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w04_’시작의 끝’ 1월을 보냅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창조주 하나님,
지난 한 주간은 대한이 지났다는 안도감을 비웃는 듯이 기습적으로 다가온 한파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자연과 세상은 저희들의 근거없는 낙관과 섣부른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놀랍게 발전한 현대 도시 문명이 오래된 겨울 앞에 움추려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광대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희는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한 자세로 머물러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이제 ‘시작의 끝’이라 할 수 있는 1월이 지나갑니다. 올 한해를 알차게 살 수 있도록 매사에 지혜를 주시고,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시행착오를 통해서 발전하게 하시고, 뜻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성숙함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화재 사고가 계속 일어나서 저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을 위로해 주시고, 치료하는 의료인들을 격려해 주시옵소서. 언론의 보도가 비난에 집중되지 않게 하시고, 지켜보는 국민들과 지역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필요한 도움을 베푸는 성숙함을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공과 그로 인해 평화 정착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동계 올림픽을 준비한 선수들이 마음껏 경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한 관련 단체들이 선수들을 위해서 최선의 후원을 해 줄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안타깝게도 빙상연맹, 스키 연맹 등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단체들이 행정 착오, 선수 폭행, 파벌 갈등 등으로 잡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저희의 고질적인 병폐를 보여주는 듯해서 부끄럽지만, 고통스럽더라도 잘못된 관행을 고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자들에게 정의로운 용기와 과감한 결단력을 주시옵소서.

더 나아가 저희 사회 곳곳 뿌리 깊게 퍼져있는 거짓, 부패, 비리, 불공정, 갑질, 연줄, 파벌 등 잘못된 관행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주위를 변화시키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이 땅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겨시고, 교회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고 자랑이었던 시절의 거룩한 권위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열망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불타오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28일 갈라디아서 05:01~15, 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설교

2018.01.28_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05:01~15
2018년 01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믿음을 입증합니다

[개요]

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합니다. 1절에 5장의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는 메지 말라’는 짧은 구절이 큰 감동을 줍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의문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신앙이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주일에 교회 안가도 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봉사, 기도 등 모든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알려주는 자유로운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0. 피아노 치기 혹은 피아노 연주하기

저는 아이들하고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고 말장난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이들한테 “아빠는 피아노 잘 친다”고하면, 아이들이 “아빠 피아노 못 치잖아”하고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피아노를 쿵쾅쿵쾅 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게 뭐가 잘 치는 거야”하고 아우성을 지릅니다.

제가 쓸데 없는 장난을 한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피아노를 잘 누른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더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면, ‘자유’와 ‘자율’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즉, 피아노를 잘 두드리기만 해서는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잘 두드려서 되지 않습니다.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피아노를 눌러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숙달된 결과입니다. 피아노를 막 두드리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고, 피아노를 악보에 따라서 누르는 것은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자기 마음대로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입니까? 피아노 두드리기는 훈련 없이 가능하지만, 피아노 연주하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된 자유를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은 힘들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율’은 뭔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자율’을 의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5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자율’이라는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지침을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갈라디아서 5장 뒷부분에서는 이 결론을 논증하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6.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훈련된 자유’입니다. 무엇에 따라 훈련되어야 하냐면, ‘사랑’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훈련하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들만 지키라고 주신 특별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부분에서 이미 그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입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리고나서 율법은 모세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안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살던 사람이라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안지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예증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받은 시대의 사람들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모세 시대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명, 즉, 사랑을 따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의미가 깊은데,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잘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5:6]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has any valu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성경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7~12.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매우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계속 막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과 생각을 계속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한때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지고 감동이 옅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걸림돌은 할례였습니다. 우리는 ‘할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구원의 확신’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할례가 있어야 ‘구원 받았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만, 할례는 포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할례를 믿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반발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정통 기독교 어디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아니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그렇게 가르쳤다면, 가르친 분이 오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인격에 감격하고 그 분을 닮고자 열망하는 가운데 홀연히 선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구원은 나의 믿음의 자동적인 결과나 구원의 확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또 하나는 ‘방언’인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방언이 구원을 주지도 않고 구원을 보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게 하신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그 이름 그대로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사역에 대해서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령 운동, 예수님을 닮지 않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성령님의 은사, 기적, 능력을 결코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사모하는 분들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의 걸림돌을 치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3. 13~15. 사랑할 자유를 누리라

악보를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훈련을 해야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따라 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라 쇳덩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가 예배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예배 속에 가장 잘 담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그거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를 들어드리는 것이고, 적용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랑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원칙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어도 괜찮지만,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으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결론]

자율은 훈련된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훈련될 때 아름답니다. 개인의 자유가 그의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프레드릭 윌리엄 파라). 자유가 자신의 속박을 잃을 때는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속박이 된다(칼리 지브란)

스스로 사랑이라는 계명에 따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고려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동을 주는 것도 그것이 고된 자기 훈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사랑이라는 악보를 가장 잘 연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w03_시련의 계절에 인내하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어제 24절기 중에 하나인 대한이 지났습니다. 대한이 가까웠던 지난 주는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춥고 눈이 많이 내린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한이 지나자 날씨가 온화해지는 것을 보니 이 겨울의 고비가 지났음을 깨닫습니다.

대한 추위 기간에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디는 거리의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지금은 메말랐지만, 머지 않아 그들은 고이 간직했던 인내의 잎새들을 찬란하게 틔울 것입니다. 저희도 그들처럼 시련의 계절에 인내하게 하시고 다가올 하나님의 계절에 찬란한 잎새를 틔우는 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참회의 계절 겨울이 가기 전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이 불안정한 저희들의 믿음이 새벽 세상을 덮은 깨끗한 함박눈처럼 안정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이라는 가장 귀한 보물을 발견함으로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이 아름다운 순례의 날들이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좋은 기회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시며, 실수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력을 주시고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는 긍정성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어울리게 하시고 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하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총의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공과 그로 인해 평화 정착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북한이 변덕을 부리지 않게 하시고, 무리한 요구, 억지 주장을 내세우지 않도록 막아주시옵소서. 그들이 어떤 계략을 가지고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든지 그들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여 주시고, 독재 체제가 무너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북한 주민들이 이 겨울의 추위를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포근한 날씨와 인도적인 원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각종 수용소 수감자들과 지하 교회 교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시고 그들이 소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시옵소서.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주민과 자영업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이 적절한 이윤을 얻게 하시고, 오랫동안 준비한 동계 올림픽을 통해서 지역 사회가 자부심과 활력을 되찾는 계기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비판적인 여론이 우호적인 여론으로 변화되도록 국민들의 마음을 섭리해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우리 나라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교회가 겸손함으로 능력 있게 하시고, 가난함으로 영적인 부요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의 대물림과 세습을 통한 권력 유지를 단호하게 거부하여 존경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을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치게 하여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21일 이사야 66:01~24, [시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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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1_[신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이사야 66:01~24
2018년 01월 2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66:1~24

[핵심 구절]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한줄 요약]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면 불필요한 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개요]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새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나누어주는 다이어리를 쓰는 분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다이어리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무슨 플래너라는 이름으로 다이어리와는 차별성을 가지며서 비싼 값에 팔리는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이제 유명해졌고 이랜드 출신이 설립한 3P플래너도 있고, 윈키아 플래너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플래너와 다이어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가격이 비싸고 디자인이 좋은 것을 플러너라고 할까요?

이번 시간에는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을 통해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0.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은 목표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어리는 단순히 계획, 일정을 쓰는 것이지만, 플래너는 목표를 정하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과 일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플래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의 목표를 먼저 적고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 일정을 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상이 의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은 플래너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도 강조된 말입니다. 일곱가지 습관 중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었습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기 원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매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즉,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걸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성공이나 성취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성공의 대가로 훨씬 더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어버린 경우,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가족과 관계가 안 좋은 경우, 치열한 경쟁으로 높는 지위에 올랐지만 인격을 상실한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지막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닥치는대로 살다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조금씩 다른 길을 가게되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최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후회하게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우리의 영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최후의 순간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1. 1~6. 하나님의 초점 : 행위가 아닌 마음

이사야서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알려줍니다.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은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훌륭한 예배당이 중요한게 아니라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멋진 성전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전세계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이보다 특별한 건축물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건축물을 건축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의 신앙도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 성전은 무너집니다. 성전의 그릇들도 모두 약탈당하고 맙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래도 이게 중요하지 않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진정한 깨달음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을 살인하는 것처럼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한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성경을 가지고 성공을 가르치고 예배를 통해서 번영주의를 전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이용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 7~14. 하나님의 방법 : 고난 중 형통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산을 하지만 진통하는 즉시 해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낳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빨리 해산한다고 해도 진통이 전혀 없기는 힘들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난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힘들게 하느니라.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쌀 수 밖에 없는 선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고난은 고생일 뿐이지만 의미있는 고난은 영광이 됩니다.

3. 15~24. 하나님의 성품 : 자비와 심판

하나님은 자비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계획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일년의 계획을 세울 때, 신앙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너무 바빠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위해서 바쁜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궁극을 생각하면서 일년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일년 계획을 세울 때 영혼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자.

2018w02_지혜와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소망의 하나님,
선물로 주신 첫 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마침 내린 눈은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하나님의 박수처럼 생각됩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그것이 쌓여 올 한 해가 지난 해보다 더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올 해는 경제적으로 소망을 회복하는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기 침체, 청년 실업, 조기 은퇴, 직업 불안 등 경제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국민들이 좌절감으로 인해서 도박, 주식, 가상 화폐 등 위험한 투자에 나서지 않게 하시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얻은 수익에 자부심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구하오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좋은 기회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실수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력을 주시고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는 긍정성을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어울리게 하시고 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하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다행히 북한이 태도를 바꾸어 선수단, 임원,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올림픽을 위해 내려온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지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계기를 갖게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여 주시고,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종식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고통받는 주민들, 각종 수용소 수감자들, 그리고 지하 교회 교인들이 하루 속히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과도하게 오른 물가가 보도되면 올림픽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관련 사업자들이 적절한 이윤만을 추구하게 하시고, 돌아선 국민들이 다시 올림픽을 응원하도록 마음을 다독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평창 동계올림픽이 우리 나라와 세계의 기쁨과 평화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우리 나라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예수님께 고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뜨거워지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14일 이사야 55:01~13, [신년]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는 기회

다른 설교

2018.01.14_[신년]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는 기회

이사야 55:01~13
2018년 01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55:1~13

[핵심 구절]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줄 요약]

인생에서 기회는 지속적으로 오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요]

새해부터 가상화폐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누가 얼마 벌었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등등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고 초조해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0. 기회는 계속 옵니다

지금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이라고 해서 인터넷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산업 국가의 주식 시장이 급속한 상승 한 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이다. IT 버블, TMT 버블, 인터넷 버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관련 기업 주식이 폭등해서 한 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그 전으로 돌아가보면 강남 개발을 시작하던 70~80년대에 부동산을 가지고 한 순간에 부자가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회는 주기적으로 계속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복기를 했다가 다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1~5. 기회는 내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만날만한 때에 여호와를 만나라고 하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할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불신이 깊던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미리 예언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께 나오라고 초청합니다.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잘 준비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시간이 없고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큰 발전을 이룬 강의가 그런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모든 강의가 다 도움이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식이 쌓이니까 도움되는 강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 강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저와 인생의 교차점이 많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2. 6~9. 하나님이 더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수는 고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으면 하수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서출판 열림원, 1998)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갈 중요한 기회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10~13. 하나님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앞으도 또 옵니다. 크고 작은 기회들이 계속 올 것입니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잘 준비하고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흘려보내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돈 버는데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좀더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의 성품에도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좀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복음을 가르치신 이유도 비슷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어떤 옷을 입고 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기회가 옷을 갈아입고 오더라고 알아보는 시각을 갖추자

2018.01.07_[신년] 새로운 시대가 오는 방식

이사야 40:01~11
2018년 01월 07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과거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십니다

[개요]

신년입니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느라 바쁠 때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셔야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0.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계절로는 봄이 왔지만 인생살이는 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비슷하게 새해가 왔지만, 새해같지 않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는 달력이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도 새해를 가져도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새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인생의 새해는 하나님만이 인생의 새해를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생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이 어떠게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1~3. 노역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 읽은 이사야 40장 2절을 보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겨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한다고 미리 선고를 하셨읍니다. 여기서 ‘노역의 때’는 70년 포로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해는 무작정 오지 않습니다. ‘노역의 때’를 채워야 옵니다. 그 기간을 바르게 보내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가끔 범죄 생활을 하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들은 경험이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면 그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범죄를 행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성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공부하고 청교도와 조직신학을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이게 성화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길에 들어 서기는 했지만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지은 존 뉴톤이 노예 상인이었잖습니까?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도 범죄 조직에서 있다가 회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 뉴톤은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 나라 범죄자들과 다르게 일생동안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존 뉴톤은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글로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약 1년 6개월 정도를 깊이 회개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존 뉴톤의 편지]

선생님, 그 당시의 나를 보실 수만 있다면…죽음의 밤 속에서 나는 고독 가운데 우수에 담겨 암석 위에 나의 셔츠 하나를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젖은 땅 위에 그것을 놓아서 잠자는 동안에 내 등을 말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불쌍한 그 모습을 보실 수 있다면…배에 딸린 보트 하나가 그 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만 숲속으로 도망쳐 버려서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었습니다. 나의 행동, 나의 중심,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런 외적 행위들보다 더욱 어두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시다면; –사도가 언급하였던(딛3:3)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라고 말하기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피심과 감당할 수 없는 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상상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There was at that time but one earnest desire in my heart which was not contrary and shocking both to religion and reason: that one desire, though my vile licentious life rendered my peculiarly unworthy of success, and though a thousand difficulties seemed to render it impossible, the Lord was pleased to gratify.

그 때에 신앙과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부딪히지 않는 진지한 열망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 열망을 주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도 합당치 못한 사악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오고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산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But this favor, though great, and greatly prized, was a small thing, compared to the blessings of his grace; he spared me, to give me “the knowledge of himself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하지만, 이 호의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분의 앞으로 보여주실 자비로우심과 비교하게 되면 너무나 적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을 나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In love to my soul, he delivered me from the pit of corruption, and cast all my aggravated sins behind his back. He brought my feet into the paths of peace.

나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부패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사 나의 모든 엄청난 죄악들을 당신의 뒤쪽으로 내 던져 버리셨습니다.그리고는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This is indeed the chief article, but it is not the whole.

이것이 물론 주요한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은 아닙니다.

When he made me acceptable to himself in the Beloved, he gave me favor in the sight of others.

하나님께서 그 사랑스러운 예수님 안에서 당신에게 나를 용납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호감을 받게 하셨습니다.

He raised me new friends, protected and guided me through a long series of dangers, and crowned every day with repeated mercies.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고 여러 가지 위험들 가운데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자비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출처] Letters on His African Hardships and His Conversion by John Newton, 존 뉴톤의 아프리카시절의 고난과 회심간증

위와 같은 말을 하면, 이렇게 반발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이제는 고난이 끝날 때가 되이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 전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난이 끝나고 잘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 빗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복이 함께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신앙도 좋아지고 복도 받은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세례 요한처럼 고행만 하다가 목이 잘려 죽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2. 4~8. 그리스도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선행은총이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개혁신학의 선행 은총이 인본주의(알미니안)적인 선행 은총과 다른 점은 하나님 주도적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인간의 노력이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권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선행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나간 부분이 어디냐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방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요한의 세례’ 다음에 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하고 동일시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이 감격적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선행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각성이 강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노역의 때’가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게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으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가장 아름다운 보석만이 가슴 속에서 빛을 발할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 ‘예언’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3. 9~11. 그리스도의 시대가 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능력으로 오십니다. 참았던 화를 폭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능력, 그리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영광으로 가득찬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실 때 이 땅의 작은 권력, 영광에 취했던 사람들은 냉혹한 심판에 슬퍼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림 예수님의 겸손을 알고 그분을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주실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시면서 노역의 때를 지나시기 바랍니다.

[결론]

노역의 때를 채우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일 기도_18w1]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새로운 해를 항상 이처럼 맑고 깨끗한 계절에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온갖 더러움이 꽁꽁 얼어붙어서 한없이 깨끗해진 이 계절에 저희도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새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지혜의 하나님,
미처 다하지 못한 숙제를 남기고 떠나는 것같이 등떠밀려 또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도도하고 부지런히 흐르는데, 저희는 부족한 지혜와 어설픈 재능이 돌부리가 되어서 걸음을 비틀거리게 됩니다. 주님 부디 저희에게 지혜와 재능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시간을 앞서 나아가 여유를 갖고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또한 기도하오니 올 한 해 항상 저희와 동행하셔서 아쉬움도 후회함도 없는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충만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오래 간직해 온 소망들이 이루어지는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여러 차례 도전하여 가까스로 올림픽을 유치했으나 러시아가 약물 사용에 대한 징계로 불참하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도 북핵 위협 등으로 인해서 불참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바라옵기는 대상 국가들의 정책이 변화되고 많은 나라들이 흔쾌하게 참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숙박비와 식사비가 과도하게 올라서 을림픽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관련 사업자들의 마음을 섭리하셔서 그들이 적절한 이윤을 추구하여 전세계적인 축제에 기쁘게 동참하였다는 자부심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들이 더이상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과 주변 국가를 자극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핵 개발을 저지하여 주시고, 잔악한 독재가 종말을 고하여 더이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같은 대한민국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부흥을 내려주시옵소서.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비로소 만나는 감격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08일 이사야 40:01~11, [신년] 새로운 시대가 오는 방식1

다른 설교

주일 기도_12w5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순결한 함박눈같은 은총으로 허물을 덮으소서

 

하나님,
마지막 남은 하루를 붙들고 주님 앞에 섰습니다. 이 하루를 예배로 채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새해 첫날 바라볼 때는 까마득했던 날들이, 뒤돌아보니 순간인 것 같습니다. 가끔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와보니 분주함만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2017년, 바쁘게 살았다지만 만족보다 회한이 크고, 자부심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시간들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어두운 새벽, 세상을 덮은 순결한 함박눈처럼 저희의 허물을 주님의 은총으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저희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을 용서하오니,  저희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더불어 새해에는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새해에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부지런한 여유를 가지고 일년을 살아가게 하시며, 후회하지 않을 사랑으로 사계절을 물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대 간, 지역 간, 정치 성향 간 나누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시고, 주님 앞에 겸손한 민족, 주님을 향해 열심인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제 회복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오니, 청년 실업, 영세 자영업자, 조기 퇴직과 노인 빈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국민들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눔의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교회가 절망만 가득하던 이 땅의 소망이었던 시절의 겸손, 섬김, 열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없이 높은 예배당이 아니라 한 없이 낮은 마음이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이 됨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의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정신과 마음과 몸을 모두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매일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거룩한 치료의 기름을 부어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31일 사도행전 07:30~60, [송년] 과거를 통해 보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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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_[송년] 과거를 통해 보는 미래

사도행전 7:30~60
2017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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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한줄 요약]

스데반을 구약 성경과 과거 역사에 정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개요]

송년입니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더 알기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0.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저는 과거가 미래에 반복된다는 사실을 바둑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둑에서 지면 분한 마음에 한 판 더를 외치면서 자꾸 새로운 바둑을 많이 두려고만 했습니다. ‘내가 그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면서, 새로운 판을 두면 지금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바둑을 두게 되는데, 바둑이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지게 됩니다. 바둑을 새롭게 두더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래가 새롭지 않고, 과거의 반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엉뚱하게도 바둑 실력이 가장 많이 늘게된 계기는 새로운 판을 빨리 많이 두어서가 아니라 복기를 배우면서부터입니다. 복기란 바둑을 한 판 끝낸 다음에 지금 둔 바둑을 다시 두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난 바둑을 다시 두면서 내가 그때 왜 여기에 두었는지 생각해 보고, 상대방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달르게 전개된 것은 무엇인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바둑 실력이 늘어갑니다. 다른 사람이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기보 몇 개는 기본적으로 외웁니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도 복기를 통해서 실력을 향상 시킨다고 합니다. 요즘은 오답 노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오답 노트는 전에 틀린 문제를 따로 적어놓고 주기적으로 다시 풀어보는 노트입니다. 틀린 문제는 또 틀리기 때문입니다. 기억에서 지워진 후에 틀렸던 문제를 풀어보면 놀랄만큼 똑같이 틀립니다.

다른 측면이지만 사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이 있어납니다. 아웃도어 판매하는 매니저님한테 들었는데 등산복을 사는 사람이 또 산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등산복 한 두 벌 사면 더 안사지 않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매번 산에 갈때마다 다른 등산복 입고 가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시더라구요.

보험도 한 번 들은 사람이 또 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기 당하는 사람도 한 번 사기 당했으니까 안 당하는게 아니라 또 사기당하는 경우가 많고 이단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은 또 이단 교회를 가거나 건전하지 않은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러 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과거에 했던 일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새롭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아지 못하고 익숙한 과거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 30~53. 스데반은 과거에 정통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초창기 교회의 집사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성령에 충만했던 분이 스데반입니다. 이분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 성경, 즉 과거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내용은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기 전에 했던 마지막 설교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대하2:6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그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것이 구약 시대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구약 시대라고 해서 성전에서 제사지는면 구원을 받는게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의지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들 통하지 않고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조상들처럼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즉, 조상들도 성령을 거스렸는데 당신들도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는 단어를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성령님을 아무리 칭송해도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모욕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성령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면 됩니다.

2. 54~60. 스데반은 바울을 통해서 미래를 살았습니다

한편, 과거가 과거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열어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가장 먼저 순교한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과 은사, 그리고 인격이 너무나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과거로 묻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의 삶을 대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교회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런 상황을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내 집 마련하듯이 내 예배당을 마련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더 알아가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스데반도 그렇고 모든 분들이 번듯한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으면 무엇을 남겼을까요?

바른 믿음, 바른 생각, 바른 행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바른 믿음과 생각과 행실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집착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 믿음과 생각과 인격이 바르지 못한 것을 봅니다. 구약 시대도 그랬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우리 교회가 그냥 해산된다고 해도 남는 것이 없을까요?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건물이 아니라 계속해서 영향력을 주게 될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3. 과거를 통해 미래를 봅시다

오늘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은 우리가 좀전에 기도한 것처럼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합시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복기할 것은 철저하게 복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감옥에 넣은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현대의 이순신 장군은 또 감옥에 넣고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고 그분만이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본질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을 정립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송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과거를 바르게 성찰함으로 미래를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