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1~31
2017년 11월 27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요]

두란노에서 출판된 ‘제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친 아르헨티나의 목회자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매우 쉬운 말로 설명하셨는데,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천국문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할까요?
성경 시험, 교리 문제 등 어떤 것을 물을까요?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를 내지 않고 청진기를 가져와서 가슴에 대 보고 너는 심장이 뛰고 있구나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 그것은 우리 내면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도록 하려는데 있다는 점말입니다.

 

1. 1~7 : 지식이 아니라 생명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2. 8~20 : 다시 종이 되지 말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시 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3. 21~31 : 아브라함의 예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기도 했는데,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

내가 예수님의 생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월 넷째 주_첫눈같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창조주 하나님!
어느새 절정을 이루던 단풍이 하나 둘 떨어지고 단풍 대신 첫눈이 빈 가지 위에 쌓인 것을 봅니다. 이 아침, 저희들의 말라비틀어진 욕심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첫눈같이 거룩한 주님의 은혜가 내릴 것을 확신합니다.

겨울의 길목에서 눈과 낙엽으로 덮인 길을 걸으며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변덕스런 사람들의 마음에 낙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위해 기쁘게 섬김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처럼, 저희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지진이 일어난 포항 지역의 상황을 온 국민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놀라고 손실을 입은 영혼들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또한 한 주간 연기된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의 마음도 지켜주시옵소서. 어떤 결과를 얻든지 그들이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좌절, 낙심하지 않도록 소망을 불어넣어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청년 실업, 고용 불안, 부의 양극화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많아지는데 사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저희는 사랑 없는 과학 발전과 경제 성장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먼저 저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재정 비리, 성적 문란, 교회 세습 등으로 손가락질 받는 현실을 회개합니다. 잘못한 목회자가 통회하게 하시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교인들도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혜롭되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1월 26일 갈라디아서 04:01~31,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설교 듣기]

11월 셋째 주_빈들을 보며 기도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풍요로웠던 가을 들판이 어느새 빈들이 되었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빈들같은 저희들 마음을 스쳐가지만, 저희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저희는 빈들이 아니라 그 위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건물, 멋진 옷,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스스로 빈들에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주님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400년 전 안락한 고국을 버리고 오직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열망으로 신대륙으로 나아간 청교도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결단이 오늘날 미국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얼마나 큰 복이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추수감사절’을 지킨 그들의 감사를 저희도 갖기 원합니다. 옳은 길을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수능을 준비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진으로 인해 시험 일자가 변경되었지만, 반석이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동요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프거나 지각, 착각, 실수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기대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아주신 예수님,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영혼들에게 치료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기가 저희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생기를 더욱 불어넣어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시간에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1월 19일 시편 50:01~23, 감사는 예배의 전부입니다

 

[다른 설교 듣기]

11월 둘째 주_성전에서 생수를 보내소서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하나님,

차가운 기온은 들판의 푸름을 앗아가고 있지만, 산마다 단풍으로 물들어 또다른 아름다움을 주심을 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오늘 저희를 불러 예배하게 하신 이 시간 스스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게 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깨어나고 성장 성숙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주시옵소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권능을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 권능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처럼 내일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안된다고 좌절하지 않도록 종일 소망을 주시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절박한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오늘도 ‘잠자는 나’ 보다는 ‘깨어 있는 나’로 살기를 원하고, ‘미워하는 나’ 보다는 ‘용서하며 사랑하는 나’로 살기를 원합니다. 항상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땅에서 참 사랑을 몸소 보이시고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처럼 주님을 본 받아 온전히 사랑하며 섬기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편지로 읽혀지는 삶을 살게 하시고, 사랑의 삶, 나눔의 삶, 섬김의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배 속에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시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우리 속에 함께하심을 믿시오니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며 주님의 구원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죽었던 모든 생물을 살리듯이 저희 안에 흐르는 성령님의 생수가 죽어 있는 저희를 살리고 나아가 저희 이웃 또한 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년 11월 12일 갈라디아서 03:06~29,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다른 설교 듣기]

감사는 예배의 전부입니다

시편 50:01~23
2017년 11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한줄 요약]

아삽은 구약 시대에 이미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개요]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늘은 시편 50편을 통해서 추수감사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50편은 맨 마지막 구절이 찬양 가사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을 다 아시는 분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은 감사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독특한 시편이면서 당시 상황에서 생각하면 놀라운 시편입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시편 저자가 생각하는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0. 아삽에 대해서

먼저, 이 시편의 저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삽은 다윗의 3악사 중 한 사람(대상 5:17, 19, 16:5)으로, 다윗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고 성가대를 지휘하고 시편을 편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시편에 12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삽은 찬양팀장이었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다윗 동반자였습니다.

아삽의 첫 등장은 다윗 왕이 법궤를 옮길 때였습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에게 빼앗결다가 돌려받은 법궤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놓여있었습니다. 사울은 별 관심도 없었고 20년이 흘렀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가 거기 있는 것이 내내 속상했기 때문에 왕궁 한곳에 성막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가 성막으로 돌아오던 날, 다윗 왕은 마치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바로 그날, 아삽이 등장합니다(대상 5:17, 19, 16:5).

법궤는 레위 지파 외에는 누구도 옮길 수 없습니다. 손조차 대서도 안 됩니다. 다윗 왕은 레위 지파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뽑힌 사람들은 성막과 법궤를 지키고,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하게 된다. 레위 지파의 존경받는 어른들은 많은 사람을 추천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으로 헤만, 에단과 함께 아삽을 추천했습니다. 아삽은 찬양대에서 놋제금(구리 심벌즈)을 쳤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날, 아삽과 찬양대는 환호성을 지르는 이스라엘 군중 사이로 행진하며 연주를 했습니다. 법궤가 안치된 후 레위 지파로 꾸려진 찬양대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찬양대장이 바로 아삽이었다.

아삽의 역할은 다윗 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때도 아삽과 찬양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금과 비파, 수금, 나팔을 연주하는 제사장만도 120명이나 됐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차서 제사장들이 서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아삽 자손들은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에 등장합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는 모압과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었습니다. 그때 무기력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상기시키며 용기를 북돋우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이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됐을 때는 성전이 황폐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전 왕들이 성전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과 함께 성전 문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들도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귀환하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훼방꾼들의 방해 공작을 견뎌 내고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했을 때, 성벽 봉헌식의 나팔수로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 역시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실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맡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속도에 발맞추는 영광스러운 삶이었고, 그의 자손들 역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때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습니다.

 

1. 1~6 : 하나님의 재판정

그런 아삽이 쓴 이 시편은 예언적인 시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재판정을 열고 심판을 준비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재판정을 여시는 모습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2:19에서

[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라는 말씀처럼 천사들과 함께 아합 왕을 심판하려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재판정에 참가해서였습니다.

[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의 재판정 모습이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4장입니다.

[4:2~4]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나 나라를 심판하실 때 즉흥적,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 하십니다.

 

2. 7~21 : 두 가지 기소 제목 – 형식적 신앙과 위선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죄를 지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시가 쓰여진 3천년 전에는 잘 이해가 안되었을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재판정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검사가 재판장 앞에서 죄인의 죄를 들추어내고 그래서 어떤 벌을 받아야 한다고 기소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죄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죄인데,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죄인데, 위선으로 사람들을 대한 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절을 보면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제물을 물질적인 면에서 욕심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4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감사’하는 마음이 제물에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22~23 : 감사로 제사 드리라

세 번째 부분은 결론이면서 권면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구약 시대였기 때문에 제사의 형식을 매우 중요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담한 주장을 했다는 것은 아삽이 아무리 다윗의 측근이라고 해도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대하게 감사가 제사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아삽은 제사가 결국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레 7: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레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 사람들도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삽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충격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삽을 중용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아삽만큼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참된 예배를 드립시다.

<인용 -곽선희 ‘이 사람의 감사’>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예화를 듣고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정확하게 어떤 점에서 은혜를 받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참을 생각해 보니, 진정한 감사는 자신을 보게 될 때 터져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고 편안할 때보다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느낄 때 더 진실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됨, 어리석음, 연약함을 똑똑하게 보게 되면 그럼이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갈라디아서 03:15~29
2017년 11월 1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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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요]

성경은 해 이래 새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425년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 경에 쓰여진 수메르 점토판에 나온 기록인데, 거기에도 젊은 이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변해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죄’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우리 인간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변해도 세상의 근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의 시간 간격이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문제와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의 문제는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문제인데,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 + a’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다른 말로 갈라디아주의는 오늘날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전도운동, 율법주의적 성령운동, 율법주의적 영성운동 등으로 말입니다. 매우 좋은 주장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율법주의가 있는 운동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겉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동일한데 율법주의는 언제나 예수님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합니다. 언제나 인격이 아니라 의식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지면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나쁜 행동을 해도 예배에 잘 참석하거나 교회에 충성하면 그것이 상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비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있는데 본인은 오히려 신앙이 매우 좋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문제의식 없이 교회다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태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최순실 씨 딸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한 일이 밝혀진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보면 정유라 때문에 원래 이화여대에 합격해야 했지만 합격하지 못해서 다른 대학에 들어간 여성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화여대 학장, 총장, 담당교수 모두 별로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부정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언론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면접에 참여한 교수들도 부정을 저질렀죠? 제가 생각할 때는 만약에 제가 그런 입시 부정을 지시 받았다면 사표를 내는 한 있더라도 거부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회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건 제 기준으로는 선을 많이 넘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왜 기독교 대학에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가 의아합니다.

 

1. 갈 02:06~14 : 양심이 살아있어서 의를 위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김세윤 교수님은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높여주면서 정작 술, 담배보다 훨씬 더 큰 죄인 부정, 부패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합니다. 사회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고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있는 것이지요.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주의는 여기서 전도나 성령운동, 영성을 결합한 것입니다. 사회에서 나쁜 행동을 해도 전도를 열심히 하거나 방언을 열심히 하거나 영성을 기르면 된다는 식으로 이끄는 일이 바로 갈라디아 주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혼란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 답이 오늘 두 번 읽은 구절입니다.

먼저,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어요. 그러면 안되지만 입시 부정을 했다고 치세요. 주일 성수 잘하거나 전도 열심히 하거나 방언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죽게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해도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들려다보고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어떤 길을 갈지는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몇가지 가능성을 말씀드리자면, 뒤늦었지만 그 일을 바로 잡으려고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상사들을 설득하든지 언론사에 제보하든지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번에는 얼떨결에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무런 결정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청교도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양심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양심이 살아있어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2. 갈 02:15~22 : 율법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알려줍니다

십계명에는 분명하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어떻게 하냐면, 단순히 율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을 면죄부로 사용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여러분께서 고민하다 보면 알게 되시겠지만 양심을 죽이지 않으려면 전진해야만 합니다. 한 두 번은 부정을 저질르고 고민만 하다가 지나갈 수 있지만 계속 양심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안그러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소경, 영적으로 감각이 마비된 나병환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정에 머물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해결해야 할 많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법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불법 프로그램도 몇가지 썼었는데, 그것이 저를 고민하기 만든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거의 다 정품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윈도우 프로그램 라이센스를 얼마전에 구입했습니다. MS 오피스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습용으로 주는 라이센스를 받았고, 인디자인은 월정액을 내고 쓰고 있습니다. 단지 한글 프로그램은 정품을 안샀는데 제가 한글을 안 쓰지만 한글 파일을 받으면 그것을 복사해서 다른 프로그램에 옮기기 위해서 깔아놓고만 있습니다.

이렇게 저도 느리지만 전진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살다보니까 알게 된 것이 무엇이냐면, 양심이 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우리 나라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셨을지 모르는데, 제게는 큰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겉으로 성장하는 것 같지만 생명은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요. 여러분도 양심이 죽지 않도록 고민하다보면 저절로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갈 03:23~29 : 예수님을 닮고자 애쓸때 열망이 생겨나고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의를 추구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예수님을 닮도록 인도하는 영이고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성령 운동이 이상합니다. 뉴코아에는 교회 안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에서 좀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분들 중에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TV에 잠깐씩 나오는 목사님들 중에 얼굴만 봐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인데, 능력 있다는 분들이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부터 뜨끔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친절하고 지혜롭고 때로는 강인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사람인가 또 그렇게 보이는가를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령 충만하다 능력 있다는 말은 안했으니까 하고 합리화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목요일에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갔었는데, 거기서 로제타 홀 여사의 전시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오, 기도하오니 저도 충성되게 하시고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게 하소서.” 성공이 중요하지만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는 것보다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휘감고 거룩한 불씨를 던져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1

갈라디아서 03:06~29
2017년 11월 0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참고: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개요]

개인적으로 허리가 아픈 적이 있었는데, 그 경험 이후에 허리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을 보아도 무심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이 눈에 잘 들어오게 되었고, 그런 병원이 왜 그렇게 많은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경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가 혹은 어떤 기도 응답을 체험했는가하고 다른 이야기입니다. ‘죄의 각성’이 아닌 다른 체험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죄’의 문제를 다루는데, ‘죄’는 다른 말로는 ‘불의’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살인, 강도 같이 나쁜 행동을 범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해 해야하는일인데 행하지 않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갈 02:06~14 : 아브라함은 율법이 생기기 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내세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롬4:11

창세기 15:6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로마서 4:11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손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언약에 대해서 전인격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막연한 믿음을 이삭의 출생이라는 문제와 연결시켜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많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번이라도 확실한 체험을 해야 하고 그 체험이 예수님과 연관되어야만 근본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로마서 4:19~24은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히11:11, 히11:12, 창17:17, 창18:11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1:6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고전10:11, 딤후3:16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 갈 02:15~22 :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까지만 유효합니다. 안내자는 안내를 하면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기 전에 의롭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야만 의롭다고 판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드러내지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3~4에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율법을 참고하라는 말씀이 이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갈 03:23~29 :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으라는 얘기는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말입니다. 청교도들을 인용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신앙서적을 읽자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 보면 그 모든 것의 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2) 다양하게 기도하자

로이드 존스는 새벽기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기도하기 전에 신앙서적을 읽어서 마음을 뜨겁게 한 다음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은 되도록 시간을 정해서 지속적으로 하자. 그러나 다양한 기도를 시도하자. 새벽기도 뿐만 아니라 순간기도, 산책기도, 쓰는기도 등

(3)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자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by 조나단 에드워즈)
– 어떤 은혜의 수단이라도 지식 없이는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 지식 없이 사랑도 없습니다. 또한 지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살아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먼저 이해되어야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지식 없이 성례전의 효과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성례전도 지식 전달 없이는 합당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표지로 어떤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지가 지시해 주는 대상에 대해 아무 지식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무지한 이교도와 다를 바 없다.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교도들이 깊은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신학적 진리를 배우지 못해서 신학적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듣고 살아가고 있다면 복음 설교가 우리에게 신학을 더 많이 알게 해 줌으로써 우리를 이교도와 드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사람들에게 이런 지식이 없다면, 사람 안에 있는 이성적 기능은 전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함입니다.

(4)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자

예배는 종합 비타민과 같다. 단순히 설교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려는 나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다. 행동이 곧 마음이기도 하니까.

[결론]

믿음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