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서 기뻐하자

본문

하박국 3:16~19 / 2018년 09월 23일 주일 설교

(합 3: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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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한줄 요약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일을 겪을 때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경륜을 알기 때문에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개요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한가위이기에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할 거리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가 그런 상황에서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0. 기뻐할 일 없는데 기뻐하기

추석이지만 어느 해 추석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내려가거나 가족 모임에 가지 않겠다고 한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고, 취업이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려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혼 혹은 출산 등에 관해서 걱정을 가장한 참견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 현상을 보면서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낯설기도 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뭔가 사회가 이상해 지는 것 같고 삭막해져 가는 것 같아서 낯설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회에서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1. 새로운 일은 없다

먼저, 새로운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당황, 공포 때문입니다.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당황,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새로운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는 자는 과거를 돌이킬지어다. 인간사는 선대의 그것을 닮게 되나니. 이는 그 사건들이 그때 살던 사람이든 지금 사는 사람이든 동일한 성정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고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그로써 그것들은 같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근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2015년에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중에서 두번째로 많은 가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손녀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 우리나라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만 함께 사는 핵가족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혼자 사는 가정이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는 혼자 사는 가정이 일반적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지만 통계로는 그것이 가장 많은 가정입니다.

나 혼자 사는 가정이 많아진 것이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일이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1990년대에 이미 1인 가구가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27.2%인데, 일본은 2010년에 31%를 넘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덴마크나 노르웨이 등은 이미 40%를 넘어선 곳도 있다고 합니다. [출처] 연합뉴스, 20130222.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우리에게는 새롭지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보면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동성애 문제도 비슷합니다. 요즘 부쩍 동성애 관련 뉴스가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동성애 애기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도 우리사회에서는 낯선 일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된지 오래입니다. 새로운 사회 현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 로마서에도 로마 시대의 동성애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동성애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사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이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반복될 뿐입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 동성애 관련 문제가 발생하는 것 등 사회 문제는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1인 가구가 거의 없습니다. 대가족이 모여삽니다. 식구가 많아야 농사 짓고 일하기 편합니다. 주거생활비도 적게 듭니다. 서로 불편한 일이 있지만, 먹고 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해지고 돈 버는 방법도 농사에서 벗어나면서 각자 떨어져 살게 됩니다.

동성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성애도 행하게 됩니다. 구약 시대 소돔과 고모라가 사치스런 도시였습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가 문제가 되는 나라는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나라들입니다. 더불어 동성애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 포함된 불신앙과 영적 타락 현상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감사하게도 우리나라는 극한의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이 최고로 잘사는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황하고 놀랍니다. 그럴 때 다른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길을 갔는지를요. 잘 살게 되면 어떤 사회 현상이 일어나고 그 결과가 어떤지를 말입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우리나라 대형 교회가 어떤 길을 갈 것인지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천주교가 잘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더 타락한 모습을 보여 줄 것입니다. 천주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이유는 수도원 운동 때문입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이 수도원에서 청빈하게 신앙을 지켰고 그게 천주교회에 흘러들어가서 천주교의 생명을 유지시켰습니다. 중세 이후로는 수도원도 타락해서 하나님은 종교 개혁을 통해서 개신교를 분리시키셨습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 교회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으니까 당황하지 말고, 미리 있었던 일을 잘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진실한 신앙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고 따라하자는 말입니다.

2. 가장 소중한 것을 갖자

둘째,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나게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언제까지나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많은 것을 잃어버려도 가장 소중한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가가 우리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하려는 시기였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나라는 망해가고 경제적으로 피폐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17절을 보면 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정확하게는 기뻐했다고 나옵니다. 하박국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진 것이 없는데로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18절입니다.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이유에 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박국이 고민했던 이유는 자기 민족이 외국의 침입을 방아서 멸망당하게 되었고, 고통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런 위기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앞 부분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 민족이 이렇게 고통당해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남유다도 타락했지만, 바벨론도 타락했는데 왜 그 타락한 바벨론에게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남유다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남유다를 심판하는 도구가 바벨론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심판의 도구였던 바벨론도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지키보기만 하고 아무 일도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섭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이 16절입니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나님은 더 악한 사람들을 덜 악한 사람들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경중을 가려서 심판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깨끗해지고 선해지도록 유도하십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하박국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안다고 하고 체험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을 해야 알 수 있는데 인정을 안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사람, 기적을 체험했다는 사람을 만나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기적이나 기도 응답이 많이 필요한게 아니었습니다. 확실한 한 번이면 족합니다. 확실하게 한 번 체험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집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은사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 없습니다. 죄의 각성이 없으면 절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알면 모든 의문과 걱정이 해결됩니다.

가족들을 챙기는 것보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데 더 힘을 쏟아야 했다. 멋진 순간을 만나더라도 폰카나 콤팩트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보다 꼭 한 템포 느렸다. 거창한 장비를 꺼내고 노출을 조절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전문가용 장비를 가진 내가 자동모드로 사진을 찍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섬주섬 장비를 꺼내고 세팅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마음이 급한 가족들은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가족을 챙기기보다는 장비를 챙겼고, 추억을 남기기보다는 근육통만 얻었다. 그러나 여행 전에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읽었더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추억이지 많은 장비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소중한 물건은 그 개수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책이 있다. ‘집에 불이 난다면, 당신은 무엇을 구해내겠습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을 시작으로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세상에 나왔다. 뉴욕에 살던 디자이너 포스터 허팅턴은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이 질문을 생각해냈다. 각자의 리스트를 내놓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버닝하우스닷컴’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중략) 처음 이 질문을 생각했을 때 허팅턴 자신의 목록은 18개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 매달린 6개월 만에 그 목록은 2개만 남았다.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내린 결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것을 갖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허핑턴 포스트 20150203

재미있는 사실은 나이 어린 세대들은 아이폰, 노트북, 외장하드 등을 골랐고, 나이든 세대들은 주로 필름, 일기, 편지, 수첩 등을 선택했다. 품목은 확연히 차이가 나지만 그 기능은 거의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추억’을 담는 기능 말이다. 중요한 것은 ‘추억’이지 가격이 아니었다.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옷이든 신발이든 전자제품이든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 마시고, 좋은 것 하나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결혼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한 명하고 결혼해서 그 사람하고 영원히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고 방식입니다. 소중한 것이 알면, 소중한지 않은 것을 잃어버려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3. 높은 곳에서 보자

세번째, 아무 것도 없는데 기뻐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보는 시야가 필요합니다. 생각의 높이가 높아져야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에 관해서 시간표가 있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야가 달라졌습니다. 고차원적인 시야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명이나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나 살펴보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삶을 살아도 보는 시야가 낮을 수가 있고 높을 수가 있습니다. 시야가 높으면 멀리보고 오래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고 하면, 먼저 씨를 땅에 심습니다. 씨가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씨를 잃어버려야 풍성한 추수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시야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안타까운 부분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맞추어서 시야를 높이지 않아서입니다. 자기 수준으로 성경을 낮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상황을 성경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것을 해석할 때 북왕국은 북한, 남왕국은 남한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합당한 해석은 북왕국은 이단 교회, 남왕국은 정통 교회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단 교회가 앞으로 정통 교회를 위합할 정도로 커질지 모릅니다. 정통 교회 안에도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다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단 교회에는 구원의 복음이 없고,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정통 교회도 쇠퇴하지만 그 안에는 복음을 계승한 사람들이 세상 끝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복음을 아는 사람은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이길 수 없는 복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말 장난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실체로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생각이 높은 사람은 눈 앞의 비극에 앞도 당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는 “영혼을 파는 자는 세상을 다 얻어도 덧없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청교도와는 반대의 길을 간 천주교인이었지만, 나름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사형 집행관에게 “힘을 내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고 말하고, 단두대에 머리를 쑥 내밀면서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며 수염을 조심하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사람은 신앙인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만큼 생각과 마음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추석에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고,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높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룻기에 나타나는 구속의 역사_김영철 목사

룻기 / 2018년 9월 16일 주일 설교

선으로 보는 구속의 역사(김영철 저) 247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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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좇아가서 소망을 잡아라

창세기 9:14~15 / 2018년 09월 09일 주일 설교

본문

(창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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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창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한줄 요약

무지개는 붙잡을 수 없는 곳에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증언해 줍니다. 꿈을 쫓는 삶은 허탈해지지만, 소망을 품은 인생은 기쁨을 누립니다.

개요

무지개는 아름답지만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무지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0. 무지개같은 꿈

교리 설교를 하는 도중이지만, 지루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중간에 다른 설교를 끼워넣어서 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인생관 혹은 사고방식에 관해서 주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편하게 들으시면 됩니다.무지개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어렸을 때는 무지개를 제법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지개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 전기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어릴 때의 얘기입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저 무지개를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친구들이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나폴레옹만은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잡으려고 무지개를 보고 뛰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뛰었습니다. 무지개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먼 길을 달려 기진맥진하여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친구들이 비웃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나는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먼 길을 달려갈 수 있었다.”

나폴레옹 뿐만 아니라 무지개를 본 사람은 누구나 무지개를 가까이 가거 보거나 만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간절하게 바라는 꿈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그랬던 것처럼 무지개를 잡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지개같다’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인 동시에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오늘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를 통해서 알려주시려고 한 교훈 세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

첫째, 무지개 언약은 다른 사람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라는 교훈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정신적인 충격을 치료하려고 하신 약속입니다. 의학과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몸에 난 상처 뿐만 아니라 정신에 난 상처도 상처로 인정합니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 충격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버지니아주 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퇴역군인의 40%가 우울증을, 25%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20%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하루 22명의 참전용사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구요. 사회 적응도 어려워서 2012년 퇴역군인 6만 2천 여 명이 노숙을 했는데. 이는 전체 미국 성인 노숙인의 13%에 이르는 수준입니다. [출처] KBS 뉴스, 2014.4.8

군인이 아니지만, 소녀시대의 써니가 3살 때 이라크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한 것은 물론,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을 위험에 놓인다거나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비만 오면 정신적 충격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비가 홍수 때처럼 오랫동안 내리지는 않더라도 두려움을 가졌을 법합니다.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주신 이유는 무지개가 비가 그친 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치고 나타나는 무지개를 보면서 노아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사건이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없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 살펴보면 어렸을 때의 경험이 크건 작건 영향을 끼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한국인이 김치를 좋아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 알게 모르게 김치를 맛보았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 외국에 입양된 사람들은 겉모습은 한국인이어도 입맛은 외국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헤아리는 섬세한 분이십니다. 이런 점은 다른 종교에서 보여주는 신과는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달라집니다.요즘에는 사람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소모품 취급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기 불편하니까 도로를 개선해 달라고 청원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참고 다니지 왜 그래.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하나님과는 다른 성품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일반적인 인간 사이의 간격이 클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인간과 장애인의 차이가 클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가 더 큽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장애인의 호소를 무시하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냉철하게 그것이 사실인지 점검해 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병폐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적용이 잘못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호소를 들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듣자고 설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맞아 맞아”하면서 각자가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들으려고 노력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붙들고 당신 왜 내 호소를 안들어 하는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스도인은 내가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들어야지 라고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호소를 들으라고 강요할 것입니다.

2. 꿈을 좇아가라 그러나

두번째로, 무지개 언약은 꿈의 실상을 알려줍니다. 무지개가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체를 잡기 어렵습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힐링을 주제로 하는 TV프로그램에서 한 철학자가 연기자 지망생에게 조언을 해주는걸 들었다. 그 철학자는 당신이 진정으로 배우를 원한다면 꿈을 버리지 말고 더 노력을 해야 하며 그리고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끈기가 부족해서 일수도 있으니 대학로든 어디든 당신이 연기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론 짧은 TV강연에서 그 철학자의 조언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난 그 조언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자칫 오해를 하면 세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을 덜했거나 끈기가 없어서일 꺼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 영 마음이 불편했다. …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난 영화계에 입문해서 마흔이 넘어서야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난 꿈을 버리지 않고 영화계에서 끈기 있게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가 되었다고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야 하는데 한번도 후배나 동료들에게 내 사례를 들어서 더 노력하고 끈기 있게 꿈을 이뤄나가라고 조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나는 ‘꿈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개그맨지망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을 웃기는걸 좋아했고 대학 다니면서도 개그맨의 꿈을 키워왔다. 그래서 대학 때는 개그오디션이나 개그맨공채시험에도 응시하려고 했으나 코미디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았다. [출처]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한국일보. 014.2.13

위의 글은 영화계에서 나름 성공한 축에 속한 분이 쓴 글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공했으니까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본인의 꿈은 그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꿈을 이루지 못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드물게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도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쓴 글을 보았습니다. “가장 허무할 때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해서 이룬 것이 진짜 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할 때이다.”

정말 드물게 자기가 원했던 꿈을 이룬 경우가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버나드 쇼의 고백에 이르릅니다.

내게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고, 하나는 마음대로 된 이후에 오는 절망이다(버나드 쇼).

큰 꿈을 꾸라는 압력을 받고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루었지만, 진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래서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을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박명수가 “꿈은 없구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했답니다. 저는 공감하지 않지만, 그 말에 공감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박명수의 말에 공감하지는 않지만 씁쓸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니까 큰 꿈을 갖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착실하게 그것을 준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이 꿈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것입니다. 의사, 판사, 회계사 등 사자 들어간 직업을 원합니다. 적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공부 잘해서 그런 직업을 선택합니다. 남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스스로 어떤 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꿈을 좇지 말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을 일을 찾고 그것을 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지개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형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꿈도 비슷합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정말 이것이 최고의 삶일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세상의 한편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좌절과 낙심으로 가득차 있고,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의혹과 당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꿈은 아무에게도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지개처럼 바라볼 때는 황홀하지만 다가갈수록 형체가 없습니다.

3. 소망을 붙잡자

세번째로, 무지개 언약은 소망이 기쁨을 준다고 알려줍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는 동안에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가 그친 후에 나타난 무지개를 보면서 큰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가 내릴 때 느꼈던 공포감 이상의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무지개는 일종의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자체의 가치보다는 외적으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재 가장 비싼 그림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님 초상화더라구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를 다시 썼다. 500여년 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15일(현지시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천30만달러(약 4천978억9천만원)에 낙찰됐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긴급 보도했다. (중략) 지금은 최고의 몸값을 받는 자리에 있지만, 그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럽 귀족들의 손을 거치며 심한 덧칠 등으로 손상됐고,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수백 년을 떠돌았다. [출처] 연합뉴스, 2017.11.16

▣ 크리스티 뉴욕 2017년 11월 전후 & 현대 미술품

그림이 훼손이 심했고, 컴퓨터 시대에 사진을 찍어서 복사하기도 쉽습니다. 왜 이 그림이 이렇게 비쌀까요? 그림 자체의 가치가 아닙니다. 이 그림에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싼 것입니다. 내 자녀가 특별합니까? 내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특별한 겁니다.무지개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를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무지개는 자연현상으로 일종의 허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 무지개를 쫓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무지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꿈이 깨어지고 목표를 얻지 못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꿈이라는 것은 무지개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꿈은 멀리서 바라볼 때 기쁜 것이지 가까지 다가갈수록 좌절과 낙심, 그리고 괴로움만 더해 줍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잡지 못했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지개는 잡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증표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호소를 들으셨고 지금도 우리의 호소를 듣고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그러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중보적인 역할을 합니다.

무지개를 잡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언제나 기쁨이 슬픔을 능가합니다. 슬픔이 더 크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슬픔보다 기쁨이 언제나 더 큽니다. 마치 튜브를 물에 넣으면 튜브가 물에 뜨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실패에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산 사람도 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바로 이것을 알려줍니다. 성공도 하고 하나님도 만나면 가장 좋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공평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지혜로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저울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공의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무지개 언약은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물 외에 다른 것으로 심판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인데 가을이 오면 농부는 추수를 합니다.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의 과일을 추수합니다. 직장인들은 연말이 되면 연말 결산을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봅니다. 한 해 농사 혹은 한 해 일한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모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심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무지개는 우리에게 일종의 테스트가 됩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를 말입니다.

꿈은 이루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꾸라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도 이루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간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꿈이 깨어졌어도 성공하지 못했어도 좌절과 낙담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소망을 가지십시오. 꿈이 아니라 소망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계절도 변하고 인생도 변한다

본문

창세기 08:22 / 2018년 09월 02일 주일 설교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설교 듣기

한줄 요약

계절의 변화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고 이러한 변화를 주셨습니다.

개요

9월입니다. 길었던 여름도 이제 끝을 보입니다. 릴케라는 시인은 이렇게 여름의 끝을 노래했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출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중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계절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번 여름이 너무 덥고 길다보니까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겨울이 무척 추우면 겨울이 없었으면 좋겠다 혹은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계절이 변하게 하셨을까요? 여름과 겨울을 주셨을까요?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0. 변화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 계절의 변화를 주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첫째, 활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이 활기가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도 많고 문화도 발달했습니다. 여름이 거의 대부분인 중동 지역에는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가 있습니다.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삶이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남쪽에 위치한 스페인도 낮잠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개선하려는 논의가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통상 오전 9시에 업무(일과)를 시작해 정오께 짧은 커피타임을 갖고 오후 2시까지 일한 뒤 4~5시까지 이어지는 긴 점심식사를 즐긴다. 이어 업무에 복귀해 오후 8시 또는 더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근로 패턴이 이렇다보니 하루 11시간가량을 회사에 머물게 된다. 늦은 귀가로 저녁은 오후 9시께 먹게 되고,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줄며,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드는 이들이 많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삶이 늘어지고 지루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노인과 청년을 구분하는 법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면 청년이고 하던 일만 계속하면 노인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될 때, 요금이 비싸다고 바꾸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카카오톡을 주변 사람들이 다 쓰니까 뒤늦게 스마트폰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좀 과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어릴 적이 동네에 전화가 몇 대 없어서 공동으로 썼습니다. 그때는 집집마다 전화기를 놓는다는 걸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설치비도 비쌌고 전화요금도 아까워서 놓을 생각을 못했습니다.

시대가 지나서 집집마다 전화기를 하나씩 놓았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집에 전화 있는데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고 주장하던 분들이 기억납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나왔고 여지없이 스마트폰이 왜 필요하냐는 분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구입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변화를 따라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바다에 온갖 쓰레기가 흘러드는데 썩지 않는 이유는 달이 바다를 끌어당겨서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게 해서입니다. 바다는 계절은 없지만, 밀물 썰물이 있어서 활기를 유지합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데 변화를 계속 따라갈 수 있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만 포기하면 나태해지고 활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변화를 주십니다. 그 변화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제 인생에는 3년에서 5년 정도 주기로 계절이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변화를 잘 발견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2. 둘째,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문제가 있는 사람은 뭔가 변화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저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더 잘사는 경우를 봅니다. 저야 어차피 돈을 벌려고 목회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질투가 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야 살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잘나가는 사람, 못 나가는 사람 정해지면 변화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 전에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였습니다. 오바마의 인생을 보면 여름과 겨울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살때 어머니가 케냐인 아버지와 이혼했습니다. 다시 인도네시안인하고 결혼해서 인도네시아에서 10살까지 살다가 미국에 와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졸업 후 시카고에서 빈민을 위한 인권 변호사를 하다가 다시 하버드 대학원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에 입문해서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오바마를 보면서 저도 위로를 받고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미국의 흑인, 빈민들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성공할 기회가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계속 차별받고 돈도 없이 살아야 한다면 그들이 범죄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살아갈 힘을 잃고, 소망이 없는 사회는 범좌가 증가합니다.

소망은 현재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변화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소망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네 인생을 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돈이 없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죽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더라구요. 죽고 싶다라고 말하지 말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라.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이렇게 바꾸어서 이야기 하세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변화된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죽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으면 이렇게 바꾸십시오. 하나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은 변화에 응답하십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자면, 오바마가 똑똑하지만 본인이 잘나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이 기회를 주셨고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또 열렬한 지지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마의 삶에 좋은 계절을 주지 않으셨으면 그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에 계절이 있다는 말은 우리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한 섭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노력이나 능력과 상관 없이 좋은 기회가 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3. 셋째,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그 사이 즉, 계절이 변할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할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치 여름날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을 옮기느라 일을 쉬게 되거나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 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시간에 그런 쉬는 시간을 마련해 주십니다.

버포드 텔레비전사의 튼튼하고도 눈부신 성장으로 기대한 부를 축적한 44세의 밥 버포드에게 성공의 공포가 찾아왔다. 내 인생에 목적을 부여해주는 가치기준은 무엇인가? 내 삶을 이끌어 갈 중요한 비전은 무엇인가? 가장 유용한 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황하며 고민하던 밥 버포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빛이요 인도자로 영접하였고 그분께 최고의 충성을 드리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그의 상속자요 계승자인 전도가 유망한 청년 외아들 로스가 리오그란데 강을 헤엄쳐서 건너던 중 익사하였고 넉달 후 강 하류 16㎞ 지점에서 로스의 시신을 찾게된다. 아들의 죽음은 밥 버포드의 인생 전반기를 마감케 하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매달리며 아들 로스가 지금 살고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한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할 일을 합시다. 생각합시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이 말씀은 8장 20절에서 노아를 제사를 받으신 후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보류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통해서 구원 받을 사람이 없어질 때 이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지집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재앙이 일어나는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쉬는 시간을 주는 이유는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교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2

본문

사도행전 7:46~55 / 2018년 08월 26일 주일 설교

(행 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행 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행 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행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설교 듣기

핵심 구절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한줄 요약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개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자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0. 무엇이 영원할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끊임 없이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은 영원한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변화는 영원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변화하게 하는 분은 영원하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의 뒤편에서 변화를 주도하고 섭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변화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사는가?” 이것은 시인 하이네의 물음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스데빈 집사를 통해서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 1. 성전
스데반 집사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는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자 듣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분노했느냐면 성전을 절대적인 가치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거기에 기댑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지만, 돈 말고도 집에 집착하는 사람, 자동차에 집착하는 사람, 컴퓨터 게임, 수집 취미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실제로는 가치가 없을 때 생깁니다. 집, 자동차, 컴퓨터, 취미품이 영원한 가치는 없지 않습니까?

위에 것과 같이 놓고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그런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예배당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종교적인 건물이니까 아무래도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형적인 것은 도구이고 수단이지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물질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이 빠집니다. ‘노틀담 드 파리’은 노틀담 성당에서 일어난 추악한 스캔들을 보여줍니다. 노틀담 성당은 대주교좌 성당이고 중세 고딕 건축 양식의 정수라는 건축물입니다. 우아하고 웅장한 성당입니다. 보기만 해도 신앙심이 일어날 것 같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 같은 성당.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 없이 거룩할 것 같은데, 사실을 일반인보다 못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임 신부 프롤로도 근위대장 페뷔스도 욕정에 이끌려 범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보기에 추악한 곱추 콰지모도가 그나마 양심적입니다.

큰 건축물을 보고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웅장한 건축물을 지어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신앙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율법주의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고정관념이 그런 경우입니다. 어렸을 때 갖게 된 고정관념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군대에 관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군대가면 고생하고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고정관념을 깨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겨울에 눈을 치우는 일을 민간인에게 위탁하고 병사들이 평일에 외출했다가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월급도 현재 병장 월급이 40만 6천원입니다.

“고정관념이 강한 분들은 이게 무슨 군대야”라고 반발하시더라구요. “내가 군대 있을 때는”으로 옛날 얘기를 합니다.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돈도 거의 못받는 수준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군대는 출퇴근이 가능하거나 주말에 집에 가는 군대로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군대가 지나치게 엄격한 건데 그게 고정관념이 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통행금지가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전에 통행금지 없애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간첩 세상이 된다고 결사 반대하는 사람들이 엄첨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통행금지가 비정상인데 그게 고정관념이 된 거죠. 국기 하강식은 어떻습니까? 걸어가다가도 멈춰야 했습니다. 그거 안하게 되었을 때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생각이든 고정관념이 되어서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하나씩 하나씩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은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고정관념인 율법주의를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를 믿지 않고 기독교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기독교주의가 문제인 이유는 진짜 지켜야 하는 것과 매우 혼동된다는 점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권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은 안지키고 율법주의만 지킵니다.

(행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지금도 옛날이 좋았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분들이 과거로 돌아가면 그런 말을 할까요? 아파도 건강보험이 없는 시대라 병원 못가고, 방 한 칸에서 식구가 몰려자고, 목욕도 제대로 못했던 상황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까요? 왜 옛날이 좋았다고 하냐면 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며 살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키며 산다고 착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면 도저히 못 지키겠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지키지 않으니까 못지키겠다는 말이 안나옵니다. 지킬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으로 설명하면 교회에서 주일 성수, 헌금, 봉사 등을 요구하면 힘들지만 할 만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 좋은 신앙인이라고 칭찬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요구는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삶은 살지 않아요. 본질적인 삶은 살지 않고 비슷한 삶을 살면서 신앙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주의입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순장도 하는 청년인데, 집에서는 막나가는 사람을 여러 명 보았습니다. 사실은 순장 안하고 교회와 집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줄이는게 더 바람직합니다. ‘기독교주의자’가 되지 말고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교회를 오래 다닌 친구와 황우석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아무래도 황우석 교수에 대한 철썩 같은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황우석 교수는 그래도 세계적인 과학자인데 언론에서 그렇게 죽여서야 되겠냐고, 그러면 우리나라도 같이 자멸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하였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장은 아픔이 있더라도 투명한 진실에 기반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신뢰를 더 높이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친구가 보수적인 기독교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대뜸 다음과 같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원래 너의 신앙적 기준이라면 황우석 교수가 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오히려 반대해야 맞는 거 아니니?” 라고 말해주자, 그 친구는 나의 갑작스런 이 질문에 흠칫 놀라면서 잠시 생각해보더니 “그…. 그렇지”라고 얼버무리듯 얘기한 적이 있다. [출처]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475

현실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없는 것을 미화하고 절대화합니다. 과거가 좋았다고 하고 어디 가면 행복할 거라고 상상합니다. 과거에 머물고 상상 속에서 삽니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변화에 몸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영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잡히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변화무쌍하고 잡히지 않는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지난 주에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들 보면서 가슴에 와닿았던 말은 이것입니다. “살아 있어줘 고맙다.” 92세 이금섬씨(남측)과 북측에서 온 71세 아들 리상철씨를 만나자 마자 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금섬씨는 60년 만에 만난 아들을 향해 “고생했다” “살아있어줘 고맙다”며 애틋한 부정을 표현했습니다. 부자 간의 정, 사랑은 60년의 시간을 넘어서 이어졌습니다.

이와같이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아직 마음이 연결되지 않았다면 교회가 건설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를 감동하시기에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합니다. 교회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마음이 영원하기에 교회도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는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의 영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00. 그리스도인으로 살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줘 고맙다”고 하시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고통이 녹아들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이 시대에 구속사가 필요한 이유(김영철 목사)

이번주는 평택 두란노 교회 김영철 목사님께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3:33~43, 2018년 08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눅 23: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눅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눅 23: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눅 23: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눅 23: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눅 23: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눅 23: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눅 23: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눅 23: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눅 23: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눅 23: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교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1

# 본문

사도행전 7:55~60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핵심 구절(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 설교 듣기

# 한줄 요약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0. 예수님은 길이고 문이다

교회 역사에는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을 보내서 오류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현대에 다수의 기독교인이 잘못알고 있는 가르침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조금씩 강조점은 달랐지만 반복된 일입니다.

4세기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이단 사상을 만들어 교회를 부패시킬 때 아타나시우스란 사람이 나와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아다나시우스 때문입니다.

5세기 초에 펠라기우스가 거짓 교리를 유포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워주셨습니다.어거스틴의 책은 지금 박사학위를 몇 개 받은 사람이 읽어도 위대한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된 사람이 그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참으로 위대합니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거짓 교리를 유포할 때에 하나님은 마틴 루터와 칼빈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목숨 걸고 진리를 지킨 것입니다. 1521년 보름스 칙령은 루터를 누가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목숨 걸고 우리가 믿는 은혜의 복음을 밝혀냈습니다.1

8세기 영국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리를 일으키시고 조지 휫필드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워 복음을 전하고 영국 사람들이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침례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곤두박질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스펄젼 목사님을 세워주셔서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종교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을 만나러 가는 유일한 길(요 14:6)이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요 10:7)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중요한 건 “하나님을 믿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동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이 존재한다” 혹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이 기독교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의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란 죄와 심판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것으로 인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적으로 기독교인은 죄의 각성을 통해서 양심이 살아납니다. 죄를 지어도 괴롭지 않던 사람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죽은 뒤에 막연하게 좋은 곳에 갈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져 살던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난을 감수하고 살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이끌어서 신비롭게 상호작용합니다. 인간의 측면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서 살 길을 찾아가다가 예수님을 감격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고 간증을 듣기도 했지만, 죄와 심판의 각성이 일어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기본적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지는데, 자기객관화는 커녕 유아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돌아와서 간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눅 16:30~31)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인간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믿음은 정보 습득, 교리 이해,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던가 천국과 지옥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오늘 본문 조금 위에 보면,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유는 성경을 바르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바르게 본 사람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이 알려주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식과 예수 의식을 분간 못할 정도로,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통해 자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광신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사상이나 자기 암시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을 붙잡고 인도하시던 사상 가장 강렬한 인격이신 예수에게 사랑을 받고 열애(熱愛)하고 있다. 열 번 죽어도 아쉬운 마음뿐이다. – 예수칼럼 김준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스데반이 본 환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옆에 계신 거니까 비서같은 역할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은 보좌 옆입니다. 비서는 같은 보좌 옆에 있을 수 없고 아래에 있습니다. 동등한 신분만 보좌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인 이유도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탄이 가장 알리기 싫어하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믿으면 악한 영이 파고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연 구원받은 자인가를 괴롭게 고민하던 존 번연은 어느 날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 갑자기 어떤 생각이 제 양심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이 제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네 의는 하늘에 있느니라.” 그리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모습이 영혼의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다리를 꽁꽁 묶고 있던 사슬이 풀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2.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예수님도 사랑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스데반도 최후에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무분별한 분노를 터뜨리거나 자기 중심적인 광기를 보여주는 교인이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려고 이익 단체처럼 시위를 하고 정치 집단처럼 선동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두려움 때문에 갖는 존경심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갖게 된 존경심을 신앙으로 포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합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존경심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았다고 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요즘 교회에서 가장 보기 힘든 사람이 기독교인일지도 모릅니다.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따르자고 주장하고 손해보더라도 사랑이 우선이라고 외치면, 스데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박해받은 것처럼 박해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회색 지대에 숨어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 코로 숨 쉬고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을 찾아 역사의 정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수채 구멍(말구유)으로 불청객처럼 오셨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찾아 물 한 잔을 청하여 그렇게도 낮게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만남을 위하여 닫혀진 문에 노크를 시도하신다. 예수는 전지 전능하신 분. 남을 구원할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무능했고 천군 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으나 나 위해 무능한 사형수가 되셨다. – 예수칼럼

3. 예수님은 길이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인 상태입니다.

(엡 2:1~5)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영으로 기독교인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기도하지 않고 확신 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늘과 지상이 구분이 없어집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사는가?” 이것은 시인 하이네의 물음이다. 이 물음 속에 종교와 철학과 도덕의 물음의 원점이 있는 것 같다. 누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나이다. 그런고로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는 평안이 없었나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고백이다. 예수를 모르고는 나도, 하나님도 모른다(파스칼).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요 14:9). – 예수칼럼 김준곤

00. 예수님의 제자, 스데반

스데반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한 기도가 증거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비로소 제자인 것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처음에 언급했던 18세기 기독교의 위기를 구한 조지 휫필드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닳아 없어지는 사람이 됩시다.

찬양과경배. 195 언제나 내 모습

[교리] 십자가의 도 2

# 본문

고린도전서 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한줄 요약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도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 0. 선택의 어려움, 필터가 필요

우리나라에는 ‘돌잡이’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돌이 된 아이 앞에 쌀, 돈, 활, 붓, 실을 놔두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장래를 점치는 풍습입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놓아서 선택 범위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미신적인 풍습이라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우리 인생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조안 롤링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선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선택과 관련해서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습니다. 선택 장애입니다. 무언가를 선택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쇼핑을 하려고 해도 쇼핑몰이 매우 많고, 뉴스를 보려고 해도 인터넷에 가짜 뉴스가 넘칩니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도 선택하기가 힘듭니다.홈쇼핑에 대해서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이 홈쇼핑을 주로 이용하는 것 같은데 홈쇼핑은 어느 정도 선별을 해서 파는 것이라 그런지 대체로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것 같더군요. 전에는 아내가 홈쇼핑으로 무언가를 사는 걸 싫어했는데 요새는 오히려 이게 시간 절약인 것 같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비슷한 선택 장애가 생겼습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방송, 홈페이지, 유튜브 등으로 설교와 성경 공부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두어서 선택의 범위를 줄여야 합니다. 정수기에 필터를 설치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터를 통과한 물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물은 선택 사항에 포함시키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강력 필터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기독교는 깨끗한 기독교이고 통과하지 못한 기독교는 오염된 기독교라고 보면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기독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십자가라는 필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히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서 하나님이 걸러내려고 하셨던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기적의 필터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걸러내려고 하셨던 첫번째 요소는 능력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이 표적을 구했다는 말은 기적을 구했다는 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적을 구하는게 왜 잘못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적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능력만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것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기적은 수단이고 부수적이었습니다. 목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금식하면 일이 형통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가르침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일이 형통하고 문제가 해결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기적만을 바라보면 일상이 무너집니다.

>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을 가는데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더니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대박이 난 농부는 그 때부터 농사는 접어둔 채 하루종일 나무 밑둥만을 바라보며 토끼가 와서 부딪혀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농부는 그 후 한마리의 토끼도 얻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밭에 가 보았지만 이미 잡초가 우거져 있었고 결국 농부는 일년 농사를 망쳤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저는 기적 같은 기도 응답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응답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기도 응답이 인생을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앙 명언이 있습니다.

> 내가 기도할 때 우연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 우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연으로 가장하여 기적을 주십니다. 우연을 지나치게 기대하면 오히려 우연이 없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을 믿어야 하지만 기적만을 바라서는 안되고,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지만 기도와 금식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기적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겉보기에 좋아보이지만 신앙에 큰 해를 끼칩니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저는 이 명언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돕는자를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한 가지 말만 추가하면 완전합니다.

> 하나님은 의를 위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말입니다.

## 2. 지혜의 필터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걸러내려고 하셨던 두번째 요소는 지혜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사람을 파악할 때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용어의 정의를 묻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목사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기독교인에게 기독교가 무슨 종교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평소 생각이 깊지 않고 기본기가 없다면 뻔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관점에서 용어를 재정의하고 거기에 맞는 통찰을 보여줘야 실력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사유의 깊이를 측정하기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14년에 출간되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정의가 무엇이냐는 간단한 질문을 심도있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일수록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각이 깊은 사람을 구분하기 좋습니다.

위의 방법을 활용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란 무엇일까요? 돈을 잘 벌게 하는 것, 성공하게 하는 것,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용어는 달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지혜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이 세상을 잘 먹고 잘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데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이후까지 생각을 넓히면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전 생애를 선교사역으로 보내고 귀국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어 고국인 미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갔다가 오는 미국의 대통령과 한 배를 타고 같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배에서 내리자 군악대의 예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붉은 카펫이 깔렸으며, 환영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이 먼저 항만을 빠져 나간 후에 맨 나중에 한평생 아프리카에서 고독과 싸우며 복음을 선포한 노 선교사가 배에서 내렸으나 그때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예포 소리도, 주단도 펴지지 않았다. 그는 쓸쓸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빠져 나오면서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하나님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대통령은 그렇게 열열하게 환영을 받는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평생을 바치고 늙은 몸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이 이토록 초라하고 고독해야 합니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서 항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석양의 구름 사이로 찬란한 빛살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선교사를 향하여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그날에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아니라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붉은 카펫이 아니라 황금과 유리 길을 깔고 내가 너를 친히 마중나가 줄 터이니,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것을 잊지 말라”는 음성이었다.

> 에콰도르 와다니 족을 전도하기 위해 갔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은 미련한 것 같지만 지혜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이 세상만을 범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딸에게 “잘 먹고 잘 살려는 목적으로만 교회 다니면 번영주의자다”라고 말했더니 딸 아이가 “아빠 그러면 난 번영주의자인가 봐”라고 말하더라구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번영주의자야. 베드로나 요한도 그랬어. 하지만, 점점 변화되었어.”라고 말입니다.

## 3. 십자가의 필터

반대로 하나님이 남기려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본문에서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아담, 아브라함, 다윗 등 위대한 성경 인물들도 자기 힘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갔습니다.

십자가의 필터는 정직한 사람을 통과시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은 이 필터를 통과합니다. 복음의 역설입니다. 복음은 엄격한 것같지만 자비롭고, 어려운 것 같지만 쉽습니다.

## 00.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누구나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 해롤드 브라운은 지옥을 ‘인간적인 의지의 자유가 가져다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기념품’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 때문에 실존하게 된 것이다. 루이스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종류의 집단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뜻대로 되리라”고 선언하신다.

> 런던에 있는 성 바울 성당에 가면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란 매우 감동적이고 매력적인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손에 등불을 켜들고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 그림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 화가에게 예수님께서 문빗장을 여시는 모습으로 그리도록 당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화가는 “문고리가 안쪽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너그러우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걸맞지 않다. 또 한편으로 그 어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괴롭히기 좋아하신다는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와 동행하든지 아니면 그를 멀리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옥 / 해롤드 브라이슨

이 세상만을 바라보는 기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찬양과경배. 101 은혜로만 들어가네

[교리] 십자가의 도

# 본문

고린도전서 1:18~24

(고전 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한줄 요약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도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 0. 원하는 것은 얻기 위해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 바디매오를 만났을 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질문하시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가 왔는데 망설이면 어떻게 그것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생각과 다른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왕이 고종인데 고종이 12살에 왕이 되어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의 친척들이 세도를 부려서 곤혹을 치렀기 때문에 친척이 없는 여인을 고종의 부인으로 맞아 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여인이 민비, 다른 이름으로는 명성황후였습니다. 친척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왕의 부인이 된 이 여인은 흥선대원군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중앙의 요직은 물론 지방의 방백, 수령까지도 좋은 자리는 모두 민씨가 차지하였다”고 비판했습니다. 친척이 없던 민비는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을 대거 등용하여 세력화하고,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아서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을 몰아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자기파괴적인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유가 저는 기독교 박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민비와 결혼한 1866년은 병인박해가 일어난 해인데, 천주교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인 8천 명이 처형된 비극입니다. 개신교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적대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한 사람은 자기 생각에 최선의 선택을 하더라도 어리석은 선택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팀과 조이스는 한 건축업자와 주택개조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건축 업자는 나쁜 사기꾼이었다. 팀과 조이스는 집 두 채에 대해 고스란 히 손해를 보아야 했다. 어느 날 조이스의 아버지가 물었다. “얼마 나 힘드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 일 은 우리 결혼생활에 큰 힘을 가져다 주었어요. 그 어느 것과도 이 시간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팀과 저는 지금처럼 서로를 가깝게 느 껴본 적이 없었어요. 저희는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드린답니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지요. 저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답니 다.” 하나님께 당신의 고난 기간 중에 가르쳐 주시기로 의도하신 모든 교훈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그 길을 다시는 걷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고난은 우리를 더 나쁘게 하거나 더 낫게 할 것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출처] 아버지의 일곱 가지 계절 / 패트릭 M. 모레이

## 1. 능력을 구한 유대인 vs 지혜를 원한 헬라인

유대인, 헬라인이라고 하니까 지금 우리하고 별 상관 없는 사람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 헬라인이 여전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했습니다. 표적은 지금 용어로 하면 능력을 원했다는 말입니다. “능력이 있어야 기독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대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도깨비 방망이 같은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알게 하려는 능력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소경 바디매오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소명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바디매오에게 능력을 발휘하셨는지 아십니까? 바디매오에 관한 구절을 보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구원자,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 인류를 구원하기로 약속된 그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막 능력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능력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본질이고 능력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증명하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은 중요하지 않고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따르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럴 때 능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했습니다. 독특한 생각과 색다른 사상에 이끌렸습니다. “성경을 기가막히게 해석하네”라는 말에 이끌리면 헬라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성에 신천지에 빠진 청년이 있다고 해서 설득해 달라고해서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설득을 잘 했는데, 계속 요한계시록 얘기만 하더니 이렇게 따졌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이 나오는데 그게 누군지 압니까? 아냐구요?”

성경에 그게 누군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자신과 홍종효라는 사람이 두 증인이라고 합니다. 근거가 전혀 없는 황당한 주장일 뿐입니다. 그런 황당한 주장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일찌기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거짓말도 100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 거짓말도 매일하면 진실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요?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물어야 할 것은, “이 곳의 예배스타일을 내가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이 교리들은 참된가? 여기에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 이 문을 두드리길 꺼리는 것은 나의 교만이나 단순한 취향 때문이거나 특정 문지기(예를 들면, 특정 교회의 목사나 그의 설교방식들)를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은 아닌가?” 입니다.

## 2. 하나님의 생각 vs 사람의 생각

성경 해석은 새롭고 독특한 이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알려주신 해석방법을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해석방법이 교리입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시각이고 성경을 바라보는 마음이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교리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생각이고 마음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비뚤어지면 아무리 좋은 걸 가져도 주어도 나쁘게 해석할 뿐입니다. 성경이라는 거룩한 책을 주어도 생각과 마음이 비뚤어지면 엉뚱하게 해석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리을 알아야 합니다.

정수기 필터가 물에서 나쁜 성분을 걸러내는 것처럼 교리는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필터링해서 악한 요소를 걸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천국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생각과 마음이 바뀌지 않은 채 천국에 가게 되면 천국이나 여기나 별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필터링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필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모든 안좋은 생각을 걸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의 대적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거한 십자가 중심을 부정합니다. 십자가는 신앙과 불신앙의 기준입니다.

이슬람교 : 하나님의 중요한 선지자가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 했을리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십자가에서 발현된 ‘하나님의 친애한 부성과 사죄의 깊은 확신’이 없다
힌두교 : 십자가의 역사성은 인정하나 그 구원의 의미는 부정
니체 : 십자가에 드러난 신의 역약함 때문에 거절, 알프레드 아이어 – 기독교의 야만적인 교훈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때에만 우리는 회개라는 죽음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되지 않는 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의 빚을 갚으셨으며 그로서는 전혀 겪을 필요가 없는 고통을 우리를 위해 겪으셨다는 말에 담긴 뜻입니다.

## 3. 부르심을 받아야 보이는 십자가

성경의 감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내 안에 있는 나쁜 성분을 제거해야 합니다.

나쁜 성분이 제거될 때 죄의 각성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보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십자가가 감격스럽게 다가옵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보아야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선택하고 따르고 실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463 우리 보좌 앞에

기뻐하는 이유

# 본문

빌립보서 1:12~18 / 2018년 07월 22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본문

빌립소서 1:12~18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핵심 구절

(빌 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줄 요약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이 잘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각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교회 관련해서 다른 부분을 설교합니다. 다음 주부터 교리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 0. 고수의 생각법

가끔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이 엉뚱한 사람은 무시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면 다릅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고수입니다.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켜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회사로 만든 사람이 스티븐 잡스입니다. 세계 경영자들이 존경하는 경영의 최고수입니다.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이 사람이 제작해서 보급했으니까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이 사람 모토가 “다르게 생각하자”입니다. 컴퓨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과장하면, 아파트 한 채 만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작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걸 사람들이 집에 한 대씩 가져다 놓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가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서 판매했습니다. 애플 컴퓨터를 창업했고, 노트북 터치패드, 마우스, 윈도우를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고 플로피 디스크를 없앴으며 USB를 표준으로 만드는 등 획기적은 시도를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 당시에는 독특한 생각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를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엉뚱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고수의 생각을 배우려려고 합니다. 바울도 일종의 고수입니다. 기독교를 순식간에 로마 전역에 전파한 전도의 고수입니다. 이 바울의 생각이 독특합니다. 감옥에 갇혔는데, 기뻐했으니까요. 우리도 바울의 생각법을 배워서 적용한다면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1. 바울의 생각법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곳은 로마입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당연히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설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설립된 교회가 복음을 바르게 알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로마에 죄수로 끌려갔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로마로 오는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되자 로마에 있던 교회 중에서 일부 지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바울의 명성에 관해서 질투하고 견제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전도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화를 내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서 큰 성과를 이룬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일 중에 하나가 조훈현 9단이 응창기배에서 우승한 사건입니다. 세계 바둑 올림픽 혹은 바둑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세계 바둑 대회였는데, 거기서 예상 외로 우승해서 온 국민이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조훈현 9단이 쓴 책이 고수의 생각입니다. 거기서 하수와 다른 고수의 생각 몇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 그 중 하나가 이창호가 자신을 꺾었을 때 기뻐한 일입니다. 그는 이런 태도를 일본인 스승 세고에 9단에게서 배웠습니다.

세고에 선생님은 나에게 바둑에 대한 사랑과 곧고 깊은 정신세계를 물려주셨다. 선생님은 바둑에 일생을 바치셨다. 바둑을 위해서라면 국가도 민족도, 자신의 명예나 이익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인 우칭위안을 데려와 일본 바둑계를 뒤흔들어놓았고 한국인인 나를 세계 정상의 기사로 키워내셨다. 선생님의 레거시(legacy, 유산)는 바둑 역사에 살아 흐르고 있다. 세고에 선생님의 레거시를 나는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까. 1984년 이창호를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이 내게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아무 조건 없이 창호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창호는 바둑에 대한 재능과 자세는 물론 인격까지도 모두 완성된 상태로 나에게 왔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 살 때 들어온 그 꼬맹이가 열다섯에 나의 자리를 넘보는 호랑이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생애 최고의 기쁨과 최악의 지옥을 동시에 맛봐야 하는 혼란을 겪었다. 그때는 극복하기 힘들었고 그냥 견뎌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창호는 나의 자랑스러운 레거시가 되었다. 창호 역시 물려받은 이 정신적 유산을 잘 계승해줄 것이라 믿는다.

세고에 9단은 국가도 민족도 명예도 이익도 생각하지 않고 바둑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최고의 제자를 남겼고 결과적으로 자신도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조훈현 9단도 이 정신을 물려받아서 이창호 9단을 키웠고 그래서 더 위대한 바둑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고수의 생각은 본질에 충실한 것 같습니다. 본질 다시 말해서 목표를 바르게 알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을 기쁘게 생각한 것이 바울을 더 위대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가 복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어렵지만 불가능해서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욕심만 버려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사실과 해석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때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해석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선생님이 준 편지를 가기고 와서 어머니한테 주었습니다.

“엄마 학교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읽지말고 엄마에게 꼭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편지를 읽던 엄마는 손끝을 떨며 눈물을 흘릴것 같았습니다.그런 엄마를 쳐다보던 아이에게 엄마는 웃음을 지으며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 주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천재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학교에는 당신의 아이를 가르칠 만한 선생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직접 아이를 가르쳐 주십시요.” 그렇게 아이는 어머니의 손에서 교육을 받으며 컸고 몇십년의 세월이 흘러 아이는 성공한 과학자가 되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를 하던 그 아이는 낡은 책상의 안쪽 구석에 있던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지적장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아이들과 함께 가르칠 수 없습니다. 더이상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편지를 읽으며 어머니의 생각에 한동안 눈물을 멈출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엄마는 나를 천재로 만드셨다.”

선생님은 에디슨의 독특한 생각을 지적 장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에디슨의 어머니는 천재라서 그런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누가 고수일까요? 선생님일까요, 어머니일까요? 어머니의 사랑이 에디슨의 감추어진 잠재력을 보게 했고, 이끌어내게 했습니다. 메마른 이성과 단편적인 합리주의는 생각을 편협하게 하고 감추어진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합니다. 생각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성과 합리주의 뿐만 아니라 사랑을 갖추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질투해서 전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볼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질투로 동기가 부여되어서 전도한 사람들 속에 있는 작지만 순수한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키워주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건 사랑과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악한 것으로 몰아가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로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이성과 동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해석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사랑을 동시에 가져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반대자들에 관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3. 기뻐하는 이유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믿음, 소망, 사랑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기쁨.

기쁨을 추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쾌락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도 기쁘지만, 잘못하면 이런 기쁨은 쾌락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기쁨은 하늘을 바로보고, 비슷한 쾌락은 땅을 지향합니다. 기쁨은 고상한 목표를 이루어갈 때 가장 잘 누릴 수 있습니다.

 (히 12: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남자들이 인생에서 가장 기쁠 때가 결혼도 있지만, 제대할 때인 것 같습니다. 부대 정문을 나설 때 만감이 교차합니다. 고생했던 모든 일들이 스쳐지나가면서 그 고생에 몇 배 더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튜브가 항상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기쁨은 고통을 능가합니다.

기쁨은 항상 고생을 능가합니다. 고생한만큼 그 이상 기쁘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 고통이 가득차도 그 고통이상의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을수록 그리스도인은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 기쁨은 고통을 압도한다

우리가 장차 하늘 나라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기쁨을 조금 당겨서 누렸으면 합니다. 나중에 기쁨을 누릴 것이 확실하니까 미리 당겨서 이 땅에서 기뻐합시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의 길을 걸어갈 때에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압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493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