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의 대설교자 로이드 존스목사는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일어난다 고 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부흥의 신학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부흥의 신학이 철저하게 그의 칼빈주의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오히려 최근의 부흥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은사주의운동캠프에 속해있으면서 에드워즈의 글들을 자신들의 신학의 들러리로 삼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흥을 위해서 그렇게도 반대했던 신학을 주장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조나단 웨드워즈의 글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니, 참 이상한 현상이기도 하다.
아래에 그의 회심간증을 옮겨놓는다. 그가 1737년도에 작성한 것인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자신의 회심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려놓고 있다. 그의 회심은 15년전 곧 1721년, 그러니까 자신의 20살때쯤에 있었던 것이다.
이 회심간증을 읽으면서 주목할 것은, 이미 그가 자신의 회심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던 싯점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고백이 머리요, 신조만으로서의 고백이었음을 그의 회심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에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되어지고 또한 그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 우리는 그의 생생한 언어들로 대할 수가 있다.
그의 표현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신비주의적 경향(하지만 그의 신학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님을 유의하시라!)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선을 잘 지켜서 정통신학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 혹은 그의 글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주여, 부흥의 영이시여, 에스겔골짜기의 그 마른 뼈들같은 우리들에게도 부시옵소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체험적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번역한다.
자료출처: http://www.calltoworship.org/calltoworship/testimony/jonathan.html
Jonathan Edwards “Personal Narrative”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인간증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 자신의 구원받게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내력
I had a variety of concerns and exercises about my soul from my childhood; but had two more remarkable seasons of awakening, before I met with that change by which I was brought to those new dispositions, and that new sense of things, that I have since had.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혼에 대해서 다양한 관심을 가진 채로 여러 가지 실행들을 해 왔다.그리고 두 번의 현저하게 주목할 만한 각성의 기간을 두 번이나 거친 후에야 새로운 기질과 새로운 영적 감각을 갖게 되는 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런 기질들과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The first time was when I was a boy, some years before I went to college, at a time of remarkable awakening in my father’s congregation.
내가 대학을 진학하기 몇 해 전, 부친의 교회에서 있었던 현저한 각성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I was then very much affected for many months, and concerned about the things of religion, and my soul’s salvation; and was abundant in duties.
그 당시 몇 달 동안이나 그 각성으로 인해서 영향을 입어서는 신앙의 문제,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는 그것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충만했었다.
I used to pray five times a day in secret, and to spend much time in religious talk with other boys; and used to meet with them to pray together.
하루에 다섯 번씩 은밀히 기도시간을 가졌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신앙에 관한 대화들을 하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서 모임을 갖기도 하곤 했었다.
I experienced I know not what kind of delight in religion.
나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모르는 채로 신앙 안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였다.
My mind was much engaged in it, and had much self-righteous pleasure; and it was my delight to abound in religious duties.
내 마음은 그것에 깊이 몰두했었다. 또한 무척 내성적이었고 나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즐거웠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무를 충실히 행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I with some of my schoolmates joined together, and built a booth in a swamp, in a very retired spot, for a place of prayer.
학교친구들 몇몇과 함께 습지 안의 한 곳 으슥한 곳에 기도할 수 있는 거처를 지어놓았다.
And besides, I had particular secret places of my own in the woods, where I used to retire by myself; and was from time to time much affected.
게다가 숲속에는 내만이 알고 있던 특별한 장소가 있어서 혼자서 그곳에 가서 때때로 묵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My affections seemed to be lively and easily moved, and I seemed to be in my element when engaged in religious duties.
나의 정서는 들뜨고 쉽게 감동받는 것 같았고 종교적인 의무에 빠져들었을 때에는 나의 근원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
And I am ready to think, many are deceived with such affections, and such a kind of delight as I then had in religion, and mistake it for grace.
그래서 지금 생각하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서들에 현혹되어서 내가 종교에 대해서 가졌던 그런 종류의 즐거움들 때문에 그것이 은혜를 받은 것인 양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But in process of time, my convictions and affections wore off; and I entirely lost all those affections and delights and left off secret prayer, at least as to any constant performance of it; and returned like a dog to his vomit, and went on in the ways of sin.
하지만,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의 확신과 감정은 닳아져 버렸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런 흥분 속의 쾌감들을 잃어버리고 은밀한 기도시간도 갖지 않았다. 최소한 지속적으로 기도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또한 개가 그 뱉아버린 것을 다시 주워먹는 것처럼 죄된 생활들을 반복하였다.
Indeed I was at times very uneasy, especially towards the latter part of my time at college; when it pleased God, to seize me with a pleurisy; in which he brought me nigh to the grave, and shook me over the pit of hell.
물론 때때로 특별히 대학생활의 말기쯤에 와서는 이런 나의 상태에 심기가 아주 불편해 졌다. 늑막염으로 고생할 때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 지옥구덩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And yet, it was not long after my recovery, before I fell again into my old ways of sin.
하지만, 회복되자 곧 옛날 저질렀던 죄악으로 되돌아 갔다.
But God would not suffer me to go on with any quietness; I had great and violent inward struggles, till, after many conflicts with wicked inclinations, repeated resolutions, and bonds that I laid myself under by a kind of vows to God.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엄청나고 강력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악한 내적 경향들과 씨름한 후에 또 다시 결심하고 하나님께 서원 같은 것을 하곤 하였다.
From my childhood up, my mind had been full of objections against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in choosing whom he would to eternal life, and rejecting whom he pleased; leaving them eternally to perish, and be everlastingly tormented in hell. It used to appear like a horrible doctrine to me.
어릴 때부터 내 마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교리를 반대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해서 지옥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당하도록 두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But I remember the time very well, when I seemed to be convinced, and fully satisfied, as to this sovereignty of God, and his justice in thus eternally disposing of men, according to his sovereign pleasure.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주권적인 즐거움을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확신하고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분명히 기억나기는 한다.
But never could give an account, how, or by what means, I was thus convinced, not in the least imagining at the time, nor a long time after, that there was any extraordinary influence of God’s Spirit in it; but only that now I saw further, and my reason apprehended the justice and reasonableness of it.
하지만,내가 어떻게 혹은 어떤 방편으로 그렇게 확신을 하게 되었는지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때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순간도 없었고 되돌아볼 때에 그런 순간이 있었노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순간도 없었다.
However, my mind rested in it; and it put an end to all those cavils and objections.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확신에 안주하고 있었고 모든 의문과 반대에 종지부를 찍었었다.
And there has been a wonderful alteration in my mind, in respect to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from that day to this; so that I scarce ever have found so much as the rising of an objection against it, in the most absolute sense, in God’s strewing mercy to whom he will shew mercy, and hardening whom he will.
그리고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의 면에서 나의 마음 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반대해 보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에게 주시고 거두실 자에게는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God’s absolute sovereignty and justice, with respect to salvation and damnation, is what my mind seems to rest assured of, as much as of any thing that I see with my eyes; at least it is so at times.
구원과 저주의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며 또한 의로우시다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분명하게 확신되었서 마치 내 눈으로 보는 것과도 같게 여겨졌다; 최소한 때때로 그렇게 여겨졌다.
But I have often, since that first conviction, had quite another kind of sense of God’s sovereignty than I had then.
하지만, 그 첫번째의 확신 이후로 간혹 아주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
I have often since had not only a conviction, but a delightful conviction. The doctrine has very often appeared exceeding pleasant, bright, and sweet. Absolute sovereignty is what I love to ascribe to God. But my first conviction was not so.
그 이후로 간혹 하나의 확신으로서만 아니라 달콤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절대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나는 사랑하였다. 하지만, 첫번째 확신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The first instance that I remember of that sort of inward, sweet delight in God and divine things that I have lived much in since, was on reading those words, I Tim. 1:17.
그런 종류의 하나님에 대해서 내적이면서 달콤한 즐거움, 그리고 그 이후 생활하던 중에 계속 겪었던 신성한 일들에 대한 추억의 첫 체험은 디모데전서1:17에 있는 말씀들을 읽었을 때였다.
Now un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wise God, be honou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정말로 오직 영원하시며, 영생하시고, 보이지 않으신 왕이시며 유일하게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이 무궁하시길 !
As I read the words, there came into my soul, and was as it were diffused through it, a sense of the glory of the Divine Being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 영혼 속으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확산되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곧 그것은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었다;
a new sense, quite different from any thing I ever experienced before Never any words of scripture seemed to me as these words did.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전 어느 때에 겪어보지 못하였던 너무나도 다른 그 무엇이었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과 같이 여겨지지 않았었다(역자주: 그만큼 새롭게 여겨졌었다는 뜻)
I thought with myself, how excellent a Being that was, and how happy I should be, if I might enjoy that God, and be rapt up to him in heaven, and be as it were swallowed up in him for ever!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 분은 얼마나 뛰어나신 존재이신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시는 그 분에게로 환희로 올리워지게 된다면, 그 분 안에 영원토록 삼키워지게 되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I kept saying, and as it were singing over these words of scripture to myself; and went to pray to God that I might enjoy him, and prayed in a manner quite different from what I used to do; with a new sort of affection.
나는 계속 말하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계속 노래하면서 하나님께 당신을 계속 즐거워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였었다. 새로운 종류의 정동(情動)이 넘치고 있었다.
But it never came into my thought, that there was any thing spiritual, or of a saving nature in this.
하지만, 이것 안에, 영적인 어떤 것, 혹은 구원케하는 성질에 관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From about that time, I began to have a new kind of apprehensions and ideas of Christ. and the work of redemption, and the glorious way of salvation by him.
그 어간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로운 종류의 인식과 생각, 그리고 그에 의한 구원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An inward, sweet sense of these things, at times, came into my heart; and my soul was led away in pleasant views and contemplations of them.
이러한 일들에 대한 내적이면서도 달콤한 감각이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왔고 내 영혼은 그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유쾌해지고 깊어졌다.
And my mind was greatly engaged to spend my time in reading and meditating on Christ, on the beauty and excellency of his person, and the lovely way of salvation by free grace in him.
내 마음은 그 분의 인격의 아름다우심과 뛰어나심, 그 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그 사랑스러운 방식에 대하여 독서하고 묵상하느라고 깊이 빠져서 시간을 보내었다.
I found no books so delightful to me, as those that treated of these subjects.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책들 외에는 전혀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Those words Cant. 2:1, used to be abundantly with me, I am the Rose of Sharon, and the Lilly of the valleys.
아가서2장1절의 나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라는 말씀이 내 안에 가득차고 넘치곤 했었다.
The words seemed to me, sweetly to represent the loveliness and beauty of Jesus Christ.
나에게 이런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주는 달콤한 말씀으로 여겨졌다.
The whole book of Canticles used to be pleasant to me, and I used to be much in reading it, about that time.
아가서 전체가 나에게 유쾌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읽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었다;
and found, from time to time, an inward sweetness, that would carry me away, in my contemplations.
그리고는 때때로, 묵상 중에 나를 멀리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곤 하던 어떤 내적인 달콤함을 발견하였다.
This I know not how to express otherwise,
어떻게 이런 것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than by a calm, sweet abstraction of soul from all the concerns of this world.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그 영혼의 달콤함;
and sometimes a kind of vision, or fixed ideas and imaginations, of being alone in the mountains, or some solitary wilderness, far from all mankind, sweetly conversing with Christ, and wrapt and swallowed up in God.
때로는 어떤 종류의 비젼, 혹은 어떤 사람과도 단절되어서 홀로 산 중에 있거나 외로운 광야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와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 안에 감싸여서 삼키워지는 것 같은 비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The sense I had of divine things, would often of a sudden kindle up, as it were, a sweet burning in my heart; an ardor of soul,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신적인 일들에 대하여 내가 가졌던 이런 감각은 간혹 사실은 갑자기 일어났다가 내 마음 속에 달콤하게 타오르기도 하였다. 영혼의 그 향기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Not long after I first began to experience these things, I gave an account to my father of some things that had passed in my mind.
이런 일을 겪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마음 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렸다.
I was pretty much affected by the discourse we had together; and when the discourse was ended, I walked abroad alone, in a solitary place in my father’s pasture, for contemplation.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에 아주 고무되어서 대화가 끝나자 나는 밖으로 혼자 나와서 농장의 조용한 곳으로 묵상하기 위해서 찾았다.
And as I was walking there, and looking up on the sky and clouds, there came into my mind so sweet a sense of the glorious majesty and grace of God, that I know not how to express.
그곳을 걸을 때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I seemed to see them both in a sweet conjunction; majesty and meekness joined together; it was a sweet, and gentle, and holy majesty; and also a majestic meekness; an awful sweetness; a high, and great, and holy gentleness.
장엄함과 겸손함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그런 달콤함 결합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달콤했고 부드러웠으며 거룩하게 장엄하였다; 또한 장엄한 겸손함이었다. 위엄스러운 달콤함이었고 또한 지고하며 위대한 그리고 거룩한 부드러움이었다.
After this my sense of divine things gradually increased, and became more and more lively, and had more of that inward sweetness.
이 일 후에 신적인 일들에 대한 나의 감각이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더욱 더 생동감이 있게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이 증가되었다.
The appearance of every thing was altered; there seemed to be, as it were, a calm sweet cast, or appearance of divine glory, in almost every thing.
모든 일들이 변화되었다; 사실 거의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있는 차분하면서도 달콤한 주형물처럼 여겨졌다.
God’s excellency, his wisdom, his purity and love, seemed to appear in every thing; in the sun, moon, and stars; in the clouds, and blue sky; in the grass, flowers, trees; in the water, and all nature; which used greatly to fix my mind.
하나님의 뛰어나심, 그 분의 지혜, 순결함과 사랑스러움이 모든 사물 속에 보여지는 것 같았다; 태양 속에서, 달, 그리고 별들 속에서; 구름 속에서, 그리고 푸른 하늘 속에서; 잔디, 꽃들, 나무들 속에서; 물 속에서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랬다; 이전에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이 모든 자연들 속에서 그러했다.
I often used to sit and view the moon for continuance; and in the day, spent much time in viewing the clouds and sky, to behold the sweet glory of God in these things; in the mean time, singing forth, with a low voice my contemplations of the Creator and Redeemer.
간혹 나는 조용히 앉아서 달을 바라보곤 하였다; 낮에는 하늘과 구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이런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신 분을 묵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부르곤 하였다.
And scarce any thing, among all the works of nature, was so sweet to me as thunder and lightning; formerly, nothing had been so terrible to me.
모든 자연의 작품들 속에서 그 어떤 것 하나도 나에게 달콤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천둥과 번개조차 그러했다.
Before, I used to be uncommonly terrified with thunder, and to be struck with terror when I saw a thunder storm rising; but now, on the contrary, it rejoiced me.
이전에는 천둥치는 것을 보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서워하였었다; 하지만, 이제는,정반대로, 그것을 보면 즐거워 졌다.
I felt God, so to speak, at the first appearance of a thunder storm; and used to take the opportunity, at such times, to fix myself in order to view the clouds, and see the lightnings play, and hear the majestic and awful voice of God’s thunder, which oftentimes was exceedingly entertaining, leading me to sweet contemplations of my great and glorious God.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천둥번개 가운데서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을 느꼈다; 그 천둥이 치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구름을 보려고 집중해 서는 번개가 휘몰아치는 장면을 지켜 보았고 하나님의 천둥의 그 장엄하고 위엄스러운 음성을 듣곤 하였다. 때때로는 너무나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의 위대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달콤하게 묵상하는 데로 나를 인도하였다.
While thus engaged, it always seemed natural to me to sing, or chant for my mediations; or, to speak my thoughts in soliloquies with a singing voice.
이렇게 몰두하는 중에 노래를 부르거나 묵상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혹은 노래부르는 듯 혼자서 조용히 나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뱉아 놓았다.
I felt then great satisfaction, as to my good state; but that did not content me.
나는 그 당시 나의 좋은 상태에 대해서 아주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하지는 않았다.
I had vehement longings of soul after God and Christ, and after more holiness, wherewith my heart seemed to be full, and ready to break; which often brought to my mind the words of the Psalmist, Psal. 119:28.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추구하였고 더욱 거룩하고자 하였으며 나의 마음은 그러한 열망으로 가득 차고 넘치는 것 같았고 언제든지 그런 것들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시편119:28절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곤 할 정도였다.
My soul breaketh for the longing it hath.
나의 영혼은 원하는 바 그 열망으로 상하여졌다.
I often felt a mourning and lamenting in my heart, that I had not turned to God sooner, that I might have had more time to grow in grace.
간혹 내 마음 속에 보다 더 일찍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음을 애닮아 하는 슬픔과 비애를 느껴서 더욱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워 하였다.
My mind was greatly fixed on divine things; almost perpetually in the contemplation of them.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몰두하였다; 그것들을 거의 지속적으로 묵상하였다.
I spent most of my time in thinking of divine things, year after year; often walking alone in the woods, and solitary places, for meditation, soliloquy, and prayer, and converse with God; and it was always my manner, at such times, to sing forth my contemplations.
거의 모든 시간을 신적인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수년 동안을 그렇게 지내었다. 때로는 숲속 길을 홀로 걸으면서 때로는 나 홀로 있는 장소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 명상 중에 찬양이 튀쳐 나오는 것이 나의 생활이었다.
I was almost constantly in ejaculatory prayer, wherever I was.
언제나 대부분 자연스럽게 기도가 터쳐 나왔다.
Prayer seemed to be natural to me, as the breath by which the inward burnings of my heart had vent.
마치 나의 내적 심령의 타오름이 내뿜는 숨결처럼 기도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The delights which I now felt in the things of religion, were of an exceeding different kind from those before mentioned, that I had when a boy; and what I then had no more notion of, than one born blind has of pleasant and beautiful colors.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즐거움은 앞서 언급했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전의 것은 마치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총천연색깔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갖는 그런 차원의 것이었을 뿐이다.
They were of a more inward, pure, soul animating and refreshing nature.
이제 느끼는 것들은 보다 내적이고 순수하며 영혼의 활력을 주는 신선한 성격의 것이었다.
Those former delights never reached the heart; and did not arise from any sight of the divine excellency of the things of God; or any taste of the soul satisfying and life-giving good there is in them.
이전의 즐거움은 마음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신적인 뛰어남을 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을 만족시키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그것들 안에 있어서 그 맛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역주: 이 이후의 기록은 1723년 뉴욕으로 건너가서 목회일을 시작하는 일들이 기록된다. 그의 전기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