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9년 03월 10년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4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같은 예루살렘의 주류 종교인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적극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을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으로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진실한 삶 때문에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받은 존경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평판과 명성 혹은 직책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했기 때문에 얻어진 밑으로부터의 존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례 요한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이 든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혼란에 빠졌을까요? 이유는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면 바로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을 심판하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3:7~12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 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의 뜨거운 열정과 불같은 성격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빨리 심판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면 엄청난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군사적인 메시아,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당연히 로마군대를 패퇴시키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후에 타락한 제사장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패퇴시키기는 커녕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한가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이 많습니다.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메시아의 초리시 사역과 재림시 사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처음 오셨을 때는 구원을 가져오시고, 두번째 오실 때는 심판을 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성경을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만, 편견을 가지고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5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는,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행할 사역을 정확하게 예언했고 그 일을 예수님은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신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맞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변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엉뚱한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변호입니다. 한때 세례 요한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성급한 비난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는 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칭송하던 말이 가시돋힌 비난으로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기억해 주십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던 시절의 세례 요한을 추억하신 것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거부했고, 왕궁이 아니라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인생을 남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해서 변명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위해서 변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최후에 변론해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을 알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한 일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헤롯을 추종하거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헤롯을 메시아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가 대립할 때 외교적인 감각을 가지고 로마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인 힘을 추종하던 사람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찬 가르침을 가르쳤지만, 엄격해 보이는 모습이 호감을 주었습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세례 요한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의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라는 개인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 실패했다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갖는 이유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를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례 요한을 붙드는 굳건한 근거입니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용서받고 스스로 구원 받는 셀프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물론,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주의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탄원이고 요청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에 근거합니다.

R.C. 스프롤도 구원의 확신이 유익하지만, 구원의 확신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동시에, 넓은 의미의 구원, 즉, 그 전후의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후쿠마의 가르침은 저의 오랜 의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처럼 위선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지만 거룩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강조하지만 셀프 구원이라는 인본주의를 강화할 뿐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면서 입에 거짓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류 종교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또한 불의한 자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의를 추구함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헌신과 그들이 변심할지라도 그들의 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언제나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께 매혹되는 것이고 매료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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