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

# 본문

로마서 3:10~21 / 2018년 07월 15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내용

두란노교회 김영철 목사님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 세미나 안내

2015년 5월 17일, 24일(주일) 오후 2시에 수원 예닮교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 세미나를 인도합니다.

제가 지혜롭게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미나 안내]

 

강사 : 장춘권 목사

날짜 : 2015년 5월 17일, 24일(주일)

시간 : 오후 2시

장소 : 수원 예닮교회, 이기현 목사 시무

준비물 : 필기도구, 형광펜,  A4용지 20장 지참

오시는 길 : 수원 예닮교회 오시는 길

 

 

 

 

 

 

문제는 다시 ‘구원’이다

근래 우리 나라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모아집니다. 그러니까 아닌 건 알겠는데, 긴 건 뭘까요?

데카르트의 치열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합니다. 갑자기 데카르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때문입니다.

아다시피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철학자’입니다. ‘회의주의자’는 뭐든지 의심하고 보는 사람들인데, 그러다 보니 혼란이 생겼습니다. 뭐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책상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환상을 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전 인류가 단체로 꿈을 꾸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매트릭스 같은 영화도 있으니 가능성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고민 가운데서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입니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의심을 하려면 데카르트 만큼 의심해서 의심의 끝을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다.

기독교가 위기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어쩌면 매우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정말 근본부터 샅샅이 점검해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고치면 우리 나라 기독교는 앞으로 큰 부흥을 맞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독교 위기의 원인은 중세 시대와 동일합니다. ‘면죄부’의 판매가 기독교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면죄부는 ‘인본주의적 구원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말씀에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구원받는다.”
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얼핏 보면 성경적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가진 주장입니다.

위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인본주의’입니다. 구원과 구원의 확신을 갖는 주체가 모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을 구원의 객체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줄 수 밖에 없다는 주장에 다름 아닙니다.

복음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다가 왜곡하게 된 예입니다. 필자도 선교단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이 주장이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생각이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제자리를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청교도들을 통해서 그 쳇바퀴를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무의식적인 두려움, 예상되는 논란들, 내 자신부터 되돌아보아야 하는 부담감 등이 사고의 전진을 막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청교도들은 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구원과 회심의 문제에 집착했을까?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구원과 회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을까?”

이것이 예전의 청교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니까 청교도들이 구원과 회심의 문제에 집착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회심에 ‘매료’되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신비가 그들의 정신 세계에 말할 수 없이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본 사람이 그것을 추천하고 소감을 얘기는 것과 비슷한 행동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 안 받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언제 구원을 받았냐는 질문은 더더구나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망언입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교회사를 통해서 가장 복음의 영광이 드러났던 시대와 현 시대를 비교해 보는 일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교회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더 위대했던 신앙의 선조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일찍 교만에 물든 것이 아닐까요? 그 교만이 복음의 영광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은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교만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영광, 구원의 신비,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