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0_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9년 03월 10년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4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같은 예루살렘의 주류 종교인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적극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을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으로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진실한 삶 때문에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받은 존경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평판과 명성 혹은 직책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했기 때문에 얻어진 밑으로부터의 존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례 요한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이 든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혼란에 빠졌을까요? 이유는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면 바로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을 심판하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3:7~12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 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의 뜨거운 열정과 불같은 성격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빨리 심판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면 엄청난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군사적인 메시아,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당연히 로마군대를 패퇴시키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후에 타락한 제사장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패퇴시키기는 커녕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한가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이 많습니다.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메시아의 초리시 사역과 재림시 사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처음 오셨을 때는 구원을 가져오시고, 두번째 오실 때는 심판을 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성경을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만, 편견을 가지고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5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는,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행할 사역을 정확하게 예언했고 그 일을 예수님은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신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맞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변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엉뚱한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변호입니다. 한때 세례 요한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성급한 비난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는 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칭송하던 말이 가시돋힌 비난으로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기억해 주십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던 시절의 세례 요한을 추억하신 것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거부했고, 왕궁이 아니라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인생을 남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해서 변명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위해서 변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최후에 변론해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을 알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한 일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헤롯을 추종하거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헤롯을 메시아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가 대립할 때 외교적인 감각을 가지고 로마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인 힘을 추종하던 사람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찬 가르침을 가르쳤지만, 엄격해 보이는 모습이 호감을 주었습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세례 요한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의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라는 개인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 실패했다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갖는 이유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를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례 요한을 붙드는 굳건한 근거입니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용서받고 스스로 구원 받는 셀프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물론,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주의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탄원이고 요청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에 근거합니다.

R.C. 스프롤도 구원의 확신이 유익하지만, 구원의 확신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동시에, 넓은 의미의 구원, 즉, 그 전후의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후쿠마의 가르침은 저의 오랜 의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처럼 위선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지만 거룩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강조하지만 셀프 구원이라는 인본주의를 강화할 뿐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면서 입에 거짓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류 종교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또한 불의한 자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의를 추구함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헌신과 그들이 변심할지라도 그들의 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언제나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께 매혹되는 것이고 매료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8.12.25_[성탄절] 거룩한 낭비

2018.12.25 성탄절

본문

마태복음 01:21~23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현대인의 두려움 – 낭비

성탄절하면 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 박사에 관한 말씀도 그렇고, 누가복음에서 밤새 양떼를 지킨 목자들도 그렇고 둘다 별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64억 km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그 사진에는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주에 지구만 있다면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낭비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마음 먹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낭비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랜드 사목을 할 때, 이랜드에서 강조한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줄임말로 ‘인, 지, 낭’이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 낭비제거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중에서 세번째 낭비제거가 나머지 두가지에 비해서 한단계 격이 낮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거창한 것 같은데, 낭비제거는 좀 쪼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낭비제거를 위해서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작은 낭비에는 신경을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기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조금만 낭비를 제거해도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낭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무언가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낭비의 역설

낭비를 반대하지만, 낭비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낭비하지 않느려고 하면 더 낭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이 있었습니다. 깜깜해서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고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헤드랜턴을 잃어버리고도 하나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답니다. 2인 1조로 일했으면 컨테이어 벨트를 비상멈춤 해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해 줄 사람이 없었서 숨졌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회사 경영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절감 목표를 정해주면, 그 목표 안에서 낭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다보면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낄 건 안아끼고 아끼지 않아야 될 건 아끼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헤드랜턴이나 2인 1조 작업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만 작업이 멈춰도 헤드랜턴이나 인건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려다 더 낭비하게 된 셈입니다.

낭비에 관한 또하나의 역설은 낭비인 줄 알았는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 에펠탑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에펠탑은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높이 324m로 81층에 해당합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 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낭비의 상징이었던 에펠탑은 파리의 자존심으로 변했고, 매년 수 백만 명이 방문하는 유료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에펠탑 뿐만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이익이 된 예는 많습니다. 고기집 종업원이 주인이 미워서 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손님들에게 고기를 막 퍼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커녕 장사가 더 잘됐답니다.

낭비와 사랑

그래도 낭비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를 막으려다가 더 큰 낭비가 생길 수 있고, 낭비가 이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 앞에서 낭비가 일어나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확실한 이득을 근거로 낭비를 합리화하지 말라, 낭비는 나쁘고 말합니다.

그런데, 낭비에 관한 특히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자고 할 때는 한 단어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즉, ‘낭비하지 말자’는 말 앞에 ‘나말고’가 숨어있습니다. 남의 낭비에 관해서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낭비에 관해서는 관대합니다. 원가 절감, 낭비 제거를 강조하는 경영자도 양복을 수 백만원 , 시계도 수천 만원, 자동차는 수 억원 짜리를 구입합니다.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낭비가 분명합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자기는 낭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남이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나는 낭비하고 싶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낭비의 결과입니다. 어렸을 때 평상에 누워서 별을 본 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은 일, 이른 새벽에 산책한 일, 가족들과 중국 여행 가서 거리를 걸었던 일,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일, 성탄절에 마트에서 아이들 선물을 샀던 일 등.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비생산적인 일 투성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낭비의 기억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인생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어느 해변에서 저녁 노을을 감상하던 순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 일,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 예정에 없이 1박 2일로 미지의 장소로 짧은 여행을 간 일 등을 꼽았다. 결혼이나 사업 성공, 자녀의 성취, 혹은 유럽 일주 여행 같은 큰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에 새겨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생산적인 일, 혹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 다시 말해서 낭비에 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낭비한 일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기꺼이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는 낭비를 허락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지출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도 담배는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지출입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당연한 지출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지만, 스스로는 낭비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 가족, 자녀에게 낭비합니다.

낭비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대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낭비

하나님은 왜 광대한 우주 공간을 낭비하면서 수 많은 별을만드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기에는 그 불합리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정도 공간 낭비는 기꺼이 감사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큽니다. 옛 사람들은 별이 천장에 보석을 매달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스케일이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우주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찬란한 별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보다 더 큰 낭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당은 얼마일까요? 무한대입니다. 현재 인간 중에서 일당이 가장 높은 사람은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입니다. 일당이 무려 2억 5천만원이랍니다. 한 번 축구를 할 때마다 2억 5천만원을 받는 축구선수가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낭비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무한대에 비하면 0에 수렴합니다.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이라는 말입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고의 낭비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고의 낭비가 일어난 날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그 가치를, 그 능력을 한 인격 안에 제한하셨습니다. 즉, 낭비하셨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감행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은 잡아가둔다는 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 할까요? 수억원, 수백 억, 수천 억 아니요, 무한대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하면 지구와 우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지혜를 왜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십니까? 왜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렇게 낭비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다른 데 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 제 아이들을 보면,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우주와 과학을 생각하면 신앙이 약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들어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직행통로입니다. 신자는 내 안에 계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확고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명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입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어쨌든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구절을 택해서 거룩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낭비는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무한한 낭비를 감행하신 성탄절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를 살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배도 낭비일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낭비를 알기에 이 자리게 왔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것입니다. 낭비를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실천해 봅시다.

2018.05.20_항상 함께 있으리라

본문

마태복음 28:16~20 / 2018년 05월 20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작은 예수로 만들어가십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작은 예수를 만드는 성령님

어제 영국 해리 왕자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오랜만에 있었던 국가 행사였기 때문에 떠들썩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이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신부 때문입니다. 신부가 매건 마클이라는 영화 배우입니다. 톱 배우는 아니고 나름 유명한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나와서 이름을 알린 정도의 배우입니다. 독특한 점은, 피부색이 검습니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데 흑인쪽에 가깝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해리 왕자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37살이고, 결혼한 경력이 있는 이혼녀입니다.

사회운동과 자원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해리 왕자와 매건을 연결한 것은 자원봉사 활동으로 알려졌습니다. 매건은 월드비전 캐나다(World Vision Canada)의 국제홍보대사로 활동했으며 르완다에서 조직의 깨끗한 물 운동(Clean Water Campaign) 홍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사고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여성이 왕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우리가 해리 왕자보다 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도 생각합니다.

매건 마클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여성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왕자와 결혼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신자를 신부로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각을 잘못 추측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시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모두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주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의 심판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주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많은 물소리 같고, 백마를 타셨습니다.

(계 19:15~16)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러나 예수님은 초림때는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과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걸 ‘구원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을 섬기니까 전도할 때 “니네들 까불지마라”라는 생각으로 전도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에 하신 것처럼 겸손하게 전도해야 합니다.

2. 우리를 보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호화로운 궁전에 살게 하지 않고 거친 광야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기다리고 사모했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마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사도 바울도 비슷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과 대조적으로 자기 삶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11:23~27)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예수님은 우리를 광야로 보냅니다. 우리를 보내신 목적은 우리 자신과 세상 둘을 모두 변화시키려는 목적입니다. 소금이 스스로 녹아야 물을 짜게 합니다. 등불이 스스로 타올라야 세상을 밝힙니다. 자기 희생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광야로 안가는 게 더 유리합니다. 그러나 부귀영화보다 예수님의 인정과 평가를 원한다면, 광야로 가야 합니다.

(11:7~9)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3. 함께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때로는 몇 천원이 없어서 커피를 먹고 싶어도 못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띠링하고 알람이 울립니다. 아는 분이 개인적으로 2만원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감사기도 드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비참한 삶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함께 하는 행복한 삶입니다.

많은 돈을 펑펑 쓰면서 사는 분도 계시겠지만,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한 것이 행복이고, 부요한 것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때 마음이 부요해져서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지옥 같았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못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삶이 좋은데 이런 삶이 싫은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00. 작은 예수가 되자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지만 우리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를 작은 예수로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는 예수님을 따라 삽시다.

2018.03.11_요나의 표적이 주는 교훈

본문

마태복음 12:38~45, 요나 3:5 / 2018년 03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3: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한줄 요약

요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알려줍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간에는 요나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표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오토’, 헬라어로는 ‘세메이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에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적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일’을 의미합니다. 표적은 ‘기적’을 포함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표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첫째,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기적, 은사, 능력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병이 치료되거나 귀신이 쫒겨나는 것, 성령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둘째, 기도 응답입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라도 기도 응답이 표적이 됩니다.셋째, 시대의 표적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본문하고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표적입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그 표적을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0. 병원갈까, 기도할까?

요즘도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병원가고 기도하십시오. 병원간다고해서 믿음 없는 것이 아니고 병원 안간다고 믿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이유는 병원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기도로 대표되는 신앙이 서로 반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과 신앙이 반대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과 상식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도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기적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들어가 있다가 살아난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설명하면,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무조건 믿어라”라고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하는지도 설명합니다. 이런 배경을 설명한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한 후에 그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성경이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부활이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믿을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 안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런 분께는 죄송한데, 그게 믿는게 아닙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는 거고 믿고 싶은 거일 뿐입니다. 그런 자세는 좋지만, 다 됐다고 생각하는 건 큰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을 진심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편견 없이 보니까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라는 공식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믿음 없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믿음을 갖도록 차근차근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잘 따라오지 못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엇나갔는지 아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1. 38~40절.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서 몇 사람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말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진짜 큰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주셨냐면,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건 표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한 이유는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돼!’라고 근거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적을 보여주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부활의 표적에 대해서 예고하고 다른 표적은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표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표적 알아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주셔도 알아채지 못했느냐면,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면 안돼! 하나님도 기적을 일어키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잘못된 거야!”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가진 안식일과 같은 편견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선한 양심에 귀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선한 양심과 어긋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현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난 없는 형통, 희생 없는 영광, 거룩 없는 성령, 섬김 없는 은사가 바로 번영주의입니다.

기도만 많이하면 형통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누리려고만 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데 말과 행동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합니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물의를 일으킨 목회자가 건재하는 이유는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판적으로 교회에 다니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 41~42절. 요나의 기적이 알려주는 의미

예수님이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이 이상의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살던 시대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믿지 못한다면 설명이 무의미합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더 잘 볼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이나 남방 여왕 처럼요.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교회 안 다니는 사람한테 “이 교회하고 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때 보이세요?”하고 물어보면 어느 정도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 많이하고 봉사도 열심히해서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 그 교회 사람들 엄청 이기적이예요”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도도 봉사도 잘 못해서 힘 없이 다니는데, “그 교회 사람들 순수하고 겸손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새 카톡으로 구국기도회니 하는데 참여하라는 문자가 가끔 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그걸 주도하는 분들 얼굴이나 말투를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애들한테 “얘들아, 이 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은 것 같니?”라고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생각해 봅니다.

분노와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대답을 내 놓을까요? 아이들은 존경스럽다고 할까요?

다들 소신과 근거를 가지고 나름대로 믿음으로 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소신과 근거, 믿음이 어디에선가 오염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채려면 자기 마음의 오염을 제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광기가 아니라 겸손과 평안 가운데 해야 합니다..

3. 43~45절. 나중에 전보다 심해진다

표적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없으면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내가 선택하는 길이 곧 내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면 잘못된 길을 가게되고 잘못된 길을 가면 마음이 더 잘못됩니다. 악순환에 빠집니다.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걸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걸음은 단지 한걸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걸음 이후에 걸을 수 많은 걸음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첫생각이 중요합니다. 정직과 거짓의 갈림길에서, 공의와 불의의 갈림길에서, 고난과 번영의 갈림길에서 첫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옳은 길을 선택하면 힘들고 고생할 것 같지만 고난 중 형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선순환에 들어섭니다. 반대로 옳지 않은 길을 선택하면 번영할 것 같지만 환난에 빠집니다. 예수님과 멀어지고 악순환에 빠집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우리를 힘든 길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정직, 공의, 희생은 상대적으로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옳을 길을 가면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 끝에 예수님이 활짝 웃으며 여러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켜는 일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선한 양심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우면 어리석음이 떠나갑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아는 빛나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웁시다.

결론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부활이 믿기 어렵지만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 내면이 정결해 져야 합니다. 표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편견과 분노, 광기에서 벗어나 평안과 확신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밝은 빛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인격을 묵상하십시오. 언제든지 그것이 최우선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지켜질 것입니다.

2018.02.25_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13:10~17

2018년 02월 2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한줄 요약]

복음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드러냅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두번째 주간에는 이사야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 비싼 선물이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간절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사순절 묵상을 하고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이유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면에서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항상 문 앞까지만 가도 “어서 오십시오”하던 식당이 어느날 갑자기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분위기로 바뀐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복음은 쉽다, 믿음은 단순하다, 구원은 공짜다”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듣는데, 반대의 말씀도 성경에는 많습니다. “복음은 어렵다, 믿음은 복잡하다, 구원은 비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 정확하게 의미를 알고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악하게 살다가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아무하고나 결혼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면서요? 왜 사람 차별합니까?”라고 반발한다면 그 반발하는 사람이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닙니까? 평등하다는 말이 동등한 결혼 상대자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결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아무나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합당한 조건을 갖추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악하게 살다가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구원는 손쉽게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의 결혼하는 것은 원하기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속된 말로 ‘구원은 싸구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주보를 보십시오. 두란노에서 나온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라는 책에서 스캔한 그림입니다. 제가 주보에 싣고 있는 것도 이 책입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싸구려 물건은 받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너무 값진 물건은 아무나 주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줄 사람을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1. 10~12.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예수님이 비유로 진리를 가르치신 이유는 재미를 위한 목적도 있고, 보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보는 것에 빗대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미 설교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복음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비유는 잘 생각하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싫어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간절하지 않은 사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설명을 낯설어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려고 하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최대한 쉽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셨을 거야. 어렵게 생각 안해도 네네만 계속하면 구원받을 수 있게 말씀하시는 분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전화로 보험 가입할 때, 형식적으로 설명을 듣고 ‘네, 네’만 해주면 큰 문제 없이 보험에 가입되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되었습니다. 다른 본문을 볼 것 없이 오늘 본문을 보면 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복음을 믿겠다고 하면 구원을 주시는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네, 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참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2. 13~15. 보아도 보지 못하게(반어법)

우리가 두 번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싸구려’처럼 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진정한 의미를 숨기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복음에 대해서 잘 아는데요?”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질문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드린다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죄에 대한 각성을 체험하셨습니까?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조금의 변명도 없이 인정하십니까?”

제가 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즉,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은 하나님이다” 정도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도 대단하지만 그 하나님과 확실하게 연결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성경 속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개성과 인격을 가진 실체로서 영혼에 확실하게 조명됩니다. 그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해 주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히 유신론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압니다.

3. 16~17. 너희는 복이 있다

반대로 복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똑똑하지 않고 재산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간절함과 열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시면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예수님께 알려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합니다. 그들은 실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감싸주셨습니다. 끝까지 그들을 붙드셨고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왜 그들에게는 복이 있었을까요? 복음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불한 댓가가 구원을 받기에 턱 없이 부족했지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정도가 되지 못했지만 구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등가 교환이 아닙니다. 즉, 산 게 아닙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비싼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해도 구원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홀연히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습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하려고 하는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도 구원을 살 수는 없지만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3:7~14]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결론]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비싼 선물입니다. 주면 받고 안주면 말겠다는 태도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자, 즉,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비싼 선물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비싼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댓가를 치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를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을 두려움 없이 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2017.08.06_성령님은 누구신가? 3

2017년 08월 06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03:16~04:11

설교 듣기

오늘은 구체적으로 성령님은 우리 인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듬으시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는 분입니다.

‘고난 중 형통’을 통해서 다듬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 밀어넣으시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동일한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 가게 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 4: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능력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지혜와 성렴님의 인도에 대한 확신으로 시험을 극복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자들이 신앙 고백 이후에 고난을 통해서 무능력을 경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예수님께서 이미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능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믿음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곳은 고난의 장소이고 낮아짐의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능력이 아니라 바른 믿음과 바른 인격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수 천명을 회개하게 한 것에 열광합니다. 바울이 일으킨 기적에 흥분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난은 성령님께서 신자를 인도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에게 고난 중 형통을 주는 분이십니다.

본문 4장 3절에서 10까지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멋지게 대답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14장에서 알아본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대답할 말을 생각하게 하시는 분,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에게 지혜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만 주시지 않고 고난 중에 형통도 주십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부분인데, 성령님은 고난을 벗어나게 하지는 않시고 고난 속에서 형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힘들어 지칠 때면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물이 없어서 힘들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시고요. 왜 병주고 약주고를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너무나 힘들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사실을 고난을 겪는다면 우리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번영주의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형통이 아니라 고난이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나서 고난 중 형통을 주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고난을 주시지만 동시에 고난 중 형통도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 중에 있다면 고난 중 형통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는 점입니다. 일상의 고난 중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그 원망하지 말고, 고난을 넉넉하게 감당할 능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다시 구약 성경 민수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했습니까? 그들의 광야 생활은 단지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장차 있을 가나안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노예로 수 백년을 살아온 민족에 전쟁을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제식 훈련을 하셨습니다.

마치 다윗이 양을 지키면서 돌팔매질 연습을 한 것이 나중에 골리앗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골리앗을 충분히 이길 능력을 훈련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훈련하고 성장시키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고 동시에 고난 중 형통을 주십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그 고난 속에서 형통을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본문 4:11에서 천사들이 와서 수종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주시는 영광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진정한 영광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영광은 진정한 영광 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하늘 나라에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면 하늘 나라에서 참된 영광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발견한 한 구절이 제 가슴에 깊은 인상으 남겼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무형한 사람이 많고, 이 땅에서 무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내면과 외면이 모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우리를 힘들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18에서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롬 8:17~18)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얻기를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바르게 아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7.04.16_부활, 죽음의 죽음

부활, 죽음의 죽음
마태복음 28:01~10

2017년 04월 16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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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개요]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한 인생의 비극을 끝내는 ‘죽음의 죽음’ 입니다.

  1. 부활은 초자연적인 사건이라서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역사적 논리적으로 볼 때 증거가 많습니다.
  2. 인생의 모든 슬픔과 비극이 회복할 수 있지만 죽음이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또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죽음이 죽은’ 사건입니다.

[결론] 부활은 모든 슬픔과 비극을 끝내는 참된 소망입니다.

2017.04.09_[사순절] 영원한 사랑의 언약

마태복음 26:17~26
[사순절] 영원한 사랑의 언약

2017년 04월 0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언약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도입니다. 예수님의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1.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언약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슈퍼갑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2. 언약은 인격적인 관계의 시작이고, 아름다운 관계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3. 예수님의 언약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영원한 언약에 들어갑시다.

2017.03.26_[사순절] 겸손과 평화의 왕

[사순절] 겸손과 평화의 왕
마태복음 21:01-11

2017년 03월 26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써, ‘겸손과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1. 공직자의 행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과 평화'를 의미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도 ‘겸손과 평화'로 세상을 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겸손과 평화'는 진정으로 용기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2017.03.19_[사순절]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사순절]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마태복음 16:21~28

2017년 03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개요]
복음은 단순히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1. 얕게 아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2. 복음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3. 유사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
4.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복음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결론] 복음이 무엇인지는 삶으로 깨달아야 한다

2017.03.12_[사순절] 내 마음을 살피자!

[사순절] 내 마음을 살피자!
마태복음 13:01-09

2017년 03월 12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개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지만,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도 중요합니다.

1.‘길 가’같은 마음 – 유물론, 세속적 사고

2.‘돌밭’같은 마음 – 환난에 넘어짐. 진리에 대한 고민 없음.

3.‘가시덤불’같은 마음 – 돈과 세상 유혹, 번영주의

4.‘좋은 밭'같은 마음 – 말씀에 대한 진실한 마음

[결론] 내 마음을 살펴서 나쁜 것을 골라내자!

2017.01.01_[신년] 지극히 값진 보물

2017년 01월 01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13:44-50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6)

[한줄 요약]
좋은 것을 간직하고 덜 좋은 것을 버리는 과정에서 우리 삶이 정돈되고 성장합니다.

[개요]
1. 신년은 우리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기 좋은 시기입니다.
2. 올해의 키워드는 <정리>
정리가 필요한 이유: 물건이 많을수록 에너지 축소
정리하는 하는 마음가짐: 소수의 좋은 것만 남겨두기
3.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물건을 버리는 것은 두려움을 버리는 것 – 캐런 킹스턴
추억은 간직하고 물건은 버리는 것이 성장의 과정 – 낸시 도허티
4. 가장 값진 것을 추구하고, 덜 좋은 것은 버리자

[결론] 가장 값진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016.12.25_[성탄절] 보이는 선물, 보이지 않는 믿음

마태복음 02:01-12
[성탄절] 보이는 선물, 보이지 않는 믿음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한줄 요약]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원리는 믿음을 가지려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개요]
1. 성탄을 축하하러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2. 먼 곳에서 성탄을 축하하러 찾아 온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성탄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왜 그럴까요?
3. 동방 박사들이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남들이 축하하지 않는 상황에서 축하했기 때문에
값진 선물을 드리고 돌아갔기 때문에
4. 준 사람은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을 받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드릴 때마다 받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의 크리스마스 선물, 예수 그리스도.

2016.08.28_절망이 주는 소망

2016년 08월 28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26:69-7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한줄 요약]
절망은 자기 한계를 깨닫는 것인데, 그때 예수님을 발견하고 소망을 갖는 계기가 된다.

[개요]

  1. 이 말씀이 전해진 상황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혀간 상황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감
  2. 예수님의 제자훈련
    베드로는 예수님 제자훈련의 모델
    베드로가 자기 한계를 느끼고 절망한 것은 제자훈련의 필수 과정
  3. 영적 도약의 조건
    자기 한계를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소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결론] 절망할 때 예수님의 인격을 묵상하자

2016.08.20_때가 있다

2016년 08월 20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26:36-46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마 26:45)

[한줄 요약]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시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기 직전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상황
  2. 일상이 주는 공포
    끝없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
  3. 때가 있다
    계절에 맞게 생활하고 마음 가짐을 준비하자
    예수님이 우리의 시련의 계절에 도와주신다

[결론] 예수님은 능력과 인격을 갖춘 분이다

2016.08.14_복음 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

2016년 08월 14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24:1-14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한줄 요약]
외형적은 것으로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형적인 것을 계속적으로 무너뜨리십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전을 지나가시던 때
    제자들은 성전에 압도되었으나 예수님은 본질을 보심
  2. 외형과 본질
    외형이 믿음으로 가는 길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형이 본질이 없음을 감추기도 합니다
  3. 성전을 무너뜨리시는 이유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인격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를 제거하십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이 곧 믿음이다

2016.08.07_그대, 그리스도와 함께 누구이고, 그리스도 없이 누구인가?

2016년 08월 07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19: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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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한줄 요약]
종교 생활을 잘 하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상황
    율법을 잘 지키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옴
  2. 율법과 복음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파이다고고스)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머물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3. 믿음으로 충분
    믿음에 대한 매우 큰 오해가 ‘예수님께 미치고 싶다’는 말
    믿음은 최고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신비를 동반합니다

[결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다

2016.07.31_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6년 07월 31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 11:7)

[한줄 요약]
세례 요한은 마지막에 흔들렸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상황
    예수님의 사역에 의문을 품고 질문함
  2. 요한이 바라던 그리스도
    종말론적 심판을 내리시는 분으로 착각했습니다
    로마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해방해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3.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
    초림과 재림을 혼동하는 오해를 풀어주셨습니다
    요한을 두둔하고 변호해 주셨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을 알자

2015.12.25_가장 아름다운 예배

마태복음 02:01-12
“가장 아름다운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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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1-12)

[한줄 요약]
먼 길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지만, 믿음을 확인하고 아름다운 예배를 드렸다는 추억을 안고 돌아갔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방문
    아무런 보상 없이 돌아감
  2. 감동과 아쉬움
    먼 길에서 믿음을 따라 찾아 온 수고에 대한 감동
    물질적인 보상이 없는 아쉬움
  3. 무엇을 얻었는가?
    물질적인 것을 잃었지만, 비물질적인 것을 얻음
    물질적인 것은 소유할 수 없고, 비물질적인 것만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음

[결론] 가장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자.

20150329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7-30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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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요약]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로 새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중심 구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개요]

  1. 최후의 만찬

예수님의 탁월한 교육 방법

식사를 통한 비유

  1. 십자가의 의미

대속 제물이 되심

새언약을 세우심

  1. 새언약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

[결론] 예수님 안에서 새언약의 주인공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