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베드로를 만나주시다 – 2018.11.11

2018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5:1~11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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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

0. 만남

만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현재는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책이지만,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톤레사프’는 캄보디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여인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지금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몬순이 닥치면 엄청난 폭우가 몰아쳐서 집이며 세간을 모조리 휩쓸어버리죠. 그러면 사람들은 공동으로 뗏목을 만들어서 몇 집이 함께 살아요.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서 뗏목이 모습을 보이고,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죠. 바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저는 해마다 6개월 동안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두 옆집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표정이군요. 하지만 이웃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상대방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앞서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면 아직도 새학기가 되면 기대에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하고 말입니다. 반 아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기대합니다. 기성 세대는 워낙에 힘들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만남이 기쁠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만남에 관해 기대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만남이 기피해야 할 일이 된 이유는 만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면 만남도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그래서 그의 삶이 기쁨과 기대로 가득차게 되었을까요?

1. 다가오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본문과 병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 4:18~20)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만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자 마자 모든 것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간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본문과 연계해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에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갔던 일을 생각하면 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은밀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온 줄로 오해할 정도로 말입니다. 신앙이 내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만, 좁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혹독한 고문을 당해서 신앙을 부인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지만, 고문이 너무 심해서 신앙을 부인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매우 편안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신앙 생활한 사람보다 실제로는 믿음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비합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니까 사람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야 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쿠마는 좁은 의미의 구원 그러니까 구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전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잘난체하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반대로 한편으로는 깊은 안도감을 줍니다. 내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도 기댈 곳이 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지구는 멈춰있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지구는 멈춰있고, 해가 도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도는 것은 해가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주변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대하며 신중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됩니다.

2. 부르시는 예수님

다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결단의 계기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결단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결단할만한 근거도 주십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라는 권유입니다. 그냥 놔두면 우리는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때는 속삭이시고, 기분이 안좋을 때는 양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만, 고통중에 있을 때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적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번에 헌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무죄 판결 난 것이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했다. 기도 응답을 체험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확실한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확실한 체험일까요?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한 체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 체험입니다. 성령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사역은 죄의 각성 사역,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도록 조명하시는 사역,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보통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양심이 악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한 양심의 자연적 작용으로도 때로는 통렬한 후회와 자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변화는 오직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안이 열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 (고후 3:18) 나타납니다.

깊은 곳은 외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내면을 비추고 그 빛을 통해서 내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 깊은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잘 살게 해 주어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성을 깨달았을 때 감격하게 됩니다.

신문 기사에서 한 어머니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당신들은 댓글 한 줄 썼지만, 내 딸은 목숨을 버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댓글 때문에 삶을 마감한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댓글 한 줄도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악도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의 불씨를 보아야 하고 그 비극성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인간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지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악이 있는 이상, 이 세상에는 비극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악의 불씨가 제거되지 않으면 어디나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문제를 발견하고 슬퍼하고 붙들고 씨름한 사람만 그리스도께 감격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절망을 체험해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조명됩니다.

3. 만나주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세 번째이유는 베드로에게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말씀 잘 듣고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본문과 같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건 기적을 체험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데 머물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자신을 보는 일이 일어납니다. 빛이 비치면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만나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됨을 보게 됩니다. 구약 시대 이사야가 체험한 일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 하늘나라 재판정에 불리워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됩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더니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사야가 그전에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우리도 동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이익 단체나 사교 장소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그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염려할 필요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자신이 선택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교회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출처] 장영학,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자기를 보는 것은 가장 높은 정신적 단계입니다. 하지만, 신앙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베드로는 이런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경황 없는 중에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다시피 예수님께서 다시 그를 찾아 와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에 이끌려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서 믿음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오셨고, 깊은 곳으로 가자고 권유하셨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러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구약과 공관복음_김영철 목사

선으로 본 구속의 역사  설교 및 강의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2018년 10월 28일 주일 설교

고리로전서 3:6~11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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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한줄 요약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성장하게 도우십니다.

개요

10월 마지막 주간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10월을 보내면서 가지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저 같은 세대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생각할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할로윈데이를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외국 풍습이라서 동참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또래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무조건 막기도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10월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생각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종교개혁입니다. 중세 교회가 끝없는 타락에 빠졌을 때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마틴 루터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마무리 지은 사람은 존 칼빈입니다.

왜 하나님은 존 칼빈에게 종교 개혁을 마무리 짓게 하셨을까요?

0. 칼빈이 종교 개혁을 마무리한 이유

칼빈은 우상화의 위험이 적은 사람입니다. 루터파를 만든 루터나 감리교를 만든 웨슬리는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칼빈은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비교적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주도하기 보다는 도와주었고, 리더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536년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한 이후입니다. 이 일도 망설이는 칼빈을 기욤 파렐이라는 사람이 칼빈을 강력하게 설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칼빈은 후에 당시 일을 이렇게 썼습니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출처, 칼빈의 시편 주석 서문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리더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칼빈은 인물 자체로 유명하기보다는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통해서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강요는 성경을 체계화한 책으로 조직신학이라는 학문의 바탕이 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를 잘 세운 사람입니다.

칼빈은 다른 말로 하면, 우상화의 위험성이 적은 사람입니다. 저는 칼빈의 이런 점이 종교개혁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 우상화의 위험

사람에게는 우상화의 경향이 있습니다. 우상화는 일종의 투사입니다. 영어로는 프로젝션입니다. 프로젝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여기 벽에 나오는 화면은 사실을 벽에 쓰여진 게 아니라 노트북에 있는 것입니다. 노트북에 있는 화면을 벽에 쏜 것입니다. 그래서 글자를 고치려면 벽에서 고쳐서는 안되고 노트북에서을 고쳐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의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 의사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잘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자기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에 의사는 나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 마음을 엉뚱한 사람에게 덮어씌운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 이미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아까 말씀대로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무턱대로 존경합니다. 우상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 칼빈같은 사람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장로교인은 칼빈을 무슨 우상처럼 존경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성경을 해석한 방법을 존중하고 그 방법을 따라 할 뿐입니다.

2. 아볼로, 바울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형의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빠와 엄마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는 스승도 필요하지만, 신중하고 세심한 스승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카리스마 있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고, 아볼로는 신중하고 학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제자 중에서 디모데는 몸이 약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리더로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 속에서 우상화하고 싶은 사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 섬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바꾸기 원하십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슈퍼맨처럼 힘에 쎈 사람입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척척박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아빠가 배나온 아저씨에 불과하고, 모르는 것이 많고,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어른에 됩니다. 좋은 아빠는 이 과정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4살 때,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5살 때, 아빠는 많은 걸 알고 계셨다.
6살 때, 아빠는 다른 애들의 아빠보다 똑똑하셨다.
8살 때, 아빠가 모든 걸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10살 때, 아빠가 어렸을 때는 지금과 확실히 많은 게 달랐다.
12살 때, 아빠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빠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엔 너무 늙으셨다.
14살 때, 아빠에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아빤 너무 구식이거든!
21살 때, 우리 아빠 말이야?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쳐졌지.
25살 때, 아빠는 그것에 대해 의외로 좀 알고 계시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내놓으신다. 뭐 오랫동안 그 일에 경험을 쌓아 오셨으니까 그 정도쯤은 아시는 거겠지만.
30살 때, 아마도 아버지의 의견을 물어보는것도 큰 도움이 될것 같다. 아버진 경험이 많으시니까.
35살 때, 아버지께 여쭙기 전에는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40살 때,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버진 그만큼 현명하고 세상 경험이 많으시다.
50살 때, 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계셔서 이 모든 걸 말씀드릴 수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다.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걸 배울 수도 있었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출처, 앤 랜더스

 

정신적인 성장과정도 비슷합니다. 우상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우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오해하고 착각 속에 살게 됩니다.

어머닌 장에 가실 때마다 나를 교실에 맡기셨는데 학교가 세상 전부인 교사의 아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전능한 신이었다. 이모가 결혼을 하자 고급공무원에다 부자인 이모부는 나의 전능하신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경쟁 관계가 되었다. 그해 여름 이모 가족과 우리는 시골 별장을 빌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떠났다. 드디어 휴가의 클라이막스인 사냥, 최신식 엽총을 꺼내는 이모부 앞에서 아버지가 낡은 화승총을 꺼내면서부터 모든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인 아버지는 한마디도 못하고 이모부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고. 아버지와 이모부 몰래 따라간 사냥에서 나는 아버지의 처참한 패배를 몇 번씩이나 확인해야 했다. 나는 그해 여름 신처럼 전능하게만 여겨지던 아빠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고 아빠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출처, 영화 마르셀의 여름

약점이 많은 인간임을 알고, 그것마처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반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사람을 우상화하고 고집스럽게 단점과 연약한 점을 외면합니다. 우상화된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을 내세웁니다.

참된 스승은 제자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 줍니다. 보스는 부하가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스승이 되어야지 보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3.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스승을 보내고 그 스승을 통해서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장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현재로써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1년 이상 변덕부리지 말고 꾸준하게 예배했으면 합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심지가 견고하게 지냅시다.

정신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남야 합니다.

미국의 쿠바 침공작전의 실패는 생각이 같은 사람의 오류를 알려줍니다.

집단사고의 대표적인 예는 미국의 피그스 만 침공사건을 들 수 있다. 케네디 정권은 당시 쿠바에 위협을 느껴 카스트로 정권을 없앨 궁리를 했다. 핵심참모들이 논의한 끝에 미국으로 망명한 반(反) 카스트로 쿠바인들을 훈련시킨 후 피그스 만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겠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냈다. 또한 실패를 하더라도 쿠바의 내부 봉기를 일으킬 수 있을테니 케네디 행정부의 참모들은 이것은 꽃놀이패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참담 그 자체였다. 일단 침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3일 만에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000명이 생포되었다. 그러면 쿠바의 내부 봉기는? 봉기는커녕 카스트로 정권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고 쿠바는 미국에게 내정간섭이라고 몰아부치며 포로교환의 조건으로 배상을 청구했다. 그리고 미국은 어쩔 수 없이 1961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용인 5,300만 달러를 배상했다. 무엇보다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미국은 멍청한 짓을 했다는 비아냥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글로벌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었다.
당시 케네디 정권의 참모진은 하버드대학교 교수, 포드자동차 사장, 록펠러재단 이사장 등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폐쇄된 공간에 모여 논의를 할 때,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사고는 큰 실패를 낳을 수 있는 잠재된 핵폭탄과 같다. 실제로 미국의 어설픈 행동으로 인해 당시 쿠바를 지원하던 소련과 핵전쟁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출처, 고영성의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있으면 아무리 엘리트를 모았더라도 오류에 빠지고 실수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단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설립하고 아볼로가 대를 이어서 목회를 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두 사람의 성향이 다른 것을 하나님도 아셨습니다. 그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리더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우상화하거나 숭배해서는 안됩니다. 그도 약점이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섭리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 찬양과경배
425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노아의 권위

본문 

창세기 09:20~27 / 2018년 10월 21일 주일설교

(창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창 9: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한줄 요약

노아는 구원 계시의 전달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하나님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0. 권위와 권위주의

노아가 술을 먹고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아들 중에서 함은 노아의 실수를 떠벌렸고, 셈은 덮어주었습니다. 이 내용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단순히 목회자의 실수를 떠벌리면 안된다. 혹은 목사를 비판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바른 해석은 무엇일까요?

이 내용에서 의문점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노아의 실수는 무엇인가?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셈이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가 자기 방에서 술을 먹고 옷을 벗었는데, 그것이 왜 큰 실수일까요? 함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마지막으로 셈의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권위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영향력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는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필요한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1. 노아의 실수는 무엇인가?

첫째, 노아의 실수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고 추측해 보겠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은 속옷을 입고 하체를 가려야 했습니다. 하체를 보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노아도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왜 하체를 가렸을까요? 당시 가나안 이방 종교에서는 옷을 벗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죄를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할례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또 제사장에게 하체를 가리라는 말씀도 특별히 더 음란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하체를 가리지 않은 것이 실수입니다. 그는 음란한 죄를 범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하체가 놀림이나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었습니다.

2. 가나안이 저주받은 이유는?

둘째, 함이 잘못했는데, 왜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노아가 하체를 벗었어도 함이 그것을 발설하지 않았으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은 그것을 발설했고 노아의 실수는 알려졌습니다.

함의 죄는 계시의 전달자인 노아의 권위를 훼손해서 그가 전하는 말씀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데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다른 건 다 용서해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못하게 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성령 모독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함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예를 보면 명백합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울은 정식으로 기름부음받은 왕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건,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받은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제사장, 왕,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제사장과 동등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할 때 보여준 존중은 함이 노아에게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함이 잘못했는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의 계보로는 이후로 구원 계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이 믿음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말은 함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3.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셈은 다윗이 사울에게 보여준 것과 동일한 존중을 노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스도를 존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셈의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셈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믿음이 확증된 것입니다.

오늘날 권위가 실종되고 권위주의만 남았습니다. 권위주의란 권위가 없는데 권위가 있는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권위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막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권위와 권위주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동일하게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깨끗하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비판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하지만, 권위는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권위는 그리스도를 알도록 인도하고 도와주고 만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권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교리] 예수님의 죽으심

본문

사 53:4~6 / 2018년 10월 14일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한줄 요약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죄를 범한 인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은 대속이었습니다.

개요

프로야구 정기 시즌이 끝났습니다. 플레이오프라고 해서 정규시즌이 끝난 뒤에 1등을 가리는 시합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스포치를 좋아하는 분들, ‘팬’이라고 하는 분들은 스포츠에 매우 몰입을 합니다. 대학 동창 중에 한 명은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했습니다. 그 친구는 타자들의 타율과 투수들의 방어율 같은 기록을 암기하고 다녔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그런 팬의 모습이 놀랍게 보이겠지만 더 심하게 몰입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야구팬 중에는 선수나 감독보다 데이터를 잘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수 중에는 자기 기록은 몰라도 다른 사람의 기록은 잘 모르는 선수도 있습니다. 데이터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 아무리 잘 알고, 각종 기록을 암기하고 있어도 팬은 팬이고 선수는 선수입니다. 결국 기록을 만들고 감동적인 순간을 가져도 주는 사람은 팬이 아니라 선수입니다. 여러분은 선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팬이 되고 싶으십니까? 교회에도 선수가 있고, 팬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선수가 될 수도 있고, 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용어로는 선수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팬은 무리라고 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데서 그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을 살아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다녀면 예수님이 나를 대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이 진리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경험해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0. 복음의 신비

복음의 신비는 사랑과 공의를 둘 다 만족시켰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지 않고 용서하면 불공정한 일이 되고, 죄를 지었다고 벌만 주면 사랑이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모순,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점이 신비입니다.

동그라미와 네모를 합칠 수 있을까요? 그냥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원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위에서 보면 원이고, 옆에서 보면 네모입니다. 생각이 넓어져야 신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것도 이처럼 생각이 넓어져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의 질고를 지고

질고는 병 혹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죽어간다는 증거가 질고입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정신적 , 육체적으로 질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과 사회를 바라볼 때 이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질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질고는 형벌을 동반합니다. 질고의 원인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는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인간이 의롭지 못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 생명을 이어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에도 질고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과 정신에 질고가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이 부패했습니다. 다른 말로 비정상적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몸과 정신에 질고가 있기 때문에 슬픔이 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모두 질고에 원인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영혼이 아파서입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자녀, 형제자매, 직장 동료, 주변 사람들이 아픔을 줍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2. 그가 찔림은

우리 삶의 질고와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모든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불경건의 대가를 치러야 불경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대속의 삶이셨습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질고와 슬픔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죄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각성이 일어나기는 힘듭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이 시작됩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났는지 안 일어났는지 알려면, 자기 객관화가 가능한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용, 장영학 – 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여러 경험이 축적되고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양한 관점을 접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생긴다. 이것이 자기 통제적 정신이다. 이 단계가 되면 비로소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다. 사회적 정신은 모두가 ‘예’ 하면 절대 ‘아니오’ 하지 못한다. 자기 통제적 정신에 이르러야 자신만의 관점을 남들에게 주장할 수 있으며, 가보지 않은 곳으로 남들을 이끄는 리더가 될 수 있다. 다만 이 단계는 자신의 관점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것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불완전한 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잊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남, 특히 자기보다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게 된다. 자신만이 옳은 사람이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임원들 중에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에 빠져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런 분들은 자기 통제적 정신을 가지고 성공했지만 그 성공 경험 때문에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인용 끝]

자기 객관화에 이른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고 했는데, 이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가장 처음 도달하는 경지입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당연히 오는 단계입니다.

성경을 기가막히게 푼다는 사람 중에 죄의 각성이 있어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무리일 뿐입니다. 아직 선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3. 그에게 담당시켜셨다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법은 예수님이 대신 대가를 치르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필요하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대가를 치르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야구 룰과 선수들의 데이터를 많이 안다고 해서 선수가 아닙니다.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뛰어야 선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을 직접 살아야 선수입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죄의 각성이 일어나는 데서부터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죽음의 신비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의 각성이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우리의 어두운 눈이

[교리] 예수님의 거룩

본문

눅 4:33~37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한줄 요약

예수님도 하나님처럼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은 이 땅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났을까요?

개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0. 거룩이라는 항생제

성경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사람이셨으나 동시에 죄가 없으셨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천 사가 마리아에게 주님의 성육신을 고지했다.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 를 입증해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 9:14) “죄를 범하지 아 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 라.”(요일 3:5)
주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참으로 사람이셨다고 주장하나 결코 육신에 속한 존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육욕은 타락의 결과이며 첫 아담은 창조될 때에 결코 육욕적이지 않았다. 그분은 참으로 사람이었지만 죄는 없으셨다.

 

발가락이 까져서 오래된 밴드를 붙이고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정도 지나니까 얇게 딱지는 생겼는데 무척 간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소독약을 찾아서 소독을 했더니 거품이 나면서 몹시 아팠습니다. 다음 날 다시 소독을 했더니 간지럽지 않고 낫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조금 까진 상처 때문에 오랫 동안 고생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나 노약자들은 어이없이 생명을 잃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항생제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병균이 우리 몸에 들어와도 그 병균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고생한 것입니다. 다행히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몸이 이겨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버티지 못한 것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변균이 강하면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 때문에 인구의 30~50%가 죽었다고 합니다. 숫자로는 7,500만 명에서 2억 명 정도라고 하니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오랫동안 큰 피해를 겪었습니다. 아이들이 오래 살지 못할까 봐 이름을 짓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전염병에 약하기 때문에 아이를 잃었을 때 슬픔을 줄이려고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염병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이유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푸른 곰팡이가 병균을 죽이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인류는 몸 속에 침투한 병균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고 전염병을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몸 밖 상처에 있는 병균을 죽이는 약을 소독약이라고 하고, 몸 안에 침투한 병균을 죽이는 약을 항생제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병균이 침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의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떤 부분이 병을 죽이는 항생제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마음의 병균 : 더러운 영

성경은 영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영, 다른 말로 귀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영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영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병균이 몸에 침투하면 열이 나거나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거나 하는 증상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을 보고 병균이 침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영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비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영이 우리 마음에 침투하면 어떤 증상이 일어날까요?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더러워진다’라고 말입니다.

눅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요즘에는 상처가 나면 가장 먼저 소독을 합니다. 소독만 잘해도 상처가 덧나지 않습니다. 소독을 안하면 상처가 덧나고 곯마서 나중에는 그 부위가 썩어들어갑니다. 소독은 더러운 균을 죽이는 것입니다. 더러운 균은 우리 몸을 썩게하는 균입니다.

영도 더러운 영이란 건, 우리 마음을 썩게하고 부패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영이란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중독입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마음입니다. 여기에 더러운 영이 침입하면, 중독이 됩니다. 알콜 중독, 도박 중독같이 마음이 중독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썩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하는 마음도 필요한 마음입니다. 나쁜 사람, 나쁜 일을 미워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악한 영이 침투하면 미움이 자기를 파괴하고 남도 파괴합니다.

더러운 균은 우리 몸의 건강한 세포를 곯게 해서 파괴합니다. 더러운 영도 우리 마음의 건강한 감정을 곯마서 파괴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더러운 영에 영향을 받은 마음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롬 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말씀 앞에 두 가지 더러운 행동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것과 동성애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악한 영의 영향입니다. 악한 영은 보이지 않고, 통증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사람의 인생과 사회에 비극을 일으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이 더러운 영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마음의 항생제 : 거룩

마음에 항생제를 놓아야 합니다. 마음의 항생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거룩입니다.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악한 영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병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독약입니다. 항생제입니다.

어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빛이 입니다. 어둠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대포를 쏘아도 끄덕 없습니다. 잠시 총이나 대포가 반짝하는 동안 주춤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빛이 없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소독약, 항생제는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어떤 능력 있다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이 안 나가면 귀신한테 엄청 욕을 한답니다. 그러면 나간데요. 제가 놀란 이유는 이런 말을 듣고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해서 답답합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입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상처가 생겼는데 소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천으로 닦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상태가 안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귀신이 나가는 척 해주는 것이지 나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입니다. 거룩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거룩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성품 앞에 거룩이라는 말을 붙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 하나님의 인내는 거룩한 인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에 말 한 마디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사도들을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했기 때문에 동일하게 말로 악한 영을 쫒아냈습니다. 하지만, 악한 영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가장 강력한 항생제이고 가장 강한 능력입니다. 가장 강한 귀신도 거룩한 사랑에는 견디지 못합니다.

안이숙 사모님의 죽으면 죽으리라에 보면, 감옥에서 미친 만주 여자를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주의 가난한 집에서 감자 한 부대에 팔려 10살 때에 중국 농부에게 시집을 갔다가 어떤 총각과 눈이 맞아 함께 공모하여 남편을 토막 내어 죽이고 도망치다 잡혀온 것이었다.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왔는데 쇠고랑에 묶여 고문을 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졌습니다. 옷도 더러고 몸에서 악취가 나서 사람들이 접근을 안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안했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이 그 여인이 불쌍해서 자기 밥을 주고 꽁꽁 얼은 더러운 발을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 지나니까 이 여인이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오랜 기간 진심의 정성과 하나님의 사랑은 92번 그녀의 얼었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깊은 고민에 잠기어 그녀는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머리를 잡아 뜯고 가슴을 때리며 통회하고 있었다. 92번 그 모질고 악한 살인범이었던 그녀가 마치 무슨 아름다운 초상화 같이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이숙 여사를 통하여 그녀는 예수님을 보고 있었다. 검고 긴 머리는 뒤에 늘어지고 맑고 흰 얼굴에는 수심이 끼고 그 눈은 애원하는 불안의 눈이었지만 그렇게도 아름답게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92번의 사형집행일이 다가왔다.
“92번 나와!”
“아휴 어떻게 어떡하니 어떻게… 선생님 나 무서워요. 나 죽는 게 무서워요. 나 살려 주세요. 나 살려 주세요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 예수님이 널 사랑하셔. 언제나 네 옆에 계실거야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실 거야.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예수님께 부탁해서 저를 꼭 남편 있는 곳에 가게 해 주세요. 가서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싶어요.”
“예수님이 항상 너를 인도하실 거야.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뵐게요.”

3. 치료의 결과 : 상하지 않음

항생제를 바르게 사용하면 건강해집니다. 예수님의 치료도 귀신들린 사람을 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회복시켰습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건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잠잠하도록 하셨습니다. 귀신과 대화하거나 물어보면 안됩니다. 마가복음에 대화하신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설교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윽박지르고 소리 높이는 등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고, 마음에 거룩한 사랑도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 식으로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깊이 회개했을 때 제 머리가 맑아지고 감정이 변화되고 몸의 경직이 풀렸습니다. 몸에 실질적인 회복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 마땅한 존재라는 깨달음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깨달아졌을 때 결박이 풀어졌습니다. 청교도가 그렇게 주장한 일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거룩한 영은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긴가민가하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상처 없이 온전하게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본 받아 행할 때 동일하게 온전한 회복을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세상은 인간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병균으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 병균은 마음에 침투해서 악한 마음을 같게 하고 악한 행동한 하게 합니다. 양심을 마비시키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병균은 죄입니다. 이 병균은 페스트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이 죄라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없으면 인간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죄를 이길 수 있는 항생제가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항생제를 알고 바르게 사용합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립시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292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교리] 예수님이 육체로 오심

본문

(요일 4:1~3)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한줄 요약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시인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0. 예수님이 교리의 핵심

오래된 베스트셀러 중에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이 있습니다. 맨 앞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는 첫날부터 이해하기 쉬운 말로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운다. 선생님은 ‘간단한 규칙’이라며 가르쳐주지만, 사실 이것들은 인간이 힘겹게 싸워 얻어낸, 온갖 시험을 거친 인간 행위의 규범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다. 아이들은 규칙을 배운 뒤, 곧 실습을 하게 된다. 학교가 매일 배운 것을 연습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행동으로 옮겼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교리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 책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간단하게 배우는 교리가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매우 힘들게 발견하고 지켜온 것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성경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때 배운 것만 잘 기억해도 좋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탓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를 탓하고 싶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지 모릅니다.

이 책에는 죽음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가끔 사람들이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목사로 일하던 시절, 사람들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하면 늘 당황스러웠다. “방금 전 병원에 다녀왔는데, 의사가 저더러 시한부 인생이랍니다.”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뭐라고요? 그걸 몰랐습니까? 나이도 적지 않은데 그 말을 들으려고 의사한테 돈까지 냈단 말입니까? 유치원에서 작은 컵에 솜과 물과 씨앗을 담아놓고 기다리던 때에 당신은 어디 있었습니까? 컵 속에서 생명이 태어난 것은 기억합니까? 뿌리가 나오고 새싹이 돋았지요.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식물은 죽었어요. 죽었단 말입니다. 삶은 짧습니다. 그날 자고 있었나요? 아니면 아파서 학교에 안 가고 집에 있었나요?” 끝내 그렇게 말은 못하고 생각만 했다.

정말 중요한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외면하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외면할 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목적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과 그 사실이 왜 중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1. 영을 다 믿지 말라

먼저, 성경에서는 신앙적인 영역에도 속이는 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주의하라는 얘기입니다. 영적 사기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자기가 사기꾼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기는 진실한 사람이고, 절대 사기꾼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맹세하라면 맹세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상담한 분 중에는 신천지에게 성경 공부를 배웠는데, 그 사람이 절대 신천지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혈서까지 쓰겠다고 장담했는데, 결국 신천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절대로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 선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귀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스스로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즉, 그 거짓 선지자도 속고 있는 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자기 주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내가 보고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원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했답니다. 거기서 예배드리고 애기를 나누어 보니까 수원 교도소에 억울한 사람만 있지 죄인은 하나도 없는 것 같더랍니다. 재판정에 가면 모두 자기는 선한 사람이고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재판관이 그런 사람 주장을 믿고 재판하면 엉터리 재판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주장만을 믿으면 안되고 드러난 증거과 증인의 증언, 사겅의 정황을 두루 살펴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 재판장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결국 내가 분별하고 내가 그 분별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져야 합니다. 속았다고 해서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너무 헷갈립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헷갈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헷갈리지 않습니다.

감사하게도 비신앙인들이 큰 도움을 줍니다.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뉴스 탐사 프로그램에서 알려줍니다. 비신앙인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볼 때 상식 이하라고 생각되는 신앙인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세상 뉴스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을 비판하는 내용은 이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보 같아. 정직하게 장사하면 돈을 어떻게 벌어.”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융통성이 없어 뇌물을 안 주면 사업을 어떻게 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을 받는다고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사람은 교회다니는데 나보다 더 썩었어. 사기꾼이야”라거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공사 대금을 주지를 않아.”라는 비판을 받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각성이 일어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양심이 살아납니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의 기준이 비신앙이보다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장갑을 끼고 밤송이를 만지는 사람과 장갑을 안끼고 밤송이를 만지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자유롭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비양심이라는 장갑을 벗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담대하게 죄악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한 때,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의 다음과 같은 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도 있고, 일부를 영원히 속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링컨)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살펴보면 당대에 대단한 인기와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대의 평판과 명성에 휘둘리지 말고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

이단 중에는 두 가지 이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단과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영이라는 이단입니다. 정통 교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인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가 살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있었습니다. 영은 고귀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주장입니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체를 갖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육신과 몸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은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영어로는 the sinful nature, 즉 죄악된 본성입니다. 헬라어로는 ‘사르크스’라고 해서 몸을 가리키는 ‘소마’와 다릅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도박에 중독된 사람을 도박하지 못하게 하려고 손을 자르면 어떻게 될까요? 도박을 안할까요? 영화에서 보니까 손에 갈고리를 끼고도 도박을 하더라구요. 손이 무슨 잘못입니까? 마음이 잘못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육신은 오염된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오염되어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죄를 괴로워하는 감각이 무뎌진 마음이 육신입니다.

가끔 보면, 귀신을 쫓아 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오염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온전하게 거룩하셨습니다. 육체는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 중립적입니다. 몸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은 엄청난 희생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제한된 육체에 갇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구더기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구더기 같은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지에 파송된 선교사들 혹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많이 묵상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고 합니다.

3. 예수를 시인하자. 삶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외치지 말고,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믿는다면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이 구호가 안 통하게 되었습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처음 언급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학장이 마지막에 당혹스러운 말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네.” “네?”

“걱정 말게. 인내심을 가져. 시간이 지나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될 걸세. 눈을 뜨고 살게. 판단은 유보해. 쓸모 있은 사람이 되게.”

이 책의 저자는 목회자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걸 아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하는 핵심 습관이 있습니다. 핵심 습관이란 용어는 제가 고영성 작가의 ‘처음에 누구나 걷지도 못했다’에서 보았습니다.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2010년 KBS에서 신년기획으로 ‘습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습관에 대해 많은 것을 다루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안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제보를 받아 이들의 문제점을 알아보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통해 그 잘못된 습관을 교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20세 대학생이었던 ‘김△리’ 씨는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김씨의 잘못된 습관은 정리 정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깔끔한 외모와 20세 여대생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방은 너무 지저분했죠. 스타킹, 잠옷 등 일주일 동안 입었던 옷들 이 침대 위에 널 부러져 있었고, 책상은 폭탄을 맞은 듯 책들이 중구난방으로 쓰러져 있어 공부하고 책 읽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쁜 습관을 프로그램에참가한 어떤 사람보다도 완벽하게 고쳤습니다. 그 결과 방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해졌고 그녀는 더욱 예뻐 보였습니다. 그런데 김씨가 제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았던 이유는 단순히 잘못된 습관을 고친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계획을 세우면 모두 실패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목표를 세우면 행동에 변화를 주어 이룰 수 있겠다’, ‘스스로 많이 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그것 하나만 고치면 다른 습관도 고쳐지는 파급 효과가 큰 습관을 가리켜서 ‘핵심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 ‘핵심 습관’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자기 성찰’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 핵심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이유는 육체로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기뻐하자

본문

하박국 3:16~19 / 2018년 09월 23일 주일 설교

(합 3:16~19)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한줄 요약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일을 겪을 때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경륜을 알기 때문에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개요

추석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한가위이기에 더욱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감사할 거리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가 그런 상황에서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0. 기뻐할 일 없는데 기뻐하기

추석이지만 어느 해 추석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내려가거나 가족 모임에 가지 않겠다고 한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고, 취업이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려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혼 혹은 출산 등에 관해서 걱정을 가장한 참견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 현상을 보면서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낯설기도 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뭔가 사회가 이상해 지는 것 같고 삭막해져 가는 것 같아서 낯설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회에서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1. 새로운 일은 없다

먼저, 새로운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당황, 공포 때문입니다.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당황,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새로운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는 자는 과거를 돌이킬지어다. 인간사는 선대의 그것을 닮게 되나니. 이는 그 사건들이 그때 살던 사람이든 지금 사는 사람이든 동일한 성정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고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그로써 그것들은 같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근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2015년에 1인 가구가 전체 가구 중에서 두번째로 많은 가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손녀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 우리나라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만 함께 사는 핵가족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혼자 사는 가정이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는 혼자 사는 가정이 일반적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지만 통계로는 그것이 가장 많은 가정입니다.

나 혼자 사는 가정이 많아진 것이 우리나라에는 생소한 일이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1990년대에 이미 1인 가구가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27.2%인데, 일본은 2010년에 31%를 넘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덴마크나 노르웨이 등은 이미 40%를 넘어선 곳도 있다고 합니다. [출처] 연합뉴스, 20130222.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우리에게는 새롭지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보면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동성애 문제도 비슷합니다. 요즘 부쩍 동성애 관련 뉴스가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동성애 애기를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성애 문제도 우리사회에서는 낯선 일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된지 오래입니다. 새로운 사회 현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 로마서에도 로마 시대의 동성애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동성애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사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이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반복될 뿐입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 동성애 관련 문제가 발생하는 것 등 사회 문제는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1인 가구가 거의 없습니다. 대가족이 모여삽니다. 식구가 많아야 농사 짓고 일하기 편합니다. 주거생활비도 적게 듭니다. 서로 불편한 일이 있지만, 먹고 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해지고 돈 버는 방법도 농사에서 벗어나면서 각자 떨어져 살게 됩니다.

동성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성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성애도 행하게 됩니다. 구약 시대 소돔과 고모라가 사치스런 도시였습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가 문제가 되는 나라는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나라들입니다. 더불어 동성애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 포함된 불신앙과 영적 타락 현상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감사하게도 우리나라는 극한의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이 최고로 잘사는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황하고 놀랍니다. 그럴 때 다른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길을 갔는지를요. 잘 살게 되면 어떤 사회 현상이 일어나고 그 결과가 어떤지를 말입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우리나라 대형 교회가 어떤 길을 갈 것인지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천주교가 잘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더 타락한 모습을 보여 줄 것입니다. 천주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이유는 수도원 운동 때문입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이 수도원에서 청빈하게 신앙을 지켰고 그게 천주교회에 흘러들어가서 천주교의 생명을 유지시켰습니다. 중세 이후로는 수도원도 타락해서 하나님은 종교 개혁을 통해서 개신교를 분리시키셨습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 교회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으니까 당황하지 말고, 미리 있었던 일을 잘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진실한 신앙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고 따라하자는 말입니다.

2. 가장 소중한 것을 갖자

둘째,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나게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언제까지나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많은 것을 잃어버려도 가장 소중한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가가 우리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남유다가 멸망하려는 시기였습니다.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나라는 망해가고 경제적으로 피폐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17절을 보면 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정확하게는 기뻐했다고 나옵니다. 하박국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진 것이 없는데로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18절입니다.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이유에 관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박국이 고민했던 이유는 자기 민족이 외국의 침입을 방아서 멸망당하게 되었고, 고통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런 위기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앞 부분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 민족이 이렇게 고통당해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남유다도 타락했지만, 바벨론도 타락했는데 왜 그 타락한 바벨론에게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남유다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남유다를 심판하는 도구가 바벨론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심판의 도구였던 바벨론도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지키보기만 하고 아무 일도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섭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이 16절입니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나님은 더 악한 사람들을 덜 악한 사람들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경중을 가려서 심판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깨끗해지고 선해지도록 유도하십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하박국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나름대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고 안다고 하고 체험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을 해야 알 수 있는데 인정을 안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사람, 기적을 체험했다는 사람을 만나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기적이나 기도 응답이 많이 필요한게 아니었습니다. 확실한 한 번이면 족합니다. 확실하게 한 번 체험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집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은사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 없습니다. 죄의 각성이 없으면 절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알면 모든 의문과 걱정이 해결됩니다.

가족들을 챙기는 것보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데 더 힘을 쏟아야 했다. 멋진 순간을 만나더라도 폰카나 콤팩트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보다 꼭 한 템포 느렸다. 거창한 장비를 꺼내고 노출을 조절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전문가용 장비를 가진 내가 자동모드로 사진을 찍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주섬주섬 장비를 꺼내고 세팅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마음이 급한 가족들은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
가족을 챙기기보다는 장비를 챙겼고, 추억을 남기기보다는 근육통만 얻었다. 그러나 여행 전에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읽었더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추억이지 많은 장비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소중한 물건은 그 개수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책이 있다. ‘집에 불이 난다면, 당신은 무엇을 구해내겠습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을 시작으로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세상에 나왔다. 뉴욕에 살던 디자이너 포스터 허팅턴은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이 질문을 생각해냈다. 각자의 리스트를 내놓기 시작했고 급기야 ‘더 버닝하우스닷컴’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중략) 처음 이 질문을 생각했을 때 허팅턴 자신의 목록은 18개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 매달린 6개월 만에 그 목록은 2개만 남았다.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내린 결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것을 갖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출처] 허핑턴 포스트 20150203

재미있는 사실은 나이 어린 세대들은 아이폰, 노트북, 외장하드 등을 골랐고, 나이든 세대들은 주로 필름, 일기, 편지, 수첩 등을 선택했다. 품목은 확연히 차이가 나지만 그 기능은 거의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추억’을 담는 기능 말이다. 중요한 것은 ‘추억’이지 가격이 아니었다.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옷이든 신발이든 전자제품이든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지 마시고, 좋은 것 하나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결혼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한 명하고 결혼해서 그 사람하고 영원히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고 방식입니다. 소중한 것이 알면, 소중한지 않은 것을 잃어버려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3. 높은 곳에서 보자

세번째, 아무 것도 없는데 기뻐하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보는 시야가 필요합니다. 생각의 높이가 높아져야 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에 관해서 시간표가 있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야가 달라졌습니다. 고차원적인 시야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명이나 불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나 살펴보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삶을 살아도 보는 시야가 낮을 수가 있고 높을 수가 있습니다. 시야가 높으면 멀리보고 오래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고 하면, 먼저 씨를 땅에 심습니다. 씨가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씨를 잃어버려야 풍성한 추수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시야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안타까운 부분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맞추어서 시야를 높이지 않아서입니다. 자기 수준으로 성경을 낮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상황을 성경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것을 해석할 때 북왕국은 북한, 남왕국은 남한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합당한 해석은 북왕국은 이단 교회, 남왕국은 정통 교회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단 교회가 앞으로 정통 교회를 위합할 정도로 커질지 모릅니다. 정통 교회 안에도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다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단 교회에는 구원의 복음이 없고,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정통 교회도 쇠퇴하지만 그 안에는 복음을 계승한 사람들이 세상 끝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 복음을 아는 사람은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이길 수 없는 복음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 말이 말 장난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실체로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생각이 높은 사람은 눈 앞의 비극에 앞도 당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는 “영혼을 파는 자는 세상을 다 얻어도 덧없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청교도와는 반대의 길을 간 천주교인이었지만, 나름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사형 집행관에게 “힘을 내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고 말하고, 단두대에 머리를 쑥 내밀면서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며 수염을 조심하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사람은 신앙인이 거의 유일합니다. 그만큼 생각과 마음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추석에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고,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당황하거나 공포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높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룻기에 나타나는 구속의 역사_김영철 목사

룻기 / 2018년 9월 16일 주일 설교

선으로 보는 구속의 역사(김영철 저) 247페이지 참고

설교 듣기

꿈을 좇아가서 소망을 잡아라

창세기 9:14~15 / 2018년 09월 09일 주일 설교

본문

(창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창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한줄 요약

무지개는 붙잡을 수 없는 곳에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증언해 줍니다. 꿈을 쫓는 삶은 허탈해지지만, 소망을 품은 인생은 기쁨을 누립니다.

개요

무지개는 아름답지만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무지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0. 무지개같은 꿈

교리 설교를 하는 도중이지만, 지루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중간에 다른 설교를 끼워넣어서 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인생관 혹은 사고방식에 관해서 주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편하게 들으시면 됩니다.무지개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어렸을 때는 무지개를 제법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지개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 전기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어릴 때의 얘기입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저 무지개를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친구들이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나폴레옹만은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잡으려고 무지개를 보고 뛰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뛰었습니다. 무지개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먼 길을 달려 기진맥진하여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친구들이 비웃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나는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먼 길을 달려갈 수 있었다.”

나폴레옹 뿐만 아니라 무지개를 본 사람은 누구나 무지개를 가까이 가거 보거나 만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간절하게 바라는 꿈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그랬던 것처럼 무지개를 잡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지개같다’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인 동시에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오늘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를 통해서 알려주시려고 한 교훈 세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

첫째, 무지개 언약은 다른 사람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라는 교훈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정신적인 충격을 치료하려고 하신 약속입니다. 의학과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몸에 난 상처 뿐만 아니라 정신에 난 상처도 상처로 인정합니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 충격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버지니아주 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퇴역군인의 40%가 우울증을, 25%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20%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하루 22명의 참전용사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구요. 사회 적응도 어려워서 2012년 퇴역군인 6만 2천 여 명이 노숙을 했는데. 이는 전체 미국 성인 노숙인의 13%에 이르는 수준입니다. [출처] KBS 뉴스, 2014.4.8

군인이 아니지만, 소녀시대의 써니가 3살 때 이라크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한 것은 물론,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을 위험에 놓인다거나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비만 오면 정신적 충격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비가 홍수 때처럼 오랫동안 내리지는 않더라도 두려움을 가졌을 법합니다.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주신 이유는 무지개가 비가 그친 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치고 나타나는 무지개를 보면서 노아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사건이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없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 살펴보면 어렸을 때의 경험이 크건 작건 영향을 끼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한국인이 김치를 좋아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 알게 모르게 김치를 맛보았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 외국에 입양된 사람들은 겉모습은 한국인이어도 입맛은 외국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헤아리는 섬세한 분이십니다. 이런 점은 다른 종교에서 보여주는 신과는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달라집니다.요즘에는 사람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소모품 취급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기 불편하니까 도로를 개선해 달라고 청원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참고 다니지 왜 그래.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하나님과는 다른 성품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일반적인 인간 사이의 간격이 클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인간과 장애인의 차이가 클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가 더 큽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장애인의 호소를 무시하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냉철하게 그것이 사실인지 점검해 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병폐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적용이 잘못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호소를 들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듣자고 설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맞아 맞아”하면서 각자가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들으려고 노력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붙들고 당신 왜 내 호소를 안들어 하는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스도인은 내가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들어야지 라고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호소를 들으라고 강요할 것입니다.

2. 꿈을 좇아가라 그러나

두번째로, 무지개 언약은 꿈의 실상을 알려줍니다. 무지개가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체를 잡기 어렵습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힐링을 주제로 하는 TV프로그램에서 한 철학자가 연기자 지망생에게 조언을 해주는걸 들었다. 그 철학자는 당신이 진정으로 배우를 원한다면 꿈을 버리지 말고 더 노력을 해야 하며 그리고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끈기가 부족해서 일수도 있으니 대학로든 어디든 당신이 연기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론 짧은 TV강연에서 그 철학자의 조언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난 그 조언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자칫 오해를 하면 세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을 덜했거나 끈기가 없어서일 꺼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 영 마음이 불편했다. …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난 영화계에 입문해서 마흔이 넘어서야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난 꿈을 버리지 않고 영화계에서 끈기 있게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가 되었다고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야 하는데 한번도 후배나 동료들에게 내 사례를 들어서 더 노력하고 끈기 있게 꿈을 이뤄나가라고 조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나는 ‘꿈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개그맨지망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을 웃기는걸 좋아했고 대학 다니면서도 개그맨의 꿈을 키워왔다. 그래서 대학 때는 개그오디션이나 개그맨공채시험에도 응시하려고 했으나 코미디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았다. [출처]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한국일보. 014.2.13

위의 글은 영화계에서 나름 성공한 축에 속한 분이 쓴 글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공했으니까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본인의 꿈은 그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꿈을 이루지 못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드물게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도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쓴 글을 보았습니다. “가장 허무할 때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해서 이룬 것이 진짜 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할 때이다.”

정말 드물게 자기가 원했던 꿈을 이룬 경우가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버나드 쇼의 고백에 이르릅니다.

내게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고, 하나는 마음대로 된 이후에 오는 절망이다(버나드 쇼).

큰 꿈을 꾸라는 압력을 받고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루었지만, 진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래서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을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박명수가 “꿈은 없구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했답니다. 저는 공감하지 않지만, 그 말에 공감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박명수의 말에 공감하지는 않지만 씁쓸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니까 큰 꿈을 갖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착실하게 그것을 준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이 꿈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것입니다. 의사, 판사, 회계사 등 사자 들어간 직업을 원합니다. 적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공부 잘해서 그런 직업을 선택합니다. 남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스스로 어떤 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꿈을 좇지 말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을 일을 찾고 그것을 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지개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형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꿈도 비슷합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정말 이것이 최고의 삶일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세상의 한편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좌절과 낙심으로 가득차 있고,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의혹과 당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꿈은 아무에게도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지개처럼 바라볼 때는 황홀하지만 다가갈수록 형체가 없습니다.

3. 소망을 붙잡자

세번째로, 무지개 언약은 소망이 기쁨을 준다고 알려줍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는 동안에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가 그친 후에 나타난 무지개를 보면서 큰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가 내릴 때 느꼈던 공포감 이상의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무지개는 일종의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자체의 가치보다는 외적으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재 가장 비싼 그림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님 초상화더라구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를 다시 썼다. 500여년 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15일(현지시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천30만달러(약 4천978억9천만원)에 낙찰됐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긴급 보도했다. (중략) 지금은 최고의 몸값을 받는 자리에 있지만, 그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럽 귀족들의 손을 거치며 심한 덧칠 등으로 손상됐고,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수백 년을 떠돌았다. [출처] 연합뉴스, 2017.11.16

▣ 크리스티 뉴욕 2017년 11월 전후 & 현대 미술품

그림이 훼손이 심했고, 컴퓨터 시대에 사진을 찍어서 복사하기도 쉽습니다. 왜 이 그림이 이렇게 비쌀까요? 그림 자체의 가치가 아닙니다. 이 그림에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싼 것입니다. 내 자녀가 특별합니까? 내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특별한 겁니다.무지개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를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무지개는 자연현상으로 일종의 허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 무지개를 쫓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무지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꿈이 깨어지고 목표를 얻지 못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꿈이라는 것은 무지개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꿈은 멀리서 바라볼 때 기쁜 것이지 가까지 다가갈수록 좌절과 낙심, 그리고 괴로움만 더해 줍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잡지 못했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지개는 잡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증표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호소를 들으셨고 지금도 우리의 호소를 듣고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그러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중보적인 역할을 합니다.

무지개를 잡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언제나 기쁨이 슬픔을 능가합니다. 슬픔이 더 크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슬픔보다 기쁨이 언제나 더 큽니다. 마치 튜브를 물에 넣으면 튜브가 물에 뜨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실패에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산 사람도 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바로 이것을 알려줍니다. 성공도 하고 하나님도 만나면 가장 좋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공평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지혜로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저울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공의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무지개 언약은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물 외에 다른 것으로 심판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인데 가을이 오면 농부는 추수를 합니다.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의 과일을 추수합니다. 직장인들은 연말이 되면 연말 결산을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봅니다. 한 해 농사 혹은 한 해 일한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모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심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무지개는 우리에게 일종의 테스트가 됩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를 말입니다.

꿈은 이루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꾸라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도 이루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간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꿈이 깨어졌어도 성공하지 못했어도 좌절과 낙담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소망을 가지십시오. 꿈이 아니라 소망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계절도 변하고 인생도 변한다

본문

창세기 08:22 / 2018년 09월 02일 주일 설교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설교 듣기

한줄 요약

계절의 변화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고 이러한 변화를 주셨습니다.

개요

9월입니다. 길었던 여름도 이제 끝을 보입니다. 릴케라는 시인은 이렇게 여름의 끝을 노래했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출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중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계절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번 여름이 너무 덥고 길다보니까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겨울이 무척 추우면 겨울이 없었으면 좋겠다 혹은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계절이 변하게 하셨을까요? 여름과 겨울을 주셨을까요?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0. 변화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 계절의 변화를 주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첫째, 활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이 활기가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도 많고 문화도 발달했습니다. 여름이 거의 대부분인 중동 지역에는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가 있습니다.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삶이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남쪽에 위치한 스페인도 낮잠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개선하려는 논의가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통상 오전 9시에 업무(일과)를 시작해 정오께 짧은 커피타임을 갖고 오후 2시까지 일한 뒤 4~5시까지 이어지는 긴 점심식사를 즐긴다. 이어 업무에 복귀해 오후 8시 또는 더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근로 패턴이 이렇다보니 하루 11시간가량을 회사에 머물게 된다. 늦은 귀가로 저녁은 오후 9시께 먹게 되고,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줄며,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드는 이들이 많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삶이 늘어지고 지루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노인과 청년을 구분하는 법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면 청년이고 하던 일만 계속하면 노인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될 때, 요금이 비싸다고 바꾸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카카오톡을 주변 사람들이 다 쓰니까 뒤늦게 스마트폰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좀 과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어릴 적이 동네에 전화가 몇 대 없어서 공동으로 썼습니다. 그때는 집집마다 전화기를 놓는다는 걸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설치비도 비쌌고 전화요금도 아까워서 놓을 생각을 못했습니다.

시대가 지나서 집집마다 전화기를 하나씩 놓았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집에 전화 있는데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고 주장하던 분들이 기억납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나왔고 여지없이 스마트폰이 왜 필요하냐는 분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구입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변화를 따라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바다에 온갖 쓰레기가 흘러드는데 썩지 않는 이유는 달이 바다를 끌어당겨서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게 해서입니다. 바다는 계절은 없지만, 밀물 썰물이 있어서 활기를 유지합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데 변화를 계속 따라갈 수 있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만 포기하면 나태해지고 활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변화를 주십니다. 그 변화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제 인생에는 3년에서 5년 정도 주기로 계절이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변화를 잘 발견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2. 둘째,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문제가 있는 사람은 뭔가 변화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저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더 잘사는 경우를 봅니다. 저야 어차피 돈을 벌려고 목회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질투가 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야 살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잘나가는 사람, 못 나가는 사람 정해지면 변화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 전에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였습니다. 오바마의 인생을 보면 여름과 겨울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살때 어머니가 케냐인 아버지와 이혼했습니다. 다시 인도네시안인하고 결혼해서 인도네시아에서 10살까지 살다가 미국에 와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졸업 후 시카고에서 빈민을 위한 인권 변호사를 하다가 다시 하버드 대학원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에 입문해서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오바마를 보면서 저도 위로를 받고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미국의 흑인, 빈민들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성공할 기회가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계속 차별받고 돈도 없이 살아야 한다면 그들이 범죄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살아갈 힘을 잃고, 소망이 없는 사회는 범좌가 증가합니다.

소망은 현재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변화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소망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네 인생을 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돈이 없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죽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더라구요. 죽고 싶다라고 말하지 말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라.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이렇게 바꾸어서 이야기 하세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변화된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죽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으면 이렇게 바꾸십시오. 하나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은 변화에 응답하십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자면, 오바마가 똑똑하지만 본인이 잘나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이 기회를 주셨고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또 열렬한 지지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마의 삶에 좋은 계절을 주지 않으셨으면 그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에 계절이 있다는 말은 우리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한 섭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노력이나 능력과 상관 없이 좋은 기회가 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3. 셋째,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그 사이 즉, 계절이 변할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할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치 여름날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을 옮기느라 일을 쉬게 되거나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 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시간에 그런 쉬는 시간을 마련해 주십니다.

버포드 텔레비전사의 튼튼하고도 눈부신 성장으로 기대한 부를 축적한 44세의 밥 버포드에게 성공의 공포가 찾아왔다. 내 인생에 목적을 부여해주는 가치기준은 무엇인가? 내 삶을 이끌어 갈 중요한 비전은 무엇인가? 가장 유용한 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황하며 고민하던 밥 버포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빛이요 인도자로 영접하였고 그분께 최고의 충성을 드리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그의 상속자요 계승자인 전도가 유망한 청년 외아들 로스가 리오그란데 강을 헤엄쳐서 건너던 중 익사하였고 넉달 후 강 하류 16㎞ 지점에서 로스의 시신을 찾게된다. 아들의 죽음은 밥 버포드의 인생 전반기를 마감케 하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매달리며 아들 로스가 지금 살고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한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할 일을 합시다. 생각합시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이 말씀은 8장 20절에서 노아를 제사를 받으신 후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보류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통해서 구원 받을 사람이 없어질 때 이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지집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재앙이 일어나는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쉬는 시간을 주는 이유는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교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2

본문

사도행전 7:46~55 / 2018년 08월 26일 주일 설교

(행 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행 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행 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행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설교 듣기

핵심 구절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한줄 요약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개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자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0. 무엇이 영원할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끊임 없이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은 영원한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변화는 영원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변화하게 하는 분은 영원하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의 뒤편에서 변화를 주도하고 섭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변화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사는가?” 이것은 시인 하이네의 물음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스데빈 집사를 통해서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 1. 성전
스데반 집사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는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자 듣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분노했느냐면 성전을 절대적인 가치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거기에 기댑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지만, 돈 말고도 집에 집착하는 사람, 자동차에 집착하는 사람, 컴퓨터 게임, 수집 취미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실제로는 가치가 없을 때 생깁니다. 집, 자동차, 컴퓨터, 취미품이 영원한 가치는 없지 않습니까?

위에 것과 같이 놓고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그런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예배당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종교적인 건물이니까 아무래도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형적인 것은 도구이고 수단이지 결코 본질이 아닙니다. 물질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이 빠집니다. ‘노틀담 드 파리’은 노틀담 성당에서 일어난 추악한 스캔들을 보여줍니다. 노틀담 성당은 대주교좌 성당이고 중세 고딕 건축 양식의 정수라는 건축물입니다. 우아하고 웅장한 성당입니다. 보기만 해도 신앙심이 일어날 것 같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 같은 성당.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 없이 거룩할 것 같은데, 사실을 일반인보다 못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임 신부 프롤로도 근위대장 페뷔스도 욕정에 이끌려 범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보기에 추악한 곱추 콰지모도가 그나마 양심적입니다.

큰 건축물을 보고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도 웅장한 건축물을 지어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신앙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율법주의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고정관념이 그런 경우입니다. 어렸을 때 갖게 된 고정관념이 자신도 모르게 머리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군대에 관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군대가면 고생하고 고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고정관념을 깨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겨울에 눈을 치우는 일을 민간인에게 위탁하고 병사들이 평일에 외출했다가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월급도 현재 병장 월급이 40만 6천원입니다.

“고정관념이 강한 분들은 이게 무슨 군대야”라고 반발하시더라구요. “내가 군대 있을 때는”으로 옛날 얘기를 합니다.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돈도 거의 못받는 수준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군대는 출퇴근이 가능하거나 주말에 집에 가는 군대로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군대가 지나치게 엄격한 건데 그게 고정관념이 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통행금지가 있다가 사라졌습니다. 그전에 통행금지 없애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간첩 세상이 된다고 결사 반대하는 사람들이 엄첨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통행금지가 비정상인데 그게 고정관념이 된 거죠. 국기 하강식은 어떻습니까? 걸어가다가도 멈춰야 했습니다. 그거 안하게 되었을 때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생각이든 고정관념이 되어서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하나씩 하나씩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은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고정관념인 율법주의를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를 믿지 않고 기독교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기독교주의가 문제인 이유는 진짜 지켜야 하는 것과 매우 혼동된다는 점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권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은 안지키고 율법주의만 지킵니다.

(행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지금도 옛날이 좋았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분들이 과거로 돌아가면 그런 말을 할까요? 아파도 건강보험이 없는 시대라 병원 못가고, 방 한 칸에서 식구가 몰려자고, 목욕도 제대로 못했던 상황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나올까요? 왜 옛날이 좋았다고 하냐면 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며 살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키며 산다고 착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면 도저히 못 지키겠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지키지 않으니까 못지키겠다는 말이 안나옵니다. 지킬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으로 설명하면 교회에서 주일 성수, 헌금, 봉사 등을 요구하면 힘들지만 할 만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 좋은 신앙인이라고 칭찬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요구는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의를 위해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삶은 살지 않아요. 본질적인 삶은 살지 않고 비슷한 삶을 살면서 신앙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주의입니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순장도 하는 청년인데, 집에서는 막나가는 사람을 여러 명 보았습니다. 사실은 순장 안하고 교회와 집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줄이는게 더 바람직합니다. ‘기독교주의자’가 되지 말고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교회를 오래 다닌 친구와 황우석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아무래도 황우석 교수에 대한 철썩 같은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황우석 교수는 그래도 세계적인 과학자인데 언론에서 그렇게 죽여서야 되겠냐고, 그러면 우리나라도 같이 자멸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하였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장은 아픔이 있더라도 투명한 진실에 기반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신뢰를 더 높이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친구가 보수적인 기독교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대뜸 다음과 같이 다시 얘기를 꺼냈다. “원래 너의 신앙적 기준이라면 황우석 교수가 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오히려 반대해야 맞는 거 아니니?” 라고 말해주자, 그 친구는 나의 갑작스런 이 질문에 흠칫 놀라면서 잠시 생각해보더니 “그…. 그렇지”라고 얼버무리듯 얘기한 적이 있다. [출처]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475

현실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 없는 것을 미화하고 절대화합니다. 과거가 좋았다고 하고 어디 가면 행복할 거라고 상상합니다. 과거에 머물고 상상 속에서 삽니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변화에 몸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영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잡히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사람의 마음만큼 변화무쌍하고 잡히지 않는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지난 주에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들 보면서 가슴에 와닿았던 말은 이것입니다. “살아 있어줘 고맙다.” 92세 이금섬씨(남측)과 북측에서 온 71세 아들 리상철씨를 만나자 마자 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금섬씨는 60년 만에 만난 아들을 향해 “고생했다” “살아있어줘 고맙다”며 애틋한 부정을 표현했습니다. 부자 간의 정, 사랑은 60년의 시간을 넘어서 이어졌습니다.

이와같이 마음이 연결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아직 마음이 연결되지 않았다면 교회가 건설되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를 감동하시기에 교회가 지금까지 존재합니다. 교회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 마음이 영원하기에 교회도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는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의 영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00. 그리스도인으로 살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줘 고맙다”고 하시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고통이 녹아들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이 시대에 구속사가 필요한 이유(김영철 목사)

이번주는 평택 두란노 교회 김영철 목사님께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3:33~43, 2018년 08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눅 23: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눅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눅 23: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눅 23: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눅 23: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눅 23: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눅 23: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눅 23: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눅 23: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눅 23: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눅 23: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교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1

# 본문

사도행전 7:55~60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핵심 구절(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 설교 듣기

# 한줄 요약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0. 예수님은 길이고 문이다

교회 역사에는 기독교인의 대다수가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을 보내서 오류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현대에 다수의 기독교인이 잘못알고 있는 가르침은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조금씩 강조점은 달랐지만 반복된 일입니다.

4세기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이단 사상을 만들어 교회를 부패시킬 때 아타나시우스란 사람이 나와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아다나시우스 때문입니다.

5세기 초에 펠라기우스가 거짓 교리를 유포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워주셨습니다.어거스틴의 책은 지금 박사학위를 몇 개 받은 사람이 읽어도 위대한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된 사람이 그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참으로 위대합니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거짓 교리를 유포할 때에 하나님은 마틴 루터와 칼빈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목숨 걸고 진리를 지킨 것입니다. 1521년 보름스 칙령은 루터를 누가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목숨 걸고 우리가 믿는 은혜의 복음을 밝혀냈습니다.1

8세기 영국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리를 일으키시고 조지 휫필드라는 걸출한 인물을 세워 복음을 전하고 영국 사람들이 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침례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곤두박질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스펄젼 목사님을 세워주셔서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종교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을 만나러 가는 유일한 길(요 14:6)이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요 10:7)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중요한 건 “하나님을 믿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자동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이 존재한다” 혹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이 기독교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의 말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란 죄와 심판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것으로 인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현상적으로 기독교인은 죄의 각성을 통해서 양심이 살아납니다. 죄를 지어도 괴롭지 않던 사람이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죽은 뒤에 막연하게 좋은 곳에 갈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져 살던 사람이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난을 감수하고 살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이끌어서 신비롭게 상호작용합니다. 인간의 측면에서는 죽을 힘을 다해서 살 길을 찾아가다가 예수님을 감격스럽게 만나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고 간증을 듣기도 했지만, 죄와 심판의 각성이 일어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기본적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지는데, 자기객관화는 커녕 유아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돌아와서 간증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눅 16:30~31)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인간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믿음은 정보 습득, 교리 이해,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던가 천국과 지옥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오늘 본문 조금 위에 보면, 스데반은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유는 성경을 바르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바르게 본 사람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이 알려주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 내 의식과 예수 의식을 분간 못할 정도로,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를 통해 자기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광신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사상이나 자기 암시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을 붙잡고 인도하시던 사상 가장 강렬한 인격이신 예수에게 사랑을 받고 열애(熱愛)하고 있다. 열 번 죽어도 아쉬운 마음뿐이다. – 예수칼럼 김준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스데반이 본 환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옆에 계신 거니까 비서같은 역할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곳은 보좌 옆입니다. 비서는 같은 보좌 옆에 있을 수 없고 아래에 있습니다. 동등한 신분만 보좌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인 이유도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하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사탄이 가장 알리기 싫어하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믿으면 악한 영이 파고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연 구원받은 자인가를 괴롭게 고민하던 존 번연은 어느 날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 갑자기 어떤 생각이 제 양심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다음과 같은 한 문장이 제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네 의는 하늘에 있느니라.” 그리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모습이 영혼의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다리를 꽁꽁 묶고 있던 사슬이 풀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2.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예수님도 사랑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스데반도 최후에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무분별한 분노를 터뜨리거나 자기 중심적인 광기를 보여주는 교인이 있습니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려고 이익 단체처럼 시위를 하고 정치 집단처럼 선동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두려움 때문에 갖는 존경심만큼 비열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갖게 된 존경심을 신앙으로 포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합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존경심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았다고 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요즘 교회에서 가장 보기 힘든 사람이 기독교인일지도 모릅니다.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따르자고 주장하고 손해보더라도 사랑이 우선이라고 외치면, 스데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박해받은 것처럼 박해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회색 지대에 숨어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 코로 숨 쉬고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을 찾아 역사의 정문으로 들어오시지 않고 수채 구멍(말구유)으로 불청객처럼 오셨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을 찾아 물 한 잔을 청하여 그렇게도 낮게 그렇게도 조심스럽게 만남을 위하여 닫혀진 문에 노크를 시도하신다. 예수는 전지 전능하신 분. 남을 구원할 수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무능했고 천군 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으나 나 위해 무능한 사형수가 되셨다. – 예수칼럼

3. 예수님은 길이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인 상태입니다.

(엡 2:1~5)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영으로 기독교인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기도하지 않고 확신 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늘과 지상이 구분이 없어집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사는가?” 이것은 시인 하이네의 물음이다. 이 물음 속에 종교와 철학과 도덕의 물음의 원점이 있는 것 같다. 누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지으셨나이다. 그런고로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는 평안이 없었나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고백이다. 예수를 모르고는 나도, 하나님도 모른다(파스칼).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다(요 14:9). – 예수칼럼 김준곤

00. 예수님의 제자, 스데반

스데반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한 기도가 증거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인지 아닌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비로소 제자인 것입니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처음에 언급했던 18세기 기독교의 위기를 구한 조지 휫필드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닳아 없어지는 사람이 됩시다.

찬양과경배. 195 언제나 내 모습

[교리] 십자가의 도 2

# 본문

고린도전서 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한줄 요약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도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 0. 선택의 어려움, 필터가 필요

우리나라에는 ‘돌잡이’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돌이 된 아이 앞에 쌀, 돈, 활, 붓, 실을 놔두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장래를 점치는 풍습입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놓아서 선택 범위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미신적인 풍습이라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우리 인생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조안 롤링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선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선택과 관련해서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습니다. 선택 장애입니다. 무언가를 선택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쇼핑을 하려고 해도 쇼핑몰이 매우 많고, 뉴스를 보려고 해도 인터넷에 가짜 뉴스가 넘칩니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도 선택하기가 힘듭니다.홈쇼핑에 대해서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이 홈쇼핑을 주로 이용하는 것 같은데 홈쇼핑은 어느 정도 선별을 해서 파는 것이라 그런지 대체로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것 같더군요. 전에는 아내가 홈쇼핑으로 무언가를 사는 걸 싫어했는데 요새는 오히려 이게 시간 절약인 것 같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비슷한 선택 장애가 생겼습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방송, 홈페이지, 유튜브 등으로 설교와 성경 공부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두어서 선택의 범위를 줄여야 합니다. 정수기에 필터를 설치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터를 통과한 물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물은 선택 사항에 포함시키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강력 필터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기독교는 깨끗한 기독교이고 통과하지 못한 기독교는 오염된 기독교라고 보면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기독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십자가라는 필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히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서 하나님이 걸러내려고 하셨던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기적의 필터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걸러내려고 하셨던 첫번째 요소는 능력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이 표적을 구했다는 말은 기적을 구했다는 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적을 구하는게 왜 잘못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적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능력만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것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기적은 수단이고 부수적이었습니다. 목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금식하면 일이 형통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가르침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일이 형통하고 문제가 해결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기적만을 바라보면 일상이 무너집니다.

>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을 가는데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더니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대박이 난 농부는 그 때부터 농사는 접어둔 채 하루종일 나무 밑둥만을 바라보며 토끼가 와서 부딪혀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농부는 그 후 한마리의 토끼도 얻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밭에 가 보았지만 이미 잡초가 우거져 있었고 결국 농부는 일년 농사를 망쳤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저는 기적 같은 기도 응답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응답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기도 응답이 인생을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앙 명언이 있습니다.

> 내가 기도할 때 우연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 우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연으로 가장하여 기적을 주십니다. 우연을 지나치게 기대하면 오히려 우연이 없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을 믿어야 하지만 기적만을 바라서는 안되고,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지만 기도와 금식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기적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겉보기에 좋아보이지만 신앙에 큰 해를 끼칩니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저는 이 명언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돕는자를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한 가지 말만 추가하면 완전합니다.

> 하나님은 의를 위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말입니다.

## 2. 지혜의 필터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걸러내려고 하셨던 두번째 요소는 지혜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사람을 파악할 때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용어의 정의를 묻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목사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기독교인에게 기독교가 무슨 종교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평소 생각이 깊지 않고 기본기가 없다면 뻔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관점에서 용어를 재정의하고 거기에 맞는 통찰을 보여줘야 실력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사유의 깊이를 측정하기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14년에 출간되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정의가 무엇이냐는 간단한 질문을 심도있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일수록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각이 깊은 사람을 구분하기 좋습니다.

위의 방법을 활용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란 무엇일까요? 돈을 잘 벌게 하는 것, 성공하게 하는 것,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용어는 달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지혜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이 세상을 잘 먹고 잘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데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이후까지 생각을 넓히면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전 생애를 선교사역으로 보내고 귀국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어 고국인 미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갔다가 오는 미국의 대통령과 한 배를 타고 같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배에서 내리자 군악대의 예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붉은 카펫이 깔렸으며, 환영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이 먼저 항만을 빠져 나간 후에 맨 나중에 한평생 아프리카에서 고독과 싸우며 복음을 선포한 노 선교사가 배에서 내렸으나 그때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예포 소리도, 주단도 펴지지 않았다. 그는 쓸쓸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빠져 나오면서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하나님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대통령은 그렇게 열열하게 환영을 받는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평생을 바치고 늙은 몸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이 이토록 초라하고 고독해야 합니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서 항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석양의 구름 사이로 찬란한 빛살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선교사를 향하여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그날에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아니라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붉은 카펫이 아니라 황금과 유리 길을 깔고 내가 너를 친히 마중나가 줄 터이니,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것을 잊지 말라”는 음성이었다.

> 에콰도르 와다니 족을 전도하기 위해 갔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은 미련한 것 같지만 지혜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이 세상만을 범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딸에게 “잘 먹고 잘 살려는 목적으로만 교회 다니면 번영주의자다”라고 말했더니 딸 아이가 “아빠 그러면 난 번영주의자인가 봐”라고 말하더라구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번영주의자야. 베드로나 요한도 그랬어. 하지만, 점점 변화되었어.”라고 말입니다.

## 3. 십자가의 필터

반대로 하나님이 남기려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본문에서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아담, 아브라함, 다윗 등 위대한 성경 인물들도 자기 힘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갔습니다.

십자가의 필터는 정직한 사람을 통과시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은 이 필터를 통과합니다. 복음의 역설입니다. 복음은 엄격한 것같지만 자비롭고, 어려운 것 같지만 쉽습니다.

## 00.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누구나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 해롤드 브라운은 지옥을 ‘인간적인 의지의 자유가 가져다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기념품’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 때문에 실존하게 된 것이다. 루이스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종류의 집단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뜻대로 되리라”고 선언하신다.

> 런던에 있는 성 바울 성당에 가면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란 매우 감동적이고 매력적인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손에 등불을 켜들고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 그림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 화가에게 예수님께서 문빗장을 여시는 모습으로 그리도록 당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화가는 “문고리가 안쪽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너그러우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걸맞지 않다. 또 한편으로 그 어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괴롭히기 좋아하신다는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와 동행하든지 아니면 그를 멀리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옥 / 해롤드 브라이슨

이 세상만을 바라보는 기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찬양과경배. 101 은혜로만 들어가네

[교리] 십자가의 도

# 본문

고린도전서 1:18~24

(고전 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한줄 요약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도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 0. 원하는 것은 얻기 위해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 바디매오를 만났을 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질문하시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가 왔는데 망설이면 어떻게 그것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생각과 다른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왕이 고종인데 고종이 12살에 왕이 되어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의 친척들이 세도를 부려서 곤혹을 치렀기 때문에 친척이 없는 여인을 고종의 부인으로 맞아 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여인이 민비, 다른 이름으로는 명성황후였습니다. 친척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왕의 부인이 된 이 여인은 흥선대원군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중앙의 요직은 물론 지방의 방백, 수령까지도 좋은 자리는 모두 민씨가 차지하였다”고 비판했습니다. 친척이 없던 민비는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을 대거 등용하여 세력화하고,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아서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을 몰아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자기파괴적인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이유가 저는 기독교 박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민비와 결혼한 1866년은 병인박해가 일어난 해인데, 천주교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천주교인 8천 명이 처형된 비극입니다. 개신교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적대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한 사람은 자기 생각에 최선의 선택을 하더라도 어리석은 선택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팀과 조이스는 한 건축업자와 주택개조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건축 업자는 나쁜 사기꾼이었다. 팀과 조이스는 집 두 채에 대해 고스란 히 손해를 보아야 했다. 어느 날 조이스의 아버지가 물었다. “얼마 나 힘드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이 일 은 우리 결혼생활에 큰 힘을 가져다 주었어요. 그 어느 것과도 이 시간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팀과 저는 지금처럼 서로를 가깝게 느 껴본 적이 없었어요. 저희는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드린답니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지요. 저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답니 다.” 하나님께 당신의 고난 기간 중에 가르쳐 주시기로 의도하신 모든 교훈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그 길을 다시는 걷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고난은 우리를 더 나쁘게 하거나 더 낫게 할 것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출처] 아버지의 일곱 가지 계절 / 패트릭 M. 모레이

## 1. 능력을 구한 유대인 vs 지혜를 원한 헬라인

유대인, 헬라인이라고 하니까 지금 우리하고 별 상관 없는 사람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 헬라인이 여전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했습니다. 표적은 지금 용어로 하면 능력을 원했다는 말입니다. “능력이 있어야 기독교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대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은 도깨비 방망이 같은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알게 하려는 능력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소경 바디매오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소명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왜 바디매오에게 능력을 발휘하셨는지 아십니까? 바디매오에 관한 구절을 보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구원자,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 인류를 구원하기로 약속된 그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막 능력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능력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본질이고 능력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증명하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은 중요하지 않고 능력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따르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럴 때 능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했습니다. 독특한 생각과 색다른 사상에 이끌렸습니다. “성경을 기가막히게 해석하네”라는 말에 이끌리면 헬라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성에 신천지에 빠진 청년이 있다고 해서 설득해 달라고해서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설득을 잘 했는데, 계속 요한계시록 얘기만 하더니 이렇게 따졌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이 나오는데 그게 누군지 압니까? 아냐구요?”

성경에 그게 누군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자신과 홍종효라는 사람이 두 증인이라고 합니다. 근거가 전혀 없는 황당한 주장일 뿐입니다. 그런 황당한 주장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일찌기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 거짓말도 100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 거짓말도 매일하면 진실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요?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물어야 할 것은, “이 곳의 예배스타일을 내가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이 교리들은 참된가? 여기에 거룩이 있는가? 나의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 이 문을 두드리길 꺼리는 것은 나의 교만이나 단순한 취향 때문이거나 특정 문지기(예를 들면, 특정 교회의 목사나 그의 설교방식들)를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은 아닌가?” 입니다.

## 2. 하나님의 생각 vs 사람의 생각

성경 해석은 새롭고 독특한 이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알려주신 해석방법을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해석방법이 교리입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시각이고 성경을 바라보는 마음이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교리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생각이고 마음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비뚤어지면 아무리 좋은 걸 가져도 주어도 나쁘게 해석할 뿐입니다. 성경이라는 거룩한 책을 주어도 생각과 마음이 비뚤어지면 엉뚱하게 해석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리을 알아야 합니다.

정수기 필터가 물에서 나쁜 성분을 걸러내는 것처럼 교리는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필터링해서 악한 요소를 걸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이대로 천국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생각과 마음이 바뀌지 않은 채 천국에 가게 되면 천국이나 여기나 별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천국을 천국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필터링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필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적인 모든 안좋은 생각을 걸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의 대적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거한 십자가 중심을 부정합니다. 십자가는 신앙과 불신앙의 기준입니다.

이슬람교 : 하나님의 중요한 선지자가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 했을리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십자가에서 발현된 ‘하나님의 친애한 부성과 사죄의 깊은 확신’이 없다
힌두교 : 십자가의 역사성은 인정하나 그 구원의 의미는 부정
니체 : 십자가에 드러난 신의 역약함 때문에 거절, 알프레드 아이어 – 기독교의 야만적인 교훈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때에만 우리는 회개라는 죽음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되지 않는 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의 빚을 갚으셨으며 그로서는 전혀 겪을 필요가 없는 고통을 우리를 위해 겪으셨다는 말에 담긴 뜻입니다.

## 3. 부르심을 받아야 보이는 십자가

성경의 감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내 안에 있는 나쁜 성분을 제거해야 합니다.

나쁜 성분이 제거될 때 죄의 각성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보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십자가가 감격스럽게 다가옵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보아야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선택하고 따르고 실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463 우리 보좌 앞에

기뻐하는 이유

# 본문

빌립보서 1:12~18 / 2018년 07월 22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본문

빌립소서 1:12~18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핵심 구절

(빌 1: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줄 요약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이 잘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각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교회 관련해서 다른 부분을 설교합니다. 다음 주부터 교리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 0. 고수의 생각법

가끔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이 엉뚱한 사람은 무시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이라면 다릅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고수입니다.다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켜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회사로 만든 사람이 스티븐 잡스입니다. 세계 경영자들이 존경하는 경영의 최고수입니다.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이 사람이 제작해서 보급했으니까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이 사람 모토가 “다르게 생각하자”입니다. 컴퓨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과장하면, 아파트 한 채 만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작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걸 사람들이 집에 한 대씩 가져다 놓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가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서 판매했습니다. 애플 컴퓨터를 창업했고, 노트북 터치패드, 마우스, 윈도우를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고 플로피 디스크를 없앴으며 USB를 표준으로 만드는 등 획기적은 시도를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 당시에는 독특한 생각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를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엉뚱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고수의 생각을 배우려려고 합니다. 바울도 일종의 고수입니다. 기독교를 순식간에 로마 전역에 전파한 전도의 고수입니다. 이 바울의 생각이 독특합니다. 감옥에 갇혔는데, 기뻐했으니까요. 우리도 바울의 생각법을 배워서 적용한다면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1. 바울의 생각법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곳은 로마입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당연히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바울이 설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로마서를 써서 로마에 설립된 교회가 복음을 바르게 알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로마에 죄수로 끌려갔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로마로 오는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되자 로마에 있던 교회 중에서 일부 지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바울의 명성에 관해서 질투하고 견제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이 전도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화를 내지 않고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서 큰 성과를 이룬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제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일 중에 하나가 조훈현 9단이 응창기배에서 우승한 사건입니다. 세계 바둑 올림픽 혹은 바둑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세계 바둑 대회였는데, 거기서 예상 외로 우승해서 온 국민이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조훈현 9단이 쓴 책이 고수의 생각입니다. 거기서 하수와 다른 고수의 생각 몇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 그 중 하나가 이창호가 자신을 꺾었을 때 기뻐한 일입니다. 그는 이런 태도를 일본인 스승 세고에 9단에게서 배웠습니다.

세고에 선생님은 나에게 바둑에 대한 사랑과 곧고 깊은 정신세계를 물려주셨다. 선생님은 바둑에 일생을 바치셨다. 바둑을 위해서라면 국가도 민족도, 자신의 명예나 이익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인 우칭위안을 데려와 일본 바둑계를 뒤흔들어놓았고 한국인인 나를 세계 정상의 기사로 키워내셨다. 선생님의 레거시(legacy, 유산)는 바둑 역사에 살아 흐르고 있다. 세고에 선생님의 레거시를 나는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까. 1984년 이창호를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이 내게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아무 조건 없이 창호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창호는 바둑에 대한 재능과 자세는 물론 인격까지도 모두 완성된 상태로 나에게 왔다.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 살 때 들어온 그 꼬맹이가 열다섯에 나의 자리를 넘보는 호랑이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생애 최고의 기쁨과 최악의 지옥을 동시에 맛봐야 하는 혼란을 겪었다. 그때는 극복하기 힘들었고 그냥 견뎌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창호는 나의 자랑스러운 레거시가 되었다. 창호 역시 물려받은 이 정신적 유산을 잘 계승해줄 것이라 믿는다.

세고에 9단은 국가도 민족도 명예도 이익도 생각하지 않고 바둑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최고의 제자를 남겼고 결과적으로 자신도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조훈현 9단도 이 정신을 물려받아서 이창호 9단을 키웠고 그래서 더 위대한 바둑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고수의 생각은 본질에 충실한 것 같습니다. 본질 다시 말해서 목표를 바르게 알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을 기쁘게 생각한 것이 바울을 더 위대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가 복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어렵지만 불가능해서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욕심만 버려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일입니다.

2. 사실과 해석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때로는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해석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선생님이 준 편지를 가기고 와서 어머니한테 주었습니다.

“엄마 학교 선생님께서 이 편지를 읽지말고 엄마에게 꼭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편지를 읽던 엄마는 손끝을 떨며 눈물을 흘릴것 같았습니다.그런 엄마를 쳐다보던 아이에게 엄마는 웃음을 지으며 편지를 큰소리로 읽어 주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천재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학교에는 당신의 아이를 가르칠 만한 선생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직접 아이를 가르쳐 주십시요.” 그렇게 아이는 어머니의 손에서 교육을 받으며 컸고 몇십년의 세월이 흘러 아이는 성공한 과학자가 되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를 하던 그 아이는 낡은 책상의 안쪽 구석에 있던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지적장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아이들과 함께 가르칠 수 없습니다. 더이상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편지를 읽으며 어머니의 생각에 한동안 눈물을 멈출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엄마는 나를 천재로 만드셨다.”

선생님은 에디슨의 독특한 생각을 지적 장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에디슨의 어머니는 천재라서 그런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누가 고수일까요? 선생님일까요, 어머니일까요? 어머니의 사랑이 에디슨의 감추어진 잠재력을 보게 했고, 이끌어내게 했습니다. 메마른 이성과 단편적인 합리주의는 생각을 편협하게 하고 감추어진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합니다. 생각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이성과 합리주의 뿐만 아니라 사랑을 갖추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질투해서 전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볼 만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질투로 동기가 부여되어서 전도한 사람들 속에 있는 작지만 순수한 열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키워주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건 사랑과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악한 것으로 몰아가면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현실을 냉철하게 바로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이성과 동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해석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사랑을 동시에 가져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반대자들에 관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3. 기뻐하는 이유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믿음, 소망, 사랑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기쁨.

기쁨을 추구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쾌락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도 기쁘지만, 잘못하면 이런 기쁨은 쾌락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기쁨은 하늘을 바로보고, 비슷한 쾌락은 땅을 지향합니다. 기쁨은 고상한 목표를 이루어갈 때 가장 잘 누릴 수 있습니다.

 (히 12: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남자들이 인생에서 가장 기쁠 때가 결혼도 있지만, 제대할 때인 것 같습니다. 부대 정문을 나설 때 만감이 교차합니다. 고생했던 모든 일들이 스쳐지나가면서 그 고생에 몇 배 더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튜브가 항상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기쁨은 고통을 능가합니다.

기쁨은 항상 고생을 능가합니다. 고생한만큼 그 이상 기쁘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 고통이 가득차도 그 고통이상의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을수록 그리스도인은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 기쁨은 고통을 압도한다

우리가 장차 하늘 나라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기쁨을 조금 당겨서 누렸으면 합니다. 나중에 기쁨을 누릴 것이 확실하니까 미리 당겨서 이 땅에서 기뻐합시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통의 길을 걸어갈 때에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압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493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구속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 본문

로마서 3:10~21 / 2018년 07월 15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내용

두란노교회 김영철 목사님 설교

하나되는 비결

# 본문

에베소서 4:1~6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께서 하나로 묶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되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 개요

두란노 교회와 예배를 함께 드리려고 합니다. 그 배경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0. 훌륭한 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오늘날 사회는 협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혼자서는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혼자서는 재능이 부족해도 협력을 잘해서 큰 성공을 이루기도 합니다. 러시아에서 한창 뜨겁게 진행되고 있는 월드컵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8강에 진출할 팀이 가려졌습니다. 우리나라와 가장 처음 경기를 했던 스웨덴이 8강에 올라갔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는 스웨덴, 멕시코, 독일과 한 조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그중에서 스웨덴을 1승할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유명한 선수 한 명 없는 팀이었기 때문에 만만하게 본 것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선수 한 명 없던 스웨덴만 8강까지 진출해서 우리나라가 속한 조에서 가장 높이 올라갔습니다. 스웨덴을 보면 개인으로는 유명한 선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팀으로서는 매우 훌륭합니다. 개인이 뛰어나지 않은데, 팀으로는 좋은 경우는 어느 부분에서나 발생합니다. 경영학자들은 왜 뛰어난 개인을 모아놓아도 훌륭한 팀이 되지 않는지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입니다. 뛰어난 성과를 달성한 개인은 이기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양보심이 많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보다는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일처리하는 사람이 성과가 좋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팀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만 모아놓으니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개인은 이기적일수록 성과를 많이 내지만, 팀은 이타적일수록 성과를 많이 냅니다. 물론, 팀에는 뛰어난 개인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팀에 이타적인 사람이 없으면 팀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어떤 팀이 놀라운 성과를 냈다는 건 그 팀에 반드시 뛰어난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교회가 팀이라고 알려줍니다. 교회가 팀이라면 어떻게 해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뛰어난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나아갈 방향도 바로 이와 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의 앞으로 진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교회의 기도 제목

우리교회가 평택 뉴코아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기간이 올 연말까지입니다. 제가 이랜드 사목을 하면서 주일예배 서비스를 겸해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랜드 사목실이 분사하면서 예배 장소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연초에 내년부터 예배드릴 장소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었습니다.

예배 장소를 찾는 것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중요한 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예배 장소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주 전에 두란노 교회 김영철 목사님으로부터 예배를 함께 드리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일단 한 달에 한 번 정도 예배를 함께 드려보고 우리교회 성도님들과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김영철 목사님의 제안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만 우리가 쫓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실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순종할 의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는 것이 복일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따르지 못하면 불순종만 늘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랫동안 교제해 왔고 구속사라는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받기보다 주기

어떤 분의 주례사를 인상 깊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결혼에 실패하는 이유가 뭐냐? 이득을 얻기 위해서 결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내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이런 이득을 얻겠지’라고 생각하고, 남편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이런 이득을 얻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결혼한다는 겁니다.

생각만큼 이득을 얻지 못하면 서로에게 분노하고 다투게 됩니다. 급기야는 이혼하거나 이혼하지 않더라도 냉랭하게 남남처럼 살아가는 사이가 됩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구요? 서로 이득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저 사람하고 결혼해서 이런 도움을 주어야지’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이런 게 부족하니까 내가 그걸 보완해 주어야지’라고 생각하면 다툴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이득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득을 안겨주려는 태도가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모든 연합, 하나됨의 비결은 받기보다 주기에 힘쓰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두란노 교회와 연합해서 예배를 드릴 때도 ‘연합해서 예배를 드리면 우리교회에 이런 이익이 생기겠지’라는 생각을 먼저한다면, 이 연합은 볼 필요도 없이 깨어질 것입니다. 좋은 관계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익을 줄 것인지 고민하고 실제로 이익을 안겨줄 때만 연합은 유지되고 좋은 관계로 남을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주기만 하면 나는 뭐가 남습니까? 뭐가 남을까요? 남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성장입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은 한 종류 밖에 없습니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학생회, 청년회 때 설겆이하고 뒷정리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성장합니다. 제자 훈련, 성경 공부가 사람을 성장시키지 않습니다.

3. 하나됨을 지키자

하나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되어 있습니다. 하나됨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 만나도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편안합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뜻이 통합니다. 속마음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해코지하려 하지 않고 섬기려고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요? 하나됨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원래 하나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과 사랑을 최대한 실천해야 합니다.

# 하나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인데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대속 사상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이 사상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한 번 시도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