 인물이다. 진시황은 유학자를 산채로 땅에 뭍어죽이고 책을 불태웠다. 무서워서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죽지 않는 불사약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가 천년 살았으면 천년동안 세상은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백년을 못살고 죽었기 때문에 그나마 당시 사람들의 고통이 줄었다.

현대에 인간은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노력한다. 인간 수명을 늘리는 답을 찾는 순간 인류는 지옥을 향해 급발진할 것다. 종멸이 가까워질 것이다. 조심할 건 과학의 발전을 걱정하거나 과학을 적대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과학은 문제가 없다. 과학자가 문제다. 과학 자체는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고통을 줄여준다. 과학은 다운그레이드된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결국 심판받아야 한다. 타락의 근원이 사라지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 타락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이 타락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타락의 근원이 사라져야 의롭게 될 수 있다. 노아가 의인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노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노아가 홍수 후에 드린 ‘피의 제사’이다. 첫번째 요절인 창세기 8:20을 보자.

요절 1. 창 8:20

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이 바로 ‘피의 제사’이다. 피의 제사는 ‘흠 없는 양이 죄인을 대신해서 죄값을 받고 죽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약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다. 이건 아담이 하나님께 계시받았고 아벨이 상속받은 믿음의 표현이다. 이 ‘피의 제사’는 일종의 바통이다. 바통은 이어달리기를 할 때, 달리기 선수가 전달받는 막대기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바통을 못받으면 탈락이다.

아담이 이 ‘피의 제사’라는 바통을 아벨에게 전해주었다. 아벨이 죽은 후에 셋이 이 바통을 받았다. 셋, 에녹, 노아 등이 이 바통을 받고 전해준 믿음의 주자들이다.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피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을 고백했다.

이 ‘피의 제사’라는 바통을 통해서 믿음이 누구에게 전달되는지 알 수 있다. 믿음을 전달받은 사람을 믿음의 상속자라고 한다. 노아가 믿음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20절에서 알 수 있다.

요절 2. 창 8:21-22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두번째 요절인 21절에서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성품이다. 대홍수는 세상을 다운그레이드한 사건이라고 말씀드렸다. 세상을 안좋게 만들어야 했던 원인이 인간 때문이었다. 인간 때문에 세상이 큰 고통을 겪었다. 하나님은 다운그레이드는 한 번만 하고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의 포인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친절한 성품이다. 하나님은 친절한 분이다. 하나님의 공정함을 알 수 있었던 부분이 3장이다. 슈퍼갑인 하나님이 슈퍼을인 인간과 고용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강의를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세상을 안심시키셨다. 노아 가족도 안심시키셨다. 노아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한 순간에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죽었다.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인가?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정신적·심리적으로 불안해진다. 불이 나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 가스렌지 켜는 것도 꺼려진다. 노아 가족은 비만 와도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적·심리적인 불안을 상처라고 표현한다. 손이 칼에 베인 것과 같다고 본다. 정신적·심리적 불안을 심리적 외상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트라우마라고 한다.

정신적·심리적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심한 사람은 정신적·심리적 상처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신적·심리적 상처로 고통받는다고 하면 참으라고 한다. 하나님은 참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정신적·심리적 상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위로해주셨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무섭고 예수님은 친절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 두 분은 본질도 성품이 같지만, 역할이 다르다. 삼위일체이다.

정리

창세기 8장은 세상을 다운그레이드한 사건이다. 타락한 인간이 오래살면 종말이 가까우니까 오래살지 못하게 하셨다. 오래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다. 하나님은 이미 답을 주고 시작하신다. 오래 살려고 하지 말고 타락한 죄성을 고치는데 집중해야 한다.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그 근거가 ‘피의 제사’이다. 노아가 믿음의 상속자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친절한 분이다.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그 근거이다. 하나님은 친철하기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닮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적용

‘피의 제사’는 그 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다.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교회다니고 예배드린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니까 교회다니고 예배하는 것이다. ‘피의 제사’라는 의식에 집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에 집중하자.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내가 교회다닌다는 사실이, 전도했다는 공로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주신다. 자신 없으면 이 강의를 계속 들으라. 답을 얻을 것이다.

창세기 7장 | 의란 인간다운 것 | 인간은 왜 인간답지 못한가?

개요

지난 시간에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은 이유를 노아가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7:1을 보면, 그 사실이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노아가 의로웠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방주를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게 먼저고 방주를 지은 게 나중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의’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의’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알아보겠습니다.

‘의’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구원’이란 것을 어떻게 받게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복잡한 이론을 알아야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걸 정리해 주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지옥에 가야할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인간답지 못합니다. 예들 들어보겠습니다. 강아지가 집안에 비싼 도자기를 깨뜨렸다고 해서 강아지답지 못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원숭이가 양복을 입고 사람 흉내를 낸다고 해서 원숭이답지 못한 게 아닙니다. 고양이가 소파를 할퀴어 놓았다고 해서 고양이답지 못다하고 말할 사람 없습니다. 강아지든 무슨 짓을 해도 강아지답고, 원숭이도, 고양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만 사람답지 못하다고 합니다.

제가 만나서 상담한 많은 사람이 왜 괴로워했느냐면, 인간 관계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자기한테 잘못했다는 겁니다. 연애로 고민하는 사람은 나는 그 사람한테 잘해주었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직장 인간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은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상사가 안 알아준다고 합니다, 혹은 상사가 나를 괴롭힌다고 합니다. 친구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잘해주었는데 보답하지 않는다, 배신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점은 이겁니다. 사람들이 상대방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거죠. 상대방이 당연히 이렇게 해야하는데 안해서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있습니까?” 그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게 바로 ‘의’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은 모두 예외없이 상대방이 ‘의’가 없기 때문에 상처받았습니다. 그들은 ‘의’가 없는 사람을 분노하고 저주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험담을 하고 잘해준 건 비웃었다고 해 보세요. 어떤 감정이 들겠습니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왜 인간에게만 인간답다는 기준이 있냐는 겁니다.

인간이 그냥 동물의 하나라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그건 인간다운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대로 강아지가 원숭이가 고양이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건 그 동물다운 행동이라니까요. 인간도 어떤 행동을 하든 인간다운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만 인간답지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만 인간답다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할 때, 인간은 분노합니다. 그 인간답지 못한 인간을 벌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성경적으로 표현한 것이 로마서 1:18입니다.

로마서 1:18

1: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지옥에 가야 하냐면, 의롭지 않으니까.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해서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에만 있는 먼 이야기로 생각하지 마시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 현실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배신, 사기, 뒤통수 치는 것, 이유 없는 험담 이런 게 ‘불의’고 이렇게 불의한 사람은 혼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한 가지 더 나옵니다. 뭐냐면, 인간이 지옥에 가는 이유를 ‘불의’ 때문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에 대해서 나타난다는 건 불의한 자가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지옥에 하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표현하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죄’가 곧 ‘불의’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와 ‘불의’는 같은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이 죄라고 하면 도둑질, 사기, 살인 같은 범죄를 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흉악한 범죄도 죄지만, 죄는 더 크고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도둑질, 사기, 살인을 안해도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면 그게 죄입니다.

나쁜 짓을 안해도 아버지, 어머니가 아버지, 어머니 노릇을 못하면 죄입니다.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하면 죄입니다. 친구가 애인이 사장이 직원이 다 마찬가지로 자기 해야 할 당연한 일을 안하면 불의이고 죄란 말입니다. 인간에게만 인간답다는 기준이 있는데, 그 인간답다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화가나고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로마서를 이해하려면 이 불의가 곧 죄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구원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의가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 불의합니다.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는가? 먼저, 자기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다른 사람이 불의하다는 사실은 잘 아는데, 자기가 불의하다는 건 모른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눈이 멀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죄의 각성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자기가 죄인이라고 깨닫는 걸 자기가 범죄자라고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각성은 세상 용어로 표현하면, 자기객관화입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죠. 자기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은 자기가 흉악 범죄자라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자기가 불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2:1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죄의 각성 즉, 자기객관화가 되면 자기가 불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불의에는 심판이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구원을 받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의로워져야 하는데, 얼마나 의로워져야 하는가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의의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그런데, 율법을 잘 이해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자기객관화가 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의로워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이 과정을 설명한 것이

로마서 3:20-22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또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주제로 돌아와서 구원의 작동 과정은 첫째, 의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에게 의가 없다는 죄의 각성. 둘째, 자기 힘으로 의를 얻으려다가 안되는 절망.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험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경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이 과정을 거치고 자기 체험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이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구원의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단계는 죄의 각성의 단계, 즉 자기객관화의 단계입니다. 죄의 각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만, 자기객관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은 산상수훈의 요약인 팔복의 구절을 보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6, 10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요절 1. 창 7:1

7: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정리

적용

창세기 6-2장 | 하나님의 아들들 | 결혼 계명

개요

창세기 6장. 창세기에서 흔히 잘못 해석되는 장이 3장과 6장이다. 이 두 장을 잘못해석하게 되면, 구원계시에서 잃어버리고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창세기 6장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속사적 성경해석 방법을 알아야 한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 깨달아지면 성경을 보는 눈이 조금을 열리게 된다. 먼저, 왜 창세기 6장을 잘못 해석하는지 설명하겠다.

첫째, 파이다고고스를 모르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이 가르치려는 핵심 내용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창세기 6장의 핵심은 결혼 계명이다. 창세기 2장을 강의하면서 결혼이라는 주제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러니까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결혼은 중요하다. 필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든 계명의 본질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율법이 계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율법보다 중요한 계명이 결혼이다.

결혼은 파이다고고스의 하나이다. 파이다고고스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몽학선생’이다. 개역개정에서는 ‘초등교사’라고 표현했다. 이 파이다고고스는 어떤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갈 3:24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둘째, 요약적 진술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수 천년의 역사를 압축해서 기록한 책이다. 창세기 6장도 수 백년을 요약한 내용이다. “나는 어제 행복했다”라는 말과 “나는 초등 학교 다닐 때 행복했다”는 말은 비슷한 문장이지만 압축률이 다르다. 어제 행복했다는 말은 하루를 요약한 말이고, 초등 학교 다닐 때 행복했다는 말은 초등학교 6년을 요약한 말이다. 어제 하루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하는 것과 초등학교 6년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코로나 19가 화제의 중심이다. 2020년 1년 간 있었던 사건을 짧게 요약하면 코로나 19 확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있었던 일 즉, 100년을 짧게 요약하라면 어떤 사건을 기록할까? 일제 강점기, 6·25전쟁, 경제발전 등 코로나 19보다 중요한 사건이 많아서 빠질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기간을 압축했는가를 생각해야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창세기 1-11장은 최소 2,000년을 요약한 기록이다. 따라서 한 장당 최소 200년을 압축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압축된 기록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 6장의 기록도 수 백년간 일어난 사건을 요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부터 수 백년 전이면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일을 한 장에 기록했다고 생각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했다는 기록이 창세기 6장에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해석은 문자적 문맥적 해석으로도 잘못된 해석이지만 결정적으로 요약적 진술을 이해하지 못한 해석이다. 무슨 말이냐면, 천사들과 사람들이 결혼하는 일이 역사 속으로 실제로 일어났을까? 그걸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을까? 그럴리 없다. 지금도 천사와 사람이 결혼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창세기 6장 시절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우 긴 기간을 요약하다보면 비유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중국 역사와 로마 역사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여름에는 살인적인 더위와 홍수로, 겨울은 혹한으로 시련과 절망의 강이었지만 중국인들은 이 시련에 맞서 적응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황하문명을 이룩했다. 로마인들은 풀 한 포기 없는 자갈밭과 역병이 들끓는 황야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창세기 6장도 긴 기간을 짧게 요약하는 과정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다.

셋째, 구원 계시의 계승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 인류에게 주신 구원 계시와 그 구원 계시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구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이걸 복음의 씨앗이라고 표현했다. 이건 필자의 표현이 아니라 화란 개혁파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가 성경 신학이라는 책에서 한 표현이다. 어쨌든 구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구원 계시의 계승은 누가 구원 계시를 받았고, 어떻게 구원 계시를 받을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구원 계시를 받은 사람은 셋의 족보를 따라서 창세기 11장까지 설명한다. 그들이 어떻게 구원계시를 받았는지는 창세기 12장부터 설명한다.

구원 계시는 사람이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있다. 주권자 하나님께 은총을 구해야 한다. 은총을 구하는 방법은 구원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공부하는 것이다.

성경을 활용해서 현세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서 구원 계시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절 1. 창 6:2-3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첫번째 요절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이 구절은 요약된 것입니다.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 계열을 의미하고 사람의 딸들은 나머지 계열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각자 자기들 지역에서 살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인구가 많아지면서 교류하게 되고 결혼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결혼 제도가 무너진 점입니다.

결혼 제도가 무너진 게 왜 문제가 될까요? 지난 시간에 결혼은 ‘파이다고고스’라고 설명했습니다. 결혼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인도자 역할을 합니다. 결혼 제도가 무너지면서 셋 계열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이다고고스에 관해서 좀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성경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경이 쓰여지기 전 시대입니다. 성경은 나중에 모세가 쓰게 되니까요. 시대 구분이 잘 안되시는 분은 저의 다른 강의를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까요? 부모에게 복음을 들어야겠죠? 그렇지만, 부모에게 한 두번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복음을 믿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믿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리고 어떤 식으로든 신앙 교육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경이 없는 시대에 신앙 교육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신앙 교육이 필요합니다. 행위 교육입니다. 그런 행위교육이 바로 파이다고고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약 시대의 제사가 바로 행위 교육입니다. 지금은 구약 시대의 제사를 성경 공부 시간에 성경 공부로 배우지만, 구약 시대 사람들은 행위를 실행함으로 배웠다는 말입니다. 행위를 통한 신앙 교육 중에 하나가 결혼입니다.

성경은 결혼을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단순히 이혼하지 않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쇼윈도 부부라는 말처럼 남들 앞에서만 사이 좋은 척하는 부부 생활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서 하나도 연합되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결혼 생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결혼이 일부일처제인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원 계시를 기록한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행위 교육은 불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결혼 제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가 무너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백 이십년 후에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존속이 오직 구원 계시의 전달에 달려있다고 가르칩니다. 구원 계시를 상속할 상속자가 없어지면 인류 역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셋 계열이 급속하게 믿음을 잃어 가는 상황에서 노아마저 믿음을 잃게 되면 인류 역사는 완전히 끝나기 때문에 노아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홍수 심판은 사실 노아를 살리기 위한 비상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다음 요절에서 더 설명하겠습니다. 두 번째 요절로 가겠습니다.

요절 2. 창 6:9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노아를 구하기 위해서 홍수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노아가 어떤 점이 특별할까요? 단 한 가지 그가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씀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입니까?

답을 드리기 전에 대표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노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지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의 해석입니다. 아니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의 해석입니다. 어떤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거나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기독교가 아니고, 성경의 정보를 사실로 인정하는 게 신앙이 아닌데 그렇기 알고 있는 사람의 해석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게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게 기독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죠. 이런 질문하시는 분은 현재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유신론자요. 아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 강의를 계속 들으시면 유신론자에서 기독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기독교에 우호적인 유신론자가 많지만, 기독교인은 드뭅니다. 유신론적인 성경 해석을 하지만, 기독교적 성경 해석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기독교인을 만들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해서 구원 계시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 계시의 상속자가 늘어날 것입니다.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아가 의인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근거는 무엇입니까? 노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었다는 근거는 창세기 8:20에 있습니다.

창 8: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는 아벨과 셋이 드렸던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창세기 4장에서 아벨에 관해서 강의하면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그 강의를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에녹에 관한 강의가 있으니 그 강의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리

창세기 1~11장은 수 천년의 기간을 압축한 책이기 때문에 요약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요약적 진술은 비유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성경을 해석해야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대표적인 요약적 진술입니다. 이 표현은 수 백년에 걸쳐 일어난 현상을 간략하게 압축하느라 비유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시편에서 모세는 천 년이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라고 비유합니다.

시 9: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행위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행위 교육 중에 하나가 결혼 제도입니다. 결혼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이 점자 적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구원 계시의 상속자인 노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홍수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의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창세기의 시대 가인의 후손들 중에는 용사도 있고 예술가도 있고 금속 문명의 창시자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노아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구원 계시를 상속한 상속자였습니다. 실질적으로 인류 역사는 구원 계시의 상속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상속자가 없어지면 인류 역사를 끝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유신론자에 머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용사, 예술가, 발명가가 되기 전에 구원 계시의 상속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6-1장 | 하나님의 아들들: 결혼 계명

개요

창세기 6장. 창세기에서 흔히 잘못 해석되는 장이 3장과 6장이다. 이 두 장을 잘못해석하게 되면, 구원계시에서 잃어버리고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창세기 6장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속사적 성경해석 방법을 알아야 한다.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 깨달아지면 성경을 보는 눈이 조금을 열리게 된다. 먼저, 왜 창세기 6장을 잘못 해석하는지 설명하겠다.

첫째, 파이다고고스를 모르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이 가르치려는 핵심 내용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창세기 6장의 핵심은 결혼 계명이다. 창세기 2장을 강의하면서 결혼이라는 주제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러니까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만큼 결혼은 중요하다. 필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든 계명의 본질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율법이 계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율법보다 중요한 계명이 결혼이다.
결혼은 파이다고고스의 하나이다. 파이다고고스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몽학선생’이다. 개역개정에서는 ‘초등교사’라고 표현했다. 이 파이다고고스는 어떤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갈 3:24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둘째, 요약적 진술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수 천년의 역사를 압축해서 기록한 책이다. 창세기 6장도 수 백년을 요약한 내용이다. “나는 어제 행복했다”라는 말과 “나는 초등 학교 다닐 때 행복했다”는 말은 비슷한 문장이지만 압축률이 다르다. 어제 행복했다는 말은 하루를 요약한 말이고, 초등 학교 다닐 때 행복했다는 말은 초등학교 6년을 요약한 말이다. 어제 하루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하는 것과 초등학교 6년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코로나 19가 화제의 중심이다. 2020년 1년 간 있었던 사건을 짧게 요약하면 코로나 19 확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있었던 일 즉, 100년을 짧게 요약하라면 어떤 사건을 기록할까? 일제 강점기, 6·25전쟁, 경제발전 등 코로나 19보다 중요한 사건이 많아서 빠질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기간을 압축했는가를 생각해야 해석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창세기 1-11장은 최소 2,000년을 요약한 기록이다. 따라서 한 장당 최소 200년을 압축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압축된 기록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 6장의 기록도 수 백년간 일어난 사건을 요약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부터 수 백년 전이면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일을 한 장에 기록했다고 생각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했다는 기록이 창세기 6장에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해석은 문자적 문맥적 해석으로도 잘못된 해석이지만 결정적으로 요약적 진술을 이해하지 못한 해석이다. 무슨 말이냐면, 천사들과 사람들이 결혼하는 일이 역사 속으로 실제로 일어났을까? 그걸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을까? 그럴리 없다. 지금도 천사와 사람이 결혼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창세기 6장 시절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우 긴 기간을 요약하다보면 비유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중국 역사와 로마 역사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여름에는 살인적인 더위와 홍수로, 겨울은 혹한으로 시련과 절망의 강이었지만 중국인들은 이 시련에 맞서 적응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황하문명을 이룩했다. 로마인들은 풀 한 포기 없는 자갈밭과 역병이 들끓는 황야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창세기 6장도 긴 기간을 짧게 요약하는 과정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다.

셋째, 구원 계시의 계승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 인류에게 주신 구원 계시와 그 구원 계시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구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이걸 복음의 씨앗이라고 표현했다. 이건 필자의 표현이 아니라 화란 개혁파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가 성경 신학이라는 책에서 한 표현이다. 어쨌든 구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구원 계시의 계승은 누가 구원 계시를 받았고, 어떻게 구원 계시를 받을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구원 계시를 받은 사람은 셋의 족보를 따라서 창세기 11장까지 설명한다. 그들이 어떻게 구원계시를 받았는지는 창세기 12장부터 설명한다.
구원 계시는 사람이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있다. 주권자 하나님께 은총을 구해야 한다. 은총을 구하는 방법은 구원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공부하는 것이다.
성경을 활용해서 현세의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지 말고, 성경을 통해서 구원 계시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절 1. 창 6:2-3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절 2. 창 6:9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정리

적용

창세기 5장 | 에녹의 승천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

개요

에녹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승천으로 삶을 마감했다. 짧게 기록된 에녹의 삶을 통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사실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을 좀 읽은 사람은 “왜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나옵니까?”라고 묻는다.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에녹에 관한 성경 구절 어디에 예수님이 있냐고 반문한다. 자신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게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비난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다. 잊어버릴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겠다. 요절 두 절을 가지고 이 부분을 논증할텐데 이 논증하는 방법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시간 순서에 따라 연속적으로 해석할 때 이런 관점을 가질 수 있다. 통독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방송을 보면서 성경 해석 방법을 따라하려고만 하지 말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란다.

요절은 두 절이다. 3절과 22~24절이다. 먼저 3절만 읽어보겠다.

요절 1.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세기 5장은 아담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셋을 아담의 모양, 형상과 같다고 기록한다. 겉모습은 셋뿐만 아니라 다른 자녀들도 아담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특별히 셋을 콕 찝어서 기록한 이유는 셋이 아담이 전한 복음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셋은 아담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믿음까지 물려받았기 때문에 겉과 속이 모두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도 셋을 콕 찝이서 아담의 형상과 모양과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셋은 아담의 상속자라고 할 수 있다.

3절 이후로는 셋의 후손을 기록한다. 셋의 후손은 아담의 믿음을 물려받은 상속자이다. 그 상속자 중에 한 명이 에녹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은 셋의 후손을 기록하는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셋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다. 에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이 이미 전제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읽어야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적으로 읽는 걸 구속사라고 한다. 저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통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구속사적 통독이라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두 번째 요절을 설명하고 이 부분을 더 설명하겠다.

요절 2.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에는 에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두번째 요절에서는 에녹을 데려가신 이유를 생각해 보겠다. 에녹은 죽지 않고 승천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에녹을 통해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인지를 알려주려는 의도이다. 지금도 신천지같은 이단은 이만희를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고 믿는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누가 구원자인지 헷갈릴 수 있다.

성경은 사람들이 구원자가 누구인지 헷갈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자의 특징을 조금씩 알려준다. 진정한 구원자의 특징 중 하나가 창세기 5장에 나타나는데 그것이 승천이다. 구원자는 죽지 않고 승천한다는 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예수님께서 승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1:9을 보자.

행 1: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게 당연하지만,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진짜 구원자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구원자가 맞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은 예언을 활용한다. 그 중에 하나가 에녹의 승천이다.

성경의 기적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기적이 일어난다. 이걸 계시라고 한다. 다른 부분에서 설명하겠지만, 계시로서의 기적과 기도로 인한 기적은 다르다. 기도로 인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건 계시로서의 기적과는 다르다. 에녹에 관해서 정리하겠다.

정리

구약 사람 에녹이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에녹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근거는 에녹에 관한 기록이 있는 창세기 5장의 내용이다. 창세기 5장은 아담의 믿음을 상속한 셋의 자손을 기록하고 있다. 셋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상속한 사람이고, 그 중에 에녹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에녹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할 것이라는 힌트를 준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힌트를 통해서 진정한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단에게 속지 말자.

적용

성경을 해석하면서 구약에서 단순히 하나님만 믿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읽지 말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읽기 바란다.

창세기 4-3장 | 가인의 역할

개요

오늘은 가인에 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인에 관해서 생각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인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둘째, 가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가인의 믿음: 자기 숭배

먼저, 가인의 믿음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서 알려주신 구원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양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편한대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종교로 표현하면 ‘자기 숭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서 알려준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볼 때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오늘날로 비유하면, 교회를 다니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니요 솔직하게 말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새신자 교육을 받거나 성경 공부한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예수님은 기초 성경 공부 시간에 한 번 영접하면 구원을 주는 분으로만 인식됩니다. 영원히 전인격적인 영향을 끼친 전환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하거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분으로서 항상 내 안에 계시는 분으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들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을 깊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인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왜 참된 믿음을 가진 아벨과 잘못된 믿음을 가진 가인만 나오고 무신론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가인이 무종교인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과 무신론자를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정확하게는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 숭배자라고 보면 됩니다.

가인이 분노한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가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건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을 찾아보겠습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가인의 공헌: 문명 발전

하나님은 가인을 살려두셨는데, 가인의 후손이 문명을 발전시킵니다. 예를 들면, 유발은 음악을 발전시키고, 두발가인은 금속문명을 발전시킵니다. 나쁜 문화도 퍼뜨렸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맞이하는 일부이처제를 시작했습니다.

가인은 세상 문명을 발전키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 세상 문명을 발전시켰으니까 세상 문명을 거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인이 발전시킨 문명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인의 후손인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만들었고 발전시켰는데, 그 악기들이 성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금속도 성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33: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찌어다

시편 150: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출애굽기 25:3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가인의 후손이 발전시킨 문명이 성전에서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세상 문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가인의 후손이 문명을 발전시켰다고해서 과학 문명을 거부하고, 세상 학문을 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을 좀 아는 분들은 어쩌면 요한일서를 들어서 제 주장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요일 2:16-17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사탄과 그 추종자’를 가리킵니다. 16절에서 ‘세상’은 ‘아버지'(하나님)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17절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다른 부분에서 하겠지만, 성경을 해석할 때 ‘단어’를 보고 해석하지 말고 ‘의미’를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단어만 보고 해석하면 엉터리 성경 해석이 됩니다. 또, 의미는 반드시 문맥을 보고 찾아야 합니다.

정리

오늘은 두 가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가인은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 무신론자를 대표합니다.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같은 것입니다. 자기 숭배입니다.

세상의 학문과 문명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배우고 공부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적용

“아프면 병원가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비성경적이 주장입니다. 또 “컴퓨터는 사탄의 발명품이다” 같은 주장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엉터리 주장입니다. 믿음의 후손은 모세처럼 다윗처럼 문명을 적극적으로 공부해서 하나님 나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창세기 4-2장 | 아벨의 순교 | 이른 죽음의 의미

개요

창세기 4장도 설명할 분량이 많아서 나누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의 핵심은 복음의 전달입니다. 아담은 타락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아담은 복음의 씨앗을 가지고 쫓겨났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입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담이 받은 복음을 아담의 자식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저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현실은 복음을 잘 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초의 상속자 아벨

아담이 받은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인 자식은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은 최초로 믿음을 상속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은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 많은 자식 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벨이 유일했습니다. 아벨은 복음의 씨앗을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의 씨앗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과 3:21 ‘가죽옷’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분이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요소가 복음의 최소 요소인 복음의 씨앗입니다. 이 두 요소를 하나로 합친 것이 양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씨앗은 본질인데,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상태는 조금씩 변화 발전합니다. 양을 드리는 제사가 나중에는 제단으로 발전하고 더 나중에는 성막과 성전의 형태로 발전합니다.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됩니다.

가인은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가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이 아니라 자기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인이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양으로 드리는 제사의 의미와 방법이 여기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레위기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는 나중에 쓰여진 것 아닙니까?”라고요. 제 답변은 “레위기가 나중에 쓰여졌지만, 조상에게 전해들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갑자기 아벨이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아담이 자식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전해주면서 양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단, 여기서는 그 설명을 생략했습니다. 이유는 창세기 1~11장은 수 천년의 기간을 요약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설명을 기록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레위기에서 하게 됩니다.

다시 가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인은 복음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사람을 대표하는데, 복음을 왜곡한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자기 숭배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 것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자기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엄밀하게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3장에서 뱀에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숭배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사탄의 후손이 되는 길입니다.

가인의 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받은 표식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복음의 표 혹은 용서의 표라고까지 말하는데,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666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표입니다.

가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아마도 아벨의 자손과 아벨을 이어서 복음을 상속한 셋의 자손일 것입니다. 근거는 가인을 죽이면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7은 하나님의 숫자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손에게 한 경고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자손들에게 감정에 치우쳐서 가인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666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도 바로 천벌을 받아서 죽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로 그들이 자기 수명을 누리도록 허락하십니다.

요절

대략의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요절을 설명하겠습니다. 요절은 5절과 25-26절 두 곳입니다.

창 4:4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벨은 복음을 상속한 최초의 상속자입이면서 복음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한 최초의 순교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벨의 삶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독하면서 저는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인물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이고, 또 한 명은 초대 교회의 집사 스데반입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적인 면에서 뛰어났지만, 허무하게 순교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벨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벨, 야고보 사도, 스데반 집사는 신앙적으로 뛰어났지만 복음을 위해서 공헌하지 못하고 일찍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재의 허무한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성공의 관점이 아니라 목적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달성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낀 세 제자 중의 한 명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가장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가장 먼저 순교했다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끼고 뛰어난 신앙인을 일찍 데려가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큰 역할을 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만약에 꼴찌를 먼저 죽게 하면 꼴찌 입장에서는 뭔가 억울할 거란 말입니다. 일등이 먼저 죽으면 안 억울하죠. 스데반 집사도 집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집사였고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와 스데반은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을 위한다는 목적에 충실하고 떠났습니다. 큰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맡은 역할을 잘 하고 하면 됩니다. 그게 신앙인의 성공입니다.

아벨은 허무하게 떠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아담의 마음에 기억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셋에 관해서 기록할 때 “아벨 대신 다른 씨”라고 표현합니다. 아벨은 일찍 죽었지만, 셋이라는 후계자를 만들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순교하면서 교회에 큰 부흥을 유산으로 남겼고, 스데반 집사는 죽기 직전에 행한 설교와 죽음을 맞이하는 담담한 모습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회심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허무하게 보여지는 죽음이 허무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대한 섭리가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순교만큼 힘든 것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관심과 인기가 돈으로 연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하는 것이 시시해 보입니다. 저는 이런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현대인의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순교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일 수 있습니다. 관심과 인기를 끌려고 하지 말고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창 4:25-26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다음 요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셋의 이름이 셋이라서 한국 사람은 셋이 셋째인 줄 압니다. 사실은 이때 이미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많이 낳았고 그들도 자식을 낳아서 인구가 매우 많아진 상태입니다. 문제는 그 자식들 중에서 아벨이 죽은 이후로 아담과 하와가 전해주는 복음을 믿는 자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상속할 상속자가 없는 상태가 지속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셋이라는 자식이 복음을 상속하게 됩니다. 아담은 그래서 셋을 ‘아벨 대신 다른 씨’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벨을 대신해서 복음을 상속한 상속자라는 의미입니다.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상속자는 매우 적습니다.

26절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다음 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그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은 지금과는 달리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믿는 미래지향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시에 믿음을 전달해야 그 믿음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수 있는 목적달성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셋은 아들 에노스를 낳고 그 아들에게 복음을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교제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전 시대에는인격, 성격 등을 나타내는 단어가 따로 없이 이름이라는 단어로 그런 의미를 표현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무엇이냐면, 여호와와 교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4절에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의 기름을 드렸다는 표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름은 지방질입니다. 지방질에는 불이 붙잖아요. 기름을 드렸다는 말은 그 부분을 불살라서 제사지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에 자주 나타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레 3:14-16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보셨듯이 번제를 드릴 때 기름 부분을 불사랐습니다. 창세기 4장의 기름을 드렸다는 표현이 레위기와 같은 표현입니다.

레위기의 번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아벨의 제사도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 대신 다른 씨인 셋도 아벨과 동일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은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에노스에게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아벨이 양과 기름을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이었고 그 믿음이 셋과 에노스에게 이어졌습니다. 셋을 굳이 아벨 대신 다른 씨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셋이 아벨의 믿음을 물려받은 믿음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만 믿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구약 시대 사람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 통독이 헛수고가 됩니다.

저는 다양한 성경 통독 강의과 성경 공부 세미나를 들었습니다. 다들 훌륭한 강의였지만, 다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믿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었다고 가르쳤습니다. 명시적으로는 말을 안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제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공부 강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성경 연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 없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성경 내용을 알고, 방언하면 기독교인이 된 줄 압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는데 그걸 모릅니다. 제 강의를 잘 들으시면 기독교가 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즉 구원계시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리

믿음의 최초 상속자 아벨과 아벨을 대신한 셋을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을 전달하고 전달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상속한다는 것은 영광이면서 동시에 핍박받을 수 있는 위험입니다.

셋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아벨은 최초로 믿음을 상속한 믿음의 상속자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을 상속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벨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벨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사도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집사 스데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우수한 삼인방이었습니다. 그 삼인방 중에 한 명이 별다른 일을 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집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가장 먼저 순교합니다.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4-1장 | 구원계시의 상속자 | 어떻게 믿음을 전달할까?

개요

창세기 4장도 설명할 분량이 많아서 나누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의 핵심은 복음의 전달입니다. 아담은 타락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아담은 복음의 씨앗을 가지고 쫓겨났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입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담이 받은 복음을 아담의 자식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저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현실은 복음을 잘 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초의 상속자 아벨

아담이 받은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인 자식은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은 최초로 믿음을 상속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은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 많은 자식 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벨이 유일했습니다. 아벨은 복음의 씨앗을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의 씨앗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과 3:21 ‘가죽옷’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분이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요소가 복음의 최소 요소인 복음의 씨앗입니다. 이 두 요소를 하나로 합친 것이 양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씨앗은 본질인데,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상태는 조금씩 변화 발전합니다. 양을 드리는 제사가 나중에는 제단으로 발전하고 더 나중에는 성막과 성전의 형태로 발전합니다.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됩니다.

가인은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가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이 아니라 자기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인이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양으로 드리는 제사의 의미와 방법이 여기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레위기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는 나중에 쓰여진 것 아닙니까?”라고요. 제 답변은 “레위기가 나중에 쓰여졌지만, 조상에게 전해들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갑자기 아벨이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아담이 자식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전해주면서 양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단, 여기서는 그 설명을 생략했습니다. 이유는 창세기 1~11장은 수 천년의 기간을 요약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설명을 기록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레위기에서 하게 됩니다.

다시 가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인은 복음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사람을 대표하는데, 복음을 왜곡한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자기 숭배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 것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자기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엄밀하게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3장에서 뱀에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숭배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사탄의 후손이 되는 길입니다.

가인의 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받은 표식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복음의 표 혹은 용서의 표라고까지 말하는데,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666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표입니다. 가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아마도 아벨의 자손과 아벨을 이어서 복음을 상속한 셋의 자손일 것입니다. 근거는 가인을 죽이면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7은 하나님의 숫자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손에게 한 경고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자손들에게 감정에 치우쳐서 가인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666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도 바로 천벌을 받아서 죽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로 그들이 자기 수명을 누리도록 허락하십니다.

요절

대략의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요절을 설명하겠습니다. 요절은 5절과 25-26절 두 곳입니다.

창 4:4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25-26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정리

믿음의 최초 상속자 아벨과 아벨을 대신한 셋을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을 전달하고 전달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상속한다는 것은 영광이면서 동시에 핍박받을 수 있는 위험입니다.
셋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아벨은 최초로 믿음을 상속한 믿음의 상속자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을 상속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벨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벨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사도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집사 스데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우수한 삼인방이었습니다. 그 삼인방 중에 한 명이 별다른 일을 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집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가장 먼저 순교합니다.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개요

창세기 3장을 통독하고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요한계시록 20장을 통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1-2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이 대응하는 것처럼 창세기 3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이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첫 세 장 창세기 1-3장과 성경의 마지막 세 장 요한계시록 20-22장이 내용상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이 천국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면, 창세기 3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선포한 내용이 요한계시록 20장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3장이 실질적으로 성경이 시작되는 장이라면 요한계시록 20장은 실질적으로 성경이 끝나는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주목할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탄이 불못에 던져져서 완전히 멸망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인류가 부활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이 부분을 해석할 때도 반드시 창세기를 고려하면서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탄의 멸망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선언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모든 인류가 받는 최후 심판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 족보가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아담에서 시작된 인류가 한 명도 빠짐 없이 하나님 앞에 모여 심판을 받습니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은 창세기를 고려하면서 해석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과 계시록 20장 요절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의 첫번째 요절이었던 15절에서 핵심 단어는 ‘여자의 후손’이었고, 두 번째 요절이었던 20절의 핵심 단어는 ‘가죽옷’이었습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을 멸망시키는 존재로 예언되었습니다. 예언대로 계시록 20:10에서 뱀 즉 사탄과 그 추종자가 심판을 받습니다. 창세기 3:20 ‘가죽옷’은 대속을 통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 받는 것을 계시록 20:12에서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창세기 3장과 계시록 20장의 요절이 연결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20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의 요절은 10, 12절 두 절입니다. 먼저 10절부터 읽고 설명하겠습니다.

요절 1.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서 완전히 멸망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 이미 마귀가 잡힌 적이 있습니다. 잡혔다가 풀려났다가 다시 잡히는데 다시 잡히는 장면이 바로 10절입니다. 왜 마귀가 풀려났다가 다시 잡힐까요? 그 이유는 2절과 10절의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마귀가 처음 잡혔을 때는 혼자 잡힌 것으로 나옵니다. 풀려났다가 다시 잡힌 12절에서는 추종자인 거짓 선지자가 같이 잡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마귀가 풀려났다가 다시 잡히는 이유는 추종자들을 모아서 한방에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이 강의를 준비하는 시기에 전광훈 집단이 광화문 집회를 통해서 코로나 바이러스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중요한 건 전광훈 지지자가 교회에 대단히 많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전광훈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전광훈 지지자는 거짓 선지자의 추종자입니다. 마귀의 하수인이라는 말입니다. 전광훈이 잠시 활개치는 이유는 그 추종자를 싹 모아서 한번에 처리하려는 의도입니다. 다행히 이번에 숨어있던 전광훈 추종자가 많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을 기억하시고 단호하게 절연하시기 바랍니다.

천년왕국에 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귀가 잡혀있던 기간이 천년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잡혀있던 그 기간을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년왕국 전에 재림하신다는 주장을 전천년설이라고 하고 천년왕국 후에 재림하신다는 주장을 후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용어만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년왕국은 없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천년왕국이라고 봅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기독교가 탄생하고 전세계에 확산하면서 인류의 행복이 늘어났습니다. 이걸 마귀가 잡힌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텐데 그때 마귀가 완전히 멸망합니다. 마귀가 멸망하기 전에 잠깐 난동을 부릴텐데 그것을 풀려났다고 표현한 것으로 봅니다.

주의할 점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칠년대환란이니 칠십이레니 해서 겁을 많이 준다는 점입니다. 제 강의를 들으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엉터리 주장인지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두려운 책이 아니라 통쾌한 책입니다. 마귀가 잡히고 추종자들이 함께 멸망하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이 기쁘고 통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요절 2.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정리

적용

창세기 3장 | 하나님의 대안 | 잘못에 어떻게 대응할까?

개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타락이 아니라 계약위반입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긴 거죠.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대리통치자의 지위에서 해고되었습니다. 당연히 대리통치자로서 누리던 특권과 지원도 사라졌고, 통치 장소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던 존귀한 위치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동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셨느냐는 점입니다. 우리도 계약을 어기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대응을 보면서 답을 찾아봅시다.
하나님의 대응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계약을 어긴 아담과 여자를 징계하셨습니다. 둘째, 재빨리 재계약을 맺어주셨습니다. 3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내린 징계와 재계약 내용이 됩니다. 먼저, 하나님이 내린 징계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뱀, 여자, 아담이라는 세 당사자에게 책임의 크기에 따라 적절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원인 제공자인 뱀에게는 ‘여자의 후손’에게 멸망당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주셨고, 마지막에 유혹에 넘어간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벌로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린 징계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내린 징계를 단순히 이런 벌을 주셨다라고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은 성경 통독 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징계를 내리셨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린 벌은 징계이면서 동시에 처방입니다. 여자에게 출산의 고통이 어떤 의미에서 징계이자 치료일까요? 여자는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을 세상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처방이 출산의 고통입니다. 생명을 소홀히 여긴 여자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여자는 3장에서 하와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건 생명의 어머니라는 의미입니다. 여자는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에 죽음의 어머니라고 이름 붙여야 마땅하지만, 반대로 생명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이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아담은 노동의 고통을 벌로 받게 됩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 살았지만, 감사와 감격이 없었습니다. 결핍이 없었기 때문에 결핍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와 감격입니다. 아담은 결핍 없는 삶에서 겹핍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노동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필요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결핍을 채우는 노동을 통해서 감사와 감격을 알게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새예루살렘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감사와 감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절

다음으로 하나님이 제안한 재계약을 알아보겠습니다. 이 재계약이 오늘 요절입니다. 15절과 24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창 0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0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요절 1.

창 0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 여자와 맺은 재계약은 15절과 21절이 합쳐진 것입니다. 먼저,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의 유전자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자도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을 복제한 복제인간입니다. 여자도 남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구원자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만 보면 이해가 안되지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과 연결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예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은 죽인다, 멸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을 공격해서 상처를 입히지만 죽이지는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존재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계획을 이 구절에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과 소망을 동시에 줍니다. 처음에는 노력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게 되지만,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얻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오히려 소망이 생깁니다.

요절 2.

창 0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다음은, 21절에서 ‘가죽옷’입니다. ‘가죽옷’은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가죽을 얻으려면 동물이 죽어야 합니다. 가죽옷은 다른 종재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여자의 수치가 가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 즉,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네델란드 출신의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는 이 두 요소,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을 ‘복음의 씨앗’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씨앗은 생명을 가진 최소 단위입니다. 사과 나무를 생각해 보세요. 사과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묘목이 되죠. 결국에는 사과 열매를 맺는 사과 나무가 됩니다. 사과 씨앗이 자라면서 모양이 변하지만 생명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언약’을 씨앗으로 비유할 때, 복음의 생명력은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이라는 개념입니다. 즉, 구원자가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한다는 것이 복음의 씨앗이고 핵심입니다.
대속은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이 있는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말도 안되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 결코 창작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하면 이 개념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리

창세기 3장은 계약을 파기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징계하셨지만, 동시에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 처방을 주셨습니다. 또, 계약을 파기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방법인 ‘그리스도 언약’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의 핵심을 요약한 ‘복음의 씨앗’입니다. 앞으로 성경은 이 씨앗이 싹이 나고 묘목이 되고 크게 자라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창세기 3장을 이해할 때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용

저는 대속이라는 개념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부조리, 불합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잘못이 없는데 누명을 쓰면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합니다. 왜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할까요? 그것은 실천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대속의 정신으로 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알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창세기 2장 | 하나님의 성품 | 관계란 무엇인가?

핵심 구절

창세기 2장의 핵심 구절은 15-17과 24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15-17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대리통치자로 세웠다는 사실을 공부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이나 선악과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내용을 고려해서 핵심적인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면 15-17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 하나님이 아담과 노동계약을 맺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약이라는 말이 없는데 왜 계약이라고 할까요? 호세아 6:7에 보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 6:7)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담이 ‘언약’을 어겼다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말이 여기는 없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언약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공부던 초창기에는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을 여러 번 읽고, 관련 강의도 많이 들었지만 항상 뭔가 명쾌하지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 기도하고 연구하다가 어느날 깨달은 게 있습니다. 뭐냐면, 하나님이 아담과 계약을 맺었다는 점입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으니까 “아담아, 너 대신 지구를 다스려라”라고 말씀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굳이 계약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저처럼 하나님이 아담과 굳이 계약하지 않고 명령만 내리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고, 성경을 오역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일을 시키지 않고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셨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노동법이 엄해서 일을 시키려는 반드시 노동계약을 맺고 일을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노동계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담이 할 일은 에덴동산을 경작하는 것입니다. 노동의 대가, 월급은 에덴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계약 해지 조건, 즉 해고 조건은 선악과를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편의점을 내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르바이트에게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 편의점을 지켜라.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편의점에 있는 걸 마음대로 먹어라. 하지만, 금고에 손대면 널 해고하겠다”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다음장인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순한실수가 아니라 계약 파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계약을 통해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단일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 인생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성경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는 계약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그 계약을 준수하면서 신뢰를 쌓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하고 성숙한 관계입니다.

창세기 2:24

24에는 결혼 제도가 나옵니다. 부모를 떠나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이 결혼 제도입니다. 결혼은 성경의 핵심 주제 중 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예루살렘 천국에서도 결혼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계 22:17)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결혼에 관한 가르침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계약의 절정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일반적으로 계약은 서로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맺습니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유를 제한하는데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신뢰가 쌓이고 사랑이 싹트면, 자유를 완전히 공유하는 부부의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이 결혼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노동계약을 맺으시고 결혼제도를 만들어 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결혼은 모든 계약의 목표점입니다. 남남 관계인 두 사람이 만나서 남남이 아닌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가르침을 깨닫고 에베소서에서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말씀했습니다.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결혼이 어려운 것만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저는 아내 혹은 남편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그리스도를 알아하는 핵심적인 제도입니다.

정리

창세기 2장에서는 계약에 관해서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고 사람을 만든 분이지만, 사람에게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맡길 때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역할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셨고 권리와 의무도 명백하게 하셨습니다. 슈퍼 갑의 위치에 있었지만, 공의로운 성품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인격적인 존재는 개성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을 통해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계약을 신중하게 맺고 맺은 계약은 성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계약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혼입니다. 이익을 위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고 함께 하는 것 말입니다.

적용

인간의 존재 목적은 세상의 대리통치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관계를 이어준다는 말입니다. 인격적인 존재들 간에 관계를 이어줄 때는 계약이 필요합니다. IMF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계약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빚보증 계약서에 생각 없이 서명해서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보험 회사에서 계약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계약을 맺어서 무효 판결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계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IMF 전에 우리 사회는 계약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계약을 정확하게 안 맺고 잘 지키지도 않은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봄봄’이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거기에는 봄에 딸과 결혼시켜주겠다고 약속하고 무료로 일을 시키는 장인이 나옵니다. 봄이라고만 했지 어느 해 봄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을 차일피일 미룹니다. 계약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또, 힘 센 갑의 위치에 있다고 계약을 두루뭉술하게 맺고 횡포를 부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정하십니까? 반면에, 하나님과 계약을 어기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실수였다고 얼버무릴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계약을 맺지 않으려고 하고, 계약을 안지키려고 하고, 계약을 속여서 맺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계약을 신중하게 맺고 최선을 다해서 지키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숙한 인격이 된다면, 결혼 계약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