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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1:04~09 / 2018년 03월 1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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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한줄 요약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해 좁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에는 민수기 2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의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신약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12:2이고, 구약에서는 민수기 21:9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헬.아포라오: 주의 깊게 생각하다, to consider with the eyes)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히.나바트: 주목하다, 숙고하다)
두 구절에 모두 ‘보다’라는 공통된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슬쩍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생각하면서 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구약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우리 현실에서 믿음을 활용해서 상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0. 뒤돌아보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이 상하십니까?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여러 가지 있겠지요. 사업이 어려울 때, 맡은 일이생각만큼 성공적이지 못할 때, 자녀가 부모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등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는가?”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마음이 상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 상한 마음을 해소하는가?”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십니까? 답변하기 곤란하시죠? 시간 끌지 않고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없고 해답만 있습니다. 폴 트루니에의 책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폴 트루니에는 스위스의 내과의사이자 기독교 상담학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나무의 줄기 부분은 땅 위에 드러나 있고 뿌리 부분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마음을 줄기라고 한다면, 안 드러난 마음을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폴 트루니에 ‘강자와 약자’
인간은 동일한 내면의 고통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반응을 보인다. 강한 반응이란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자신 있고 적극적인 모습을 띠며, 자신의 두려움을 덮기 위해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자신의 나쁜 면을 감추기 위해 좋은 면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약한 반응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약점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것을, 강자는 은폐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반면 약자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약자의 절망과 강자의 불안, 그리고 이 둘의 불행 이면에는 거대한 착각이 있다고 믿는다. 그 거대한 착각이란 인류에게는 강자와 약자, 두 부류가 따로 있다는 그 생각 자체다. 그 둘 속에는 똑같은 내적 인간성이 감추어져 있다. 외적인 가면, 즉 외적인 반응은 약자뿐 아니라 강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기만한다.사실,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약한 존재다.
사람은 강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약하게 반응하기 마련이고, 그 둘 사이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돌아서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으셨다. 두려움 중에 죄가 되는 것은 날마다 버려야 하지만, 두려움이 주는 자극을 잘 간직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 약자는 약한 반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용기를 회복하게 되고, 강자는 강한 반응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교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설명을 드리면, 마음이 상했을 때 화를 내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우울해 지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극복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문제를 정직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강자라고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향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가지 반응의 뿌리에 공통적으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 트루니에는 모든 인간은 약자라고 말합니다. 인간 중에 강자는 없습니다.
이러한 논증이 폴 트루니에의 큰 공로입니다. 성경적인 심리분석의 방향을 잘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반응이나 약한 반응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두려움에 주목하고 그 두려움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참고 견디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재로 마음을 다스리는 열쇠가 됩니다.
1. 4~5절. 마음이 상하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 마음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펴보겠습니다.
[21:4~5]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원망’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원망은 ‘뒤돌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라고 나와 있으니까요. 이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믿음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인데, 이들은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앞 일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한데, 또 길을 멀리 돌아서 가야하니까 고달픕니다. 두려움이 증폭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뒤돌아 가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줄기를 보지 마십시오.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뿌리를 바라보십시오. 뒤돌아보는 이유는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내면의 불안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여 해결하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이 만들지 않은 하늘, 땅, 공기, 물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불안정합니다.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갈 여지가 생깁니다.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고 깨달아야 믿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의존적인 존재인 인간이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근본적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품에 안겨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2. 6~7절. 고통 속에 기도하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도 기도와 동일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자기 존재의 불안정과 거기서 비롯된 두려움을 깨달은 정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를 해도 내용은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기도하는 강한 반응이나 원망하는 약한 반응에 속으면 안됩니다. 표면적인 마음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 밑에 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 존재를 의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자신의 비서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도와주는 도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세게 한다고 기도가 강력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하나님께 순복해야 기도가 강력해 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믿음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깊은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줄기만 볼 뿐 감추어진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줄기를 잘라내고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뿌리를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뿌리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서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흡수할 때 마음 줄기도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가면과 포장을 벗겨내려는 의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같은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소한 일에 크게 화를 내시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오늘 구절은 매우 압축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반응하시는 내용이 있는데, 대부분 압축된 핵심 가르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배성들이 믿음에서 정반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멸망 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비상 개입을 하십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극약 처방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3. 8~9절. 바라보면 산다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뱀이 예수님을 비유하는게 맞는냐는 점입니다. 네, 맞습니다. 성경에서 뱀을 좋게 비유한 부분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이고 하나는 마태복음 10:10에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성경은 단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예수님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뱀은 무조건 사탄이고 금은 무조건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 영해’라는 부흥회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골탕먹이려고 이렇게 ‘이스터 에그’를 숨겨두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쳐다본즉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주의깊게 생각하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단순하게 믿자”라는 구호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성경과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 중에 믿음의 심층으로 도달한 일이 없습니다.
깊은 사고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청교도는 대학 총장도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학교는 커녕 부인한테 글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고 역작인 천로역정을 지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마음이 거짓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초등학교도 못나왔어도 정직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때문에 슬퍼하고 사람 때문에 고민하다보면 사람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깨달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귀기울이면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한 요약입니다. 더불어 우리 인생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상했을 때,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소극적으로 반응하거나 과도하지 않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이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건 정직한 성향이 강한 것이라고 폴 트루니에를 인용해서 알려드렸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마음 더 깊은 곳, 즉, 마음의 뿌리에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교만하게 원망하고 뒤돌아가느냐가 진짜 문제가 됩니다. 두려움을 포장하지 말고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하나님께 은혜를 탄원하십시오. 두려움이 해소되고 포장된 반응들이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면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인격을 신뢰하십시오. 그 바라봄이 영원히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018.03.18_[사순절] 상한 마음 다스리기”에 한개의 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