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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4 / 2018년 04월 08일 주일 설교
핵심 구절(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인간은 변하는가?
현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예전에 심리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하고 성격이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거짓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행동의 원인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갈등이 깊어지는 이유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시험이 끝나면 빠따를 때리셨습니다. 한 문제 틀리면 한 대씩 때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성적이 오르냐면 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지리 선생님이 지리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리를 열심히 공부해서 전국에서 학교별 지리 성적이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체벌이 교육 효과가 매우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게 때릴수록 부작용이 커집니다. 약한 체벌과 강한 체벌이 효과 면에서 차이가 없고, 부작용을 생각하면 약한 체벌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2년 미국 콜롬비아대의 엘리자베스 게르쇼프 박사는 1940년부터 62년 동안 이뤄진 체벌에 관한 연구 88개를 분석한 논문을 미국 심리학자가 발행하는 ‘심리학 회보’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게르쇼프 박사는 부모의 체벌을 받고 자란 아이의 행동 특성에 대해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체벌은긍정적인 면에서 효과가 거의 없는 반면 부정적인 효과는 많다. – 과학동아 2010년 10월호
또, 선생님에게 혼나고 문을 세게 닫고 가는 학생이 영화같은데 보면 나오는데, 예전에는 그게 100%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반항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책감도 포함되어 있는 거였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나는 왜 이러나?’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인상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났나?’ 싶은데, 알고보니 자책감인 경우가 있습니다. 즉, 지각을 했거나 일 처리를 잘 못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난 상태인 데 옆에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으면 서로 오해하고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오해와 혼란, 감정적인 낭비, 그리고 갈등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하는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답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 질문에 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전처럼 목숨바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혈질이고 행동파였던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책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힘들 때 곁을 지키지 못했고,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내면에서 떠바치던 자긍심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신이 나지 않았고,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상태를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험하셨다면, 어떨 때 경험하셨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아직도 극복 못하셨다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베드로가 심리적으로는 안좋은 상태일지 몰라도,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상태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영적으로 좋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동기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베드로를 이끌어간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그의 열정을 이끌어갔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사라지자 베드로는 의욕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십니다. 기초가 잘못된 건물을 지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꾸 무너뜨리고 다시 지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기초를 잘 세우고 있느냐입니다. 처음에 기초를 잘 세우지 못하면 나중에는 고칠 수 없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격하십니다.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 무너뜨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걸 알고 미리 알려주셨잖습니까? 베드로가 무너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인간적인 열정을 무너뜨리겠다 그 후에 하늘의 열망을 넣어주겠다고 말입니다.
2.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진정한 열망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순전한 열망을 말입니다. 참된 열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나의 잘못된 열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낙담하게 되고, 마침내 배터리가 방전된 가전제품처럼되고 맙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플러그를 연결해서 충만한 전원을 공급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서 다가갔습니다.
(출 3:2~3)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은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요즘 ‘열정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월급을 안주거나 조금 주고 일을 시키면서 그것을 ‘열정’이라고 표현하는 걸 말합니다. 기업은 사람을 키우거나 성장시키여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나 부품으로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게 했다가 필요 없으면 자르거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활용하면, 기업과 다를 게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간판을 단 기업입니다. 본질 만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실은 사람을 도구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정면에서 반박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의욕이 없습니다. 사용할 수 없는 도구입니다. 고쳐쓰는 것보다 다른 도구를 쓰는 게 이득입니다. 사람을 도구로 보면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의욕을 잃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상태이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격려하고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교회의 본질이고 사람의 성장이 교회의 최고 목표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3. 책망대신 조반을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소명을 새롭게 하신 방법은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대신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아침을 대접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배려 깊은 사랑이 담긴 행동입니다.
이 한끼 식사를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이 안심하고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가면서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떠나는 것이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셨고 그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서 베드로는 새롭게 열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건물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에 본질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나 긍정적 사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삶을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본질적인 믿음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야망이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 여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떤 간판을 달고, 어떤 고상한 목적을 내세워도, 성령을 입에 달고 살아도 말입니다. 사람을 전도하는 도구, 봉사하는 도구, 출석하는 도구로 보면 기업입니다. 교회를 도구로 보면 신앙인이 아니라 기업인입니다. 교회를 인간관계의 도구, 성공의 도구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인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고 닮고자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나머지를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