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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창세기 4장도 설명할 분량이 많아서 나누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의 핵심은 복음의 전달입니다. 아담은 타락한 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아담은 복음의 씨앗을 가지고 쫓겨났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입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담이 받은 복음을 아담의 자식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저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복음을 정확하게 전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현실은 복음을 잘 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초의 상속자 아벨
아담이 받은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인 자식은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은 최초로 믿음을 상속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은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 많은 자식 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벨이 유일했습니다. 아벨은 복음의 씨앗을 양으로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의 씨앗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과 3:21 ‘가죽옷’입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분이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요소가 복음의 최소 요소인 복음의 씨앗입니다. 이 두 요소를 하나로 합친 것이 양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씨앗은 본질인데,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상태는 조금씩 변화 발전합니다. 양을 드리는 제사가 나중에는 제단으로 발전하고 더 나중에는 성막과 성전의 형태로 발전합니다. 나중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됩니다.
가인은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가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법이 아니라 자기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인이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를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양으로 드리는 제사의 의미와 방법이 여기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레위기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위기는 나중에 쓰여진 것 아닙니까?”라고요. 제 답변은 “레위기가 나중에 쓰여졌지만, 조상에게 전해들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갑자기 아벨이 양으로 제사를 드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아담이 자식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전해주면서 양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단, 여기서는 그 설명을 생략했습니다. 이유는 창세기 1~11장은 수 천년의 기간을 요약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세세한 설명을 기록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레위기에서 하게 됩니다.
다시 가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가인은 복음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사람을 대표하는데, 복음을 왜곡한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자기 숭배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 것이 자기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자기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엄밀하게는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3장에서 뱀에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박수를 쳐드리고 싶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숭배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사탄의 후손이 되는 길입니다.
가인의 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받은 표식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복음의 표 혹은 용서의 표라고까지 말하는데,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666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신다는 표입니다.
가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아마도 아벨의 자손과 아벨을 이어서 복음을 상속한 셋의 자손일 것입니다. 근거는 가인을 죽이면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7은 하나님의 숫자이기 때문에 믿음의 자손에게 한 경고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자손들에게 감정에 치우쳐서 가인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666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도 바로 천벌을 받아서 죽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로 그들이 자기 수명을 누리도록 허락하십니다.
요절
대략의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요절을 설명하겠습니다. 요절은 5절과 25-26절 두 곳입니다.
창 4:4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아벨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벨은 복음을 상속한 최초의 상속자입이면서 복음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한 최초의 순교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아벨의 삶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독하면서 저는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인물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이고, 또 한 명은 초대 교회의 집사 스데반입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적인 면에서 뛰어났지만, 허무하게 순교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벨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벨, 야고보 사도, 스데반 집사는 신앙적으로 뛰어났지만 복음을 위해서 공헌하지 못하고 일찍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인재의 허무한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성공의 관점이 아니라 목적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달성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낀 세 제자 중의 한 명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가장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요? 가장 먼저 순교했다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끼고 뛰어난 신앙인을 일찍 데려가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큰 역할을 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만약에 꼴찌를 먼저 죽게 하면 꼴찌 입장에서는 뭔가 억울할 거란 말입니다. 일등이 먼저 죽으면 안 억울하죠. 스데반 집사도 집사 중에서 가장 훌륭한 집사였고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와 스데반은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을 위한다는 목적에 충실하고 떠났습니다. 큰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맡은 역할을 잘 하고 하면 됩니다. 그게 신앙인의 성공입니다.
아벨은 허무하게 떠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아담의 마음에 기억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셋에 관해서 기록할 때 “아벨 대신 다른 씨”라고 표현합니다. 아벨은 일찍 죽었지만, 셋이라는 후계자를 만들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순교하면서 교회에 큰 부흥을 유산으로 남겼고, 스데반 집사는 죽기 직전에 행한 설교와 죽음을 맞이하는 담담한 모습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회심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허무하게 보여지는 죽음이 허무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대한 섭리가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순교만큼 힘든 것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관심과 인기가 돈으로 연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하는 것이 시시해 보입니다. 저는 이런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현대인의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순교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일 수 있습니다. 관심과 인기를 끌려고 하지 말고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창 4:25-26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다음 요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셋의 이름이 셋이라서 한국 사람은 셋이 셋째인 줄 압니다. 사실은 이때 이미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많이 낳았고 그들도 자식을 낳아서 인구가 매우 많아진 상태입니다. 문제는 그 자식들 중에서 아벨이 죽은 이후로 아담과 하와가 전해주는 복음을 믿는 자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상속할 상속자가 없는 상태가 지속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셋이라는 자식이 복음을 상속하게 됩니다. 아담은 그래서 셋을 ‘아벨 대신 다른 씨’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벨을 대신해서 복음을 상속한 상속자라는 의미입니다. 인구가 아무리 많아도 상속자는 매우 적습니다.
26절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다음 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그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은 지금과는 달리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믿는 미래지향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시에 믿음을 전달해야 그 믿음의 후손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수 있는 목적달성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셋은 아들 에노스를 낳고 그 아들에게 복음을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인격적으로 교제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전 시대에는인격, 성격 등을 나타내는 단어가 따로 없이 이름이라는 단어로 그런 의미를 표현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무엇이냐면, 여호와와 교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4절에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의 기름을 드렸다는 표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름은 지방질입니다. 지방질에는 불이 붙잖아요. 기름을 드렸다는 말은 그 부분을 불살라서 제사지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레위기에 자주 나타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레 3:14-16
14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5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보셨듯이 번제를 드릴 때 기름 부분을 불사랐습니다. 창세기 4장의 기름을 드렸다는 표현이 레위기와 같은 표현입니다.
레위기의 번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아벨의 제사도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 대신 다른 씨인 셋도 아벨과 동일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은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에노스에게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아벨이 양과 기름을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다는 믿음의 표현이었고 그 믿음이 셋과 에노스에게 이어졌습니다. 셋을 굳이 아벨 대신 다른 씨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셋이 아벨의 믿음을 물려받은 믿음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만 믿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구약 시대 사람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 통독이 헛수고가 됩니다.
저는 다양한 성경 통독 강의과 성경 공부 세미나를 들었습니다. 다들 훌륭한 강의였지만, 다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믿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었다고 가르쳤습니다. 명시적으로는 말을 안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제가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공부 강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성경 연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 없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성경 내용을 알고, 방언하면 기독교인이 된 줄 압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는데 그걸 모릅니다. 제 강의를 잘 들으시면 기독교가 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즉 구원계시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리
믿음의 최초 상속자 아벨과 아벨을 대신한 셋을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을 전달하고 전달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상속한다는 것은 영광이면서 동시에 핍박받을 수 있는 위험입니다.
셋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적용
아벨은 최초로 믿음을 상속한 믿음의 상속자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을 상속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벨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벨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성경의 인물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사도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집사 스데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우수한 삼인방이었습니다. 그 삼인방 중에 한 명이 별다른 일을 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집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가장 먼저 순교합니다.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