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1장 | 의가 된 믿음 | 선행은총, 노력,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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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창세기 15장 강의를 시작하겠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비로소 의로 인정받았다.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경해석가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매우 좋았던 것처럼 설명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믿음이 창세기 15장에서 비로소 ‘의’로 인정받았다면, 그전에는 아브람의 믿음이 ‘의’가 아니었다고 해석해야한다. 그전에는 아브람의 믿음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다. 앞의 설명과 모순이 된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믿음이 ‘의’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창세기 12장에서 15장 5절까지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 아브람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말이다. 이게 가능한?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가능하다. 이걸 현대에 적용하면, 신앙생활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 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서에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6:15절을 보자.

마태복음 16:15-16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 정도 함께한 시기이다. 예수님 돌아가시기 6개월 전이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졸업시험이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잘못된 대답을 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단순히 뛰어난 선지자가 아니라 창세기 3:15에서 예언된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이심을 맞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들은 이후 비로소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6:21을 보자.

마태복음 16:21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인류를 위해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죽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제자들은 이때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3년 간 예수님과 동행했고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 의에 이른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이 온전해진 건 예수님의 부활 이후이다.

우리는 흔히 복음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는 걸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은총을 받았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가진 상태가 아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다.

‘나는 예수님 영접했고, 구원의 확신도 있어. 예배 안빠지고, 성경공부 많이 하고, 전도도 열심히 했어.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은게 확실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구원받은 단계가 아니라 선행은총의 단계에 있는 걸 수 있다. 이론만이 아니라 경험을 보아도 그렇다. 많은 교인이 바른 믿음 혹은 구원의 체험을 갖지 못한채 착각에 빠져있다. 음식 냄새를 오래 맡으면 마치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른다. 구원받았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 실제와 상관 없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교인을 이용하고 속이려는 무리가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들 때문에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하게 막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문제부터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는 개혁주의를 배우지만, 교회에서는 인본주의를 가르친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이 인본주의인 것도 모른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상황을 선행은총의 단계라고 가르쳤다. 주의할 점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르치는 선행은총은 인본주의적 선행은총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인본주의적 선행은총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도 있고 안받을수도 있다는 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선행은총은 인간이 구원을 추구(seeking)해야 한다는 말일 뿐,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적으로 인도하고 주도하신다는 말이다. 구원을 추구하는 단계가 선행은총의 단계이다. 정리하면, 선행은총이라는 단어를 ‘인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신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구원을 확신하지 말기 바란다. 선행은총의 단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의로 인정받았다는 구절에 이런 주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강의를 들으면 좋겠다. 창세기 15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따라서 요절도 두 절을 택했다. 15:4-6과 17이다. 먼저, 4-6을 보자.

요절 1. 창세기 15:4-6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인정받은 이유를 알아보자.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 아브람은 앞장에서 큰 사건을 겪었다. 소돔 지역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납치된 조카 롯을 구출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물리쳤다. 완벽한 승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복의 위협을 느꼈야했다. 삶이 불안정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후계자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물려줄 자식이 없다는 사실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안심시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이런 추측의 근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안심시키셨다. 또, 아브람의 몸에서 난 자식이 후계자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실감나게 설명하셨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왜 이 상황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을까? 이유는 한 가지이다.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비약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문맥에 명시적으로 아브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보면 비약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면 그건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 구절이 어떻게 아브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까?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2장과 13장에서 아브람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아브람은 창세기 3: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을 믿고 있었다. 또, 그분이 셈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신에게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단순히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자손으로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이 이해된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올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이해되었다. 아브람은 자신이 자식을 갖게 되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사건임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만 한다.

아브람은 현재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낳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오실 수 있다. 즉, 아브람은 자식이 태어날 것을 믿는 것과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을 믿는 것이 중첩된 상황에 놓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식이 많아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있다. 지금까지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던 아브람이 이제서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따라서 아브람의 믿음이 의롭게 여겨진 것이다.

요절 2. 창세기 15:7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지난 시간에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인정받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브람은 구원계시의 핵심인 ‘구원자의 대속’을 믿었다. 객관적 진리에 관한 믿음이다. 이것이 주관적 믿음으로 완성된 순간이 15:6이다. 아브람은 생명과 재산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 몰렸다. 자식이 없어 허무감이 커졌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순간 아브람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믿음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내면화되는 것을 느꼈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다. 구원의 순간이다.

구원에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다. 좁은 의미의 구원은 구원의 순간을 의미한다. 구원의 순간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전적으로 유효하다. 인간의 공로가 구원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넓은 의미의 구원은 구원의 순간을 둘러싼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구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아브람 언약에 관해서 알아보겠다. 아브람 언약에 관한 내용은 자료가 많다. 중복되는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이 강의의 목적대로 핵심 세가지만 짚어보겠다. 첫째, 언약을 왜 하는가? 둘째, 왜 이 시점에 언약을 했는가? 셋째, 이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언약을 왜 하는가?를 알아보자. 예전에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었다”, “이 언약은 어떤 의미가 있다”라고 배웠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깨달았다. 애초에 왜 언약을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애초에 하나님은 왜 언약을 하는 것일까? 창세기 2장 강의에서 설명했으니 그것도 참조하기 바란다. 언약을 하는 이유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아무리 친해도 계약관계에 있지 않으면 남남이다. 죽고 못살것 같은 연인사이도 헤어지면 남남이다. 영원히 우정이 변치 말자던 절친도 사이가 틀어지면 남남이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갑자기 사라져도 찾을 방법이 없다. 휴대폰 위치추적을 하려고 경찰서에 찾아가도 남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렇다. 사람은 결국 남남이다. 남이 남이 아니기 위해서는 계약이 필요하다. 계약의 종류에 따라 관계가 결정된다. 결혼계약을 하면 부부가 된다. 채무계약을 하면 채무관계가 된다. 노동계약을 하면 고용관계가 된다.

계약이 있어야 남의 생활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계약이 없으면, ‘너나 잘하세요, 남이사 무슨상관이요’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둘째, 왜 이 시점에 언약을 맺었을까? 어렵지 않다. 특별한 시기라서 그렇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념일을 ‘시간에 매듭을 짓는 것’이라고 했다. 밋밋한 밧줄은 붙잡기 어렵지만, 중간에 매듭이 있는 밧줄은 붙잡기 쉽다. 시간이라는 것도 밧줄처럼 이어진다.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매듭이 있어야 의미있는 시간을 기억으로 붙잡아 둘 수 있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매듭을 지어놓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 시점에 아브람과 언약을 맺은 이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영적 생일잔치를 벌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낭만이 있다. 당연하다. 낭만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니까. 잊지 말아야할 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나님과 풍성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이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모두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언약이다. 그중에서 본문의 언약은 그 방법으로 가나안이라는 땅을 특별하게 구별한다. 앞으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가나안 땅은구원계시의 배경이 된다. 이 땅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즉, 가나안 땅은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앞으로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과 언약을 하신다. 그때는 범위가 넓어져서 가나안 땅이 아니라 전세계가 배경이 된다. 가나안 땅을 배경으로 가르친 내용이 전세계에 확장해서 적용된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창세기 15장의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하고, 17장의 언약을 ‘할례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경륜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계획표이자 진도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구원계획, 다시 말해서 여자의 후손이 어떻게 오실 것인지 설명하신다. 한꺼번에 설명하지는 않고, 점진적으로 설명하신다.

언약식에서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원래는 계약의 당사자가 다 지나가야한다고 한다. 하나님과 아브람이 둘 다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횃불 즉, 하나님만 지나가셨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 언약을 이루겠다는 의미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신본주의이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 감사하자.

정리

두 가지를 알아보았다. 첫째, 아브람이 삶의 위기 순간에 회심했다. 롯을 구출하면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물리쳤지만, 보복의 걱정해야 했다. 생명과 재산이 위태로웠다. 하나님은 당신이 방패와 상급이라고 하시며 위로하셨다. 상속자가 없어 인생의 허탈해하는 아브람에게 자식을 약속하면서 별을 보여주며 실물교육하셨다. 아브람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곧 여자의 후손이 오시는 것과 중첩되는 사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식이 태어날 것을 믿으면서 동시에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을 믿었다. 객관적 진리가 주관적 믿음으로 심어졌다.

둘째, 이 날을 기념해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생일잔치처럼 이 날을 축하해주신 것이다. 언약은 관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부르는데, 가나안 땅이 장차 복음의 배경이 될 특별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창세기 15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자

적용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힘든데 내가 왜 살아야 되지?”라는 고민을 하게될 수 있다. 극단적인 얘기인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당신이 바르게 복음을 향해 간다면 이런 순간까지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이 말을 기억하라. ‘나는 바르게 가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필자도 그런 순간을 겪었다. 그때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 아닌 번영주의였다. 번영주의자는 ‘니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니까 그렇게 힘든 거야’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자는 신앙생활을 평균은 했다. 성경공부, 예배출석, 기도, 금식, 전도 등등 중간 이상은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주장에 반박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까? 신앙생활 잘하면 복받는다는 거짓을 의심없이 믿으며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제자들이 바닥까지 내려간 일을 기억하기 바란다. 제자들은 능력이 봉인된 채 자기 불의가 폭로되는 걸 보게 된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조롱과 멸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고통하게 된다. 그들은 그 바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인생은 고해이지만, 인생이 고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조금만 견디기 바란다. 홀연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영혼에 각인되고, 기쁨이 항상 고통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은 아브람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길지 않으니까 창세기 12장에서 15장까지를 읽으며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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