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1_[부활절]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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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5:08 / 2018년 04월 01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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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한줄 요약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영국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서로서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글입니다.

개요

부활절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부활절을 맞이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난주간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덕분인지 부활절이 더 상쾌하게 느껴집니다.오늘은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0. 죽음의 죽음 – 부활죽음의 죽음이라는 말은 영국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이 쓴 책 이름입이다.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죽기 전에는 어쨌든 희망이 있는데, 죽음은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맙니다. 그 무자비한 죽음이 죽는다는 말이 주는 기쁨과 통쾌함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죽음이란 삶이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살아 있는 졸병이 죽은 황제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혼자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겠지요. 혼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삶이 연구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범위는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인데 불신자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애써 담담하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종착점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죽음의 불안을 해소해 줍니다.

저는 기독교 사상이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활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모두 인간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데 있습니다. 이 기독교 사상을 생각할 때마다 매료되고 매혹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고 인간 세상에 비극이 생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을 고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 모든 설명의 결과로서 부활을 제시합니다.

부활은 삶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비로소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비로소 삶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가장 큰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선물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을 가지고 살아가면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1. 사망을 멸하시며

먼저 성경은 부활이 사망을 멸한다고 합니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땅에서 뽑힌 것이 사망입니다. 나무는 땅에서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시들어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나무가 완전히 죽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땅에서 뽑혔을 때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사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체는 백 년 정도 살다가 죽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습니다.

요즘 가끔 돌연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도 생명이 떠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체 기관이 존재한다고 해서 생명이 자동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최초의 시동을 걸어주어야 합니다. 현대 의학으로 아직 그 최초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지만 생명이 떠난 상태를 고치지 못합니다.

생명의 원인은 영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생명의 공급이 단절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육체로는 백 년 정도 더 살지만 죽음이 예정된 삶일 뿐입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멸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 육체 말고 새로운 육체로 변모합니다. 그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줍니다. 생명을 다시 공급해 줍니다.

2. 눈물을 씻기시며

로마서 1장 8절에 의하면 사망은 불경건과 불의로 이어집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눈물은 잘못된 선택을 후회할 때 나오는 것 같습니다.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일을 돌아볼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 잘못된 일을 예수님이 돌이켜 주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슬픔이 모두 씻어집니다.

3. 수치를 제하시며

불의는 수치를 가져옵니다. 유교는 수치, 즉 부끄러움을 들추어서 사람을 조종합니다. 우리 민족 마음에 수치가 있어서 왜곡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부끄러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수치를 이해하시고 수치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결과로 수치를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수치가 모두 제거됩니다.

결론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적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죽음을 완전히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사망, 눈물, 수치도 극복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어야 삶은 삶으로서 빛날 수 있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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