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w13_그리스도의 사랑이 죽음을 이깁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사랑의 하나님!
땅엔 희망이 일고, 나무엔 소망이 돋고, 산과 들엔 기쁨이 일렁입니다. 이 시간 움츠렸던 마음을 열고 믿음의 눈을 들어 영원하신 주님을 예배합니다.

부활의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처럼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천년 전 상실의 슬픔을 안고 갔던 여인들은 부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인생의 비통을 안고 나온 저희도 주님의 부활로 인해 감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봄의 온화함이 겨울의 차가움을 이기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죽음의 냉혹함을 이깁니다. 신음하던 대지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부활절 봄을 맞이할 때마다, 이 진리를 기억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죽음의 저주를 끊은 것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세상의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진리를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너의 쓴잔을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을 위해 기도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검증가능한 핵 포기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북한이 잔꾀를 내지 않도록 그들을 어리석게 하시고, 변덕을 부리지 않도록 마음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미국이 전쟁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평화를 적극 지지하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성적으로 정결해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연예, 토크, 코미디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성적인 대화와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려하는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방송, 연예, 영화, 스포츠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인간적인 대우와 악습을 거부하게 하시고, 사회 곳곳에 퍼진 갑질, 담합, 기합 등을 청산하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우리 자녀인 청소년들이 사회 어느 분야에 진출해도 차별과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 나라와 사회 전체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거룩한 영으로 우리를 보호하사 악한 세상에 살되 거룩하게 지키시고, 불의한 세상에 살되 의로운 자가 되도록 보호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고난주간] 예수님의 인격, 겸손

본문

스가랴 9:9 / 2018년 03월 25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한줄 요약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개요

사순절 여섯 번째 주간입니다. 이번 주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오는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토요일을 지나 주일에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 주일이 부활절이 됩니다.

0. 왜 겸손해야 할까?

얼굴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하면 쉽게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물건을 들고 있는지, 어느 장소에 있는지 등을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은 앞으로 구원자가 앞으로 오실 텐데 어떤 기적을 보여줄 것이고, 어떤 가르침을 베풀 것이고, 어떤 인격을 가질 것이다라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을 믿으니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가 메시아인지가 좀 헷갈리는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구절을 보면서 대조를 해 보아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헤롯 대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돼요”라고 말하시겠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헤롯 대왕이라는 사람이 헬라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던 이스라엘을 지켜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해서 영웅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자기가 사는 시대에 매몰되어버립니다. 당시에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추종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우상으로 자리잡으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헤롯 대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예언과 대조해 보면 헤롯 대왕이 메시아가 아닌 것이 드러납니다. 그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격이 잔인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스가랴 말씀은 메시아 구별법 중에서도 인격을 통한 구별법을 알려줍니다. 사실 기적이나 가르침보다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메시아가 겸손한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스가랴서에서는 메시아가 겸손한 분이라고 그 인격에 관해서 못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 후보에서 제외입니다. 물론 겸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은 이 사람이 ‘메시아’라는 핵심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기 때문에 메시아 구별법을 적용하면 합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메시아가 겸손하다는 말씀은 곧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왜 겸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 마음 속에 마련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피조물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부흥을 이끌었던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책 중에 ‘겸손’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머레이 목사님은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로 세 가지를 애기합니다. 첫째 피조물이기 때문에, 둘째 죄인이기 때문에, 셋째 성도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겸손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이 우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과학을 믿는 사람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더 인정할 것입니다. 사람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우주, 즉 자연에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마치 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 넣은 ‘오염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마음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 똑똑하고, 능력있고, 돈이 많으면 신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조종하려고 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우월이 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월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사람은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은 하나의 공동운명체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가족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족 위에 군림하고 가족을 짓밟는 행동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마음 속에도 마치 제가 신처럼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 마음이 오염된 것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이 오염인 것을 알아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주의 일부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2.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불의를 의미한다고 로마서를 인용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의’이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불의’라고 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주위 모든 사람에게 불의합니다. 살인, 사기를 치는 것은 당연히 불의이지만,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 아내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마땅히 나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는 기준말입니다. 그것이 어긋날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무시하고 심지어 잡아먹어도 나쁜게 아닙니다. 사람이 동물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강자가 더 강해지는 것이 선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도 정의와 평등을 외칩니다. 강자의 횡포를 불의하다고 항의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누가 그 기준을 넣어두었는지 몰라도 그 기준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알지만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의로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불의에서 건져줄 어떤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불의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전제로써 필수적입니다.

3. 성도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다음에는 교만해도 될까요?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나오는 의문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한번 하고 마는 이벤트가 아니라 영원한 변화가 시작된 지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겸손을 추구하게 될 때,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은 자연인은 겸손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잠시 겸손이라는 가면을 쓸 수는 있지만, 겸손이 인격의 일부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성도라면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성도의 겸손은 지금까지의 겸손과 다르게 적극적인 모습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겸손은 ‘섬김’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겸손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겸손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의 자기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의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적극적인 행동이었고,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론

겸손은 예수님 인격의 핵심입니다. 겸손은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의롭지 못해서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서로를 끌어내리는 진흙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강자가 우대받는 정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고 진리일 수 밖에 없고 진리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겸손을 포기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겸손을 포기한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섬김을 실천함으로 겸손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깊이 만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w12_새로운 기대로 봄을 맞이하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소망의 하나님!
신선한 설레임으로 매일의 문을 열게 하시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새 봄을 맞이하게 하소서. 이 소망의 계절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채우셔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시작되는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걷게 하소서. 예루살렘 성에서부터 성전과 이름모를 거리로, 겟세마네 동산,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골고다 언덕까지 함께 걷게 하소서. 그리하여, 전능한 하나님이 왜 고난의 길을 가셨는지 묵상하게 하소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고, 이것이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살과 피라고 하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 연합됨을 다시 확인하고자 하오니 성찬식에 함께 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동행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해 영혼에 영원한 씨를 받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격에 거룩한 옷을 입게 하시며, 기도로 생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너의 쓴잔을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이 예정되어 전쟁의 위험이 줄어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검증가능한 핵 포기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북한이 세계 경제 무대에 복귀하여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미투 운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성적으로 정결해 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연예, 토크, 코미디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성적인 대화와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려하는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방송, 연예 사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서 악습과 적폐를 청산하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수, 배우 등 연예인들 꿈꾸는 청소년들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예계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죄악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거룩은 모든 추악을 정결하게 합니다. 지은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되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206장. 나 무엇과도 주님을

이번 주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사순절] 상한 마음 다스리기

본문

민수기 21:04~09 / 2018년 03월 1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한줄 요약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해 좁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에는 민수기 2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의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신약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12:2이고, 구약에서는 민수기 21:9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헬.아포라오: 주의 깊게 생각하다, to consider with the eyes)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히.나바트: 주목하다, 숙고하다)

두 구절에 모두 ‘보다’라는 공통된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슬쩍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생각하면서 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구약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우리 현실에서 믿음을 활용해서 상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0. 뒤돌아보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이 상하십니까?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여러 가지 있겠지요. 사업이 어려울 때, 맡은 일이생각만큼 성공적이지 못할 때, 자녀가 부모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등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는가?”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마음이 상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 상한 마음을 해소하는가?”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십니까? 답변하기 곤란하시죠? 시간 끌지 않고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없고 해답만 있습니다. 폴 트루니에의 책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폴 트루니에는 스위스의 내과의사이자 기독교 상담학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나무의 줄기 부분은 땅 위에 드러나 있고 뿌리 부분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마음을 줄기라고 한다면, 안 드러난 마음을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폴 트루니에 ‘강자와 약자’

인간은 동일한 내면의 고통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반응을 보인다. 강한 반응이란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자신 있고 적극적인 모습을 띠며, 자신의 두려움을 덮기 위해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자신의 나쁜 면을 감추기 위해 좋은 면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약한 반응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약점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것을, 강자는 은폐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반면 약자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약자의 절망과 강자의 불안, 그리고 이 둘의 불행 이면에는 거대한 착각이 있다고 믿는다. 그 거대한 착각이란 인류에게는 강자와 약자, 두 부류가 따로 있다는 그 생각 자체다. 그 둘 속에는 똑같은 내적 인간성이 감추어져 있다. 외적인 가면, 즉 외적인 반응은 약자뿐 아니라 강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기만한다.사실,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약한 존재다.

사람은 강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약하게 반응하기 마련이고, 그 둘 사이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돌아서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으셨다. 두려움 중에 죄가 되는 것은 날마다 버려야 하지만, 두려움이 주는 자극을 잘 간직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 약자는 약한 반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용기를 회복하게 되고, 강자는 강한 반응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교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설명을 드리면, 마음이 상했을 때 화를 내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우울해 지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극복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문제를 정직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강자라고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향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가지 반응의 뿌리에 공통적으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 트루니에는 모든 인간은 약자라고 말합니다. 인간 중에 강자는 없습니다.

이러한 논증이 폴 트루니에의 큰 공로입니다. 성경적인 심리분석의 방향을 잘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반응이나 약한 반응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두려움에 주목하고 그 두려움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참고 견디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재로 마음을 다스리는 열쇠가 됩니다.

1. 4~5절. 마음이 상하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 마음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펴보겠습니다.

[21:4~5]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원망’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원망은 ‘뒤돌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라고 나와 있으니까요. 이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믿음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인데, 이들은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앞 일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한데, 또 길을 멀리 돌아서 가야하니까 고달픕니다. 두려움이 증폭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뒤돌아 가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줄기를 보지 마십시오.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뿌리를 바라보십시오. 뒤돌아보는 이유는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내면의 불안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여 해결하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이 만들지 않은 하늘, 땅, 공기, 물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불안정합니다.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갈 여지가 생깁니다.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고 깨달아야 믿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의존적인 존재인 인간이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근본적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품에 안겨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2. 6~7절. 고통 속에 기도하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도 기도와 동일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자기 존재의 불안정과 거기서 비롯된 두려움을 깨달은 정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를 해도 내용은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기도하는 강한 반응이나 원망하는 약한 반응에 속으면 안됩니다. 표면적인 마음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 밑에 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 존재를 의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자신의 비서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도와주는 도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세게 한다고 기도가 강력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하나님께 순복해야 기도가 강력해 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믿음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깊은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줄기만 볼 뿐 감추어진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줄기를 잘라내고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뿌리를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뿌리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서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흡수할 때 마음 줄기도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가면과 포장을 벗겨내려는 의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같은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소한 일에 크게 화를 내시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오늘 구절은 매우 압축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반응하시는 내용이 있는데, 대부분 압축된 핵심 가르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배성들이 믿음에서 정반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멸망 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비상 개입을 하십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극약 처방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3. 8~9절. 바라보면 산다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뱀이 예수님을 비유하는게 맞는냐는 점입니다. 네, 맞습니다. 성경에서 뱀을 좋게 비유한 부분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이고 하나는 마태복음 10:10에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성경은 단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예수님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뱀은 무조건 사탄이고 금은 무조건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 영해’라는 부흥회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골탕먹이려고 이렇게 ‘이스터 에그’를 숨겨두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쳐다본즉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주의깊게 생각하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단순하게 믿자”라는 구호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성경과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 중에 믿음의 심층으로 도달한 일이 없습니다.

깊은 사고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청교도는 대학 총장도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학교는 커녕 부인한테 글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고 역작인 천로역정을 지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마음이 거짓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초등학교도 못나왔어도 정직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때문에 슬퍼하고 사람 때문에 고민하다보면 사람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깨달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귀기울이면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한 요약입니다. 더불어 우리 인생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상했을 때,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소극적으로 반응하거나 과도하지 않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이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건 정직한 성향이 강한 것이라고 폴 트루니에를 인용해서 알려드렸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마음 더 깊은 곳, 즉, 마음의 뿌리에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교만하게 원망하고 뒤돌아가느냐가 진짜 문제가 됩니다. 두려움을 포장하지 말고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하나님께 은혜를 탄원하십시오. 두려움이 해소되고 포장된 반응들이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면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인격을 신뢰하십시오. 그 바라봄이 영원히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018w11_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주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빛 되신 하나님!이 시간 봄의 햇살처럼, 낙심과 우울한 기운을 날려 보내는 기쁨과 소망의 빛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의 예배가 주일의 예배가 되도록 매일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 기간, 우리가 악한 본성을 극복하고 세상의 죄악을 이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옵소서. 우리가 거룩한 영에 이끌리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주님의 길을 발견하게 하시고, 주님의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세상에 가득 찬 불의로 인해서 놀라거나 좌절하지 않게 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함을 묵상하게 하소서.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양심을 내려놓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해 영혼에 영원한 씨를 받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격에 거룩한 옷을 입게 하시며, 기도로 생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찬양 : 155장. 어두운 밤길에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남북, 북미 정상 회담이 예정되어 전쟁의 위험이 줄어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은 완전히 핵을 포기하게 하시고, 미국은 전쟁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우리나라는 북한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력을 속히 갖출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장애인 올림픽,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진행 중입니다. 보다 많은 국민들이 그들을 응원하도록 관심을 돌려주시고, 방송사들도 중계방송을 늘리게 하시며, 관련 뉴스가 많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랫동안 준비한 선수들이 보람을 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미투 운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성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여성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치료해 주시옵소서.

또한, 미투 운동이 개인의 한풀이나 비방에 그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를 제거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갑질 문화, 권력 남용, 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사오니 이러한 문화가 이 기회에 근절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편, 미투 운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오해와 사소한 실수에 관해서는 과도한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게 하소서. 나아가 이것이 남녀 갈등으로 과열되지 않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하나님의 사랑은 죄악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거룩은 모든 추악함을 이깁니다. 지은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되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주 설교  민수기 21:04~19, [사순절] 상한 마음 다스리기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요나의 표적이 주는 교훈

본문

마태복음 12:38~45, 요나 3:5 / 2018년 03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3: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한줄 요약

요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알려줍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간에는 요나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표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오토’, 헬라어로는 ‘세메이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에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적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일’을 의미합니다. 표적은 ‘기적’을 포함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표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첫째,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기적, 은사, 능력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병이 치료되거나 귀신이 쫒겨나는 것, 성령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둘째, 기도 응답입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라도 기도 응답이 표적이 됩니다.셋째, 시대의 표적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본문하고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표적입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그 표적을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0. 병원갈까, 기도할까?

요즘도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병원가고 기도하십시오. 병원간다고해서 믿음 없는 것이 아니고 병원 안간다고 믿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이유는 병원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기도로 대표되는 신앙이 서로 반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과 신앙이 반대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과 상식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도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기적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들어가 있다가 살아난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설명하면,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무조건 믿어라”라고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하는지도 설명합니다. 이런 배경을 설명한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한 후에 그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성경이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부활이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믿을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 안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런 분께는 죄송한데, 그게 믿는게 아닙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는 거고 믿고 싶은 거일 뿐입니다. 그런 자세는 좋지만, 다 됐다고 생각하는 건 큰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을 진심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편견 없이 보니까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라는 공식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믿음 없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믿음을 갖도록 차근차근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잘 따라오지 못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엇나갔는지 아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1. 38~40절.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서 몇 사람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말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진짜 큰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주셨냐면,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건 표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한 이유는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돼!’라고 근거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적을 보여주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부활의 표적에 대해서 예고하고 다른 표적은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표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표적 알아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주셔도 알아채지 못했느냐면,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면 안돼! 하나님도 기적을 일어키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잘못된 거야!”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가진 안식일과 같은 편견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선한 양심에 귀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선한 양심과 어긋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현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난 없는 형통, 희생 없는 영광, 거룩 없는 성령, 섬김 없는 은사가 바로 번영주의입니다.

기도만 많이하면 형통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누리려고만 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데 말과 행동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합니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물의를 일으킨 목회자가 건재하는 이유는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판적으로 교회에 다니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 41~42절. 요나의 기적이 알려주는 의미

예수님이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이 이상의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살던 시대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믿지 못한다면 설명이 무의미합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더 잘 볼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이나 남방 여왕 처럼요.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교회 안 다니는 사람한테 “이 교회하고 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때 보이세요?”하고 물어보면 어느 정도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 많이하고 봉사도 열심히해서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 그 교회 사람들 엄청 이기적이예요”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도도 봉사도 잘 못해서 힘 없이 다니는데, “그 교회 사람들 순수하고 겸손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새 카톡으로 구국기도회니 하는데 참여하라는 문자가 가끔 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그걸 주도하는 분들 얼굴이나 말투를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애들한테 “얘들아, 이 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은 것 같니?”라고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생각해 봅니다.

분노와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대답을 내 놓을까요? 아이들은 존경스럽다고 할까요?

다들 소신과 근거를 가지고 나름대로 믿음으로 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소신과 근거, 믿음이 어디에선가 오염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채려면 자기 마음의 오염을 제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광기가 아니라 겸손과 평안 가운데 해야 합니다..

3. 43~45절. 나중에 전보다 심해진다

표적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없으면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내가 선택하는 길이 곧 내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면 잘못된 길을 가게되고 잘못된 길을 가면 마음이 더 잘못됩니다. 악순환에 빠집니다.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걸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걸음은 단지 한걸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걸음 이후에 걸을 수 많은 걸음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첫생각이 중요합니다. 정직과 거짓의 갈림길에서, 공의와 불의의 갈림길에서, 고난과 번영의 갈림길에서 첫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옳은 길을 선택하면 힘들고 고생할 것 같지만 고난 중 형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선순환에 들어섭니다. 반대로 옳지 않은 길을 선택하면 번영할 것 같지만 환난에 빠집니다. 예수님과 멀어지고 악순환에 빠집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우리를 힘든 길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정직, 공의, 희생은 상대적으로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옳을 길을 가면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 끝에 예수님이 활짝 웃으며 여러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켜는 일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선한 양심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우면 어리석음이 떠나갑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아는 빛나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웁시다.

결론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부활이 믿기 어렵지만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 내면이 정결해 져야 합니다. 표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편견과 분노, 광기에서 벗어나 평안과 확신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밝은 빛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인격을 묵상하십시오. 언제든지 그것이 최우선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지켜질 것입니다.

2018w10_하나의 씨를 심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부드러운 봄의 기운에 무거운 외투를 벗어놓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님의 사랑도 봄과 같아서 이 아침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생명이 시작되는 이 계절에 우리가 하나의 씨를 심게 하소서. 하나의 씨를 심음으로써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일을 시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온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하나의 일을 시작하게 하셔서 그 일로 인하여 우리가 벅찬 열매를 수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사순절이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내리게 하시고, 남의 멱살을 잡던 주먹을 펴게 하시며, 남을 비난하던 입을 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혼 깊은 곳을 감동하여 내면에서부터 그러한 변화가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거룩한 씨를 심으신 주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약속하신 주님, 죽음 너머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하시는 하나님, 3월 9일부터 장애인 올림픽,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딛고 일어난 스포츠맨들에게 우리 국민들이 관심과 격려를 보내게 하시고, 그들을 보며 환난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미투 운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치를 감수하며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용기를 낸 여성들을 주님의 손으로 보호해 주시옵소서. 성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던 여성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치료해 주시옵소서.

간통죄 폐지 등으로 인해 성 윤리가 흐려지려하는 사회 분위기에 경종을 울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성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문제임을 인정하게 하시고, 그것을 소중하고 신중하게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투 운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오해와 사소한 실수에 관해서는 과도한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남녀 갈등으로 과열되지 않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미투 운동이 갈등, 분열, 정죄가 아니라 사과, 회개, 화해를 향해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게 하시고, 국민과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시며, 온 사회가 함께 책임을 인정하여 참된 화해를 이루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하나님의 사랑은 죄악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거룩은 모든 추악함을 이깁니다. 지은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되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주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본문

누가복음 10:25–37, 신명기 6:4~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한줄 요약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간에는 신명기서가 인용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율법은 가이드(a guide)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벽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또다른 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즉,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벽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잘 깨닫는 것도 힘들지만,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교육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까 답은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대가가 성경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교육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많자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맞춤형 단계적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르셨고, 단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영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하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율법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26~28. 영생을 얻는 방법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변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앞에서 하신 말씀과 대답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상이었습니다.

[14:5~6]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 두 제가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못지 않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은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는 가르침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맞춤형 교육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던 말씀을 대상에 관계없이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율법학자가 신명기 6:4~5절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이 말씀을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끄집어 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인격성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데만 힘썼지 율법의 정신을 지켜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태도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법률에 충성했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은 거부했습니다.

2. 29~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인격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생겼는데,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몰래 피해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생각을 고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양심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데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 주일 성수는 잘하는데 직원들 착취하는 장로, 술 담배하지 않는데 돈 떼어먹는 집사,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청년, 건전하지 않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헛똑똑이 교인 등입니다.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냐면, 어떤 한 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철처하게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양심이 없는데 뭔가 충성하니까 자기 스스로 신앙 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인 예를 들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관련 뉴스를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편들고 어리석은 주장을 일삼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이웃이 아니라 교회 안다녀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던 불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3. 37.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 말씀의 절정은 37절입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단계적 교육입니다.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직 그 단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비슷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말로만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또 교회 안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교회 안에서만 충성,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서 강자의 횡포에 항의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손해를 보아도 공의를 지지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떨리게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헛된 충성을 믿음의 증표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온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지키다가 손해를 보고 좌절했을 때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을 깨달을 것이고 깊은 확신 속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율법학자는 오늘날 교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의 양심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신앙 생활 잘하고 있지요? 저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배웠고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율법학자의 선한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보다 악한 삶을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율법학자의 몫입니다. 그가 어떤 길로 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선한 일반인 즉,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신앙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문제가 있든지 그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논리와 사변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헛된 확신에서 벗어나서 의를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려운 길을 가라고 권유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가라고 이끄십니다. 헛된 확신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w09_굳어진 마음을 변화시키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살아계신 하나님!
무뎌진 겨울 바람을 맞으며 예배의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겨울의 절정이 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부활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묵상합니다.

지금쯤 땅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싹을 틔우려는 씨앗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영혼 은밀한 곳에서 복음의 싹을 틔우려는 성령님의 부지런한 활동이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오니 굳어진 마음을 변화시키사 영원한 소망이 자라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 기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왜 십자가의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지를 알게 하시고, 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오직 하나의 방법인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씻어주시고, 주님의 영으로 우리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우리 내면을 채워주시고, 치료의 손길로 우리 상처를 고쳐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하시는 하나님,
3월 9일부터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 평창 동계 패럴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육체의 장애가 정신의 장애로 이어지는 것을 거부한 위대한 사람들의 축제가 큰 기쁨 가운데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보며 우리도,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배우게 하시고, 더불어 우리가 장애인과 사회적인 약자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배려하고 격려하여 세상을 살아가 용기를 북돋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성 범죄를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성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사회적인 비난이 두려워 침묵했던 여성들이 용기를 냈습니다. 그들이 낸 용기를 통해서 성 범죄자들이 합당한 징벌을 받게 하시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시옵소서.

이 일을 계기로 공의를 저버린 우리 사회 분위기가 변화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가혹한 강자숭배, 부당한 방법을 사용해도 성공하면 된다는 성공주의, 무조건 주류를 두둔하는 주류 콤플랙스를 제거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사순절 기간, 교회를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들이 의를 위해 목마르고 의를 위해 기꺼이 핍박받으려는 결단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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