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회심 간증
성경에 기록된 회심사건 외에 교회사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회심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끼친 신학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회심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회심사건 또한 특별해서 우리들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의 회심을 특별한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 요소를 우리는 발견해 내면서 우리들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 것은 일종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그의 회심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그 고백록의 구조를 음미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회심과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의 자화상을 비춰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회심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을 번역해 올린다. 그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히 고백록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1장: 어린시절.
2장:청소년기
3장:카르타고 유학중의 방탕생활/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 마니교에 입교.
4장:수사학교사가 됨/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또한 미와 비율에 관한 책을 저술함.
5장:마니교에 실망하고 대신 신플라톤주의에 빠짐/밀란에서 수사학교사
6장:밀란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계속 듣게 됨.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해소해 감.
7장:악의 문제를 고민하는 중 신플라톤주의적 해결방식시도/사도바울의 글을 읽기 시작함
8장: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빅토리아누스의 회심과 이집트의 성자 안토니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밀란의 집 뒷뜰에서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는 중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폄. 그리고 회심.
9장: 세례받음. 아프리카로 돌아감. 어머니 모니카 죽음.
10장: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육체의 유혹에 저항하는 법 등에 대한 회상
11장-13장: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설명
그의 회심사건이 있었던 시점은, 그가 철학적 종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싯점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가 마니교의 이교적 사상에서 악의 기원과 같은 종교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 탐구하던 싯점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악의 기원 같은 주제는 실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밀란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싯점도 그의 회심의 싯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싯점이고, 계속적으로 교회당에 출석하던 때인데도 그는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고뇌 중에 있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과연 어느 싯점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규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기록한 뒤에 11장-13장에서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을 해석하고 있는가? 그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꼭 풀어보아야 할 과제이다.
이런 질문이 그의 회심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회심기록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번역해 본다(역자:
손성은).
이것 또한 좋은 묵상 자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자료출처: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aug-conv.html
Augustine: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Book Three
CHAPTER I
- I came to Carthage, where a caldron of unholy loves was seething and bubbling all around me. 나는 카르타고로 갔다. 그곳에서는 불결한 사랑의 가마솥이 펄펄 끓으면서 거품을 내 주변에 품어내고 있었다. I was not in love as yet, but I was in love with love; and, from a hidden hunger, I hated myself for not feeling more intensely a sense of hunger. 그렇다고 어느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한 굶주림 속에서 그 굶주림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I was looking for something to love, for I was in love with loving, and I hated security and a smooth way, free from snares.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Within me I had a dearth of that inner food which is thyself, my God–although that dearth caused me no hunger. 내 안에서 나는 영혼의 음식인 당신, 곧 나의 하나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결핍 때문에 굶주림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And I remained without any appetite for incorruptible food–not because I was already filled with it, but because the emptier I became the more I loathed it. 이미 그것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빈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그 불멸의 음식에 대하여 어떤 구미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Because of this my soul was unhealthy; and, full of sores, it exuded itself forth, itching to be scratched by scraping on the things of the senses. 이것 때문에 나의 영혼은 건강치 못하였다;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차서 온 몸에 근질거리는 그 무엇을 가려워 하면서 내 영혼은 스스로를 발산하고 있었다. Yet, had these things no soul, they would certainly
not inspire our love. 하지만, 이런 감각들에 영혼이 없었다면 분명히 사랑을 전혀 고무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To love and to be loved was sweet to me, and all the more when I gained the enjoyment of the body of the person I loved.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달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육체의 즐거움을 탐닉하였다. Thus I polluted the spring of friendship with the filth of concupiscence and I dimmed its luster with the slime of lust. 그래서 참된 사랑의 우물을 불결한 정욕으로 더럽혔고 그 참된 사랑의 빛들을 거짓된 사랑의 악취들로 혼잡케 하였다. Yet, foul and unclean as I was, I still craved, in excessive vanity, to be thought elegant and urbane. 그렇게 나는 더럽고 불결하였음에도 여전히 엄청난 허영 가운데서 여전히 고결하고 세련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And I did fall precipitately into the love I was longing for.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도 찾고 있었던 그 사랑 속으로 급전직하 떨어졌던 것이다. My God, my mercy, with how much bitterness didst thou, out of thy infinite goodness, flavor that sweetness for me! 자비로우신 나의 하나님께서, 참으로 참으실 수 없는 비탄을 느끼시는 중에도, 당신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인하여, 그 달콤함을 나를 위하여 맛보게 하셨던 것이다! For I was not only beloved but also I secretly reached the climax of enjoyment; and yet I was joyfully bound with troublesome tics, so that I could be scourged with the burning iron rods of jealousy, suspicion, fear, anger, and strife. 왜냐하면 나는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그 즐거움의 최절정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움 중에 누리는 문제성 많은 발작들을 즐거워하면서, 질투와 의심, 두려움, 불안, 그리고 싸움의 뜨겁게 달구어진 벌건 쇳조각에 데어지기를 원하였던 것이다”EN-US” xml:lang=”EN-US”>.
CHAPTER IV
Among such as these, in that unstable period of my life, I studied the books of eloquence, for it was in eloquence that I was eager to be eminent, though from a reprehensible and vainglorious motive, and a delight in human vanity. 이런 일들 가운데서 나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들 속에서 수사학책들을 공부하였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헛된 허영이 그 깊은 동기였었지만 그 인간의 허영을 즐거워 하였던 셈이다. In the ordinary course of study I came upon a certain book of Cicero’s, whose language almost all admire, though not his heart. 공부하는 중에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키케로의 책은 비록 그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 표현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This particular book of his contains an exhortation to philosophy and was called Hortensius. 그 책에서 그는 호르텐시우스의 철학을
추천하였다. Now it was this book which quite definitely changed my whole attitude and turned my prayers toward thee, O Lord, and gave me new hope and new desires. 이제 아주 분명하게 나의 인생의 태도를 바꿔서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과 열망을 갖게 하였던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Suddenly every vain hope became worthless to me, and with an incredible warmth of heart I yearned for an immortality of wisdom and began now to arise that I might return to thee. 갑작스럽게 모든 헛된 소망들이 나에게 헛되게 여겨졌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지혜를 열망하면서 당신에게 돌아설 수 있기 시작했다. It was not to sharpen my tongue further that I made use of that book. I was now nineteen; my father had been dead two years, and my mother was providing the money for my study of rhetoric. 이 책을 이용하는 것은 나의 말솜씨를 다듬기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나의 나이는 19이었다.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고, 어머니께서 나의 수사학공부를 위해서 돈을 마련하셨다”EN-US”>. What won me in it [i.e., the Hortensius] was not its style but its substance. 호르텐시우스의 책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스타일이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 How ardent was I then, my God, how ardent to fly from earthly things to thee! 그 때, 나의 하나님, 제가 얼마나 열심을 가졌었는지요, 얼마나 진심으로 지상적인 것에서 당신을 향하여 날아가고 싶어했는지요! Nor did I know how thou was even then dealing with me. 저는 그 당시에도 당신께서 저를 다루시고 계셨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For with thee is wisdom. 지혜는 당신께 있습니다. In Greek the love of wisdom is called “philosophy,” and it was with this
love that that book inflamed me. 그리스어로 지혜의 사랑을 “철학”이라고 불렀는데, 그 책이 나에게 불붙여준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었다. There are some who seduce through philosophy, under a great, alluring, and honorable name, using it to color and adorn their own errors. 철학을 통해서 위대하고 매혹적이고 존경할 만한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의 오류를 감추고 오히려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And almost all who did this, in Cicero’s own time and earlier, are censored and pointed out in his book. 키케로가 살던 당시 그리고 그 이전에 이런 짓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책에서 비판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BOOK V
CHAPTER XIII
23.And to Milan I came, to Ambrose the bishop, famed through the whole world as one of the best of men, thy devoted servant. 나는 밀란으로 되돌아갔다. 주님의 헌신된 종이면서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밀란의 주교 암브로우시스에게로 되돌아 간 것이다. His eloquent discourse in those times abundantly provided thy people with the flour of thy wheat, the gladness of thy oil, and the sober intoxication of thy wine. 그의 유창한 설교는 그 당시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에게 속한 곡물의 먹을 것과 주의 기름의 유쾌함, 그리고 주의 포도주의 톡 쏘는 맛들을 풍성하게 제공해 주었다. To him I was led by thee without my knowledge, that by him I might be led to thee in full knowledge. 주께서는 나를 그에게로 나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로 주님께로 이제는 충분히 의식한 채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 That man of God received me as a father would, and welcomed my coming as a good bishop should. 그 하나님의 사람은 나를 마치 아빠가 자식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리고 훌륭한 목사라면 그렇게 해야할 것처럼 내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였다. And I began to love him, of course, not at the first as a teacher of the truth, for I had entirely despaired of finding that in thy Church–but as a friendly man.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진리의 교사로서가 아니라, 친절히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그러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nd I studiously listened to him–though not with the right motive–as he preached to the people. 그리고 그가 설교할 때에 옳은 동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열심으로 그에게 집중했다. “EN-US”>I was trying to discover whether his eloquence came up to his reputation, and whether it flowed fuller or thinner than others said it did. 나는 그의 유창함 때문에 그의 평판이 높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더 유창한지 아니면 아닌지 등등을 발견해 보려고 했다. And thus I hung on his words intently, but, as to his subject matter, I was only a careless and contemptuous listener. 그래서 그의 말에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주의하지 않았고 단지 얕잡아보면서 설교를 들었을 뿐이었다. I was delighted with the charm of his speech, which was more erudite, though less cheerful and soothing, than Faustus’ style. 그의 설교는 매력적이었고 학식이 풍부했지만, 파우스트의 스타일과 비교하면 유쾌한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As for subject matter, however, there could be no comparison, for the latter was wandering around in Manichean deceptions, while the former was teaching salvation most soundly.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하지만 주제에 관해서면, 비교할 만 하지가 않았다. 파우스트의 것은 마니교의 기만에 관한 것이었고 암브로시우스의 것은 구원에 관하여 가장 건전하게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But “salvation is far from the wicked,” such as I was then when I stood before him. Yet I was drawing nearer, gradually and unconsciously. 그렇지만, “구원은 사악한 자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앞에 서있었지만, 구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채로 그것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BOOK VIII
CHAPTER XII
- Now when deep reflection had drawn up out of the secret depths of my soul all my misery and had heaped it up before the sight of my heart, there arose a mighty storm, accompanied by a mighty rain of tears. 깊히 묵상하는 중에 내 영혼의 비밀스러운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나의 불행스러움이 생각나면서 내 마음의 눈 앞에 쌓아져 있는 것을 볼 때에,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광풍이 몰아치면서 나의 눈에서는 폭우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That I might give way fully to my tears and lamentations, I stole away from Alypius, for it seemed to me that solitude was more appropriate for the business of weeping. 나의 눈물과 애통함에 충분히 젖어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알피우스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있는 것이 울기만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I went far enough away that I could feel that even his presence was no restraint upon me. 나는 충분히 멀리 도망쳐서 심지어는 알피우스가 전혀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데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This was the way I felt at the time, and he realized it. 이러함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도 또한 그것을 느꼈었습니다. I suppose I had said something before I started up and he noticed that the sound of my voice was choked with weeping. 숨으려고 하기 전에 내가 무언가를 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때 내 목소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그는 느꼈었습니다. And so he stayed alone, where we had been sitting together, greatly astonished.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앞서 있었던 그곳에 혼자 머물러 있으면서 무척이나 당황했었다고 합니다. I flung myself down under a fig tree–how I know not–and gave free course to my tears. 나는 어떤 무화과나무 밑에 덜썩 주저 앉았습니다 – 어떻게 앉았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EN-US”>– 그리고는 마음껏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The streams of my eyes gushed out an acceptable sacrifice to thee. 눈물의 펑펑 쏟구쳐 나와서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And, not indeed in these words, but to this effect, I cried to thee. 그리고 실상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요지의 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And thou, O Lord, how long? How long, O Lord? Wilt thou be angry forever? Oh, remember not against us our former iniquities.” “오 주님,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더 오랫도록 참으시겠습니까? 주께서 저에게 영원토록 노하시겠나이까? 오, 저의 이전에 저질렀던 악행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For I felt that I was still enthralled by them.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런 악행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I sent up these sorrowful cries. 이런 슬픈 탄식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How long, how long? Tomorrow and tomorrow? Why not now? Why not this very hour make an end to my uncleanness?”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오랫도록? 내일 그리고 또 내일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왜 지금은 안되나요? 왜 지금 바로 이 시간 저의 이 불결함을 씻어주시지 않으십니까?”
- I was saying these things and weeping in the most bitter contrition of my heart,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가장 비통스러운 마음 속의 아픔 가운데에 통곡하고 있는 중에, when suddenly I heard the voice of a boy or a girl I know not which–coming from the neighboring house, chanting over and over again, 어디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바로 이웃집 담벽을 넘어서 어떤 남자아이인가 여자아이가 자꾸만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갑작스럽게 듣게 되었습니다. “Pick it up, read it; pick it up, read it.” [“tolle lege, tolle lege”] “집어 들어서 읽어, 집어 들어서 읽어.” Immediately I ceased weeping and began most earnestly to think whether it was usual for children in some kind of game to
sing such a song, but I could not remember ever having heard the like. 곧 나는 울기를 멈추고는 가장 심각하게 이 말이 아이들이 놀이 중에 하는 그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소리를 이전에 들어보았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So, damming the torrent of my tears, I got to my feet, for I could not but think that this was a divine command to open the Bible and read the first passage I should light upon. 그래서 나는 쏟구쳐 나오는 눈물을 막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는 바로 성경을 열어서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For I had heard how Anthony, accidentally coming into church while the gospel was being read, received the admonition as if what was read had been addressed to him. 이전에 성자 안토니가 우연히 어떤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복음서가 읽혀지고 있었는데, 그 읽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선포되고 있는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Go and sell what you have and give it to the poor, and you sha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and follow me.”COLOR: red”>” 가서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는 천국에 보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와서 나를 따르라.” By such an oracle he was forthwith converted to thee. 이런 말씀을 따라서 그는 그것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So I quickly returned to the bench where Alypius was sitting, for there I had put down the apostle’s book when I had left there. 그래서 급하게 나는 알피우스가 앉아있는 벤치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곳에서 떠났을 때 사도의 책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I snatched it up, opened it, and in silence read the paragraph on which my eyes first fell 그것을 재빨리 집어 들고는 열어서 말없이 내 눈에 처음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Not in rioting and drunkenness, not in chambering and wantonness, not in strife and envying,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fulfill the lusts thereof.”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I wanted to read no further, nor did I need to.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For instantly, as the sentence ended, there was infused in my heart something like the light of full certainty and all the gloom of doubt vanished away. 왜냐하면 곧장, 그 문장이 끝나자마자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분명하게 확실한 빛이 주입 되어지면서 의심의 흑구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주: 중간중간에 ‘습니다’체와 ‘였다’체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자신의 회심을 기술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독백의 방식으로 취하면서도 간혹 자신을 객관화시키면서 서술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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