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31_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6년 07월 31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 11:7)

[한줄 요약]
세례 요한은 마지막에 흔들렸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상황
    예수님의 사역에 의문을 품고 질문함
  2. 요한이 바라던 그리스도
    종말론적 심판을 내리시는 분으로 착각했습니다
    로마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해방해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3.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
    초림과 재림을 혼동하는 오해를 풀어주셨습니다
    요한을 두둔하고 변호해 주셨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을 알자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누구나 한 번쯤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년, 짧으면 겨우 하루 24시간 정도라 할까요. 독자들은 그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합니다. 이 경우 주인공에겐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행동반경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죄수는 그러므로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내가 만약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어떤 사건이나 경험, 관계들로 채워야 할까요?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행복한 기억은 무엇이고 후회스러운 일은 또 무엇일까요?

이따금씩 생각해봅니다. 매일매일 내일 당장 죽을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라고요. 그러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록새록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부드럽고 활기차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하지만, 우리 앞에 많은 날들이 끝없이 펼쳐질 거라 생각할 때에는 그런 마음을 종종 잃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쾌락주의 좌우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확실히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삽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마지막 순간에 행운의 여신에게 구원을 받곤 하는데, 대게의 경우 구원은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삶의 의미와 그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또는 살았던 사람들이 매사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걸 우리는 자주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아직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일수록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 또한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살날만 창창하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데 정신이 팔려 삶 자체에는 무심하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무심함이 우리가 가진 재능과 감각의 쓰임새를 한정적으로 특징지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은 귀머거리뿐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소경밖에 모릅니다. 특히 후천적인 이유로 청각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 감각의 소중함을 정실히 깨닫습니다. 하지만 시각이나 청각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그 능력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집중하지도 않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풍경이며 온갖 소리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무릇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누구나 막 성년이 되었을 즈음 며칠 동안만이라도 소경이나 귀머거리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깨워줄 것이며, 정적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나는 가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그들이 보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해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 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봄이 오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첫 신호인 어린 새순을 찾아 나뭇가지를 살며시 쓰다듬어봅니다. 꽃송이의 부드러운 결을 만지며 기뻐하고, 그 놀라운 나선형 구조를 발견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와 같이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도 즐겁지만 수북하게 쌓인 솔잎이나 푹신하게 깔린 잔디를 밟는 것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반갑습니다. 계절의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벅찬 드라마이며, 그 생동감은 내 손가락 끝을 타고 흐릅니다.

때로 내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집니다.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데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더군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마 인간일 겁니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만약 대학 총장이라면 ‘눈을 사용하는 법’이란 강의를 필수 과정으로 개설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들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즐거울지를 알게 해주는 강의가 되겠지요. 말하자면, 나태하게 잠들어 있는 기능을 일깨우는 겁니다.

 

내가 만일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가장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내 눈을 어떻게 써야 할까?” 셋째 날이 저물고 다시금 어둠이 닥쳐올 때. 이제 다시는 자신을 위한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자. 이제 사흘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여러분의 눈길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게 소중했던 것들입니다. 여러분 또한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그 후에 닥쳐올 어둠 속으로 그 기억을 가져가고 싶으실 겁니다.
다시 암흑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메이시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또한 선생님의 눈빛 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강한 개성과 내게도 자주 보여주셨던 전 인류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도 보고 싶습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지만, 나는 친구의 마음을 눈을 통해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만져지는 얼굴의 윤곽을 느낄 뿐입니다. 웃음과 슬픔,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감정들도 손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만져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냅니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내게 취하는 행동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격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을 지켜보고, 여러 가지 표현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그들의 눈빛이나 안색이 돌변하는 것을 주시해서 그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겐 없습니다.

내가 가까운 친구들을 그나마 잘 아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 달 여러 해를 나와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가깝지 않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을 맞잡았을 때의 감촉, 말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을 때의 느낌, 내 손바닥에 와닿는 촉감을 통해서 얻은 것들입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 근육의 떨림, 손의 흔들림 같은 걸 보고 사람의 본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한편 볼 수 있다고 해서 과연 친구나 지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얼굴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은 가장 친한 친구 다섯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가능한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시험삼아 나는 남자분들에게 자기 아내의 눈동자 색깔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가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며 모른다고 대답하더군요. 하긴 새 옷이나 모자를 사도, 집안의 가구를 옮겨놓아도 남편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는 아내들의 불평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일상적 환경에 쉽사리 익숙해지기 때문에, 실제로 놀랍거나 멋진 것을 보더라고 금방 싫증을 내고 맙니다. 법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증인들의 목격담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목격자와 수만큼이나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보는 사람은 간혹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걸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내게 사흘 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꼭 보고 싶은지 얘기하는 중이었군요. 그럼 계속 해야겠지요?

첫째 날은 아주 바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그들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의 외적인 증거를 가슴에 새길겁니다. 또한 아기 얼굴 위에 오래도록 시선을 둔 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을 아직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내 충직하고 믿음직한 개 두 마리의 눈도 들여다보렵니다. 스코티 종 다키는 용감하고 빈틈없는 친구요, 건장하고 유순한 그레이트데인 종 헬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재미있는 친구여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답니다.

그토록 바쁜 첫째 날에, 내 작고 아담한 집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 벽에 걸린 그림들,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을 친밀감 넘치는 장식물들도 보고 싶네요. 내 눈은 내가 읽은 점자책들 위에 경건하게 머물 것입니다. 그것들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읽는 인쇄된 책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겁니다. 기나긴 밤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서 누군가 읽어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등대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날 오후, 나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그리고 눈이 보이는 사람들에겐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자연의 장대한 영광을 단 몇 시간 안에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침 가까운 농장이 있어서, 끈기 있게 발을 가는 말들과(어쩌면 트랙터만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흙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신선한 즐거움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거기에 더해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놀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합니다.

자연이 어둠을 선언했을 때도 인간의 천재성은 인공적인 빛을 만들어 세상을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리면 나는 비로소 인간이 만든 빛의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쁨을 두 배나 누리게 될 겁니다.

 

첫째 날 밤, 나는 하루 동안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가득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겁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둘째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습니다. 태양이 잠든 대지를 깨우는 장엄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이로울까요.

나는 이날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라는 시대의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싶은 바람이랄까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하루만에 보느냐? 박물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나는 가끔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가서 거기 전시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만져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지구의 압축된 역사와 그 주민들 – 원시 자연환경 속에 그려넣은 동물이며 인간들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싶었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두뇌는 막강한 인간들이 나타나 동물의 왕국을 정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지구를 누비고 다녔던 공룡이나 마스토돈의 거대한 화석들과 동물의 진화 과정을 실감나게 표현한 전시물 그리고 인간이 이 지구를 안전한 거주지로 만드는 데 사용했던 도구들, 그 외에 자연사의 다른 수많은 측면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 중 그 흥미로운 박물관의 놀라운 전시물들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럴 기회가 없었던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기회가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분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참으로 눈여겨봐둘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입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날 며칠이고 그곳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사흘동안만 빛을 허락받은 사람은 겨우 슬쩍 훑어보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입니다. 자연사박물관이 이 세계의 물질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인간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예술적 표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과 주거, 종족번식의 욕구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이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넓은 전시실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영혼이 녹아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고대 나일 강 유역을 거닐던 신들과 여신들을 내 손의 감촉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과르테논 신전의 부조 복사품도 몇 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아테네 전사들의 율동미 또한 이미 느껴본 바 있습니다. 아폴로와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상은 내 손가락 끝의 친구들이랍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호메로스의 주름진 얼굴 생김새가 특히나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역시 장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로마와 그 다음 세대의 조각품들을 어루만지며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또 미켈란젤로의 영감이 깃든 당당한 모세 상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로댕의 힘을 더듬으며 고딕 목각품에 깃든 헌신적인 정신에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예술품들은 내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보다는 눈으로 보기에 적합하게끔 창조된 것들은 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감추고 말기에 나는 그에 대해서는 다만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 화병의 단순한 선에 감탄할 수는 있지만, 거기 새겨진 무늬에 대해서는 통 알 수가 없더군요.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색하는 일에 둘째 날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알던 것들을 나는 이제 눈으로 봅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경건한 종교적 헌신을 의미했던 미술이 근대에 이르러 열광적인 비전으로 승화된, 이들 회화의 세계가 그 웅장한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나는 라파엘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렘브란트의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볼 것입니다. 또한 베로네제의 따뜻한 색조로 눈호강을 하고, 엘그레코의 신비를 탐색하고, 코로의 풍경화에서는 자연주의의 새로운 비전을 감지 해보겠습니다. 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각 시대의 예술품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건가요?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는 그 짧은 기간만으로는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예술의 세계의 극히 적은 한 부분도 제대로 찬찬히 감상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저 피상적인 인상만 받아 가질 수 있을 뿐. 예술가들은 진정으로 예술을 깊이 감상하려면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선과 구성과 형태와 색의 장점을 이해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만약 내가 볼 수 있어 그런 환상적인 공부에 뛰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지만 내 주위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의 세계를 그저 캄캄한 밤처럼, 빛이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이야기들 하더군요.

아름다움은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데, 그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매우 섭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기 위해 굳이 메트로폴리탄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똑같은 열쇠가 그보다 더 작은 미술관이나 또는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책들 속에도 있는걸요. 하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나마 사흘밖에 볼 수 없기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이곳 메트로폴리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날 저녁은 연극이나 영화를 보며 지내고 싶습니다. 지금도 나는 온갖 연극을 보러 다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친구가 손바닥에 써줘야만 알 수 있답니다. 그러니 햄릿의 매력적인 모습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희극적 인물을 대표하는 뚱보 폴스타프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햄릿의 우아한 동작와 폴스타프의 쾌활한 걸음걸이를 눈으로 쫓을 수 있다면! 그런데 주어진 시간 동안 볼 수 있는 게 단 한 편뿐이라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닐 수 없겠군요. 꼭 보고 싶은 연극이 너무 많거든요. 여러분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연극을 언제든 보겠지요.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나 멋진 경치를 보면서 그 색채와 우아함과 율동을 즐길 수 있는 시력의 기적을 고마워한 분들이 얼마나 계시는지요?

나는 내 손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의 율동미 밖에는 즐길 수가 없습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진동을 통해 리듬의 즐거움을 조금 알고 있긴 하지만, 안나 파블로바1881~1931.러시아의발레리나의 우아한 발레 동작은 그저 어렴풋하게 상상이나 해볼 뿐입니다. 율동적인 움직임이야말로 상상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광경 중 하나일 겁니다. 나는 대리석상의 윤곽선을 더듬어보면서 그 율동미를 조금이나마 느낀답니다. 정적인 우아함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동적인 우아함을 보는 건 얼마나 감동적일까!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 중 하나는 조지프 제퍼슨이 사랑스러운 립 밴 윙클w. 어빙 작<더 스케치 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연기하며 나에게 자기 얼굴과 손을 만지도록 해준 일입니다. 나는 그때 연극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극 공연을 보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서 누리는 기쁨을 보고 들을 수 없는 내가 온전히 맛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딱 한편의 연극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직접 읽거나 수화 알파벳으로 전해 들었던 수백 편의 연극들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여 둘째 날 밤에는 희곡작품 속의 위대한 인물들이 내 눈에서 잠을 걷어내겠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또다시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매일매일 밝아오는 새벽이 영원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의 계시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날은 내가 볼 수 있는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군요. 비록 상상으로 만들어낸 기적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후회나 아쉬움 따위로 낭비할 시간이 내겐 없답니다. 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거든요. 첫날은 친구들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바쳤습니다.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느라고 보냈습니다. 오늘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낼까 합니다. 그러자면 뉴욕만큼 활동이 왕성하고 수많은 상황이 연일 벌어지는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뉴욕을 행선지로 정하겠습니다.

롱아일랜드의 포리스트힐 근교에 있는 내 집에서부터 시작하렵니다. 푸른 잔디와 숲과 꽃으로 둘러싸인 이곳엔 도시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쉼을 주는 마치 낙원과도 같은 작고 깨끗한 집들이 있고, 집집마다 그 집의 안주인과 아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떠드는 행복한 목소리가 넘쳐납니다. 나는 이스트리버로 뻗은 레이스 모양의 철제 구조물을 지나 강력하고 창의적인 인간 정신이 빚어낸 새롭고 놀라운 광경을 바라볼 것입니다. 선박들이 바쁘게 강을 오르내리고, 모터보트는 쾌속으로 질주하고, 예인선은 느릿느릿 증기를 뿜어냅니다. 만약 내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중 많은 날들을 이 강 위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보내고 싶습니다.

눈앞에 뉴욕의 매력적인 고층 빌딩들이 솟아 있습니다. 동화책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도시입니다. 얼마나 멋진 광경인지요! 반짝이는 뾰족탑, 돌과 철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제방, 신의 손으로 빚어낸 듯한 조각들, 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은 수백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시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들의 눈엔 이 멋진 광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나는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로 급히 올라가겠습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비서의 눈을 통해 본 적이 있답니다. 상상하던 모습과 현실을 비교하는 것이 조금 두렵군요.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광경일 테니까요.

이제 나는 도시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우선 아주 번화한 곳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미소를 보고 행복을 느낍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낍니다.

나는 5번가를 천천히 걸어갑니다.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지 않고, 만화경처럼 물결치며 흘러가는 색채들을 그냥 지나치며 걷습니다. 군중 속에서 움직이는 여자들의 드레스 색깔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할 테지요.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의 재단이나 스타일에 신경 쓰느라 대중 속에 녹아든 화려한 색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진열장을 가득 메운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눈이 즐거울 테니, 나는 윈도우 쇼핑에 흠뻑 맛을 들이게 될 겁니다.

이제 5번가에서 나온 나는 파크 애비뉴, 슬럼가, 공장지대,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공원 등을 들러보며 시내관광을 합니다. 외국인 거주지역도 방문해서 외국에 여행가서 민박하는 기분도 맛보렵니다. 내 눈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 모두에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더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나 행복과 불행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내 마음속은 사람들과 물건들의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또한 내 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것마다 놓치지 않고 붙잡기 위해 나는 애를 씁니다.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광경들도 있지만,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광경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고 비참한 광경에 눈을 감고 외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눈감는 것은 마음과 정신에 눈감는 것이니까요.

광명이 주어진 셋째 날이 이제 끝나갑니다. 남은 몇 시간 동안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것들이 아직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날 저녁에 나는 아주 신나는 코미디 공연이 한창인 극장으로 달려가야만 할 것 같군요. 그래서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희극적인 요소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자정이 되어 암흑으로부터의 유예 기간인 사흘이 마침내 끝나면, 나에겐 다시 영원한 밤이 이어지겠지요. 물론 그 짧은 사흘 동안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볼 순 없습니다. 어둠이 다시 내린 후에야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빠뜨리고 보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멋진 기억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빠뜨린 것에 대해 아쉬워할 겨를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부터는 만지는 것마다 사흘의 기적이 가져온 멋진 기억들이 따라와서 그 물건의 모습을 떠올려줄 테니까요.

이상, 내게 주어진 광명의 사흘을 어떻게 보낼지를 계획해보았습니다. 이 짧은 계획은 만약 여러분이 갑자기 장님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울 프로그램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여러분이 실제로 그런 운명에 처해진다면 여러분의 눈은 이전엔 결코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다가올 기나긴 밤을 위해 그 기억들을 저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할 것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당신의 눈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을 어루만지고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제대로 보게 될 것이며, 새로운 미의 세계가 당신 앞에 그 문을 열 것입니다.

나는 장님이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힌트 – 시각이란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답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다른 감각기관에도 똑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일 귀가 안 들리게 될 사람처럼 음악 소리와 새의 지저귐도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를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촉각이 모두 마비될 사람처럼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들을 만지십시오. 내일이면 후각도 미각도 잃을 사람처럼 꽃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해보십시오.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자연이 제공한 여러 가지 접촉방법을 통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세요.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축복입니다.

2016.07.24_묵은 짐을 버리자!

2016년 07월 24일 주일 설교
열왕기하 23:01-07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4)

[한줄 요약]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숭배하는데 쓰이는 그릇들이 쌓여있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하고 개혁을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상 숭배가 이루어졌습니다
  2. 우리가 성전입니다
    성전 –> 그리스도의 몸 –> 성도의 몸
    우리 마음 속에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성전이 깨끗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성전이 깨끗해진 후에야 참된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결론] 마음 속을 정결하게 하여 믿음을 소유하자

2016.07.17_예수님이 이사하신 이유

2016년 07월 17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04:12-17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 4:13)

[한줄 요약]

예수님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하셨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사역 근거지를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구약 성경이 예언한 일
    그리스도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실현하는 분이다(삿 5:17-18)
  3.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결론] 예수님은 소망과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이다

예배 장소를 평택 뉴코아로 이전합니다

평택남부교회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예배 장소를 평택 뉴코아 아울렛 12층 교육관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장소에는 다른 좋은 교회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예배 드리셔도 됩니다.

[평택남부교회 예배장소 이전 안내]

  • 주소

(구주소) 경기도 평택시 비전2동 830 평택뉴코아 아울렛
(신주소) 경기도 평택시 경기대로 279 평택뉴코아 아울렛

  • 장소

12층 교육관

평택뉴코아

2016.07.10_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1

2016년 07월 10일 주일 설교
사도행전 2:14-42

설교 듣기

[핵심 구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한줄 요약]
베드로는 오순절에 자신들이 살던 지역의 언어(방언,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하는 것을 듣고 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자신들이 살던 지역의 언어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2. 구약 성경이 예언한 일
    선지가 요엘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구원을 주는 영입니다
  3. 영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받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요약

제 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1. 감정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감정이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을 가진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능은 2가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영혼이 바라보는 사물을 인정하고 기쁘고 애착을 가지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싫어하고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감정과 격정을 종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 ‘감정’이라는 말은 ‘격정’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다. 감정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에 사용한다. 그러나 격정은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격렬하며 충동적인 상태가 되어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에 사용한다. 전자의 경우는 사랑, 갈망, 기쁨, 감사, 희망이 있고 후자에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이 있다.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마음이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하는 것은 마음에 행한 할례의 참된 열매이며, 생명의 약속이 있는 참된 거듭남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세상적인 일에서 세상적 감정이 인간의 추구와 행동의 근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 문제에서도 종교적 감정이 행동의 근본인 것이다. 감정 없이 교리 지식과 분별할 수 있는 지식만 가진 사람은 진지한 신앙생활이 힘들다.

성경은 믿음을 사랑이라는 감정 즉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과 주림과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갈망을 참된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 성경은 거룩한 기쁨 역시 참된 믿음에서 큰 부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기쁨은 믿음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자주 권면되고 진지하게 요구된다. 종교적인 슬픔, 애통함 그리고 상한 마음 역시 참된 믿음의 큰 요소로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참된 성도를 구별해주는 특질이며 그 특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참된 믿음이 역사하는 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른 감정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다. 그리고 성경은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를 참된 믿음의 크고도 본질적인 요소로 자주 말씀한다. 열정도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믿음의 아주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한다.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자신을 주실 때에 마음에 품고 계셨던 위대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성경은 모든 감정의 원천이며 그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랑 안에 참된 믿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믿음과 경건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었다. 다윗의 경우 시편에서 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며,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뿜어내고 있다.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믿음과 경건 역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인 분위기가 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고 활력을 주며 사로잡아서 그들을 강렬한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의심이 필요 없는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 속에 존재한다.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마가복음3: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에 완악하기 때문이다(에스겔3:7).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에 완고하면서 악하기 때문이다(역대하36: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에스겔11:19;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이와 반대인 부드러운 마음은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시야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열왕기하 22:19에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기술되어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팍함과 연결시킨다.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이제는 몇 가지의 추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우리는 모든 신앙감정을 믿을 수 없거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 이 땅에 영적 대각성기에 위대한 신앙감정을 가졌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올바른 성향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들이 감정적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 때에 많은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높이 고양된 감정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당연하게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교묘한 술수를 보게 된다. 사단은 신앙감정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았고,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과 그 감정들이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고 잘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오류는 결국 사람이 감정이 없는 형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신앙감정들을 경멸하고 얕잡아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서 모든 참된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멸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고상한 감정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 안에 고상한 감정들이 있을 수가 없다. 신앙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경멸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만일 참된 신앙이 대부분 감정에 있다면 감정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경향성을 지닌 수단들을 힘써 구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서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에 참된 유익을 주지 못하는 수단들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들이 감정들을 감정을 자극할 수는 있더라도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이나 은혜를 향하는 감정을 자극하지는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에 속한 일들을 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그 방법들을 본성에 적합하고 참된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그 방법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을 더 많이 일으키게 되며 그럴수록 그 방편들은 더 나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참된 믿음의 대부분이 감정 아에 있다는 것이 옳다면, 우리가 믿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감정이 더 이상 자극받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당혹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목적은 그들에게 영혼의 모든 다른 기능들과 원리들을 주신 목적과 같다. 그 목적은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큰 목적 즉 사람의 본분에 봉사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 때문에 외면적인 쾌락을 위해, 명예와 명성을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그들의 소망은 강렬해지고 욕망은 타오르며 그들의 사랑은 불이 붙고 열정은 강렬해진다. 그러나 과연 영원한 세계인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감각하고 심령이 굳어져 있으며, 강퍅해져 있는지! 그들의 열정은 식어있고 그들의 갈망은 미지근하며, 그들의 감사는 얼마나 부족한지!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한다면 그리고 쓸모없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감정은 감정의 작용이 가장 합당하게 쏟아야 할 대상을 향해 발휘대고 행사되어야 한다. 복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칭찬과 감탄과 사랑의 대상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성육신 하시고, 무한한 사랑이 있으시며,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고 또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속주의 얼굴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주를 위해서 열정적이고 강렬하게 사랑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첫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강도

신앙감정이 단지 크게 높아 졌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오류가 없는 성경은, 매우 높아졌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감정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라디아서 4:15). 11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한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하다.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그들이 크게 감화되어 찬송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자신의 놀랍게 나타나심을 보고 크게 감동했고, 거룩한 언약을 세울 때 관심을 보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잊어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시대는 어떠한가? 그가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 때에는 찬송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고 조롱과 가시 면류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결국은 신앙감정이 높다고 하더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2. 두 번째 소극적 표지: 몸의 격렬한 반응

모든 감정은 어떤 것이든 어떤 점에서든 또는 어느 정도로든 몸에 영향을 준다. 몸은 심리적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몸의 체엑 특히 본능은 마음의 변화와 심리적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을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감정으로 높아졌음을 나타내시려고 영적인 감정과 전혀 맞지 않는 것들과 사단의 교묘한 흔적들 그리고 웅덩이의 더러운 냄새를 끝없이 풍기는 것들을 아름다운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하신다고 생각지 않는다.

3. 세 번째 소극적 표지: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나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된 감정들은 그 강도가 같다면 참된 감정들보다 더 심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본질이 바로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 이 현상들의 증거다.

4. 네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사람이 지정된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자 기대한다는 것은 타당치 못한 교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 채 사람들의 마음에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열광주의적인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한 영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신체가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 또는 뇌가 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과 상상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그 원인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같은 이유로 해서 영적인 인상에서도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잠자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사단에게는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 그래서 사단은 사람의 마음속에 성경 말씀을 표현하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인 타락한 이단의 교사들이 성경 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베드로후서3:16). 우리는 그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본문이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기들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소극적 표시: 사랑의 피상적 표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함없이’라는 말은 원문에 ‘부패함 없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어도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일곱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정도

거짓된 믿음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온전함과 조화가 없지만, 매우 다양한 거짓 감정들을 합하면 은혜로운 감정과 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거짓이 있다.

회심하기 전 상태에서 사람들이 신앙감정과 유사한 모든 감정 가운데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유사한 감정을 동시에 함께 체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주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올라갈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8. 여덟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체험 순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2가지의 매우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이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나타나시기 전에 그들이 좌절하는 상태가 되어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편으로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감과 각성을 경험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꼭 회심하는 것이 순서가 확실히 수학 공식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회심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회심자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죄의 자각과 위로를 어떤 방법과 순서대로 하나씩 경험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보게 된다.

진정한 회심은 그 일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의 영적이고 신적인 본질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9. 아홉 번째 소극적 표지: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우리는 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의무적으로 하다못해 어쩛 수 없이 드린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정말 혐오스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자를 경계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경험상,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안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다른 삶은 생각하지를 않는다. 결국엔 은둔자가 되어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0. 열 번째 소극적 표지: 찬송을 열심히 부름

가장 확실한 한 예를 들자면 출애굽시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들은 분명히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는 주님을 향해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잊어버렸다.

소망과 위로 가운데 무가치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자비하심 때문에 감화되어 이 값없는 은혜를 크게 높이며 찬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감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에게 위대한 감정과 존경심으로 찬양하며 높였다. 이방의 느부갓네살 왕과 다리오 왕도 그러했다.

11. 열한 번째 소극적 표시: 자신의 구원 확신

확신이라는 것은 어떤 비상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된다(베드로후서1:5-8).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비난을 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위선자에게도 이런 확신은 있는데 그것이 확고해지면 참된 성도들은 종종 의심하는 일에서도 자기가 품은 소망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된다. 첫째로, 그는 마음이 신중해야 하고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며 자신이 속고 있다는 두려움이 없다. 둘째로, 위선자는 참된 성도에게 있는 자기 자신의 소경 됨에 대한 지식과 자기 마음의 거짓됨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신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된 깨달음과 감정으로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더 쉽게 자신들에게 있는 빛과 지식을 더 크게 자만하게 된다.

셋째로, 마귀는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소망은 공격하지만 위선자들의 소망은 공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그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를 더욱 내리시고, 깊이 품도록 하시고, 삶 속에서 더 엄격하고 부지런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것 같은 시각이 없다. 반성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에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된 깨달음과 고상함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전자는 알마니안주의자들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며 대가 없는 은혜를 많이 말한다.

12.열두 번째 소극적 표시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 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그러나 외형적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얻을 수준으로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는 제일 수준이 높은 사람들 조차도 속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던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일이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신 원리와 말씀들에 만족하고 자신들의 원리를 버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남이 인정한다고 우쭐하거나 자팩할 거 없다.

제 3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구별해 주는 표지들

1. 첫 번째 적극적 표지: 성령의 내주

우리는 참된 성도들 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을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사람인 것은 그들이 가진 고유의 자질이라고 말하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영구적으로 거하실 처소인 참된 성도들 안에 거주하신다. 그래서 성도를 자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2:20).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로서 성도와 연합한다.

성도들과 그들에게 있는 미덕들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성도들의 영혼 속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역사하시고 자신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성령 또는 거룩한 영이라고 부른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셨다고 선포한다는 것과 그것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 참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2. 두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본질은 참된 성도에게 있는 영적인 감정에서 제일 중요하고 근본적인 객관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의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받은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었기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 속에 참되고 거룩한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영광을 먼저 경험하고,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런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나중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사랑과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도의 감정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달콤한 영광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거나 뒤돌아 볼 시간이 없다, 그리고 교만하거나 태만하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

3. 세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일반적인 형태의 도덕의 의미는 아니다. 거룩함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이나 척도와 무관하고 거룩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질들과 관계없는 본성 자체로서 본성을 완성하거나 본성에 어울리는 선을 뜻한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란 의미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속성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선하고, 의롭고, 한없이 마땅하고 사랑스러우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시고, 영원하시고, 편재하시며, 장엄하고 두려운 위엄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기뻐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거룩성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위대하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4. 네 번째 적극적 표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본체의 아름다움이며,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신성이시며(베스트 오브 베스트)(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선의 무한한 근본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악이 될 것이다(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또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참된 체험적 지식은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데에서 생긴다. 믿음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여러 은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사역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 전체를 알지 못한다.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려서 성경의 참된 의미 속에 담겨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항상 그 안에 담겨있던 영광스러운 일들의 놀라운 영적 탁월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이 사랑스럽고 밝게 드러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탁월하며 합당함을 아는 것이며, 성경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합리적인 확신은 참된 증거에 기초한 확신이다. 또는 확신할 만한 좋은 이유나 정당한 근거를 기초한 확신이다.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낌으로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런 확신이 생길 때, 비로소 복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의 신성과 진실성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복음에 있는 내용이 거룩하다는 확신이 직접 마음에 생긴다. 왜냐하면 이 영광 그 자체가 복음의 신성함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영광을 분명하게 보거나 이 초 자연적 감각이 상당할 정도로 생길 때 더욱 그러하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봄으로써, 복음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확신하게 된다.

2.이런 신적인 영광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신을 더 간접적인 방식이 있음을 말한다. 1)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립하는 마음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증거 되는 말씀에 설득되어 마음이 녹아지게 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심어준다. 2)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해 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돕는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그 대상들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대상들의 상호 관계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적극적 표지: 참된 겸손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엄청나게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은혜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피조물임을 아는 겸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스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일반적으로 대단한 겸손을 가장해서 나타나지만, 영적인 교만을(아마도 보편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런 영적 질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신앙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이 탁월한 성도이며, 성도 가운데 아주 원숙한 사람이고, 자신이 특별히 선하고 위대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로, 사람이 자신의 겸손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된 체험은 보통 가짜 겸손을 동반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바로 거짓된 겸손의 본질이다. 거짓된 신앙감정은 일반적으로 그 감정을 체험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자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평가한다.

7. 일곱 번째 적극적 표지: 성품의 변화

회심은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는다. 회심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에 있는 본성 때문에 죄에 계속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은 심지어 이런 죄들에 대해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록 은혜는 악한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를 뽑지를 못하지만, 은혜의 강한 능력과 효과로 악한 본성적 기질을 고칠 수 있다. 처음 회심 때 체험하는 영적 깨달음과 감정과 마찬가지로, 회심한 후에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는 모든 깨달음과 감정들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8. 여덟 번째 적극적 표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감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많이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본질적이고,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속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기쁨,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9 아홉 번째 표지: 하나님을 두려워함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아담이나 하와나 가인 같이 그렇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 되어 있다. 어린 아이는 살만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부드럽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며, 쉽게 영향을 받으며, 쉽게 굴복한다. 영적인 일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의 말씀을 경건하고 받드는 것이다. 무서워하는 것은 죄를 지어 무서워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서워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10. 열 번째 적극적 표지: 신앙의 균형

성도들이 지닌 진정한 거룩한 감정에는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의 전체가 각인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성도들 안에 있다. 은혜의 걸맞는 은혜가 있다는 말이다.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형상이 있으며, 이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걸맞다. 그 형상은 참된 형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가 있다. 특징에 걸맞는 특징이 있고, 지체에 걸맞는 지체가 있다.

하나님의 작품에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꼐서 만드신 자연적인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1. 열한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참된 성도가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그가 죄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죄를 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에게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한다. 그가 죄를 더 애통해할수록,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의 심령이 더 상할수록 심령이 더욱더 상하기를 갈망한다. 그가 하나님과 거룩함을 더 목말라하고 더 갈망할수록, 그는 더 갈망하고 하나님을 매일 찾게 된다.그럴수록 은혜의 불꽃이 타 올라서 온 몸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한다.

12. 열두 번째 적극적 표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이 말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세상에서 성도의 행위나 실천은 기독교의 원리에 전체적으로 일치해야 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둘째, 성도는 그런 거룩한 행위를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성도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한다.

거룩함에는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전적으로 순종적이라는 평가르 받기 위해서는 그의 순종은 금지의 명령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헌신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한 사업과 같이, 신앙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아주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세 번째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나게 되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전적인 순종의 길과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해 나간다. 참된 성도들은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대한 섬김에 진저리가 날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할 수 없다. 즉 더 이상 전적으로 순종할 수 없을 정도로는 결코 변절되지 않는다.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행에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그리스도인의 행함으로 행사되고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은혜로운 감정들의 가장 주된 객관적 근거가 신적인 일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에 있는 것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거룩하게 행동하게 하는 이유는 모든 거룩한 감정의 토대인 신적인 일들에서 보이는 탁월성 즉 신령한 일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탁월성 또는 아름다운 거룩함에 있는 듯하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실천적인 경향성과 결과를 갖는 것은, 감정들이 신적인 일들이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기 때문이다.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행위는 온전히 변하지 않는다.

거룩한 감정들이 이와 같이 실천적으로 행하고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이유는 거룩한 감정들이 겸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은 순복적이고 복종적이며, 순종적인 마음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엄격하고 전반적이며 지속적인 순종을 동반하게 하는 이유는 온유함 때문이기도 하다. 온유한 심령은 참된 성도들의 감정에서 드러나며 도덕적인 악의 존재와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속에 빠르고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은혜로운 감정들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전반적이고 지속적이며 끈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에서 흘러 나오는 행위는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룩한 감정들이 거룩한 행위를 향한 진지함과 행동과 헌신과 인내를 통해 표현되고 드러내는 이유는 신앙생활에서 더 큰 성취를 얻고자 하는 영적 욕구와 갈망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참된 감정을 동반하며 퇴보하지 않고 점점 증가한다.

우리의 삶은 비타민C 같다고 할 수 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은혜를 갈망하며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신앙이 퇴화하고 죄를 짓는 옛날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늘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나누게 되면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단 15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것이 내겐 유익하다.”

우리도 역시 이런 주님이 주신 달콤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출처] changmoolee.tistory.com

2016.07.03_하나님의 큰 일

2016년 07월 03일 주일 설교
사도행전 02:05-13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

[한줄 요약]
바벨탑 사건(창 11장) 이후 인류의 언어가 분열되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복음으로 통일됩니다. 그 언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세례와 충만을 받은 때
    각 외국어(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습니다
  2. 경건한 유대 사람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방문한 사람들 율법을 실천하고 그 참된 의미를 알고자 노력한 사람들
  3. 하나님의 큰 일(타 메갈레이아 투데우)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결론]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