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창세기 14장 | 인생은 고해 | 환난 중 소망이 있다

개요

창세기 14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한다.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다. 내용은 단순한데 해석을 조심스럽게 해야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설교하기 좋은 장이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전투에서 승리했고, 십일조까지 드렸다고 하니 얼마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설교하기에 얼마나 좋은 내용인가? 설교하기 좋은 내용이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할까?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앞서 말한대로 아브람의 일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믿음의 승리, 십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찾기 어렵게 된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겪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사건을 겪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다행히 아브람은 납치당했던 조카 롯을 무사히 구출했다. 조카가 납치당하는 일을 겪는 것도 흔하지 않겠지만, 무사히 구출하는 것은 더 흔하지 않을 것이다. 흔하지 않다는 건 곧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창세기 14장을 믿음의 승리, 십일조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보편성을 잃은 해석이 된다. 14장은 어떻게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다른 장과 연결이 안된다. 체계 없는 파편적인 해석이 된다.

이런 식의 성경 해석은 교회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잘 다니면 만사가 형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돈 문제, 집문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계속 몰려온다. 교회 잘 안다녀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기도 많이하고, 예배 잘 참석하고, 전도하고, 방언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그런 주장을 하는 목회자들부터 자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교인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때문에 교인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제는 이런 비현실적인 성경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세기 14장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까? 내용에서 보편성을 찾는다면 그건 무엇일까? 답을 말하겠다. 환난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도 환난을 피할 수 없다. 환난은 믿음이 좋거나 안좋거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교회를 잘 나가거나 잘 안나가거나 상관 없이 모두에게 닥쳐온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환난을 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14장을 살펴보자.

요절 1. 창세기 14:16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의 조카 롯은 소돔에 살았다. 소돔처럼 풍요로운 지역은 탐내는 세력들이 있다. 세력들 간에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분쟁 중에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브람은 이런 분쟁이 생길 걸 미리 예상했던 것 같다. 분쟁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병사 318명을 훈련시켜 놓았다. 그리고 멋지게 롯을 구출했다.

간략하게 기록해서 그렇지 아브람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소돔 지역에서 분쟁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랐을 것이다.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내려 앉았을 것이다. 병사들을 이끌고 뒤쫓을 때는 초조하고 긴장되었을 것이다. 기습해서 적을 물리치고 조카를 구출했을 때는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이건 단순히 믿음으로 성공하는 내용이 아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는데, 그걸 믿음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 내용은 인생의 환난에 관한 것이고, 환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을 예상했고 대비했다. 그래서 환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기독교 작가인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 첫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이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6:33

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환난을 안 당한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다. 단, 환난을 당하면 놀라지 말라고 하셨다. 담대하라고 하셨다. 교회 잘 다니면 환난을 안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그 생각을 버려라. 내가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안해서 전도를 안해서 봉사를 안해서 이런 환난이 닥친 것 같다는 생각을 버려라. 비성경적이고, 불필요하고, 어리석고, 틀린 생각을 버려라.

앞서 말한 스캇 펙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삶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왜 한국교회 교인들의 삶이 더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삶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거꾸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자기 배를 불리려고 성경을 왜곡한다. 쓸데 없이 죄책감을 일으킨다. 죄책감은 죄의 각성과 다르다. 죄책감은 바깥에서 찌르는 것이고, 죄의 각성은 안에서 풀리는 것이다. 죄책감은 파괴적이고 죄의 각성은 건설적이다. 죄책감은 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막는다.

환난이란 건 개인의 믿음의 정도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인생의 문제이다. 이걸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생활을 성실히 했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누구에게든 어떤 모양으로든 찾아올 수 있다. 아브람처럼 환난이 올 걸 예상하고 준비하고 대비하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요절 2. 창세기 14:18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은 적을 물리치고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난다.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히브리서 7:3

3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한마디로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등장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한 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비중있는 배우가 다른 영화에 단역으로 잠깐 등장하는 걸 까메오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이 까메오로 출연한 것이다. 아브람은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아브람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근거는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8:56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또 만나게 된다. 그건 다시 설명하겠다. 안타까운 건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십일조에 맞춰해석하려는 경향이다. 중요한 건 십일조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 보자. 아브람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롯을 무사히 구출해도 돌아왔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분을 만났다. 자신이 말로만 들었던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말이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승리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드리고 싶었다. 십일조를 드린 이유이다. 성경에서 십일조는 전체를 드렸다는 의미가 된다.

왜 예수님은 여기에 나타나셨을까? 환난 가운데 함께 하고 돕기 위해서이다. 환난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다. 스포츠 경기장에 관중이 들어찬 것과 같다. 마라톤 경기 결승선에 응원하는 관중이 기다리는 것과 같다. 너를 응원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의미이다. 조금만 참고 견디라는 말이다. 그만큼 환난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눈물 흘리게 한다. 예수님이 여기서 깜짝 등장하신 이유는 그만큼 이 과정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망을 갖자. 뜻밖의 동행,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환난은 왜 찾아 올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성경에서 환난은 에덴동산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인생에서 환난은 필수과목이다. 너무나 큰 환난을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환난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환난이 필수라는 말이 기분 나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많은 경우, 환난이 나를 성장시켜준다는 것이다. 환난을 통해 성장하게 되면, 환난은 일종의 수업료가 된다. 좋은 수업은 수업료가 비싸다. 배움이 크면 수업료가 아깝지 않듯이 크게 성장하면 환난도 아프지 않게 된다.

환난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환난을 가장 잘 극복하는 방법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것은 환난 중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이걸 잘 요약한 구절이 있다. 요한계시록 7:14이다.

요한계시록 7:14

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큰 환난’은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큰 환난’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이걸 종말에 있을 ‘대환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그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셀 수 없을만큼 많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대환난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그 큰 환난’을 ‘인생’이라고 해석한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하나의 ‘큰 환난’이다. 인생이라는 큰 환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바란다.

정리

창세기 14장의 주제는 “믿음이 좋으면 형통한다, 십일조 잘내자”가 아니다. “인생에는 환난이 있다”가 주제이다. 아브람은 환난이 찾아올 걸 알고 대비했다. 미리 훈련시킨 병사를 데리고 조카 롯을 구출했다. 인생에 환난이 반드시 있고, 그걸 대비하는 것이 인생을 대하는 바른 태도이다. 환난은 신앙의 정도와 상관 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대비하면 잘 극복할 수 있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으로 등장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롯을 구출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감사드렸다. 환난은 큰 고통을 주지만, 환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환난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면 그를 도우신다.

적용

누구나 평온하고 형통한 인생을 원한다. 문제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환난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걸 인정할 때, 환난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다. 환난은 성장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필수코스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울 수도 있다. 두려워서 피하려고 싶다. 신앙생활 잘하면 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환난은 에덴에서 새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점이다. 피해갈 수 없다.

환난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 환난 당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탓하지 말라. 환난에 맞설 때 예수님이 도우신다. 환난 가운데 예수님이 깜짝 등장하신다.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응원하기 위해서. 환난 가운데 소망을 갖자.

창세기 13장 | 헤어짐과 만남 | 방향을 정하면 동행이 생긴다

개요

창세기 13장 강의하겠다. 아브람의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의해야할 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아무거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아무거나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브람에 관한 기록을 보면서 제대로된 해석을 못한다. 제대로된 해석을 못하니까 억지로 해석하거나 자기마음대로 해석한다. 잠시 영상을 멈추고 창세기 13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구나로 해석되는가 아니면 이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해석되는가?

아브람에 관한 기록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다. 아브람 개인의 경험이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12장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불의가 드러나는 사건을 겪었다.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윗도 블레셋으로 망명했다. 이것은 배교에 해당하는 심각한 불의이다. 불의가 드러나는 사건 이후에 아브람은 어떤 일을 겪을까? 답을 말하겠다. 결별의 단계이다.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지고, 멀었던 혹은 몰랐던 사람과 가까워지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나아갈 방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함께 갈 사람과 함께 못갈 사람이 나누어진다.

롯은 아브람과 인간적으로 가까웠다. 롯와 아브람은 함께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롯과 아브람은 목표가 달랐다. 목적지가 다르면 같은 차를 타고 갈 수 없다. 부산으로 가는 사람과 광주로 가는 사람이 같은 열차를 타고 갈 수는 없다. 어느 정도는 함께 가다가도 갈라서야 할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 이것은 믿음을 향해 나아갈 때 반드시 겪어야 할 단계이다.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는 목적지가 어딘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요절 1. 창세기 13:9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앞장의 내용을 잠시 돌이켜보자.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바로에게 빼앗겼다. 자신이 지레 겁을 먹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핑계댈 사정도,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하나님이 바로의 꿈에 나타나 경고했기에 아내를 되찾고 보상금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아브람이 치사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누구나 치사하고 나약해질 때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자. 중요한 건 자기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부분이다. 방법은 다르지만, 모든 구도자가 이 과정을 거친다.

지난 시간에는 다윗의 예들 들었다. 이번 시간에는 레위기를 예로 들겠다. 레위기에서는 독특하게도 나병에 관한 규례가 자세하게 소개된다. 나병은 신경세포가 마비되는 병이다. 신경세포가 마비되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손가락이 잘려도 아프지 않다. 등에 불이 붙어도 태연하게 걸을 수 있다. 나병은 불의한 인간의 상태를 비유이다. 인간은 당연히 해야할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한다. 불의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해도 태연하다.

레위기에서는 피부에 반점에 생기면 제사장에게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제사장은 시간을 두고 상태를 살펴야 한다. 반점이 퍼지면 환자를 부정하다고 판정한다. 그런데, 놀라운 규정이 있다. 반점이 온몸에 퍼지면 정하다고 판정해야 한다.

레위기 13: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의하다는 것을 알면 정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이걸 이렇게 표현하셨다.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임을 알아야 복음의 필요성을 알게 된다. 자기 불의를 발견한 사람은 의를 찾게 된다. 영양이 결핍되면 몸이 필요한 음식을 찾는다. 내 안에 의가 없기 때문에 바깥에서 의를 찾는 것이다. 영혼이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찾는다. 그리스도를 향해서 방향을 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 오면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갈 수 없게 된다.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가 다투었다. 롯과 아브람의 마음이 멀어진 결과이다. 근본 원인은 롯과 아브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롯은 번영을 추구했고, 아브람은 그리스도를 추구했다. 이것은 롯이 선택한 땅을 보면 알 수 있다. 롯은 소돔을 선택했다. 이것으로 왜 롯과 아브람이 헤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두 사람이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했다면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하기를 기도하자.

요절 2. 창세기 13:16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타국으로 떠날 때 함께했고 외로울 때 의지했던 조카가 떠났다. 쓸쓸하고 힘이 빠질 상황이다. 하나님은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위로하신다. 조카와 힘을 합쳐야 자손이 번창하기 쉬울 것 같지만, 하나님 생각은 달랐다. 단순히 육신의 자손이 복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육신의 자손도 복을 받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자손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자손이라는 말씀은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앞으로 자손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아브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둘째, 육신적인 자손과 그들이 받을 가리킨다. 인간은 물질적인 복을 받아야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아브람 한 사람에서 비롯한 아브람 가문은 이스라엘이라는 큰 나라를 세우게 된다. 셋째, 영적인 자손과 복을 가리킨다. 물질적인 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려는 궁극적인 복이 아니다. 진정한 복, 영원한 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복을 아브람처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주신다. 자손에 관한 설명은 15장에서 다시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하겠다.

한 가지 더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미 여러차례 설명한 요약적 서술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브람이 믿음을 가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이 순식간에 믿는다고 하면 믿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요약적 서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매우 긴 시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요약되어 있다. 요약해서 서술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2을 보자.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구절은 요약적으로 서술된 구절이다. 왜냐하면,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구원을 주신 사건을 짧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는 걸 보여준다. 요약해서 서술했으니까 풀어서 보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이걸 반대로 해석한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구원받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한다.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고 말만하면 구원받는다는 황당한 교리를 만든다.

창세기 12장부터 기록된 아브람의 예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개입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이걸 알고 성경을 보자.

정리

창세기 12장부터는 믿음을 향해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단계를 알려준다. 12장에서는 불의가 폭로되었고, 13장에서는 결별이 찾아왔다.

현대 용어로 설명하면 이렇다. 아브람은 교회를 다녔고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경 공부도 했고, 기도 생활도 하고, 예배도 잘 드렸지만,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용기를 내서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출발한다면 말이다.

여행을 떠나게 되면, 헤어짐과 만남이 시작된다. 함께 갈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새롭게 동행하는 사람도 생긴다. 하나님은 자손이라는 말로 아브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오래 알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오래 알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다 보면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사람과 만나게 된다. 헤어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남도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같은 사람과의 만남은 알고 지낸 시간과 상관 없이 즐겁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신다. 새로운 만남과 관계를 기대하도록 소망을 주신다.

적용

죽고싶을만큼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연락처를 싹 지워보시라. 죽고싶을만큼 힘든데 아무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오래알고 지냈다고 친구가 아니다. 알게 된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친구이다.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나면 어색할 때가 있다. 대화가 겉돌고 마음을 나눌 수 없다. 대화를 계속할수록 좋았던 과거 얘기를 반복할 뿐이다. 과거는 나눌 수 있지만, 미래는 나눌 수 없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가야할 방향을 알게 되면 반드시 동행이 생긴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고민하자. 그리고 그 길을 가자.

창세기 12장 | 믿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개요

창세기 12장 강의 시작하겠다.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람 가문의 이야기가 기록된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는 어떻게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믿음을 갖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말이다. 아브람을 통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지 알아보자.

먼저, 창세기 12장부터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창세기 1~11장까지는 한장에 수백년이 압축되었지만, 12장부터는 수년으로 바뀐다. 기존의 성경해석과 다르게 해석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큰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아브람은 15:6에 의를 얻었다. 아브람은 12:1에서 15:6절 사이에 아브람은 어떤 상태인가?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브람이 의에 이른 믿음을 가진 건 15:6이다. 아브람은 온전한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아보자.

요절 1. 창 12:1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 이야기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땅을 옮기는 것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다.알고지내던 사람들, 익숙해던 환경과 이별해야 한다. 아이들이 그런 이유로 이사하고 전학하는 걸 싫어한다. 또, 통치자가 달라지는 것이다. 당시에는 국경선이랄 게 없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자유로웠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통치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세상나라에서 하나님나라로 이사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것을 보이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아브람이 이사간 것이 그 예이다.

기존에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난 것이 큰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아브람은 큰 믿음을 가진 상태로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믿음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다. 근거는 창세기 15:6이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비로소 의에 도달한다.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은 다른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어설프게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모든게 다 이루어지는 줄로 이해한다. 믿음을 자기 확신, 자기 세뇌, 할수있다는 신념, 긍정적 사고방식 정도로 이해한다. 믿음을 생각의 힘을 발동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시작도 안한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기만하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있어야 한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할 때 기독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 문제의 근원이 ‘의’에 있다고 설명한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인간다운 걸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는데, 인간답지 못하다. 인간다운 게 ‘의’니까 인간답지 못한 건 ‘불의’이다. 성경에서 ‘불의’는 ‘죄’와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죄’를 ‘나쁜 짓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죄가 맞다. 성경에서는 ‘나쁜 짓하는 것’도 죄고,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부모가 부모답워야한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 있다.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할 그게 ‘의’이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의’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아무짓도 안하면 ‘죄’를 안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자식도 부모에게 당연히 해야할 도리가 있다. 그걸 안하면 ‘불의’이고 ‘죄’이다. 부부로서, 친구로서, 직원으로서 등등 모든 분야에서 당연히 해야할 ‘의’가 있다. 하다못해 강아지에게도 지켜야 할 의가 있다. 강아지와 놀아주는 게 의이다. 안놀아주면 불의이다. 죄를 불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왜 지옥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살기 싫어질 때가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했을 때이다. 언제 상처받고 실망하냐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이다. 불의의 문제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근본문제가 된다. 불의가 인간 문제의 근본 문제라고 동의할 때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해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불의한 건 아는데 자기가 불의한 건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감각이 죽어 있다. 자기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의 시작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기독교 믿음을 시작조차 못했다. 기독교 밖에서 기웃거린다. 기독교 밖에 있는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믿으면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요절로 돌아오겠다. 아브람도 자기가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믿음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믿음 교육을 시작하신다.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 가보지 않았던 여행의 출발, 하나님의 인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큰 믿음의 결단이 아니라 작은 믿음 혹은 아주 가냘픈 기대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어쩌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시작하게 되는 상황에 서게 될 수도 있다. 실망하지 마시라. 그것도 충분히 믿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떠나는 것이 중요하니까

요절 2. 창 12:8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앞에서는 무조건 피의 제사를 지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긴 기간을 압축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시현상이다. 멀리서 보면 점선이 실선처럼 보인다. 철길도 중간중간 떨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연결되어 보인다. 피의 제사를 지낸다고 무조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기 전에 피의 제사를 지내는 기간도 있다. 피의 제사를 계속 지내면 믿음으로 인도되는 시점이 있다.

본문 뒤에는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아브람의 실수 중 한가지가 아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엄선된 이야기이다. 아브람이 자기의 불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아브람 뿐만 아니라 성경의 위인이라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의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의 예가 극적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이스라엘 땅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지쳐서 결국에는 블레셋에게 망명한다. 불의를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망신을 주려고 불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불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사무엘상 27:1-2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불의가 드러나야 한다면 의롭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있었다. 그런 사람은 믿음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산상수훈 팔복에서 의를 위해 핍박받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 의를 추구할 때 역설적으로 불의한 자신을 보게 된다. 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믿음의 길을 찾을 수조차 없다.

그 예를 오늘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날 교회는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교회 지도자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일제를 찬양하고, 독재 시대에 독재 정권에 아부했다. 그 결과 교회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통하고 있을 때, 안좋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쓴다. 의를 추구하지 않을 결과 불의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단순히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믿음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의를 추구해야 믿음에 다가서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는 이유이다. 오히려 교회 밖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믿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정리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갈 때 믿음이 크고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믿음은 방향성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큰 믿음이 있으면 좋겠지만, 크기보다 중요한 게 방향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 그것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브람이 피의 제사를 지냈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이 안내자를 따라갈 때 홀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적용

예배에 안 빠지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나름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 가정이 불화하고 직장에서 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 최적화된 사람이다. 교회에 최적화되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몸만 피곤할 뿐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실제적인 것이 다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는 반드시 실제적이다. 당신이 교회에 최적화되었을 뿐 진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기 바란다. 그것이 아브람이 간 길이다.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의를 추구하기 바란다. 누구 덕 볼 생각하지 말고, 옳은 행동을 하기 바란다. 교회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더 분노하신다. 세상보다 못한 윤리의식을 가진 교회가 교회일 수 없다. 비교인보다 불의한 교인이 교인일 수 없다. 정신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