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1 예수님, 베드로를 만나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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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5:1~11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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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

0. 만남

만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현재는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책이지만,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톤레사프’는 캄보디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여인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지금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몬순이 닥치면 엄청난 폭우가 몰아쳐서 집이며 세간을 모조리 휩쓸어버리죠. 그러면 사람들은 공동으로 뗏목을 만들어서 몇 집이 함께 살아요.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서 뗏목이 모습을 보이고,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죠. 바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저는 해마다 6개월 동안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두 옆집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표정이군요. 하지만 이웃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상대방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앞서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면 아직도 새학기가 되면 기대에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하고 말입니다. 반 아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기대합니다. 기성 세대는 워낙에 힘들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만남이 기쁠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만남에 관해 기대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만남이 기피해야 할 일이 된 이유는 만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면 만남도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그래서 그의 삶이 기쁨과 기대로 가득차게 되었을까요?

1. 다가오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본문과 병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 4:18~20)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만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자 마자 모든 것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간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본문과 연계해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에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갔던 일을 생각하면 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은밀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온 줄로 오해할 정도로 말입니다. 신앙이 내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만, 좁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혹독한 고문을 당해서 신앙을 부인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지만, 고문이 너무 심해서 신앙을 부인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매우 편안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신앙 생활한 사람보다 실제로는 믿음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비합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니까 사람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야 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쿠마는 좁은 의미의 구원 그러니까 구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전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잘난체하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반대로 한편으로는 깊은 안도감을 줍니다. 내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도 기댈 곳이 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지구는 멈춰있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지구는 멈춰있고, 해가 도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도는 것은 해가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주변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대하며 신중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됩니다.

2. 부르시는 예수님

다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결단의 계기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결단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결단할만한 근거도 주십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라는 권유입니다. 그냥 놔두면 우리는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때는 속삭이시고, 기분이 안좋을 때는 양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만, 고통중에 있을 때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적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번에 헌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무죄 판결 난 것이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했다. 기도 응답을 체험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확실한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확실한 체험일까요?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한 체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 체험입니다. 성령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사역은 죄의 각성 사역,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도록 조명하시는 사역,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보통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양심이 악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한 양심의 자연적 작용으로도 때로는 통렬한 후회와 자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변화는 오직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안이 열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 (고후 3:18) 나타납니다.

깊은 곳은 외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내면을 비추고 그 빛을 통해서 내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 깊은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잘 살게 해 주어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성을 깨달았을 때 감격하게 됩니다.

신문 기사에서 한 어머니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당신들은 댓글 한 줄 썼지만, 내 딸은 목숨을 버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댓글 때문에 삶을 마감한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댓글 한 줄도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악도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의 불씨를 보아야 하고 그 비극성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인간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지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악이 있는 이상, 이 세상에는 비극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악의 불씨가 제거되지 않으면 어디나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문제를 발견하고 슬퍼하고 붙들고 씨름한 사람만 그리스도께 감격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절망을 체험해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조명됩니다.

3. 만나주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세 번째이유는 베드로에게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말씀 잘 듣고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본문과 같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건 기적을 체험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데 머물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자신을 보는 일이 일어납니다. 빛이 비치면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만나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됨을 보게 됩니다. 구약 시대 이사야가 체험한 일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 하늘나라 재판정에 불리워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됩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더니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사야가 그전에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우리도 동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이익 단체나 사교 장소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그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염려할 필요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자신이 선택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교회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출처] 장영학,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자기를 보는 것은 가장 높은 정신적 단계입니다. 하지만, 신앙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베드로는 이런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경황 없는 중에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다시피 예수님께서 다시 그를 찾아 와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에 이끌려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서 믿음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오셨고, 깊은 곳으로 가자고 권유하셨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러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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