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Contents

개요

창세기 12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람 가문의 이야기가 기록된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어떻게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믿음을 갖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아브람을 통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지 알아보자.

먼저, 창세기 12장부터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창세기 1~11장까지는 한장에 수백년이 압축되었지만, 12장부터는 수년으로 바뀐다. 기존의 성경해석과 다르게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큰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아브람은 15:6에 의를 얻었다. 아브람은 12:1에서 15:6절 사이에 아브람은 어떤 상태인가?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브람이 의에 이른 믿음을 가진 건 15:6이다. 아브람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아보자.

요절 1. 창 12:1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 이야기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땅을 옮기는 것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알고지내던 사람들, 익숙해던 환경과 이별해야 한다. 아이들이 그런 이유로 이사하고 전학하는 걸 싫어한다. 또, 통치자가 달라지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경선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자유로웠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통치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세상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이사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것을 보이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아브람이 이사간 것이 그 예이다.

기존에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난 것이 큰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아브람은 큰 믿음을 가진 상태로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믿음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다. 근거는 창세기 15:6이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비로소 의에 도달한다.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은 다른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어설프게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모든게 다 이루어지는 줄로 이해한다. 믿음을 자기 확신, 자기 세뇌, 할수있다는 신념, 긍정적 사고방식 정도로 이해한다. 믿음을 생각의 힘을 발동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시작도 안한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기만하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있어야 한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문제의 근원이 ‘의’에 있다고 설명한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다운 걸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데, 인간답지 못하다. 인간다운 게 ‘의’니까 인간답지 못한 건 ‘불의’이다. 성경에서 ‘불의’는 ‘죄’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죄’를 ‘나쁜 짓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죄가 맞다. 성경에서는 ‘나쁜 짓하는 것’도 죄고,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부모가 부모답워야한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 있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그게 ‘의’이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의’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아무짓도 안하면 ‘죄’를 안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자식도 부모에게 당연히 해야할 도리가 있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부부로서, 친구로서, 직원으로서 등등 모든 분야에서 당연히 해야할 ‘의’가 있다. 하다못해 강아지에게도 지켜야 할 의가 있다. 강아지와 놀아주는 게 의이다. 안놀아주면 불의이다. 죄를 불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왜 지옥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살기 싫어질 때가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했을 때이다. 언제 상처받고 실망하냐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이다. 불의의 문제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근본문제가 된다. 불의가 인간 문제의 근본 문제라고 동의할 때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해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한 건 아는데 자기가 불의한 건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감각이 죽어 있다. 자기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시작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기독교 믿음을 시작조차 못했다. 기독교 밖에서 기웃거린다. 기독교 밖에 있는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믿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요절로 돌아오겠다. 아브람도 자기가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믿음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믿음 교육을 시작하신다.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 가보지 않았던 여행의 출발, 하나님의 인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큰 믿음의 결단이 아니라 작은 믿음 혹은 아주 가냘픈 기대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어쩌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시작하게 되는 상황에 서게 될 수도 있다. 실망하지 마시라. 그것도 충분히 믿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떠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요절 2. 창 12:8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앞에서는 무조건 피의 제사를 지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긴 기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시현상이다. 멀리서 보면 점선이 실선처럼 보인다. 철길도 중간중간 떨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연결되어 보인다. 피의 제사를 지낸다고 무조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내는 기간도 있다. 피의 제사를 계속 지내면 믿음으로 인도되는 시점이 있다.

본문 뒤에는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아브람의 실수 중 한가지가 아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엄선된 이야기이다. 아브람이 자기의 불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아브람 뿐만 아니라 성경의 위인이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의 예가 극적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이스라엘 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지쳐서 결국에는 블레셋에게 망명한다. 불의를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망신을 주려고 불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사무엘상 27:1-2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불의가 드러나야 한다면 의롭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 그런 사람은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의를 위해 핍박받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 의를 추구할 때 역설적으로 불의한 자신을 보게 된다. 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을 찾을 수조차 없다.

그 예를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날 교회는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일제를 찬양하고, 독재 시대에 독재 정권에 아부했다. 그 결과 교회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통하고 있을 때, 안좋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쓴다. 의를 추구하지 않을 결과 불의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단순히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믿음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의를 추구해야 믿음에 다가서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는 이유이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믿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정리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갈 때 믿음이 크고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믿음은 방향성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큰 믿음이 있으면 좋겠지만, 크기보다 중요한 게 방향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 그것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이 안내자를 따라갈 때 홀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적용

예배에 안 빠지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나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가정이 불화하고 직장에서 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교회에 최적화되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몸만 피곤할 뿐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실제적인 것이 다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는 반드시 실제적이다. 당신이 교회에 최적화되었을 뿐 진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기 바란다. 그것이 아브람이 간 길이다.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의를 추구하기 바란다. 누구 덕 볼 생각하지 말고, 옳은 행동을 하기 바란다. 교회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분노하신다. 세상보다 못한 윤리의식을 가진 교회가 교회일 수 없다. 비교인보다 불의한 교인이 교인일 수 없다. 정신차리자.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