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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성탄절
본문
마태복음 01:21~23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현대인의 두려움 – 낭비
성탄절하면 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 박사에 관한 말씀도 그렇고, 누가복음에서 밤새 양떼를 지킨 목자들도 그렇고 둘다 별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64억 km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그 사진에는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주에 지구만 있다면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낭비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마음 먹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낭비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랜드 사목을 할 때, 이랜드에서 강조한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줄임말로 ‘인, 지, 낭’이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 낭비제거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중에서 세번째 낭비제거가 나머지 두가지에 비해서 한단계 격이 낮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거창한 것 같은데, 낭비제거는 좀 쪼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낭비제거를 위해서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작은 낭비에는 신경을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기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조금만 낭비를 제거해도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낭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무언가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낭비의 역설
낭비를 반대하지만, 낭비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낭비하지 않느려고 하면 더 낭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이 있었습니다. 깜깜해서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고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헤드랜턴을 잃어버리고도 하나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답니다. 2인 1조로 일했으면 컨테이어 벨트를 비상멈춤 해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해 줄 사람이 없었서 숨졌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회사 경영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절감 목표를 정해주면, 그 목표 안에서 낭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다보면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낄 건 안아끼고 아끼지 않아야 될 건 아끼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헤드랜턴이나 2인 1조 작업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만 작업이 멈춰도 헤드랜턴이나 인건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려다 더 낭비하게 된 셈입니다.
낭비에 관한 또하나의 역설은 낭비인 줄 알았는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 에펠탑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에펠탑은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높이 324m로 81층에 해당합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 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낭비의 상징이었던 에펠탑은 파리의 자존심으로 변했고, 매년 수 백만 명이 방문하는 유료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에펠탑 뿐만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이익이 된 예는 많습니다. 고기집 종업원이 주인이 미워서 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손님들에게 고기를 막 퍼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커녕 장사가 더 잘됐답니다.
낭비와 사랑
그래도 낭비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를 막으려다가 더 큰 낭비가 생길 수 있고, 낭비가 이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 앞에서 낭비가 일어나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확실한 이득을 근거로 낭비를 합리화하지 말라, 낭비는 나쁘고 말합니다.
그런데, 낭비에 관한 특히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자고 할 때는 한 단어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즉, ‘낭비하지 말자’는 말 앞에 ‘나말고’가 숨어있습니다. 남의 낭비에 관해서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낭비에 관해서는 관대합니다. 원가 절감, 낭비 제거를 강조하는 경영자도 양복을 수 백만원 , 시계도 수천 만원, 자동차는 수 억원 짜리를 구입합니다.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낭비가 분명합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자기는 낭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남이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나는 낭비하고 싶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낭비의 결과입니다. 어렸을 때 평상에 누워서 별을 본 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은 일, 이른 새벽에 산책한 일, 가족들과 중국 여행 가서 거리를 걸었던 일,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일, 성탄절에 마트에서 아이들 선물을 샀던 일 등.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비생산적인 일 투성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낭비의 기억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인생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어느 해변에서 저녁 노을을 감상하던 순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 일,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 예정에 없이 1박 2일로 미지의 장소로 짧은 여행을 간 일 등을 꼽았다. 결혼이나 사업 성공, 자녀의 성취, 혹은 유럽 일주 여행 같은 큰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에 새겨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생산적인 일, 혹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 다시 말해서 낭비에 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낭비한 일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기꺼이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는 낭비를 허락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지출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도 담배는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지출입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당연한 지출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지만, 스스로는 낭비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 가족, 자녀에게 낭비합니다.
낭비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대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낭비
하나님은 왜 광대한 우주 공간을 낭비하면서 수 많은 별을만드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기에는 그 불합리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정도 공간 낭비는 기꺼이 감사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큽니다. 옛 사람들은 별이 천장에 보석을 매달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스케일이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우주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찬란한 별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보다 더 큰 낭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당은 얼마일까요? 무한대입니다. 현재 인간 중에서 일당이 가장 높은 사람은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입니다. 일당이 무려 2억 5천만원이랍니다. 한 번 축구를 할 때마다 2억 5천만원을 받는 축구선수가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낭비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무한대에 비하면 0에 수렴합니다.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이라는 말입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고의 낭비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고의 낭비가 일어난 날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그 가치를, 그 능력을 한 인격 안에 제한하셨습니다. 즉, 낭비하셨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감행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은 잡아가둔다는 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 할까요? 수억원, 수백 억, 수천 억 아니요, 무한대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하면 지구와 우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지혜를 왜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십니까? 왜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렇게 낭비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다른 데 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 제 아이들을 보면,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우주와 과학을 생각하면 신앙이 약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들어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직행통로입니다. 신자는 내 안에 계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확고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명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입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어쨌든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구절을 택해서 거룩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낭비는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무한한 낭비를 감행하신 성탄절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를 살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배도 낭비일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낭비를 알기에 이 자리게 왔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것입니다. 낭비를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실천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