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1_부활의 증거

2019년 04월 2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44~49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저는 교회를 몇 년 다니면서도 부활절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진짜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믿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걸 믿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분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는 않는데, 다들 그랬다니까 믿는 척하거나 하니면 그러려니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활 신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와 부활의 증인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부활의 증거 1

– 기독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첫번째 증거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입니다.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축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시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름 충성스럽고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와 좌절, 분열과 갈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현대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니 가늘게라도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질적인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뛰어난 교주가 특별한 가르침과 기이한 기적을 행해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죽었습니다. 교주가 마련한 기반 위에 뛰어난 후계자들이 세력을 키워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이 물론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로마의 사형수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할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사형수를 믿는 종교일 뿐입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최후가 비참합니다. 그런 분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한가지 가능성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거짓말로 모의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독교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맞섰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멸절하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다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10대 박해로 정리합니다. 1대 박해인 네로 황제의 박해(AD 54~68년)에서부터 10대 박해인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AD 284~305년)까지 250년 이상을 박해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이보다 심한 박해를 이토록 오랫동안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던 그들을 이토록 맹렬하고 담대한 사자들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위협과 채찍, 감옥과 고문,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열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용맹한 사자들이 되어 목숨을 걸고 증언하도록 만든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와 역동적 능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콜로세움 아기 한 사형수를 믿는 종교가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종교가 로마 제국이 멸절하려던 종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불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천년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증거 2

– 성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두번째 증거는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예언된 사건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에 관한 예언은 구약의 족장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조와 함께 잔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깨어날 것을 암시하는 부활의 신앙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무덤)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라고 예언하였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충분한 증거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추상적이거나 환상적인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17:22)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32~36)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에 던져졌던 시체가 살아났던 사례도 있다.(왕하13:20~21) 단순히 예언만했다면 어쩌다가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나야만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라고 말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리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점말입니다. 부활을 하나의 독립된 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고,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연속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기록이 이 연속적인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 필연성을 알려줍니다. 단순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거나 실제로 죽었지만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 오셔야만하고 대신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고 죽으셔야만 하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연속적인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의 증거 3- 교회

예수님 부활의 세번째 증거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을 정보습득, 지적동의, 자기확신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인다거나 존재를 확신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데 그 사실을 사탄은 더 잘 인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믿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심겨진 감사와 감격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한가지 방법 외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의 인격적인 만남은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그것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고난받으심,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적으로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의 각성은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것을 의미하지만, 그 전에 자기자신을 보는 자기성찰력이 생깁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여전히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에너지입니다.

부활의 증인이다

증인은 증인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9.03.10_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9년 03월 10년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4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같은 예루살렘의 주류 종교인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적극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을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으로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진실한 삶 때문에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받은 존경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평판과 명성 혹은 직책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했기 때문에 얻어진 밑으로부터의 존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례 요한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이 든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혼란에 빠졌을까요? 이유는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면 바로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을 심판하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3:7~12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 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의 뜨거운 열정과 불같은 성격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빨리 심판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면 엄청난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군사적인 메시아,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당연히 로마군대를 패퇴시키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후에 타락한 제사장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패퇴시키기는 커녕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한가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이 많습니다.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메시아의 초리시 사역과 재림시 사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처음 오셨을 때는 구원을 가져오시고, 두번째 오실 때는 심판을 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성경을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만, 편견을 가지고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5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는,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행할 사역을 정확하게 예언했고 그 일을 예수님은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신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맞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변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엉뚱한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변호입니다. 한때 세례 요한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성급한 비난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는 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칭송하던 말이 가시돋힌 비난으로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기억해 주십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던 시절의 세례 요한을 추억하신 것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거부했고, 왕궁이 아니라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인생을 남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해서 변명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위해서 변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최후에 변론해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을 알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한 일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헤롯을 추종하거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헤롯을 메시아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가 대립할 때 외교적인 감각을 가지고 로마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인 힘을 추종하던 사람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찬 가르침을 가르쳤지만, 엄격해 보이는 모습이 호감을 주었습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세례 요한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의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라는 개인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 실패했다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갖는 이유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를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례 요한을 붙드는 굳건한 근거입니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용서받고 스스로 구원 받는 셀프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물론,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주의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탄원이고 요청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에 근거합니다.

R.C. 스프롤도 구원의 확신이 유익하지만, 구원의 확신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동시에, 넓은 의미의 구원, 즉, 그 전후의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후쿠마의 가르침은 저의 오랜 의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처럼 위선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지만 거룩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강조하지만 셀프 구원이라는 인본주의를 강화할 뿐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면서 입에 거짓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류 종교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또한 불의한 자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의를 추구함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헌신과 그들이 변심할지라도 그들의 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언제나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께 매혹되는 것이고 매료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