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누구나 한 번쯤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년, 짧으면 겨우 하루 24시간 정도라 할까요. 독자들은 그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합니다. 이 경우 주인공에겐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행동반경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죄수는 그러므로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내가 만약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어떤 사건이나 경험, 관계들로 채워야 할까요?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행복한 기억은 무엇이고 후회스러운 일은 또 무엇일까요?

이따금씩 생각해봅니다. 매일매일 내일 당장 죽을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라고요. 그러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록새록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부드럽고 활기차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하지만, 우리 앞에 많은 날들이 끝없이 펼쳐질 거라 생각할 때에는 그런 마음을 종종 잃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쾌락주의 좌우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확실히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삽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마지막 순간에 행운의 여신에게 구원을 받곤 하는데, 대게의 경우 구원은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삶의 의미와 그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또는 살았던 사람들이 매사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걸 우리는 자주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아직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일수록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 또한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살날만 창창하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데 정신이 팔려 삶 자체에는 무심하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무심함이 우리가 가진 재능과 감각의 쓰임새를 한정적으로 특징지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은 귀머거리뿐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소경밖에 모릅니다. 특히 후천적인 이유로 청각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 감각의 소중함을 정실히 깨닫습니다. 하지만 시각이나 청각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그 능력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집중하지도 않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풍경이며 온갖 소리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무릇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누구나 막 성년이 되었을 즈음 며칠 동안만이라도 소경이나 귀머거리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깨워줄 것이며, 정적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나는 가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그들이 보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해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 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봄이 오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첫 신호인 어린 새순을 찾아 나뭇가지를 살며시 쓰다듬어봅니다. 꽃송이의 부드러운 결을 만지며 기뻐하고, 그 놀라운 나선형 구조를 발견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와 같이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도 즐겁지만 수북하게 쌓인 솔잎이나 푹신하게 깔린 잔디를 밟는 것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반갑습니다. 계절의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벅찬 드라마이며, 그 생동감은 내 손가락 끝을 타고 흐릅니다.

때로 내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집니다.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데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더군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마 인간일 겁니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만약 대학 총장이라면 ‘눈을 사용하는 법’이란 강의를 필수 과정으로 개설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들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즐거울지를 알게 해주는 강의가 되겠지요. 말하자면, 나태하게 잠들어 있는 기능을 일깨우는 겁니다.

 

내가 만일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가장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내 눈을 어떻게 써야 할까?” 셋째 날이 저물고 다시금 어둠이 닥쳐올 때. 이제 다시는 자신을 위한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자. 이제 사흘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여러분의 눈길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게 소중했던 것들입니다. 여러분 또한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그 후에 닥쳐올 어둠 속으로 그 기억을 가져가고 싶으실 겁니다.
다시 암흑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메이시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또한 선생님의 눈빛 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강한 개성과 내게도 자주 보여주셨던 전 인류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도 보고 싶습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지만, 나는 친구의 마음을 눈을 통해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만져지는 얼굴의 윤곽을 느낄 뿐입니다. 웃음과 슬픔,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감정들도 손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만져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냅니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내게 취하는 행동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격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을 지켜보고, 여러 가지 표현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그들의 눈빛이나 안색이 돌변하는 것을 주시해서 그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겐 없습니다.

내가 가까운 친구들을 그나마 잘 아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 달 여러 해를 나와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가깝지 않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을 맞잡았을 때의 감촉, 말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을 때의 느낌, 내 손바닥에 와닿는 촉감을 통해서 얻은 것들입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 근육의 떨림, 손의 흔들림 같은 걸 보고 사람의 본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한편 볼 수 있다고 해서 과연 친구나 지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얼굴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은 가장 친한 친구 다섯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가능한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시험삼아 나는 남자분들에게 자기 아내의 눈동자 색깔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가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며 모른다고 대답하더군요. 하긴 새 옷이나 모자를 사도, 집안의 가구를 옮겨놓아도 남편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는 아내들의 불평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일상적 환경에 쉽사리 익숙해지기 때문에, 실제로 놀랍거나 멋진 것을 보더라고 금방 싫증을 내고 맙니다. 법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증인들의 목격담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목격자와 수만큼이나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보는 사람은 간혹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걸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내게 사흘 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꼭 보고 싶은지 얘기하는 중이었군요. 그럼 계속 해야겠지요?

첫째 날은 아주 바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그들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의 외적인 증거를 가슴에 새길겁니다. 또한 아기 얼굴 위에 오래도록 시선을 둔 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을 아직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내 충직하고 믿음직한 개 두 마리의 눈도 들여다보렵니다. 스코티 종 다키는 용감하고 빈틈없는 친구요, 건장하고 유순한 그레이트데인 종 헬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재미있는 친구여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답니다.

그토록 바쁜 첫째 날에, 내 작고 아담한 집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 벽에 걸린 그림들,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을 친밀감 넘치는 장식물들도 보고 싶네요. 내 눈은 내가 읽은 점자책들 위에 경건하게 머물 것입니다. 그것들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읽는 인쇄된 책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겁니다. 기나긴 밤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서 누군가 읽어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등대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날 오후, 나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그리고 눈이 보이는 사람들에겐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자연의 장대한 영광을 단 몇 시간 안에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침 가까운 농장이 있어서, 끈기 있게 발을 가는 말들과(어쩌면 트랙터만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흙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신선한 즐거움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거기에 더해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놀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합니다.

자연이 어둠을 선언했을 때도 인간의 천재성은 인공적인 빛을 만들어 세상을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리면 나는 비로소 인간이 만든 빛의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쁨을 두 배나 누리게 될 겁니다.

 

첫째 날 밤, 나는 하루 동안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가득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겁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둘째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습니다. 태양이 잠든 대지를 깨우는 장엄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이로울까요.

나는 이날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라는 시대의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싶은 바람이랄까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하루만에 보느냐? 박물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나는 가끔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가서 거기 전시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만져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지구의 압축된 역사와 그 주민들 – 원시 자연환경 속에 그려넣은 동물이며 인간들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싶었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두뇌는 막강한 인간들이 나타나 동물의 왕국을 정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지구를 누비고 다녔던 공룡이나 마스토돈의 거대한 화석들과 동물의 진화 과정을 실감나게 표현한 전시물 그리고 인간이 이 지구를 안전한 거주지로 만드는 데 사용했던 도구들, 그 외에 자연사의 다른 수많은 측면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 중 그 흥미로운 박물관의 놀라운 전시물들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럴 기회가 없었던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기회가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분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참으로 눈여겨봐둘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입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날 며칠이고 그곳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사흘동안만 빛을 허락받은 사람은 겨우 슬쩍 훑어보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입니다. 자연사박물관이 이 세계의 물질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인간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예술적 표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과 주거, 종족번식의 욕구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이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넓은 전시실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영혼이 녹아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고대 나일 강 유역을 거닐던 신들과 여신들을 내 손의 감촉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과르테논 신전의 부조 복사품도 몇 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아테네 전사들의 율동미 또한 이미 느껴본 바 있습니다. 아폴로와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상은 내 손가락 끝의 친구들이랍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호메로스의 주름진 얼굴 생김새가 특히나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역시 장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로마와 그 다음 세대의 조각품들을 어루만지며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또 미켈란젤로의 영감이 깃든 당당한 모세 상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로댕의 힘을 더듬으며 고딕 목각품에 깃든 헌신적인 정신에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예술품들은 내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보다는 눈으로 보기에 적합하게끔 창조된 것들은 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감추고 말기에 나는 그에 대해서는 다만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 화병의 단순한 선에 감탄할 수는 있지만, 거기 새겨진 무늬에 대해서는 통 알 수가 없더군요.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색하는 일에 둘째 날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알던 것들을 나는 이제 눈으로 봅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경건한 종교적 헌신을 의미했던 미술이 근대에 이르러 열광적인 비전으로 승화된, 이들 회화의 세계가 그 웅장한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나는 라파엘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렘브란트의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볼 것입니다. 또한 베로네제의 따뜻한 색조로 눈호강을 하고, 엘그레코의 신비를 탐색하고, 코로의 풍경화에서는 자연주의의 새로운 비전을 감지 해보겠습니다. 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각 시대의 예술품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건가요?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는 그 짧은 기간만으로는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예술의 세계의 극히 적은 한 부분도 제대로 찬찬히 감상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저 피상적인 인상만 받아 가질 수 있을 뿐. 예술가들은 진정으로 예술을 깊이 감상하려면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선과 구성과 형태와 색의 장점을 이해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만약 내가 볼 수 있어 그런 환상적인 공부에 뛰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지만 내 주위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의 세계를 그저 캄캄한 밤처럼, 빛이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이야기들 하더군요.

아름다움은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데, 그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매우 섭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기 위해 굳이 메트로폴리탄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똑같은 열쇠가 그보다 더 작은 미술관이나 또는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책들 속에도 있는걸요. 하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나마 사흘밖에 볼 수 없기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이곳 메트로폴리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날 저녁은 연극이나 영화를 보며 지내고 싶습니다. 지금도 나는 온갖 연극을 보러 다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친구가 손바닥에 써줘야만 알 수 있답니다. 그러니 햄릿의 매력적인 모습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희극적 인물을 대표하는 뚱보 폴스타프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햄릿의 우아한 동작와 폴스타프의 쾌활한 걸음걸이를 눈으로 쫓을 수 있다면! 그런데 주어진 시간 동안 볼 수 있는 게 단 한 편뿐이라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닐 수 없겠군요. 꼭 보고 싶은 연극이 너무 많거든요. 여러분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연극을 언제든 보겠지요.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나 멋진 경치를 보면서 그 색채와 우아함과 율동을 즐길 수 있는 시력의 기적을 고마워한 분들이 얼마나 계시는지요?

나는 내 손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의 율동미 밖에는 즐길 수가 없습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진동을 통해 리듬의 즐거움을 조금 알고 있긴 하지만, 안나 파블로바1881~1931.러시아의발레리나의 우아한 발레 동작은 그저 어렴풋하게 상상이나 해볼 뿐입니다. 율동적인 움직임이야말로 상상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광경 중 하나일 겁니다. 나는 대리석상의 윤곽선을 더듬어보면서 그 율동미를 조금이나마 느낀답니다. 정적인 우아함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동적인 우아함을 보는 건 얼마나 감동적일까!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 중 하나는 조지프 제퍼슨이 사랑스러운 립 밴 윙클w. 어빙 작<더 스케치 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연기하며 나에게 자기 얼굴과 손을 만지도록 해준 일입니다. 나는 그때 연극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극 공연을 보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서 누리는 기쁨을 보고 들을 수 없는 내가 온전히 맛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딱 한편의 연극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직접 읽거나 수화 알파벳으로 전해 들었던 수백 편의 연극들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여 둘째 날 밤에는 희곡작품 속의 위대한 인물들이 내 눈에서 잠을 걷어내겠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또다시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매일매일 밝아오는 새벽이 영원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의 계시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날은 내가 볼 수 있는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군요. 비록 상상으로 만들어낸 기적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후회나 아쉬움 따위로 낭비할 시간이 내겐 없답니다. 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거든요. 첫날은 친구들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바쳤습니다.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느라고 보냈습니다. 오늘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낼까 합니다. 그러자면 뉴욕만큼 활동이 왕성하고 수많은 상황이 연일 벌어지는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뉴욕을 행선지로 정하겠습니다.

롱아일랜드의 포리스트힐 근교에 있는 내 집에서부터 시작하렵니다. 푸른 잔디와 숲과 꽃으로 둘러싸인 이곳엔 도시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쉼을 주는 마치 낙원과도 같은 작고 깨끗한 집들이 있고, 집집마다 그 집의 안주인과 아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떠드는 행복한 목소리가 넘쳐납니다. 나는 이스트리버로 뻗은 레이스 모양의 철제 구조물을 지나 강력하고 창의적인 인간 정신이 빚어낸 새롭고 놀라운 광경을 바라볼 것입니다. 선박들이 바쁘게 강을 오르내리고, 모터보트는 쾌속으로 질주하고, 예인선은 느릿느릿 증기를 뿜어냅니다. 만약 내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중 많은 날들을 이 강 위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보내고 싶습니다.

눈앞에 뉴욕의 매력적인 고층 빌딩들이 솟아 있습니다. 동화책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도시입니다. 얼마나 멋진 광경인지요! 반짝이는 뾰족탑, 돌과 철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제방, 신의 손으로 빚어낸 듯한 조각들, 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은 수백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시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들의 눈엔 이 멋진 광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나는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로 급히 올라가겠습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비서의 눈을 통해 본 적이 있답니다. 상상하던 모습과 현실을 비교하는 것이 조금 두렵군요.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광경일 테니까요.

이제 나는 도시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우선 아주 번화한 곳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미소를 보고 행복을 느낍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낍니다.

나는 5번가를 천천히 걸어갑니다.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지 않고, 만화경처럼 물결치며 흘러가는 색채들을 그냥 지나치며 걷습니다. 군중 속에서 움직이는 여자들의 드레스 색깔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할 테지요.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의 재단이나 스타일에 신경 쓰느라 대중 속에 녹아든 화려한 색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진열장을 가득 메운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눈이 즐거울 테니, 나는 윈도우 쇼핑에 흠뻑 맛을 들이게 될 겁니다.

이제 5번가에서 나온 나는 파크 애비뉴, 슬럼가, 공장지대,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공원 등을 들러보며 시내관광을 합니다. 외국인 거주지역도 방문해서 외국에 여행가서 민박하는 기분도 맛보렵니다. 내 눈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 모두에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더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나 행복과 불행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내 마음속은 사람들과 물건들의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또한 내 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것마다 놓치지 않고 붙잡기 위해 나는 애를 씁니다.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광경들도 있지만,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광경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고 비참한 광경에 눈을 감고 외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눈감는 것은 마음과 정신에 눈감는 것이니까요.

광명이 주어진 셋째 날이 이제 끝나갑니다. 남은 몇 시간 동안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것들이 아직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날 저녁에 나는 아주 신나는 코미디 공연이 한창인 극장으로 달려가야만 할 것 같군요. 그래서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희극적인 요소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자정이 되어 암흑으로부터의 유예 기간인 사흘이 마침내 끝나면, 나에겐 다시 영원한 밤이 이어지겠지요. 물론 그 짧은 사흘 동안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볼 순 없습니다. 어둠이 다시 내린 후에야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빠뜨리고 보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멋진 기억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빠뜨린 것에 대해 아쉬워할 겨를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부터는 만지는 것마다 사흘의 기적이 가져온 멋진 기억들이 따라와서 그 물건의 모습을 떠올려줄 테니까요.

이상, 내게 주어진 광명의 사흘을 어떻게 보낼지를 계획해보았습니다. 이 짧은 계획은 만약 여러분이 갑자기 장님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울 프로그램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여러분이 실제로 그런 운명에 처해진다면 여러분의 눈은 이전엔 결코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다가올 기나긴 밤을 위해 그 기억들을 저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할 것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당신의 눈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을 어루만지고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제대로 보게 될 것이며, 새로운 미의 세계가 당신 앞에 그 문을 열 것입니다.

나는 장님이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힌트 – 시각이란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답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다른 감각기관에도 똑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일 귀가 안 들리게 될 사람처럼 음악 소리와 새의 지저귐도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를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촉각이 모두 마비될 사람처럼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들을 만지십시오. 내일이면 후각도 미각도 잃을 사람처럼 꽃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해보십시오.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자연이 제공한 여러 가지 접촉방법을 통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세요.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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