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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창세기 9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무지개 언약과 노아의 실수이다. 간단한 내용같지만 해석을 위해서 알아야 할 개념이 많다. 성경을 생각 없이 통독하면 그냥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성경은 별 거 아닌 일도 기록했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간다. 성경의 기록이 신중하게 선별되고 정밀하게 배열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 성경은 쉬워보이지만 끝을 알 수 없을만큼 깊다.
다행히 성경은 친절하다. 친절하게 주제가 하나이다. 시작부터 주제를 알려주고 시작한다. 그 주제를 요약하고 비유하고 반복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은 사람, 믿는 방법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일단 창세기 11장까지는 성경 전체의 요약이다. 매우매우 압축되어있다.
이제 창세기 9장이다. 창세기 9장은 요약, 비유, 반복이 나온다. 그러면서 새로운 개념을 알려주고, 전진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설명하겠다. 먼저 첫번째 요절을 알아보자. 창세기 9:26-27이다.
요절 1. 창세기 9:26-27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의 실수를 알아보자.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자기 장막에서 옷을 벗고 잤다. 옷 벗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아들 함이 다른 아들들에게 알렸다. 다른 아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다. 이것이 노아의 실수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읽으면 네 가지 정도 의문이 생긴다. 첫째,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함의 잘못이 그렇게 큰가? 셋째, 함이 잘못했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 넷째, 셈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 배운 것을 적용해서 해석해보자. 28절에 보면,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다. 삼백오십 년 동안 일어난 일 중에서 하나를 선별한 게 이 사건이다. 홍수 후 삼백오십년을 이 사건에 압축했다. 요약된 기록이다. 에피소드나 해프닝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비유를 담고 있을까? 아담에 비유하고 있다.
홍수 후에 성경의 최대 관심은 무엇일까? 노아가 상속한 구원계시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이다. 노아는 아담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아담이 구원계시를 아벨/셋에게 전달한 것처럼 노아도 구원계시를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다. 노아는 실수했다. 아담도 실수했다. 아담이 실수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벗은 것을 누가 알게 했느냐고 물으셨다. 뱀이 그렇게 했다. 벗은 몸을 누가 가려주었나? 하나님이 가려주셨다. 본문에서 노아가 벗은 것을 알게한 사람은 함이고, 가려준 사람은 셈이다. 비유적으로 창세기 9장과 창세기 3장이 비슷하다. 구원계시를 받는 상속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둘째, 함의 잘못이 그렇게 큰가? 이 사건이 단순한 에피소드나 해프닝이라면 큰 잘못이 아니다. 압축된 사건이기 때문에 큰 잘못된다. 압축된 건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유적이란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 기록하기 어려우니까 한 가지 사건에 뭉뚱그려서 표현했다는 말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일은 큰 잘못이 아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알린 사건은 함이 노아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무엘하 6:16 다윗이 춤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긴 미갈과 비슷하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줄 사람은 노아 밖에 없었다. 노아는 파이다고고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안내자란 의미이다. 안내자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만나지 않겠는가?
주의할 점은, 현대의 목사를 파이다고고스라고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오직 성경만이 파이다고고스이다. 목사, 성전, 율법 등 어떤 것도 파이다고고스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용납치 않으신다. 목사들이 은근히 자기를 파이다고고스인 것처럼 가르치거나 암시하는 경우가 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심각한 죄라는 걸 몰라서 하는 행동이다.
성경을 구원계시를 담은 책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존중해야 한다. 만약 목사가 자기 잘못을 보고도 떠벌리지 말라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함이 했던 태도이다. 구원계시를 자기 합리화에 이용하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행동이다.
셋째, 함의 잘못이 큰데 왜 가나안에 저주받았을까?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 가나안의 아들들은 순서대로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이다. 넷째 아들 가나안이 함의 잘못에 동참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나안은 나중에 극히 죄악이 심해서 심판받는 가나안 민족의 조상이다. 역사에는 가나안 민족처럼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극악한 죄를 범하는 개인, 단체, 민족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절하게 제거하셨기 때문에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었다. 노아 언약의 실현이다.
노아가 가나안이 저주 했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이 미래에 악한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아니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개념이라서 기회가 되면 기독교 과학관을 설명하겠다. 간략하게 말하면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고 가르친다. 창조와 동시에 종말이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종말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이 이미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책을 출판할 때 이미 결말이 쓰여져 있는 것과 같다. 영화도 개봉할 때 엔딩이 정해져 있다. 이 세상이 책이나 영화와 다른 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현재, 미래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현재 행동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오차 범위가 있을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알 수 없는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저주가 가나안 민족에게 악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 있을 가나안 민족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보고 말한 것이다. 에서를 생각해 보자. 에서는 태중에서 선택받지 못했다. 동시에, 에서는 자기 스스로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겼다. 에서가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에서에게는 잘못이 없다.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서가 선택받지 못한 것과 구원계시를 소홀히 여긴 것은 시간적으로는 선후가 있지만 섭리적으로는 순서가 없다. 자세한 것은 신비에 속한다.
함의 아들들 이름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이라고 한다.
넷째, 셈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의 하체를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셈은 함과 반대로 노아를 존중했다. 파이다고고스를 존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한다는 말이다. 비슷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 다윗이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 자른 것을 회개했다. 사울 개인은 악한 자였지만, 그가 받은 왕의 기름부음은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다윗은 그가 받은 기름부음을 존중했다. 다윗이 구원계시의 상속자가 된 것은 이런 존중때문이다. 셈도 마찬가지로 노아의 역할을 존중했기 때문에 상속자가 되었다.
요절 2. 창세기 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있지 아니하리라
무지개 언약의 의미는 창세기 8장과 연결되기 때문에 8장을 다시 들어보기 바란다. 조금 덧붙이겠다. 무지개 언약은 노아가 중심이므로 노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노아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무엇일까? 노아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을 보장하는 근거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세상을 보존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심판은 반드시 온다. 그 심판은 대홍수처럼 전세계적인 다운그레이드가 아니다. 어떤 식인지 알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종말이 될 것이다.
정리
적용
시편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