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w12_새로운 기대로 봄을 맞이하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소망의 하나님!
신선한 설레임으로 매일의 문을 열게 하시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새 봄을 맞이하게 하소서. 이 소망의 계절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채우셔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시작되는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걷게 하소서. 예루살렘 성에서부터 성전과 이름모를 거리로, 겟세마네 동산,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골고다 언덕까지 함께 걷게 하소서. 그리하여, 전능한 하나님이 왜 고난의 길을 가셨는지 묵상하게 하소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고, 이것이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살과 피라고 하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 연합됨을 다시 확인하고자 하오니 성찬식에 함께 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동행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해 영혼에 영원한 씨를 받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격에 거룩한 옷을 입게 하시며, 기도로 생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너의 쓴잔을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남북, 북미 정상 회담이 예정되어 전쟁의 위험이 줄어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검증가능한 핵 포기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북한이 세계 경제 무대에 복귀하여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미투 운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성적으로 정결해 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연예, 토크, 코미디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성적인 대화와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려하는 잘못된 관행이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방송, 연예 사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서 악습과 적폐를 청산하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가수, 배우 등 연예인들 꿈꾸는 청소년들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예계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은 죄악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거룩은 모든 추악을 정결하게 합니다. 지은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되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206장. 나 무엇과도 주님을

이번 주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3.18_[사순절] 상한 마음 다스리기

본문

민수기 21:04~09 / 2018년 03월 1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한줄 요약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해 좁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에는 민수기 2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의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신약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12:2이고, 구약에서는 민수기 21:9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헬.아포라오: 주의 깊게 생각하다, to consider with the eyes)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히.나바트: 주목하다, 숙고하다)

두 구절에 모두 ‘보다’라는 공통된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슬쩍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생각하면서 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구약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우리 현실에서 믿음을 활용해서 상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0. 뒤돌아보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이 상하십니까?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여러 가지 있겠지요. 사업이 어려울 때, 맡은 일이생각만큼 성공적이지 못할 때, 자녀가 부모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등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는가?”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마음이 상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 상한 마음을 해소하는가?”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십니까? 답변하기 곤란하시죠? 시간 끌지 않고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없고 해답만 있습니다. 폴 트루니에의 책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폴 트루니에는 스위스의 내과의사이자 기독교 상담학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나무의 줄기 부분은 땅 위에 드러나 있고 뿌리 부분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마음을 줄기라고 한다면, 안 드러난 마음을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폴 트루니에 ‘강자와 약자’

인간은 동일한 내면의 고통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반응을 보인다. 강한 반응이란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자신 있고 적극적인 모습을 띠며, 자신의 두려움을 덮기 위해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자신의 나쁜 면을 감추기 위해 좋은 면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약한 반응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약점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것을, 강자는 은폐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반면 약자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약자의 절망과 강자의 불안, 그리고 이 둘의 불행 이면에는 거대한 착각이 있다고 믿는다. 그 거대한 착각이란 인류에게는 강자와 약자, 두 부류가 따로 있다는 그 생각 자체다. 그 둘 속에는 똑같은 내적 인간성이 감추어져 있다. 외적인 가면, 즉 외적인 반응은 약자뿐 아니라 강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기만한다.사실,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약한 존재다.

사람은 강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약하게 반응하기 마련이고, 그 둘 사이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돌아서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으셨다. 두려움 중에 죄가 되는 것은 날마다 버려야 하지만, 두려움이 주는 자극을 잘 간직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 약자는 약한 반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용기를 회복하게 되고, 강자는 강한 반응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교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설명을 드리면, 마음이 상했을 때 화를 내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우울해 지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극복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문제를 정직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강자라고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향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가지 반응의 뿌리에 공통적으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 트루니에는 모든 인간은 약자라고 말합니다. 인간 중에 강자는 없습니다.

이러한 논증이 폴 트루니에의 큰 공로입니다. 성경적인 심리분석의 방향을 잘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반응이나 약한 반응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두려움에 주목하고 그 두려움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참고 견디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재로 마음을 다스리는 열쇠가 됩니다.

1. 4~5절. 마음이 상하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 마음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펴보겠습니다.

[21:4~5]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원망’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원망은 ‘뒤돌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라고 나와 있으니까요. 이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믿음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인데, 이들은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앞 일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한데, 또 길을 멀리 돌아서 가야하니까 고달픕니다. 두려움이 증폭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뒤돌아 가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줄기를 보지 마십시오.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뿌리를 바라보십시오. 뒤돌아보는 이유는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내면의 불안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여 해결하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이 만들지 않은 하늘, 땅, 공기, 물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불안정합니다.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갈 여지가 생깁니다.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고 깨달아야 믿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의존적인 존재인 인간이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근본적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품에 안겨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2. 6~7절. 고통 속에 기도하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도 기도와 동일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자기 존재의 불안정과 거기서 비롯된 두려움을 깨달은 정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를 해도 내용은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기도하는 강한 반응이나 원망하는 약한 반응에 속으면 안됩니다. 표면적인 마음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 밑에 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 존재를 의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자신의 비서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도와주는 도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세게 한다고 기도가 강력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하나님께 순복해야 기도가 강력해 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믿음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깊은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줄기만 볼 뿐 감추어진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줄기를 잘라내고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뿌리를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뿌리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서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흡수할 때 마음 줄기도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가면과 포장을 벗겨내려는 의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같은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소한 일에 크게 화를 내시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오늘 구절은 매우 압축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반응하시는 내용이 있는데, 대부분 압축된 핵심 가르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배성들이 믿음에서 정반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멸망 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비상 개입을 하십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극약 처방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3. 8~9절. 바라보면 산다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뱀이 예수님을 비유하는게 맞는냐는 점입니다. 네, 맞습니다. 성경에서 뱀을 좋게 비유한 부분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이고 하나는 마태복음 10:10에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성경은 단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예수님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뱀은 무조건 사탄이고 금은 무조건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 영해’라는 부흥회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골탕먹이려고 이렇게 ‘이스터 에그’를 숨겨두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쳐다본즉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주의깊게 생각하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단순하게 믿자”라는 구호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성경과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 중에 믿음의 심층으로 도달한 일이 없습니다.

깊은 사고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청교도는 대학 총장도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학교는 커녕 부인한테 글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고 역작인 천로역정을 지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마음이 거짓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초등학교도 못나왔어도 정직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때문에 슬퍼하고 사람 때문에 고민하다보면 사람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깨달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귀기울이면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한 요약입니다. 더불어 우리 인생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상했을 때,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소극적으로 반응하거나 과도하지 않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이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건 정직한 성향이 강한 것이라고 폴 트루니에를 인용해서 알려드렸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마음 더 깊은 곳, 즉, 마음의 뿌리에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교만하게 원망하고 뒤돌아가느냐가 진짜 문제가 됩니다. 두려움을 포장하지 말고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하나님께 은혜를 탄원하십시오. 두려움이 해소되고 포장된 반응들이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면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인격을 신뢰하십시오. 그 바라봄이 영원히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018w11_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주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빛 되신 하나님!이 시간 봄의 햇살처럼, 낙심과 우울한 기운을 날려 보내는 기쁨과 소망의 빛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의 예배가 주일의 예배가 되도록 매일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 기간, 우리가 악한 본성을 극복하고 세상의 죄악을 이길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옵소서. 우리가 거룩한 영에 이끌리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주님의 길을 발견하게 하시고, 주님의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세상에 가득 찬 불의로 인해서 놀라거나 좌절하지 않게 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함을 묵상하게 하소서.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양심을 내려놓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해 영혼에 영원한 씨를 받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격에 거룩한 옷을 입게 하시며, 기도로 생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찬양 : 155장. 어두운 밤길에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남북, 북미 정상 회담이 예정되어 전쟁의 위험이 줄어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정상 회담을 통해서 북한은 완전히 핵을 포기하게 하시고, 미국은 전쟁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우리나라는 북한이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력을 속히 갖출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약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장애인 올림픽,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진행 중입니다. 보다 많은 국민들이 그들을 응원하도록 관심을 돌려주시고, 방송사들도 중계방송을 늘리게 하시며, 관련 뉴스가 많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랫동안 준비한 선수들이 보람을 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미투 운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성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여성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치료해 주시옵소서.

또한, 미투 운동이 개인의 한풀이나 비방에 그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를 제거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갑질 문화, 권력 남용, 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사오니 이러한 문화가 이 기회에 근절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편, 미투 운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오해와 사소한 실수에 관해서는 과도한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게 하소서. 나아가 이것이 남녀 갈등으로 과열되지 않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하나님의 사랑은 죄악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거룩은 모든 추악함을 이깁니다. 지은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되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주 설교  민수기 21:04~19, [사순절] 상한 마음 다스리기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3.11_요나의 표적이 주는 교훈

본문

마태복음 12:38~45, 요나 3:5 / 2018년 03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3: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한줄 요약

요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알려줍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간에는 요나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표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오토’, 헬라어로는 ‘세메이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에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적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일’을 의미합니다. 표적은 ‘기적’을 포함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표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첫째,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기적, 은사, 능력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병이 치료되거나 귀신이 쫒겨나는 것, 성령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둘째, 기도 응답입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라도 기도 응답이 표적이 됩니다.셋째, 시대의 표적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본문하고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표적입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그 표적을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0. 병원갈까, 기도할까?

요즘도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병원가고 기도하십시오. 병원간다고해서 믿음 없는 것이 아니고 병원 안간다고 믿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이유는 병원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기도로 대표되는 신앙이 서로 반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과 신앙이 반대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과 상식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도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기적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들어가 있다가 살아난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설명하면,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무조건 믿어라”라고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하는지도 설명합니다. 이런 배경을 설명한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한 후에 그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성경이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부활이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믿을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 안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런 분께는 죄송한데, 그게 믿는게 아닙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는 거고 믿고 싶은 거일 뿐입니다. 그런 자세는 좋지만, 다 됐다고 생각하는 건 큰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을 진심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편견 없이 보니까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라는 공식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믿음 없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믿음을 갖도록 차근차근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잘 따라오지 못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엇나갔는지 아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1. 38~40절.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서 몇 사람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말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진짜 큰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주셨냐면,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건 표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한 이유는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돼!’라고 근거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적을 보여주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부활의 표적에 대해서 예고하고 다른 표적은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표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표적 알아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주셔도 알아채지 못했느냐면,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면 안돼! 하나님도 기적을 일어키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잘못된 거야!”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가진 안식일과 같은 편견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선한 양심에 귀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선한 양심과 어긋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현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난 없는 형통, 희생 없는 영광, 거룩 없는 성령, 섬김 없는 은사가 바로 번영주의입니다.

기도만 많이하면 형통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누리려고만 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데 말과 행동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합니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물의를 일으킨 목회자가 건재하는 이유는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판적으로 교회에 다니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 41~42절. 요나의 기적이 알려주는 의미

예수님이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이 이상의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살던 시대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믿지 못한다면 설명이 무의미합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더 잘 볼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이나 남방 여왕 처럼요.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교회 안 다니는 사람한테 “이 교회하고 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때 보이세요?”하고 물어보면 어느 정도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 많이하고 봉사도 열심히해서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 그 교회 사람들 엄청 이기적이예요”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도도 봉사도 잘 못해서 힘 없이 다니는데, “그 교회 사람들 순수하고 겸손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새 카톡으로 구국기도회니 하는데 참여하라는 문자가 가끔 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그걸 주도하는 분들 얼굴이나 말투를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애들한테 “얘들아, 이 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은 것 같니?”라고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생각해 봅니다.

분노와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대답을 내 놓을까요? 아이들은 존경스럽다고 할까요?

다들 소신과 근거를 가지고 나름대로 믿음으로 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소신과 근거, 믿음이 어디에선가 오염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채려면 자기 마음의 오염을 제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광기가 아니라 겸손과 평안 가운데 해야 합니다..

3. 43~45절. 나중에 전보다 심해진다

표적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없으면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내가 선택하는 길이 곧 내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면 잘못된 길을 가게되고 잘못된 길을 가면 마음이 더 잘못됩니다. 악순환에 빠집니다.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걸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걸음은 단지 한걸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걸음 이후에 걸을 수 많은 걸음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첫생각이 중요합니다. 정직과 거짓의 갈림길에서, 공의와 불의의 갈림길에서, 고난과 번영의 갈림길에서 첫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옳은 길을 선택하면 힘들고 고생할 것 같지만 고난 중 형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선순환에 들어섭니다. 반대로 옳지 않은 길을 선택하면 번영할 것 같지만 환난에 빠집니다. 예수님과 멀어지고 악순환에 빠집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우리를 힘든 길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정직, 공의, 희생은 상대적으로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옳을 길을 가면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 끝에 예수님이 활짝 웃으며 여러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켜는 일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선한 양심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우면 어리석음이 떠나갑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아는 빛나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웁시다.

결론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부활이 믿기 어렵지만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 내면이 정결해 져야 합니다. 표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편견과 분노, 광기에서 벗어나 평안과 확신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밝은 빛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인격을 묵상하십시오. 언제든지 그것이 최우선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지켜질 것입니다.

2018w10_하나의 씨를 심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부드러운 봄의 기운에 무거운 외투를 벗어놓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님의 사랑도 봄과 같아서 이 아침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생명이 시작되는 이 계절에 우리가 하나의 씨를 심게 하소서. 하나의 씨를 심음으로써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일을 시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온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하나의 일을 시작하게 하셔서 그 일로 인하여 우리가 벅찬 열매를 수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사순절이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내리게 하시고, 남의 멱살을 잡던 주먹을 펴게 하시며, 남을 비난하던 입을 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혼 깊은 곳을 감동하여 내면에서부터 그러한 변화가 시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거룩한 씨를 심으신 주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약속하신 주님, 죽음 너머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주님,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하시는 하나님, 3월 9일부터 장애인 올림픽, 평창 동계 패럴림픽이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딛고 일어난 스포츠맨들에게 우리 국민들이 관심과 격려를 보내게 하시고, 그들을 보며 환난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미투 운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수치를 감수하며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용기를 낸 여성들을 주님의 손으로 보호해 주시옵소서. 성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던 여성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치료해 주시옵소서.

간통죄 폐지 등으로 인해 성 윤리가 흐려지려하는 사회 분위기에 경종을 울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성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문제임을 인정하게 하시고, 그것을 소중하고 신중하게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투 운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오해와 사소한 실수에 관해서는 과도한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게 하소서. 이것이 남녀 갈등으로 과열되지 않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미투 운동이 갈등, 분열, 정죄가 아니라 사과, 회개, 화해를 향해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게 하시고, 국민과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시며, 온 사회가 함께 책임을 인정하여 참된 화해를 이루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하나님의 사랑은 죄악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거룩은 모든 추악함을 이깁니다. 지은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되 진실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을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주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3.04_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본문

누가복음 10:25–37, 신명기 6:4~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한줄 요약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간에는 신명기서가 인용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율법은 가이드(a guide)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벽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또다른 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즉,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벽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잘 깨닫는 것도 힘들지만,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교육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까 답은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대가가 성경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교육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많자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맞춤형 단계적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르셨고, 단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영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하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율법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26~28. 영생을 얻는 방법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변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앞에서 하신 말씀과 대답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상이었습니다.

[14:5~6]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 두 제가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못지 않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은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는 가르침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맞춤형 교육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던 말씀을 대상에 관계없이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율법학자가 신명기 6:4~5절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이 말씀을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끄집어 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인격성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데만 힘썼지 율법의 정신을 지켜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태도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법률에 충성했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은 거부했습니다.

2. 29~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인격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생겼는데,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몰래 피해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생각을 고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양심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데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 주일 성수는 잘하는데 직원들 착취하는 장로, 술 담배하지 않는데 돈 떼어먹는 집사,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청년, 건전하지 않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헛똑똑이 교인 등입니다.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냐면, 어떤 한 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철처하게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양심이 없는데 뭔가 충성하니까 자기 스스로 신앙 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인 예를 들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관련 뉴스를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편들고 어리석은 주장을 일삼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이웃이 아니라 교회 안다녀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던 불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3. 37.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 말씀의 절정은 37절입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단계적 교육입니다.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직 그 단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비슷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말로만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또 교회 안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교회 안에서만 충성,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서 강자의 횡포에 항의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손해를 보아도 공의를 지지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떨리게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헛된 충성을 믿음의 증표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온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지키다가 손해를 보고 좌절했을 때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을 깨달을 것이고 깊은 확신 속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율법학자는 오늘날 교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의 양심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신앙 생활 잘하고 있지요? 저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배웠고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율법학자의 선한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보다 악한 삶을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율법학자의 몫입니다. 그가 어떤 길로 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선한 일반인 즉,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신앙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문제가 있든지 그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논리와 사변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헛된 확신에서 벗어나서 의를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려운 길을 가라고 권유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가라고 이끄십니다. 헛된 확신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w09_굳어진 마음을 변화시키소서

읽으면 기도가 돼 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내 읽어주세요.

살아계신 하나님!
무뎌진 겨울 바람을 맞으며 예배의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겨울의 절정이 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부활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묵상합니다.

지금쯤 땅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싹을 틔우려는 씨앗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영혼 은밀한 곳에서 복음의 싹을 틔우려는 성령님의 부지런한 활동이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오니 굳어진 마음을 변화시키사 영원한 소망이 자라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순절 기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왜 십자가의 길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지를 알게 하시고, 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오직 하나의 방법인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씻어주시고, 주님의 영으로 우리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거룩한 기름부음으로 우리 내면을 채워주시고, 치료의 손길로 우리 상처를 고쳐주시옵소서.

우리나라를 하시는 하나님,
3월 9일부터 열리는 장애인 올림픽, 평창 동계 패럴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육체의 장애가 정신의 장애로 이어지는 것을 거부한 위대한 사람들의 축제가 큰 기쁨 가운데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을 보며 우리도,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배우게 하시고, 더불어 우리가 장애인과 사회적인 약자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배려하고 격려하여 세상을 살아가 용기를 북돋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성 범죄를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성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사회적인 비난이 두려워 침묵했던 여성들이 용기를 냈습니다. 그들이 낸 용기를 통해서 성 범죄자들이 합당한 징벌을 받게 하시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시옵소서.

이 일을 계기로 공의를 저버린 우리 사회 분위기가 변화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가혹한 강자숭배, 부당한 방법을 사용해도 성공하면 된다는 성공주의, 무조건 주류를 두둔하는 주류 콤플랙스를 제거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사순절 기간, 교회를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들이 의를 위해 목마르고 의를 위해 기꺼이 핍박받으려는 결단을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주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2.25_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13:10~17

2018년 02월 2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한줄 요약]

복음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드러냅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두번째 주간에는 이사야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 비싼 선물이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간절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사순절 묵상을 하고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이유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면에서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항상 문 앞까지만 가도 “어서 오십시오”하던 식당이 어느날 갑자기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분위기로 바뀐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복음은 쉽다, 믿음은 단순하다, 구원은 공짜다”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듣는데, 반대의 말씀도 성경에는 많습니다. “복음은 어렵다, 믿음은 복잡하다, 구원은 비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 정확하게 의미를 알고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악하게 살다가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아무하고나 결혼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면서요? 왜 사람 차별합니까?”라고 반발한다면 그 반발하는 사람이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닙니까? 평등하다는 말이 동등한 결혼 상대자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결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아무나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합당한 조건을 갖추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악하게 살다가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구원는 손쉽게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의 결혼하는 것은 원하기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속된 말로 ‘구원은 싸구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주보를 보십시오. 두란노에서 나온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라는 책에서 스캔한 그림입니다. 제가 주보에 싣고 있는 것도 이 책입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싸구려 물건은 받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너무 값진 물건은 아무나 주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줄 사람을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1. 10~12.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예수님이 비유로 진리를 가르치신 이유는 재미를 위한 목적도 있고, 보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보는 것에 빗대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미 설교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복음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비유는 잘 생각하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싫어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간절하지 않은 사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설명을 낯설어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려고 하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최대한 쉽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셨을 거야. 어렵게 생각 안해도 네네만 계속하면 구원받을 수 있게 말씀하시는 분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전화로 보험 가입할 때, 형식적으로 설명을 듣고 ‘네, 네’만 해주면 큰 문제 없이 보험에 가입되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되었습니다. 다른 본문을 볼 것 없이 오늘 본문을 보면 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복음을 믿겠다고 하면 구원을 주시는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네, 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참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2. 13~15. 보아도 보지 못하게(반어법)

우리가 두 번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싸구려’처럼 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진정한 의미를 숨기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복음에 대해서 잘 아는데요?”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질문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드린다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죄에 대한 각성을 체험하셨습니까?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조금의 변명도 없이 인정하십니까?”

제가 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즉,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은 하나님이다” 정도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도 대단하지만 그 하나님과 확실하게 연결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성경 속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개성과 인격을 가진 실체로서 영혼에 확실하게 조명됩니다. 그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해 주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히 유신론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압니다.

3. 16~17. 너희는 복이 있다

반대로 복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똑똑하지 않고 재산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간절함과 열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시면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예수님께 알려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합니다. 그들은 실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감싸주셨습니다. 끝까지 그들을 붙드셨고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왜 그들에게는 복이 있었을까요? 복음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불한 댓가가 구원을 받기에 턱 없이 부족했지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정도가 되지 못했지만 구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등가 교환이 아닙니다. 즉, 산 게 아닙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비싼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해도 구원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홀연히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습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하려고 하는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도 구원을 살 수는 없지만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3:7~14]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결론]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비싼 선물입니다. 주면 받고 안주면 말겠다는 태도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자, 즉,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비싼 선물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비싼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댓가를 치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를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을 두려움 없이 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2018w08_우리 눈과 마음을 맑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주 우리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경배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찾아와 만나주시는 주님, 날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굴곡진 인생길에서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님께 합당한 백성이 되어, 온 생애를 바쳐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긍휼히 여기셔서 응답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과 발자취를 따라 묵상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며 우리는 날마다 살아갈 힘을 얻사오니,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마다 확신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주의 말씀과 영으로 우리 눈과 마음을 맑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저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시켜주시옵소서. 우리가 푯대를 향해 한걸음씩 전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높임 받으시고, 가난하고 연약한 우리 안에서 생명의 샘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나라를 하시는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이 오늘 폐막합니다. 전쟁의 위협, 행정적인 착오, 과도한 숙식 요금, 선수 폭행 등의 문제로 인해서 심각한 우려 속에 개최되었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인생의 문제는 끊이지 않지만 기도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문제가 닥쳐올 때마다 기도로 이길 수 있도록 기도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설 연휴와 올림픽이 지나 일상에 복귀하는 국민들과 동행해 주시고, 일상의 자리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육체적으로 힘들어 낙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로하시며 도움의 손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진로를 고민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주시고, 매너리즘에 빠져 의욕이 없는 자에게 열정을 주시옵소서. 물질이 부족해 근심 걱정하는 자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고,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자에게 치유의 기름을 부어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우리 나라의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소망의 등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가 가난하더라도 정결하게 하시고, 낮아져도 담담하여 거룩한 품격을 갖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오며,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주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2.18_너는 작을 지라도

미가 5:2

2018년 02월 18일 주일 설교

핵심 구절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한줄 요약

나는 미약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나와 관계를 맺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나도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영어로는 관사없이 ‘Lent’라고 합니다. 부활절 전 46일을 가리킵니다. 사순이면 40일인데 46일인 이유는 주일을 빼고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빼는 이유는 주일에는 금식 혹은 고행을 중지하고 기쁘게 보내자는 취지입니다. 예전에는 사순절에 금식 혹은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일만은 그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우리가 절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신앙 습관을 형성하려는 의도입니다. 좋은 습관이 인생을 바꿔주듯이 좋은 신앙 습관도 인생을 바꿔줄 수 있습니다.

0. 자존심이 아니라 자경심

사회가 경쟁이 심해지고 스트레스가 늘어나면서 심리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심리적인 처방을 내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처방 중에 하나가 ‘자존심’ 혹은 ‘자존감’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존감이 낮아서 우울증이 걸리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고 합니다.

김미경이라는 강사의 자존감 강연도 있었지만,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인생에 어느 정도 도움은 됩니다. <자존감 수업>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용

‘자존감 수업’은 자존감의 정의부터 짚고 넘어갑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나를 존중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명확하게 자존감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Self-esteem)’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존.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어떻게 하면 끌어올릴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 남의 눈이 항상 두려운 사람, 감정싸움으로 쉽게 지치는 사람, 항상 공허함에 시달리는 사람 등

저자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의과대학을 다닐 때 유급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낙방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학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적도 있고, 대학입시에도, 심지어 재수학원 입시에도 떨어졌다. 의과 대학 낙제는 그중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의 경로 자체를 수정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나는 매일 술을 마셨고, 담배와 게임에 빠져 지냈다.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암담했고, 스스로에게 창피해서 가족들도 피해 다녔다. 아침이 되면 친구들은 학교로 가고 나는 PC방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면 몰래 귀가했다. 당구장에서 밤을 보내거나 친구들과 포장 마차를 전전하다가 동이 틀 무렵 고양이처럼 들어오길 반복했다. - page 10 쪽

part7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다섯가지 실천

*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하기"
* 자신을 사랑하기
*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기
* '지금, 여기' 에 집중하기
* 패배주의를 뚫고 전진하기

저자가 말하길,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여러 심리학책을 탐독하며 보편화(‘나만 이런게 아니었구나’), 죄책감 탈피(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수만은 요인을 알게된다), 지식화 (감정으로 느끼던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의 과정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존감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경심’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너는 작을지라도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경심은 자신을 존경하라는 말인데,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존경하라는 의미입니다.

내 아이가 소중한 이유는 가장 잘나서가 아닙니다.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은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자경심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장소를 예언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이스라엘의 제사장, 서기관들이 오늘 본문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베들레햄은 다윗 왕의 고향이었지만, 대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신약 시대까지 작은 도시로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기로 결정하셨고, 뿐만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랑하는 것들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말입니다.

사람들은 명문가 출신, 멋있는 외모, 좋은 학벌 등을 자랑합니다. 오늘날에는 자랑이 돌고돌아서 출신 가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금수저를 즉,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랑거리를 거부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셨지만, 부가적인 자랑거리는 조금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갈릴리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도 나사렛은 아주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나사렛이 그만큼 가치 없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만큼 경멸하고 낮추어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쉽게 말하면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시골뜨기 예수’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한 번씩 ‘나사렛 예수’라고 표현한 것은 ‘너희들이 천히 여긴 시골뜨기 예수’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복음 2장 23절 말씀 “…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 선지자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리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인데, 그곳이 바로 이사야 11장 1절이다. 그런데 정작 이사야 11장 1절을 펴보면 ‘나사렛’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나온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사야 11장 1절 중에 ‘가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음으로 ‘네쩨르’라는 단어를 썼고,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바로 ‘네쩨르’라고 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나사렛’이란 단어의 원단어가 ‘네쩨르’라는 ‘가지’에서 나왔기에 그 의미로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한다고 번역했던 것이다. ‘네쩨르’는 번역하면 ‘뿌리에서 나온 아주 가늘고 볼품없는 연한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이 ‘네쩨르’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사렛 예수’로 불리신 것은 예수님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만약 예수님이 화려한 하늘 왕권을 가지고 강력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세상에 기댈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가까이 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 모습으로 오셨다. 그렇기에 오히려 힘 있고 화려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가까이하거나 만나기 꺼려지는 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3. 영원으로 이어주는 예수님

예수님이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모조리 거부하신 이유는 인간의 참된 가치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잘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존감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지만,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자존감은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은혜의 시작은 인간은 죄악 덩어리, 죄의 장아찌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의 길에서는 자존감이라는 갈대 지팡이가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서 있다가는 참된 은혜의 길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가치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가치 있다는 생각은 모세의 지팡이와 같습니다. 결코 부러지지 않고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합니다. 자존감을 너머 영원한 나라로 말입니다.

결론

자존감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존중하도록 권유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 처방이지 근원 치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의 길을 갈때 방해가 되고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자경심은 우리 자신에게서 가지를 발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가치있게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길에 항상 동행하는 진리의 지팡이가 됩니다.

베들레햄아 너는 작을지라도.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가치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순례자여 그대 그리스도와 함께 누구이고 그리스도 없이 누구인가?

2018w07_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시고 아버지의 나라는 늘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오니 하늘 문을 열고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통해 알리주기 원하신 영원한 진리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베들레햄 이름모를 마굿간에서부터 요단의 강가, 유다의 광야, 갈릴리의 마을들, 사마리아의 우물을 거쳐, 골고다 언덕까지 주님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예수님과 발자취를 따라 묵상할 때, 전능한 예수님이 왜 그런 고난의 여정을 걸으셨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처럼, 우리가 아무리 캄캄한 세상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하시고, 고통을 직면해야 할 때 담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행사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오니 고난을 거룩하게 하셔서, 우리의 삶이 고난 속에서도 영원한 그 나라를 위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단지 인간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늘의 능력과 진리를 체험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그 은혜 안에 우리가 늘 머무르게 하시고, 우리 가족들을 은혜로 보살펴주소서. 연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셔서 그들이 비록 실수 하고 넘어지더라도 여전히 주를 섬기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합니다. 구주 예수를 알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계심을 알고 의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전쟁의 위협 속에서 개최된 평창 동계 올림픽이 사건 사고 없이 순조롭게 마무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올림픽을 통해서 마련된 대화 분위기가 실제적인 성과로 이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국제 사회로 나오는 변화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설 연휴를 외롭게 보내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독거노인들을 기억해 주시고, 재정적 어려움으로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관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평안함을 주옵소서.

치료의 하나님,몸과 마음, 정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성도를 치료해 주시고,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성도를 속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후유증, 재발병, 합병증을 막아주시고 건강한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으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우리 나라의 교회를 불쌍하게 여겨주시옵소서. 교회의 참된 능력은 거룩과 겸손과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는데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과 잃은 자들을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2월 18일 미가 05:02, [사순절] 너는 작을 지라도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질문 24가지

이병철 회장이 타계 직전 정의채 신부에게 보낸 24가지 질문들을 소개합니다. 이병철 회장은 평생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삶에 대한 여러 평가와 논란이 있지만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신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고 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참고: 이 질문들에 대해 신부, 철학자가 대답을 하는 형식의 책이 2권 있습니다. 각각 ‘잊혀진 질문’,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입니다.)

1. 神(하느님)의 存在를 어떻게 證明할 수 있나? 神은 왜 자신의 存在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2. 神은 宇宙萬物의 創造主라는데 무엇으로 證明할 수 있나?

3. 生物學者들은 人間도 오랜 進化過程의 産物이라고 하는데 神의 人間 創造와 어떻게 다른가? 人間이나 生物도 進化의 産物 아닌가?

4. 언젠가 生命의 合成, 無病長壽의 時代도 可能할 것 같다. 이처럼 科學이 끝없이 發達하면 神의 存在도 否認되는 것이 아닌가?

5. 神은 人間을 사랑했다면 왜 苦痛과 不幸과 죽음을 주었는가?

6. 神은 왜 惡人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罪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罪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罪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8. 聖經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證明할 수 있나?

9. 宗敎란 무엇인가? 왜 人間에게 必要한가?

10. 靈魂이란 무엇인가?

11. 宗敎의 種類와 特徵은 무엇인가?

12. 天主敎를 믿지 않고는 天國에 갈 수 없는가? 無宗敎人, 無神論者, 他宗敎人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宗敎의 目的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天主敎만 第一이고 다른 宗敎는 異端視하는가?

14. 人間이 죽은 후에 靈魂은 죽지않고 天國이나 地獄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5. 信仰이 없어도 富貴를 누리고 惡人 중에도 富貴와 安樂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神의 敎訓은 무엇인가?

16. 聖經에 富者가 天國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富者는 惡人이란 말인가?

17. 이태리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天主敎徒인데 社會混亂과 犯罪가 왜 그리 많으며 世界의 模範國이 되지 못하는가?

18. 信仰人은 때때로 狂人처럼 되는데 共産黨員이 共産主義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天主敎와 共産主義는 相剋이라 하는데 天主敎徒가 많은 나라들이 왜 共産國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제국 , 니카라구아 등

20. 우리나라는 두 집건너 敎會가 있고 信者도 많은데 社會犯罪와 試鍊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敎皇의 決定은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獨善이 可能한가?

22. 神父는 어떤 사람인가? 왜 獨身인가? 修女는 어떤 사람인가? 왜 獨身인가?

23. 天主敎의 어떤 團體는 企業主를 착취자로, 勞動者를 착취당하는 자로 斷定, 企業의 分裂과 파괴를 助長하는데 資本主義 體制와 美德을 否認하는 것인가?

24. 地球의 終末은 오는가?

2018.02.11_수님이 부르시는 그곳

갈라디아서 06:01~18

2018년 02월 11일 주일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줄 요약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사람은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뿌린 모든 것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개요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에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는 복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복음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살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오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어떤 삶인지 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0. ‘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삶을 생각할 때 주의 해야 할 것은 단어의 오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슬프다’는 단어만으로는 전혀 슬프지 않고, 구체적으로 슬픈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런데, 슬프다는 말을 듣고 슬픈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996

2012년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에 세들어 살던 세 모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동반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입니다.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사과하는 글에는 슬프다는 말이 들어있지 않지만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2011년에는 안양구 석수동 월세집에서 예비 시나리오 작가 최 아무개 씨가 홀로 죽었는데, 죽기 며칠 전에 이웃집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2228.html#csidx42c556d70778d24bbaf0e6c34e064df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한다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1. 1~10. 성령님의 인도, 십자가

우리 시대에 십자가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십자가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더 큽니다. 마치 중세 시대와 비슷합니다.

당시에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팔아서 대성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것이 교리적으로 무척 잘못되었고 교회와 사회, 윤리적인 타락의 근원이었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면죄부 사놓지 뭐”, “대성당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럴 수도 있지”, “잘못되었지만 너무 세력이 강하니까 어쩔수 없지”

소수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카톨릭에서 매장하고 사람들도 외면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제가 성령 운동 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이 성령 세례라는데 방언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연습해서 방언을 해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양심이 불량한데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대형 교회를 세습하면서 십자가를 물려준다고 십자가를 모독해도 충성을 바칩니다.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교회에서 쫓겨나도 여전히 추종자들이 따라다닙니다.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 시대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2. 11~15. 인생의 자랑, 십자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느 시대나 힘듭니다. 십자가는 항상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시대의 주류가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부흥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6:8~9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삶이고, 영원한 나라에 기록되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3. 16~18.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손해, 손실,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다가 입는 피해를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을 지키다가 가난하게 되거나, 실패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흔적’은 가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몸에난 상처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트라우마일 수도 있습니다.

카톨릭은 ‘예수의 흔적’을 잘못된 영성으로 인도합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시스코의 상흔에 관한 일화인데, 성프란시스코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몸에 못자국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런 영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상흔은 비역사적인 상흔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역사적인 무언가입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미국으로 건나갈 때 많은 가족, 동료들을 잃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고생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행동에 의한 피해가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상흔입니다.

넓은 길로만 가면 고생할 일도 없고, 상처날 일도 없습니다. ‘예수의 상흔’이 없습니다. 있다면 비역사적인 환상에 의한 상흔만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서기도 힘들 뿐더라 칭찬을 듣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분들은 명백하게 불편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을 ‘예수의 흔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예수의 상흔’은 ‘영광의 상처’로 변할 것입니다.

결론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의 주관자 마귀는 우리보다 머리가 좋습니다. 교묘하게 신앙인들을 십자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박해가 아니라 오염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박해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결국에는 영광의 상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분을 향해 나아갑시다.

2018w06_졸업생들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살아계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께서 심으신 그 영원한 생명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더욱 자라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2월은 졸업의 계절입니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환경으로 나아가는 졸업생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그들이 앞으로 맞닥뜨릴 일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졸업생들 뿐만 아니라 진학, 취업, 이사, 결혼, 출산, 등으로 인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알 수 없는 미래로 인해서 불안해 할 때,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 두려움 대신 기대감을 주시고, 주저함 대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우리 삶이 갈등과 유혹, 문제로 둘러싸여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 여전히 모든 것을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삶에 실망하지 않고 거짓에 현혹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손길은 흔들림이 없고 한결 같습니다. 그 손을 더욱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창 동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쟁의 위협 속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이 평화의 축제로 발절할 수 있도록 계속 이끌어주시고, 동계올림픽을 통해서 전국민이 활기와 기쁨, 소망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재능 있는 선수가 우승하게 하시되 열심히 노력한 선수의 노력도 보답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유명한 선수 뿐만 아니라 무명의 선수가 조명받게 하시고, 간절히 원하는 선수가 꿈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치료의 하나님,
몸과 마음, 정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성도를 치료해 주시고,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성도에게 회복의 기름을 부어주시옵소서. 후유증, 재발병, 합병증을 막아주시고 건강한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으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교회의 직장인들 위해서 기도합니다. 직업은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직장에서 기쁨과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상사와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교회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참된 확신을 갖게 하시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새로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열망하게 하시고, 잃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사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2월 11일 갈라디아서 06:01~18, 예수님이 부르시는 그곳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2.05_성령의 열매 VS 육체의 일

2018년 02월 05월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05:16~26

설교 듣기

핵심 구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한줄 요약

성령님을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개요

지금은 헐벗었지만, 봄이 되면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우리는 그 열매의 단맛을 즐기면서 잠시동안 행복에 잠길 것입니다. 열매는 단맛을 줄 뿐만 아니라 땅이 떨어지면 그 열매 속에 담겨져 있는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날 것입니다.

0. 씨와 열매

열매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나무의 번식을 위해서 필수적인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열매는 사람과 나무 모두를 이롭게 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오늘 성령의 열매에 대한 내용을 설교하려고 하는데, 성경에서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열매가 모두를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18. 두 마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사는 것에 대해서 오해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로봇처럼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로서 나는 항상 존재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항상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육체의 소욕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이 항상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영어성경에서는 the sinful nature 죄악된 본성 혹은 the desires of the flesh 육의 소욕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두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마음 중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한번에 죄악된 마음을 없애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책임이 독립된 인격의 본성입니다. 선택과 책임을 다할 여건이 없으면 자유의지는 있으나마나합니다. 개혁파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는 회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회심하지 못합니다. 애5:21절의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과 같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돌이킴의 원인은 하나님입니다(행11:18, 딤후2:25). 비록 회심이 중생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중생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만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33:1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돌이키라고 할 때 사람의 행동으로 돌이킴을 훨씬 많이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돌이키다’는 의미를 지닌 구약의 ‘슈브’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74번 사용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돌이킨다는 의미로는 5번만 사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크마는 그런 의미로 중생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심은 사람의 사역이라고 구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189)

회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에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신비하게 맞물려서 진행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고통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육체의 소욕에게 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롬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2. 19~24. 두 결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우리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자기 점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과 나무가 사과를 맺으려고 노력해서 사과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버티면 열매가 저절로 맺힙니다. 뿌리가 어디에 뻗어있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성령님께 연결되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육체에 연결되어 있으면 육체의 일이 맺힙니다. 이 두 가지의 대조되는 결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열매는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생명의 재생산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감동을 남기고 떠나셨지만 그 감동은 제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감동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는 재생산됩니다.

반대로 육체의 일은 악하고 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회적입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 병을 낫게 했다거나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보다는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도 저런 능력을 받아서 유명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신이 성령님을 바르게 따르고 있는지 점검하는 자기 점검 목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기 점검표를 만들어서 매일 자신을 점검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서 구체적으로 진단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조지 휫필드의 매일자기점검표
1. 나는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각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있게 행했는가?
9.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며 친절했는가?
10.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11.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았으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며, 잠자는 일에 있어서 절제가 있었는가?
12.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13.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는가?
14.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15. 나의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3. 25~2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성령님은 겸손한 분이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높이십니다. 그분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필요합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의 영광을 생각하고 훈련을 견딥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달게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서 영광을 받을지 대상을 바르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영광을 받기 원하면, 다투고 경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 경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 여건과 환경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휫필드는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다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고 말했다. 그는 한 교파나 교단의 창시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의 영광보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사모했습니다.

[결론]

성령님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사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열린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판단의 주체로서 ‘나’는 존재합니다. 나를 포기하지 말고 나를 육체가 아닌 하나님께 드리려고 힘써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기 점검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성령을 따르고 있는지 이 열매들과 비교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신앙 생활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2018w05_’벌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2월입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은혜의 하나님,
‘벌써’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2월입니다. 새해를 맞이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새로운 달이되었습니다. 가장 짧은 달이기도한 2월에는 조바심과 조급함을 갖기 쉽습니다. 쫓기는 마음에 분노, 짜증을 내지 않도록 여유를 주시고, 서두르다가 중요한 일을 빠뜨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기억을 지켜주시옵소서.

화재로 인해 귀한 생명을 떠나보내는 사고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고장난 스프링클러와 부족한 인력이 피해가 늘어난 원인이라고 합니다. 수익을 위해서 시설 관리를 소홀히하고 인력을 줄이는 관행이 비싼 댓가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관행을 고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훈련해 온 선수들이 좋은 성과를 얻게 하시고,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경기장, 시설, 장비들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심판들이 공정한 판정을 내려서 억울한 선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게하여 주시옵소서.

열심히 노력한 선수가 우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정직한 땀은 반드시 올바른 성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확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명의 선수가 감동적으로 메달을 따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를 통해서 저희 모두가 주인공인 것처럼 활력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치료의 하나님,
교회의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각종 질병으로 치료,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건강한 몸을 회복할 수 있도록 치료의 기름을 부어주시옵소서. 후유증, 재발병이 없게 하시고 합병증도 생기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성도들의 직업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직업은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을 인정하오니,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기쁘고 보람있게 일 할 수 있는 직장을 갖게 하시고, 고유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희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고, 인맥이 아니라 사랑으로 유지된다는 교훈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불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사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2월 05일 갈라디아서 05:16~26, 성령의 열매 VS 육체의 일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w04_’시작의 끝’ 1월을 보냅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창조주 하나님,
지난 한 주간은 대한이 지났다는 안도감을 비웃는 듯이 기습적으로 다가온 한파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자연과 세상은 저희들의 근거없는 낙관과 섣부른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놀랍게 발전한 현대 도시 문명이 오래된 겨울 앞에 움추려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광대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희는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한 자세로 머물러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이제 ‘시작의 끝’이라 할 수 있는 1월이 지나갑니다. 올 한해를 알차게 살 수 있도록 매사에 지혜를 주시고,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시행착오를 통해서 발전하게 하시고, 뜻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성숙함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화재 사고가 계속 일어나서 저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들을 위로해 주시고, 치료하는 의료인들을 격려해 주시옵소서. 언론의 보도가 비난에 집중되지 않게 하시고, 지켜보는 국민들과 지역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필요한 도움을 베푸는 성숙함을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공과 그로 인해 평화 정착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랫동안 동계 올림픽을 준비한 선수들이 마음껏 경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한 관련 단체들이 선수들을 위해서 최선의 후원을 해 줄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안타깝게도 빙상연맹, 스키 연맹 등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단체들이 행정 착오, 선수 폭행, 파벌 갈등 등으로 잡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저희의 고질적인 병폐를 보여주는 듯해서 부끄럽지만, 고통스럽더라도 잘못된 관행을 고칠 수 있도록 책임 있는 자들에게 정의로운 용기와 과감한 결단력을 주시옵소서.

더 나아가 저희 사회 곳곳 뿌리 깊게 퍼져있는 거짓, 부패, 비리, 불공정, 갑질, 연줄, 파벌 등 잘못된 관행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주위를 변화시키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이 땅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겨시고, 교회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고 자랑이었던 시절의 거룩한 권위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열망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불타오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28일 갈라디아서 05:01~15, 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설교

2018.01.28_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05:01~15
2018년 01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믿음을 입증합니다

[개요]

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합니다. 1절에 5장의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는 메지 말라’는 짧은 구절이 큰 감동을 줍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의문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신앙이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주일에 교회 안가도 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봉사, 기도 등 모든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알려주는 자유로운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0. 피아노 치기 혹은 피아노 연주하기

저는 아이들하고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고 말장난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이들한테 “아빠는 피아노 잘 친다”고하면, 아이들이 “아빠 피아노 못 치잖아”하고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피아노를 쿵쾅쿵쾅 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게 뭐가 잘 치는 거야”하고 아우성을 지릅니다.

제가 쓸데 없는 장난을 한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피아노를 잘 누른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더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면, ‘자유’와 ‘자율’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즉, 피아노를 잘 두드리기만 해서는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잘 두드려서 되지 않습니다.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피아노를 눌러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숙달된 결과입니다. 피아노를 막 두드리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고, 피아노를 악보에 따라서 누르는 것은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자기 마음대로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입니까? 피아노 두드리기는 훈련 없이 가능하지만, 피아노 연주하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된 자유를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은 힘들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율’은 뭔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자율’을 의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5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자율’이라는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지침을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갈라디아서 5장 뒷부분에서는 이 결론을 논증하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6.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훈련된 자유’입니다. 무엇에 따라 훈련되어야 하냐면, ‘사랑’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훈련하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들만 지키라고 주신 특별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부분에서 이미 그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입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리고나서 율법은 모세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안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살던 사람이라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안지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예증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받은 시대의 사람들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모세 시대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명, 즉, 사랑을 따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의미가 깊은데,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잘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5:6]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has any valu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성경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7~12.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매우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계속 막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과 생각을 계속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한때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지고 감동이 옅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걸림돌은 할례였습니다. 우리는 ‘할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구원의 확신’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할례가 있어야 ‘구원 받았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만, 할례는 포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할례를 믿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반발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정통 기독교 어디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아니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그렇게 가르쳤다면, 가르친 분이 오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인격에 감격하고 그 분을 닮고자 열망하는 가운데 홀연히 선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구원은 나의 믿음의 자동적인 결과나 구원의 확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또 하나는 ‘방언’인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방언이 구원을 주지도 않고 구원을 보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게 하신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그 이름 그대로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사역에 대해서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령 운동, 예수님을 닮지 않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성령님의 은사, 기적, 능력을 결코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사모하는 분들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의 걸림돌을 치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3. 13~15. 사랑할 자유를 누리라

악보를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훈련을 해야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따라 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라 쇳덩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가 예배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예배 속에 가장 잘 담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그거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를 들어드리는 것이고, 적용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랑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원칙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어도 괜찮지만,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으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결론]

자율은 훈련된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훈련될 때 아름답니다. 개인의 자유가 그의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프레드릭 윌리엄 파라). 자유가 자신의 속박을 잃을 때는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속박이 된다(칼리 지브란)

스스로 사랑이라는 계명에 따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고려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동을 주는 것도 그것이 고된 자기 훈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사랑이라는 악보를 가장 잘 연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w03_시련의 계절에 인내하게 하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어제 24절기 중에 하나인 대한이 지났습니다. 대한이 가까웠던 지난 주는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춥고 눈이 많이 내린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한이 지나자 날씨가 온화해지는 것을 보니 이 겨울의 고비가 지났음을 깨닫습니다.

대한 추위 기간에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디는 거리의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지금은 메말랐지만, 머지 않아 그들은 고이 간직했던 인내의 잎새들을 찬란하게 틔울 것입니다. 저희도 그들처럼 시련의 계절에 인내하게 하시고 다가올 하나님의 계절에 찬란한 잎새를 틔우는 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참회의 계절 겨울이 가기 전에 흩날리는 눈송이같이 불안정한 저희들의 믿음이 새벽 세상을 덮은 깨끗한 함박눈처럼 안정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이라는 가장 귀한 보물을 발견함으로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이 아름다운 순례의 날들이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좋은 기회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시며, 실수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력을 주시고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는 긍정성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어울리게 하시고 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하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총의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공과 그로 인해 평화 정착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북한이 변덕을 부리지 않게 하시고, 무리한 요구, 억지 주장을 내세우지 않도록 막아주시옵소서. 그들이 어떤 계략을 가지고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든지 그들의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여 주시고, 독재 체제가 무너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북한 주민들이 이 겨울의 추위를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포근한 날씨와 인도적인 원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각종 수용소 수감자들과 지하 교회 교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시고 그들이 소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시옵소서.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주민과 자영업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이 적절한 이윤을 얻게 하시고, 오랫동안 준비한 동계 올림픽을 통해서 지역 사회가 자부심과 활력을 되찾는 계기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비판적인 여론이 우호적인 여론으로 변화되도록 국민들의 마음을 섭리해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우리 나라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교회가 겸손함으로 능력 있게 하시고, 가난함으로 영적인 부요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의 대물림과 세습을 통한 권력 유지를 단호하게 거부하여 존경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을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치게 하여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21일 이사야 66:01~24, [시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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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1_[신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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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66:1~24

[핵심 구절]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한줄 요약]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면 불필요한 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개요]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새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나누어주는 다이어리를 쓰는 분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다이어리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무슨 플래너라는 이름으로 다이어리와는 차별성을 가지며서 비싼 값에 팔리는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이제 유명해졌고 이랜드 출신이 설립한 3P플래너도 있고, 윈키아 플래너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플래너와 다이어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가격이 비싸고 디자인이 좋은 것을 플러너라고 할까요?

이번 시간에는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을 통해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0.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은 목표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어리는 단순히 계획, 일정을 쓰는 것이지만, 플래너는 목표를 정하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과 일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플래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의 목표를 먼저 적고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 일정을 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상이 의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은 플래너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도 강조된 말입니다. 일곱가지 습관 중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었습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기 원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매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즉,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걸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성공이나 성취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성공의 대가로 훨씬 더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어버린 경우,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가족과 관계가 안 좋은 경우, 치열한 경쟁으로 높는 지위에 올랐지만 인격을 상실한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지막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닥치는대로 살다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조금씩 다른 길을 가게되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최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후회하게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우리의 영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최후의 순간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1. 1~6. 하나님의 초점 : 행위가 아닌 마음

이사야서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알려줍니다.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은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훌륭한 예배당이 중요한게 아니라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멋진 성전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전세계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이보다 특별한 건축물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건축물을 건축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의 신앙도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 성전은 무너집니다. 성전의 그릇들도 모두 약탈당하고 맙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래도 이게 중요하지 않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진정한 깨달음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을 살인하는 것처럼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한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성경을 가지고 성공을 가르치고 예배를 통해서 번영주의를 전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이용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 7~14. 하나님의 방법 : 고난 중 형통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산을 하지만 진통하는 즉시 해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낳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빨리 해산한다고 해도 진통이 전혀 없기는 힘들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난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힘들게 하느니라.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쌀 수 밖에 없는 선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고난은 고생일 뿐이지만 의미있는 고난은 영광이 됩니다.

3. 15~24. 하나님의 성품 : 자비와 심판

하나님은 자비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계획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일년의 계획을 세울 때, 신앙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너무 바빠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위해서 바쁜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궁극을 생각하면서 일년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일년 계획을 세울 때 영혼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