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3

2017년 08월 27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10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신 8:5~6) 5 당신들은, 사람이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을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십시오. 6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하십시오.

[도입]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설교 요약]
오늘은 5절과 6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은 훈련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을 가게 하신 이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갈 수 있는 훈련을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천국의 모형일까요?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천로역정을 보아도 해석자의 집을 지나야 십자가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배워야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라는 것이 행위적인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방편이라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마련해 놓은 구원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홀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 오늘날 가나안은 직업과 소명입니다 –창 1:28, 12:1

하나님은 광야를 가더라고 방향 없이 가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목표를 정해주고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모든 신자에게 공통되면서도 다릅니다. 그것은 직업이라는 소명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직장이 아니라 직업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직장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 두면 여러분은 다른 일을 하게 될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직장은 있지만 직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 내가 일생동안 발전시키고 계발해야 할 나만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에 매진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람에게 통치자라는 직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직업은 인간의 타락 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단지 난이도가 높아졌을 뿐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져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 매우 작게 세분화되어 있지만 우리 모두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작게 세분화된 직업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역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현재에는 직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찾으십시오.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직업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직장에 들어갈 것인가에 목 매달지 말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고민하게 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그곳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 오늘날 광야는 바로 인생 자체입니다 – 계 7:14

광야는 곧 인생 자체입니다.

(계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시록 7:14에서 큰 환란는 ‘테스 세오슬립스 테스 메갈레스’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the great tribulation’이라고 합니다. 원어나 영어를 알 필요까지는 없는데, 한 가지 한국어가 갖는 한계 때문에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큰 환란’이 아니라 ‘그 큰 환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종말 때에 있을 대환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다르게 해석하는데, 여기서 흰옷입은 사람들은 종말때 대 환란을 거쳐서 들어가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환란이 있기 전 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겪은 그 큰 환난은 무엇일까? 저는 각자의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지난 주에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스캇 펙이 ‘인생은 고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게 불교식 용어이기 때문에 ‘인생은 환란이다’라고 고치고 싶습니다. 인생은 환란입니다. 스캇 펙의 말처럼 인생을 환란이라고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환란을 헤쳐나갈 힘을 비로소 얻게 됩니다.

 

  • 오늘날 만나와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요 6:51, 고전 10:4

그러나 환란을 헤쳐나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도를 만나는 일입니다. 광야는 힘든 곳이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생수를 마신 일은 모두 그리스도를 체험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번영주의적 사고를 버리면 됩니다.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부흥사들이 많아지고 방언이 일반화되고 영성이 들어오기 전에 오히려 기도 응답이 더 많았습니다. 힘들 현실 속에서도 분투하면서 겸손하게 신앙 생활 할 때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저는 지금 더 많은 기도 응답을 체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동행하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번영주의에서 벗어나니까 예수님을 더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영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기도, 방언, 영성 등으로 빨리 환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나를 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라고 이해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그리스도를 만날 것입니다.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2

2017년 08월 20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10

 

설교 듣기

 

 

[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한줄 요약]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인생은 광야와 같은 일상으로 이루어져있으면 그 일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개요]

  1.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분몬은 신명기이며, 모세가 광야의 의미에 대해서 나중에 회고한 내용입니다. 광야를 왜 지나야 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은데,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1.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1. 광야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1

2017년 08월 13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10

 

설교 듣기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한줄 요약]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인생은 광야와 같은 일상으로 이루어져있으면 그 일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개요]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분몬은 신명기이며, 모세가 광야의 의미에 대해서 나중에 회고한 내용입니다. 광야를 왜 지나야 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은데,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2절에서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_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_.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광야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3

2017년 08월 06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03:16~04:11

 

설교 듣기

 

오늘은 구체적으로 성령님은 우리 인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듬으시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는 분입니다.

‘고난 중 형통’을 통해서 다듬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 밀어넣으시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동일한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 가게 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 4: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능력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지혜와 성렴님의 인도에 대한 확신으로 시험을 극복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자들이 신앙 고백 이후에 고난을 통해서 무능력을 경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예수님께서 이미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능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믿음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곳은 고난의 장소이고 낮아짐의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능력이 아니라 바른 믿음과 바른 인격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수 천명을 회개하게 한 것에 열광합니다. 바울이 일으킨 기적에 흥분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난은 성령님께서 신자를 인도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에게 고난 중 형통을 주는 분이십니다.

본문 4장 3절에서 10까지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멋지게 대답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14장에서 알아본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대답할 말을 생각하게 하시는 분,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에게 지혜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만 주시지 않고 고난 중에 형통도 주십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부분인데, 성령님은 고난을 벗어나게 하지는 않시고 고난 속에서 형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힘들어 지칠 때면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물이 없어서 힘들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시고요. 왜 병주고 약주고를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너무나 힘들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사실을 고난을 겪는다면 우리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번영주의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형통이 아니라 고난이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나서 고난 중 형통을 주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고난을 주시지만 동시에 고난 중 형통도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 중에 있다면 고난 중 형통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는 점입니다. 일상의 고난 중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그 원망하지 말고, 고난을 넉넉하게 감당할 능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다시 구약 성경 민수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했습니까? 그들의 광야 생활은 단지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장차 있을 가나안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노예로 수 백년을 살아온 민족에 전쟁을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제식 훈련을 하셨습니다.

마치 다윗이 양을 지키면서 돌팔매질 연습을 한 것이 나중에 골리앗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골리앗을 충분히 이길 능력을 훈련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훈련하고 성장시키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고 동시에 고난 중 형통을 주십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그 고난 속에서 형통을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본문 4:11에서 천사들이 와서 수종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주시는 영광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진정한 영광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영광은 진정한 영광 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하늘 나라에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면 하늘 나라에서 참된 영광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발견한 한 구절이 제 가슴에 깊은 인상으 남겼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무형한 사람이 많고, 이 땅에서 무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내면과 외면이 모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우리를 힘들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18에서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롬 8:17~18)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얻기를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바르게 아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