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9_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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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28~35 / 2018년 04월 2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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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한줄 요약

예수님은 좌절감에 빠져서 마음이 차가워지고 무기력해진 제자들에게 참된 말씀으로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열정에 기름붓기

http://www.10puzzle.com/piece/25991-열정에-기름붓기-송강호와-봉준호.html

3년 전, 패기 넘치는 두 청년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재선(27)·표시형(26) 대표인데요. “꿈을 향해 달리는 청년들 위해 힘을 실어주자”고 결심, 동기부여 콘텐츠를 제작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컨텐츠가 ‘열정에 기름붓기’입니다.

저는 번영주의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열정에 기름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이나 하면 된다는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허풍만 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불신앙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혼동해도 안되고, 그 사고가 기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도할 뿐입니다. 신앙과 거짓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정에 기름을 부은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1. 떡을 축사하시고 주시니 – 기도

첫째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가 아니고 밥을 사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능력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만 금식 기도하십시오. 남한테는 금식 기도하라고 하지 마세요.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책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몇 몇 구절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밥 먹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하면 금식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금식 기도는 밥 먹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을 만큼 절실할 때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밥을 주시면서 기도할 때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인간적인 필요를 채워줄 때 마음이 열리고 기도가 강력해 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 기도를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놀기 좋아한다고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금식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잔칫날 금식하거나 일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해야 할 때는 금식하셨고,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하셨습니다. 주로 홀로 계실 때 금식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억지로 금식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2. 성경을 풀어 주실 때 – 말씀

말씀을 바로 알아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정통 기독교 교리가 주는 감동을 영혼의 중심을 태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제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는 이 우주보다 크고 인간의 마음보다 깊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어떤 사상과 철학보다 고상합니다. 어떤 시보다 숭고하고 어떤 소설보다 충격적입니다.

이 교리를 위해서 인생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단 교리를 듣고 좋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딧불을 보고 밝다하고, 태양을 보고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보고 마음이 이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예루살렘에 돌아가 – 교제

열정이 살아나기 위해서 필요한 세 번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교제입니다. 다들 아시듯이 모닥불을 보면 나무가 하나 있을 때는 꺼지기 쉽지만, 여러개 모여 있으면 잘 안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의리로 서로를 속박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집착이 되고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가는 동행의 의미입니다. 제가 가는 목표가 여러분과 비슷하다면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결론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정을 받아야 합니다. 세 가지를 통해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교제입니다. 신앙의 베이직입니다. 신앙의 베이직에 힘쓸 때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8w17_영광으로 우리 안을 채우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섭리의 하나님!
새로운 기대감으로 주님 주시는 하루를 맞이합니다. 주위를 온통 채운 봄 기운처럼 주님의 영광이 우리 안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하며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때에 맞게 비를 내려 메마른 땅을 적셔주시는 주님, 예상하지 못한 기쁨을 선물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는 주님, 저희 목마른 영혼이 이 시간 은혜로 해갈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주님의 오른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그러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하늘로 올리지 않고 이 땅에서 살도록 남겨두셨습니다.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의미로 압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기 위해 스스로 녹아야 하고, 등불은 빛을 내기 위해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저희가 소금과 빛처럼 헌신하여 세상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고난을 만나도 놀라지 않게 하시고, 혼란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날개 아래서 자녀 된 우리가 함께 기뻐하게 하시고, 삶의 모든 부분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남북 정상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약속한 완전히 비핵화가 온전히 실행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앞으로 진행될 북미 회담에서도 이 약속이 재확인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게 하게 하시고, 북한 주민의 오랜 고통이 속히 완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북한과 철도, 도로가 연결되어 경제 발전에 진전이 있게 하시고, 그 길을 통해 선교사들이 중앙 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평택 뉴코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택 뉴코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게 하시고, 좋은 평가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보람을 느끼고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소망으로 가득 찬 봄을 맞이했습니다. 이 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교회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여 참된 권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성공과 번영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4.22_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본문

누가복음 24:13~27 / 2018년 04월 22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좌절감에 휩싸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방법으로 새로운 소망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실패는 없고, 시행착오만 있다

좌절감은 요즘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굶어죽는 사람보다 좌절해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일지 모릅니다. 20대 청년 실업자, 30대 직장인, 40~50대 명퇴 대상자들이 모두 좌절감이 싸여 있습니다.

좌절감은 뜻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 마음이 꺾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류콤플렉스, 일등주의, 성공지상주의에 빠진 이유 중에 하나는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좌절감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도전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좌절감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쓰러진 일은 시행착오가 됩니다.

에디슨이 전구들 만들 때 실패한 일은 유명합니다. 에디슨은 필라멘트에 적합한 물질을 찾기 위해 다양한 재료들을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부터 머리카락, 옷감, 백금 등 수많은 재료들을 사용하여 무려 1,000여 번이 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에디슨은 실험을 머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실험실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일본산 부채 하나가 에디슨의 눈에 들어왔다. 에디슨은 그 부채의 부챗살을 가늘게 잘라 필라멘트로 만들었고, 그 부챗살로 만든 필라멘트는 1,500시간을 넘게 버터주어 마침내 상용화할 수 있는 전구를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에디슨이 몇 백 번쯤 실험을 하다가 포기하였다면 전구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나 다른 발명가의 손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며, 어쩌면 아직까지도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에디슨의 성공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디슨의 성공 비결인 ‘포기하지 않는 것’을 성공 확률이 100%인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좌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좌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대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가 계속되면 사람은 좌절하게 됩니다. 이런 좌절이 두 제자를 휩싸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갔다면, 이들은 좌절감 때문에 고향으로 내렸갔습니다. 그들이 좌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은 17절과 23~24절 두 부분입니다.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여기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슬퍼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3~24절을 보면

(24:23~2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증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데도 고향으로 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습니다. 마음이 꺾여서 좌절한 것입니다.

좌절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불 꺼진 난로, 시동 꺼진 자동차 같습니다. 한숨만 쉬고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납니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의 기력도 빨아들여서 함께 무기력하게 만드는 늪같이 됩니다. 이처럼기대가 꺾이고 실패가 쌓여서 좌절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은 어떻게 변화시키셨을까요?

2.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 오해

사람이 좌절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처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는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어떤 오해를 했습니까? 예수님을 능력있는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4: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4:23~2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여기까지는 오해가 아닙니다. 오해는 바로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24:20~21)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속량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군사적인 승리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로마 군대 철수, 강력한 국가로 성장 등이 이들이 바란 속량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량은 이들의 마음에 없었습니다.

두 제자의 사고 방식은 이겁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반대자를 물리치고 굴복시켜서 자기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각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고 방식은 정반대였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약한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대신해서 그들이 받을 벌을 대신 받을 능력이 있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인류를 굴복시키는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넣어주려는 마음입니다.

3.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해결

예수님은 그들의 사고 방식을 하나씩 교정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해도 성경 지식만 늘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잘못된 생각이 고쳐지지 않으면, 좌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시대가 좌절에 휩싸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거짓된 신화와 과장된 광고 때문입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데 성공해야 할 것처럼 경쟁으로 몰아갑니다. 반칙으로 승리한 것을 위대한 업적인 것처럼 과장합니다.

[교회에서마저 성공, 번영, 기적을 최고의 목적으로 가르칩니다. 교역자를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교체합니다. 다른 교회 교인에게 전도합니다. 방언을 연습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역자가 성령 충만을 주장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물의를 일으키는 목회자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그 사람에게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물의를 일으켜도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추종자들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성공의 길을 안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청해서 고난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려고 하면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고난 속에서 형통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하나하나 고쳐주십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버리게 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복음의 길을 가야한다고 설득하십니다. 그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

좌절감은 요즘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성공과 번영으로 몰아가려는 풍조가 좌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 구조인데 경쟁을 과열시키고 모두가 번영할 수 없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헛된 마음을 불어넣습니다.

좌절감을 극복하는 길은 ‘고난 중 형통’이라는 복음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린 마음을 되돌려서 복음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공의 길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섬김의 삶을 살면 그리스도의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2018w16_움츠러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섭리의 하나님!
봄은 고이 간직했던 온갖 장난감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어린이같습니다. 메말랐던 산과 들이 하루가 다르게 채워지고, 나무는 새순을 틔우려고 분주합니다. 꽃은 빠르게 세대가 교체됩니다. 이 아침 계절을 섭리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하며 예배합니다.

사랑의 주님!
이 시간 세상의 냉혹함에 놀라 움츠러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고 가슴 아파하셨던 주님.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치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명령하신 주님.

안타깝게도 저희는 세상에서 ‘뱀처럼 지혜’롭지 못했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지도 못했습니다. 세상의 냉막함에 지레 겁먹었고, 그들처럼 힘과 불법을 추종했습니다. 회개하오니 지혜와 순결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심을 믿사오니 늘 기도하게 하시고, 필요한 순간에 깨우침을 주시옵소서. 고난을 만나도 놀라지 않게 하시고, 혼란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영혼에 영원한 씨를 심어 주시고,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인격에 거룩한 옷을 입게 하시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408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을 위해 기도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완전히 핵을 포기하게 하시고, 정상적인 국가로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북한 주민의 깊은 고통이 속히 완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창조의 하나님,
환경 오염, 미세 먼지, 쓰레기 문제에 관해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깨끗하게 보존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을 깨끗하게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소망으로 가득 찬 봄을 맞이했습니다. 이 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교회가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여 참된 권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성공과 번영이 아니라 사랑과 겸손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480 나 주님의 기쁨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w15_겨울을 이긴 꽃들이 신비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섭리의 하나님!
싱그러운 벚꽃 가득한 길을 걸어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활짝 핀 꽃은 추위를 이긴 생명이 내는 기쁜 웃음소리 같습니다. 이렇게 여린 몸으로 겨울을 이겨낸 저들이 신비합니다.

이 부활의 계절 4월에 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연약한 우리가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힘을 주십니다. 슬플 때 우리를 위로하시고, 기쁠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언제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 영혼에 넣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려고 우리를 세상에 두셨으니 흔들리지 않고 주님 가신 길을 가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마음속 그리스도의 영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섭리를 늘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하루를 살되 영원을 바라보게 하시고, 최선을 다하되 여유를 갖게 하소서. 사명을 위해 살아갈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하소서. 주님의 일을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환경 오염, 미세 먼지, 쓰레기 문제에 관해 기도합니다. 그동안 파괴적인 개발과 무분별한 쓰레기 배출을 계속한 대가를 비싸게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깨끗하게 보존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각자에게 매우 적은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모여 전 지구를 신음하게 했습니다. 작은 죄가 모여 큰 비극을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을 깨끗하게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하기 원합니다. 더 늦기 전에 불필요한 포장을 줄이고,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며, 환경 보존을 위한 제도를 만들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소망으로 가득 찬 봄을 맞이했습니다. 이 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시고, 우리도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4.15_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본문

요한복음 21:15~19 / 2018년 04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돈보다 중요한 것은?

뉴스에서 어느 여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누가 갑질을 해서 사과시켰나?’ 궁금한 마음으로 클릭해 보았습니다. 장애인을 자녀로 둔 어머니가 장애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꿇고 호소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댓글들도 장애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우세한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비난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논리가 결국은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면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 돈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블랙홀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로 뭉치쳐서 같은 목소리를 내게 하는 강력한 힘이 바로 돈인 것 같습니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의 중심이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돈이 그렇게 강력한데도 돈에 맞서는 힘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뭘까요? ‘사랑’인 것 같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여성이 아파트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게한 힘이 바로 장애인 자녀에 대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이 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돈으로 뭉친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주민들이 생겼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던 여론을 바꾸어 놓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 전에 그런 사진이 올라 온 이유가 기자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돈은 물질만능주의의 화신입니다. 사랑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가장 정신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냐 돈이냐를 선택하라고 하면 돈을 선택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돈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을 갈구할까요?

돈을 즐거워하지만,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또다른 사랑의 힘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바꾸어놓는 힘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1.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십니다. 우리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 것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가난하고 궁핍한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일종의 훈련입니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처럼 영혼을 훈련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영혼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트레이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로 인해서 운동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은 생각이 달라져서 운동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기 몸이 균형 잡히고 건강해 지는 것을 보며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훈련을 즐기는 사람 말입니다. 이번에 발령난 우석제 실장님하고 작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에서 좋은 훈련을 받고 떠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다른 건 다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밑에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면 분노가 생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부분이 잘 훈련되어서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은 쉽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자주 부딪혔는데, 전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격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인격의 훈련을 받을 때,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격이 성장합니다.

저도 생각해 보니까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 표현이 부적절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걸 이해하고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필요를 아십니다. 불필요한 궁핍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영혼을 누구보다 배부르고 풍성하게 먹이기 원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풍요로움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이라는 동기로 예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신앙 생활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를 보면, 정확하게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상태로 돌아간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화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합니다. 계획도 짜고, 운동도 하고, 가지 계발 서적도 읽고 나름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에 부딪히면 어떻게 하냐면 원위치합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요.

왜 그럴까요? 가장 쉬운 선택이고 그게 좋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 예를 들어서 이단에 빠진 사람을 왜 구하지 못할까요? 근본적으로 그 사람은 그것이 좋아보이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걸 좋아합니다. 그 사람한테는 그게 좋아보입니다.

좋은 것이 좋아보여야 좋은 쪽으로 변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의 기쁨을 알려줍니다. 영원을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에서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거룩한 것을 기뻐하는 마음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투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지에 따라서 우리가 속할 나라를 결정됩니다. 갈등이 없으면 안될까요? 갈등이 없으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갈등 속에서 갈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그 과정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3.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면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제가 가장 부끄럽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는 없고, 말씀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능력이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능력이나 은사가 있으니까 자기를 섬기라고 하고 자기를 살찌웁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 받았으니까 이제 좀 누리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게 번영주의입니다. 이미 마음이 오염되었습니다.

어떤 변명을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냐 번영주의의 길이냐? 그 본질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적으로 도착할 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하늘로 연결되지만, 번영주의의 길은 멸망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반드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대략적인 방향을 알고 있어야 네비게이션이 오류가 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성령님의 인도를 바르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고 말은 안해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너무 강력해서 저항하지 못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 무엇이든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 그 사랑이 물질만능주의을 이기고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주셨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2018.04.08_와서 조반을 먹으라

본문

요한복음 21:1~14 / 2018년 04월 0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인간은 변하는가?

현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예전에 심리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하고 성격이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거짓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행동의 원인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갈등이 깊어지는 이유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시험이 끝나면 빠따를 때리셨습니다. 한 문제 틀리면 한 대씩 때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성적이 오르냐면 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지리 선생님이 지리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리를 열심히 공부해서 전국에서 학교별 지리 성적이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체벌이 교육 효과가 매우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게 때릴수록 부작용이 커집니다. 약한 체벌과 강한 체벌이 효과 면에서 차이가 없고, 부작용을 생각하면 약한 체벌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2년 미국 콜롬비아대의 엘리자베스 게르쇼프 박사는 1940년부터 62년 동안 이뤄진 체벌에 관한 연구 88개를 분석한 논문을 미국 심리학자가 발행하는 ‘심리학 회보’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게르쇼프 박사는 부모의 체벌을 받고 자란 아이의 행동 특성에 대해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체벌은긍정적인 면에서 효과가 거의 없는 반면 부정적인 효과는 많다. – 과학동아 2010년 10월호
또, 선생님에게 혼나고 문을 세게 닫고 가는 학생이 영화같은데 보면 나오는데, 예전에는 그게 100%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반항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책감도 포함되어 있는 거였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나는 왜 이러나?’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인상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났나?’ 싶은데, 알고보니 자책감인 경우가 있습니다. 즉, 지각을 했거나 일 처리를 잘 못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난 상태인 데 옆에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으면 서로 오해하고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오해와 혼란, 감정적인 낭비, 그리고 갈등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하는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답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 질문에 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전처럼 목숨바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혈질이고 행동파였던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책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힘들 때 곁을 지키지 못했고,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내면에서 떠바치던 자긍심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신이 나지 않았고,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상태를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험하셨다면, 어떨 때 경험하셨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아직도 극복 못하셨다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베드로가 심리적으로는 안좋은 상태일지 몰라도,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상태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영적으로 좋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동기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베드로를 이끌어간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그의 열정을 이끌어갔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사라지자 베드로는 의욕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십니다. 기초가 잘못된 건물을 지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꾸 무너뜨리고 다시 지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기초를 잘 세우고 있느냐입니다. 처음에 기초를 잘 세우지 못하면 나중에는 고칠 수 없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격하십니다.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 무너뜨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걸 알고 미리 알려주셨잖습니까? 베드로가 무너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인간적인 열정을 무너뜨리겠다 그 후에 하늘의 열망을 넣어주겠다고 말입니다.

2.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진정한 열망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순전한 열망을 말입니다. 참된 열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나의 잘못된 열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낙담하게 되고, 마침내 배터리가 방전된 가전제품처럼되고 맙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플러그를 연결해서 충만한 전원을 공급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서 다가갔습니다.

(출 3:2~3)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은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요즘 ‘열정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월급을 안주거나 조금 주고 일을 시키면서 그것을 ‘열정’이라고 표현하는 걸 말합니다. 기업은 사람을 키우거나 성장시키여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나 부품으로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게 했다가 필요 없으면 자르거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활용하면, 기업과 다를 게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간판을 단 기업입니다. 본질 만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실은 사람을 도구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정면에서 반박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의욕이 없습니다. 사용할 수 없는 도구입니다. 고쳐쓰는 것보다 다른 도구를 쓰는 게 이득입니다. 사람을 도구로 보면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의욕을 잃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상태이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격려하고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교회의 본질이고 사람의 성장이 교회의 최고 목표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3. 책망대신 조반을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소명을 새롭게 하신 방법은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대신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아침을 대접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배려 깊은 사랑이 담긴 행동입니다.

이 한끼 식사를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이 안심하고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가면서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떠나는 것이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셨고 그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서 베드로는 새롭게 열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건물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에 본질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나 긍정적 사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삶을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본질적인 믿음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야망이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 여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떤 간판을 달고, 어떤 고상한 목적을 내세워도, 성령을 입에 달고 살아도 말입니다. 사람을 전도하는 도구, 봉사하는 도구, 출석하는 도구로 보면 기업입니다. 교회를 도구로 보면 신앙인이 아니라 기업인입니다. 교회를 인간관계의 도구, 성공의 도구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인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고 닮고자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나머지를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w14_하루하루를 섭리로 채색해 주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주 우리 하나님!
매일 달라지는 봄의 색깔을 보며 주님의 다채로운 성품을 묵상합니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 같은 우리의 일상도 주님의 섭리로 채색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아침에 하루의 문을 열 때마다 새로운 기대로 설레게 하시고, 저녁에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감사로 찬송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이 공동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주께서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우리 영혼이 주님 곁에서 머물게 하소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마음이 주님 품에서 치료받게 하시고, 회복된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 하시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영광에 중독되지 않으며, 진리가 아닌 것에 집착하지 않게 하소서.

하지만,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게 하소서. 예수님처럼 힘써 세상을 섬기고 후회 없이 하늘로 돌아가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를 품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을 위해 기도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검증가능한 핵 포기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북한이 잔꾀를 내지 않도록 그들을 어리석게 하시고, 변덕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미국이 전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평화를 적극 지지하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창조의 하나님,
미세 먼지에 관해 기도합니다. 이 일은 그동안 파괴적인 개발과 무분별한 쓰레기 배출을 지속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깨끗하게 보존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각자에게 매우 적은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모여 전 지구를 신음하게 했습니다. 작은 죄가 모여 큰 비극을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을 깨끗하고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하기 원합니다. 더 늦기 전에 불필요한 포장을 줄이고,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며, 환경 보존을 위한 제도를 만들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소망으로 가득 찬 봄을 맞이했습니다. 봄 꽃같은 복음을 이 사회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4.01_[부활절]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본문

이사야 25:08 / 2018년 04월 0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한줄 요약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영국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서로서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글입니다.

개요

부활절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부활절을 맞이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난주간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덕분인지 부활절이 더 상쾌하게 느껴집니다.오늘은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0. 죽음의 죽음 – 부활죽음의 죽음이라는 말은 영국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이 쓴 책 이름입이다.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죽기 전에는 어쨌든 희망이 있는데, 죽음은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맙니다. 그 무자비한 죽음이 죽는다는 말이 주는 기쁨과 통쾌함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죽음이란 삶이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살아 있는 졸병이 죽은 황제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혼자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겠지요. 혼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삶이 연구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범위는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인데 불신자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애써 담담하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종착점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죽음의 불안을 해소해 줍니다.

저는 기독교 사상이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활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모두 인간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데 있습니다. 이 기독교 사상을 생각할 때마다 매료되고 매혹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고 인간 세상에 비극이 생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을 고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 모든 설명의 결과로서 부활을 제시합니다.

부활은 삶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비로소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비로소 삶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가장 큰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선물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을 가지고 살아가면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1. 사망을 멸하시며

먼저 성경은 부활이 사망을 멸한다고 합니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땅에서 뽑힌 것이 사망입니다. 나무는 땅에서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시들어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나무가 완전히 죽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땅에서 뽑혔을 때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사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체는 백 년 정도 살다가 죽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습니다.

요즘 가끔 돌연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도 생명이 떠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체 기관이 존재한다고 해서 생명이 자동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최초의 시동을 걸어주어야 합니다. 현대 의학으로 아직 그 최초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지만 생명이 떠난 상태를 고치지 못합니다.

생명의 원인은 영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생명의 공급이 단절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육체로는 백 년 정도 더 살지만 죽음이 예정된 삶일 뿐입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멸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 육체 말고 새로운 육체로 변모합니다. 그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줍니다. 생명을 다시 공급해 줍니다.

2. 눈물을 씻기시며

로마서 1장 8절에 의하면 사망은 불경건과 불의로 이어집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눈물은 잘못된 선택을 후회할 때 나오는 것 같습니다.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일을 돌아볼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 잘못된 일을 예수님이 돌이켜 주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슬픔이 모두 씻어집니다.

3. 수치를 제하시며

불의는 수치를 가져옵니다. 유교는 수치, 즉 부끄러움을 들추어서 사람을 조종합니다. 우리 민족 마음에 수치가 있어서 왜곡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부끄러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수치를 이해하시고 수치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결과로 수치를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수치가 모두 제거됩니다.

결론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적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죽음을 완전히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사망, 눈물, 수치도 극복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어야 삶은 삶으로서 빛날 수 있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