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_제사, 왜 지낼까? 1

창세기 04:01~07
2017년 09월 2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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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7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그리워 하는 마음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설레고, 명절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명절이 반갑기 보다는 우울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명절 스트레스에 더하여 제사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부터는 제사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제사를 지내면 안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이렇게 하는지 원래 이유를 모르면 불필요한 관습을 답습하게 됩니다. 영국 판사들이 쓰는 가발의 기원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판사에 임용된 어느 젊은이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왜 판사들은 하얀 가발을 쓰고 재판을 하는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는 무척 더운 나라여서 가발을 쓰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판사들은 두꺼운 법관복까지 입고서 하얀 가발을 쓰다니, 젊은 판사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꽤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예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모른다는 대답들뿐이었다.

그는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왜 가발을 쓸까?” 알고 보니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얻고서 ‘아하, 그렇군.’이라고 반응하며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겠지만, 그 젊은 판사는 달랐다. 그는 다시 “그렇다면, 왜 영국에서는 판사들이 가발을 쓰는 걸까?”란 질문을 던졌다. 판사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얀 가발을 썼다는 설이 있었지만 그가 알아낸 것은 의외의 사실이었다.

영국의 법관들은 대개 나이가 많았고 그 때문에 대머리들이 많았다. 게다가 영국의 법정은 천장이 높아서 매우 추웠다. 결국 하얀 가발은 권위의 상징물이 아니라, 그저 방한용이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사용하던 가발을 적도 바로 위에 위치한 싱가포르에서도 써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관성’은 지독히도 생명력이 질겨서 아직도 싱가포르 법정에서는 가발 쓴 판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 ‘틀을 깨라’는 창조적 발상이 젊은 판사가 품은 ‘왜?’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왜 그것이 여기에 존재하는 걸까? 왜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해답을 탐구하는 자가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머리가 비상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디어 창조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출처: http://infuture.kr/1036 [인퓨처컨설팅 & 유정식]

우리 나라에서는 조상들에 대한 제사가 일반적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거부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민족이든지 원래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드렸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 ‘수릿날’과 10월 ‘계절제’를 고구려의 ‘동명’, 신라의 ‘팔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한국의 신화·전설·가요가 구체적으로 불린 자리에 제천 의식이 있었고, 서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생활 모습으로서 무속 신앙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86%8D_%EC%8B%A0%EC%95%99)(巫俗信仰), 곧 샤머니즘 (https://ko.wikipedia.org/wiki/%EC%83%A4%EB%A8%B8%EB%8B%88%EC%A6%98)을 가지고 있었다. 또 수렵 경제에서 농업 경제로 넘어오면서 집단적인 부족 회의와 공동적인 제전으로 제천 의식을 열고, 생명의 근원인 창조신과 더불어 곡신(穀神)을 제사지냈다.

출처:위키백과 ‘한국의 제천 행사’ 중에서

2. 공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를 조상 숭배로 왜곡했습니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조상 숭배로 바꾼 사람이 공자입니다. 공자는 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을까요?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조상이 돌아가신 날이나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한국에서 제사 지내는 풍습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민속학자가 연구할 일이기에, 저는 공자가 제사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공자는 제자가 귀신과 사후 세계에 관해 물었을 때, ‘사람의 일도 아직 잘 모르는데 귀신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 또 살아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는데 죽어서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잘 모르는 일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은 사람이 해결해야 하고, 사람이 세상일을 해결하는 이데올로기로 ‘인(仁)’이라는 사상을 만들게 됩니다.

공자는 인(仁)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예(禮)’를 말하고, ‘예(禮)’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강조합니다. ‘관혼상제’에서 상제(喪祭)는 조상이 죽었을 때 어떻게 제사를 지낼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공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하면서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성껏 제삿밥을 만들었는데, 정작 제삿밥을 먹을 조상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묵자(묵가를 만든 제자백가 중 한 사람)는 귀신도 없는데 제사를 지내라는 공자가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비판합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공자가 ‘재여’라는 제자와 부모에게 제사 지내는 문제로 논쟁한 내용이 있습니다. 공자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이유는 부모가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준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3년을 품에 품고 지내기에 자식도 부모님에게 보답하기 위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시묘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말하는 제사는 조상의 사후 귀신을 모시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낳고 키워준 조상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공자의 답변에 ‘재여’가 다시 질문합니다. 부모가 죽은 후 3년 동안 시묘를 하면 생활에 피해가 생긴다며,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해 먹고 살아야 하는데, 3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으면 뭘 먹고 사느냐고 항변합니다.

‘재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기”곡례편’에 나오는 ‘예는 서민에게 내리지 않는다’는 구절로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예(禮)’를 실천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일반 서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공자가 살았던 봉건시대의 사회 계급은 위로 ‘천자’가 있고 그 아래로 땅을 하사받은 ‘경대부’가 있고 ‘경대부’ 아래에 행정관료 역할을 담당하던 ‘사(士)’가 있었습니다. ‘사(士)’를 선비라고도 해석하는데 조선 시대 양반에 해당하는 계급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자가 말한 제사는 ‘양반’이상의 계급에만 해당되는 거고, 일반 서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출처 : 김기동의 ‘중국문화기행’ 7, 오마이뉴스 2017.3.28.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 출판  | 2001년 11월 30일 출간)나 북경대학교 리링 교수가 쓴 <논어, 세 번 찢다>(글항아리 펴냄)에서 모두 공자가 기존 통치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제사가 하늘에 드리는 것이었는데, 공자에 의해서 조상 숭배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효도’라는 윤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것’을 ‘효도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위에서 인용한 글을 마저 보면 중국 사람들의 조상 숭배가 나옵니다. 그들의 제사는 우리 나라와 달리 단촐하고 실용적입니다.

작년 구정에 중국친구 초대로 시골에 있는 중국 친구 아버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설날에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상이 단출합니다. 튀긴 닭고기 한 접시와 튀긴 물고기 한 마리 그리고 과일이 있습니다. 물만두도 한 그릇 있네요. 당연히 술도 있고요. 다른 친척이 와서 절을 할 수 있게 제사상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답니다.

[Image: file:///C:/-/blob/cRSAAAUV88y/Y29IDaQxL0v08mT0Zepaow]
저의 중국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제사상을 이렇게 차렸다고 생각할 수 있어, 중국 친구를 소개합니다. 중국 친구는 나이가 쉰셋이고 한국으로 치면 중소도시 국립인민병원 의사이고, 대학에서 강의도 합니다. 중국 친구 부인은 중국공상은행에 근무하는데 직위가 한국으로 치면 부장급입니다.

중국에서는 6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는데, 하나의 제사상으로 한꺼번에 제사를 지냅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표인 ‘지방’은, 개인별 이름표를 가진 우리나라와 달리 단체 이름표를 사용합니다. 제사상 앞에 있는 ‘단체지방'(제가 만든 단어입니다) 족자에 6층 건물 그림을 그리고 맨 아래부터 1대, 2대 ~~ 순으로 조상의 이름을 적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도 간단한데, 단 한 번 절하고 제사를 끝냅니다. 공자의 말처럼 조상귀신이 없으니, 제사를 지내는 동안 문을 조금 열어 조상귀신을 모시는 절차도 없습니다. 중국사람은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일 보다, 친척들이 모인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출처 : 김기동의 ‘중국문화기행’ 7, 오마이뉴스 2017.3.28.

3. 부모님을 공경하되 제사는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명절 스트레스 문제가 나온지 매우 오래되었는데, 고쳐지지 않는 이유도 제사 문제와 비슷합니다. 즉, ‘효도’라는 문제와 맞물려서 생각에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김경일 교수는 유교를 죽은 사람 섬기다가 산 사람 죽이는 종교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렇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의 아버지 김춘교 선생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큰 교훈을 줍니다.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경기도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능내리에 살던 무렵 아들 김용기가 세 살 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그의 어머니는 크게 근심했다. 아무리 용한 무당을 데려다가 밤을 새면서 굿을 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또 점쟁이에게 물어보면 좋은 약 처방을 받을까 하여 그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점쟁이 앞에 정성을 다해 아이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 점쟁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이 아이는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린 용기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용기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려고 하는 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머니는 전도지를 주면서 이 길로 10리 정도 나가면 용진교회가 있으니 계속 걸어가라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어머니는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아이가 크게 숨을 쉬더니 엄마를 부르면서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기에 가까운 주막집에서 잠깐 쉬면서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을 얻어 주고 그 아주머니가 준 전도쪽지를 읽어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용기 엄마는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해’라며, 그 발걸음을 재촉하여 용진교회를 찾았고 이후 계속 출석하게 됐다. 그렇게 용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출처: 한국장로신문, 농민운동가 김용기 장로, [제1200호] 2009년 10월 3일]

김춘교 선생은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사상을 차리고 동네 어른들을 잘 섬겨서 인심을 얻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삼촌이 갓을 쓰고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4.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줍니다. 이것은 평생에 걸쳐 묵상해야 할 주제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하려고 합니다. 제사는 하늘에 지내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제사드리는 것이 바른 제사인지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7.09.19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3

2017년 09월 19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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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었는가?”라고 말입니다.
(1) 내가 왜 이것을 위대하다고 생각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웅장함, 화려함, 힘에 도취되어서 위대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착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의 종말을 보면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어렸은 적에 통행금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통행금지가 해제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 속으로 통행금지 해제되면 간접 천국이 될텐데라고 생각하면서 겁을 먹었습니다. 통행 금지 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라고 생각했니다. 그러면서 통행 금지가 해제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 바람과는 달리 통행 금지는 해제되었고, 더불어 간첩 천국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 회전이 빠르지는 않지만 과거를 복기하는 일은 잘하는데, 이 일로 인해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무엇이냐면, 통행 금지를 해제하자던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니라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통행 금지가 있을 때는 불편함 없이 살았는데, 통행 금지가 해제되고 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거의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은혜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백락청 교수나 마틴 루터 킹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단점들이 있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질 때가 있슸니다

(2) 내 마음 속의 우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위대하지 않은 것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 마음 속에 우상이 있어서 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대한 것들이 무너질 때 동시에 마음 속 잘못을 버리지 않으면 강력한 우상이 됩니다. 다미 선교회,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런 길을 갔습니다.

교회에서도 우상 숭배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겔 8:14~16) 1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애곡하고 교회에서 우상을 위해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3)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사람과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체된다고 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 것도 남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 변화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남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영원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확실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건물은 몇 백년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천년 전의 예수님은 지금도 제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오랫동안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교회가 해체된다고 해도 이곳에서 영향을 받아서 정신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측면에서 성장한 여러분은 남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결론]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우리 마음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2017.09.10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2

2017년 09월 10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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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한 줄 요약]

마음 속에 위대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요]

1. 우리 마음 속에는 전설과 신화 등의 우상이 들어있습니다

많은 걸그룹, 보이그룹들이 등장하면 여지없이 많은 팬들이 생겨나고 그들을 응원합니다. 그들을 TV 등 미디어를 통해서 알뿐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알게 된 것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열광이 논리적인 것도 인격적인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걸, 보이그룹의 팬들이 더 적극적이고 열광적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행동을 보이지만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열광을 성경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표현합니다. 연예인들을 아이돌 스타라고 하느데, 아이돌이 영어로 우상이라는 뜻아닙니까? 그러나 우상 숭배는 다양합니다. 종교적인 우상, 정치적인 우상, 사회적인 우상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종교적인 우상 숭배는 이단 종교고 정치적인 우상 숭배는 극우극좌 운동입니다. 사회적인 열광은 연예인,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 특정 기업 등에 대한 열광으로 표현됩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자신들의 마음 속에 나름 대로의 우상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징은 논리적 혹은 합리적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각자에게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 영원하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노틀담 드 파리를 통해서 위대해 보이는 것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추악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화려한 것들이라고해서 반드시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31년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발표한 장편 소설로, 꼽추이자 추한 외모를 지닌 노트르담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끝내 파멸하는 사제(司祭)의 뒤틀린 사랑을 중심으로 15세기 파리의 인간군상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트르담 드 파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7366) [Notre-Dame de Paris] (두산백과)

일반적으로 <노트르담 드 파리>는 낭만적이고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속에 마녀 재판을 통한 폐쇄적이며 배타적 사회적 편견의 고발, 중세 교회 권력의 이중성과 위선, 기득권 세력과 소외 계층,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미와 추,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삶의 근본적인 대립 점들이 망라되어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종교적인 우상이 무너져도 그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단에서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안식일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apos;다미 선교회&apos;가 있습니다.

1844년 10월 22일 윌리암 밀러의 종말론 실패(대실망의 날)

찰스 테이지 러셀 여호와의 증인, 엘런 화잇이 제칠안식일교로 갈라짐.
여호와의 증인 1914년 여호와의 왕국 지상 건설 주장 –> 공중건설로 변경.

다미선교회 근황 2002년 20년 특집

중앙일보에서 20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오늘’에 대해 26일 보도했다.
‘다미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자정 휴거(携擧)가 온다고 주장했던 사이비 단체다. 그날 당연히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다미선교회 전국 173교회 8천여명의 신도들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이들은 자살하거나 직장을 사직하고,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했으며 가출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휴거가 일어나지 않은 후 이들은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에서는 날짜를 계속 수정해 가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이 언론은 밝혔다.
또 당시 다미선교회를 이끌던 이장림(65)을 비롯해 ‘어린 선지자’로 지목된 권미나(39), 해외선교 담당 장만호(74), 분파였던 이만성(56), 다미선교회 출신으로 다베라선교회(1992년 10월 10일 휴거 주장)에서 활동한 하방익(37) 등의 근황을 추적했다. 이장림은 휴거 날짜로 지정된 1992년 10월 28일 한달 전 사기 혐의로 이미 구속됐었다.
이장림은 1993년 출소 후 새로운 삶을 살겠다며 ‘이답게(사람답게라는 뜻)’로 개명했고, 서울 서교동에 새하늘교회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3년 건강상 이유로 활동을 접었지만, 지난해 8월 신도들 요청으로 다시 다미선교회 본부가 있던 성산동에 C교회를 세우고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답게’는 더 이상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1992년 이후 쓴 저서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잘못됐음을 뼈아프게 느꼈다. 시한부 종말론이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그는 현재 건강 문제로 기도원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방익은 시한부 종말론을 회개한 후 총신대학원을 나오는 등 정통 신학으로 건너갔고, 현재 경기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선지자’ 권미나도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종말 신앙을 전하다, 최근 일반 장로교회에 정착했다.
그러나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 본부에서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던 장만호는 아직도 휴거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출간된 <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역사(크리스천리더)>가 그의 책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 책의 저자는 ‘장 죠셉’이라 소개돼 있다. 장만호는 취재진에게 “베리칩이 모든 사람들 몸에 심겨지는 2013-2016년 사이 휴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0년부터 온라인 동영상으로 종말 신앙을 전하다 경남 거제 J교회에서 시무중인 이만성도 “2013년 제3차 세계대전이 휴거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중앙일보, 2012년 10월 26일 기사

3.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마음 속 우상을 &apos;투사&apos;한 것입니다. 즉,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우상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위대해 보이는 것이 무너질 때, 내 마음 속 우상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위대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각성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고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결론]

건물로 된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우리 마음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2017.09.03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1

2017년 09월 03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3:01~02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1~2)

[도입]

마음 속에 위대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요]

  1. 우리 마음 속에는 전설과 신화 등의 우상이 들어있습니다.
  2. 각자에게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 영원하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3.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론]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우리 마음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