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8_너는 작을 지라도

미가 5:2

2018년 02월 18일 주일 설교

핵심 구절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한줄 요약

나는 미약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나와 관계를 맺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나도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영어로는 관사없이 ‘Lent’라고 합니다. 부활절 전 46일을 가리킵니다. 사순이면 40일인데 46일인 이유는 주일을 빼고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빼는 이유는 주일에는 금식 혹은 고행을 중지하고 기쁘게 보내자는 취지입니다. 예전에는 사순절에 금식 혹은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일만은 그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우리가 절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신앙 습관을 형성하려는 의도입니다. 좋은 습관이 인생을 바꿔주듯이 좋은 신앙 습관도 인생을 바꿔줄 수 있습니다.

0. 자존심이 아니라 자경심

사회가 경쟁이 심해지고 스트레스가 늘어나면서 심리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심리적인 처방을 내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처방 중에 하나가 ‘자존심’ 혹은 ‘자존감’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존감이 낮아서 우울증이 걸리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고 합니다.

김미경이라는 강사의 자존감 강연도 있었지만,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인생에 어느 정도 도움은 됩니다. <자존감 수업>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용

‘자존감 수업’은 자존감의 정의부터 짚고 넘어갑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나를 존중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명확하게 자존감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Self-esteem)’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존.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어떻게 하면 끌어올릴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 남의 눈이 항상 두려운 사람, 감정싸움으로 쉽게 지치는 사람, 항상 공허함에 시달리는 사람 등

저자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의과대학을 다닐 때 유급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낙방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학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적도 있고, 대학입시에도, 심지어 재수학원 입시에도 떨어졌다. 의과 대학 낙제는 그중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의 경로 자체를 수정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나는 매일 술을 마셨고, 담배와 게임에 빠져 지냈다.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암담했고, 스스로에게 창피해서 가족들도 피해 다녔다. 아침이 되면 친구들은 학교로 가고 나는 PC방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면 몰래 귀가했다. 당구장에서 밤을 보내거나 친구들과 포장 마차를 전전하다가 동이 틀 무렵 고양이처럼 들어오길 반복했다. - page 10 쪽

part7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다섯가지 실천

*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하기"
* 자신을 사랑하기
*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기
* '지금, 여기' 에 집중하기
* 패배주의를 뚫고 전진하기

저자가 말하길,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여러 심리학책을 탐독하며 보편화(‘나만 이런게 아니었구나’), 죄책감 탈피(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수만은 요인을 알게된다), 지식화 (감정으로 느끼던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의 과정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존감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경심’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너는 작을지라도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경심은 자신을 존경하라는 말인데,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존경하라는 의미입니다.

내 아이가 소중한 이유는 가장 잘나서가 아닙니다.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은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자경심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장소를 예언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이스라엘의 제사장, 서기관들이 오늘 본문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베들레햄은 다윗 왕의 고향이었지만, 대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신약 시대까지 작은 도시로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기로 결정하셨고, 뿐만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랑하는 것들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말입니다.

사람들은 명문가 출신, 멋있는 외모, 좋은 학벌 등을 자랑합니다. 오늘날에는 자랑이 돌고돌아서 출신 가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금수저를 즉,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랑거리를 거부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셨지만, 부가적인 자랑거리는 조금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갈릴리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도 나사렛은 아주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나사렛이 그만큼 가치 없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만큼 경멸하고 낮추어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쉽게 말하면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시골뜨기 예수’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한 번씩 ‘나사렛 예수’라고 표현한 것은 ‘너희들이 천히 여긴 시골뜨기 예수’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복음 2장 23절 말씀 “…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 선지자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리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인데, 그곳이 바로 이사야 11장 1절이다. 그런데 정작 이사야 11장 1절을 펴보면 ‘나사렛’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나온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사야 11장 1절 중에 ‘가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음으로 ‘네쩨르’라는 단어를 썼고,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바로 ‘네쩨르’라고 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나사렛’이란 단어의 원단어가 ‘네쩨르’라는 ‘가지’에서 나왔기에 그 의미로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한다고 번역했던 것이다. ‘네쩨르’는 번역하면 ‘뿌리에서 나온 아주 가늘고 볼품없는 연한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이 ‘네쩨르’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사렛 예수’로 불리신 것은 예수님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만약 예수님이 화려한 하늘 왕권을 가지고 강력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세상에 기댈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가까이 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 모습으로 오셨다. 그렇기에 오히려 힘 있고 화려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가까이하거나 만나기 꺼려지는 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3. 영원으로 이어주는 예수님

예수님이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모조리 거부하신 이유는 인간의 참된 가치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잘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존감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지만,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자존감은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은혜의 시작은 인간은 죄악 덩어리, 죄의 장아찌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의 길에서는 자존감이라는 갈대 지팡이가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서 있다가는 참된 은혜의 길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가치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가치 있다는 생각은 모세의 지팡이와 같습니다. 결코 부러지지 않고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합니다. 자존감을 너머 영원한 나라로 말입니다.

결론

자존감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존중하도록 권유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 처방이지 근원 치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의 길을 갈때 방해가 되고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자경심은 우리 자신에게서 가지를 발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가치있게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길에 항상 동행하는 진리의 지팡이가 됩니다.

베들레햄아 너는 작을지라도.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가치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순례자여 그대 그리스도와 함께 누구이고 그리스도 없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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