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2_우리는어디를 향해 가는가?

2019년 05월 12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03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줄 요약]

5월입니다. 2019년이라는 해가 낯설다가 이제 조금 익숙해졌습니다. 날씨도 풀리고 새해에 가졌던 의욕도 아직 남아 있어서 열심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좋은 시간입니다. 올해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다면 이제 몰입해서 그 일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에 몰입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입니다. 방향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심히 일했지만 불필요한 일을 하는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가 비슷한 상황에서 설교된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광야 40년을 요약한 설교집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에 두고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내용입니다. 목적은 제가 좀전에 말씀드린대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광야를 지나왔는데, 그 광야를 지나 온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우리가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것인데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지나왔습니까? 우리가 지나온 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개요]

##1.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

1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적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목적이 있는 걱 여행이고, 목적이 없으면 방황이라고 합니다.

창조론은 목적론적 세계관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물건은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건 어떤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목적은 성공과는 다릅니다. 성공은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고 번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은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청소를 하다보니까 못보던 것이 떨어져 있었는는데 작은 나사못이 이었습니다.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버렸습니다. 나중에 아이 장난감 자동차를 보니 건전지를 덮고 있는 플라스틱판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사못이 풀려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사못이 작은 것이라서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나사못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수퍼 컴퓨터 첨단 신세품이라도 값싼 부품이 필요합니다. 작은 부품이 없으면 고장을 일으킵니다. 비싸고 안 비싸고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라는과점에서 보면 꼭 필요한 제품이 있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성공이 아니라 필요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화려한 모래성이 아니라 투박한 벽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모래성은 금방 지을 수 있고 얼마든지 멋을 부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벽돌성은 더뎌보이지만, 하나하나가 쌓이면 튼튼하고 오래가는 건물이 됩니다. 우리가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방향이 올바르면 한걸음을 가도 전진이지만, 방향이 어긋나면 만걸음을 가도 헛수고입니다.

2.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이 어렵고 막막하더라도,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2절에서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3.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결론. 광야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