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30_[종교개혁] 믿음, 의, 예수 그리스도

2016년 10월 30일 주일 설교
로마서 0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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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한줄 요약]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준인 ‘의’를 통과해야합니다. 그 ‘의’는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에 자신의 복음을 적어 보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계기

2 종교개혁과 의
죄와 의에 대한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이 주시는 의
예수님만 온전히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님이 주시는 ‘의’를 받자

2016.10.23_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 그리스도의 중심성

2016년 10월 23일 주일 설교
사도행전 02:37-42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십자가의 체험이 성령 세례입니다

3    주의해야 할 점
선택과 책임은 독립된 인격의 영원한 본성
수동적 소극적이 아니라 주도적 적극적

[결론]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

금세기의 대설교자 로이드 존스목사는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난다 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부흥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부흥의 신학이 철저하게 그의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오히려 최근의 부흥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은사주의운동캠프에 속해있으면서 에드워즈의 글들을 자신들의 신학의 들러리로 삼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도 반대했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조나단 웨드워즈의 글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참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다.

아래에 그의 회심간증을 옮겨놓는다. 그가 1737년도에 작성한 것인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자신의 회심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려놓고 있다. 그의 회심은 15년전 곧 1721년, 그러니까 자신의 20살때쯤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심간증을 읽으면서 주목할 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회심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던 싯점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고백이 머리요, 신조만으로서의 고백이었음을 그의 회심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에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되어지고 또한 그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우리는 그의 생생한 언어들로 대할 수가 있다.

그의 표현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신비주의적 경향(하지만 그의 신학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님을 유의하시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선을 잘 지켜서 정통신학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 혹은 그의 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주여, 부흥의 영이시여, 에스겔골짜기의 그 마른 뼈들같은 우리들에게도 부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체험적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번역한다.

자료출처: http://www.calltoworship.org/calltoworship/testimony/jonathan.html

Jonathan Edwards “Personal Narrative”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인간증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신의 구원받게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내력
I had a variety of concerns and exercises about my soul from my childhood; but had two more remarkable seasons of awakening, before I met with that change by which I was brought to those new dispositions, and that new sense of things, that I have since had.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혼에 대해서 다양한 관심을 가진 채로 여러 가지 실행들을 해 왔다.그리고 두 번의 현저하게 주목할 만한 각성의 기간을 두 번이나 거친 후에야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갖게 되는 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런 기질들과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The first time was when I was a boy, some years before I went to college, at a time of remarkable awakening in my father’s congregation.

내가 대학을 진학하기 몇 해 전, 부친의 교회에서 있었던 현저한 각성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I was then very much affected for many months, and concerned about the things of religion, and my soul’s salvation; and was abundant in duties.

그 당시 몇 달 동안이나 그 각성으로 인해서 영향을 입어서는 신앙의 문제,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는 그것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충만했었다.

I used to pray five times a day in secret, and to spend much time in religious talk with other boys; and used to meet with them to pray together.

하루에 다섯 번씩 은밀히 기도시간을 가졌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대화들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곤 했었다.

I experienced I know not what kind of delight in religion.

나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모르는 채로 신앙 안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였다.

My mind was much engaged in it, and had much self-righteous pleasure; and it was my delight to abound in religious duties.

내 마음은 그것에 깊이 몰두했었다. 또한 무척 내성적이었고 나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즐거웠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I with some of my schoolmates joined together, and built a booth in a swamp, in a very retired spot, for a place of prayer.

학교친구들 몇몇과 함께 습지 안의 한 곳 으슥한 곳에 기도할 수 있는 거처를 지어놓았다.

And besides, I had particular secret places of my own in the woods, where I used to retire by myself; and was from time to time much affected.

게다가 숲속에는 내만이 알고 있던 특별한 장소가 있어서 혼자서 그곳에 가서 때때로 묵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My affections seemed to be lively and easily moved, and I seemed to be in my element when engaged in religious duties.

나의 정서는 들뜨고 쉽게 감동받는 것 같았고 종교적인 의무에 빠져들었을 때에는 나의 근원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And I am ready to think, many are deceived with such affections, and such a kind of delight as I then had in religion, and mistake it for grace.

그래서 지금 생각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서들에 현혹되어서 내가 종교에 대해서 가졌던 그런 종류의 즐거움들 때문에 그것이 은혜를 받은 것인 양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But in process of time, my convictions and affections wore off; and I entirely lost all those affections and delights and left off secret prayer, at least as to any constant performance of it; and returned like a dog to his vomit, and went on in the ways of sin.

하지만,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의 확신과 감정은 닳아져 버렸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런 흥분 속의 쾌감들을 잃어버리고 은밀한 기도시간도 갖지 않았다. 최소한 지속적으로 기도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또한 개가 그 뱉아버린 것을 다시 주워먹는 것처럼 죄된 생활들을 반복하였다.

Indeed I was at times very uneasy, especially towards the latter part of my time at college; when it pleased God, to seize me with a pleurisy; in which he brought me nigh to the grave, and shook me over the pit of hell.

물론 때때로 특별히 대학생활의 말기쯤에 와서는 이런 나의 상태에 심기가 아주 불편해 졌다.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 지옥구덩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And yet, it was not long after my recovery, before I fell again into my old ways of sin.

하지만, 회복되자 곧 옛날 저질렀던 죄악으로 되돌아 갔다.

But God would not suffer me to go on with any quietness; I had great and violent inward struggles, till, after many conflicts with wicked inclinations, repeated resolutions, and bonds that I laid myself under by a kind of vows to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엄청나고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악한 내적 경향들과 씨름한 후에 또 다시 결심하고 하나님께 서원 같은 것을 하곤 하였다.

From my childhood up, my mind had been full of objections against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in choosing whom he would to eternal life, and rejecting whom he pleased; leaving them eternally to perish, and be everlastingly tormented in hell. It used to appear like a horrible doctrine to me.

어릴 때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교리를 반대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해서 지옥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도록 두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But I remember the time very well, when I seemed to be convinced, and fully satisfied, as to this sovereignty of God, and his justice in thus eternally disposing of men, according to his sovereign pleasure.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주권적인 즐거움을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확신하고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분명히 기억나기는 한다.

But never could give an account, how, or by what means, I was thus convinced, not in the least imagining at the time, nor a long time after, that there was any extraordinary influence of God’s Spirit in it; but only that now I saw further, and my reason apprehended the justice and reasonableness of it.

하지만,내가 어떻게 혹은 어떤 방편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게 되었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순간도 없었고 되돌아볼 때에 그런 순간이 있었노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없었다.

However, my mind rested in it; and it put an end to all those cavils and objection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확신에 안주하고 있었고 모든 의문과 반대에 종지부를 찍었었다.

And there has been a wonderful alteration in my mind, in respect to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from that day to this; so that I scarce ever have found so much as the rising of an objection against it, in the most absolute sense, in God’s strewing mercy to whom he will shew mercy, and hardening whom he will.

그리고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의 면에서 나의 마음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반대해 보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에게 주시고 거두실 자에게는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God’s absolute sovereignty and justice, with respect to salvation and damnation, is what my mind seems to rest assured of, as much as of any thing that I see with my eyes; at least it is so at times.

구원과 저주의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며 또한 의로우시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분명하게 확신되었서 마치 내 눈으로 보는 것과도 같게 여겨졌다; 최소한 때때로 그렇게 여겨졌다.

But I have often, since that first conviction, had quite another kind of sense of God’s sovereignty than I had then.

하지만, 그 첫번째의 확신 이후로 간혹 아주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I have often since had not only a conviction, but a delightful conviction. The doctrine has very often appeared exceeding pleasant, bright, and sweet. Absolute sovereignty is what I love to ascribe to God. But my first conviction was not so.

그 이후로 간혹 하나의 확신으로서만 아니라 달콤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나는 사랑하였다. 하지만, 첫번째 확신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The first instance that I remember of that sort of inward, sweet delight in God and divine things that I have lived much in since, was on reading those words, I Tim. 1:17.

그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해서 내적이면서 달콤한 즐거움, 그리고 그 이후 생활하던 중에 계속 겪었던 신성한 일들에 대한 추억의 첫 체험은 디모데전서1:17에 있는 말씀들을 읽었을 때였다.

Now un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wise God, be honou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정말로 오직 영원하시며, 영생하시고, 보이지 않으신 왕이시며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이 무궁하시길 !

As I read the words, there came into my soul, and was as it were diffused through it, a sense of the glory of the Divine Being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 영혼 속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확산되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곧 그것은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었다;

a new sense, quite different from any thing I ever experienced before Never any words of scripture seemed to me as these words did.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전 어느 때에 겪어보지 못하였던 너무나도 다른 그 무엇이었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과 같이 여겨지지 않았었다(역자주: 그만큼 새롭게 여겨졌었다는 뜻)

I thought with myself, how excellent a Being that was, and how happy I should be, if I might enjoy that God, and be rapt up to him in heaven, and be as it were swallowed up in him for ever!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분은 얼마나 뛰어나신 존재이신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시는 그 분에게로 환희로 올리워지게 된다면, 그 분 안에 영원토록 삼키워지게 되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I kept saying, and as it were singing over these words of scripture to myself; and went to pray to God that I might enjoy him, and prayed in a manner quite different from what I used to do; with a new sort of affection.

나는 계속 말하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계속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당신을 계속 즐거워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였었다. 새로운 종류의 정동(情動)이 넘치고 있었다.

But it never came into my thought, that there was any thing spiritual, or of a saving nature in this.

하지만, 이것 안에, 영적인 어떤 것, 혹은 구원케하는 성질에 관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From about that time, I began to have a new kind of apprehensions and ideas of Christ. and the work of redemption, and the glorious way of salvation by him.

그 어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로운 종류의 인식과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구원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An inward, sweet sense of these things, at times, came into my heart; and my soul was led away in pleasant views and contemplations of them.

이러한 일들에 대한 내적이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내 영혼은 그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유쾌해지고 깊어졌다.

And my mind was greatly engaged to spend my time in reading and meditating on Christ, on the beauty and excellency of his person, and the lovely way of salvation by free grace in him.

내 마음은 그 분의 인격의 아름다우심과 뛰어나심, 그 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그 사랑스러운 방식에 대하여 독서하고 묵상하느라고 깊이 빠져서 시간을 보내었다.

I found no books so delightful to me, as those that treated of these subjects.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책들 외에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Those words Cant. 2:1, used to be abundantly with me, I am the Rose of Sharon, and the Lilly of the valleys.

아가서2장1절의 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라는 말씀이 내 안에 가득차고 넘치곤 했었다.

The words seemed to me, sweetly to represent the loveliness and beauty of Jesus Christ.

나에게 이런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주는 달콤한 말씀으로 여겨졌다.

The whole book of Canticles used to be pleasant to me, and I used to be much in reading it, about that time.

아가서 전체가 나에게 유쾌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읽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었다;

and found, from time to time, an inward sweetness, that would carry me away, in my contemplations.

그리고는 때때로, 묵상 중에 나를 멀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곤 하던 어떤 내적인 달콤함을 발견하였다.

This I know not how to express otherwise,

어떻게 이런 것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than by a calm, sweet abstraction of soul from all the concerns of this world.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그 영혼의 달콤함;

and sometimes a kind of vision, or fixed ideas and imaginations, of being alone in the mountains, or some solitary wilderness, far from all mankind, sweetly conversing with Christ, and wrapt and swallowed up in God.

때로는 어떤 종류의 비젼, 혹은 어떤 사람과도 단절되어서 홀로 산 중에 있거나 외로운 광야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 안에 감싸여서 삼키워지는 것 같은 비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The sense I had of divine things, would often of a sudden kindle up, as it were, a sweet burning in my heart; an ardor of soul,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내가 가졌던 이런 감각은 간혹 사실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내 마음 속에 달콤하게 타오르기도 하였다. 영혼의 그 향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Not long after I first began to experience these things, I gave an account to my father of some things that had passed in my mind.

이런 일을 겪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마음 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렸다.

I was pretty much affected by the discourse we had together; and when the discourse was ended, I walked abroad alone, in a solitary place in my father’s pasture, for contemplation.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에 아주 고무되어서 대화가 끝나자 나는 밖으로 혼자 나와서 농장의 조용한 곳으로 묵상하기 위해서 찾았다.

And as I was walk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and clouds, there came into my mind so sweet a sense of the glorious majesty and grace of God,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그곳을 걸을 때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I seemed to see them both in a sweet conjunction; majesty and meekness joined together; it was a sweet, and gentle, and holy majesty; and also a majestic meekness; an awful sweetness; a high, and great, and holy gentleness.

장엄함과 겸손함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런 달콤함 결합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달콤했고 부드러웠으며 거룩하게 장엄하였다; 또한 장엄한 겸손함이었다. 위엄스러운 달콤함이었고 또한 지고하며 위대한 그리고 거룩한 부드러움이었다.

After this my sense of divine things gradually increased, and became more and more lively, and had more of that inward sweetness.

이 일 후에 신적인 일들에 대한 나의 감각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더욱 더 생동감이 있게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이 증가되었다.

The appearance of every thing was altered; there seemed to be, as it were, a calm sweet cast, or appearance of divine glory, in almost every thing.

모든 일들이 변화되었다; 사실 거의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차분하면서도 달콤한 주형물처럼 여겨졌다.

God’s excellency, his wisdom, his purity and love, seemed to appear in every thing; in the sun, moon, and stars; in the clouds, and blue sky; in the grass, flowers, trees; in the water, and all nature; which used greatly to fix my mind.

하나님의 뛰어나심, 그 분의 지혜, 순결함과 사랑스러움이 모든 사물 속에 보여지는 것 같았다; 태양 속에서, 달, 그리고 별들 속에서; 구름 속에서, 그리고 푸른 하늘 속에서; 잔디, 꽃들, 나무들 속에서; 물 속에서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랬다; 이전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이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러했다.

I often used to sit and view the moon for continuance; and in the day, spent much time in viewing the clouds and sky, to behold the sweet glory of God in these things; in the mean time, singing forth, with a low voice my contemplations of the Creator and Redeemer.

간혹 나는 조용히 앉아서 달을 바라보곤 하였다; 낮에는 하늘과 구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신 분을 묵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부르곤 하였다.

And scarce any thing, among all the works of nature, was so sweet to me as thunder and lightning; formerly, nothing had been so terrible to me.

모든 자연의 작품들 속에서 그 어떤 것 하나도 나에게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천둥과 번개조차 그러했다.

Before, I used to be uncommonly terrified with thunder, and to be struck with terror when I saw a thunder storm rising; but now, on the contrary, it rejoiced me.

이전에는 천둥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서워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정반대로, 그것을 보면 즐거워 졌다.

I felt God, so to speak, at the first appearance of a thunder storm; and used to take the opportunity, at such times, to fix myself in order to view the clouds, and see the lightnings play, and hear the majestic and awful voice of God’s thunder, which oftentimes was exceedingly entertaining, leading me to sweet contemplations of my great and glorious God.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천둥번개 가운데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을 느꼈다; 그 천둥이 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구름을 보려고 집중해 서는 번개가 휘몰아치는 장면을 지켜 보았고 하나님의 천둥의 그 장엄하고 위엄스러운 음성을 듣곤 하였다. 때때로는 너무나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의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달콤하게 묵상하는 데로 나를 인도하였다.

While thus engaged, it always seemed natural to me to sing, or chant for my mediations; or, to speak my thoughts in soliloquies with a singing voice.

이렇게 몰두하는 중에 노래를 부르거나 묵상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혹은 노래부르는 듯 혼자서 조용히 나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아 놓았다.

I felt then great satisfaction, as to my good state; but that did not content me.

나는 그 당시 나의 좋은 상태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지는 않았다.

I had vehement longings of soul after God and Christ, and after more holiness, wherewith my heart seemed to be full, and ready to break; which often brought to my mind the words of the Psalmist, Psal. 119:28.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였고 더욱 거룩하고자 하였으며 나의 마음은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차고 넘치는 것 같았고 언제든지 그런 것들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시편119:28절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곤 할 정도였다.

My soul breaketh for the longing it hath.

나의 영혼은 원하는 바 그 열망으로 상하여졌다.

I often felt a mourning and lamenting in my heart, that I had not turned to God sooner, that I might have had more time to grow in grace.

간혹 내 마음 속에 보다 더 일찍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음을 애닮아 하는 슬픔과 비애를 느껴서 더욱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워 하였다.

My mind was greatly fixed on divine things; almost perpetually in the contemplation of them.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몰두하였다; 그것들을 거의 지속적으로 묵상하였다.

I spent most of my time in thinking of divine things, year after year; often walking alone in the woods, and solitary places, for meditation, soliloquy, and prayer, and converse with God; and it was always my manner, at such times, to sing forth my contemplations.

거의 모든 시간을 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수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었다. 때로는 숲속 길을 홀로 걸으면서 때로는 나 홀로 있는 장소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 명상 중에 찬양이 튀쳐 나오는 것이 나의 생활이었다.

I was almost constantly in ejaculatory prayer, wherever I was.

언제나 대부분 자연스럽게 기도가 터쳐 나왔다.

Prayer seemed to be natural to me, as the breath by which the inward burnings of my heart had vent.

마치 나의 내적 심령의 타오름이 내뿜는 숨결처럼 기도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The delights which I now felt in the things of religion, were of an exceeding different kind from those before mentioned, that I had when a boy; and what I then had no more notion of, than one born blind has of pleasant and beautiful colors.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즐거움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전의 것은 마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총천연색깔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갖는 그런 차원의 것이었을 뿐이다.

They were of a more inward, pure, soul animating and refreshing nature.

이제 느끼는 것들은 보다 내적이고 순수하며 영혼의 활력을 주는 신선한 성격의 것이었다.

Those former delights never reached the heart; and did not arise from any sight of the divine excellency of the things of God; or any taste of the soul satisfying and life-giving good there is in them.

이전의 즐거움은 마음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신적인 뛰어남을 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을 만족시키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그것들 안에 있어서 그 맛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역주: 이 이후의 기록은 1723년 뉴욕으로 건너가서 목회일을 시작하는 일들이 기록된다. 그의 전기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4 자신의 요약 1-8항

  1. In this refined way of trusting to my own works, and my own righteousness, (so zealously inculcated by the mystic writers,) I dragged on heavily, finding no comfort or heal therein till the time of my leaving England. on shipboard, however, I was again active in outward works; where it pleased God, of his free mercy, to give me twenty-six of the Moravian brethren for companions, who endeavored to show me a more excellent way. But I understood it not at first. I was too learned and too wise: so that it seemed foolishness unto me. And I continued preaching and following after and trusting in that righteousness whereby no flesh can be justified.

 

(신비주의 작가들에 의해서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쳐 지고 있는) 그런 정교한 방식으로 나의 행위를 의지하면서 그리고 나의 의를 의지하면서 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면서 아무런 위로나 치료책을 발견하지 못한 채 아메리카를 향해서 떠났다. 하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선상에서 다시금 나는 외적 선행들을 열심으로 행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자비하신 은총으로 기뻐하시길 나에게 26명의 모라비안형제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나에게 그들은 더욱 훌륭한 길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처음엔 그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또한 너무 지혜로왔다: 그들의 조언은 나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어떤 육체도 의롭게 할 수 없는 그런 의를 설교하면서 그 의를 추구했고 또한 신뢰하였던 것이다.

  1. All the time I was at Savannah I was thus beating the air. Being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which by a living faith in him bringeth salvation “to every one that believeth,” I sought to establish my own righteousness, and so labored in the fire all my days. I was not properly under the law; I knew that the law of God was spiritual; I consented to it, that it was good. Yea, I delighted in it, after the inner man. Yet was I carnal, sold under sin. Every day was I constrained to cry out, “What I do, I allow not; for what I would, I do not; but what I hate, that I do. To will is indeed present with me; but how to perform that which is good, I find not. For the good which I would, I do not; but the evil which I would not, that I do. I find a law, that when I would do good, evil is present with me; even the law in my members, warring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still bringing me into captivity to the law of sin.”

 

사반나에 있는 동안 나는 그래서 계속 허공을 헛되이 치고 있었다. 살아있는 진짜 믿음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고 종일토록 불구덩이 속에서 일하였다. 나는 적합하게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영적인 것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선한 것인 줄을 동의하였다. 속사람을 따라서는 그것을 즐거워하였었다. 하지만, 나는 죄 아래 팔린 육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나는, “내가 행하는 그것을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은 분명히 내 안에 있도다; 하지만,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느냐 그것을 알 수 없구나. 내가 행해야 할 선은 행하지 아니하면서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악을 내가 행하고 있도다. 참으로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는데,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역시 내 안에 악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나의 지체의 법이 죄의 법 아래로 나를 계속해서 사로잡아가고 있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1. In this vile, abject state of bondage to sin I was indeed fighting continually, but not conquering. Before, I had willingly served sin; now, it was unwillingly; but still I served it. I fell and rose, and fell again. Sometimes I was overcome, and in heaviness; sometimes I overcame, and was in joy. For as in the former state I had some foretastes of the terrors of the law, so had I in this, of the comforts of the gospel. During this whole struggle between nature and grace (which had now continued above ten years) I had many remarkable returns to prayer, especially when I was in trouble. I had many sensible comforts, which are indeed no other than short anticipations of the life of faith. But I was still under the law, not under grace: the state most who are called Christians are content to live and die in. For I was only striving with, not freed from sin; neither had I the witness of the Spirit with my spirit, and indeed could not, for I sought it not by faith, but (as it were) by the works of the law.

 

이런 사악하고 비참한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나는 물론 계속 힘써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즐거워하면서 섬겼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원치 않으면서도 섬겼다. 넘어졌다 일어섰는가 하면 또 넘어졌다. 때로는 무거움으로 압도당했다; 때로는 기쁨 가운데서 내가 이겼다. 이전 상태에서처럼 율법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얼마 맛보기도 했었는데, 이런 기쁨 속에서는 복음의 위로를 맛보기도 하였었다. 자연과 은혜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이런 모든 투쟁의 기간 동안(거의 10여년간 진행되어 왔다) 나는 특별히 곤란을 당하는 경우에 여러 번 기도의 특별한 경험들을 하였다. 상당한 정도의 위로를 누리기도 했었고, 이런 것은 물론 신앙생활을 예기케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었다.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만족한 채로 살며 또한 죽고자 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단지 힘써 추구하고 있었을 뿐이지, 죄에서 해방된 것도, 나의 영과 더불어 성령의 증거를 가진 것도, 또한 가질 수도 없었다. 내가 추구한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그러했던 것이다.

 

  1. 11. In my return to England, January, 1738, being in imminent danger of death, and very uneasy on that account, I was strongly convinced that the cause of that uneasiness was unbelief, and that the gaining a true, living faith was the one thing needful for me. But still I fixed not this faith on its right object: I meant only faith in God, not faith in or through Christ. Again, I knew not that I was wholly void of this faith; but only thought I had not enough of it. So that when Peter Bohler, whom God prepared for me as soon as I came to London, affirmed of true faith in Christ, (which is but one,) that it had those two fruits inseparably attending it, “dominion over sin, and constant peace from a sense of forgiveness,” I was quite amazed, and looked upon it as a new gospel. If this was so, it was clear I had not faith. But I was not willing to be convinced of this. Therefore I disputed with all my might, and labored to prove that faith might be where these were not; especially where the sense of forgiveness was not: for all the scriptures relating to this, I had been long since taught to construe away, and to call all Presbyterians who spoke otherwise. Besides, I well saw no one could (in the nature of things) have such a sense of forgiveness, and not feel it. But I felt it not. If then there was no faith without this, all my pretensions to faith dropped at once.

 

영국으로 돌아온 1738년 1월, 사경 속에서 그리고 그때 겪었던 일에 심기가 불편한 채로 바로 그런 불편함이란 불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을 얻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에 고정시키지 못하였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그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이런 신앙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내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해 두셨던 피터 뵐러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이란 두 가지 열매 곧 “죄의 지배와 죄용서함 받은 것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지속적인 평화”의 이 두가지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랬고 그것을 새로운 복음이라고 간주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러므로, 모든 힘을 다해서 그것에 대해서 반대했고 이런 확신이 없어도 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었다; 특별히 죄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다:지금까지 무시하도록 가르침 받았던 성경구절들을 이것과 관계시켜보려고 하면서 다르게 설명하는 모든 장로교인들의 의견들을 참고하였다[역주: 아, 그가 이 참된 회심을 알고 있었던 장로교인들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었더라면….그 당시에는 영국국교이든, 장로교인이든, 침례교회이든 영국의 영적 상태가 무척이나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참된 회심에 대한 관심이 무척 저하되어 있어서, 여기서 웨슬레가 말하고 있는 참된 회심에 대한 무지가 장로교회교인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어느 누구도 이런 용서함 받은 느낌을 가질 수 없고 또한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내가 느꼈던 것이다. 이런 용서함의 느낌이 없으면 참 믿음이 아니라고 할 때 내가 믿음이 있노라고 했던 그 모든 것은 당장 잘못된 것이 되는 것이다.

 

  1. When I met Peter Bohler again, he consented to put the dispute upon the issue which I desired, viz., Scripture and experience. I first consulted the Scripture. But when I set aside the glosses of men, and simply considered the words of God, comparing them together, endeavoring to illustrate the obscure by the plainer passages, I found they all made against me, and was forced to retreat to my last hold, “that experience would never agree with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those scriptures. Nor could I, therefore, allow it to be true till I found some living witnesses of it.” He replied, “He could show me such at any time; if I desired it, the next day.” And accordingly the next day he came with three others, all of whom testified of their own personal experience that a true living faith in Christ is inseparable from a sense of pardon for all past, and freedom from all present sins. They added with one mouth, that this faith was the gift, the free gift of God, and that he would surely bestow it upon every soul who earnestly and perseveringly sought it. I was not thoroughly convinced, and by the grace of God I resolved to seek it unto the end: — 1. By absolutely renouncing all dependence, in whole or in part, upon my own works or righteousness, on which I had really grounded my hope of salvation, though I knew it not, from my youth up. 2. By adding to the constant use of all the other means of grace continual prayer for this very thing — justifying, saving faith; a full reliance on the blood of Christ shed for me; a trust in him as my Christ, as my sole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redemption.

 

피터 뵐러를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토론하고 싶어했던 주제, 곧 성경과 체험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나는 먼저 성경을 상고하였다. 하지만, 신학적인 용어들을 제껴두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서로를 비교하면서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더 쉬운 구절들을 따라서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구절들이 바로 나 자신을 공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의 마지막 보루에 기대었었다. 그 보루란, “체험이란 이 성경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과는 결코 일치 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기 까지는 그런 구절들을 참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노라는 것”이었다. 그는 답변하기를, “내가 그것을 어느 때라도 보여 줄 수도 있는데, 내일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음 날 그는 세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는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믿음이 지난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셨다는 느낌, 그리고 현재의 모든 죄들로부터 자유하다는 것과 불가분리하다는 것을 간증하였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첨가하기를, 이런 신앙은 선물, 곧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진정으로 그것을 구하고 끝까지 추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철저하게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것을 끝까지 추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 1. 부분적으로건 전적으로건 나 자신의 행위나 의에 의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젊은 시절부터 내 구원을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포기함으로. 2. 모든 다른 은혜의 수단들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일, 의롭게 하는, 구원케 하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 계속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바로 나를 위해서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분을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영혼의 의로우심, 거룩하심, 그리고 구속으로 신뢰하는 것이었다.

 

  1. I continued thus to seek it (though with strange indifference, dullness, and coldness, and unusually frequent relapses into sin) till Wednesday, May 24th. I think it was about five this morning that I opened my Testament on those words: [note: here follows a line of Greek] “There are given unto us exceeding great and precious promises, even that ye should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2 Pet. i, 4. Just as I went out, I opened it again on those words: “Thou art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In the afternoon I was asked to go to St. Paul’s. The anthem was, “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 Lord, hear my voice. O let thine ears consider well the voice of my complaint. If thou, Lord, wilt be extreme to mark what is done amiss, O Lord, who may abide it? But there is mercy with thee; therefore thou shalt be feared. O Israel, trust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mercy, and with him is plenteous redemption. And he shall redeem Israel from all his sins.”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도 무관심에 빠지고 지겹고, 냉냉하고, 또한 자주 죄로 떨어지기도 하였지만) 계속 5월 24일 수요일까지 그것을 구해 왔었다. 그날 아침 5시경으로 생각한다. 성경책을 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다:[주,여기에 헬라어로 성경구절이 적혀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 하셨으니”. 집밖으로 나가자 마자, 성경을 다시 펴서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말씀을 읽었다. 오후에 세인트 폴 성당에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곳에서 불렀던 찬송가의 가사내용은 이렇다: “깊음 속에서 주를 내가 불렀나이다: 주여, 나의 기도에 응답하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만약 주께서 인생의 실수를 기억하신다면 누가 주 앞에서 견딜 수가 있겠나이까? 하오나 주께는 자비가 있사오니; 주께서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이스라엘아, 주만 신뢰하라: 주에게 자비하심이 있고, 그에게 구속이 넘치는도다. 또한 주께서 그 모든 죄악들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로다”

 

  1.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저녁에 나는 알더스게이트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억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내 같은 사람의 죄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1. 15. I began to pray with all my might for those who had in a more especial manner despitefully used me and persecuted me. I then testified openly to all there what I now first felt in my heart. But it was not long before the enemy suggested, “This cannot be faith; for where is thy joy?” Then was I taught that peace and victory over sin are essential to faith in the Captain of our salvation; but that, as to the transports of joy that usually attend the beginning of it, especially in those who have mourned deeply, God sometimes giveth, sometimes withholdeth them, according to the counsels of his own will.

 

나는 전심으로 특별하게 나를 기만적으로 이용해 먹었던 사람들, 나를 그렇게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간증하였다. 하지만, 곧 이어서 나의 적이 암시를 주었다. “이것은 믿음일 수 없어; 어디에 기쁨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는 분을 믿는 믿음에 본질적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 구원의 시작에 보통 동반되는 황홀한 기쁨은 깊이 탄식하는 자들 속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뜻하신 바를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주시기도 하고 또한 거두시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16. After my return home, I was much buffeted with temptations; but cried out, and they fled away. They returned again and again. I as often lifted up my eyes, and he sent me help from his holy place. And herein I found the difference between this and my former state chiefly consisted. I was striving, yea, fighting with all my might under the law, as well as under grace; but then I was sometimes, if not often, conquered: now I was always conqueror.

 

집으로 돌아와서는 여러가지 유혹들에 지쳐버렸다; 하지만, 크게 외쳤을 때 그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유혹은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눈을 들어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 거룩하신 곳으로부터 도우심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이런 것과 이전의 상태 사이에 있었던 차잇점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예,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씨름하였는데 은혜 아래에서건 율법 아래에서건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 때때로(sometimes), 자주(often)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복당하였었다: 이제는 언제나(always) 정복자였다[역주, 이 부분은 웨슬레의 회심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분분한 의견들이 있는 곳인데, 과연 그가 이 ‘알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 ‘언제나 정복자였다’는 말이 어떤 의미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분석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그의 모든 ‘마음’ 속에서 아무런 ‘죄의 유혹조차’ 없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죄의 유혹은 있었는데, 그 유혹에 ‘마음’으로라도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는 의미인가? ‘마음’으로는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는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웨슬레가 추구해 온 것인 ‘내적 거룩함’이었기 때문에, ‘마음으로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해석이 지지를 받는데, 과연 그러한가, 또는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에 남게 된다. 웨슬리 자신이 비록 ‘완전론’을 주장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흠한 상태, 죄없는 상태로 있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을 참고해서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1. Thursday, May 25th. — The moment I awaked, “Jesus, Master,” was in my heart and in my mouth; and I found all my strength lay in keeping my eye fixed upon him, and my soul waiting on him continually. Being again at St. Paul’s in the afternoon, I could taste the good word of God in the anthem, which began, “My song shall be always of the loving kindness of the Lord: with my mouth will I ever be showing forth thy truth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Yet the enemy injected a fear, “If thou dost believe, why is there not a more sensible change?” I answered, (yet not I,) “That I know not. But this I know, I have now peace with God. And I sin not to-day, and Jesus my Master has forbid me to take thought for the morrow.”

 

5월 25일, 목요일, 눈을 뜬 순간,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서 나의 눈을 그 분에게 고정시키고 있고, 나의 영혼은 계속해서 그 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후에 다시 세인트 폴 성당에 가서 부르게 된 찬송에서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언제나 주의 사랑에 풍성하신 친절을 노래하겠네:입술을 열어서 주의 진리를 영원히 전하겠노라.” 하지만 원수가 다시 두려움을 집어넣었다. “진짜로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왜 더욱 느낄 만한 변화가 없단 말인가?” 내가 대답했다,( 아니 답변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난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내일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금하시고 있어.”

 

  1. “But is not any sort of fear,” continued the tempter, “a proof that thou dost not believe?” I desired my Master to answer for me, and opened his book upon those words of St. Paul: “Without were fightings, within were fears.” Then, inferred I, well may fears be within me; but I must go on, and tread them under my feet.

 

“하지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유혹자가 계속해서 소곤거렸다, “…네가 참으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게 아니니?” 나의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답변해 주시길 원했다. 그 분의 책을 열어서 사도바울의 이런 말씀을 발견하였다. “밖으로는 싸움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7:5). 이 말을 읽고는 생각하였다. 흠, 내 안에 비록 두려움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계속 나아가야지, 그 두려움을 내 발 밑에 밟아 문대버려야지.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3 자신의 요약 1-7항

Mr. Wesley’s Conversion

 

 

웨슬리의 회심

 

http://www.gbod.org/worship/default.asp?act=reader&item_id=5951&loc_id=639,624

 

 

아래의 글은 웨슬리의 회심사건 백주년을 기념해서 The Methodist Magazine and Quarterly Review (Volume XX.New Series, Vol.IX,1838,New York: T.Mason and G.Lane, p.321-326)지에 실린 그의 일기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인데, 실상은 자신의 회심사건을 회상하면서 좀 더 보충하고 확대설명하고 있습니다. 웨슬리 자신이 직접 자신의 회심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그의 회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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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Monday, Tuesday, and Wednesday I had continual sorrow and heaviness in my heart; something of which I had described, in the broken manner I was able, in the following letter to a friend: —’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나는 계속 슬펐고 마음이 무거웠다; 할 수 있는 한 퉁명스럽게 무언가를 나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나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O why is it, that so great, so wise, so holy a God will use such an instrument as me? Lor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wilt thou send the dead to raise the dead? Yea, thou sendest whom thou wilt send, and showest mercy by whom thou wilt show mercy! Amen! Be it then according to thy will! If thou speak the word, Judas shall cast out devils.

 

오 왜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도구로 삼으시는 것일까! 주님,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보내실까? 주님께서는 보내실 자를 보내실거야. 그리고 자비를 나타내실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실거야. 아멘! 그러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될지어다. 만약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유다도 귀신들을 쫓아낼 것이니깐.

 

“I feel what you say, (though not enough,) for I am under the same condemnation. I see that the whole law of God is holy, just, and good. I know every thought, every temper of my soul, ought to bear God’s image and superscription. But how am I fallen from the glory of God! I feel that I am sold under sin. I know that I, too, deserve nothing but wrath, being full of all abominations; and having no good thing in me, to atone for them, or to remove the wrath of God. All my works, my righteousness, my prayers, need an atonement for themselves. So that my mouth is stopped. I have nothing to plead. God is holy; I am unholy. God is a consuming fire; I am altogether a sinner, meet to be consumed.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말한 것을 느끼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은 저주의 상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의롭고 또한 선한 것임을 알고 있어.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기질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명을 드러내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 “나는 죄아래 팔렸다”고 느껴. 나도 또한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어. 저주받을 것들로 넘치는데 그것들을 처리할 만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어떤 선한 것이 내 안에는 전혀 없단 말이야. 나의 모든 행위, 나의 의, 나의 기도는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야. 내 입술로는 할 말이 없어. 무엇도 탄원할 만한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데, 나는 불결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길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야, 소멸당하기에 딱 맞는 그런 죄인이란 말이야.

 

“Yet I hear a voice (and is it not the voice of God?) saying,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He that believeth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지만 나는 한 목소리를 듣고 있어(이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나에게 말하기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O let no one deceive us by vain words, as if we had already obtained this faith! By its fruits we shall know. Do we already feel peace with God, and joy in the Holy Ghost? Does his Spirit bear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Alas! With mine he does not. Nor, I fear, with yours. O thou Saviour of men, save us from trusting in any thing but thee! Draw us after thee! Let us be emptied of ourselves, and then fill us with all peace and joy in believing, and let nothing separate us from thy love, in time or in eternity!”

 

헛된 말로 속임을 당하지 말자구나. 이런 믿음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열매로 우리가 안다고 하지 않니.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과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어쩌나! 나의 영과 더불어 그 분이 증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데. 염려가 되는 것은, 너의 영과 더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쟎나.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오직 당신만 신뢰할 수 있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믿음 중에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눠지지 않게 하소서. 이 생에건 영원 속에서이건!

 

What occurred on Wednesday, the 24th, I think best to relate at large, after premising what may make it the better understood. Let him that cannot receive it ask the Father of lights that he would give more light to him and me.

 

바로 그 24일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그 일을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한 뒤에야 설명해야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은 빛들의 아버지 되시는 분에게 구하길 바란다. 자신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더욱 많은 빛을 달라고.

 

  1. I believe, till I was about ten years old, I had not sinned away that “washing of the Holy Ghost” which was given me in baptism, having been strictly educated, and carefully taught that I could only be saved “by universal obedience, by keeping all the commandments of God;” in the of which I was diligently instructed. And those instructions, so far as they respected outward duties and sins, I gladly received and often thought of. But all that was said to me of inward obedience or holiness I neither understood nor remembered. So that I was, indeed, as ignorant of the true meaning of the law as I was of the gospel of Christ.

 

나는 열살 정도 되기까지 유아세례시에 베풀어졌던 ‘성령의 씻으심’을 전혀 더럽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받았고 오직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준행하는 모든 면에서의 복종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외적인 의무들과 죄들에 관해서라면 그러한 가르침들을 나는 즐겁게 받아들였고 종종 묵상하곤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나 거룩에 관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처럼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무지했었다.

 

  1. 2. The next six or seven years were spent at school; where, outward restraints being removed, I was much more negligent than before, even of outward duties, and almost continually guilty of outward sins, which I knew to be such, though they were not scandalous in the eye of the world. However, I still read the Scriptures, and said my prayers, morning and evening. And what I now hoped to be saved by was, 1. Not being so bad as other people. 2. Having still a kindness for religion. And, 3. Reading the Bible, going to church, and saying my prayers.

 

그 이후 5,6년 동안은 학교생활을 했다; 외적인 규제가 제거되어진 학교생활에서는 외적인 의무들을 행하는 것에서조차도 이전보다 많이 게을러졌다. 그래서 거의 매일같이 외적인 죄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졌다. 비록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내가 보기로는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성경을 읽기는 하였고 기도도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그때 구원받기 위하여 바랬던 것은, 1.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악하지 않는 것, 2. 종교에 대해서 관대할 것, 그리고 3.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니고,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 등이었다.

 

  1. Being removed to the university, for five years, I still said my prayers, both in public and private, and read, with the Scriptures, several other books of religion, especially comments on the New Testament. Yet I had not all this while so much as a notion of inward holiness; nay, went on habitually and, for the most part, very contentedly, in some or other known sin; indeed, with some intermission and short struggles, especially before and after the holy communion, which I was obliged to receive thrice a year. I cannot well tell what I hoped to be saved by now, when I was continually sinning against that little light I had, unless by those transient fits of what many divines taught me to call “repentance.”

 

대학에 진학해서 5년 동안 여전히 나는 공적모임이나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그리고 성경과 더불어서 다른 경건서적들을, 특별히 신약성경주석들을 읽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적인 거룩함의 개념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아니, 습관적으로 행하였을 뿐 대부분 얼마간의 감추어진 죄나 드러난 죄조차도 제법 만족하면서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때때로 특별히 성찬식을 갖기 이전이나 직후에 간단히나마 괴로워 하고 회개하기도 하였다. 일년에 세번씩 성찬식에 참여해야 했었다. 그 무럽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내 안에 있었던 아주 조그만 빛에 대항해서 계속 죄를 범하고 있었다. 수많은 경건한 분들이 나에게 “회개”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쳐 준 그 순간적인 발작행동을 때때로 일으키면서.

 

  1. When I was about twenty-two, my father pressed me to enter into holy orders. At the same time the providence of God directing me to Kempis’s “Christian Pattern,” I began to see that true religion was seated in the heart, and that God’s law extended to all our thoughts, as well as words and actions. I was, however, very angry at Kempis for being too strict, though I read him only in Dean Stanhope’s translation. Yet I had frequently much sensible comfort in reading him, such as I was an utter stranger to before; and meeting likewise with a religious friend, which I never had until now, I began to alter the whole form of my conversation, and to set in earnest upon a new life. I set apart an hour or two a day for religious retirement. I communicated every week. I watched against all sin, whether in word or deed. I began to aim at, and pray for, inward holiness. So that now, “doing so much, and living so good a life,” I doubted not but I was a good Christian.

 

22살 무렵 부친께서 나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종용하셨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섭리 중에 아 켐피스의 “Christian Pattern”이란 책을 읽게 하셔서, 참된 신앙이란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들의 말이나 행동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생각에도 미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 켐피스의 글을 나는 Dean Stanhope의 번역판으로 읽었을 뿐이면서도 나는 아 켐피스가 너무 엄격하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편안함을 맛보았다. 이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적인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인데, 나는 이때부터 나의 생활들을 전면적으로 변경시켜 보려고 애쓰면서 새로운 삶을 진지하게 시작해 보려고 하였다. 하루에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을 신앙적인 훈련을 위해서 홀로 지내려고 하였다. 매 주일 성찬에 참여하였다. 말이나 행동의 어떤 죄도 짓지 않으려고 하였다. 내적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하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1. Removing soon after to another college, I executed a resolution which I was before convinced was of the utmost importance, shaking off at once all my trifling acquaintance. I began to see more and more the value of time. I applied myself closer to study. I watched more carefully against actual sins. I advised others to be religious, according to that scheme of religion by which I modeled my own life. But meeting now with Mr. Law’s “Christian Perfection,” and “Serious Call,” (although I was much offended at many parts of both, yet) they convinced me more than ever of the exceeding height, and breadth, and depth of the law of God. The light flowed in so mightily upon my soul that every thing appeared in a new view. I cried to God for help, and resolved not to prolong the time of obeying him as I never had done before. And by my continued “endeavor to keep his whole law,” inward and outward, “to the utmost of my power,” I was persuaded that I should be accepted of him, and that I was even then in a state of salvation.

 

다른 대학으로 옮겼을 때 나는 시시껄렁한 친교들을 당장 끊어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확신이 되는 결심들을 실행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였다. 실제적인 죄들을 더욱 조심해서 경계하였다. 나 자신의 삶에서 성취하려고 하는 그 신앙의 체계들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건하게 살도록 조언하였다. 하지만 이제 윌리엄 로의 “Christian Perfection”과 “Serious Call”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율법의 그 뛰어난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훨씬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내 영혼에 엄청나게 쏫아지는 빛 때문에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나는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고, 그 분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더 미루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 이전에 결코 그렇게 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그 분의 모든 율법을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행하려고 힘쓰는 그것으로” 나는 그 분에게 분명히 받아들였음직하고 또한 그 당시에조차도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1. In 1730 I began visiting the prisons, assisting the poor and sick in town, and doing what other good I could, by my presence or my little fortune, to the bodies and souls of all men. To this end I abridged myself of all superfluities, and many that are called necessaries of life. I soon became a by-word for so doing, and I rejoiced that “my name was cast out as evil.” The next spring I began observing the Wednesday and Friday fasts, commonly observed in the ancient church, tasting no food till three in the afternoon. And now I knew not how to go any farther. I diligently strove against all sin. I omitted no sort of self-denial which I thought lawful; I carefully used, both in public and in private, all the means of grace at all opportunities. I omitted no occasion of doing good: I for that reason suffered evil. And all this I knew to be nothing, unless as it was directed toward inward holiness. Accordingly this, the image of God, was what I aimed at in all, by doing his will, not my own. Yet when, after continuing some years in this course, I apprehended myself to be near death, I could not find that all this gave me any comfort, or any assurance of acceptance with God. At this I was then not a little surprised, not imagining I had been all this time building on the sand, nor considering that “other foundation can no man lay than that which is laid by God, even Christ Jesus.”

 

1730년에 감옥방문을 시작했다. 읍내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고,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직접 찾아가거나 찾아갈 기회가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서 좋은 일을 하였다. 이것을 위해서 나는 모든 사치품들을 제거하였고 필수품이라고 불려지는 많은 것들도 제거하였다. 나는 곧 그렇게 선행을 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름이 그렇게 놀림을 당하는 것”(my name was cast out as evil)을 기뻐하였다. 다음 해 봄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교회에서 행하여지던 거신데, 오후 세시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전진해야 할 지를 몰랐다. 모든 죄악들에 대해서 열심으로 싸웠다.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유형의 자기부정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활용될 수 있었던 은혜의 모든 방편들을 공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조심스럽게 활용하였다. 선한 일을 행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았다: 그 이유 때문에 악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내적인 거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선행들이 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행을 한 것은, 그 모든 일들 속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을 행함으로 인해서 내가 목적하였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 모든 것이 어떤 위안을 줄 수 있는 것도 혹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확신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모래 위에 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였고 어떤 인간으로도 놓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놓으시는 기초 곧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1. Soon after, a contemplative man convinced me, still more than I was convinced before, that outward works are nothing, being alone; and in several conversations instructed me how to pursue inward holiness, or a union of the soul with God. But even of his instructions, (though I then received them as the words of God,) I cannot but now observe, 1. That he spoke so incautiously against trusting in outward works, that he discouraged me from doing them at all. 2. That he recommended (as it were, to supply what was wanting in them) mental prayer and the like exercises, as the most effectual means of purifying the soul, and uniting it with God. Now these were, in truth, as much my own works as visiting the sick or clothing the naked; and the union with God thus pursued was as really my own righteousness as any I had before pursued under another name.

 

얼마 뒤에 어떤 생각이 깊으신 분이 내가 앞서 그 분을 만나기 전에 확신을 가졌던 것보다 더욱 확신을 갖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외적인 행위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나와 홀로 있을 때 그리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서 내적인 거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혹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말씀들로 받아들였지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1. 그는 외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너무 부주의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것들 모두를 전혀 행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2. 그 분은 나에게 영혼을 정화시키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정신적인 기도와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는데(실은 그것들 안에 결핍되었던 것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실상 이것들은 병자들을 방문하거나 벌거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혀주었던 식의 내가 이전에 행하였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추구했던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실제로는 내가 이전에 다른 방식으로 추구했었던 나의 의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계속)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2

런던 알더스게이트거리의 어느 집회에서 가진 “이상한 뜨거움”

 

어거스틴의 회심은 루터에게 영향을 주고 루터의 회심은 바로 웨슬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음과 같은 웨슬리의 회심기록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저녁에 나는 알더스게이트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억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내 같은 사람의 죄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웠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하는 것이 약간은 “체험”을 강조한 측면이 있지만, 이런 강조는 바로 그 앞에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가 무엇인가 고려하면서 이 “체험”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의 “이상하게 뜨거워진 마음”의 체험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단순한 감정상의 체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삶과 그의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만 허락하시는 “마음의 변화”이요, “본성의 변화”입니다. 그것을 루터가 로마서서문에서 기록하고 있고, 그 기록된 것을 읽을 때에 웨슬리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 뜨거움을 경험한 바로 다음날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The moment I awaked, “Jesus, Master”, was in my heart and in my mouth(내가 깨어난 바로 그 순간 나의 주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이것이야말로 회심의 진수입니다. 회심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동반하고 또한 그 마음의 변화는 곧 입술로, 행동으로, 삶 속에서 실천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의 뜨거움은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변화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면 당신의 나라를 이뤄가십니다. 그 나라의 성취는 바로 이 뜨거워진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시작이고 또한 만물의 변혁의 출발점이 되는 소이입니다. 이 웨슬리의 뜨거워진 마음이 바로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전가되고 또한 그로 인하여 주의 나라가 증거되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번역합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뜨겁게 하옵시고,

이 뜨거움의 감격이 사라지지 않게 하옵소서.

나에게서만 아니라,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도 약하여지지 않게 하옵소서.

 

Only to Him is Glory, Praise and the Kingdom!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1

John Wesley’s thoughts before his conversion

     회심 전에 가지고 있었던 웨슬리의 자기이해

http://www.e-n.org.uk/2003-06/2194-‘Strangely-warmed’.htm

 

John Wesley was born on June 17 1703 in Epworth, Lincolnshire. 존 웨슬리는 1703년 7월 링컨셔의 엡워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It was on May 24 1738 that Wesley received assurance of salvation in a momentous experience of conversion. It lit the fire of evangelistic zeal in his heart which continued until his death in 1791. 웨슬리가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은 1738년 5월24일이었다. 이 경험은 1791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가슴에 복음전도의 열정을 불붙어 있게 하였다.

 

Before his conversion, he had met Peter Bohler, a Moravian missionary, and had been convinced by him that salvation is by faith alone. 그가 회심하기 전에 그는 모라비안계통의 선교사였던 피터 뵐러를 만나서 구원이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It is interesting to read two letters John Wesley wrote just prior to his Aldersgate experience. 회심을 체험한 알더스게이트 사건 바로 직전에 웨슬리가 보냈던 두 통의 편지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The first is to William Law, who for 12 years had been his mentor and whose Serious Call and Christian Perfection he had previously studied avidly. 첫번째 것은 윌리엄 로에게 보낸 것인데, 로는 12년 동안 웨슬리의 영적 지도자였었고 로의 책, <진지한 요청과 기독교인의 완전 Serious Call and 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책을 웨슬리는 열심히 탐독하였었다. The second is to an unidentified friend, who, like Wesley, was seeking salvation. 둘째 편지는 신원불명의 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인데, 이 친구는 웨슬리처럼 구원을 추구하는 구도자이다.

 

 

역주: 윌리엄 로는 알미니안주의신학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기독교인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쓴 그의 저작은 거의 고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편지를 보면 윌리엄 로의 책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신랄하게 통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비판없이 윌리엄 로의 책이 추천되고 있는 것을 고려할 이런 편지의 공개는 참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윌리엄 로에게 요한 웨슬리가 편지를 보낸 싯점은 바로 그가 회심을 경험하기 바로 10 입니다. 그리고 무명의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회심하는 당일 오전중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나의 영혼의 상태를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To William Law/ 윌리엄 로에게
    [London, May 14 1738]

 

 

Reverend Sir,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It is in obedience to what I think to be the call of God that I, who have the sentence of death in my own soul, take upon me to write to you, of whom I have often desired to learn the first elements of the gospel of Christ. 영혼의 사망선고를 받은 저로서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제가 생각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서 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첫째 요소를 배우기를 때때로 소망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If you are born of God, you will approve of the design, though it may be but weakly executed. If not, I shall grieve for you, not for myself. For as I seek not the praise of men, neither regard I the contempt either of you or of any other. 선생님께서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셨다면 그렇게 태어나게 하신 계획을 또한 인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계획이 비록 아주 미세하게 실시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탄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선생님께서 저를 모욕하시든, 다른 어느 누구가 모욕하든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For two years (more especially) I have been preaching after the model of your two practical treatises; and all who heard have allowed that the law is great, wonderful and holy. But no sooner did they attempt to fulfil it, but they found that it is too high for man, and that by doing ‘the works of the law shall no flesh living be justified’. 저는 (더욱 특별하게) 최근 2년 동안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실제적인 모델에 따라서 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율법이란 위대하고 기묘하며 거룩한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율법을 성취하려고 애쓰자 마자 그것은 사람들이 성취하기에는 너무 고상한 것과 “율법의 행위를 따라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To remedy this, I exhorted them, and stirred up myself, to pray earnestly for the grace of God, and to use all the other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 which the all-wise God hath appointed. But still, both they and I were more and more convinced that this is a law by which a man cannot live; the law in our members continually warring against it, and bringing us into deeper captivity to the law of sin. 이런 문제점을 수정하기 위해서 저는 그들에게 또한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열심으로 구하여야 하고 또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지명해 놓으신 모든 방편들을 사용하도록 권면하였고 또한 나 자신도 그렇게 실행하였습니다.

 

Under this heavy yoke I might have groaned till death, had not an holy man, to whom God lately directed me, upon my complaining thereof, answered at once: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with all thy heart,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to thee. This faith, indeed, as well as the salvation it brings, is the free gift of God. But seek, and thou shalt find. Strip thyself naked of thy own works and thy own righteousness, and fly to Him. For whosoever cometh unto Him, He will in no wise cast out.’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인도해 주신 거룩한 어떤 분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 무거운 멍에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신음할 뻔 했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너의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어떤 일도 너에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값없으신 선물이다. 하지만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너의 모든 행위와 너 자신의 의로움을 벗어제쳐 버리고 그 분에게로 도망하라. 그 분에게로 가는 자마다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Now, sir, suffer me to ask: How will you answer it to our common Lord that you never gave me this advice? 이제, 선생님, 질문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런 조언을 전혀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의 주가 되시는 분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Did you never read the Acts of the Apostles, or the answer of Paul to him who said, ‘What must I do to be saved?’ Or are you wiser than he? 선생님께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간수의 질문에 사도바울이 한 답변을 읽어보지 않으셨나요? Why did I scarce ever hear you name the name of Christ? 왜 저는 선생님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 드문 것일까요? never, so as to ground anything upon ‘faith in His blood’? ‘그의 피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어떤 것을 기초하는 것으로서 언급하신 것 말입니다. Who is this who is laying another foundation? 다른 기초를 놓고 있는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If you say you advised other things as preparatory to this, what is this but laying a foundation below the foundation?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들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하신다면 그 기초 아래에 놓여져야 할 참된 기초 외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Is not Christ, then, the first as well as the last? 마지막이 되실 뿐만 아니라 처음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던가요? If you say you advised them because you knew that I had faith already, verily you knew nothing of me; you discerned not my spirit at all. 만약 제가 믿음이 있는 줄을 선생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런 조언들을 하셨다고 하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저의 영혼의 상태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I know that I had not faith, unless the faith of a devil, the faith of Judas, that speculative, notional, airy shadow, which lives in the head, not in the heart. 저는 믿음이 전혀 없었더랬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면 단지 마귀도 가질 수 있는 믿음, 유다의 믿음, 그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며 공중에 그림자일 뿐인, 곧 머리 속에만 있지 마음에는 없는 그런 믿음이었을 뿐입니다. But what is this to the living, justifying faith in the blood of Jesus? the faith that cleanseth from sin, that gives us to have free access to the Father, to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to have ‘the love of God shed abroad in our hearts by the Holy Ghost’ which dwelleth in us, and ‘the Spirit itself bearing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하지만, 예수의 보혈을 믿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산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죄를 씻어주고, 아버지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믿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비춰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믿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성령 그 분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서 증거하는 그런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입니까?

 

I beseech you, sir, by the mercies of God, to consider deeply and impartially, whether the true reason of your never pressing this upon me was not this – that you had it not yourself; whether that man of God was not in the right who gave this account of a late interview he had with you – ‘I began speaking to him of faith in Christ: he was silent.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선생님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한 번도 이런 조언을 해주시지 않은 참된 이유가 선생님께서 전혀 그런 것을 모르셨던 것은 아닌지, 선생님과 대담을 나눴던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선생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기 시작하자 선생님께서는 침묵만 하셨다”고 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과연 진실되지 않은 것인지를 참으로 깊히 그리고 공정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Then he began to speak of Mystical matters. 그리고 그 사람은 신비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I spake to him of faith in Christ again: he was silent. 제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말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그 사람이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Then he began to speak of Mystical matters again. 그는 저에게 신비한 일들을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I saw his state at once.’ And a very dangerous one in his judgement, whom I know to have the Spirit of God. 저는 당장에 그의 상태를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아주 위험한 일이겠지만, 제가 보기로는 그렇게 간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Once more, sir, let me beg you to consider whether your extreme roughness, and morose and sour behaviour, at least on many occasions, can possibly be the fruit of a living faith in Christ. If not, may the God of peace and love fill up what is yet wanting in you! – I am, reverend sir, 한 번 더 선생님께 간청합니다. 여러 경우에 보여주시는 선생님의 그 극단적으로 거친 행동, 그리고 우울함과 매서운 행동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살아있는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열매들이 아니라면, 선생님 안에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것들을 평강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존경하는 선생님, .

 
Your humble servant 선생님의 비천한 종일 뿐입니다.

 

 

  1. To a friend 친구에게
    [London, May 24 1738]

Oh why is it that so great, so wise, so holy a God will use such an instrument as me! Lor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wilt Thou send the dead to raise the dead? Yea, Thou sendest whom Thou wilt send, and showest mercy by whom Thou wilt show mercy! Amen! Be it, then, according to Thy will! If Thou speak the word, Judas shall cast out devils.오 왜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도구로 삼으시는 것일까! 주님,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보내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보낼 자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비를 나타내실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아멘! 그러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될지어다. 만약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유다도 귀신들을 쫓아낼 것입니다.

 

I feel what you say (though not enough), for I am under the same condemnation. I see that the whole law of God is holy, just, and good. I know every thought, every temper of my soul ought to bear God’s image and superscription. But how am I fallen from the glory of God! I feel that ‘I am sold under sin’. I know that I, too, deserve nothing but wrath, being full of all abominations, and having no good thing in me to atone for them or to remove the wrath of God.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말한 것을 느끼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은 저주의 상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의롭고 또한 선한 것임을 알고 있어.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기질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명을 드러내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 “나는 죄아래 팔렸다”고 느껴. 나도 또한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어. 저주받을 것들로 넘치는데 그것들을 처리할 만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어떤 선한 것이 내 안에는 전혀 없단 말이야.

 

All my works, my righteousness, my prayers need an atonement for themselves. So that my mouth is stopped. I have nothing to plead. God is holy; I am unholy. God is a consuming fire; I am altogether a sinner, meet to be consumed. 나의 모든 행위, 나의 의, 나의 기도는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야. 내 입술로는 할 말이 없어. 무엇도 탄원할 만한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데, 나는 불결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길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야, 소멸당하기에 딱 맞는 그런 죄인이란 말이야.

 

Yet I hear a voice (and is it not the voice of God?) saying,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He that believeth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지만 나는 한 목소리를 듣고 있어(이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나에게 말하기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Oh let no one deceive us by vain words, as if we had already attained this faith! By its fruits we shall know. Do we already feel ‘peace with God’ and ‘joy in the Holy Ghost’? Does ‘His Spirit bear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Alas! with mine He does not. Nor, I fear, with yours. O Thou Saviour of men, save us from trusting in anything but Thee! Draw us after Thee! Let us be emptied of ourselves, and then fill us with all peace and joy in believing; and let nothing separate us from Thy love, in time or in eternity! 헛된 말로 속임을 당하지 말자구나. 이런 믿음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열매로 우리가 안다고 하지 않니.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과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어쩌나! 나의 영과 더불어 그 분이 증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데. 염려가 되는 것은, 너의 영과 더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쟎나.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오직 당신만 신뢰할 수 있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믿음 중에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눠지지 않게 하소서. 이 생에건 영원 속에서이건!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칼빈의 회심

아래의 글은 칼빈의 시편주석의 서문(기록년대:1557년)에 나와있는 칼빈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입니다. 여기서 그는 1523에서 1535년도까지의 일들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살짝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은 칼빈자신은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연구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여러가지 설명들을 하게 합니다.

 

아래의 시편주석서문에 나와있는 칼빈의 회심간증을 분석하면서 Alexander Ganoczy라는 로마천주교회측의 연구자는 그의 “갑작스러운 회심”을 칼빈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한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강조하였던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회심, 곧 기적으로서의 회심(conversion as miracle)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표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the Young Calvin, Edinburgh: T& T Clark, 1987, p.252-266). 옳은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다”(sudden)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상의 순간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에 의한 회심이란 뜻입니다.

 

그런 면을 감안하면서 아래의 칼빈의 간증을 음미해야 합니다. 그가 어린시절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공부를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억지로 신학공부하였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칼빈의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그의 제자 베자(T.Beza)는 칼빈이 신학공부를 하던 그 당시 칼빈의 마음은 “completely absorbed in theology”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전에 일련의 발전의 과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심에 이르기까지 그 내부에서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 글을 루터의 회심과 함께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이렇게 칼빈이 “신학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자신을 그 당시에 “회심하였었다”고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신학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은 자신의 지적 즐거움이나 종교심의 발로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개입을 체험하게 된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회심”의 때였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아래의 회심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너무나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어쩌면 감추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을 극히 조심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정이나 체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시편을 주석하면서 이 시편이야말로 인간심리의 박물관이라고 묘사 한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탄식과 불안, 회의와 좌절, 공포와 의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내면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칼빈은 너무나도 명민하게 간파하고 실감나게 주석합니다. 칼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쩜 그의 시편주석을 칼빈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칼빈의 마음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칼빈이 우리들에게 바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Jean Calvin: conversion experience

 

Jean Calvin, Commentary on the Psalms (1557), Corpus Reformatorum (Opera Calvini), ed. G. Baum, E Cunitz and E. Reuss (59 vols, Braunschweig (Brunswick), 1863-80) vol lvix cols 22-4.

 

 

 

When I was still a small boy, my father had destined me for the study of theology.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내 부친께서는 신학공부를 하기를 원하셨다. But afterwards, when he perceived that the legal profession was usually financially advantageous to its members, this prospect induced him suddently to change his mind. 하지만, 얼마 뒤에 법률계통의 일을 하게 되면 보통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질 것을 아시고는 갑자기 그의 마음을 바꾸셨다. So it came to pass that I was withdrawn from the stuyd of arts, and transferred to the study of law. 그래서 일반문예과목들 공부하는 것이 취소되고 나는 법률공부로 옮기게 되었다. I endeavoured faithfully to apply myself to this course, in obedience to the will of my father. 나는 부친의 뜻을 존중해서 이 공부에 성실하게 임하기로 하였다. But God, by the secret guidance of his providence, at length gave a different direction to my life.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비밀하신 섭리의 운행을 따라서, 마침내 내 인생에 다른 경로를 허락하셨다. And first, since I was too obstinately devoted to the superstitions of Popery to be easily extricated from so profound a labyrinth, God, by a sudden conversion changed my mind from one which had been more definitively made up than my years warranted into something more receptive . . . .처음에는 교황제도의 미신에 너무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어서 그 깊은 미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바꾸셔서, 여러 해 동안 보장되어 왔던 고집스럽던 마음에서 더욱 수용적인 마음이 되게 하셨다….. Being of a retiring disposition and preferring leisure and obscurity, I then sought a quiet retreat . . . .물러서 있으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고 여유와 숨어있는 것을 보다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 조용히 뒷전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Certain wicked and lying pamphlets were circulated . . . .사악하게 거짓말하는 유인물들이 나돌고 있었다. It appeared to me, that unless I opposed them to the utmost of my ability, my silence could not be cleared of the charge of cowardice and treachery. 나로서는 내 힘을 다해서 그것들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면 나의 침묵은 비겁함과 배신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던 것 같았다. This was the consideration which induced me to published my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기독교강요를 기술하기 시작하였었던 것이다. When it was published, it was not that copious and laborious work which it now is, but only a small treatise contained a summary of the principal truths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it was published with no other design than that men might know what was the faith held by those whom I saw basely and wickedly defamed by those base and treacherous flatterers . .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는 지금 것처럼 부피가 두꺼웠던 것이 아니라, 짧게 기독교신앙의 주요진리를 요약한 것이었다; 그것을 출판한 것은 단지 저열하고 간사한 농간자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불명예를 당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고 하였던 것뿐이었다.

 

 

영어번역본 출처 http://www.st-andrews.ac.uk/jfec/cal/reformat/theologb/biofrag1.htm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마틴 루터의 회심

 

 

 

 

Martin Luther’s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마틴 루터의 회심간증

 

 

 

by Martin Luther (1483-1546)

 

 

마틴 루터

 

http://homepage.mac.com/shanerosenthal/reformationink/index.htm

 

The following selection is taken from the Preface to the Complete Edition of Luther’s Latin Writings. It was written by Luther in Wittenberg, 1545. This english edition is availble in Luther’s Works Volume 34, Career of the Reformer IV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0), p. 336-337. In the first few lines of this selection, Luther writes, “during that year;” the immediate context indicates he is refering to the year of Tetzel’s death (July, 1519). This puts the date for Luther’s conversion, in his own view, two years after the posting of the ninety-five theses.

 

아래의 글은 루터의 라틴저작 전집에 대한 서문에서 가져온 것인데, 1545년 비텐베르그에서 루터가 쓴 것이다. 영어번역본은 루터전집 34권(Carreer of the Reformer시리즈 IV, St.Louis: Concordia Publsihing House, 1960)의 336-337쪽에 실린 것이다. 이 글의 첫부분에 보면 루터가 “그 해에”(during that year)라는 말을 하는데, 앞뒤 맥락을 보면 “그 해”란 테쩰이 죽은 해(1519년 7월)를 가르킨다. 이것은 루터 자신이 자신의 회심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그 날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95개조조항을 작성하고 나서 2년이 지난 때이다(한글역주: 루터의 회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설교에서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95조개조항 작성 2년 뒤라고 하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다고 할 수 있는 95개조항, 이미 그 안에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또한 가장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이 95개조항을 작성하였으면서도 루터는 아직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놀래야 할 일이다. 한글로 이것을 번역하는 역자로서, 목사가 된 지 5년 뒤에야 회심을 하였다는 간증을 하게 되면 어떤 분들은 믿어지지 않는다 하거나, 어떤 특별한 체험 정도로 그 의미를 희석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회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회심하던 시기는 아래의 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해서 대학에서 이미 강의까지 하던 시기였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아직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알지 못하였던 때였다는 것이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참된 회심은, 배움의 적고 많음, 깊고 얕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보다 더 강조되고 음미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번역하게 된다).

 

Meanwhile, I had already during that year returned to interpret the Psalter anew. I had confidence in the fact that I was more skilful, after I had lectured in the university on St. Paul’s epistles to the Romans, to the Galatias, and the one to the Hebrews. I had indeed been captivated with an extraordinary ardor for understanding Paul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But up till then it was not the cold blood ab out the heart, but a single word in Chapter 1,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that had stood in my way. For I hated that word “righteousness of God,” which, according to the use and custom of all the teachers, I had been taught to understand philosophically regarding the formal or active righteousness, as they call it, with which God is righteous and punishes the unrighteous sinner.

 

그러던 중 나는 이미 그 해에 시편해석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대학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에 대한 강의를 끝냈었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더욱 (해석문제에 있어서) 숙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었다. 물론 이미 로마서에서의 바울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내 앞에서 놓여져 있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1장의 한 마디,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그 말을 증오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교사들의 용례와 관습에 의해서 나는 그 말을 형식적 의, 혹은 적극적인 의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받아 왔었다. 그 교사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불의한 죄인들을 그 의로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Though I lived as a monk without reproach, I felt that I was a sinner before God with an extremely disturbed conscience. I could not believe that he was placated by my satisfaction. I did not love, yes, I hated the righteous God who punishes sinners, and secretly, if not blasphemously, certainly murmuring greatly, I was angry with God, and said, “As if, indeed, it is not enough, that miserable sinners, eternally lost through original sin, are crushed by every kind of calamity by the law of the decalogue, without having God add pain to pain by the gospel and also by the gospel threatening us with his righteousness and wrath!” Thus I raged with a fierce and troubled conscience. Nevertheless, I beat importunately upon Paul at that place, most ardently desiring to know what St. Paul wanted.

 

나는 수도사로서 흠없이 살아왔었지만, 극도로 혼란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채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었다. 나는 나의 (수도사로서의 흠없는 삶을 통한) 만족스럽게 살아오는 것으로 그가 만족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 미워하였던 것이다. 비밀스럽게, 공공연하게 불경스럽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엄청나게 불평하면서 하나님에게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불행한 죄인들이 원죄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잃어진 바 되어서 십계명의 율법에 의해서 모든 종류의 재난들로 짓이겨지는 것에도 만족치 않으시는 것 같으셔! 그것에다가 복음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시고 또한 그 복음에 의하여 당신의 의와 진노로 우리들을 위협하시다니!” 그래서 나는 맹렬하면서 혼란스러운 양심으로 분노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곳에서(역주: 롬1:17) 우연스럽게도 바울과 만났던 것이고, 가장 열정적으로 바울이 원하였던 것을 알고 싶어했었다.

 

At last, by the mercy of God, meditating day and night, I gave heed to the context of the words, namely,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as it is written,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 There I began to understan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at by which the righteous lives by a gift of God, namely by faith. And this is the meaning: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by the gospel, namely, the passive righteousness with which merciful God justifies us by faith, as it is written,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 Here I felt that I was altogether born again and had entered paradise itself through open gates. There a totally other face of the entire Scripture showed itself to me. Thereupon I ran through the Scripture from memory. I also fount in other terms an analogy, as, the work of God, that is what God does in us, the power of God, with which he makes us wise, the strenght of God, the salvation of God, the glory of God.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밤낮으로 묵상을 하는 중에, 이 말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이 나오는 그 맥락에 주의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곧 믿음으로 살게 되게 하는 그런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렇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의해서 나타나(곧 계시되어지)는 것인데, 곧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수동적 의이며, 그래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꺼번에 거듭나게 되고 활짝 열려진 문들을 통해서 천국 그 자체에 들어간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나에게 전체 성경의 전적으로 다른 얼굴이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구절 위에 그때까지 암송하고 있던 다른 성경구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또한 다른 용어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같은 용어들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의 비유를 발견하였다.

 

And I extolled my sweetest word with a love as great as the hatred with which I had before hated the word “righteousness of God.” Thus that place in Paul was for me truly the gate to paradise. Later I read Augustine’s The Spirit and the Letter, where contrary to hope I found that he, too, interpreted God’s righteousness in a similar way, as the righteousness with which God clothes us when he justifies us (Augustine passage included below). Although this was heretofore said imperfectly and he did not explain all things concerning imputation clearly, it nevertheless was pleasing that God’s righteousness with which we are justified was taught.

 

그리고 나는 이전에 그렇게도 증오하였던 단어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제는 가장 열정적인 사랑으로 나의 그 가장 달콤한 단어, “하나님의 의”를 극찬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 안에 있는 그 장소는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극락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다. 후에 나는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나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도 또한 하나님의 의를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게 해주실 때에 우리들에게 의로 옷입혀 주신다는 식으로 그도 해석하고 있었다. 비록 그 당시로서는 불완전하게 표현되어지고 또한 (의의) 전가에 관하여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하였다.

 

Selections from Augustine’s The Spirit and the Letter to which Luther Refers: 루터가 언급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로부터의 인용글

 

Chapter 15 [IX.] – The Righteousness of God Manifest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15장-율법과 선지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

 

Here, perhaps, it may be said by that presumption of man, which is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wishes to establish one of its own, that the apostle quite properly said,” For by the law shall no man be justified,”46 in as much as the law merely shows what one ought to do, and what one ought to guard against, in order that what the law thus points out may be accomplished by the will, and so man be justified, not indeed by the power of the law, but by his free determination.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해서 자신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단지 사람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 행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의 율법이다. 그래서 그 율법이 가르키는 것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게 한 그런 율법이다. 그래서 당연히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해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게 되는 그런 율법 말이다. But I ask your attention, O man, to what follows. “But now the righteousness of God,” says he, “without the law is manifested, being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47 Does this then sound a light thing in deaf ears? 하지만, 오,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이 그 다음에 곧 이어 말하는 것에 주목하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니라.” He say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 그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Now this righteousness they are ignorant of, who wish to establish one of their own; they will not submit themselves to it.48 His words are,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 he does not say, the righteousness of man, or the righteousness of his own will, but the “righteousness of God,” – not that whereby He is Himself righteous, but that with which He endows man when He justifies the ungodly. 지금 이 의에 대해서 무지해서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도의 말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한다. 인간의 의나 인간 자신의 의지의 의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를 인간에게 허락하셔서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하는 그런 의를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This is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in other words, the law and the prophets each afford it testimony.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를 받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율법과 선지자들이 각각 그것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The law, indeed, by issuing its commands and threats, and by justifying no man, sufficiently shows that it is by God’s gift, through the help of the Spirit, that a man is justified; and the prophets, because it was what they predicted that Christ at His coming accomplished. 물론, 율법은 그 명령과 위협을 선포함과 어떤 인간도 의롭게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였기 때문에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Accordingly he advances a step further, and adds, “But righteousness of God by faith of Jesus Christ,”49 that is by the faith wherewith one believes in Christ for just as there is not meant the faith with which Christ Himself believes, so also there is not meant the righteousness whereby God is Himself righteous. 따라서 바울 사도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이것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어떤 사람이 믿게 되는 그 믿음을 말한다. 그리스도 그 분께서 믿으시는 그런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의로우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의로우심을 의미하는 것도 또한 아니다. Both no doubt are ours, but yet they are called God’s, and Christ’s, because it is by their bounty that these gifts are bestowed upon us. 의심할 것도 없이 이 둘은 모두 우리들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선물들이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n is without the law, but not manifested without the law; for if it were manifested without the law, how could it be witnessed by the law?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율법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율법 없이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 율법에 의해서 어떻게 그 의가 증거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That righteousness of God, however, is without the law, which God by the Spirit of grace bestows on the believer without the help of the law, – that is, when not helped by the law.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성령에 의해서 율법의 도움 없이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곧 율법의 도움 없이도 주시는 것이다. When, indeed, He by the law discovers to a man his weakness, it is in order that by faith he may flee for refuge to His mercy, and be healed.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피난처를 삼도록 도피하게 되어 치료를 받게 되는 순서이다. And thus concerning His wisdom we are told, that “she carries law and mercy upon her tongue,”50 – the “law,” whereby she may convict the proud, the “mercy,” wherewith she may justify the humbled. 그래서 그 분의 지혜에 관하여 말하기를, “지혜가 율법과 자비를 그 입으로 전하느니라”고 한다. “율법”이라 함은 지혜가 그것으로 교만한 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며 “은혜”라 함은 그것으로 지혜가 겸비해 진 자들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n, “by faith of Jesus Christ, is unto all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for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51 – not of their own glory.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르게 되는데,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그들 자신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For what have they, which they have not received?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Now if they received it, why do they glory as if they had not received it?52 그것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마치 그들이 전혀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Well, then, they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 now observe what follows: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53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온가 주의해 보라. It is not, therefore, by the law, nor is it by their own will, that they are justified; but they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 not that it is wrought without our will; but our will is by the law shown to be weak, that grace may heal its infirmity; and that our healed will may fulfil the law, not by compact under the law, nor yet in the absence of law.그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들의 의지가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회복된 의지가 율법을 이루는 것이지, 율법 아래에서의 계약에서 의해서나 율법이 전혀 없는 채로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다.

 

Chapter 16 X.] – How the Law Wa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제 16장-어떻게 율법이 의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닌가?  

 

Because “for a righteous man the law was not made;”54 and yet “the law is good, if a man use it lawfully.”55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또한 “율법을 선하게 사용하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Now by connecting together these two seemingly contrary statements, the apostle warns and urges his reader to sift the question and solve it too.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 두 말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사도바울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면서 또한 그것에 답을 제공하고 있다. For how can it be that “the law is good, if a man use it lawfully,” if what follows is also true: “Knowing this, that the law i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56 만약 어떤 사람이 율법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면 그 율법은 선하다고 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 사실을 알면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참일 수 있단 말인가? For who but a righteous man lawfully uses the law? 의로운 사람 외에 어떤 사람이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Yet it is not for him that it is made, but for the unrighteous. 하지만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Must then the unrighteous man, in order that he may be justified, – that is, become a righteous man, – lawfully use the law, to lead him, as by the schoolmaster’s hand,57 to that grace by which alone he can fulfill what the law commands? 그러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곧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하여서 자신을, 마치 몽학선생의 손에 인도함을 받아 그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바로 그 사람 자신이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은혜에 이를 수 있어야만 된단 말인가? Now it is freely that he is justified thereby, – that is, on account of no antecedent merits of his own works; “otherwise grace is no more grace,”58 since it is bestowed on us, not because we have done good works, but that we may be able to do them, – in other words, not because we have fulfilled the law, but in order that we may be able to fulfill the law. 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값없이 되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의 이전의 어떤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선한 행위를 행하였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Now He said, “I am not come to destroy the law, but to fulfil it,”59 of whom it was sai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60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왔노라”고 하셨고 그 예수님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우리들이 그 영광을 보았는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This is the glory which is meant in the words,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61 and this the grace of which he speaks in the next verse,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62 바로 이 영광이 “우리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의 그 영광이며 은혜는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오는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말의 그 은혜이다. The unrighteous man therefore lawfully uses the law, that he may become righteous; but when he has become so, he must no longer use it as a chariot, for he has arrived at his journey’s end, – or rather (that I may employ the apostle’s own simile, which has been already mentioned) as a schoolmaster, seeing that he is now fully learned. 불의한 사람은 그러므로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의롭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그 율법을 전차수처럼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여행 종착지에 이미 도착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언급했던 사도바울의 비유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미 충분하게 성장한 몽학선생으로서 그 율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How then is the law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if it is necessary for the righteous man too, not that he may be brought as an unrighteous man to the grace that justifies, but that he may use it lawfully, now that he is righteous? 어떤 사람이 불의한 사람으로서 그를 의롭게 하는 은혜로 인도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제 의롭게 된 사람으로서 그것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Does not the case perhaps stand thus, – nay, not perhaps, but rather certainly, – that the man who is become righteous thus lawfully uses the law, when he applies it to alarm the unrighteous, so that whenever the disease of some unusual desire begins in them, too, to be augmented by the incentive of the law’s prohibition and an increased amount of transgression, they may in faith flee for refuge to the grace that justifies, and becoming delighted with the sweet pleasures of holiness, may escape the penalty of the law’s menacing letter through the spirit’s soothing gift? 의롭게 되어진 사람이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가 불의한 사람을 그 율법을 사용하여 경계함으로 어떤 비상한 욕망의 질병이 그들 속에서 금지하는 율법의 자극에 의하여 축적되고 또한 범죄의 양이 증가되어서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자신들을 의롭게 하는 은혜로 믿음을 갖고 도피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달콤한 즐거움을 주는 거룩함을 기뻐하게 되고 협박하는 율법의 문서가 요구하는 형벌로부터 도피하여 영의 달콤한 선물들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인 것이 아마도, 아니, 확실한 것이 아닐까? In this way the two statements will not be contrary, nor will they be repugnant to each other: even the righteous man may lawfully use a good law, and yet the law be not made for the righteous man; for it is not by the law that he becomes righteous, but by the law of faith, which led him to believe that no other resource was possible to his weakness for fulfilling the precepts which “the law of works”63 commanded, except to be assisted by the grace of God. 이런 방식으로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의로운 사람조차도 합당하게 선한 율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법, 곧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행위의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그 계명들을 성취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는 그 믿음에 의해서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 계명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어거스틴의 회심

어거스틴의 회심 간증

http://sdcmd.egloos.com/75491

성경에 기록된 회심사건 외에 교회사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회심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끼친 신학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회심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회심사건 또한 특별해서 우리들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의 회심을 특별한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 요소를 우리는 발견해 내면서 우리들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 것은 일종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그의 회심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그 고백록의 구조를 음미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회심과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의 자화상을 비춰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회심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을 번역해 올린다. 그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히 고백록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1장: 어린시절.

2장:청소년기

3장:카르타고 유학중의 방탕생활/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 마니교에 입교.

4장:수사학교사가 됨/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또한 미와 비율에 관한 책을 저술함.

5장:마니교에 실망하고 대신 신플라톤주의에 빠짐/밀란에서 수사학교사

6장:밀란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계속 듣게 됨.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해소해 감.

7장:악의 문제를 고민하는 중 신플라톤주의적 해결방식시도/사도바울의 글을 읽기 시작함

8장: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빅토리아누스의 회심과 이집트의 성자 안토니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밀란의 집 뒷뜰에서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는 중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폄. 그리고 회심.

9장: 세례받음. 아프리카로 돌아감. 어머니 모니카 죽음.

10장: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육체의 유혹에 저항하는 법 등에 대한 회상

11장-13장: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설명

 

그의 회심사건이 있었던 시점은, 그가 철학적 종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싯점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가 마니교의 이교적 사상에서 악의 기원과 같은 종교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 탐구하던 싯점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악의 기원 같은 주제는 실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밀란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싯점도 그의 회심의 싯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싯점이고, 계속적으로 교회당에 출석하던 때인데도 그는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고뇌 중에 있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과연 어느 싯점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규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기록한 뒤에 11장-13장에서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을 해석하고 있는가? 그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꼭 풀어보아야 할 과제이다.

 

이런 질문이 그의 회심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회심기록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번역해 본다(역자:
손성은).

 

이것 또한 좋은 묵상 자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자료출처: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aug-conv.html

 

Augustine: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Book Three

CHAPTER I

 

  1. I came to Carthage, where a caldron of unholy loves was seething and bubbling all around me. 나는 카르타고로 갔다. 그곳에서는 불결한 사랑의 가마솥이 펄펄 끓으면서 거품을 내 주변에 품어내고 있었다. I was not in love as yet, but I was in love with love; and, from a hidden hunger, I hated myself for not feeling more intensely a sense of hunger. 그렇다고 어느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한 굶주림 속에서 그 굶주림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I was looking for something to love, for I was in love with loving, and I hated security and a smooth way, free from snares.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Within me I had a dearth of that inner food which is thyself, my God–although that dearth caused me no hunger. 내 안에서 나는 영혼의 음식인 당신, 곧 나의 하나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결핍 때문에 굶주림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And I remained without any appetite for incorruptible food–not because I was already filled with it, but because the emptier I became the more I loathed it. 이미 그것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빈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그 불멸의 음식에 대하여 어떤 구미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Because of this my soul was unhealthy; and, full of sores, it exuded itself forth, itching to be scratched by scraping on the things of the senses. 이것 때문에 나의 영혼은 건강치 못하였다;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차서 온 몸에 근질거리는 그 무엇을 가려워 하면서 내 영혼은 스스로를 발산하고 있었다. Yet, had these things no soul, they would certainly
    not inspire our love. 하지만, 이런 감각들에 영혼이 없었다면 분명히 사랑을 전혀 고무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To love and to be loved was sweet to me, and all the more when I gained the enjoyment of the body of the person I loved.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달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육체의 즐거움을 탐닉하였다. Thus I polluted the spring of friendship with the filth of concupiscence and I dimmed its luster with the slime of lust. 그래서 참된 사랑의 우물을 불결한 정욕으로 더럽혔고 그 참된 사랑의 빛들을 거짓된 사랑의 악취들로 혼잡케 하였다. Yet, foul and unclean as I was, I still craved, in excessive vanity, to be thought elegant and urbane. 그렇게 나는 더럽고 불결하였음에도 여전히 엄청난 허영 가운데서 여전히 고결하고 세련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And I did fall precipitately into the love I was longing for.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도 찾고 있었던 그 사랑 속으로 급전직하 떨어졌던 것이다. My God, my mercy, with how much bitterness didst thou, out of thy infinite goodness, flavor that sweetness for me! 자비로우신 나의 하나님께서, 참으로 참으실 수 없는 비탄을 느끼시는 중에도, 당신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인하여, 그 달콤함을 나를 위하여 맛보게 하셨던 것이다! For I was not only beloved but also I secretly reached the climax of enjoyment; and yet I was joyfully bound with troublesome tics, so that I could be scourged with the burning iron rods of jealousy, suspicion, fear, anger, and strife. 왜냐하면 나는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그 즐거움의 최절정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움 중에 누리는 문제성 많은 발작들을 즐거워하면서, 질투와 의심, 두려움, 불안, 그리고 싸움의 뜨겁게 달구어진 벌건 쇳조각에 데어지기를 원하였던 것이다”EN-US” xml:lang=”EN-US”>.

 

CHAPTER IV

 

Among such as these, in that unstable period of my life, I studied the books of eloquence, for it was in eloquence that I was eager to be eminent, though from a reprehensible and vainglorious motive, and a delight in human vanity. 이런 일들 가운데서 나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들 속에서 수사학책들을 공부하였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헛된 허영이 그 깊은 동기였었지만 그 인간의 허영을 즐거워 하였던 셈이다. In the ordinary course of study I came upon a certain book of Cicero’s, whose language almost all admire, though not his heart. 공부하는 중에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키케로의 책은 비록 그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 표현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This particular book of his contains an exhortation to philosophy and was called Hortensius. 그 책에서 그는 호르텐시우스의 철학을
추천하였다. Now it was this book which quite definitely changed my whole attitude and turned my prayers toward thee, O Lord, and gave me new hope and new desires. 이제 아주 분명하게 나의 인생의 태도를 바꿔서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과 열망을 갖게 하였던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Suddenly every vain hope became worthless to me, and with an incredible warmth of heart I yearned for an immortality of wisdom and began now to arise that I might return to thee. 갑작스럽게 모든 헛된 소망들이 나에게 헛되게 여겨졌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지혜를 열망하면서 당신에게 돌아설 수 있기 시작했다. It was not to sharpen my tongue further that I made use of that book. I was now nineteen; my father had been dead two years, and my mother was providing the money for my study of rhetoric. 이 책을 이용하는 것은 나의 말솜씨를 다듬기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나의 나이는 19이었다.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고, 어머니께서 나의 수사학공부를 위해서 돈을 마련하셨다”EN-US”>. What won me in it [i.e., the Hortensius] was not its style but its substance. 호르텐시우스의 책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스타일이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1. How ardent was I then, my God, how ardent to fly from earthly things to thee! 그 때, 나의 하나님, 제가 얼마나 열심을 가졌었는지요, 얼마나 진심으로 지상적인 것에서 당신을 향하여 날아가고 싶어했는지요! Nor did I know how thou was even then dealing with me. 저는 그 당시에도 당신께서 저를 다루시고 계셨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For with thee is wisdom. 지혜는 당신께 있습니다. In Greek the love of wisdom is called “philosophy,” and it was with this
    love that that book inflamed me. 그리스어로 지혜의 사랑을 “철학”이라고 불렀는데, 그 책이 나에게 불붙여준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었다. There are some who seduce through philosophy, under a great, alluring, and honorable name, using it to color and adorn their own errors. 철학을 통해서 위대하고 매혹적이고 존경할 만한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의 오류를 감추고 오히려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And almost all who did this, in Cicero’s own time and earlier, are censored and pointed out in his book. 키케로가 살던 당시 그리고 그 이전에 이런 짓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책에서 비판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BOOK V

CHAPTER XIII

23.And to Milan I came, to Ambrose the bishop, famed through the whole world as one of the best of men, thy devoted servant. 나는 밀란으로 되돌아갔다. 주님의 헌신된 종이면서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밀란의 주교 암브로우시스에게로 되돌아 간 것이다. His eloquent discourse in those times abundantly provided thy people with the flour of thy wheat, the gladness of thy oil, and the sober intoxication of thy wine. 그의 유창한 설교는 그 당시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에게 속한 곡물의 먹을 것과 주의 기름의 유쾌함, 그리고 주의 포도주의 톡 쏘는 맛들을 풍성하게 제공해 주었다. To him I was led by thee without my knowledge, that by him I might be led to thee in full knowledge. 주께서는 나를 그에게로 나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로 주님께로 이제는 충분히 의식한 채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 That man of God received me as a father would, and welcomed my coming as a good bishop should. 그 하나님의 사람은 나를 마치 아빠가 자식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리고 훌륭한 목사라면 그렇게 해야할 것처럼 내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였다. And I began to love him, of course, not at the first as a teacher of the truth, for I had entirely despaired of finding that in thy Church–but as a friendly man.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진리의 교사로서가 아니라, 친절히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그러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nd I studiously listened to him–though not with the right motive–as he preached to the people. 그리고 그가 설교할 때에 옳은 동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열심으로 그에게 집중했다. “EN-US”>I was trying to discover whether his eloquence came up to his reputation, and whether it flowed fuller or thinner than others said it did. 나는 그의 유창함 때문에 그의 평판이 높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더 유창한지 아니면 아닌지 등등을 발견해 보려고 했다. And thus I hung on his words intently, but, as to his subject matter, I was only a careless and contemptuous listener. 그래서 그의 말에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주의하지 않았고 단지 얕잡아보면서 설교를 들었을 뿐이었다. I was delighted with the charm of his speech, which was more erudite, though less cheerful and soothing, than Faustus’ style. 그의 설교는 매력적이었고 학식이 풍부했지만, 파우스트의 스타일과 비교하면 유쾌한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As for subject matter, however, there could be no comparison, for the latter was wandering around in Manichean deceptions, while the former was teaching salvation most soundly.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하지만 주제에 관해서면, 비교할 만 하지가 않았다. 파우스트의 것은 마니교의 기만에 관한 것이었고 암브로시우스의 것은 구원에 관하여 가장 건전하게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But “salvation is far from the wicked,” such as I was then when I stood before him. Yet I was drawing nearer, gradually and unconsciously. 그렇지만, “구원은 사악한 자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앞에 서있었지만, 구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채로 그것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BOOK VIII

CHAPTER XII

  1. Now when deep reflection had drawn up out of the secret depths of my soul all my misery and had heaped it up before the sight of my heart, there arose a mighty storm, accompanied by a mighty rain of tears. 깊히 묵상하는 중에 내 영혼의 비밀스러운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나의 불행스러움이 생각나면서 내 마음의 눈 앞에 쌓아져 있는 것을 볼 때에,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광풍이 몰아치면서 나의 눈에서는 폭우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That I might give way fully to my tears and lamentations, I stole away from Alypius, for it seemed to me that solitude was more appropriate for the business of weeping. 나의 눈물과 애통함에 충분히 젖어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알피우스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있는 것이 울기만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I went far enough away that I could feel that even his presence was no restraint upon me. 나는 충분히 멀리 도망쳐서 심지어는 알피우스가 전혀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데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This was the way I felt at the time, and he realized it. 이러함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도 또한 그것을 느꼈었습니다. I suppose I had said something before I started up and he noticed that the sound of my voice was choked with weeping. 숨으려고 하기 전에 내가 무언가를 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때 내 목소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그는 느꼈었습니다. And so he stayed alone, where we had been sitting together, greatly astonished.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앞서 있었던 그곳에 혼자 머물러 있으면서 무척이나 당황했었다고 합니다. I flung myself down under a fig tree–how I know not–and gave free course to my tears. 나는 어떤 무화과나무 밑에 덜썩 주저 앉았습니다 – 어떻게 앉았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EN-US”>– 그리고는 마음껏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The streams of my eyes gushed out an acceptable sacrifice to thee. 눈물의 펑펑 쏟구쳐 나와서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And, not indeed in these words, but to this effect, I cried to thee. 그리고 실상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요지의 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And thou, O Lord, how long? How long, O Lord? Wilt thou be angry forever? Oh, remember not against us our former iniquities.” “오 주님,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더 오랫도록 참으시겠습니까? 주께서 저에게 영원토록 노하시겠나이까? 오, 저의 이전에 저질렀던 악행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For I felt that I was still enthralled by them.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런 악행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I sent up these sorrowful cries. 이런 슬픈 탄식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How long, how long? Tomorrow and tomorrow? Why not now? Why not this very hour make an end to my uncleanness?”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오랫도록? 내일 그리고 또 내일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왜 지금은 안되나요? 왜 지금 바로 이 시간 저의 이 불결함을 씻어주시지 않으십니까?”

 

  1. I was saying these things and weeping in the most bitter contrition of my heart,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가장 비통스러운 마음 속의 아픔 가운데에 통곡하고 있는 중에, when suddenly I heard the voice of a boy or a girl I know not which–coming from the neighboring house, chanting over and over again, 어디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바로 이웃집 담벽을 넘어서 어떤 남자아이인가 여자아이가 자꾸만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갑작스럽게 듣게 되었습니다. “Pick it up, read it; pick it up, read it.” [“tolle lege, tolle lege”] “집어 들어서 읽어, 집어 들어서 읽어.” Immediately I ceased weeping and began most earnestly to think whether it was usual for children in some kind of game to
    sing such a song, but I could not remember ever having heard the like. 곧 나는 울기를 멈추고는 가장 심각하게 이 말이 아이들이 놀이 중에 하는 그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소리를 이전에 들어보았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So, damming the torrent of my tears, I got to my feet, for I could not but think that this was a divine command to open the Bible and read the first passage I should light upon. 그래서 나는 쏟구쳐 나오는 눈물을 막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는 바로 성경을 열어서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For I had heard how Anthony, accidentally coming into church while the gospel was being read, received the admonition as if what was read had been addressed to him. 이전에 성자 안토니가 우연히 어떤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복음서가 읽혀지고 있었는데, 그 읽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선포되고 있는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Go and sell what you have and give it to the poor, and you sha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and follow me.”COLOR: red”>” 가서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는 천국에 보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와서 나를 따르라.” By such an oracle he was forthwith converted to thee. 이런 말씀을 따라서 그는 그것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So I quickly returned to the bench where Alypius was sitting, for there I had put down the apostle’s book when I had left there. 그래서 급하게 나는 알피우스가 앉아있는 벤치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곳에서 떠났을 때 사도의 책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I snatched it up, opened it, and in silence read the paragraph on which my eyes first fell 그것을 재빨리 집어 들고는 열어서 말없이 내 눈에 처음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Not in rioting and drunkenness, not in chambering and wantonness, not in strife and envying,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fulfill the lusts thereof.”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I wanted to read no further, nor did I need to.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For instantly, as the sentence ended, there was infused in my heart something like the light of full certainty and all the gloom of doubt vanished away. 왜냐하면 곧장, 그 문장이 끝나자마자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분명하게 확실한 빛이 주입 되어지면서 의심의 흑구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주: 중간중간에 ‘습니다’체와 ‘였다’체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자신의 회심을 기술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독백의 방식으로 취하면서도 간혹 자신을 객관화시키면서 서술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2016.10.16_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_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2016년 10월 16일 주일 설교
사도행전 02:37-42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양심을 일깨워서 구원의 필요성을 알려주실 때 바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양심이 찔리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2 청교도와 양심
청교도는 양심을 마음의 법정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라고 가르쳤습니다

3 양심에 방응하자
양심의 호소에 반응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양심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알려집니다

[결론] 양심을 통해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하자

창세기 2장

하나님은 아담과 고용 계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이런 일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계약’을 맺고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계약의 의미

‘계약’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제약이 생기는 것 같아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계약이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계약은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하게 해 주기 때문에 의견이 엇갈릴 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맡기시면서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담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를 알아보겠습니다. 그 근거는 호세아서에 있습니다.

호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말함으로써 아담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창세기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신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계약도 안하고 혹은 계약에도 없는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었지만, 공정한 계약서를 쓰고 그 한도 내에서 임무를 주셨습니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명확한 계약서를 쓰고 일을 시키는 것은 그가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봄봄’이라는 소설에서는 자기 딸을 주겠다는 불명확한 약속을 내세워서 무료 봉사하게 만드는 장인이 나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계약서가 없어서 제대로 된 항의조차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도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약이 왜 중요한 지 알아야 합니다. 계약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계약자의 인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계약은 강자의 횡포를 막고, 약자를 보호합니다. 따라서, 강자가 명확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약자의 피해를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명확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매우 고매하고 훌륭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둘째,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자기 마음대로 데려다가 키우지만 계약을 맺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으셨다면 계약을 맺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법적인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법적으로는 남남입니다. 즉,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따라서, 친구가 갑자기 떠나도 그를 붙들어 둘 수 없고, 그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약 관계라면 다릅니다. 합법적으로 붙들어두고 그의 삶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고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둘 수 있습니다. 또 운동 선수들도 구단과 계약이 끝나지 않으면 마음대로 다른 구단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계약은 하나님과 인간을 남남이 아닌 관계로 이끌었습니다.

 

계약의 의미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고용 계약의 내용은

  1. 권리 :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자기 재량대로  마음껏 행동할 수 있으나
  2. 의무 : 선악과는 먹으면 안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편의점에서 종업원에게 “편의점 물건을 마음껏 사용하되 금고 안에 돈은 훔치지말라”고 계약을 맺은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이 감히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강요하지 못하고 뱀으로 변신해서 유혹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담은 사단보다 능력있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호기심에 못이긴 아이가 부모님의 말씀을 어긴 것같은 유치한 행동이 아니라 고용 계약을 맺은 성인이 자기 행동의 결과를 알고도 약속을 어긴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자신이 ‘대리통치자’ 자리에서 해고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3장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대리통치자’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이제 실업자가 된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새로운 계약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는데 실패한 아담을 보면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예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아담의 모습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었지만 그 계약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계약을 성공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세기 1장

인간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made by GOD’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하신 일은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을 관리할 ‘관리인’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Made by GOD

그러나 세상의 ‘관리인’은 시키는 일만 단순하게 수행하는 ‘마당쇠’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비서’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복’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또, ‘관리인’은 영이신 하나님과 물질 세상을 역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과 물질이 혼합된 ‘중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세상의 관리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통치자’ 역할을 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이 세상의 ‘대리통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세상의 ‘대리통치자’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구절은 애초에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바로 그 임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오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신 것은 애초에 아담이 해야 할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은 아담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실패했고, 예수님이 다시 시작하셨으며, 우리가 예수님의 영과 함께 완성해야 할 일입니다.

 

아담을 대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담이 해야 했지만 실패한 일을 성공적으로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며 이 일을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2016.10.09_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3

2016년 10년 09월 주일 설교
사도행전 02: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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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한줄 요약]
예수님은 기독교 신앙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성령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베드로가 성령 세례/충만을 받은 후 한 설교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 신앙의 입구입니다
  2. 삼위일체 중 예수님의 역할
    초창기 교회의 핵심 이슈는 예수님의 위상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시다
  3.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

[결론]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

2016.10.02_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2

2016년 10년 02일 주일 설교
사도행전 02:14-42

설교 듣기

[핵심 구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한줄 요약]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연속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행전이다

[개요]
요한계시록만큼이나 오해가 많은 성경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을 복음서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복음서를 네 권이나 기록한 목적이 모호해 진다.

사도행전을 볼 때 주목해야 할 점 :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연속이다. 따라서

1.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다.

요한복음 14:16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2. 성령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과정이 필요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 자기 발견의 과정
갈라디아서 02:20, 고린도후서 05:17

3. 예수님의 인격과 지혜, 능력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