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0 시작의 끝

시작의 끝

본문

(요 21:1)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요 21: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요 21: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요 21:4)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요 21: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요 2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요 21:7)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시작의 끝

“벌써 라는 말이 /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 벌써 2월” 오세영 시인은 2월을 ‘벌써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벌써’라는 말은 2월을 가리키는 별명으로 썩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한 일 없이 1월이 훌쩍지나고 2월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2월에 ‘벌써’라는 별명을 외에 다른 별명을 하나 더 붙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붙여주고 싶은 별명은 ‘시작의 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해 인사를 두 번합니다. 1월1일하고 설날에요. 12월31일이 지나고 1월1일이 지나도 본격적으로 새해가 시작되지 못합니다. 설날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설 연휴에 고향에 가서 가족과 친지를 만납니다. 직장과 단절이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를 갖춥니다. 기업인들도 설 연휴에 보너스를 조금이라고 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설 보너스를 주고나야 한숨 돌리고, 연휴가 끝나 뒤에 직원들을 몰아칠 수 있습니다. 설은 주로 2월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2월이 우리나라에서는 ‘시작의 끝’에 해당하는 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시작의 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한때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다니고 믿음이 있는 것도 같은데,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신앙인으로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시작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2월이 되었으니 시작의 끝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시작의 끝’은 언제인가? 다른 말로 신앙생활의 본격적인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다음 세 가지가 시작의 끝을 알려주는 알람입니다.

시작의 끝 1. 자신을 보는 것

첫째, 신앙생활은 자신을 보게 될 때 시작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놀라운 내용입니다.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사람의 생각을 벗어난 전개가 일어나기 때문에 놀랍습니다. 베드로가 간이 부어도 유분수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제자 노릇’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흩어진 제자를 불러모으고, 조직을 재건하려고 하려고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바쁜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매우 무례하고 반항적인 태도일 수 있습니다. ‘찬물을 끼얹는다’는 표현에 들어맞는 행동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행동은 예수님의 사역에 찬물을 끼얹는 무례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를 보면 베드로가 고향으로 내려간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이 믿음이 좋은 줄 알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오른팔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전처럼 자신만만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변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런 일은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자신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만큼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지성은 자기객관화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공부하는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너무나 많은 학문, 교양, 철학이 있습니다. 그걸 언제 다 공부해 머리 아파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십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은 사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이념의 대립이 심각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바꾸어주기 힘듭니다. 그런데 역사를 알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가 로마시대 공화정파와 황제정파의 갈등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영웅이었고 부루투스는 카이사르를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인데, 부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했습니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카이사르를 비롯한 황제정파는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고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게 되자 전권을 가진 황제가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화정파는 로마시민은 모두 평등한데 황제가 생기면 로마시민 사이에 계급이 생기고 차별이 심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공화정을 유지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겠습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청나라 군사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주전파는 죽더라도 싸우다가 죽자면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화친파는 잠시 굴욕을 참고 항복하자고 했습니다. 또, 조선시대 말기에 외국의 개방요구가 거셌을 때,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척사파는 절대 개방하지 말자고 했고, 김옥균을 비롯하 개화파는 적극적으로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은 좌파와 우파로 나우어져 있지만, 역사적으로 항상 인간의 조직은 나누어졌습니다. 공화파와 황제파, 주전파와 화친파, 척사파와 개화파로 말입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또 공통적으로 둘로 나누어져서 대립한 파벌은 실제 적보다도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미워했습니다. 그 미움이 얼마나 심했냐면 부루투스가 카이사르에게 했던 것처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웠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알게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내가 사는 이 시대를 보게 되고, 내 행동을 보게 되고, 내 생각을 보게 됩니다. 이런 자기객관화가 세상 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세상 학문의 역할은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술객들이 모세를 따라하다가 세 번째 이재앙부터 따라하지 못한 것과 비슷합니다. 생각을 조금 바꾸어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을 주지 못합니다. 그 이상이 무엇이냐면 ‘죄의 각성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깊은 각성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정말 지옥가야할만큼 죄인인가?’라는 질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 정도면 의리있고, 법도 잘 지키고, 인정있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면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2:1에서는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시작의 끝 2: 찾아오는 것

둘째, 시작의 끝은 은혜가 찾아올 때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서 익숙한 느낌을 받습니다. 거역과 반항의 기질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기와 질투, 편견과 독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만큼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것이고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믿을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우리는 본격적으로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인본주의적인 신앙관을 좋아하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믿음이 좋아야 구원 받고, 내가 열심히 기도해야 응답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이런 인간중심의 원리는 합리적이고 공평한 것 같지만, 매우 불공평하고 불합리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을 가져도 아무 불이익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고난, 고문, 살해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박해가 없는 나라에서 보험들듯이 교회 다닌 사람과 박해가 심한 나라에서 신앙생활하다가 고문에 못이겨 신앙을 부인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누가 더 믿음이 좋을까요?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까지입니다. 그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히브리서 12:2에서는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일은 없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저는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견했습니다.

후크마 교수는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전후의 넓은 의미의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진리를 찾고 신앙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역사합니다. 특히 구원의 순간에는 인간의 의지나 공로가 전혀 포함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이 역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섭리에 열린 마음으로 따르는 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단계적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계적으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한계단한계단 올라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됩니다. 아내와 저는 소위 영성사역하는 단체에 십년여를 있었습니다. 그 단체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헛된 자부심, 교만이 있었습니다. 종종 뭔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떠나지 못했습니다. 강권적으로 평택으로 오게 되면서 새롭게 구속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지금도 환난을 당하면서도 번영주의, 물질주의 신앙에 헛된 충성을 바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같이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야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 진리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작의 끝 3: 승복하는 것

셋째, 승복할 때 시작합니다. 승복한다는 말은 ‘납득하여 따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생각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납득했기 때문에 따른다는 말입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한테 줄 서라는 식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가장 힘 센 신이니까 하나님 믿어라, 하나님 안 믿으면 지옥가니까 하나님 믿어라는 식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승복한 사람이 아닙니다.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타락시킵니다. “니네를 교회 안 나오면 다 지옥 가”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아니 그런 식으로 믿음이 전달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에 겁나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더 무섭습니다.

베드로가 ‘제자 파업’하고 고향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체면이 깎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런 전개를 보면서 감동에 젖습니다. 이런 전개는 꾸며낼 수도 없습니다. 사고의 한계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직장에서 본 그 어떤 리더도 예수님 같은 분은 없었습니다. 직원이 이렇게 행동하면, 파면하거나 좌천 시킵니다. 학생이 이렇게 행동하면 낙제점을 줍니다. 자녀가 이렇게 행동하면 부모라도 괴로울 것입니다. 전적으로 삐딱한 마음으로 반항적인 행동을 한 베드로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를 용서하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대속 못지 않은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섭섭하게 하거나 내 기대를 깨뜨린 사람, 나의 좋은 기회를 망치고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살점을 뜯는 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보면 해고하거나 벌 줄 생각부터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유능하게 할 생각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능력있는 분이시고, 섬김의 인격을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가치 있는 삶입니다. 실패해도 의미가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걸으면 도중에 멈추더라도 전진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법칙을 따르는 삶은 성공해도 가치 없는 삶입니다. 그릇된 방향으로 걸으면 아무리 멀리가도 무가치합니다. 승복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어보여도 가치있는 삶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최고 힘에 세니까 하나님한테 줄러라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신는 감동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고, 인본주의 종교관을 기독교라는 단어로 포장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무늬만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강하다

룻기에서 역사의 숨은 영웅이신 예수님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숨은 영웅,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성찰, 자기 객관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체에 빠지기 쉽습니다. 양심이 악한 사람은 나쁜 짓을 해도 담대한 반면, 양심이 예민한 사람은 작은 죄에도 절망하기 쉽습니다. 양심이 주는 경고를 무시하면 안되겠지만, 압도적인 의로 우리를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보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영역은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시작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2월에 우리 신앙을 돌아봅시다. 내 자신을 보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인도에 열려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승복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