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5_[교리] 십자가의 도 2

# 본문

고린도전서 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한줄 요약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한마디로 십자가의 도라도 불렀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 개요
교리에 관한 설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 다른 말로는 기독론에 관해서 설교하기 전에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십자가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바르게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해야 겠습니다.

## 0. 선택의 어려움, 필터가 필요

우리나라에는 ‘돌잡이’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돌이 된 아이 앞에 쌀, 돈, 활, 붓, 실을 놔두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장래를 점치는 풍습입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놓아서 선택 범위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미신적인 풍습이라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우리 인생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조안 롤링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선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선택과 관련해서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습니다. 선택 장애입니다. 무언가를 선택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쇼핑을 하려고 해도 쇼핑몰이 매우 많고, 뉴스를 보려고 해도 인터넷에 가짜 뉴스가 넘칩니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도 선택하기가 힘듭니다.홈쇼핑에 대해서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이 홈쇼핑을 주로 이용하는 것 같은데 홈쇼핑은 어느 정도 선별을 해서 파는 것이라 그런지 대체로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것 같더군요. 전에는 아내가 홈쇼핑으로 무언가를 사는 걸 싫어했는데 요새는 오히려 이게 시간 절약인 것 같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비슷한 선택 장애가 생겼습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방송, 홈페이지, 유튜브 등으로 설교와 성경 공부가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을 두어서 선택의 범위를 줄여야 합니다. 정수기에 필터를 설치해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필터를 통과한 물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물은 선택 사항에 포함시키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강력 필터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기독교는 깨끗한 기독교이고 통과하지 못한 기독교는 오염된 기독교라고 보면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기독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십자가라는 필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히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서 하나님이 걸러내려고 하셨던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기적의 필터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걸러내려고 하셨던 첫번째 요소는 능력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이 표적을 구했다는 말은 기적을 구했다는 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적을 구하는게 왜 잘못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기적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능력만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것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기적은 수단이고 부수적이었습니다. 목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 알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금식하면 일이 형통하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가르침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람들이 일이 형통하고 문제가 해결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기적만을 바라보면 일상이 무너집니다.

>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을 가는데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더니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대박이 난 농부는 그 때부터 농사는 접어둔 채 하루종일 나무 밑둥만을 바라보며 토끼가 와서 부딪혀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농부는 그 후 한마리의 토끼도 얻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밭에 가 보았지만 이미 잡초가 우거져 있었고 결국 농부는 일년 농사를 망쳤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수주대토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입니다.

저는 기적 같은 기도 응답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응답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기도 응답이 인생을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앙 명언이 있습니다.

> 내가 기도할 때 우연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을 때 우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연으로 가장하여 기적을 주십니다. 우연을 지나치게 기대하면 오히려 우연이 없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기적을 믿어야 하지만 기적만을 바라서는 안되고,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지만 기도와 금식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기적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겉보기에 좋아보이지만 신앙에 큰 해를 끼칩니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저는 이 명언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돕는자를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한 가지 말만 추가하면 완전합니다.

> 하나님은 의를 위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말입니다.

## 2. 지혜의 필터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걸러내려고 하셨던 두번째 요소는 지혜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사람을 파악할 때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용어의 정의를 묻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목사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기독교인에게 기독교가 무슨 종교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평소 생각이 깊지 않고 기본기가 없다면 뻔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관점에서 용어를 재정의하고 거기에 맞는 통찰을 보여줘야 실력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딱히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사유의 깊이를 측정하기 좋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14년에 출간되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이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정의가 무엇이냐는 간단한 질문을 심도있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일수록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각이 깊은 사람을 구분하기 좋습니다.

위의 방법을 활용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란 무엇일까요? 돈을 잘 벌게 하는 것, 성공하게 하는 것,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용어는 달라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지혜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이 세상을 잘 먹고 잘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데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이후까지 생각을 넓히면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전 생애를 선교사역으로 보내고 귀국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어 고국인 미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갔다가 오는 미국의 대통령과 한 배를 타고 같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배에서 내리자 군악대의 예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붉은 카펫이 깔렸으며, 환영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이 먼저 항만을 빠져 나간 후에 맨 나중에 한평생 아프리카에서 고독과 싸우며 복음을 선포한 노 선교사가 배에서 내렸으나 그때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악대의 나팔 소리도, 예포 소리도, 주단도 펴지지 않았다. 그는 쓸쓸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빠져 나오면서 이렇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하나님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는 대통령은 그렇게 열열하게 환영을 받는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평생을 바치고 늙은 몸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이 이토록 초라하고 고독해야 합니까?”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혼자서 항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석양의 구름 사이로 찬란한 빛살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선교사를 향하여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그날에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아니라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붉은 카펫이 아니라 황금과 유리 길을 깔고 내가 너를 친히 마중나가 줄 터이니,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것을 잊지 말라”는 음성이었다.

> 에콰도르 와다니 족을 전도하기 위해 갔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은 미련한 것 같지만 지혜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이 세상만을 범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딸에게 “잘 먹고 잘 살려는 목적으로만 교회 다니면 번영주의자다”라고 말했더니 딸 아이가 “아빠 그러면 난 번영주의자인가 봐”라고 말하더라구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제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번영주의자야. 베드로나 요한도 그랬어. 하지만, 점점 변화되었어.”라고 말입니다.

## 3. 십자가의 필터

반대로 하나님이 남기려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본문에서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아담, 아브라함, 다윗 등 위대한 성경 인물들도 자기 힘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갔습니다.

십자가의 필터는 정직한 사람을 통과시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은 이 필터를 통과합니다. 복음의 역설입니다. 복음은 엄격한 것같지만 자비롭고, 어려운 것 같지만 쉽습니다.

## 00.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누구나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 해롤드 브라운은 지옥을 ‘인간적인 의지의 자유가 가져다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기념품’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 때문에 실존하게 된 것이다. 루이스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종류의 집단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들의 뜻대로 되리라”고 선언하신다.

> 런던에 있는 성 바울 성당에 가면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란 매우 감동적이고 매력적인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손에 등불을 켜들고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 그림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 화가에게 예수님께서 문빗장을 여시는 모습으로 그리도록 당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화가는 “문고리가 안쪽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너그러우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걸맞지 않다. 또 한편으로 그 어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괴롭히기 좋아하신다는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와 동행하든지 아니면 그를 멀리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를 부여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옥 / 해롤드 브라이슨

이 세상만을 바라보는 기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찬양과경배. 101 은혜로만 들어가네

어거스틴의 회심

어거스틴의 회심 간증

http://sdcmd.egloos.com/75491

성경에 기록된 회심사건 외에 교회사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회심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끼친 신학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회심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회심사건 또한 특별해서 우리들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의 회심을 특별한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 요소를 우리는 발견해 내면서 우리들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 것은 일종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그의 회심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그 고백록의 구조를 음미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회심과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의 자화상을 비춰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회심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을 번역해 올린다. 그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히 고백록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1장: 어린시절.

2장:청소년기

3장:카르타고 유학중의 방탕생활/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 마니교에 입교.

4장:수사학교사가 됨/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또한 미와 비율에 관한 책을 저술함.

5장:마니교에 실망하고 대신 신플라톤주의에 빠짐/밀란에서 수사학교사

6장:밀란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계속 듣게 됨.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해소해 감.

7장:악의 문제를 고민하는 중 신플라톤주의적 해결방식시도/사도바울의 글을 읽기 시작함

8장: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빅토리아누스의 회심과 이집트의 성자 안토니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밀란의 집 뒷뜰에서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는 중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폄. 그리고 회심.

9장: 세례받음. 아프리카로 돌아감. 어머니 모니카 죽음.

10장: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육체의 유혹에 저항하는 법 등에 대한 회상

11장-13장: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설명

 

그의 회심사건이 있었던 시점은, 그가 철학적 종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싯점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가 마니교의 이교적 사상에서 악의 기원과 같은 종교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 탐구하던 싯점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악의 기원 같은 주제는 실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밀란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싯점도 그의 회심의 싯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싯점이고, 계속적으로 교회당에 출석하던 때인데도 그는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고뇌 중에 있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과연 어느 싯점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규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기록한 뒤에 11장-13장에서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을 해석하고 있는가? 그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꼭 풀어보아야 할 과제이다.

 

이런 질문이 그의 회심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회심기록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번역해 본다(역자:
손성은).

 

이것 또한 좋은 묵상 자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자료출처: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aug-conv.html

 

Augustine: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Book Three

CHAPTER I

 

  1. I came to Carthage, where a caldron of unholy loves was seething and bubbling all around me. 나는 카르타고로 갔다. 그곳에서는 불결한 사랑의 가마솥이 펄펄 끓으면서 거품을 내 주변에 품어내고 있었다. I was not in love as yet, but I was in love with love; and, from a hidden hunger, I hated myself for not feeling more intensely a sense of hunger. 그렇다고 어느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한 굶주림 속에서 그 굶주림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I was looking for something to love, for I was in love with loving, and I hated security and a smooth way, free from snares.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Within me I had a dearth of that inner food which is thyself, my God–although that dearth caused me no hunger. 내 안에서 나는 영혼의 음식인 당신, 곧 나의 하나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결핍 때문에 굶주림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And I remained without any appetite for incorruptible food–not because I was already filled with it, but because the emptier I became the more I loathed it. 이미 그것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빈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그 불멸의 음식에 대하여 어떤 구미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Because of this my soul was unhealthy; and, full of sores, it exuded itself forth, itching to be scratched by scraping on the things of the senses. 이것 때문에 나의 영혼은 건강치 못하였다;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차서 온 몸에 근질거리는 그 무엇을 가려워 하면서 내 영혼은 스스로를 발산하고 있었다. Yet, had these things no soul, they would certainly
    not inspire our love. 하지만, 이런 감각들에 영혼이 없었다면 분명히 사랑을 전혀 고무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To love and to be loved was sweet to me, and all the more when I gained the enjoyment of the body of the person I loved.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달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육체의 즐거움을 탐닉하였다. Thus I polluted the spring of friendship with the filth of concupiscence and I dimmed its luster with the slime of lust. 그래서 참된 사랑의 우물을 불결한 정욕으로 더럽혔고 그 참된 사랑의 빛들을 거짓된 사랑의 악취들로 혼잡케 하였다. Yet, foul and unclean as I was, I still craved, in excessive vanity, to be thought elegant and urbane. 그렇게 나는 더럽고 불결하였음에도 여전히 엄청난 허영 가운데서 여전히 고결하고 세련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And I did fall precipitately into the love I was longing for.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도 찾고 있었던 그 사랑 속으로 급전직하 떨어졌던 것이다. My God, my mercy, with how much bitterness didst thou, out of thy infinite goodness, flavor that sweetness for me! 자비로우신 나의 하나님께서, 참으로 참으실 수 없는 비탄을 느끼시는 중에도, 당신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인하여, 그 달콤함을 나를 위하여 맛보게 하셨던 것이다! For I was not only beloved but also I secretly reached the climax of enjoyment; and yet I was joyfully bound with troublesome tics, so that I could be scourged with the burning iron rods of jealousy, suspicion, fear, anger, and strife. 왜냐하면 나는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그 즐거움의 최절정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움 중에 누리는 문제성 많은 발작들을 즐거워하면서, 질투와 의심, 두려움, 불안, 그리고 싸움의 뜨겁게 달구어진 벌건 쇳조각에 데어지기를 원하였던 것이다”EN-US” xml:lang=”EN-US”>.

 

CHAPTER IV

 

Among such as these, in that unstable period of my life, I studied the books of eloquence, for it was in eloquence that I was eager to be eminent, though from a reprehensible and vainglorious motive, and a delight in human vanity. 이런 일들 가운데서 나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들 속에서 수사학책들을 공부하였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헛된 허영이 그 깊은 동기였었지만 그 인간의 허영을 즐거워 하였던 셈이다. In the ordinary course of study I came upon a certain book of Cicero’s, whose language almost all admire, though not his heart. 공부하는 중에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키케로의 책은 비록 그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 표현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This particular book of his contains an exhortation to philosophy and was called Hortensius. 그 책에서 그는 호르텐시우스의 철학을
추천하였다. Now it was this book which quite definitely changed my whole attitude and turned my prayers toward thee, O Lord, and gave me new hope and new desires. 이제 아주 분명하게 나의 인생의 태도를 바꿔서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과 열망을 갖게 하였던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Suddenly every vain hope became worthless to me, and with an incredible warmth of heart I yearned for an immortality of wisdom and began now to arise that I might return to thee. 갑작스럽게 모든 헛된 소망들이 나에게 헛되게 여겨졌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지혜를 열망하면서 당신에게 돌아설 수 있기 시작했다. It was not to sharpen my tongue further that I made use of that book. I was now nineteen; my father had been dead two years, and my mother was providing the money for my study of rhetoric. 이 책을 이용하는 것은 나의 말솜씨를 다듬기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나의 나이는 19이었다.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고, 어머니께서 나의 수사학공부를 위해서 돈을 마련하셨다”EN-US”>. What won me in it [i.e., the Hortensius] was not its style but its substance. 호르텐시우스의 책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스타일이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1. How ardent was I then, my God, how ardent to fly from earthly things to thee! 그 때, 나의 하나님, 제가 얼마나 열심을 가졌었는지요, 얼마나 진심으로 지상적인 것에서 당신을 향하여 날아가고 싶어했는지요! Nor did I know how thou was even then dealing with me. 저는 그 당시에도 당신께서 저를 다루시고 계셨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For with thee is wisdom. 지혜는 당신께 있습니다. In Greek the love of wisdom is called “philosophy,” and it was with this
    love that that book inflamed me. 그리스어로 지혜의 사랑을 “철학”이라고 불렀는데, 그 책이 나에게 불붙여준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었다. There are some who seduce through philosophy, under a great, alluring, and honorable name, using it to color and adorn their own errors. 철학을 통해서 위대하고 매혹적이고 존경할 만한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의 오류를 감추고 오히려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And almost all who did this, in Cicero’s own time and earlier, are censored and pointed out in his book. 키케로가 살던 당시 그리고 그 이전에 이런 짓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책에서 비판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BOOK V

CHAPTER XIII

23.And to Milan I came, to Ambrose the bishop, famed through the whole world as one of the best of men, thy devoted servant. 나는 밀란으로 되돌아갔다. 주님의 헌신된 종이면서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밀란의 주교 암브로우시스에게로 되돌아 간 것이다. His eloquent discourse in those times abundantly provided thy people with the flour of thy wheat, the gladness of thy oil, and the sober intoxication of thy wine. 그의 유창한 설교는 그 당시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에게 속한 곡물의 먹을 것과 주의 기름의 유쾌함, 그리고 주의 포도주의 톡 쏘는 맛들을 풍성하게 제공해 주었다. To him I was led by thee without my knowledge, that by him I might be led to thee in full knowledge. 주께서는 나를 그에게로 나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로 주님께로 이제는 충분히 의식한 채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 That man of God received me as a father would, and welcomed my coming as a good bishop should. 그 하나님의 사람은 나를 마치 아빠가 자식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리고 훌륭한 목사라면 그렇게 해야할 것처럼 내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였다. And I began to love him, of course, not at the first as a teacher of the truth, for I had entirely despaired of finding that in thy Church–but as a friendly man.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진리의 교사로서가 아니라, 친절히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그러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nd I studiously listened to him–though not with the right motive–as he preached to the people. 그리고 그가 설교할 때에 옳은 동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열심으로 그에게 집중했다. “EN-US”>I was trying to discover whether his eloquence came up to his reputation, and whether it flowed fuller or thinner than others said it did. 나는 그의 유창함 때문에 그의 평판이 높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더 유창한지 아니면 아닌지 등등을 발견해 보려고 했다. And thus I hung on his words intently, but, as to his subject matter, I was only a careless and contemptuous listener. 그래서 그의 말에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주의하지 않았고 단지 얕잡아보면서 설교를 들었을 뿐이었다. I was delighted with the charm of his speech, which was more erudite, though less cheerful and soothing, than Faustus’ style. 그의 설교는 매력적이었고 학식이 풍부했지만, 파우스트의 스타일과 비교하면 유쾌한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As for subject matter, however, there could be no comparison, for the latter was wandering around in Manichean deceptions, while the former was teaching salvation most soundly.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하지만 주제에 관해서면, 비교할 만 하지가 않았다. 파우스트의 것은 마니교의 기만에 관한 것이었고 암브로시우스의 것은 구원에 관하여 가장 건전하게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But “salvation is far from the wicked,” such as I was then when I stood before him. Yet I was drawing nearer, gradually and unconsciously. 그렇지만, “구원은 사악한 자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앞에 서있었지만, 구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채로 그것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BOOK VIII

CHAPTER XII

  1. Now when deep reflection had drawn up out of the secret depths of my soul all my misery and had heaped it up before the sight of my heart, there arose a mighty storm, accompanied by a mighty rain of tears. 깊히 묵상하는 중에 내 영혼의 비밀스러운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나의 불행스러움이 생각나면서 내 마음의 눈 앞에 쌓아져 있는 것을 볼 때에,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광풍이 몰아치면서 나의 눈에서는 폭우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That I might give way fully to my tears and lamentations, I stole away from Alypius, for it seemed to me that solitude was more appropriate for the business of weeping. 나의 눈물과 애통함에 충분히 젖어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알피우스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있는 것이 울기만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I went far enough away that I could feel that even his presence was no restraint upon me. 나는 충분히 멀리 도망쳐서 심지어는 알피우스가 전혀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데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This was the way I felt at the time, and he realized it. 이러함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도 또한 그것을 느꼈었습니다. I suppose I had said something before I started up and he noticed that the sound of my voice was choked with weeping. 숨으려고 하기 전에 내가 무언가를 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때 내 목소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그는 느꼈었습니다. And so he stayed alone, where we had been sitting together, greatly astonished.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앞서 있었던 그곳에 혼자 머물러 있으면서 무척이나 당황했었다고 합니다. I flung myself down under a fig tree–how I know not–and gave free course to my tears. 나는 어떤 무화과나무 밑에 덜썩 주저 앉았습니다 – 어떻게 앉았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EN-US”>– 그리고는 마음껏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The streams of my eyes gushed out an acceptable sacrifice to thee. 눈물의 펑펑 쏟구쳐 나와서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And, not indeed in these words, but to this effect, I cried to thee. 그리고 실상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요지의 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And thou, O Lord, how long? How long, O Lord? Wilt thou be angry forever? Oh, remember not against us our former iniquities.” “오 주님,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더 오랫도록 참으시겠습니까? 주께서 저에게 영원토록 노하시겠나이까? 오, 저의 이전에 저질렀던 악행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For I felt that I was still enthralled by them.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런 악행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I sent up these sorrowful cries. 이런 슬픈 탄식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How long, how long? Tomorrow and tomorrow? Why not now? Why not this very hour make an end to my uncleanness?”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오랫도록? 내일 그리고 또 내일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왜 지금은 안되나요? 왜 지금 바로 이 시간 저의 이 불결함을 씻어주시지 않으십니까?”

 

  1. I was saying these things and weeping in the most bitter contrition of my heart,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가장 비통스러운 마음 속의 아픔 가운데에 통곡하고 있는 중에, when suddenly I heard the voice of a boy or a girl I know not which–coming from the neighboring house, chanting over and over again, 어디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바로 이웃집 담벽을 넘어서 어떤 남자아이인가 여자아이가 자꾸만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갑작스럽게 듣게 되었습니다. “Pick it up, read it; pick it up, read it.” [“tolle lege, tolle lege”] “집어 들어서 읽어, 집어 들어서 읽어.” Immediately I ceased weeping and began most earnestly to think whether it was usual for children in some kind of game to
    sing such a song, but I could not remember ever having heard the like. 곧 나는 울기를 멈추고는 가장 심각하게 이 말이 아이들이 놀이 중에 하는 그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소리를 이전에 들어보았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So, damming the torrent of my tears, I got to my feet, for I could not but think that this was a divine command to open the Bible and read the first passage I should light upon. 그래서 나는 쏟구쳐 나오는 눈물을 막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는 바로 성경을 열어서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For I had heard how Anthony, accidentally coming into church while the gospel was being read, received the admonition as if what was read had been addressed to him. 이전에 성자 안토니가 우연히 어떤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복음서가 읽혀지고 있었는데, 그 읽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선포되고 있는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Go and sell what you have and give it to the poor, and you sha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and follow me.”COLOR: red”>” 가서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는 천국에 보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와서 나를 따르라.” By such an oracle he was forthwith converted to thee. 이런 말씀을 따라서 그는 그것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So I quickly returned to the bench where Alypius was sitting, for there I had put down the apostle’s book when I had left there. 그래서 급하게 나는 알피우스가 앉아있는 벤치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곳에서 떠났을 때 사도의 책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I snatched it up, opened it, and in silence read the paragraph on which my eyes first fell 그것을 재빨리 집어 들고는 열어서 말없이 내 눈에 처음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Not in rioting and drunkenness, not in chambering and wantonness, not in strife and envying,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fulfill the lusts thereof.”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I wanted to read no further, nor did I need to.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For instantly, as the sentence ended, there was infused in my heart something like the light of full certainty and all the gloom of doubt vanished away. 왜냐하면 곧장, 그 문장이 끝나자마자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분명하게 확실한 빛이 주입 되어지면서 의심의 흑구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주: 중간중간에 ‘습니다’체와 ‘였다’체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자신의 회심을 기술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독백의 방식으로 취하면서도 간혹 자신을 객관화시키면서 서술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대림절(the Advent)

이번 주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대림절은 ‘대강절’ 혹은 ‘강림절’이라고도 하며,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되는데 개신교에서는 부활절 전 40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Lent)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대림절 기간에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대림절을 맞이해야 할까요?

대림절 프로그램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촛불 예배
예수님을 세상을 구원하는 참빛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모아 촛불을 켜는 풍습이 있습니다. ‘보라-연보라-분홍-하양(노랑)’ 순서

대림절 찬송
크리스마스 캐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성경 공부
예수님의 탄생은 즉흥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에 계획된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구약성경 메시아 예언을 통해 공부합니다.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은 미국으로 이주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1년 12월 13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축제를 벌인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1904년에 처음 도입하였고, 현재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성경적 근거가 없는 미국 문화라 하여 거부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문화인 것은 맞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유월절(무교절), 칠칠절(맥추절), 초막절(수장절)이라는 세 절기를 지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신16:1~17). 하나님께 예물을 가지고 나와서 추수를 감사하라고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의 근거가 분명합니다.

11월 셋째 주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문제제기는 타당하지만, 도시화된 오늘날에는 ‘추수’의 의미보다는 ‘감사’의 의미가 더 크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미국 선교사들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11월 달에 감사절을 지키는 것도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국은 어디에

60년대나 70년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 시대는 천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 잘 곳, 입을 것이 없는 절대 가난 가운데 있을 때는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면 행복이 저절로 찾아오고 그 상태가 곧 천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먹고 자고 입는 문제가 해결된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자신이 천국에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인정하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행복하기에 필요한 전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돈 문제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정신적, 심리적인 문제가 더 큽니다. 돈이 좀 없어도 가정이 화목하고 인간관계가 즐거우면 헤쳐나갈 수 있지만 인간관계가 힘들고 마음이 괴로우면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약간의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신, 심리적인 성장을 일으켜줍니다. 예수님과 만남으로 천국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확신할수록 관대하자

저는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 미션 스쿨입니다. 불교 미션 스쿨을 나왔지만 기독교 목사가 되었으니 그 학교는 미션 달성에 실패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이 그 학교 때문에 불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의 선생님들, 친구들에 대한 기억은 소중한 추억의 일부입니다.

이쯤 되면 어떤 분들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목사가 불교나 불교인을 좋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지요.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인들 중에도 인격이 훌륭한 분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인들 보다 나은 분들도 많구요.”

그러면 또 이렇게 묻습니다. 왜 기독교인이 되었냐구요.

저는 “예수님을 뜨겁게 만났고, 기독교가 진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쯤되면 불교인은 떨떠름해 하고 기독교인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신앙은 좋은 것 같은데 불교를 욕하고 무시하지 않으니까 이상한 것이지요.

저는 확신을 가졌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무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워 할 수는 있지만, 좀더 관대한 태도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요?

교회는 ‘사람’과 ‘사랑’

흔히 하는 오해 중에 하나가 교회를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원어로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2천년을 지속하는 동안 변변한 건물 없이 유지된 예가 더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를 지속시킨 것은 언제나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예배 장소를 중심으로 모이기 때문이 편의상 예배 장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즘은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주중 예배는 말 할 것도 없고 주일 예배조차 참석하기 힘들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교회가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예배 드리는 일입니다.

큐티를 통해서 개인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함께 기도회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 사이에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랑’이 있으면 교회는 어떤 환경에서도 끝까지 유지될 것입니다.

목사들의 비리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형 교회 목사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계속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이런 보도를 보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과 이야기할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더욱 곤란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제 생각을 밝혀 봅니다.

첫째, 비리를 저지른 목사를 변호하지 마십시오.
종교 지도자는 일반인보다 높은 윤리 기준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변호하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식이 의심스러워서 교회에 대해서 불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변호하지 마십시오.

둘째, 교회의 크기나 평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시오.
큰 교회 목회자들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큰 교회지만 잘못된 교회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셋째, 교회를 대표해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교회를 대표해서 깨끗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부터 개선할 것을 약속하면 조금이나마 교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목사님들이 겸손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믿음을 찾으십시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집중한 주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교회에서 ‘믿음’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탐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큰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신앙인들이 제가 ‘믿음’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 그냥 믿으면 되는거야.”

“너무 따지는 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야.”

등등의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발견한 것은 사람마다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믿음’이 다 달랐다는 점입니다. 또한 ‘믿음’이 있다는 분들조차 사실은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기 몰라서 곤란해 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믿음이 무엇인지 답을 찾았지만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진지한 걸 싫어하고, 교회가 크지 않으면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렇게 소극적으로 글을 씁니다. ‘믿음’이란 것은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니 무턱대고 믿지 마시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고 말입니다.

청교도의 매일 점검표

미국을 건국한 지도자들은 영국 청교도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목사, 휘필드의 매일 점검표를 보면 그들이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됩니다.

  1. 나는 개인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시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있게 행했는가?

  9.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며 친절했는가?

  10.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11.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았으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며, 잠자는 일에 있어서 절제가 있었는가?

  12.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13.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는가?

  14.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15. 나의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추석을 어떻게 보낼까?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지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면 교통체증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그만큼 고향은 우리에게 중요한 곳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에 가는 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차례와 성묘 등 전통 문화에 동참할 수 없다보니 곤혹 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갔다가도 재빨리 돌아오거나 아예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경우도 보게됩니다.

고향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친지들이 모두 소중한 분들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울까요?
정답은 아니겠지만 저는 되도록이면 고향에 내려가서 친지들과도 적극적으로 어울리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또, 돌아가신 분들에게 절을 해서는 결코 안되겠지만 차례나 성묘 자리에도 참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잘못된 문화에 동참하지는 않되, 궂은 일을 찾아 묵묵히 섬겨주고 어른들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중에는 마음이 열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황의 방문을 보며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수도자)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친다.

-프란치스코(제266대 교황)

 

교황의 방문이 며칠 동안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우울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교황의 방문과 적절한 메시지를 통해서 위로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카톨릭의 교리와 정책을 반대하고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황의 방문을 비난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성경과 믿음의 선조들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교훈이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이 교리적으로 온전한 복음을 가르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삶에서도 청빈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카톨릭과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진리를 소유한 개신교 신자들이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계절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인생의 계절’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듯이 사람의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결코 겨울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시나브로 시간은 흘러서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간에 처하면 결코 그 어려운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어서 더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도 계절이 있어서 어려운 시간은 가고 기쁘고 행복한 시간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에도 계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인생의 계절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끝없는 겨울 같은 인생이 계속 되었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계절이 변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에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다짐하듯이 되뇌입니다.

“좋은 계절은 반드시 다시 온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신자입니다

구원파 유병언 회장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달 이상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것에 비해서는 허무한 결말이라서 다들 당황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렇게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쉽게 죽을 수 있겠느냐는 점입니다.

그러나, 유병언 회장의 행동을 보면 그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월호’ 사건의 최고 원인 제공자면서도 무작정 도주부터 했다는 점에서 도덕성을 상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도피 생활 중 적었다는 메모에 음모론과 울분만 가득할 뿐 반성과 회개가 없었다는 점은 종교인의 모습과도 거리가 멉니다.

도피 생활 중에도 명품옷을 입고 미네랄 생수를 먹으며 비서와 운전사의 수행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사치와 안락에 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셨지만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때로는 아침상을 차려주셨던 예수님의 인격과 얼마나 다릅니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

교회 선택이 어려워요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고전14:20)

 

사회가 편리해진 만큼 복잡해지면서 전과는 다른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려고 해도 이단도 많고, 정통 교회라고 해도 물의를 일으키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있다보니 교회를 선택하기 어려워진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은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라는 구절입니다. 진짜가 있으면 가짜도 있기 마련입니다. 가짜가 많다고 해서 진짜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여행을 가려고 해도 전과는 다르게 여행업체가 너무 많아서 선택이 힘든 세상입니다. 그중에는 허위광고를 하는 업체도 있습니다. 하지만, 꼼꼼하게 비교해 보면 정직하고 좋는 업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선택할 때도 시간을 갖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인도하심을 따르면 좋은 교회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생각에 어른이 되는 방법입니다.

문제는 다시 ‘구원’이다

근래 우리 나라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모아집니다. 그러니까 아닌 건 알겠는데, 긴 건 뭘까요?

데카르트의 치열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합니다. 갑자기 데카르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진단하고 처방을 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때문입니다.

아다시피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철학자’입니다. ‘회의주의자’는 뭐든지 의심하고 보는 사람들인데, 그러다 보니 혼란이 생겼습니다. 뭐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책상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환상을 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전 인류가 단체로 꿈을 꾸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매트릭스 같은 영화도 있으니 가능성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고민 가운데서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입니다.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의심을 하려면 데카르트 만큼 의심해서 의심의 끝을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다.

기독교가 위기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어쩌면 매우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정말 근본부터 샅샅이 점검해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고치면 우리 나라 기독교는 앞으로 큰 부흥을 맞이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독교 위기의 원인은 중세 시대와 동일합니다. ‘면죄부’의 판매가 기독교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면죄부는 ‘인본주의적 구원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말씀에 따라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구원받는다.”
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얼핏 보면 성경적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가진 주장입니다.

위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인본주의’입니다. 구원과 구원의 확신을 갖는 주체가 모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을 구원의 객체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줄 수 밖에 없다는 주장에 다름 아닙니다.

복음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다가 왜곡하게 된 예입니다. 필자도 선교단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이 주장이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생각이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제자리를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청교도들을 통해서 그 쳇바퀴를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무의식적인 두려움, 예상되는 논란들, 내 자신부터 되돌아보아야 하는 부담감 등이 사고의 전진을 막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청교도들은 왜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구원과 회심의 문제에 집착했을까?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구원과 회심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을까?”

이것이 예전의 청교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니까 청교도들이 구원과 회심의 문제에 집착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회심에 ‘매료’되었던 것입니다. 그 놀라운 신비가 그들의 정신 세계에 말할 수 없이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본 사람이 그것을 추천하고 소감을 얘기는 것과 비슷한 행동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 안 받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언제 구원을 받았냐는 질문은 더더구나 인본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망언입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의 주장처럼 교회사를 통해서 가장 복음의 영광이 드러났던 시대와 현 시대를 비교해 보는 일은 언제나 유익합니다.

교회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더 위대했던 신앙의 선조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일찍 교만에 물든 것이 아닐까요? 그 교만이 복음의 영광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은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교만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영광, 구원의 신비,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파의 교훈

구원파 유병언 회장의 도피 행각이 이슈입니다.

“좁은 땅에서 많은 상금이 걸린 사람이 얼마나 도망다닐 수 있을까?” 생각했던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듯이 경찰과 검찰의 포위망을 잘도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언론에 의하면, 유병언 회장은 세월호가 침몰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불법 개조와 과적’을 지시한 책임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원들이 여러 차례 위험을 호소했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의 책임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공적으로 도피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구원파’라는 종교단체의 수장이라서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도피를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잘못된 종교의 폐해를 봅니다. 잘못된 종교는 믿음을 맹목적인 충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추종자들도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보다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어거지를 부립니다.

우리 정통 교회도 ‘구원파’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목사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바르게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녀교육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다면 다른 엄마들도 할 수 있어요. 저는 학창시절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야간 상고를 다녔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한이 남아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남편은 너무 가난해 군대를 면제받을 정도였습니다.” – 박경이 사모

자녀교육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시중에 많은 책이 나와있지만 ‘땅에서 자라는 하늘 자녀'(지혜의샘)가 특별한 이유는 광주 딸부자 집 다섯째로 태어나 야간 상고, 방통대를 졸업한 저자의 경력이 만만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교육 성공사례를 찾아보면, 부모가 연예인이거나 외교관이거나 강남출신이거나 하다못해 명문대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한 명도 아닌 네 자녀를 모두 예일, 하버드, 듀크, 일리노이주립대 등 명문대학에 입학시키는 결과를 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가난한 목회자 부부가 어떻게 미국 명문가도 이루지 못한 결과를 신앙의 힘으로 이루는지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실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