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질문 24가지

이병철 회장이 타계 직전 정의채 신부에게 보낸 24가지 질문들을 소개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평생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삶에 대한 여러 평가와 논란이 있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신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고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참고: 이 질문들에 대해 신부, 철학자가 대답을 하는 형식의 책이 2권 있습니다. 각각 ‘잊혀진 질문’,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입니다.)

1. 神(하느님)의 存在를 어떻게 證明할 수 있나? 神은 왜 자신의 存在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2. 神은 宇宙萬物의 創造主라는데 무엇으로 證明할 수 있나?

3. 生物學者들은 人間도 오랜 進化過程의 産物이라고 하는데 神의 人間 創造와 어떻게 다른가? 人間이나 生物도 進化의 産物 아닌가?

4. 언젠가 生命의 合成, 無病長壽의 時代도 可能할 것 같다. 이처럼 科學이 끝없이 發達하면 神의 存在도 否認되는 것이 아닌가?

5. 神은 人間을 사랑했다면 왜 苦痛과 不幸과 죽음을 주었는가?

6. 神은 왜 惡人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罪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罪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罪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8. 聖經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證明할 수 있나?

9. 宗敎란 무엇인가? 왜 人間에게 必要한가?

10. 靈魂이란 무엇인가?

11. 宗敎의 種類와 特徵은 무엇인가?

12. 天主敎를 믿지 않고는 天國에 갈 수 없는가? 無宗敎人, 無神論者, 他宗敎人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宗敎의 目的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天主敎만 第一이고 다른 宗敎는 異端視하는가?

14. 人間이 죽은 후에 靈魂은 죽지않고 天國이나 地獄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5. 信仰이 없어도 富貴를 누리고 惡人 중에도 富貴와 安樂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神의 敎訓은 무엇인가?

16. 聖經에 富者가 天國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富者는 惡人이란 말인가?

17. 이태리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天主敎徒인데 社會混亂과 犯罪가 왜 그리 많으며 世界의 模範國이 되지 못하는가?

18. 信仰人은 때때로 狂人처럼 되는데 共産黨員이 共産主義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天主敎와 共産主義는 相剋이라 하는데 天主敎徒가 많은 나라들이 왜 共産國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제국 , 니카라구아 등

20. 우리나라는 두 집건너 敎會가 있고 信者도 많은데 社會犯罪와 試鍊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敎皇의 決定은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獨善이 可能한가?

22. 神父는 어떤 사람인가? 왜 獨身인가? 修女는 어떤 사람인가? 왜 獨身인가?

23. 天主敎의 어떤 團體는 企業主를 착취자로, 勞動者를 착취당하는 자로 斷定, 企業의 分裂과 파괴를 助長하는데 資本主義 體制와 美德을 否認하는 것인가?

24. 地球의 終末은 오는가?

A~Z 알파벳 신앙

A. (Always)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라.
B. (Busy)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라.
C. (Check)
항상 하나님 안에 있나 체크하라.
D. (During Love)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매일 확인하라.
E. (Enjoy)
내 영혼에게 날마다 기쁨이 되게 하라.
F. (First)
항상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어라.
G. (Give)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사랑을 드려라.
H. (High)
항상 저 높은 곳을 사모하라.
J. (Joy)
항상 기쁘게, 감격으로 하나님을 만나라.
K. (Kind)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을 다하라.
L. (Leave)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떠나지 말라.
M. (Memory)
은혜 받았던 것을 잊지 말라.
N. (Need)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늘 생각하라.
O. (Only)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아라.
P. (Plan)
하나님의 계획이 높으심을 깨달아라.
Q. (Question)
의심을 품고 물어 보지 말라.
R. (Remember)
늘 하나님을 기억하라.
S. (Show)
나의 믿음을 하나님께 드리자.
T. (Test)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U. (Use)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자.
V. (Vex)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자.
W. (Will)
미래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맡겨라.
X
“아니오”라는 불순종을 제거하라.
Y. (Yesterday)
지나간 과거에 붙잡히지 마라.
Z. (Zea)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라.

행복 십계명

일. 일일히 간섭하지 말라

이. 이기심을 버려라

삼. 삼상오오 짝을 맞춰 대화하라

사. 사생결단하지말라

오. 오기를 버려라

육. 육체를 괴롭혀라(운동)

칠. 칠십프로만 만족하라

팔. 팔자 타령하지말라

구. 구질구질하게 살지말라

십. 십자가만 바라보라

 

[출처] www.speech21.co.k

내가 만나야 할 10종류의 사람들

  1. 카카오톡 자료를 잘 보내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항상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
  2. 내일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
  3.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나를 치유해 주는 사람이다.
  4. 확신에 찬 말을 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기준 잡힌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5.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주위를 항상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6. 아무리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작은 행복이 자주 일어나는 사람이다.
  7. 생각만 해도 대단하다고 느끼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8.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사람을 만나라. 그 사람은 항상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다.
  9. 언제나 밝게 웃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멀리 있는 복도 찾아오게 하는 사람이다.
  10.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과 만나라. 그 사람은 삶이 항상 풍요롭다.

 

[출처] http://www.speech21.co.kr

가나다라……………….사랑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 입니다.

나의 빈자리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움”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 입니다.

라일락의 향기와 같은 당신의 향을 찾는 것은 “그리움” 입니다.

마음 속 깊이 당신을 그리는 것은 “간절함” 입니다.

바라볼 수록 당신이 더 생각나는 것은 “설레임”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도 빛나는 것은 “믿음” 입니다.

아무런 말 하지  않아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은 “편안함”입니다.

자신보다 당신을  더 이해하고 깊은 것이 “배려” 입니다

차가운 겨울이 와도 춥지 않은 것은 당신의 “따뜻함”입니다.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고 싶은 것은 “보고싶은 마음”입니다.

타인이 아닌 내가 당신 곁에 자리하고 싶은 것은 “바램”입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처럼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은 “존중”입니다.

하얀 좋이위에 쓰고 싶은 말은 “사랑”입니다.

 

[출처] http://www.speech21.co.kr

A4 용지 한 장으로 외우는 성경 약도

자료실에 오랜만에 자료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저에게 성경을 배운 분들은 A4 용지를 접어서 성경 내용을 암기하는 방법이 익숙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에게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ppt 자료를 올렸습니다.

자료실에  ‘구속사, 맥을 잡아라!’ 강의안이 있는데, 저는 이 강의안이 없어도 성경과 A4 용지만으로도 동일한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저에게 강의를 들으신 분들도 성경과 A4 용지만 있으면 내용을 대부분 기억해 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말보다는 ppt 파일을 보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눌러서 게시판에 가셔서 다운받으시면 됩니다. 이 약도를 암기하시면 성경 지명의 90% 이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성경을 전혀 모르는 분들에게 가르쳐 보았더니 익숙해지니까 30초 정도에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번 암기하시면 성경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아래 ‘자료실’을 누르세요.

자료실

하나에서 열까지

  1. 천하보다 소중한 한 글자 :
  2.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두 글자 : 우리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글자 : 사랑해
  4. 평화를 가져오는 네 글자 : 내 탓이오
  5. 돈 안드는 최고 동력 다섯 글자 : 정말 잘했어
  6.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여섯 글자 : 우리 함께 해요
  7.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일곱 글자 : 처음 그 마음으로
  8.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여덟 글자 : 그럼에도 불구하고
  9. 다시한번 일어서게 하는 아홉 글자 :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10.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열 글자  :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께!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

금세기의 대설교자 로이드 존스목사는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난다 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부흥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부흥의 신학이 철저하게 그의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오히려 최근의 부흥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은사주의운동캠프에 속해있으면서 에드워즈의 글들을 자신들의 신학의 들러리로 삼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도 반대했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조나단 웨드워즈의 글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참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다.

아래에 그의 회심간증을 옮겨놓는다. 그가 1737년도에 작성한 것인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자신의 회심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려놓고 있다. 그의 회심은 15년전 곧 1721년, 그러니까 자신의 20살때쯤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심간증을 읽으면서 주목할 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회심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던 싯점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고백이 머리요, 신조만으로서의 고백이었음을 그의 회심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에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되어지고 또한 그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우리는 그의 생생한 언어들로 대할 수가 있다.

그의 표현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신비주의적 경향(하지만 그의 신학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님을 유의하시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선을 잘 지켜서 정통신학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 혹은 그의 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주여, 부흥의 영이시여, 에스겔골짜기의 그 마른 뼈들같은 우리들에게도 부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체험적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번역한다.

자료출처: http://www.calltoworship.org/calltoworship/testimony/jonathan.html

Jonathan Edwards “Personal Narrative”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인간증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신의 구원받게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내력
I had a variety of concerns and exercises about my soul from my childhood; but had two more remarkable seasons of awakening, before I met with that change by which I was brought to those new dispositions, and that new sense of things, that I have since had.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혼에 대해서 다양한 관심을 가진 채로 여러 가지 실행들을 해 왔다.그리고 두 번의 현저하게 주목할 만한 각성의 기간을 두 번이나 거친 후에야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갖게 되는 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런 기질들과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The first time was when I was a boy, some years before I went to college, at a time of remarkable awakening in my father’s congregation.

내가 대학을 진학하기 몇 해 전, 부친의 교회에서 있었던 현저한 각성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I was then very much affected for many months, and concerned about the things of religion, and my soul’s salvation; and was abundant in duties.

그 당시 몇 달 동안이나 그 각성으로 인해서 영향을 입어서는 신앙의 문제,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는 그것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충만했었다.

I used to pray five times a day in secret, and to spend much time in religious talk with other boys; and used to meet with them to pray together.

하루에 다섯 번씩 은밀히 기도시간을 가졌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대화들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곤 했었다.

I experienced I know not what kind of delight in religion.

나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모르는 채로 신앙 안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였다.

My mind was much engaged in it, and had much self-righteous pleasure; and it was my delight to abound in religious duties.

내 마음은 그것에 깊이 몰두했었다. 또한 무척 내성적이었고 나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즐거웠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I with some of my schoolmates joined together, and built a booth in a swamp, in a very retired spot, for a place of prayer.

학교친구들 몇몇과 함께 습지 안의 한 곳 으슥한 곳에 기도할 수 있는 거처를 지어놓았다.

And besides, I had particular secret places of my own in the woods, where I used to retire by myself; and was from time to time much affected.

게다가 숲속에는 내만이 알고 있던 특별한 장소가 있어서 혼자서 그곳에 가서 때때로 묵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My affections seemed to be lively and easily moved, and I seemed to be in my element when engaged in religious duties.

나의 정서는 들뜨고 쉽게 감동받는 것 같았고 종교적인 의무에 빠져들었을 때에는 나의 근원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And I am ready to think, many are deceived with such affections, and such a kind of delight as I then had in religion, and mistake it for grace.

그래서 지금 생각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서들에 현혹되어서 내가 종교에 대해서 가졌던 그런 종류의 즐거움들 때문에 그것이 은혜를 받은 것인 양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But in process of time, my convictions and affections wore off; and I entirely lost all those affections and delights and left off secret prayer, at least as to any constant performance of it; and returned like a dog to his vomit, and went on in the ways of sin.

하지만,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의 확신과 감정은 닳아져 버렸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런 흥분 속의 쾌감들을 잃어버리고 은밀한 기도시간도 갖지 않았다. 최소한 지속적으로 기도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또한 개가 그 뱉아버린 것을 다시 주워먹는 것처럼 죄된 생활들을 반복하였다.

Indeed I was at times very uneasy, especially towards the latter part of my time at college; when it pleased God, to seize me with a pleurisy; in which he brought me nigh to the grave, and shook me over the pit of hell.

물론 때때로 특별히 대학생활의 말기쯤에 와서는 이런 나의 상태에 심기가 아주 불편해 졌다.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 지옥구덩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And yet, it was not long after my recovery, before I fell again into my old ways of sin.

하지만, 회복되자 곧 옛날 저질렀던 죄악으로 되돌아 갔다.

But God would not suffer me to go on with any quietness; I had great and violent inward struggles, till, after many conflicts with wicked inclinations, repeated resolutions, and bonds that I laid myself under by a kind of vows to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엄청나고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악한 내적 경향들과 씨름한 후에 또 다시 결심하고 하나님께 서원 같은 것을 하곤 하였다.

From my childhood up, my mind had been full of objections against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in choosing whom he would to eternal life, and rejecting whom he pleased; leaving them eternally to perish, and be everlastingly tormented in hell. It used to appear like a horrible doctrine to me.

어릴 때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교리를 반대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해서 지옥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도록 두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But I remember the time very well, when I seemed to be convinced, and fully satisfied, as to this sovereignty of God, and his justice in thus eternally disposing of men, according to his sovereign pleasure.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주권적인 즐거움을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확신하고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분명히 기억나기는 한다.

But never could give an account, how, or by what means, I was thus convinced, not in the least imagining at the time, nor a long time after, that there was any extraordinary influence of God’s Spirit in it; but only that now I saw further, and my reason apprehended the justice and reasonableness of it.

하지만,내가 어떻게 혹은 어떤 방편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게 되었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순간도 없었고 되돌아볼 때에 그런 순간이 있었노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없었다.

However, my mind rested in it; and it put an end to all those cavils and objection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확신에 안주하고 있었고 모든 의문과 반대에 종지부를 찍었었다.

And there has been a wonderful alteration in my mind, in respect to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from that day to this; so that I scarce ever have found so much as the rising of an objection against it, in the most absolute sense, in God’s strewing mercy to whom he will shew mercy, and hardening whom he will.

그리고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의 면에서 나의 마음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반대해 보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에게 주시고 거두실 자에게는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God’s absolute sovereignty and justice, with respect to salvation and damnation, is what my mind seems to rest assured of, as much as of any thing that I see with my eyes; at least it is so at times.

구원과 저주의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며 또한 의로우시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분명하게 확신되었서 마치 내 눈으로 보는 것과도 같게 여겨졌다; 최소한 때때로 그렇게 여겨졌다.

But I have often, since that first conviction, had quite another kind of sense of God’s sovereignty than I had then.

하지만, 그 첫번째의 확신 이후로 간혹 아주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I have often since had not only a conviction, but a delightful conviction. The doctrine has very often appeared exceeding pleasant, bright, and sweet. Absolute sovereignty is what I love to ascribe to God. But my first conviction was not so.

그 이후로 간혹 하나의 확신으로서만 아니라 달콤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나는 사랑하였다. 하지만, 첫번째 확신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The first instance that I remember of that sort of inward, sweet delight in God and divine things that I have lived much in since, was on reading those words, I Tim. 1:17.

그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해서 내적이면서 달콤한 즐거움, 그리고 그 이후 생활하던 중에 계속 겪었던 신성한 일들에 대한 추억의 첫 체험은 디모데전서1:17에 있는 말씀들을 읽었을 때였다.

Now un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wise God, be honou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정말로 오직 영원하시며, 영생하시고, 보이지 않으신 왕이시며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이 무궁하시길 !

As I read the words, there came into my soul, and was as it were diffused through it, a sense of the glory of the Divine Being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 영혼 속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확산되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곧 그것은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었다;

a new sense, quite different from any thing I ever experienced before Never any words of scripture seemed to me as these words did.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전 어느 때에 겪어보지 못하였던 너무나도 다른 그 무엇이었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과 같이 여겨지지 않았었다(역자주: 그만큼 새롭게 여겨졌었다는 뜻)

I thought with myself, how excellent a Being that was, and how happy I should be, if I might enjoy that God, and be rapt up to him in heaven, and be as it were swallowed up in him for ever!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분은 얼마나 뛰어나신 존재이신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시는 그 분에게로 환희로 올리워지게 된다면, 그 분 안에 영원토록 삼키워지게 되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I kept saying, and as it were singing over these words of scripture to myself; and went to pray to God that I might enjoy him, and prayed in a manner quite different from what I used to do; with a new sort of affection.

나는 계속 말하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계속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당신을 계속 즐거워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였었다. 새로운 종류의 정동(情動)이 넘치고 있었다.

But it never came into my thought, that there was any thing spiritual, or of a saving nature in this.

하지만, 이것 안에, 영적인 어떤 것, 혹은 구원케하는 성질에 관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From about that time, I began to have a new kind of apprehensions and ideas of Christ. and the work of redemption, and the glorious way of salvation by him.

그 어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로운 종류의 인식과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구원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An inward, sweet sense of these things, at times, came into my heart; and my soul was led away in pleasant views and contemplations of them.

이러한 일들에 대한 내적이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내 영혼은 그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유쾌해지고 깊어졌다.

And my mind was greatly engaged to spend my time in reading and meditating on Christ, on the beauty and excellency of his person, and the lovely way of salvation by free grace in him.

내 마음은 그 분의 인격의 아름다우심과 뛰어나심, 그 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그 사랑스러운 방식에 대하여 독서하고 묵상하느라고 깊이 빠져서 시간을 보내었다.

I found no books so delightful to me, as those that treated of these subjects.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책들 외에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Those words Cant. 2:1, used to be abundantly with me, I am the Rose of Sharon, and the Lilly of the valleys.

아가서2장1절의 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라는 말씀이 내 안에 가득차고 넘치곤 했었다.

The words seemed to me, sweetly to represent the loveliness and beauty of Jesus Christ.

나에게 이런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주는 달콤한 말씀으로 여겨졌다.

The whole book of Canticles used to be pleasant to me, and I used to be much in reading it, about that time.

아가서 전체가 나에게 유쾌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읽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었다;

and found, from time to time, an inward sweetness, that would carry me away, in my contemplations.

그리고는 때때로, 묵상 중에 나를 멀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곤 하던 어떤 내적인 달콤함을 발견하였다.

This I know not how to express otherwise,

어떻게 이런 것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than by a calm, sweet abstraction of soul from all the concerns of this world.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그 영혼의 달콤함;

and sometimes a kind of vision, or fixed ideas and imaginations, of being alone in the mountains, or some solitary wilderness, far from all mankind, sweetly conversing with Christ, and wrapt and swallowed up in God.

때로는 어떤 종류의 비젼, 혹은 어떤 사람과도 단절되어서 홀로 산 중에 있거나 외로운 광야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 안에 감싸여서 삼키워지는 것 같은 비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The sense I had of divine things, would often of a sudden kindle up, as it were, a sweet burning in my heart; an ardor of soul,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내가 가졌던 이런 감각은 간혹 사실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내 마음 속에 달콤하게 타오르기도 하였다. 영혼의 그 향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Not long after I first began to experience these things, I gave an account to my father of some things that had passed in my mind.

이런 일을 겪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마음 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렸다.

I was pretty much affected by the discourse we had together; and when the discourse was ended, I walked abroad alone, in a solitary place in my father’s pasture, for contemplation.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에 아주 고무되어서 대화가 끝나자 나는 밖으로 혼자 나와서 농장의 조용한 곳으로 묵상하기 위해서 찾았다.

And as I was walk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and clouds, there came into my mind so sweet a sense of the glorious majesty and grace of God,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그곳을 걸을 때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I seemed to see them both in a sweet conjunction; majesty and meekness joined together; it was a sweet, and gentle, and holy majesty; and also a majestic meekness; an awful sweetness; a high, and great, and holy gentleness.

장엄함과 겸손함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런 달콤함 결합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달콤했고 부드러웠으며 거룩하게 장엄하였다; 또한 장엄한 겸손함이었다. 위엄스러운 달콤함이었고 또한 지고하며 위대한 그리고 거룩한 부드러움이었다.

After this my sense of divine things gradually increased, and became more and more lively, and had more of that inward sweetness.

이 일 후에 신적인 일들에 대한 나의 감각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더욱 더 생동감이 있게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이 증가되었다.

The appearance of every thing was altered; there seemed to be, as it were, a calm sweet cast, or appearance of divine glory, in almost every thing.

모든 일들이 변화되었다; 사실 거의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차분하면서도 달콤한 주형물처럼 여겨졌다.

God’s excellency, his wisdom, his purity and love, seemed to appear in every thing; in the sun, moon, and stars; in the clouds, and blue sky; in the grass, flowers, trees; in the water, and all nature; which used greatly to fix my mind.

하나님의 뛰어나심, 그 분의 지혜, 순결함과 사랑스러움이 모든 사물 속에 보여지는 것 같았다; 태양 속에서, 달, 그리고 별들 속에서; 구름 속에서, 그리고 푸른 하늘 속에서; 잔디, 꽃들, 나무들 속에서; 물 속에서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랬다; 이전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이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러했다.

I often used to sit and view the moon for continuance; and in the day, spent much time in viewing the clouds and sky, to behold the sweet glory of God in these things; in the mean time, singing forth, with a low voice my contemplations of the Creator and Redeemer.

간혹 나는 조용히 앉아서 달을 바라보곤 하였다; 낮에는 하늘과 구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신 분을 묵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부르곤 하였다.

And scarce any thing, among all the works of nature, was so sweet to me as thunder and lightning; formerly, nothing had been so terrible to me.

모든 자연의 작품들 속에서 그 어떤 것 하나도 나에게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천둥과 번개조차 그러했다.

Before, I used to be uncommonly terrified with thunder, and to be struck with terror when I saw a thunder storm rising; but now, on the contrary, it rejoiced me.

이전에는 천둥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서워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정반대로, 그것을 보면 즐거워 졌다.

I felt God, so to speak, at the first appearance of a thunder storm; and used to take the opportunity, at such times, to fix myself in order to view the clouds, and see the lightnings play, and hear the majestic and awful voice of God’s thunder, which oftentimes was exceedingly entertaining, leading me to sweet contemplations of my great and glorious God.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천둥번개 가운데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을 느꼈다; 그 천둥이 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구름을 보려고 집중해 서는 번개가 휘몰아치는 장면을 지켜 보았고 하나님의 천둥의 그 장엄하고 위엄스러운 음성을 듣곤 하였다. 때때로는 너무나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의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달콤하게 묵상하는 데로 나를 인도하였다.

While thus engaged, it always seemed natural to me to sing, or chant for my mediations; or, to speak my thoughts in soliloquies with a singing voice.

이렇게 몰두하는 중에 노래를 부르거나 묵상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혹은 노래부르는 듯 혼자서 조용히 나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아 놓았다.

I felt then great satisfaction, as to my good state; but that did not content me.

나는 그 당시 나의 좋은 상태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지는 않았다.

I had vehement longings of soul after God and Christ, and after more holiness, wherewith my heart seemed to be full, and ready to break; which often brought to my mind the words of the Psalmist, Psal. 119:28.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였고 더욱 거룩하고자 하였으며 나의 마음은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차고 넘치는 것 같았고 언제든지 그런 것들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시편119:28절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곤 할 정도였다.

My soul breaketh for the longing it hath.

나의 영혼은 원하는 바 그 열망으로 상하여졌다.

I often felt a mourning and lamenting in my heart, that I had not turned to God sooner, that I might have had more time to grow in grace.

간혹 내 마음 속에 보다 더 일찍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음을 애닮아 하는 슬픔과 비애를 느껴서 더욱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워 하였다.

My mind was greatly fixed on divine things; almost perpetually in the contemplation of them.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몰두하였다; 그것들을 거의 지속적으로 묵상하였다.

I spent most of my time in thinking of divine things, year after year; often walking alone in the woods, and solitary places, for meditation, soliloquy, and prayer, and converse with God; and it was always my manner, at such times, to sing forth my contemplations.

거의 모든 시간을 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수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었다. 때로는 숲속 길을 홀로 걸으면서 때로는 나 홀로 있는 장소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 명상 중에 찬양이 튀쳐 나오는 것이 나의 생활이었다.

I was almost constantly in ejaculatory prayer, wherever I was.

언제나 대부분 자연스럽게 기도가 터쳐 나왔다.

Prayer seemed to be natural to me, as the breath by which the inward burnings of my heart had vent.

마치 나의 내적 심령의 타오름이 내뿜는 숨결처럼 기도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The delights which I now felt in the things of religion, were of an exceeding different kind from those before mentioned, that I had when a boy; and what I then had no more notion of, than one born blind has of pleasant and beautiful colors.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즐거움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전의 것은 마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총천연색깔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갖는 그런 차원의 것이었을 뿐이다.

They were of a more inward, pure, soul animating and refreshing nature.

이제 느끼는 것들은 보다 내적이고 순수하며 영혼의 활력을 주는 신선한 성격의 것이었다.

Those former delights never reached the heart; and did not arise from any sight of the divine excellency of the things of God; or any taste of the soul satisfying and life-giving good there is in them.

이전의 즐거움은 마음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신적인 뛰어남을 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을 만족시키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그것들 안에 있어서 그 맛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역주: 이 이후의 기록은 1723년 뉴욕으로 건너가서 목회일을 시작하는 일들이 기록된다. 그의 전기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4 자신의 요약 1-8항

  1. In this refined way of trusting to my own works, and my own righteousness, (so zealously inculcated by the mystic writers,) I dragged on heavily, finding no comfort or heal therein till the time of my leaving England. on shipboard, however, I was again active in outward works; where it pleased God, of his free mercy, to give me twenty-six of the Moravian brethren for companions, who endeavored to show me a more excellent way. But I understood it not at first. I was too learned and too wise: so that it seemed foolishness unto me. And I continued preaching and following after and trusting in that righteousness whereby no flesh can be justified.

 

(신비주의 작가들에 의해서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쳐 지고 있는) 그런 정교한 방식으로 나의 행위를 의지하면서 그리고 나의 의를 의지하면서 나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면서 아무런 위로나 치료책을 발견하지 못한 채 아메리카를 향해서 떠났다. 하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선상에서 다시금 나는 외적 선행들을 열심으로 행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자비하신 은총으로 기뻐하시길 나에게 26명의 모라비안형제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나에게 그들은 더욱 훌륭한 길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처음엔 그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또한 너무 지혜로왔다: 그들의 조언은 나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어떤 육체도 의롭게 할 수 없는 그런 의를 설교하면서 그 의를 추구했고 또한 신뢰하였던 것이다.

  1. All the time I was at Savannah I was thus beating the air. Being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which by a living faith in him bringeth salvation “to every one that believeth,” I sought to establish my own righteousness, and so labored in the fire all my days. I was not properly under the law; I knew that the law of God was spiritual; I consented to it, that it was good. Yea, I delighted in it, after the inner man. Yet was I carnal, sold under sin. Every day was I constrained to cry out, “What I do, I allow not; for what I would, I do not; but what I hate, that I do. To will is indeed present with me; but how to perform that which is good, I find not. For the good which I would, I do not; but the evil which I would not, that I do. I find a law, that when I would do good, evil is present with me; even the law in my members, warring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still bringing me into captivity to the law of sin.”

 

사반나에 있는 동안 나는 그래서 계속 허공을 헛되이 치고 있었다. 살아있는 진짜 믿음으로 “믿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고 종일토록 불구덩이 속에서 일하였다. 나는 적합하게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영적인 것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선한 것인 줄을 동의하였다. 속사람을 따라서는 그것을 즐거워하였었다. 하지만, 나는 죄 아래 팔린 육적인 사람이었다. 매일 나는, “내가 행하는 그것을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원하는 것은 분명히 내 안에 있도다; 하지만,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느냐 그것을 알 수 없구나. 내가 행해야 할 선은 행하지 아니하면서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악을 내가 행하고 있도다. 참으로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는데,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지만 역시 내 안에 악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나의 지체의 법이 죄의 법 아래로 나를 계속해서 사로잡아가고 있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1. In this vile, abject state of bondage to sin I was indeed fighting continually, but not conquering. Before, I had willingly served sin; now, it was unwillingly; but still I served it. I fell and rose, and fell again. Sometimes I was overcome, and in heaviness; sometimes I overcame, and was in joy. For as in the former state I had some foretastes of the terrors of the law, so had I in this, of the comforts of the gospel. During this whole struggle between nature and grace (which had now continued above ten years) I had many remarkable returns to prayer, especially when I was in trouble. I had many sensible comforts, which are indeed no other than short anticipations of the life of faith. But I was still under the law, not under grace: the state most who are called Christians are content to live and die in. For I was only striving with, not freed from sin; neither had I the witness of the Spirit with my spirit, and indeed could not, for I sought it not by faith, but (as it were) by the works of the law.

 

이런 사악하고 비참한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나는 물론 계속 힘써 싸웠다. 그렇지만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즐거워하면서 섬겼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원치 않으면서도 섬겼다. 넘어졌다 일어섰는가 하면 또 넘어졌다. 때로는 무거움으로 압도당했다; 때로는 기쁨 가운데서 내가 이겼다. 이전 상태에서처럼 율법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얼마 맛보기도 했었는데, 이런 기쁨 속에서는 복음의 위로를 맛보기도 하였었다. 자연과 은혜 사이에서 진행되었던 이런 모든 투쟁의 기간 동안(거의 10여년간 진행되어 왔다) 나는 특별히 곤란을 당하는 경우에 여러 번 기도의 특별한 경험들을 하였다. 상당한 정도의 위로를 누리기도 했었고, 이런 것은 물론 신앙생활을 예기케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었다.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만족한 채로 살며 또한 죽고자 하는 그런 상태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단지 힘써 추구하고 있었을 뿐이지, 죄에서 해방된 것도, 나의 영과 더불어 성령의 증거를 가진 것도, 또한 가질 수도 없었다. 내가 추구한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그러했던 것이다.

 

  1. 11. In my return to England, January, 1738, being in imminent danger of death, and very uneasy on that account, I was strongly convinced that the cause of that uneasiness was unbelief, and that the gaining a true, living faith was the one thing needful for me. But still I fixed not this faith on its right object: I meant only faith in God, not faith in or through Christ. Again, I knew not that I was wholly void of this faith; but only thought I had not enough of it. So that when Peter Bohler, whom God prepared for me as soon as I came to London, affirmed of true faith in Christ, (which is but one,) that it had those two fruits inseparably attending it, “dominion over sin, and constant peace from a sense of forgiveness,” I was quite amazed, and looked upon it as a new gospel. If this was so, it was clear I had not faith. But I was not willing to be convinced of this. Therefore I disputed with all my might, and labored to prove that faith might be where these were not; especially where the sense of forgiveness was not: for all the scriptures relating to this, I had been long since taught to construe away, and to call all Presbyterians who spoke otherwise. Besides, I well saw no one could (in the nature of things) have such a sense of forgiveness, and not feel it. But I felt it not. If then there was no faith without this, all my pretensions to faith dropped at once.

 

영국으로 돌아온 1738년 1월, 사경 속에서 그리고 그때 겪었던 일에 심기가 불편한 채로 바로 그런 불편함이란 불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을 얻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참으로 필요로 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에 고정시키지 못하였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믿는 그런 신앙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이런 신앙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내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해 두셨던 피터 뵐러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이란 두 가지 열매 곧 “죄의 지배와 죄용서함 받은 것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지속적인 평화”의 이 두가지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상당히 놀랬고 그것을 새로운 복음이라고 간주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러므로, 모든 힘을 다해서 그것에 대해서 반대했고 이런 확신이 없어도 신앙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었다; 특별히 죄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있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했었다:지금까지 무시하도록 가르침 받았던 성경구절들을 이것과 관계시켜보려고 하면서 다르게 설명하는 모든 장로교인들의 의견들을 참고하였다[역주: 아, 그가 이 참된 회심을 알고 있었던 장로교인들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었더라면….그 당시에는 영국국교이든, 장로교인이든, 침례교회이든 영국의 영적 상태가 무척이나 침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참된 회심에 대한 관심이 무척 저하되어 있어서, 여기서 웨슬레가 말하고 있는 참된 회심에 대한 무지가 장로교회교인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어느 누구도 이런 용서함 받은 느낌을 가질 수 없고 또한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내가 느꼈던 것이다. 이런 용서함의 느낌이 없으면 참 믿음이 아니라고 할 때 내가 믿음이 있노라고 했던 그 모든 것은 당장 잘못된 것이 되는 것이다.

 

  1. When I met Peter Bohler again, he consented to put the dispute upon the issue which I desired, viz., Scripture and experience. I first consulted the Scripture. But when I set aside the glosses of men, and simply considered the words of God, comparing them together, endeavoring to illustrate the obscure by the plainer passages, I found they all made against me, and was forced to retreat to my last hold, “that experience would never agree with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those scriptures. Nor could I, therefore, allow it to be true till I found some living witnesses of it.” He replied, “He could show me such at any time; if I desired it, the next day.” And accordingly the next day he came with three others, all of whom testified of their own personal experience that a true living faith in Christ is inseparable from a sense of pardon for all past, and freedom from all present sins. They added with one mouth, that this faith was the gift, the free gift of God, and that he would surely bestow it upon every soul who earnestly and perseveringly sought it. I was not thoroughly convinced, and by the grace of God I resolved to seek it unto the end: — 1. By absolutely renouncing all dependence, in whole or in part, upon my own works or righteousness, on which I had really grounded my hope of salvation, though I knew it not, from my youth up. 2. By adding to the constant use of all the other means of grace continual prayer for this very thing — justifying, saving faith; a full reliance on the blood of Christ shed for me; a trust in him as my Christ, as my sole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and redemption.

 

피터 뵐러를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토론하고 싶어했던 주제, 곧 성경과 체험의 관계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나는 먼저 성경을 상고하였다. 하지만, 신학적인 용어들을 제껴두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서로를 비교하면서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더 쉬운 구절들을 따라서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구절들이 바로 나 자신을 공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의 마지막 보루에 기대었었다. 그 보루란, “체험이란 이 성경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과는 결코 일치 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기 까지는 그런 구절들을 참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노라는 것”이었다. 그는 답변하기를, “내가 그것을 어느 때라도 보여 줄 수도 있는데, 내일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하겠노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음 날 그는 세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는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믿음이 지난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셨다는 느낌, 그리고 현재의 모든 죄들로부터 자유하다는 것과 불가분리하다는 것을 간증하였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첨가하기를, 이런 신앙은 선물, 곧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진정으로 그것을 구하고 끝까지 추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철저하게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것을 끝까지 추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 1. 부분적으로건 전적으로건 나 자신의 행위나 의에 의지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젊은 시절부터 내 구원을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포기함으로. 2. 모든 다른 은혜의 수단들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일, 의롭게 하는, 구원케 하는 믿음을 얻기 위해서 계속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바로 나를 위해서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분을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영혼의 의로우심, 거룩하심, 그리고 구속으로 신뢰하는 것이었다.

 

  1. I continued thus to seek it (though with strange indifference, dullness, and coldness, and unusually frequent relapses into sin) till Wednesday, May 24th. I think it was about five this morning that I opened my Testament on those words: [note: here follows a line of Greek] “There are given unto us exceeding great and precious promises, even that ye should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2 Pet. i, 4. Just as I went out, I opened it again on those words: “Thou art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In the afternoon I was asked to go to St. Paul’s. The anthem was, “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 Lord, hear my voice. O let thine ears consider well the voice of my complaint. If thou, Lord, wilt be extreme to mark what is done amiss, O Lord, who may abide it? But there is mercy with thee; therefore thou shalt be feared. O Israel, trust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mercy, and with him is plenteous redemption. And he shall redeem Israel from all his sins.”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도 무관심에 빠지고 지겹고, 냉냉하고, 또한 자주 죄로 떨어지기도 하였지만) 계속 5월 24일 수요일까지 그것을 구해 왔었다. 그날 아침 5시경으로 생각한다. 성경책을 열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었다:[주,여기에 헬라어로 성경구절이 적혀 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려 하셨으니”. 집밖으로 나가자 마자, 성경을 다시 펴서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는 말씀을 읽었다. 오후에 세인트 폴 성당에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곳에서 불렀던 찬송가의 가사내용은 이렇다: “깊음 속에서 주를 내가 불렀나이다: 주여, 나의 기도에 응답하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만약 주께서 인생의 실수를 기억하신다면 누가 주 앞에서 견딜 수가 있겠나이까? 하오나 주께는 자비가 있사오니; 주께서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이스라엘아, 주만 신뢰하라: 주에게 자비하심이 있고, 그에게 구속이 넘치는도다. 또한 주께서 그 모든 죄악들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리로다”

 

  1.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저녁에 나는 알더스게이트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억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내 같은 사람의 죄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1. 15. I began to pray with all my might for those who had in a more especial manner despitefully used me and persecuted me. I then testified openly to all there what I now first felt in my heart. But it was not long before the enemy suggested, “This cannot be faith; for where is thy joy?” Then was I taught that peace and victory over sin are essential to faith in the Captain of our salvation; but that, as to the transports of joy that usually attend the beginning of it, especially in those who have mourned deeply, God sometimes giveth, sometimes withholdeth them, according to the counsels of his own will.

 

나는 전심으로 특별하게 나를 기만적으로 이용해 먹었던 사람들, 나를 그렇게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간증하였다. 하지만, 곧 이어서 나의 적이 암시를 주었다. “이것은 믿음일 수 없어; 어디에 기쁨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는 분을 믿는 믿음에 본질적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 구원의 시작에 보통 동반되는 황홀한 기쁨은 깊이 탄식하는 자들 속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뜻하신 바를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주시기도 하고 또한 거두시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16. After my return home, I was much buffeted with temptations; but cried out, and they fled away. They returned again and again. I as often lifted up my eyes, and he sent me help from his holy place. And herein I found the difference between this and my former state chiefly consisted. I was striving, yea, fighting with all my might under the law, as well as under grace; but then I was sometimes, if not often, conquered: now I was always conqueror.

 

집으로 돌아와서는 여러가지 유혹들에 지쳐버렸다; 하지만, 크게 외쳤을 때 그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유혹은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눈을 들어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 거룩하신 곳으로부터 도우심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이런 것과 이전의 상태 사이에 있었던 차잇점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예,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씨름하였는데 은혜 아래에서건 율법 아래에서건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 때때로(sometimes), 자주(often)는 아니라 하더라도, 정복당하였었다: 이제는 언제나(always) 정복자였다[역주, 이 부분은 웨슬레의 회심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분분한 의견들이 있는 곳인데, 과연 그가 이 ‘알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 ‘언제나 정복자였다’는 말이 어떤 의미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분석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그의 모든 ‘마음’ 속에서 아무런 ‘죄의 유혹조차’ 없었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죄의 유혹은 있었는데, 그 유혹에 ‘마음’으로라도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는 의미인가? ‘마음’으로는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는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웨슬레가 추구해 온 것인 ‘내적 거룩함’이었기 때문에, ‘마음으로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해석이 지지를 받는데, 과연 그러한가, 또는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에 남게 된다. 웨슬리 자신이 비록 ‘완전론’을 주장하였지만,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흠한 상태, 죄없는 상태로 있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을 참고해서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1. Thursday, May 25th. — The moment I awaked, “Jesus, Master,” was in my heart and in my mouth; and I found all my strength lay in keeping my eye fixed upon him, and my soul waiting on him continually. Being again at St. Paul’s in the afternoon, I could taste the good word of God in the anthem, which began, “My song shall be always of the loving kindness of the Lord: with my mouth will I ever be showing forth thy truth from one generation to another.” Yet the enemy injected a fear, “If thou dost believe, why is there not a more sensible change?” I answered, (yet not I,) “That I know not. But this I know, I have now peace with God. And I sin not to-day, and Jesus my Master has forbid me to take thought for the morrow.”

 

5월 25일, 목요일, 눈을 뜬 순간,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서 나의 눈을 그 분에게 고정시키고 있고, 나의 영혼은 계속해서 그 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후에 다시 세인트 폴 성당에 가서 부르게 된 찬송에서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언제나 주의 사랑에 풍성하신 친절을 노래하겠네:입술을 열어서 주의 진리를 영원히 전하겠노라.” 하지만 원수가 다시 두려움을 집어넣었다. “진짜로 네가 그렇게 믿는다면,왜 더욱 느낄 만한 변화가 없단 말인가?” 내가 대답했다,( 아니 답변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난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주인되시는 예수께서 내일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금하시고 있어.”

 

  1. “But is not any sort of fear,” continued the tempter, “a proof that thou dost not believe?” I desired my Master to answer for me, and opened his book upon those words of St. Paul: “Without were fightings, within were fears.” Then, inferred I, well may fears be within me; but I must go on, and tread them under my feet.

 

“하지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유혹자가 계속해서 소곤거렸다, “…네가 참으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게 아니니?” 나의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답변해 주시길 원했다. 그 분의 책을 열어서 사도바울의 이런 말씀을 발견하였다. “밖으로는 싸움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7:5). 이 말을 읽고는 생각하였다. 흠, 내 안에 비록 두려움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계속 나아가야지, 그 두려움을 내 발 밑에 밟아 문대버려야지.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3 자신의 요약 1-7항

Mr. Wesley’s Conversion

 

 

웨슬리의 회심

 

http://www.gbod.org/worship/default.asp?act=reader&item_id=5951&loc_id=639,624

 

 

아래의 글은 웨슬리의 회심사건 백주년을 기념해서 The Methodist Magazine and Quarterly Review (Volume XX.New Series, Vol.IX,1838,New York: T.Mason and G.Lane, p.321-326)지에 실린 그의 일기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인데, 실상은 자신의 회심사건을 회상하면서 좀 더 보충하고 확대설명하고 있습니다. 웨슬리 자신이 직접 자신의 회심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그의 회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     *     *

 

(인용)

 

Monday, Tuesday, and Wednesday I had continual sorrow and heaviness in my heart; something of which I had described, in the broken manner I was able, in the following letter to a friend: —’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나는 계속 슬펐고 마음이 무거웠다; 할 수 있는 한 퉁명스럽게 무언가를 나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나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O why is it, that so great, so wise, so holy a God will use such an instrument as me? Lor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wilt thou send the dead to raise the dead? Yea, thou sendest whom thou wilt send, and showest mercy by whom thou wilt show mercy! Amen! Be it then according to thy will! If thou speak the word, Judas shall cast out devils.

 

오 왜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도구로 삼으시는 것일까! 주님,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보내실까? 주님께서는 보내실 자를 보내실거야. 그리고 자비를 나타내실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실거야. 아멘! 그러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될지어다. 만약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유다도 귀신들을 쫓아낼 것이니깐.

 

“I feel what you say, (though not enough,) for I am under the same condemnation. I see that the whole law of God is holy, just, and good. I know every thought, every temper of my soul, ought to bear God’s image and superscription. But how am I fallen from the glory of God! I feel that I am sold under sin. I know that I, too, deserve nothing but wrath, being full of all abominations; and having no good thing in me, to atone for them, or to remove the wrath of God. All my works, my righteousness, my prayers, need an atonement for themselves. So that my mouth is stopped. I have nothing to plead. God is holy; I am unholy. God is a consuming fire; I am altogether a sinner, meet to be consumed.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말한 것을 느끼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은 저주의 상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의롭고 또한 선한 것임을 알고 있어.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기질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명을 드러내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 “나는 죄아래 팔렸다”고 느껴. 나도 또한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어. 저주받을 것들로 넘치는데 그것들을 처리할 만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어떤 선한 것이 내 안에는 전혀 없단 말이야. 나의 모든 행위, 나의 의, 나의 기도는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야. 내 입술로는 할 말이 없어. 무엇도 탄원할 만한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데, 나는 불결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길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야, 소멸당하기에 딱 맞는 그런 죄인이란 말이야.

 

“Yet I hear a voice (and is it not the voice of God?) saying,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He that believeth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지만 나는 한 목소리를 듣고 있어(이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나에게 말하기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O let no one deceive us by vain words, as if we had already obtained this faith! By its fruits we shall know. Do we already feel peace with God, and joy in the Holy Ghost? Does his Spirit bear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Alas! With mine he does not. Nor, I fear, with yours. O thou Saviour of men, save us from trusting in any thing but thee! Draw us after thee! Let us be emptied of ourselves, and then fill us with all peace and joy in believing, and let nothing separate us from thy love, in time or in eternity!”

 

헛된 말로 속임을 당하지 말자구나. 이런 믿음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열매로 우리가 안다고 하지 않니.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과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어쩌나! 나의 영과 더불어 그 분이 증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데. 염려가 되는 것은, 너의 영과 더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쟎나.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오직 당신만 신뢰할 수 있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믿음 중에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눠지지 않게 하소서. 이 생에건 영원 속에서이건!

 

What occurred on Wednesday, the 24th, I think best to relate at large, after premising what may make it the better understood. Let him that cannot receive it ask the Father of lights that he would give more light to him and me.

 

바로 그 24일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그 일을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한 뒤에야 설명해야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은 빛들의 아버지 되시는 분에게 구하길 바란다. 자신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더욱 많은 빛을 달라고.

 

  1. I believe, till I was about ten years old, I had not sinned away that “washing of the Holy Ghost” which was given me in baptism, having been strictly educated, and carefully taught that I could only be saved “by universal obedience, by keeping all the commandments of God;” in the of which I was diligently instructed. And those instructions, so far as they respected outward duties and sins, I gladly received and often thought of. But all that was said to me of inward obedience or holiness I neither understood nor remembered. So that I was, indeed, as ignorant of the true meaning of the law as I was of the gospel of Christ.

 

나는 열살 정도 되기까지 유아세례시에 베풀어졌던 ‘성령의 씻으심’을 전혀 더럽히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엄격하게 교육받았고 오직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준행하는 모든 면에서의 복종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외적인 의무들과 죄들에 관해서라면 그러한 가르침들을 나는 즐겁게 받아들였고 종종 묵상하곤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나 거룩에 관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처럼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무지했었다.

 

  1. 2. The next six or seven years were spent at school; where, outward restraints being removed, I was much more negligent than before, even of outward duties, and almost continually guilty of outward sins, which I knew to be such, though they were not scandalous in the eye of the world. However, I still read the Scriptures, and said my prayers, morning and evening. And what I now hoped to be saved by was, 1. Not being so bad as other people. 2. Having still a kindness for religion. And, 3. Reading the Bible, going to church, and saying my prayers.

 

그 이후 5,6년 동안은 학교생활을 했다; 외적인 규제가 제거되어진 학교생활에서는 외적인 의무들을 행하는 것에서조차도 이전보다 많이 게을러졌다. 그래서 거의 매일같이 외적인 죄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졌다. 비록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내가 보기로는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성경을 읽기는 하였고 기도도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그때 구원받기 위하여 바랬던 것은, 1.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사악하지 않는 것, 2. 종교에 대해서 관대할 것, 그리고 3.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니고,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 등이었다.

 

  1. Being removed to the university, for five years, I still said my prayers, both in public and private, and read, with the Scriptures, several other books of religion, especially comments on the New Testament. Yet I had not all this while so much as a notion of inward holiness; nay, went on habitually and, for the most part, very contentedly, in some or other known sin; indeed, with some intermission and short struggles, especially before and after the holy communion, which I was obliged to receive thrice a year. I cannot well tell what I hoped to be saved by now, when I was continually sinning against that little light I had, unless by those transient fits of what many divines taught me to call “repentance.”

 

대학에 진학해서 5년 동안 여전히 나는 공적모임이나 개인적으로 기도를 하곤 했다. 그리고 성경과 더불어서 다른 경건서적들을, 특별히 신약성경주석들을 읽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적인 거룩함의 개념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아니, 습관적으로 행하였을 뿐 대부분 얼마간의 감추어진 죄나 드러난 죄조차도 제법 만족하면서 저지르기도 했다; 물론 때때로 특별히 성찬식을 갖기 이전이나 직후에 간단히나마 괴로워 하고 회개하기도 하였다. 일년에 세번씩 성찬식에 참여해야 했었다. 그 무럽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내 안에 있었던 아주 조그만 빛에 대항해서 계속 죄를 범하고 있었다. 수많은 경건한 분들이 나에게 “회개”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쳐 준 그 순간적인 발작행동을 때때로 일으키면서.

 

  1. When I was about twenty-two, my father pressed me to enter into holy orders. At the same time the providence of God directing me to Kempis’s “Christian Pattern,” I began to see that true religion was seated in the heart, and that God’s law extended to all our thoughts, as well as words and actions. I was, however, very angry at Kempis for being too strict, though I read him only in Dean Stanhope’s translation. Yet I had frequently much sensible comfort in reading him, such as I was an utter stranger to before; and meeting likewise with a religious friend, which I never had until now, I began to alter the whole form of my conversation, and to set in earnest upon a new life. I set apart an hour or two a day for religious retirement. I communicated every week. I watched against all sin, whether in word or deed. I began to aim at, and pray for, inward holiness. So that now, “doing so much, and living so good a life,” I doubted not but I was a good Christian.

 

22살 무렵 부친께서 나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종용하셨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섭리 중에 아 켐피스의 “Christian Pattern”이란 책을 읽게 하셔서, 참된 신앙이란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들의 말이나 행동만 아니라 우리들의 모든 생각에도 미치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 켐피스의 글을 나는 Dean Stanhope의 번역판으로 읽었을 뿐이면서도 나는 아 켐피스가 너무 엄격하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주 편안함을 맛보았다. 이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적인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인데, 나는 이때부터 나의 생활들을 전면적으로 변경시켜 보려고 애쓰면서 새로운 삶을 진지하게 시작해 보려고 하였다. 하루에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을 신앙적인 훈련을 위해서 홀로 지내려고 하였다. 매 주일 성찬에 참여하였다. 말이나 행동의 어떤 죄도 짓지 않으려고 하였다. 내적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행을 행하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1. Removing soon after to another college, I executed a resolution which I was before convinced was of the utmost importance, shaking off at once all my trifling acquaintance. I began to see more and more the value of time. I applied myself closer to study. I watched more carefully against actual sins. I advised others to be religious, according to that scheme of religion by which I modeled my own life. But meeting now with Mr. Law’s “Christian Perfection,” and “Serious Call,” (although I was much offended at many parts of both, yet) they convinced me more than ever of the exceeding height, and breadth, and depth of the law of God. The light flowed in so mightily upon my soul that every thing appeared in a new view. I cried to God for help, and resolved not to prolong the time of obeying him as I never had done before. And by my continued “endeavor to keep his whole law,” inward and outward, “to the utmost of my power,” I was persuaded that I should be accepted of him, and that I was even then in a state of salvation.

 

다른 대학으로 옮겼을 때 나는 시시껄렁한 친교들을 당장 끊어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확신이 되는 결심들을 실행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였다. 실제적인 죄들을 더욱 조심해서 경계하였다. 나 자신의 삶에서 성취하려고 하는 그 신앙의 체계들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건하게 살도록 조언하였다. 하지만 이제 윌리엄 로의 “Christian Perfection”과 “Serious Call”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율법의 그 뛰어난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훨씬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내 영혼에 엄청나게 쏫아지는 빛 때문에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나는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고, 그 분에게 복종해야 할 것을 더 미루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 이전에 결코 그렇게 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그 분의 모든 율법을 나의 모든 힘을 다해서 행하려고 힘쓰는 그것으로” 나는 그 분에게 분명히 받아들였음직하고 또한 그 당시에조차도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1. In 1730 I began visiting the prisons, assisting the poor and sick in town, and doing what other good I could, by my presence or my little fortune, to the bodies and souls of all men. To this end I abridged myself of all superfluities, and many that are called necessaries of life. I soon became a by-word for so doing, and I rejoiced that “my name was cast out as evil.” The next spring I began observing the Wednesday and Friday fasts, commonly observed in the ancient church, tasting no food till three in the afternoon. And now I knew not how to go any farther. I diligently strove against all sin. I omitted no sort of self-denial which I thought lawful; I carefully used, both in public and in private, all the means of grace at all opportunities. I omitted no occasion of doing good: I for that reason suffered evil. And all this I knew to be nothing, unless as it was directed toward inward holiness. Accordingly this, the image of God, was what I aimed at in all, by doing his will, not my own. Yet when, after continuing some years in this course, I apprehended myself to be near death, I could not find that all this gave me any comfort, or any assurance of acceptance with God. At this I was then not a little surprised, not imagining I had been all this time building on the sand, nor considering that “other foundation can no man lay than that which is laid by God, even Christ Jesus.”

 

1730년에 감옥방문을 시작했다. 읍내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고,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직접 찾아가거나 찾아갈 기회가 없으면 다른 방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서 좋은 일을 하였다. 이것을 위해서 나는 모든 사치품들을 제거하였고 필수품이라고 불려지는 많은 것들도 제거하였다. 나는 곧 그렇게 선행을 함으로써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름이 그렇게 놀림을 당하는 것”(my name was cast out as evil)을 기뻐하였다. 다음 해 봄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교회에서 행하여지던 거신데, 오후 세시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전진해야 할 지를 몰랐다. 모든 죄악들에 대해서 열심으로 싸웠다.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유형의 자기부정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활용될 수 있었던 은혜의 모든 방편들을 공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조심스럽게 활용하였다. 선한 일을 행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았다: 그 이유 때문에 악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내적인 거룩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선행들이 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선행을 한 것은, 그 모든 일들 속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을 행함으로 인해서 내가 목적하였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이 모든 것이 어떤 위안을 줄 수 있는 것도 혹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확신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모래 위에 성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였고 어떤 인간으로도 놓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놓으시는 기초 곧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1. Soon after, a contemplative man convinced me, still more than I was convinced before, that outward works are nothing, being alone; and in several conversations instructed me how to pursue inward holiness, or a union of the soul with God. But even of his instructions, (though I then received them as the words of God,) I cannot but now observe, 1. That he spoke so incautiously against trusting in outward works, that he discouraged me from doing them at all. 2. That he recommended (as it were, to supply what was wanting in them) mental prayer and the like exercises, as the most effectual means of purifying the soul, and uniting it with God. Now these were, in truth, as much my own works as visiting the sick or clothing the naked; and the union with God thus pursued was as really my own righteousness as any I had before pursued under another name.

 

얼마 뒤에 어떤 생각이 깊으신 분이 내가 앞서 그 분을 만나기 전에 확신을 가졌던 것보다 더욱 확신을 갖게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외적인 행위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나와 홀로 있을 때 그리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서 내적인 거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혹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 당시로서는 하나님의 말씀들로 받아들였지만)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1. 그는 외적인 행위들에 대해서 너무 부주의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것들 모두를 전혀 행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2. 그 분은 나에게 영혼을 정화시키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정신적인 기도와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는데(실은 그것들 안에 결핍되었던 것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실상 이것들은 병자들을 방문하거나 벌거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혀주었던 식의 내가 이전에 행하였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추구했던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실제로는 내가 이전에 다른 방식으로 추구했었던 나의 의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계속)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2

런던 알더스게이트거리의 어느 집회에서 가진 “이상한 뜨거움”

 

어거스틴의 회심은 루터에게 영향을 주고 루터의 회심은 바로 웨슬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음과 같은 웨슬리의 회심기록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저녁에 나는 알더스게이트거리에 있는 한 모임에 억지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처분해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내 같은 사람의 죄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확신이 주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웠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하는 것이 약간은 “체험”을 강조한 측면이 있지만, 이런 강조는 바로 그 앞에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가 무엇인가 고려하면서 이 “체험”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의 “이상하게 뜨거워진 마음”의 체험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변화는 단순한 감정상의 체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삶과 그의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만 허락하시는 “마음의 변화”이요, “본성의 변화”입니다. 그것을 루터가 로마서서문에서 기록하고 있고, 그 기록된 것을 읽을 때에 웨슬리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 뜨거움을 경험한 바로 다음날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The moment I awaked, “Jesus, Master”, was in my heart and in my mouth(내가 깨어난 바로 그 순간 나의 주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고 나의 입술에 계셨다). 이것이야말로 회심의 진수입니다. 회심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변화를 동반하고 또한 그 마음의 변화는 곧 입술로, 행동으로, 삶 속에서 실천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의 뜨거움은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변화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면 당신의 나라를 이뤄가십니다. 그 나라의 성취는 바로 이 뜨거워진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이야말로 교회개혁의 시작이고 또한 만물의 변혁의 출발점이 되는 소이입니다. 이 웨슬리의 뜨거워진 마음이 바로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전가되고 또한 그로 인하여 주의 나라가 증거되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번역합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뜨겁게 하옵시고,

이 뜨거움의 감격이 사라지지 않게 하옵소서.

나에게서만 아니라,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도 약하여지지 않게 하옵소서.

 

Only to Him is Glory, Praise and the Kingdom!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웨슬리의 회심 1

John Wesley’s thoughts before his conversion

     회심 전에 가지고 있었던 웨슬리의 자기이해

http://www.e-n.org.uk/2003-06/2194-‘Strangely-warmed’.htm

 

John Wesley was born on June 17 1703 in Epworth, Lincolnshire. 존 웨슬리는 1703년 7월 링컨셔의 엡워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It was on May 24 1738 that Wesley received assurance of salvation in a momentous experience of conversion. It lit the fire of evangelistic zeal in his heart which continued until his death in 1791. 웨슬리가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은 1738년 5월24일이었다. 이 경험은 1791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가슴에 복음전도의 열정을 불붙어 있게 하였다.

 

Before his conversion, he had met Peter Bohler, a Moravian missionary, and had been convinced by him that salvation is by faith alone. 그가 회심하기 전에 그는 모라비안계통의 선교사였던 피터 뵐러를 만나서 구원이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It is interesting to read two letters John Wesley wrote just prior to his Aldersgate experience. 회심을 체험한 알더스게이트 사건 바로 직전에 웨슬리가 보냈던 두 통의 편지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The first is to William Law, who for 12 years had been his mentor and whose Serious Call and Christian Perfection he had previously studied avidly. 첫번째 것은 윌리엄 로에게 보낸 것인데, 로는 12년 동안 웨슬리의 영적 지도자였었고 로의 책, <진지한 요청과 기독교인의 완전 Serious Call and 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책을 웨슬리는 열심히 탐독하였었다. The second is to an unidentified friend, who, like Wesley, was seeking salvation. 둘째 편지는 신원불명의 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인데, 이 친구는 웨슬리처럼 구원을 추구하는 구도자이다.

 

 

역주: 윌리엄 로는 알미니안주의신학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기독교인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쓴 그의 저작은 거의 고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편지를 보면 윌리엄 로의 책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신랄하게 통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비판없이 윌리엄 로의 책이 추천되고 있는 것을 고려할 이런 편지의 공개는 참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윌리엄 로에게 요한 웨슬리가 편지를 보낸 싯점은 바로 그가 회심을 경험하기 바로 10 입니다. 그리고 무명의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회심하는 당일 오전중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나의 영혼의 상태를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To William Law/ 윌리엄 로에게
    [London, May 14 1738]

 

 

Reverend Sir,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It is in obedience to what I think to be the call of God that I, who have the sentence of death in my own soul, take upon me to write to you, of whom I have often desired to learn the first elements of the gospel of Christ. 영혼의 사망선고를 받은 저로서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제가 생각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서 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첫째 요소를 배우기를 때때로 소망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If you are born of God, you will approve of the design, though it may be but weakly executed. If not, I shall grieve for you, not for myself. For as I seek not the praise of men, neither regard I the contempt either of you or of any other. 선생님께서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셨다면 그렇게 태어나게 하신 계획을 또한 인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계획이 비록 아주 미세하게 실시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탄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선생님께서 저를 모욕하시든, 다른 어느 누구가 모욕하든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For two years (more especially) I have been preaching after the model of your two practical treatises; and all who heard have allowed that the law is great, wonderful and holy. But no sooner did they attempt to fulfil it, but they found that it is too high for man, and that by doing ‘the works of the law shall no flesh living be justified’. 저는 (더욱 특별하게) 최근 2년 동안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실제적인 모델에 따라서 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율법이란 위대하고 기묘하며 거룩한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율법을 성취하려고 애쓰자 마자 그것은 사람들이 성취하기에는 너무 고상한 것과 “율법의 행위를 따라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To remedy this, I exhorted them, and stirred up myself, to pray earnestly for the grace of God, and to use all the other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 which the all-wise God hath appointed. But still, both they and I were more and more convinced that this is a law by which a man cannot live; the law in our members continually warring against it, and bringing us into deeper captivity to the law of sin. 이런 문제점을 수정하기 위해서 저는 그들에게 또한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열심으로 구하여야 하고 또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지명해 놓으신 모든 방편들을 사용하도록 권면하였고 또한 나 자신도 그렇게 실행하였습니다.

 

Under this heavy yoke I might have groaned till death, had not an holy man, to whom God lately directed me, upon my complaining thereof, answered at once: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with all thy heart,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to thee. This faith, indeed, as well as the salvation it brings, is the free gift of God. But seek, and thou shalt find. Strip thyself naked of thy own works and thy own righteousness, and fly to Him. For whosoever cometh unto Him, He will in no wise cast out.’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인도해 주신 거룩한 어떤 분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 무거운 멍에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신음할 뻔 했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너의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어떤 일도 너에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값없으신 선물이다. 하지만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너의 모든 행위와 너 자신의 의로움을 벗어제쳐 버리고 그 분에게로 도망하라. 그 분에게로 가는 자마다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Now, sir, suffer me to ask: How will you answer it to our common Lord that you never gave me this advice? 이제, 선생님, 질문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런 조언을 전혀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의 주가 되시는 분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Did you never read the Acts of the Apostles, or the answer of Paul to him who said, ‘What must I do to be saved?’ Or are you wiser than he? 선생님께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간수의 질문에 사도바울이 한 답변을 읽어보지 않으셨나요? Why did I scarce ever hear you name the name of Christ? 왜 저는 선생님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 드문 것일까요? never, so as to ground anything upon ‘faith in His blood’? ‘그의 피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어떤 것을 기초하는 것으로서 언급하신 것 말입니다. Who is this who is laying another foundation? 다른 기초를 놓고 있는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If you say you advised other things as preparatory to this, what is this but laying a foundation below the foundation?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들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하신다면 그 기초 아래에 놓여져야 할 참된 기초 외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Is not Christ, then, the first as well as the last? 마지막이 되실 뿐만 아니라 처음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던가요? If you say you advised them because you knew that I had faith already, verily you knew nothing of me; you discerned not my spirit at all. 만약 제가 믿음이 있는 줄을 선생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런 조언들을 하셨다고 하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저의 영혼의 상태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I know that I had not faith, unless the faith of a devil, the faith of Judas, that speculative, notional, airy shadow, which lives in the head, not in the heart. 저는 믿음이 전혀 없었더랬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면 단지 마귀도 가질 수 있는 믿음, 유다의 믿음, 그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며 공중에 그림자일 뿐인, 곧 머리 속에만 있지 마음에는 없는 그런 믿음이었을 뿐입니다. But what is this to the living, justifying faith in the blood of Jesus? the faith that cleanseth from sin, that gives us to have free access to the Father, to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to have ‘the love of God shed abroad in our hearts by the Holy Ghost’ which dwelleth in us, and ‘the Spirit itself bearing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하지만, 예수의 보혈을 믿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산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죄를 씻어주고, 아버지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믿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비춰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믿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성령 그 분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서 증거하는 그런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입니까?

 

I beseech you, sir, by the mercies of God, to consider deeply and impartially, whether the true reason of your never pressing this upon me was not this – that you had it not yourself; whether that man of God was not in the right who gave this account of a late interview he had with you – ‘I began speaking to him of faith in Christ: he was silent.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선생님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한 번도 이런 조언을 해주시지 않은 참된 이유가 선생님께서 전혀 그런 것을 모르셨던 것은 아닌지, 선생님과 대담을 나눴던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선생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기 시작하자 선생님께서는 침묵만 하셨다”고 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과연 진실되지 않은 것인지를 참으로 깊히 그리고 공정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Then he began to speak of Mystical matters. 그리고 그 사람은 신비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I spake to him of faith in Christ again: he was silent. 제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말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그 사람이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Then he began to speak of Mystical matters again. 그는 저에게 신비한 일들을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I saw his state at once.’ And a very dangerous one in his judgement, whom I know to have the Spirit of God. 저는 당장에 그의 상태를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아주 위험한 일이겠지만, 제가 보기로는 그렇게 간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Once more, sir, let me beg you to consider whether your extreme roughness, and morose and sour behaviour, at least on many occasions, can possibly be the fruit of a living faith in Christ. If not, may the God of peace and love fill up what is yet wanting in you! – I am, reverend sir, 한 번 더 선생님께 간청합니다. 여러 경우에 보여주시는 선생님의 그 극단적으로 거친 행동, 그리고 우울함과 매서운 행동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살아있는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열매들이 아니라면, 선생님 안에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것들을 평강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존경하는 선생님, .

 
Your humble servant 선생님의 비천한 종일 뿐입니다.

 

 

  1. To a friend 친구에게
    [London, May 24 1738]

Oh why is it that so great, so wise, so holy a God will use such an instrument as me! Lor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wilt Thou send the dead to raise the dead? Yea, Thou sendest whom Thou wilt send, and showest mercy by whom Thou wilt show mercy! Amen! Be it, then, according to Thy will! If Thou speak the word, Judas shall cast out devils.오 왜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도구로 삼으시는 것일까! 주님,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보내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보낼 자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비를 나타내실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아멘! 그러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될지어다. 만약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유다도 귀신들을 쫓아낼 것입니다.

 

I feel what you say (though not enough), for I am under the same condemnation. I see that the whole law of God is holy, just, and good. I know every thought, every temper of my soul ought to bear God’s image and superscription. But how am I fallen from the glory of God! I feel that ‘I am sold under sin’. I know that I, too, deserve nothing but wrath, being full of all abominations, and having no good thing in me to atone for them or to remove the wrath of God.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말한 것을 느끼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은 저주의 상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의롭고 또한 선한 것임을 알고 있어.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기질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명을 드러내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 “나는 죄아래 팔렸다”고 느껴. 나도 또한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어. 저주받을 것들로 넘치는데 그것들을 처리할 만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어떤 선한 것이 내 안에는 전혀 없단 말이야.

 

All my works, my righteousness, my prayers need an atonement for themselves. So that my mouth is stopped. I have nothing to plead. God is holy; I am unholy. God is a consuming fire; I am altogether a sinner, meet to be consumed. 나의 모든 행위, 나의 의, 나의 기도는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야. 내 입술로는 할 말이 없어. 무엇도 탄원할 만한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데, 나는 불결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길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야, 소멸당하기에 딱 맞는 그런 죄인이란 말이야.

 

Yet I hear a voice (and is it not the voice of God?) saying,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He that believeth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지만 나는 한 목소리를 듣고 있어(이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나에게 말하기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Oh let no one deceive us by vain words, as if we had already attained this faith! By its fruits we shall know. Do we already feel ‘peace with God’ and ‘joy in the Holy Ghost’? Does ‘His Spirit bear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Alas! with mine He does not. Nor, I fear, with yours. O Thou Saviour of men, save us from trusting in anything but Thee! Draw us after Thee! Let us be emptied of ourselves, and then fill us with all peace and joy in believing; and let nothing separate us from Thy love, in time or in eternity! 헛된 말로 속임을 당하지 말자구나. 이런 믿음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열매로 우리가 안다고 하지 않니.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과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어쩌나! 나의 영과 더불어 그 분이 증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데. 염려가 되는 것은, 너의 영과 더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쟎나.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오직 당신만 신뢰할 수 있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믿음 중에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눠지지 않게 하소서. 이 생에건 영원 속에서이건!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칼빈의 회심

아래의 글은 칼빈의 시편주석의 서문(기록년대:1557년)에 나와있는 칼빈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입니다. 여기서 그는 1523에서 1535년도까지의 일들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살짝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은 칼빈자신은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연구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여러가지 설명들을 하게 합니다.

 

아래의 시편주석서문에 나와있는 칼빈의 회심간증을 분석하면서 Alexander Ganoczy라는 로마천주교회측의 연구자는 그의 “갑작스러운 회심”을 칼빈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한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강조하였던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회심, 곧 기적으로서의 회심(conversion as miracle)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표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the Young Calvin, Edinburgh: T& T Clark, 1987, p.252-266). 옳은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다”(sudden)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상의 순간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에 의한 회심이란 뜻입니다.

 

그런 면을 감안하면서 아래의 칼빈의 간증을 음미해야 합니다. 그가 어린시절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공부를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억지로 신학공부하였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칼빈의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그의 제자 베자(T.Beza)는 칼빈이 신학공부를 하던 그 당시 칼빈의 마음은 “completely absorbed in theology”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전에 일련의 발전의 과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심에 이르기까지 그 내부에서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 글을 루터의 회심과 함께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이렇게 칼빈이 “신학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자신을 그 당시에 “회심하였었다”고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신학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은 자신의 지적 즐거움이나 종교심의 발로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개입을 체험하게 된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회심”의 때였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아래의 회심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너무나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어쩌면 감추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을 극히 조심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정이나 체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시편을 주석하면서 이 시편이야말로 인간심리의 박물관이라고 묘사 한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탄식과 불안, 회의와 좌절, 공포와 의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내면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칼빈은 너무나도 명민하게 간파하고 실감나게 주석합니다. 칼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쩜 그의 시편주석을 칼빈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칼빈의 마음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칼빈이 우리들에게 바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Jean Calvin: conversion experience

 

Jean Calvin, Commentary on the Psalms (1557), Corpus Reformatorum (Opera Calvini), ed. G. Baum, E Cunitz and E. Reuss (59 vols, Braunschweig (Brunswick), 1863-80) vol lvix cols 22-4.

 

 

 

When I was still a small boy, my father had destined me for the study of theology.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내 부친께서는 신학공부를 하기를 원하셨다. But afterwards, when he perceived that the legal profession was usually financially advantageous to its members, this prospect induced him suddently to change his mind. 하지만, 얼마 뒤에 법률계통의 일을 하게 되면 보통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질 것을 아시고는 갑자기 그의 마음을 바꾸셨다. So it came to pass that I was withdrawn from the stuyd of arts, and transferred to the study of law. 그래서 일반문예과목들 공부하는 것이 취소되고 나는 법률공부로 옮기게 되었다. I endeavoured faithfully to apply myself to this course, in obedience to the will of my father. 나는 부친의 뜻을 존중해서 이 공부에 성실하게 임하기로 하였다. But God, by the secret guidance of his providence, at length gave a different direction to my life.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비밀하신 섭리의 운행을 따라서, 마침내 내 인생에 다른 경로를 허락하셨다. And first, since I was too obstinately devoted to the superstitions of Popery to be easily extricated from so profound a labyrinth, God, by a sudden conversion changed my mind from one which had been more definitively made up than my years warranted into something more receptive . . . .처음에는 교황제도의 미신에 너무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어서 그 깊은 미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바꾸셔서, 여러 해 동안 보장되어 왔던 고집스럽던 마음에서 더욱 수용적인 마음이 되게 하셨다….. Being of a retiring disposition and preferring leisure and obscurity, I then sought a quiet retreat . . . .물러서 있으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고 여유와 숨어있는 것을 보다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 조용히 뒷전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Certain wicked and lying pamphlets were circulated . . . .사악하게 거짓말하는 유인물들이 나돌고 있었다. It appeared to me, that unless I opposed them to the utmost of my ability, my silence could not be cleared of the charge of cowardice and treachery. 나로서는 내 힘을 다해서 그것들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면 나의 침묵은 비겁함과 배신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던 것 같았다. This was the consideration which induced me to published my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기독교강요를 기술하기 시작하였었던 것이다. When it was published, it was not that copious and laborious work which it now is, but only a small treatise contained a summary of the principal truths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it was published with no other design than that men might know what was the faith held by those whom I saw basely and wickedly defamed by those base and treacherous flatterers . .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는 지금 것처럼 부피가 두꺼웠던 것이 아니라, 짧게 기독교신앙의 주요진리를 요약한 것이었다; 그것을 출판한 것은 단지 저열하고 간사한 농간자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불명예를 당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고 하였던 것뿐이었다.

 

 

영어번역본 출처 http://www.st-andrews.ac.uk/jfec/cal/reformat/theologb/biofrag1.htm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마틴 루터의 회심

 

 

 

 

Martin Luther’s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마틴 루터의 회심간증

 

 

 

by Martin Luther (1483-1546)

 

 

마틴 루터

 

http://homepage.mac.com/shanerosenthal/reformationink/index.htm

 

The following selection is taken from the Preface to the Complete Edition of Luther’s Latin Writings. It was written by Luther in Wittenberg, 1545. This english edition is availble in Luther’s Works Volume 34, Career of the Reformer IV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0), p. 336-337. In the first few lines of this selection, Luther writes, “during that year;” the immediate context indicates he is refering to the year of Tetzel’s death (July, 1519). This puts the date for Luther’s conversion, in his own view, two years after the posting of the ninety-five theses.

 

아래의 글은 루터의 라틴저작 전집에 대한 서문에서 가져온 것인데, 1545년 비텐베르그에서 루터가 쓴 것이다. 영어번역본은 루터전집 34권(Carreer of the Reformer시리즈 IV, St.Louis: Concordia Publsihing House, 1960)의 336-337쪽에 실린 것이다. 이 글의 첫부분에 보면 루터가 “그 해에”(during that year)라는 말을 하는데, 앞뒤 맥락을 보면 “그 해”란 테쩰이 죽은 해(1519년 7월)를 가르킨다. 이것은 루터 자신이 자신의 회심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그 날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95개조조항을 작성하고 나서 2년이 지난 때이다(한글역주: 루터의 회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설교에서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95조개조항 작성 2년 뒤라고 하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다고 할 수 있는 95개조항, 이미 그 안에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또한 가장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이 95개조항을 작성하였으면서도 루터는 아직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놀래야 할 일이다. 한글로 이것을 번역하는 역자로서, 목사가 된 지 5년 뒤에야 회심을 하였다는 간증을 하게 되면 어떤 분들은 믿어지지 않는다 하거나, 어떤 특별한 체험 정도로 그 의미를 희석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회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회심하던 시기는 아래의 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해서 대학에서 이미 강의까지 하던 시기였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아직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알지 못하였던 때였다는 것이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참된 회심은, 배움의 적고 많음, 깊고 얕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보다 더 강조되고 음미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번역하게 된다).

 

Meanwhile, I had already during that year returned to interpret the Psalter anew. I had confidence in the fact that I was more skilful, after I had lectured in the university on St. Paul’s epistles to the Romans, to the Galatias, and the one to the Hebrews. I had indeed been captivated with an extraordinary ardor for understanding Paul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But up till then it was not the cold blood ab out the heart, but a single word in Chapter 1,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that had stood in my way. For I hated that word “righteousness of God,” which, according to the use and custom of all the teachers, I had been taught to understand philosophically regarding the formal or active righteousness, as they call it, with which God is righteous and punishes the unrighteous sinner.

 

그러던 중 나는 이미 그 해에 시편해석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대학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에 대한 강의를 끝냈었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더욱 (해석문제에 있어서) 숙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었다. 물론 이미 로마서에서의 바울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내 앞에서 놓여져 있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1장의 한 마디,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그 말을 증오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교사들의 용례와 관습에 의해서 나는 그 말을 형식적 의, 혹은 적극적인 의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받아 왔었다. 그 교사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불의한 죄인들을 그 의로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Though I lived as a monk without reproach, I felt that I was a sinner before God with an extremely disturbed conscience. I could not believe that he was placated by my satisfaction. I did not love, yes, I hated the righteous God who punishes sinners, and secretly, if not blasphemously, certainly murmuring greatly, I was angry with God, and said, “As if, indeed, it is not enough, that miserable sinners, eternally lost through original sin, are crushed by every kind of calamity by the law of the decalogue, without having God add pain to pain by the gospel and also by the gospel threatening us with his righteousness and wrath!” Thus I raged with a fierce and troubled conscience. Nevertheless, I beat importunately upon Paul at that place, most ardently desiring to know what St. Paul wanted.

 

나는 수도사로서 흠없이 살아왔었지만, 극도로 혼란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채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었다. 나는 나의 (수도사로서의 흠없는 삶을 통한) 만족스럽게 살아오는 것으로 그가 만족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 미워하였던 것이다. 비밀스럽게, 공공연하게 불경스럽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엄청나게 불평하면서 하나님에게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불행한 죄인들이 원죄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잃어진 바 되어서 십계명의 율법에 의해서 모든 종류의 재난들로 짓이겨지는 것에도 만족치 않으시는 것 같으셔! 그것에다가 복음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시고 또한 그 복음에 의하여 당신의 의와 진노로 우리들을 위협하시다니!” 그래서 나는 맹렬하면서 혼란스러운 양심으로 분노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곳에서(역주: 롬1:17) 우연스럽게도 바울과 만났던 것이고, 가장 열정적으로 바울이 원하였던 것을 알고 싶어했었다.

 

At last, by the mercy of God, meditating day and night, I gave heed to the context of the words, namely,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as it is written,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 There I began to understan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at by which the righteous lives by a gift of God, namely by faith. And this is the meaning: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by the gospel, namely, the passive righteousness with which merciful God justifies us by faith, as it is written,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 Here I felt that I was altogether born again and had entered paradise itself through open gates. There a totally other face of the entire Scripture showed itself to me. Thereupon I ran through the Scripture from memory. I also fount in other terms an analogy, as, the work of God, that is what God does in us, the power of God, with which he makes us wise, the strenght of God, the salvation of God, the glory of God.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밤낮으로 묵상을 하는 중에, 이 말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이 나오는 그 맥락에 주의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곧 믿음으로 살게 되게 하는 그런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렇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의해서 나타나(곧 계시되어지)는 것인데, 곧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수동적 의이며, 그래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꺼번에 거듭나게 되고 활짝 열려진 문들을 통해서 천국 그 자체에 들어간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나에게 전체 성경의 전적으로 다른 얼굴이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구절 위에 그때까지 암송하고 있던 다른 성경구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또한 다른 용어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같은 용어들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의 비유를 발견하였다.

 

And I extolled my sweetest word with a love as great as the hatred with which I had before hated the word “righteousness of God.” Thus that place in Paul was for me truly the gate to paradise. Later I read Augustine’s The Spirit and the Letter, where contrary to hope I found that he, too, interpreted God’s righteousness in a similar way, as the righteousness with which God clothes us when he justifies us (Augustine passage included below). Although this was heretofore said imperfectly and he did not explain all things concerning imputation clearly, it nevertheless was pleasing that God’s righteousness with which we are justified was taught.

 

그리고 나는 이전에 그렇게도 증오하였던 단어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제는 가장 열정적인 사랑으로 나의 그 가장 달콤한 단어, “하나님의 의”를 극찬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 안에 있는 그 장소는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극락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다. 후에 나는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나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도 또한 하나님의 의를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게 해주실 때에 우리들에게 의로 옷입혀 주신다는 식으로 그도 해석하고 있었다. 비록 그 당시로서는 불완전하게 표현되어지고 또한 (의의) 전가에 관하여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하였다.

 

Selections from Augustine’s The Spirit and the Letter to which Luther Refers: 루터가 언급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로부터의 인용글

 

Chapter 15 [IX.] – The Righteousness of God Manifest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15장-율법과 선지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

 

Here, perhaps, it may be said by that presumption of man, which is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wishes to establish one of its own, that the apostle quite properly said,” For by the law shall no man be justified,”46 in as much as the law merely shows what one ought to do, and what one ought to guard against, in order that what the law thus points out may be accomplished by the will, and so man be justified, not indeed by the power of the law, but by his free determination.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해서 자신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단지 사람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 행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의 율법이다. 그래서 그 율법이 가르키는 것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게 한 그런 율법이다. 그래서 당연히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해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게 되는 그런 율법 말이다. But I ask your attention, O man, to what follows. “But now the righteousness of God,” says he, “without the law is manifested, being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47 Does this then sound a light thing in deaf ears? 하지만, 오,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이 그 다음에 곧 이어 말하는 것에 주목하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니라.” He say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 그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Now this righteousness they are ignorant of, who wish to establish one of their own; they will not submit themselves to it.48 His words are,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 he does not say, the righteousness of man, or the righteousness of his own will, but the “righteousness of God,” – not that whereby He is Himself righteous, but that with which He endows man when He justifies the ungodly. 지금 이 의에 대해서 무지해서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도의 말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한다. 인간의 의나 인간 자신의 의지의 의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를 인간에게 허락하셔서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하는 그런 의를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This is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in other words, the law and the prophets each afford it testimony.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를 받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율법과 선지자들이 각각 그것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The law, indeed, by issuing its commands and threats, and by justifying no man, sufficiently shows that it is by God’s gift, through the help of the Spirit, that a man is justified; and the prophets, because it was what they predicted that Christ at His coming accomplished. 물론, 율법은 그 명령과 위협을 선포함과 어떤 인간도 의롭게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였기 때문에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Accordingly he advances a step further, and adds, “But righteousness of God by faith of Jesus Christ,”49 that is by the faith wherewith one believes in Christ for just as there is not meant the faith with which Christ Himself believes, so also there is not meant the righteousness whereby God is Himself righteous. 따라서 바울 사도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이것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어떤 사람이 믿게 되는 그 믿음을 말한다. 그리스도 그 분께서 믿으시는 그런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의로우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의로우심을 의미하는 것도 또한 아니다. Both no doubt are ours, but yet they are called God’s, and Christ’s, because it is by their bounty that these gifts are bestowed upon us. 의심할 것도 없이 이 둘은 모두 우리들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선물들이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n is without the law, but not manifested without the law; for if it were manifested without the law, how could it be witnessed by the law?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율법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율법 없이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 율법에 의해서 어떻게 그 의가 증거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That righteousness of God, however, is without the law, which God by the Spirit of grace bestows on the believer without the help of the law, – that is, when not helped by the law.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성령에 의해서 율법의 도움 없이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곧 율법의 도움 없이도 주시는 것이다. When, indeed, He by the law discovers to a man his weakness, it is in order that by faith he may flee for refuge to His mercy, and be healed.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피난처를 삼도록 도피하게 되어 치료를 받게 되는 순서이다. And thus concerning His wisdom we are told, that “she carries law and mercy upon her tongue,”50 – the “law,” whereby she may convict the proud, the “mercy,” wherewith she may justify the humbled. 그래서 그 분의 지혜에 관하여 말하기를, “지혜가 율법과 자비를 그 입으로 전하느니라”고 한다. “율법”이라 함은 지혜가 그것으로 교만한 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며 “은혜”라 함은 그것으로 지혜가 겸비해 진 자들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n, “by faith of Jesus Christ, is unto all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for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51 – not of their own glory.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르게 되는데,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그들 자신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For what have they, which they have not received?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Now if they received it, why do they glory as if they had not received it?52 그것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마치 그들이 전혀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Well, then, they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 now observe what follows: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53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온가 주의해 보라. It is not, therefore, by the law, nor is it by their own will, that they are justified; but they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 not that it is wrought without our will; but our will is by the law shown to be weak, that grace may heal its infirmity; and that our healed will may fulfil the law, not by compact under the law, nor yet in the absence of law.그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들의 의지가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회복된 의지가 율법을 이루는 것이지, 율법 아래에서의 계약에서 의해서나 율법이 전혀 없는 채로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다.

 

Chapter 16 X.] – How the Law Wa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제 16장-어떻게 율법이 의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닌가?  

 

Because “for a righteous man the law was not made;”54 and yet “the law is good, if a man use it lawfully.”55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또한 “율법을 선하게 사용하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Now by connecting together these two seemingly contrary statements, the apostle warns and urges his reader to sift the question and solve it too.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 두 말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사도바울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면서 또한 그것에 답을 제공하고 있다. For how can it be that “the law is good, if a man use it lawfully,” if what follows is also true: “Knowing this, that the law i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56 만약 어떤 사람이 율법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면 그 율법은 선하다고 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 사실을 알면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참일 수 있단 말인가? For who but a righteous man lawfully uses the law? 의로운 사람 외에 어떤 사람이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Yet it is not for him that it is made, but for the unrighteous. 하지만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Must then the unrighteous man, in order that he may be justified, – that is, become a righteous man, – lawfully use the law, to lead him, as by the schoolmaster’s hand,57 to that grace by which alone he can fulfill what the law commands? 그러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곧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하여서 자신을, 마치 몽학선생의 손에 인도함을 받아 그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바로 그 사람 자신이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은혜에 이를 수 있어야만 된단 말인가? Now it is freely that he is justified thereby, – that is, on account of no antecedent merits of his own works; “otherwise grace is no more grace,”58 since it is bestowed on us, not because we have done good works, but that we may be able to do them, – in other words, not because we have fulfilled the law, but in order that we may be able to fulfill the law. 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값없이 되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의 이전의 어떤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선한 행위를 행하였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Now He said, “I am not come to destroy the law, but to fulfil it,”59 of whom it was sai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60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왔노라”고 하셨고 그 예수님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우리들이 그 영광을 보았는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This is the glory which is meant in the words,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61 and this the grace of which he speaks in the next verse,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62 바로 이 영광이 “우리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의 그 영광이며 은혜는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오는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말의 그 은혜이다. The unrighteous man therefore lawfully uses the law, that he may become righteous; but when he has become so, he must no longer use it as a chariot, for he has arrived at his journey’s end, – or rather (that I may employ the apostle’s own simile, which has been already mentioned) as a schoolmaster, seeing that he is now fully learned. 불의한 사람은 그러므로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의롭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그 율법을 전차수처럼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여행 종착지에 이미 도착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언급했던 사도바울의 비유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미 충분하게 성장한 몽학선생으로서 그 율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How then is the law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if it is necessary for the righteous man too, not that he may be brought as an unrighteous man to the grace that justifies, but that he may use it lawfully, now that he is righteous? 어떤 사람이 불의한 사람으로서 그를 의롭게 하는 은혜로 인도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제 의롭게 된 사람으로서 그것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Does not the case perhaps stand thus, – nay, not perhaps, but rather certainly, – that the man who is become righteous thus lawfully uses the law, when he applies it to alarm the unrighteous, so that whenever the disease of some unusual desire begins in them, too, to be augmented by the incentive of the law’s prohibition and an increased amount of transgression, they may in faith flee for refuge to the grace that justifies, and becoming delighted with the sweet pleasures of holiness, may escape the penalty of the law’s menacing letter through the spirit’s soothing gift? 의롭게 되어진 사람이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가 불의한 사람을 그 율법을 사용하여 경계함으로 어떤 비상한 욕망의 질병이 그들 속에서 금지하는 율법의 자극에 의하여 축적되고 또한 범죄의 양이 증가되어서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자신들을 의롭게 하는 은혜로 믿음을 갖고 도피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달콤한 즐거움을 주는 거룩함을 기뻐하게 되고 협박하는 율법의 문서가 요구하는 형벌로부터 도피하여 영의 달콤한 선물들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인 것이 아마도, 아니, 확실한 것이 아닐까? In this way the two statements will not be contrary, nor will they be repugnant to each other: even the righteous man may lawfully use a good law, and yet the law be not made for the righteous man; for it is not by the law that he becomes righteous, but by the law of faith, which led him to believe that no other resource was possible to his weakness for fulfilling the precepts which “the law of works”63 commanded, except to be assisted by the grace of God. 이런 방식으로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의로운 사람조차도 합당하게 선한 율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법, 곧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행위의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그 계명들을 성취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는 그 믿음에 의해서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 계명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예수님이 옳으셨다

예수님이 옳으셨다
● 내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 험담하기보다 그를 품는다. 나는 관계가 회복될 때의 기쁨을 안다. 아니, 적어도 깨끗한 양심의 기쁨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 몰래 숨겨 두고 싶던 돈을 헌금한다. 나는 더 많이 베푸는 기쁨을 안다. 아니, 적어도 인색해지지 않을 때의 마음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 나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만, 단순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진실할 때의 기쁨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집을 짓는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집’이라는 단어를 ‘성격’이나 ‘영혼’으로 대체해 보라. 우리가 하는 선택의 질은 우리의 성격과 영혼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어리석은 건축자들에게 확실한 기초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분의 지혜를 나눠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위에 집을 세운다면 예수님의 옳으심을 알게 될 것이며, 결코 실망할 일이 없을 것이다.
– 「누더기 하나님」/ 존 오트버그

주님만이 저의 지혜시고 의로움이시고 거룩함과 구원이십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좇지도 말게 하시며, 영원한 지혜이신 주님만을 붙들게 하시며 주님의 말씀위에 삶을 세워지게 하소서 주님만이 옳으심을 고백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아멘

 

[출처] by graced | 2007/10/17 ♥오늘의 묵상과기도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누구나 한 번쯤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년, 짧으면 겨우 하루 24시간 정도라 할까요. 독자들은 그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합니다. 이 경우 주인공에겐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행동반경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죄수는 그러므로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내가 만약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어떤 사건이나 경험, 관계들로 채워야 할까요?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행복한 기억은 무엇이고 후회스러운 일은 또 무엇일까요?

이따금씩 생각해봅니다. 매일매일 내일 당장 죽을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라고요. 그러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록새록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부드럽고 활기차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하지만, 우리 앞에 많은 날들이 끝없이 펼쳐질 거라 생각할 때에는 그런 마음을 종종 잃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쾌락주의 좌우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확실히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삽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마지막 순간에 행운의 여신에게 구원을 받곤 하는데, 대게의 경우 구원은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삶의 의미와 그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또는 살았던 사람들이 매사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걸 우리는 자주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아직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일수록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 또한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살날만 창창하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데 정신이 팔려 삶 자체에는 무심하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무심함이 우리가 가진 재능과 감각의 쓰임새를 한정적으로 특징지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은 귀머거리뿐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소경밖에 모릅니다. 특히 후천적인 이유로 청각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 감각의 소중함을 정실히 깨닫습니다. 하지만 시각이나 청각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그 능력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집중하지도 않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풍경이며 온갖 소리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무릇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누구나 막 성년이 되었을 즈음 며칠 동안만이라도 소경이나 귀머거리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깨워줄 것이며, 정적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나는 가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그들이 보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해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 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봄이 오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첫 신호인 어린 새순을 찾아 나뭇가지를 살며시 쓰다듬어봅니다. 꽃송이의 부드러운 결을 만지며 기뻐하고, 그 놀라운 나선형 구조를 발견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와 같이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도 즐겁지만 수북하게 쌓인 솔잎이나 푹신하게 깔린 잔디를 밟는 것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반갑습니다. 계절의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벅찬 드라마이며, 그 생동감은 내 손가락 끝을 타고 흐릅니다.

때로 내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집니다.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데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더군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마 인간일 겁니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만약 대학 총장이라면 ‘눈을 사용하는 법’이란 강의를 필수 과정으로 개설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들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즐거울지를 알게 해주는 강의가 되겠지요. 말하자면, 나태하게 잠들어 있는 기능을 일깨우는 겁니다.

 

내가 만일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가장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내 눈을 어떻게 써야 할까?” 셋째 날이 저물고 다시금 어둠이 닥쳐올 때. 이제 다시는 자신을 위한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자. 이제 사흘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여러분의 눈길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게 소중했던 것들입니다. 여러분 또한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그 후에 닥쳐올 어둠 속으로 그 기억을 가져가고 싶으실 겁니다.
다시 암흑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메이시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또한 선생님의 눈빛 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강한 개성과 내게도 자주 보여주셨던 전 인류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도 보고 싶습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지만, 나는 친구의 마음을 눈을 통해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만져지는 얼굴의 윤곽을 느낄 뿐입니다. 웃음과 슬픔,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감정들도 손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만져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냅니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내게 취하는 행동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격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을 지켜보고, 여러 가지 표현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그들의 눈빛이나 안색이 돌변하는 것을 주시해서 그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겐 없습니다.

내가 가까운 친구들을 그나마 잘 아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 달 여러 해를 나와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가깝지 않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을 맞잡았을 때의 감촉, 말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을 때의 느낌, 내 손바닥에 와닿는 촉감을 통해서 얻은 것들입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 근육의 떨림, 손의 흔들림 같은 걸 보고 사람의 본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한편 볼 수 있다고 해서 과연 친구나 지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얼굴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은 가장 친한 친구 다섯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가능한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시험삼아 나는 남자분들에게 자기 아내의 눈동자 색깔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가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며 모른다고 대답하더군요. 하긴 새 옷이나 모자를 사도, 집안의 가구를 옮겨놓아도 남편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는 아내들의 불평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일상적 환경에 쉽사리 익숙해지기 때문에, 실제로 놀랍거나 멋진 것을 보더라고 금방 싫증을 내고 맙니다. 법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증인들의 목격담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목격자와 수만큼이나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보는 사람은 간혹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걸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내게 사흘 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꼭 보고 싶은지 얘기하는 중이었군요. 그럼 계속 해야겠지요?

첫째 날은 아주 바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그들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의 외적인 증거를 가슴에 새길겁니다. 또한 아기 얼굴 위에 오래도록 시선을 둔 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을 아직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내 충직하고 믿음직한 개 두 마리의 눈도 들여다보렵니다. 스코티 종 다키는 용감하고 빈틈없는 친구요, 건장하고 유순한 그레이트데인 종 헬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재미있는 친구여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답니다.

그토록 바쁜 첫째 날에, 내 작고 아담한 집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 벽에 걸린 그림들,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을 친밀감 넘치는 장식물들도 보고 싶네요. 내 눈은 내가 읽은 점자책들 위에 경건하게 머물 것입니다. 그것들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읽는 인쇄된 책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겁니다. 기나긴 밤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서 누군가 읽어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등대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날 오후, 나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그리고 눈이 보이는 사람들에겐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자연의 장대한 영광을 단 몇 시간 안에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침 가까운 농장이 있어서, 끈기 있게 발을 가는 말들과(어쩌면 트랙터만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흙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신선한 즐거움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거기에 더해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놀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합니다.

자연이 어둠을 선언했을 때도 인간의 천재성은 인공적인 빛을 만들어 세상을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리면 나는 비로소 인간이 만든 빛의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쁨을 두 배나 누리게 될 겁니다.

 

첫째 날 밤, 나는 하루 동안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가득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겁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둘째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습니다. 태양이 잠든 대지를 깨우는 장엄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이로울까요.

나는 이날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라는 시대의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싶은 바람이랄까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하루만에 보느냐? 박물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나는 가끔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가서 거기 전시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만져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지구의 압축된 역사와 그 주민들 – 원시 자연환경 속에 그려넣은 동물이며 인간들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싶었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두뇌는 막강한 인간들이 나타나 동물의 왕국을 정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지구를 누비고 다녔던 공룡이나 마스토돈의 거대한 화석들과 동물의 진화 과정을 실감나게 표현한 전시물 그리고 인간이 이 지구를 안전한 거주지로 만드는 데 사용했던 도구들, 그 외에 자연사의 다른 수많은 측면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 중 그 흥미로운 박물관의 놀라운 전시물들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럴 기회가 없었던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기회가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분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참으로 눈여겨봐둘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입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날 며칠이고 그곳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사흘동안만 빛을 허락받은 사람은 겨우 슬쩍 훑어보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입니다. 자연사박물관이 이 세계의 물질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인간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예술적 표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과 주거, 종족번식의 욕구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이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넓은 전시실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영혼이 녹아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고대 나일 강 유역을 거닐던 신들과 여신들을 내 손의 감촉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과르테논 신전의 부조 복사품도 몇 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아테네 전사들의 율동미 또한 이미 느껴본 바 있습니다. 아폴로와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상은 내 손가락 끝의 친구들이랍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호메로스의 주름진 얼굴 생김새가 특히나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역시 장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로마와 그 다음 세대의 조각품들을 어루만지며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또 미켈란젤로의 영감이 깃든 당당한 모세 상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로댕의 힘을 더듬으며 고딕 목각품에 깃든 헌신적인 정신에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예술품들은 내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보다는 눈으로 보기에 적합하게끔 창조된 것들은 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감추고 말기에 나는 그에 대해서는 다만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 화병의 단순한 선에 감탄할 수는 있지만, 거기 새겨진 무늬에 대해서는 통 알 수가 없더군요.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색하는 일에 둘째 날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알던 것들을 나는 이제 눈으로 봅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경건한 종교적 헌신을 의미했던 미술이 근대에 이르러 열광적인 비전으로 승화된, 이들 회화의 세계가 그 웅장한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나는 라파엘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렘브란트의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볼 것입니다. 또한 베로네제의 따뜻한 색조로 눈호강을 하고, 엘그레코의 신비를 탐색하고, 코로의 풍경화에서는 자연주의의 새로운 비전을 감지 해보겠습니다. 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각 시대의 예술품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건가요?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는 그 짧은 기간만으로는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예술의 세계의 극히 적은 한 부분도 제대로 찬찬히 감상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저 피상적인 인상만 받아 가질 수 있을 뿐. 예술가들은 진정으로 예술을 깊이 감상하려면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선과 구성과 형태와 색의 장점을 이해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만약 내가 볼 수 있어 그런 환상적인 공부에 뛰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지만 내 주위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의 세계를 그저 캄캄한 밤처럼, 빛이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이야기들 하더군요.

아름다움은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데, 그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매우 섭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기 위해 굳이 메트로폴리탄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똑같은 열쇠가 그보다 더 작은 미술관이나 또는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책들 속에도 있는걸요. 하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나마 사흘밖에 볼 수 없기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이곳 메트로폴리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날 저녁은 연극이나 영화를 보며 지내고 싶습니다. 지금도 나는 온갖 연극을 보러 다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친구가 손바닥에 써줘야만 알 수 있답니다. 그러니 햄릿의 매력적인 모습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희극적 인물을 대표하는 뚱보 폴스타프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햄릿의 우아한 동작와 폴스타프의 쾌활한 걸음걸이를 눈으로 쫓을 수 있다면! 그런데 주어진 시간 동안 볼 수 있는 게 단 한 편뿐이라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닐 수 없겠군요. 꼭 보고 싶은 연극이 너무 많거든요. 여러분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연극을 언제든 보겠지요.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나 멋진 경치를 보면서 그 색채와 우아함과 율동을 즐길 수 있는 시력의 기적을 고마워한 분들이 얼마나 계시는지요?

나는 내 손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의 율동미 밖에는 즐길 수가 없습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진동을 통해 리듬의 즐거움을 조금 알고 있긴 하지만, 안나 파블로바1881~1931.러시아의발레리나의 우아한 발레 동작은 그저 어렴풋하게 상상이나 해볼 뿐입니다. 율동적인 움직임이야말로 상상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광경 중 하나일 겁니다. 나는 대리석상의 윤곽선을 더듬어보면서 그 율동미를 조금이나마 느낀답니다. 정적인 우아함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동적인 우아함을 보는 건 얼마나 감동적일까!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 중 하나는 조지프 제퍼슨이 사랑스러운 립 밴 윙클w. 어빙 작<더 스케치 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연기하며 나에게 자기 얼굴과 손을 만지도록 해준 일입니다. 나는 그때 연극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극 공연을 보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서 누리는 기쁨을 보고 들을 수 없는 내가 온전히 맛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딱 한편의 연극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직접 읽거나 수화 알파벳으로 전해 들었던 수백 편의 연극들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여 둘째 날 밤에는 희곡작품 속의 위대한 인물들이 내 눈에서 잠을 걷어내겠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또다시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매일매일 밝아오는 새벽이 영원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의 계시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날은 내가 볼 수 있는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군요. 비록 상상으로 만들어낸 기적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후회나 아쉬움 따위로 낭비할 시간이 내겐 없답니다. 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거든요. 첫날은 친구들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바쳤습니다.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느라고 보냈습니다. 오늘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낼까 합니다. 그러자면 뉴욕만큼 활동이 왕성하고 수많은 상황이 연일 벌어지는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뉴욕을 행선지로 정하겠습니다.

롱아일랜드의 포리스트힐 근교에 있는 내 집에서부터 시작하렵니다. 푸른 잔디와 숲과 꽃으로 둘러싸인 이곳엔 도시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쉼을 주는 마치 낙원과도 같은 작고 깨끗한 집들이 있고, 집집마다 그 집의 안주인과 아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떠드는 행복한 목소리가 넘쳐납니다. 나는 이스트리버로 뻗은 레이스 모양의 철제 구조물을 지나 강력하고 창의적인 인간 정신이 빚어낸 새롭고 놀라운 광경을 바라볼 것입니다. 선박들이 바쁘게 강을 오르내리고, 모터보트는 쾌속으로 질주하고, 예인선은 느릿느릿 증기를 뿜어냅니다. 만약 내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중 많은 날들을 이 강 위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보내고 싶습니다.

눈앞에 뉴욕의 매력적인 고층 빌딩들이 솟아 있습니다. 동화책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도시입니다. 얼마나 멋진 광경인지요! 반짝이는 뾰족탑, 돌과 철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제방, 신의 손으로 빚어낸 듯한 조각들, 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은 수백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시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들의 눈엔 이 멋진 광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나는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로 급히 올라가겠습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비서의 눈을 통해 본 적이 있답니다. 상상하던 모습과 현실을 비교하는 것이 조금 두렵군요.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광경일 테니까요.

이제 나는 도시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우선 아주 번화한 곳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미소를 보고 행복을 느낍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낍니다.

나는 5번가를 천천히 걸어갑니다.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지 않고, 만화경처럼 물결치며 흘러가는 색채들을 그냥 지나치며 걷습니다. 군중 속에서 움직이는 여자들의 드레스 색깔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할 테지요.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의 재단이나 스타일에 신경 쓰느라 대중 속에 녹아든 화려한 색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진열장을 가득 메운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눈이 즐거울 테니, 나는 윈도우 쇼핑에 흠뻑 맛을 들이게 될 겁니다.

이제 5번가에서 나온 나는 파크 애비뉴, 슬럼가, 공장지대,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공원 등을 들러보며 시내관광을 합니다. 외국인 거주지역도 방문해서 외국에 여행가서 민박하는 기분도 맛보렵니다. 내 눈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 모두에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더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나 행복과 불행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내 마음속은 사람들과 물건들의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또한 내 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것마다 놓치지 않고 붙잡기 위해 나는 애를 씁니다.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광경들도 있지만,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광경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고 비참한 광경에 눈을 감고 외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눈감는 것은 마음과 정신에 눈감는 것이니까요.

광명이 주어진 셋째 날이 이제 끝나갑니다. 남은 몇 시간 동안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것들이 아직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날 저녁에 나는 아주 신나는 코미디 공연이 한창인 극장으로 달려가야만 할 것 같군요. 그래서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희극적인 요소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자정이 되어 암흑으로부터의 유예 기간인 사흘이 마침내 끝나면, 나에겐 다시 영원한 밤이 이어지겠지요. 물론 그 짧은 사흘 동안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볼 순 없습니다. 어둠이 다시 내린 후에야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빠뜨리고 보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멋진 기억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빠뜨린 것에 대해 아쉬워할 겨를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부터는 만지는 것마다 사흘의 기적이 가져온 멋진 기억들이 따라와서 그 물건의 모습을 떠올려줄 테니까요.

이상, 내게 주어진 광명의 사흘을 어떻게 보낼지를 계획해보았습니다. 이 짧은 계획은 만약 여러분이 갑자기 장님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울 프로그램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여러분이 실제로 그런 운명에 처해진다면 여러분의 눈은 이전엔 결코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다가올 기나긴 밤을 위해 그 기억들을 저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할 것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당신의 눈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을 어루만지고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제대로 보게 될 것이며, 새로운 미의 세계가 당신 앞에 그 문을 열 것입니다.

나는 장님이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힌트 – 시각이란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답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다른 감각기관에도 똑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일 귀가 안 들리게 될 사람처럼 음악 소리와 새의 지저귐도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를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촉각이 모두 마비될 사람처럼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들을 만지십시오. 내일이면 후각도 미각도 잃을 사람처럼 꽃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해보십시오.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자연이 제공한 여러 가지 접촉방법을 통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세요.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축복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요약

제 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1. 감정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감정이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을 가진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능은 2가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영혼이 바라보는 사물을 인정하고 기쁘고 애착을 가지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싫어하고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감정과 격정을 종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 ‘감정’이라는 말은 ‘격정’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다. 감정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에 사용한다. 그러나 격정은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격렬하며 충동적인 상태가 되어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에 사용한다. 전자의 경우는 사랑, 갈망, 기쁨, 감사, 희망이 있고 후자에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이 있다.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마음이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하는 것은 마음에 행한 할례의 참된 열매이며, 생명의 약속이 있는 참된 거듭남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세상적인 일에서 세상적 감정이 인간의 추구와 행동의 근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 문제에서도 종교적 감정이 행동의 근본인 것이다. 감정 없이 교리 지식과 분별할 수 있는 지식만 가진 사람은 진지한 신앙생활이 힘들다.

성경은 믿음을 사랑이라는 감정 즉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과 주림과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갈망을 참된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 성경은 거룩한 기쁨 역시 참된 믿음에서 큰 부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기쁨은 믿음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자주 권면되고 진지하게 요구된다. 종교적인 슬픔, 애통함 그리고 상한 마음 역시 참된 믿음의 큰 요소로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참된 성도를 구별해주는 특질이며 그 특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참된 믿음이 역사하는 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른 감정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다. 그리고 성경은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를 참된 믿음의 크고도 본질적인 요소로 자주 말씀한다. 열정도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믿음의 아주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한다.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자신을 주실 때에 마음에 품고 계셨던 위대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성경은 모든 감정의 원천이며 그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랑 안에 참된 믿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믿음과 경건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었다. 다윗의 경우 시편에서 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며,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뿜어내고 있다.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믿음과 경건 역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인 분위기가 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고 활력을 주며 사로잡아서 그들을 강렬한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의심이 필요 없는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 속에 존재한다.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마가복음3: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에 완악하기 때문이다(에스겔3:7).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에 완고하면서 악하기 때문이다(역대하36: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에스겔11:19;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이와 반대인 부드러운 마음은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시야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열왕기하 22:19에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기술되어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팍함과 연결시킨다.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이제는 몇 가지의 추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우리는 모든 신앙감정을 믿을 수 없거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 이 땅에 영적 대각성기에 위대한 신앙감정을 가졌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올바른 성향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들이 감정적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 때에 많은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높이 고양된 감정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당연하게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교묘한 술수를 보게 된다. 사단은 신앙감정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았고,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과 그 감정들이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고 잘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오류는 결국 사람이 감정이 없는 형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신앙감정들을 경멸하고 얕잡아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서 모든 참된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멸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고상한 감정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 안에 고상한 감정들이 있을 수가 없다. 신앙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경멸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만일 참된 신앙이 대부분 감정에 있다면 감정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경향성을 지닌 수단들을 힘써 구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서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에 참된 유익을 주지 못하는 수단들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들이 감정들을 감정을 자극할 수는 있더라도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이나 은혜를 향하는 감정을 자극하지는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에 속한 일들을 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그 방법들을 본성에 적합하고 참된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그 방법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을 더 많이 일으키게 되며 그럴수록 그 방편들은 더 나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참된 믿음의 대부분이 감정 아에 있다는 것이 옳다면, 우리가 믿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감정이 더 이상 자극받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당혹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목적은 그들에게 영혼의 모든 다른 기능들과 원리들을 주신 목적과 같다. 그 목적은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큰 목적 즉 사람의 본분에 봉사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 때문에 외면적인 쾌락을 위해, 명예와 명성을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그들의 소망은 강렬해지고 욕망은 타오르며 그들의 사랑은 불이 붙고 열정은 강렬해진다. 그러나 과연 영원한 세계인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감각하고 심령이 굳어져 있으며, 강퍅해져 있는지! 그들의 열정은 식어있고 그들의 갈망은 미지근하며, 그들의 감사는 얼마나 부족한지!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한다면 그리고 쓸모없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감정은 감정의 작용이 가장 합당하게 쏟아야 할 대상을 향해 발휘대고 행사되어야 한다. 복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칭찬과 감탄과 사랑의 대상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성육신 하시고, 무한한 사랑이 있으시며,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고 또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속주의 얼굴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주를 위해서 열정적이고 강렬하게 사랑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첫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강도

신앙감정이 단지 크게 높아 졌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오류가 없는 성경은, 매우 높아졌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감정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라디아서 4:15). 11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한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하다.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그들이 크게 감화되어 찬송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자신의 놀랍게 나타나심을 보고 크게 감동했고, 거룩한 언약을 세울 때 관심을 보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잊어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시대는 어떠한가? 그가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 때에는 찬송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고 조롱과 가시 면류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결국은 신앙감정이 높다고 하더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2. 두 번째 소극적 표지: 몸의 격렬한 반응

모든 감정은 어떤 것이든 어떤 점에서든 또는 어느 정도로든 몸에 영향을 준다. 몸은 심리적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몸의 체엑 특히 본능은 마음의 변화와 심리적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을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감정으로 높아졌음을 나타내시려고 영적인 감정과 전혀 맞지 않는 것들과 사단의 교묘한 흔적들 그리고 웅덩이의 더러운 냄새를 끝없이 풍기는 것들을 아름다운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하신다고 생각지 않는다.

3. 세 번째 소극적 표지: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나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된 감정들은 그 강도가 같다면 참된 감정들보다 더 심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본질이 바로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 이 현상들의 증거다.

4. 네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사람이 지정된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자 기대한다는 것은 타당치 못한 교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 채 사람들의 마음에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열광주의적인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한 영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신체가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 또는 뇌가 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과 상상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그 원인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같은 이유로 해서 영적인 인상에서도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잠자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사단에게는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 그래서 사단은 사람의 마음속에 성경 말씀을 표현하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인 타락한 이단의 교사들이 성경 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베드로후서3:16). 우리는 그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본문이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기들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소극적 표시: 사랑의 피상적 표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함없이’라는 말은 원문에 ‘부패함 없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어도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일곱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정도

거짓된 믿음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온전함과 조화가 없지만, 매우 다양한 거짓 감정들을 합하면 은혜로운 감정과 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거짓이 있다.

회심하기 전 상태에서 사람들이 신앙감정과 유사한 모든 감정 가운데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유사한 감정을 동시에 함께 체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주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올라갈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8. 여덟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체험 순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2가지의 매우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이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나타나시기 전에 그들이 좌절하는 상태가 되어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편으로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감과 각성을 경험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꼭 회심하는 것이 순서가 확실히 수학 공식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회심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회심자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죄의 자각과 위로를 어떤 방법과 순서대로 하나씩 경험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보게 된다.

진정한 회심은 그 일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의 영적이고 신적인 본질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9. 아홉 번째 소극적 표지: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우리는 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의무적으로 하다못해 어쩛 수 없이 드린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정말 혐오스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자를 경계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경험상,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안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다른 삶은 생각하지를 않는다. 결국엔 은둔자가 되어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0. 열 번째 소극적 표지: 찬송을 열심히 부름

가장 확실한 한 예를 들자면 출애굽시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들은 분명히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는 주님을 향해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잊어버렸다.

소망과 위로 가운데 무가치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자비하심 때문에 감화되어 이 값없는 은혜를 크게 높이며 찬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감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에게 위대한 감정과 존경심으로 찬양하며 높였다. 이방의 느부갓네살 왕과 다리오 왕도 그러했다.

11. 열한 번째 소극적 표시: 자신의 구원 확신

확신이라는 것은 어떤 비상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된다(베드로후서1:5-8).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비난을 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위선자에게도 이런 확신은 있는데 그것이 확고해지면 참된 성도들은 종종 의심하는 일에서도 자기가 품은 소망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된다. 첫째로, 그는 마음이 신중해야 하고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며 자신이 속고 있다는 두려움이 없다. 둘째로, 위선자는 참된 성도에게 있는 자기 자신의 소경 됨에 대한 지식과 자기 마음의 거짓됨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신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된 깨달음과 감정으로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더 쉽게 자신들에게 있는 빛과 지식을 더 크게 자만하게 된다.

셋째로, 마귀는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소망은 공격하지만 위선자들의 소망은 공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그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를 더욱 내리시고, 깊이 품도록 하시고, 삶 속에서 더 엄격하고 부지런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것 같은 시각이 없다. 반성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에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된 깨달음과 고상함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전자는 알마니안주의자들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며 대가 없는 은혜를 많이 말한다.

12.열두 번째 소극적 표시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 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그러나 외형적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얻을 수준으로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는 제일 수준이 높은 사람들 조차도 속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던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일이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신 원리와 말씀들에 만족하고 자신들의 원리를 버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남이 인정한다고 우쭐하거나 자팩할 거 없다.

제 3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구별해 주는 표지들

1. 첫 번째 적극적 표지: 성령의 내주

우리는 참된 성도들 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을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사람인 것은 그들이 가진 고유의 자질이라고 말하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영구적으로 거하실 처소인 참된 성도들 안에 거주하신다. 그래서 성도를 자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2:20).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로서 성도와 연합한다.

성도들과 그들에게 있는 미덕들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성도들의 영혼 속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역사하시고 자신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성령 또는 거룩한 영이라고 부른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셨다고 선포한다는 것과 그것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 참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2. 두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본질은 참된 성도에게 있는 영적인 감정에서 제일 중요하고 근본적인 객관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의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받은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었기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 속에 참되고 거룩한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영광을 먼저 경험하고,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런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나중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사랑과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도의 감정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달콤한 영광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거나 뒤돌아 볼 시간이 없다, 그리고 교만하거나 태만하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

3. 세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일반적인 형태의 도덕의 의미는 아니다. 거룩함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이나 척도와 무관하고 거룩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질들과 관계없는 본성 자체로서 본성을 완성하거나 본성에 어울리는 선을 뜻한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란 의미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속성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선하고, 의롭고, 한없이 마땅하고 사랑스러우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시고, 영원하시고, 편재하시며, 장엄하고 두려운 위엄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기뻐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거룩성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위대하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4. 네 번째 적극적 표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본체의 아름다움이며,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신성이시며(베스트 오브 베스트)(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선의 무한한 근본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악이 될 것이다(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또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참된 체험적 지식은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데에서 생긴다. 믿음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여러 은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사역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 전체를 알지 못한다.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려서 성경의 참된 의미 속에 담겨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항상 그 안에 담겨있던 영광스러운 일들의 놀라운 영적 탁월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이 사랑스럽고 밝게 드러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탁월하며 합당함을 아는 것이며, 성경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합리적인 확신은 참된 증거에 기초한 확신이다. 또는 확신할 만한 좋은 이유나 정당한 근거를 기초한 확신이다.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낌으로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런 확신이 생길 때, 비로소 복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의 신성과 진실성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복음에 있는 내용이 거룩하다는 확신이 직접 마음에 생긴다. 왜냐하면 이 영광 그 자체가 복음의 신성함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영광을 분명하게 보거나 이 초 자연적 감각이 상당할 정도로 생길 때 더욱 그러하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봄으로써, 복음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확신하게 된다.

2.이런 신적인 영광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신을 더 간접적인 방식이 있음을 말한다. 1)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립하는 마음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증거 되는 말씀에 설득되어 마음이 녹아지게 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심어준다. 2)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해 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돕는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그 대상들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대상들의 상호 관계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적극적 표지: 참된 겸손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엄청나게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은혜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피조물임을 아는 겸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스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일반적으로 대단한 겸손을 가장해서 나타나지만, 영적인 교만을(아마도 보편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런 영적 질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신앙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이 탁월한 성도이며, 성도 가운데 아주 원숙한 사람이고, 자신이 특별히 선하고 위대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로, 사람이 자신의 겸손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된 체험은 보통 가짜 겸손을 동반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바로 거짓된 겸손의 본질이다. 거짓된 신앙감정은 일반적으로 그 감정을 체험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자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평가한다.

7. 일곱 번째 적극적 표지: 성품의 변화

회심은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는다. 회심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에 있는 본성 때문에 죄에 계속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은 심지어 이런 죄들에 대해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록 은혜는 악한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를 뽑지를 못하지만, 은혜의 강한 능력과 효과로 악한 본성적 기질을 고칠 수 있다. 처음 회심 때 체험하는 영적 깨달음과 감정과 마찬가지로, 회심한 후에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는 모든 깨달음과 감정들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8. 여덟 번째 적극적 표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감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많이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본질적이고,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속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기쁨,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9 아홉 번째 표지: 하나님을 두려워함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아담이나 하와나 가인 같이 그렇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 되어 있다. 어린 아이는 살만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부드럽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며, 쉽게 영향을 받으며, 쉽게 굴복한다. 영적인 일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의 말씀을 경건하고 받드는 것이다. 무서워하는 것은 죄를 지어 무서워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서워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10. 열 번째 적극적 표지: 신앙의 균형

성도들이 지닌 진정한 거룩한 감정에는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의 전체가 각인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성도들 안에 있다. 은혜의 걸맞는 은혜가 있다는 말이다.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형상이 있으며, 이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걸맞다. 그 형상은 참된 형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가 있다. 특징에 걸맞는 특징이 있고, 지체에 걸맞는 지체가 있다.

하나님의 작품에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꼐서 만드신 자연적인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1. 열한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참된 성도가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그가 죄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죄를 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에게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한다. 그가 죄를 더 애통해할수록,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의 심령이 더 상할수록 심령이 더욱더 상하기를 갈망한다. 그가 하나님과 거룩함을 더 목말라하고 더 갈망할수록, 그는 더 갈망하고 하나님을 매일 찾게 된다.그럴수록 은혜의 불꽃이 타 올라서 온 몸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한다.

12. 열두 번째 적극적 표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이 말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세상에서 성도의 행위나 실천은 기독교의 원리에 전체적으로 일치해야 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둘째, 성도는 그런 거룩한 행위를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성도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한다.

거룩함에는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전적으로 순종적이라는 평가르 받기 위해서는 그의 순종은 금지의 명령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헌신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한 사업과 같이, 신앙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아주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세 번째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나게 되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전적인 순종의 길과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해 나간다. 참된 성도들은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대한 섬김에 진저리가 날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할 수 없다. 즉 더 이상 전적으로 순종할 수 없을 정도로는 결코 변절되지 않는다.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행에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그리스도인의 행함으로 행사되고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은혜로운 감정들의 가장 주된 객관적 근거가 신적인 일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에 있는 것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거룩하게 행동하게 하는 이유는 모든 거룩한 감정의 토대인 신적인 일들에서 보이는 탁월성 즉 신령한 일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탁월성 또는 아름다운 거룩함에 있는 듯하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실천적인 경향성과 결과를 갖는 것은, 감정들이 신적인 일들이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기 때문이다.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행위는 온전히 변하지 않는다.

거룩한 감정들이 이와 같이 실천적으로 행하고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이유는 거룩한 감정들이 겸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은 순복적이고 복종적이며, 순종적인 마음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엄격하고 전반적이며 지속적인 순종을 동반하게 하는 이유는 온유함 때문이기도 하다. 온유한 심령은 참된 성도들의 감정에서 드러나며 도덕적인 악의 존재와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속에 빠르고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은혜로운 감정들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전반적이고 지속적이며 끈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에서 흘러 나오는 행위는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룩한 감정들이 거룩한 행위를 향한 진지함과 행동과 헌신과 인내를 통해 표현되고 드러내는 이유는 신앙생활에서 더 큰 성취를 얻고자 하는 영적 욕구와 갈망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참된 감정을 동반하며 퇴보하지 않고 점점 증가한다.

우리의 삶은 비타민C 같다고 할 수 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은혜를 갈망하며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신앙이 퇴화하고 죄를 짓는 옛날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늘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나누게 되면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단 15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것이 내겐 유익하다.”

우리도 역시 이런 주님이 주신 달콤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출처] changmoolee.tistory.com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1. 무엇을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며 삶이 항상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2. 스스로 ‘독립성’을 유지한다남에게 휘둘리지도 남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상사가 나를 짜증 나게 해”라고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과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기보다 유연함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변화는 불가피하며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4.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교통체증, 이미 잃어버린 수하물 등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열 받지 않는다. 그 보다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나 상황에 집중한다.

  5. 모두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때때로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6. 예측 가능한 리스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 리스크가 현실로 닥쳤을 때 어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지 철저히 평가한 뒤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행동으로 옮긴다.

  7.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아 옛날이여’라며 과거에 얽매여있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배웠다고 여기고 현재와 미래에 집중한다.

  8. 실수는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반드시 책임을 진다. 따라서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9.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축하하고 인정할 줄 알며 질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성공을 위해 묵묵히 일한다.

  10. 한 두 번의 실패로 포기하지 않는다. 실패는 성장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며 제대로 해낼 때까지 시도한다.

  11. 혼자 있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과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홀로 보내는 시간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보낸다.

  12. 세상이 자신에게 무언가 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을 바탕으로 성공할 기회를 노릴 뿐이다.

  13.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 변화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할 뿐 조급해하지 않는다.
    [출처] 에이미 모린/심리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