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8 성령님에 관한 오해 4. 방언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 행 02:01-13

0. 방언 운동

성령님에 관한 오해 네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주는 방언 운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현대 방언 운동이 1900년 미국 아주사에서 시작되었으니 120년 이상 지났습니다. 우리나라도 방언 운동의 파도를 결산을 해도 될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 성령님에 관해서 알아보면서 방언 운동의 문제점을 짚어보겠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 02:01-13입니다.

사도행전 02:0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1.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방언 받아야 구원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방언이 성령 세례의 증거이고, 구원을 받는 근거라고 했습니다. 강력하게 내세우지 않지만 아직도 그 주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방언을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 방언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분들과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은 것이고 성령 세례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단순히 주장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리칩을 몸에 이식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당신은 베리칩 교를 믿고 있군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도 화를 냅니다.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는게 배리칩이 구원을 좌우한다면 그건 베리칩 교가 확실합니다. 방언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방언교이고, 베리칩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베리칩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베리칩을 몸에 이식해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게 기독교입니다. 방언 안해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해야 기독교입니다. 물론, 방언이나 베리칩을 주장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예수님도 믿고 방언도 해야 한다거나 예수님도 믿고 베리쳅을 이식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온리가 기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알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이게 기독교입니다. 예수 플러스 알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건 플러스 알파에 해당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성경에 오직 예수라고 기록된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누구나 오직 예수라고 말합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고 논쟁할 이유도 없습니다.

2.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하게 되는가?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그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현상입니다. 왜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 방언은 완벽한 외국어였습니다.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다가 이스라엘로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온 사람들이 자기 나라 언어를 알아들었으니까요.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이 구절을 인용한 책 ‘하나님의 큰 일’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건 성령님의 취임인사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하면 현충원이나 국립묘지에 방문합니다. 그건 행동으로 보여주는 취임인사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로 외국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취임인사를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오셨다는 의미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방언을 주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성령님 자신을 내세우려고 오신 게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그 사실을 방언 즉, 외국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게 하는 것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항상 방언을 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이 기록된 것이 사도행전에 4번 나옵니다. 2장 예루살렘, 8장 사마리아, 10장 가이사랴, 19장 에베소에서 입니다. 예수의 유언엔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방언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만 한 게 아니라 예언도 했고,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 하셨던 기적을 성령님이 똑같이 행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방언만 강조합니다. 다른 은사에 관해서는 입을 닫습니다. 지금도 병고치는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하철 성형수술 광고에서 비포, 에프터를 보여주잖아요. 믿으라고 소리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비포, 에프터 사진을 보여주면 됩니다. 하지만,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 중에 그런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있으면 코로나 환자를 치료해서 비포, 에프터를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은사집회 광고가 싹 사라졌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방언을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3. 방언 운동의 결과는 무엇인가?

방언 운동의 결과는 어땠는가? 역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방언이 없을 때 기독교는 전세계에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방언을 하지 않았을 때 기독교가 강력하게 전파되었습니다. 반대로 방언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이후에 전세계에서 기독교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생각해 보아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지 않습니까? 반발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방언 운동을 해서 기독교가 성장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방언 운동을 하면 일어나는 특징이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기독교는 쇠퇴한다는 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방언 운동이 확산하면 교회 다닌다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교회가 교회가 아닌 곳이 되어버립니다. 목사의 말이 천박해지고 교인의 행동이 과격해집니다. 교회가 조금만 비판을 받아도 집단 폭력을 행사합니다. 각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자기 교회 아니면 다 적으로 간주하는 교회 이기주의가 강해집니다. 기독교가 강력하게 전파된 시대는 기독교가 힘이 강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힘이 약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자기 희생으로 세상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준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예만 들겠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존경하는 사람이 장기려 박사입니다. 부산 복음병원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고 자기 월급을 털어서 도와 준 일로 유명합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주시오.’ 장기려(1911∼1995) 박사가 영양실조 환자에게 직접 썼던 처방전입니다. 지나가는 걸인에게 적선으로 한 달 월급 수표를 주었다가 그 걸인이 수표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경찰서로 소환되어 해명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습니다.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해 지불하기도 했고, 병원 측의 반대로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했답니다. 복음병원 초창기에 모든 직원의 월급을 식구수대로 나누어 식구수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고 자신은 아들 하나뿐이므로 운전기사와 같은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1985년 남북관계의 일시적 해빙기에 정부가 배려하여 특별방북대상으로 선정하였으나 ‘나만 특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방북을 사양한 일,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평생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1968년에 청십자 의료보험이라는 최초의 의료보험 제도를 시행해서 오늘날 건강보험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표어가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였습니다.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우리나라 최초로 간절제술을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방언이 아니라 행동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의사였고, 추진력 있는 행정가였고, 미래를 준비하는 개혁가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를 이끈 것은 방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오늘날 방언 운동은 어떻습니까? 삶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방언하면서 과격하고 무례하게 전도합니다. 억지로 교회 데려가고, 무조건 예배 많이 참석하게 합니다. 마음을 감동시키는 게 아니라 힘으로 굴복시킵니다. 방언 운동은 무엇을 남겼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게 했지만, 동시에 교회가 교회가 아니게 했습니다. 방언 운동은 교회를 소외시켰고 복음을 소외시켰다. 방언은 남고 복음을 사라졌다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방언 운동을 지지하시는 분이 있다면 근거 없이 지지하지 마시고, 냉철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면, 방언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방언 연습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00119 창세기 15:01~07, [신년] 어떻게 변할까?

창세기 15:01~07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0. 변하고 싶은데 잘 안돼요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다”
“​The definition of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but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Albert Einstein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고영성)에서 핵심습관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볼링에서 킹핀을 맞추면 다른 핀들이 쓰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습관을 발견해서 그것을 바꾸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강조하신 것도 한 가지 습관의 변화였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습관입니다. 언약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습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1. 도전 후에 오는 침체

아브라함은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조카 롯이 납치되었을 때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318명을 이끌고 전투에 뛰어들어 롯을 되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침체에 빠진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로 바꾸어서 조직 폭력배에게 조카가 납치되었는데, 조직 폭력배를 공격해서 조카를 구출해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조카가 납치된 상황에서는 정신없이 행동하겠지만, 일이 끝난 뒤에는 후환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사건을 경험하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암 진단을 받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차분해집니다.

어쨌든 도전을 시도한 후에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울증 증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2. 안보이는 것 보기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에 의존하다보면 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쇠퇴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흥할 때가 있고 쇠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이는 것을 의지하면 언제나 실망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심어주려하신 핵심습관은 언약을 의지하는 습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습관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정의 기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하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3. 의로 인정받은 믿음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구절을 보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뭇별을 보여주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문맥에 감추어진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처음 부름받을 때, 이미 비슷한 언약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그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상태였고, 자신도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소망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기적이 아니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가진 정도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아이를 낳아야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는 언약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2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 #4. 결론: 핵심 습관을 바꾸자

그리스도인의 핵심 습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습관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볼 때, 외모, 재산 같이 보니는 것으로 분별하지 않고, 인격, 성품 등 보이지 않는 것에 따라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습관이 익숙해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데,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려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2018.12.25_[성탄절] 거룩한 낭비

2018.12.25 성탄절

본문

마태복음 01:21~23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현대인의 두려움 – 낭비

성탄절하면 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 박사에 관한 말씀도 그렇고, 누가복음에서 밤새 양떼를 지킨 목자들도 그렇고 둘다 별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64억 km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그 사진에는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주에 지구만 있다면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낭비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마음 먹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낭비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랜드 사목을 할 때, 이랜드에서 강조한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줄임말로 ‘인, 지, 낭’이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 낭비제거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중에서 세번째 낭비제거가 나머지 두가지에 비해서 한단계 격이 낮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거창한 것 같은데, 낭비제거는 좀 쪼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낭비제거를 위해서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작은 낭비에는 신경을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기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조금만 낭비를 제거해도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낭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무언가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낭비의 역설

낭비를 반대하지만, 낭비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낭비하지 않느려고 하면 더 낭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이 있었습니다. 깜깜해서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고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헤드랜턴을 잃어버리고도 하나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답니다. 2인 1조로 일했으면 컨테이어 벨트를 비상멈춤 해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해 줄 사람이 없었서 숨졌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회사 경영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절감 목표를 정해주면, 그 목표 안에서 낭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다보면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낄 건 안아끼고 아끼지 않아야 될 건 아끼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헤드랜턴이나 2인 1조 작업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만 작업이 멈춰도 헤드랜턴이나 인건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려다 더 낭비하게 된 셈입니다.

낭비에 관한 또하나의 역설은 낭비인 줄 알았는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 에펠탑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에펠탑은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높이 324m로 81층에 해당합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 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낭비의 상징이었던 에펠탑은 파리의 자존심으로 변했고, 매년 수 백만 명이 방문하는 유료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에펠탑 뿐만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이익이 된 예는 많습니다. 고기집 종업원이 주인이 미워서 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손님들에게 고기를 막 퍼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커녕 장사가 더 잘됐답니다.

낭비와 사랑

그래도 낭비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를 막으려다가 더 큰 낭비가 생길 수 있고, 낭비가 이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 앞에서 낭비가 일어나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확실한 이득을 근거로 낭비를 합리화하지 말라, 낭비는 나쁘고 말합니다.

그런데, 낭비에 관한 특히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자고 할 때는 한 단어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즉, ‘낭비하지 말자’는 말 앞에 ‘나말고’가 숨어있습니다. 남의 낭비에 관해서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낭비에 관해서는 관대합니다. 원가 절감, 낭비 제거를 강조하는 경영자도 양복을 수 백만원 , 시계도 수천 만원, 자동차는 수 억원 짜리를 구입합니다.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낭비가 분명합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자기는 낭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남이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나는 낭비하고 싶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낭비의 결과입니다. 어렸을 때 평상에 누워서 별을 본 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은 일, 이른 새벽에 산책한 일, 가족들과 중국 여행 가서 거리를 걸었던 일,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일, 성탄절에 마트에서 아이들 선물을 샀던 일 등.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비생산적인 일 투성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낭비의 기억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인생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어느 해변에서 저녁 노을을 감상하던 순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 일,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 예정에 없이 1박 2일로 미지의 장소로 짧은 여행을 간 일 등을 꼽았다. 결혼이나 사업 성공, 자녀의 성취, 혹은 유럽 일주 여행 같은 큰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에 새겨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생산적인 일, 혹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 다시 말해서 낭비에 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낭비한 일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기꺼이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는 낭비를 허락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지출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도 담배는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지출입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당연한 지출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지만, 스스로는 낭비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 가족, 자녀에게 낭비합니다.

낭비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대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낭비

하나님은 왜 광대한 우주 공간을 낭비하면서 수 많은 별을만드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기에는 그 불합리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정도 공간 낭비는 기꺼이 감사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큽니다. 옛 사람들은 별이 천장에 보석을 매달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스케일이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우주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찬란한 별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보다 더 큰 낭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당은 얼마일까요? 무한대입니다. 현재 인간 중에서 일당이 가장 높은 사람은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입니다. 일당이 무려 2억 5천만원이랍니다. 한 번 축구를 할 때마다 2억 5천만원을 받는 축구선수가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낭비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무한대에 비하면 0에 수렴합니다.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이라는 말입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고의 낭비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고의 낭비가 일어난 날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그 가치를, 그 능력을 한 인격 안에 제한하셨습니다. 즉, 낭비하셨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감행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은 잡아가둔다는 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 할까요? 수억원, 수백 억, 수천 억 아니요, 무한대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하면 지구와 우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지혜를 왜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십니까? 왜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렇게 낭비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다른 데 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 제 아이들을 보면,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우주와 과학을 생각하면 신앙이 약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들어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직행통로입니다. 신자는 내 안에 계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확고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명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입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어쨌든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구절을 택해서 거룩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낭비는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무한한 낭비를 감행하신 성탄절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를 살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배도 낭비일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낭비를 알기에 이 자리게 왔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것입니다. 낭비를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실천해 봅시다.

2018.03.04_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본문

누가복음 10:25–37, 신명기 6:4~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한줄 요약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간에는 신명기서가 인용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율법은 가이드(a guide)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벽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또다른 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즉,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벽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잘 깨닫는 것도 힘들지만,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교육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까 답은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대가가 성경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교육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많자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맞춤형 단계적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르셨고, 단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영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하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율법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26~28. 영생을 얻는 방법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변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앞에서 하신 말씀과 대답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상이었습니다.

[14:5~6]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 두 제가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못지 않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은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는 가르침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맞춤형 교육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던 말씀을 대상에 관계없이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율법학자가 신명기 6:4~5절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이 말씀을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끄집어 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인격성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데만 힘썼지 율법의 정신을 지켜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태도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법률에 충성했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은 거부했습니다.

2. 29~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인격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생겼는데,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몰래 피해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생각을 고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양심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데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 주일 성수는 잘하는데 직원들 착취하는 장로, 술 담배하지 않는데 돈 떼어먹는 집사,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청년, 건전하지 않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헛똑똑이 교인 등입니다.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냐면, 어떤 한 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철처하게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양심이 없는데 뭔가 충성하니까 자기 스스로 신앙 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인 예를 들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관련 뉴스를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편들고 어리석은 주장을 일삼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이웃이 아니라 교회 안다녀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던 불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3. 37.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 말씀의 절정은 37절입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단계적 교육입니다.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직 그 단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비슷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말로만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또 교회 안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교회 안에서만 충성,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서 강자의 횡포에 항의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손해를 보아도 공의를 지지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떨리게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헛된 충성을 믿음의 증표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온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지키다가 손해를 보고 좌절했을 때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을 깨달을 것이고 깊은 확신 속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율법학자는 오늘날 교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의 양심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신앙 생활 잘하고 있지요? 저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배웠고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율법학자의 선한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보다 악한 삶을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율법학자의 몫입니다. 그가 어떤 길로 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선한 일반인 즉,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신앙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문제가 있든지 그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논리와 사변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헛된 확신에서 벗어나서 의를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려운 길을 가라고 권유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가라고 이끄십니다. 헛된 확신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1.21_[신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이사야 66:01~24
2018년 01월 2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66:1~24

[핵심 구절]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한줄 요약]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면 불필요한 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개요]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새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나누어주는 다이어리를 쓰는 분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다이어리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무슨 플래너라는 이름으로 다이어리와는 차별성을 가지며서 비싼 값에 팔리는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이제 유명해졌고 이랜드 출신이 설립한 3P플래너도 있고, 윈키아 플래너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플래너와 다이어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가격이 비싸고 디자인이 좋은 것을 플러너라고 할까요?

이번 시간에는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을 통해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0.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은 목표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어리는 단순히 계획, 일정을 쓰는 것이지만, 플래너는 목표를 정하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과 일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플래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의 목표를 먼저 적고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 일정을 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상이 의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은 플래너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도 강조된 말입니다. 일곱가지 습관 중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었습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기 원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매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즉,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걸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성공이나 성취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성공의 대가로 훨씬 더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어버린 경우,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가족과 관계가 안 좋은 경우, 치열한 경쟁으로 높는 지위에 올랐지만 인격을 상실한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지막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닥치는대로 살다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조금씩 다른 길을 가게되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최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후회하게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우리의 영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최후의 순간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1. 1~6. 하나님의 초점 : 행위가 아닌 마음

이사야서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알려줍니다.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은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훌륭한 예배당이 중요한게 아니라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멋진 성전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전세계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이보다 특별한 건축물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건축물을 건축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의 신앙도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 성전은 무너집니다. 성전의 그릇들도 모두 약탈당하고 맙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래도 이게 중요하지 않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진정한 깨달음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을 살인하는 것처럼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한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성경을 가지고 성공을 가르치고 예배를 통해서 번영주의를 전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이용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 7~14. 하나님의 방법 : 고난 중 형통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산을 하지만 진통하는 즉시 해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낳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빨리 해산한다고 해도 진통이 전혀 없기는 힘들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난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힘들게 하느니라.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쌀 수 밖에 없는 선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고난은 고생일 뿐이지만 의미있는 고난은 영광이 됩니다.

3. 15~24. 하나님의 성품 : 자비와 심판

하나님은 자비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계획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일년의 계획을 세울 때, 신앙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너무 바빠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위해서 바쁜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궁극을 생각하면서 일년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일년 계획을 세울 때 영혼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자.

2018.01.14_[신년]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는 기회

이사야 55:01~13
2018년 01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55:1~13

[핵심 구절]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줄 요약]

인생에서 기회는 지속적으로 오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요]

새해부터 가상화폐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누가 얼마 벌었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등등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고 초조해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0. 기회는 계속 옵니다

지금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이라고 해서 인터넷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산업 국가의 주식 시장이 급속한 상승 한 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이다. IT 버블, TMT 버블, 인터넷 버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관련 기업 주식이 폭등해서 한 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그 전으로 돌아가보면 강남 개발을 시작하던 70~80년대에 부동산을 가지고 한 순간에 부자가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회는 주기적으로 계속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복기를 했다가 다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1~5. 기회는 내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만날만한 때에 여호와를 만나라고 하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할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불신이 깊던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미리 예언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께 나오라고 초청합니다.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잘 준비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시간이 없고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큰 발전을 이룬 강의가 그런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모든 강의가 다 도움이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식이 쌓이니까 도움되는 강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 강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저와 인생의 교차점이 많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2. 6~9. 하나님이 더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수는 고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으면 하수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서출판 열림원, 1998)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갈 중요한 기회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10~13. 하나님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앞으도 또 옵니다. 크고 작은 기회들이 계속 올 것입니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잘 준비하고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흘려보내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돈 버는데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좀더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의 성품에도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좀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복음을 가르치신 이유도 비슷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어떤 옷을 입고 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기회가 옷을 갈아입고 오더라고 알아보는 시각을 갖추자

2017.10.01_제사, 왜 지낼까? 2

창세기 04:01~07
2017년 10월 0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한줄 요약]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방법을 알려주는 의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1. 제사는 효도 방법이 아닙니다

제사 때문에 명절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제사로 인해서 가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좋은 풍습인 것 같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데일리 김영수 기자] 명절 전후 이혼 신청이 평소에 비해 3배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태섭 의원(더불어민주당·서울 강서갑)이 27일 법원행정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하루 평균 298건의 이혼신청이 접수된 반면, 설날과 추석 전후 10일간은 하루 평균 979건으로 3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이혼신청 중 22.5%가 명절 전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절 직후 3~4일간 이혼 접수가 매일 700~800건으로 가장 많았다. 평소 쌓였던 부부간, 가족간 갈등과 각종 스트레스가 명절기간 폭발하면서 평소에 비해 이혼소송 접수 건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0년간(2008~2017.8.) 월평균 2만6143쌍이 결혼하고 9564쌍이 이혼하고 있으며 다섯쌍 중 네쌍은 협의이혼, 한쌍은 재판이혼을 하고 있다.

금태섭 의원은 “부부갈등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명절갈등’을 특별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출처] https://getpocket.com/a/read/1905115127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았습니다. 공자의 무책임한 제사 발언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깨어진 예입니다.

장손 집안입니다. 조상덕은 보지도 못해서 명절마다 해외여행은 커녕 차례상에 성묘에 고생 고생 고생… 그리고 저희 집안도 역시나 명절과 제사는 항상 술과 싸움으로 끝나는 대단한 집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아버지들 모시고 차례와 기제사 그만 지내겠다고 폭탄을 날렸습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었죠. 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이 그렇게 많은지 그때 알았습니다. 당연히 저는 근본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되었구요 작은 아버지들이 저와 계속 말다툼 하시더니 본인들이 제사를 모셔가겠다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습니다. 당황하던 작은 어머니들의 표정을… 작은아버지가 제사 가져간 첫 해에는 제사모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제사 안지낸다고 하시더군요. 제사와 차례를 안지내니 명절도 당연히 친척이 다 모이지 않고 저희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즐기고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어머니께서 종종 말씀하십니다. 니 덕분에 명절을 명절답게 보낸다고….

[출처] https://getpocket.com/a/read/1908667535

제사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이유는 제사가 조상을 공경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2.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주는 의식입니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기 전에 저는 가인의 제사가 거절되었다는 말씀을 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고 또 우리 나라는 농경 국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인의 제사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는 단순히 정성으로 나아가서는 안되고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비유입니다. 비슷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유할 수는 없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유한 것인데, 예수님의 십지가는 우리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피가 흘려지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는 말씀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때로는 기쁘게 즐겁게 힘차게 살아가지만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 때문에 항상 노이로제에 걸려서 살 수는 없지만 가끔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바로 명절이고, 제사 드릴 때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3.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주는 의식입니다

제사는 대속을 통해서 살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속을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요. 그래야 우리는 대속이 얼마나 힘들 일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속을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필요합니다. 첫째는 능력입니다. 그 사람이 망쳐놓은 일을 책임지고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는 능력말입니다. 둘째는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부족합니다.

죄를 위한 대속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격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사람만이 죄인들 대속할 수 있습니다.
대속을 실천할 때,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속을 실천하며 삽시다. 명절 제사를 보면서 제사의 참된 의미와 예수님의 대속을 기억합시다

[결론]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방법을 알려주는 의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명절에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공경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20150208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룻기 3:1-10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중심 구절]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3:4)

[한 줄 요약]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침반을 주셔서 삶을 인도하신다.

[개요]

1. 성경 인물들의 삶을 해석하는 방법

입다는 위대한 사사였지만, 큰 실수를 범함

성경 인물들의 선택이 모두 옮은 것은 아님

2. 나오미의 선택

나오미의 선택도 인간적인 선택임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수를 고쳐주심

[결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자!

20150125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기 02:07-16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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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구절]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한 줄 요약]
신앙의 길에 들어선 룻은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갑니다. 이외같이
신앙인의 삶은 은혜를 좇는 삶입니다.

[개요]
1. 호의를 베푸는 보아스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품
룻의 소식을 들음

  1. 룻의 겸손
    자신의 처지를 앎
    은혜받을 자격이 없음을 앎
  2. 하나님의 섭리
    친족인 보아스

[결론] 하나님은 단계적 은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끄신다.

20150118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룻기 01:19-2:07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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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구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룻2:1)

[한줄 요약]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죽은 남편의 친족으로 유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설교 개요]

  1.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하나님을 원망하는 나오미
  2. 유력한 친족
    죽은 남편의 친족인 보아스
    우리에게 있는 유력한 친족, 예수님
  3.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
    단계적 은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결론] 하나님은 단계적 은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끄신다.

20150111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기 01:06-08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설교 듣기

[중심 구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

[한줄 요약]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햄으로 귀향한 사건을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간 것과 비슷한 신앙의 결단입니다.

[설교 개요]
1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형통케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란?

2 탕자와 같은 나오미의 귀향
나오미의 귀향은 구약의 탕자 비유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영광이 됨

3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인
룻은 이방인 중에서 아브라함 같은 여인

[결론] 그리스도 안에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