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1_[교리] 두 세계에 속한 인간

# 본문

창세기 1:24~31 / 2018년 07월 01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한줄 요약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인간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성경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진단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왜 사는지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0. 두 세계에 속한 인간

아메리카 인디언에기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흰 개와 검은 개가 있는데, 흰 개가 강해지면 착한 일을 하고, 검은 개가 강해지면 악한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개가 강할까요? 먹이를 많이 먹는 개가 강해진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 야기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착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인간은 때로는 고상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고 때로는 반대로 비열하고 잔악한 행동을 합니다. 한 사람 안에 반대되는 마음이 있고, 한 사람이 전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인간의 역할 :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세상을 계획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먼저 해, 달, 별 같은 배경을 만들고 나중에 그 무대에서 살아갈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생물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 날에 창조된 생물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을 세상의 관리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관리자입니다. 다른 말로는 대리통치자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이 인간을 대리통치자로 임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은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두 가지 성격을 설명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관리자는 주인과 세입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인과 세입자의 전화번호를 둘다 가지고 있다가 둘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면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서 인간은 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과 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물질도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과 물질 두 가지를 함께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은 영이 없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동물도 종교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동물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원합니다. 이 모순된 상황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줍니다. 인간은 동물적인 삶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2. 인간의 목적 : 나는 왜 사는가?

인간은 왜 살까요? 본문을 통해서 답을 찾아보면, 땅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과 교제할 권리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땅을 다스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 기쁩니다.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땅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은 일을 잘 하고 싶어하고 일을 잘 할 때 즐겁습니다. 그러나 일만 잘하면 공허합니다. 하나님께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간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일을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삽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은 참된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잘하는 것, 교회에서 예배를 잘 드리는 것, 가정을 잘 유지하는 것 모두가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잘 드리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갖추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3. 인간의 선택 : 어디에 속할 것인가

인간은 중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도 아니고 물질도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영원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합니다. 동물처럼 본능에만 충실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관리자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역할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인간이 이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역할을 적절하게 할 수 있는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도와주십니다.

물질은 반드시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나무도 돌도 강철도 썩고 파괴되고 녹슬어 분해됩니다. 형체를 잃고 사라집니다. 인간도 물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라집니다. 인간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야 합니다. 인간이 물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며 살아갈 때 영원한 하나님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물질에 속할 것인지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인지 선택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 00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가자

인간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합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갈등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018.06.24_[교리] 심판하시는 하나님

# 본문

요한계시록 14:7 / 2018년 06월 24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계 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 한줄 요약

모든 일에는 마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고 결산하시는 분입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0. 모든 일에는 마감이 있다

자연은 봄에 싹이 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추수합니다. 모든회사도 매월 마감을 하고 연말에는 결산을 합니다.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하지만, 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배우기는 했는데, 얼마나 배웠는지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월드컵도 서로 실력을 겨루는 일종의 테스트이고 결산입니다. 세상 만물이 결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도 결산할 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결산하신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준비를 잘 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지 않지만, 준비를 잘 못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습니다. 어떻게 인생의 결산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 두려우신 분 : 진노

하나님은 진노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거룩은 홀로 고고하고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진노를 포함합니다.

> 증오란 정당한 것이다. 부정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 -로망 롤랑

부정을 미워해야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부정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정을 두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정한 사람을 좋아하고 두둔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동일하게 부정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을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이것은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능한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야 혹은 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이야 라고 결론을 내리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 원리를 가지고 스스로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불의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언젠가는 모든 불의를 불태우는 심판을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2. 심판의 시간 : 공의

만약에 이 세상에 악인이 득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대로 놔두어야 할까요? 억울한 일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창조자인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감을 갖고 세상에 대한 심판을 하는 것이 공의일 것입니다.

>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재판정을 열고 심판을 진행하십니다. .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은 재판장이 재판하는 것처럼 법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재판관의 판결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이 땅에 재앙이 일어납니다.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회개하는 자들이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의 이르게 됩니다.

3. 심판받지 않는 방법 : 그리스도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지만, 심판을 받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미리 심판을 받기 때문에 다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그 사실을 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다 압니다. 이렇게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체험에 근거한 믿음이있어야 합니다.

막연한 낙관론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서 막연한 낙관론과 믿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 가르침에 동의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만, 그것이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잘 모르지만, 불신자들도 구원의 확신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 불신자들도 죽어서 좋은 곳에 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은 안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감은 있지만, 안일함과 나태로 인해서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로 덮어 놓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불신자들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막연한 낙관론과 비슷한 것인데 믿음인 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막연한 낙관과 믿음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에베소서 2:1~3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2:1~3)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자신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종이고, 진노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내가 죄인이고 반드시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생생하게 알게 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처철한 자기 발견이 있어야만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 00 죽어야 산다

기독교는 죽어야 산다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막연한 낙관을 갖는 것은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죽음을 아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6.17_[교리] 전능하고 신실하신 하나님

# 본문

창세기 1:1~2, 신명기 7:9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창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한줄 요약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신실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은 감탄을 자아내고 신실한 성품은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0. 갑질의 유혹 :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

우리 나라에 갑질 문화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조폭 영화도 비슷합니다. 조직 폭력배가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갑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비난을 받아서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그런데,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전지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이고 전능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입니다. 이 짧은 선언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어찌어찌 대충 만든 세상이 아닙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기계같은 세상입니다. 그것은 어떤 기계를 만들었지만, 스스로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구성 요소와 작동 원리 그리고 그 결말까지 완전하게 알고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소에 성질을 부여하셨고, 모든 행성에게 원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책이 출판될 때는 이미 결말이 지어진 상태에서 출판됩니다. 영화가 상영될 때는 이미 결말까지 완성하고 상영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이미 세상의 시작과 끝이 완성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속속들이 정해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완성된 책이나 영화 속의 인물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결말이 지어진 책이나 영화라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긴장감을 자아내고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말을 감추십니다. 신비 속에 그 결말을 감추십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2.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ᅟ한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는 변덕스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를 만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든 원리를 함부로 어기지 않으십니다. 자기가 원리를 만들고 자기가 원리를 어기는 것은 사람이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함부로 원리를 어기지 않으십니다.

성숙한 인격은 신실합니다. 자기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미성숙한 인격입니다. 어떤 일을 진행하다보면 처음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성숙한 인격입니다. 성숙한 인격은 행동을 하기 전에 충분히 다양한 상황을 예상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행동은 꾸준히 진행합니다.

우리가 기적와 달리 하나님께서 기적에 인색한 이유도 신실한 성품 때문입니다. 기적이 많이 일어나면 좋을 것 같지만, 기적이 많아지면 삶이 불안해집니다. 돈이 많아지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경제 활동이 불안해지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적이 많아지면 기적을 바라면서 일탈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일상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 삶의 기초이고, 신앙의 근원입니다.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성실하게 할 일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게 됩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우리를 감탄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존경을 자아냅니다.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가 아니라 ‘힘이 있어도 신실해야 한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힘이 있다고 원리 원칙을 무시하고 변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을 때 더욱 원리 원칙을 지키면 존경받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한 번 세운 원칙을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신실합니다. 쉽게 변하지 않고 바꾸지 않습니다.

3. 유능하고 신실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고 신실한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자신을 높이는데 사용하지 않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신실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에만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는 하나님의 전지전능 뿐만 아니라 신실하심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우리에게 감탄을 일으킨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러한 능력과 신실하심이 가장 잘 드러난 곳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생활에서 유능해지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더 닮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탄과 감격

조폭 영화를 보면 조직 폭력배가 법으로 응징할 수 없는 혹은 법으로 응징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상황에서 나쁜 사람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줄 때 통쾌함을 줍니다. 하지만, 조직 폭력배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통쾌해 하거나 감탄할거나 부러워할 수는 있지만, 존경은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리석어 보여도 오랫 동안 원칙을 지킨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우리를 굴복시키고 감탄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감탄하고 신실하신 성품에 감격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유능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과경배. 100 하나님 한 번도 나를

2018.06.10_[교리]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

# 본문

이사야 6:1~7 / 2018년 06월 10일 주일 설교

# 핵심 구절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 설교 듣기

# 한줄 요약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가장 본질적은 것은 영이라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품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0.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점과 다른 점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논리로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론적 논증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주론적 논증은 자연을 근거로한 논증으로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목적론적 논증은 질서와 설계로부터 이끌어 낸 논증으로써 만물은 반드시 무엇엔가로 귀결된다는 논증입니다. 도덕론적 논증은 인간에게 있는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이 도덕적 존재인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논증입니다.

우리가 학교 교육을 통해서 진화론만을 배워서 진화론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도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고등 생물로 진화하지 않고 단순 생물로 존재하는 것이 더 생존에 유리합니다. 바퀴벌레같은 생물이 생존력이 좋은데 인간으로 진화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또 어떻게 무생물이 식물같은 생물이 되고, 식물같은 생물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무생물에서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특성은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점과 다른 점

하나님과 사람의 공통점은 인격적인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인격적인 특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진 특성입니다.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영과 거룩입니다.

1.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분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보는 일체의 개념을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물질에 속한 특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감각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물질은 아무리 튼튼해도 썩고 낡고 사라지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물질에 비유하면 안됩니다. 십계명 첫 두 계명과 다른 곳에서 형상들과 초상들을 금한 이유도 하나님이 영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점

풍수지리설, 관상 등이 비인격적인 신을 믿는 것입니다. 묘자리를 잘 쓰며 악한 사람이라도 복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대응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가장 놀라운 증거는 그분의 편재하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땅 속에도 우주 공간에도 존재하십니다.
악한 영은 우두머리인 사탄마처도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고, 어디에나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모든 곳에 계십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이 다른 가장 근본적인 성품은 거룩입니다. 하나님만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증오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 25:16) 무릇 이같이 하는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정의와 거룩을 기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잠 15: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이라든가, 죄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욥 34:10)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에게서 죄인을 떠나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인을 벌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노는 강렬하시다

3. 거룩해 지는 방법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면 자기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죄가 폭로되어 하나님께 더 이상 다가갈 수 없게 됩니다. 더 가까이 가게 되면 소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정결해져야 합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00.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인격을 가진 분이고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한 스랍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의 얼굴과 발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게 되면 동시에 자신의 죄악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정결하게 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보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6.03_[교리] 보는 건 같아도 해석은 다 다릅니다

# 본문

누가복음 24:44~45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눅 24:44~45)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한줄 요약

사실을 보고 해석하는 방법을 관점이라고 하는데,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바른 관점을 배워야합니다. 성경을 보는 바른 관점이 교리입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0. 사람은 모두 관점이 다르다

한 살 차이로 세 자녀를 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자녀들을 키울 때 하루 종일 바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음악을 듣게 하며 노래를 불러 주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며 재우기까지 세 아이를 정신없이 키웠다.

이제 어른이 다 된 자녀들이 어린 시절을 간혹 기억해 냈다. 첫째는 어렸을 때 들은 동화를 기억하고 있었고, 둘째는 음악을, 셋째는 그림 그린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 자녀 모두가 여름날 개울에서 가재 잡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엄마는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똑같은 행동을 보아도 사람마다 기억에 남고 인상을 받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해석의 차이가 옵니다. 이런 해석의 차이를 관점이라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관점은 모든 사람이 다 다릅니다.

성경을 볼 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같은 성경을 보아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하게 됩니다. 세상 일이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불량한 교회, 이단이 나옵니다.

“나는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 믿는다”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관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나는 내 마음대로 믿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진 관점이 바른지 그른지 확인하고 그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수정한 다음에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1. 교리를 가르치신 예수님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가르쳐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교리 교육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무작정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교리라고 하면 무언가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반성할 일입니다. 좋은 것이라도 강요하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됩니다.

하지만, 교리가 무엇인지 알면 교리의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객관화하고 검증한 관점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관점입니다.

2. 교리를 모르는 이유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정답이라고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번틀린 문제를계소속 틀리는 이유가 여기 다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은 두뇌의 경제성에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생각을 적게 하려는 경향이 있답니다. 생각을 적게 하려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고 마는것입니다. 자기 생각, 경험, 지식에 익숙한 대로 해석하려는 경향 때문에 바르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낯설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고난, 죽음, 부활을 가르치셔도 제자들의 생각은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무조건 교회다니면 복받는다는 왜곡된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복 받는 거 아닌가요?”
“무조건 복받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야 복받습니다. 그리고 복은 무조건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 형통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교회 다닌다고 복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입니다. 아부한다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복주는 분이 아닙니다.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는 “자신의 깊은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열심을 낼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누구를 비난하기 위해서 이 말은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복음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고 참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의 죄성을 경계하면서 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3. 교리는 곧 예수님

교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이 말은 교리에 따라서 바르게 성경을 공부하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닮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목회자 후안 까를로스 오리띠즈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라는 책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가 신자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지식으로 알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바른 교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교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00. 바른 관점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람마다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 또한 달라집니다. 따라서 성경만을 믿겠다는 말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자기 관점을 점검하지 않고 객관적 관점을 배우지 않으면 자기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른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교리를 통해서 지식을 쌓지 마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도구로 활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5.27_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본문

요한복음 7:37~39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한줄 요약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갈급함을 해갈해 주십니다.

# 개요

지난 주는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인격을 만들고, 예수님의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0. 우물을 파는 사람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그 우물물을 마시기 위해 오늘도 우물을 판다.”
이것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낸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이어령 전장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른들은 늘 한 우물을 파라고 했지만 나는 거꾸로 여기저기 새 우물을 파고 다녔다.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바로 나의 갈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물을 파다가 작은 물방울만 비쳐도 나는 금시 또 다른 갈증을 찾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이고 여기저기 전전해 온 내 직업들이다.”

이어령 박사는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이어령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나이 들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다 누렸을 때, 그는 자신이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는 수없이 실패의 우물을 파며 처절한 영혼의 광야를 통과한 후, 비로소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샘물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암에 걸려서 간절하게 아버지에게 전도했고, 비로소 그가 복음에 마음을 연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비슷한 책으로 중국의 석학 임어당이 지은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임어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달콤하고 고요한 생각의 초원을 걸었고 아름다운 계곡들을 보았다. 유교 인본주의의 대저택에 한동안 기거했고, 도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그 장관을 보았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 이후에야 나는 최고봉에 해당하는 기독교 신앙에 올라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85쪽)” 대저택(유교)과 산봉우리(도교), 안개(불교)를 품고 햇빛(예수님)을 바라본다.

이어령 박사나 임어당은 자신에게 어떤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해갈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 예수님 안에서 생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을지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첫째, 목마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이스라엘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의 마지막 날을 의미합니다. 초막절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큰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성전 제단에 물을 붓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일종의 기우제였는데,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가져와 제단에 부었습니다. 그때에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의 ‘호산나’를 외치면서 물 붓기 행사에 참여하였다.

초막절이 끝나면 곧이어 바쁜 농사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이스라엘에서는 적당한 때에 비가 내려야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적당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신 11:14).

그런 점에서 ‘명절 끝날’은 일주일 동안의 초막절 절기와 앞으로 다가올 농사철에 필요한 비를 구하는 공식적인 기우제 예식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의무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풍요로운 삶의 근거인 비까지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여도 내면적으로는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께로 오려면 먼저 자신이 얼마나 목마른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안에 있는 생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생수의 강

둘째, 생수를 먹어야 합니다.

‘배’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일리아’로 우리 몸인 ‘배’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역시 같은 의미의 ‘베텐’이다. 이것은 신체 부위를 들어서 영적 의미를 추구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독특한 표현기법 중 하나였습니다. ‘배’는 영적으로 내면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배’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생명은 중심의 변화입니다. 그런 변화된 삶의 중심에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이 들어와 함께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강’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지역이므로 1년 내내 물이 흐르기만 하면 ‘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연중 물이 흐르는 ‘강’은 시작이 지하수 샘인 강입니다. 만일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많지 않다면, 어느 정도 흐르다가 주변의 고온 건조한 기후에 의해 곧 마르고 맙니다.

주님께서 하신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수 근원이 우리들 안으로 들어와 우리들 삶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갇혀 있거나 도중에 증발돼 버리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서서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넘쳐흐르는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3. 믿는자들이 받을 성령

셋째, 생수를 얻을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저술 중에 하나가 김준곤 목사님의 ‘예수 칼럼’입니다. 성령에 관한 어떤 책보다 이 책을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성령 성령한다고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령 충만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00. 해갈

예수 칼럼 중에서 ‘생수의 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소개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크리스천은 영원한 소년, 젊은 독수리의 비상(飛翔), 날마다 새 것을 잉태하는 처녀성, 다함 없는 생수의 샘터를 영혼 속 깊이 지녔다. 병들고 가난한들 어떠랴. 장미가 쓰레기에서 피고,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며, 역경에서, 고통에서 모세가 광야의 반석을 쳐서 생수가 터지게 했듯이 전혀 그럴 수 없을 때 그럴 수 없는 곳에서, 사막의 반석 같은 처지와 환경 속에서 쿨쿨쿨 생수의 강이 터지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라. 생수의 강, 성령의 강이 죽음 같이 깊은 곳에서 터지게 하라.

믿는자에게는 성령께서 생수의 강을 터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찬양과경배. 124 내 주의 은혜 강가로

 

2018.05.20_항상 함께 있으리라

본문

마태복음 28:16~20 / 2018년 05월 20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작은 예수로 만들어가십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작은 예수를 만드는 성령님

어제 영국 해리 왕자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오랜만에 있었던 국가 행사였기 때문에 떠들썩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이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신부 때문입니다. 신부가 매건 마클이라는 영화 배우입니다. 톱 배우는 아니고 나름 유명한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나와서 이름을 알린 정도의 배우입니다. 독특한 점은, 피부색이 검습니다.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데 흑인쪽에 가깝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인종 차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해리 왕자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 37살이고, 결혼한 경력이 있는 이혼녀입니다.

사회운동과 자원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해리 왕자와 매건을 연결한 것은 자원봉사 활동으로 알려졌습니다. 매건은 월드비전 캐나다(World Vision Canada)의 국제홍보대사로 활동했으며 르완다에서 조직의 깨끗한 물 운동(Clean Water Campaign) 홍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사고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여성이 왕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 우리가 해리 왕자보다 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도 생각합니다.

매건 마클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여성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왕자와 결혼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신자를 신부로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각을 잘못 추측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시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모두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주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의 심판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주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많은 물소리 같고, 백마를 타셨습니다.

(계 19:15~16)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러나 예수님은 초림때는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과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걸 ‘구원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을 섬기니까 전도할 때 “니네들 까불지마라”라는 생각으로 전도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에 하신 것처럼 겸손하게 전도해야 합니다.

2. 우리를 보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호화로운 궁전에 살게 하지 않고 거친 광야에서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기다리고 사모했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마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사도 바울도 비슷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과 대조적으로 자기 삶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11:23~27)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예수님은 우리를 광야로 보냅니다. 우리를 보내신 목적은 우리 자신과 세상 둘을 모두 변화시키려는 목적입니다. 소금이 스스로 녹아야 물을 짜게 합니다. 등불이 스스로 타올라야 세상을 밝힙니다. 자기 희생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광야로 안가는 게 더 유리합니다. 그러나 부귀영화보다 예수님의 인정과 평가를 원한다면, 광야로 가야 합니다.

(11:7~9)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3. 함께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때로는 몇 천원이 없어서 커피를 먹고 싶어도 못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띠링하고 알람이 울립니다. 아는 분이 개인적으로 2만원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감사기도 드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비참한 삶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함께 하는 행복한 삶입니다.

많은 돈을 펑펑 쓰면서 사는 분도 계시겠지만,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한 것이 행복이고, 부요한 것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때 마음이 부요해져서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지옥 같았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못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삶이 좋은데 이런 삶이 싫은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00. 작은 예수가 되자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지만 우리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함께 해 주십니다.

우리를 작은 예수로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는 예수님을 따라 삽시다.

2018.05.13_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본문

누가복음 24:36~48 / 2018년 05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한줄 요약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체험이 동반된 전인격적인 사건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성경을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깨달음은 전인격적인 사건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이 작용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체험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을 다시 가르치신 이유는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성경을 배울 준비가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을 통해서 인격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때에야 깨달을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도 예수님께 성경을 많이 배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보고 그 사건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깊은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백한가지 이야기’를 보면 처음에 나오는 간디의 신발 얘기가 나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인도해방운동 지도자 간디(Mohandas K. Gandhi, 1869-1948)가 어느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출발에 임박해서 급히 기차에 뛰어 올랐습니다. 너무 서둘러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의 신발 한 짝이 플랫폼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신발은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평민이 가지기는 힘든 것이었습니다. 기차는 이미 출발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기차 밖으로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줍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 때 간디는 다른 쪽 발에 신고 있던 신발을 급히 벗어 기차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이 급작스러운 행동을 본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신발 한 짝이 떨어진 것만 해도 아까운데 다른 한 짝을 고의로 벗어 기차 밖으로 던져 버리다니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을까요?

사람들은 간디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까운 신발을 어찌 그렇게 던져 버리십니까?” 그러자 간디는 웃음을 지으며 “어떤 가난한 사람이 떨어진 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신발 한 짝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될 것이니 기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간디가 신발 한 짝이 벗겨졌을 때 다른 한 짝을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건 간디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된 계기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사상을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발전시켰습니다. 간디는 성경에 매우 정통했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성경을 잘 따랐던 사람이 간디입니다. 그의 삶이 성경에서 힘을 얻었고 그가 독립운동을 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전략을 따랐습니다. 그는 힌두교인이었지만, 힌두교를 따르지 않고 성경을 따른 덕분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도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간디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제국 로마를 복음화했습니다. 그들이 로마를 복음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성경은 세 가지 방법을 알려줍니다.

1.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자

먼저, 불필요한 두려움과 의심을 해결해야 합니다.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두려움과 의심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면 속사람이 자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귀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귀신이 있다면 하나님도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성품을 알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래키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배려심이 깊고 섬세하십니다.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더 나아가 의심하는 마음도 꾸짖지 않고 풀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도마를 꾸짖으신 이유는 믿을만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비뚤어진 마음을 꾸짖으신 것이지 의심 자체를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2.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자

두 번째로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눅 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께서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영이라면 음식을 먹지 못할 텐데 잡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은 바르게 이해하지만,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방송과 뉴스를 보십시오. 매우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옳은 것인지 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눈은 조금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몇 달 전에 프로야구가 개막한지 얼마되지 않알을 때 어떤 성도님과 식사하면서 어떤 팀을 응원하냐고 물어보다가 한화 이글스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한 팀을 응원하지 않고 매년 돌아가면서 응원하는데, 올해는 한화하고 롯데를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한화가 앞으로 잘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한화가 연패를 당해서 분위기가 안 좋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신 있게 앞으로 잘 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한화가 경기하는 것을 보니까 선수들 정신력과 실력이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냉철하게 보고 내린 예상이었습니다. 지금은 한화가 3등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사람마다 어떤 부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떤 면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사람이 약한 사람은 자신의 바람, 편견, 감정, 어리석음에 휩쓸려서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봅니다.

속사람이 강해지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3. 고난 중 형통을 받아들이자

세 번째로 고난 중 형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항상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부활은 자동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고난을 달게 받아들이고 고난을 통한 성장을 기대하지 못하면 속사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야는 쉽게 돈벌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구원받고 쉽게 능력받고, 쉽게 형통한다는 말이 사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치러야할 댓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십시오. 형통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보십시오. 고난 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고난 중 형통할 것입니다.
고난 중 형통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결론

스탠리 존스라는 인도 선교사가 간디를 만난 일화를 책에 소개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간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꺼냈지요. “마하트마 간디, 저는 인도에서 기독교가 생활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외국 사람 또는 외국 정부와 동일시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빨리 기독교가 인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인도의 정신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인도를 구원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간디는 제 말을 듣고 아주 엄숙하고도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우선 여러분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혼으로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면서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종교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고 타협을 하지 말 것을 제안합니다.”

간디의 조언은 계속되지요. “세 번째로 저는 여러분이 사랑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 정신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을 해 내는 강력한 원동력으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도덕적 세계에서 실제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간디는 그 기독교의 사랑이 개인들 사이와 집단들 사이, 인종과 나라들 사이에 적용되길 바라지요. 그 사랑이 세계를 통합시키고 구원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의 의미에 너무나 민감한 영혼을 지니고 있던 간디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 주었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를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 속에 있는 장점들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그들에게 접근할 때 보다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간디가 객관적인 시각에서 기독교가 부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성경을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의 깊은 세계로 인도받을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298 주 품에 품으소서

2018.05.06_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본문

요한일서 1:8~10 / 2018년 05월 06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한줄 요약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개요

박진영이 구원파라는 방송이 나오면서 구원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왜 구원파가 이단인지 알고 싶어하더군요. 이단에 대해서 잘 알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을 연구한다고 해서 신앙이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위조 지폐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위조 지폐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위조 지폐가 나오기 때문에 다 연구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효과적인 방법은 진짜 지폐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진짜 지폐가 아닌 것을 위조 지폐로 판정하면 됩니다.그렇다고, 위조 지폐에 조금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위조 지폐를 알고 있으면 판별이 쉬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에 대해서도 많이 알 필요는 없지만, 대표적인 이단에 대해서 조금 알면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파가 왜 이단인지 조금 설명드리고, 참된 기독교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겠습니다.

 1. 구원파는 왜 이단인가?

구원파가 이단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구원파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사용하는 단골 질문이 있습니다.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이 “언제 어디서 구원받으셨습니까?”이다. 이에 대해 정확히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구원받지 못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준다. 자신이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은 정확히 기억하여 매년 지키면서 어떻게 우리의 영생을 좌우할 영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사실일까? 구원받은 날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성경에는 그런 걸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 보면 바울이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같이 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 그래서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디모데나 루디아같이 그런 극적인 경험이 없이 조용히 예수님 믿고 회심하고 구원받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인 것입니다.

둘째, 구원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없다고 한다

한 번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회개(metanoeo)와 자백(homologeo)을 구분한다.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단 한 번만 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일상적인 죄들에 대해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할까요? 요한일서 9절을 근거로 듭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면 성경에 정말 회개는 한 번만 하면 되고 자백은 반복해서 하라고 되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위의 요한일서 9절을 검토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자백”은 사실 구원파가 주장하는 “회개”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모든 불의(adikia, 여성형 단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이 “불의”는 의롭지 못한 개별행위들(복수)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의 뿌리인 “불의”(단수)인 것이다. 이렇게 “자백”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이건 구원파에서 말하는 “회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셋째,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일시에 용서되었다. 이 용서는 우리가 회개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러면 구원파에서는 결과적으로 누가 구원을 받는가?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거듭나고 구원받는다.

구원파에서는 회개의 고된 투쟁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깨달음만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느끼는 비참함, 자신이 지옥에 가 마땅한 존재라는 전적인 승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관한 뜨거운 감사를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사람들이 구원파에 빠지는 이유는 쉽고 단순하고 죄책감을 제거한 구원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구원파에 빠진 사람들은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얼핏 들으면 정통 교회와 비슷한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철저히 오해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 칭의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구원파는 이 칭의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해합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의가 주어질 때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가 단번에 완전히 없어져서 이제부터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가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가 용서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법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피고가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형벌을 면제받았다고 그 범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형벌을 면제해주시고 의인으로 선언해주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파에서는 한 가지 종류의 회개, 즉 칭의의 회개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맞지도 않고 우리의 경험에 맞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도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모습을 보였고 다윗도 여러 번 회개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죄성이 남아 있고 죄와의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죄와의 싸움은 매우 가치있는 경험입니다. 그 싸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에 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3. 주의할 점

주의할 점은 정교도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은 립서비스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통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도 죄책감을 제거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매우 쉽고 단순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나름대로 은혜 체험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좀더 확실한 구원 체험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좀더 안전한 구원 체험은 한 마디로 죄의 각성과 십자가 체험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라는 처절한 인식을 하지 못했다면 그 체험을 위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방언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사를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의 각성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저는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면, 모르는 것이라는 신조로 신앙 생활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게 냉철한 기준을 세우고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구원파는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구원 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인본주의를 믿고, 죄를 지어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인 만남 없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백퍼센트 지옥에 갑니다.

참된 기독교는 죄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선고를 인정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전인격적으로 체험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4.29_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랴

본문

누가복음 21:28~35 / 2018년 04월 2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한줄 요약

예수님은 좌절감에 빠져서 마음이 차가워지고 무기력해진 제자들에게 참된 말씀으로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열정에 기름붓기

http://www.10puzzle.com/piece/25991-열정에-기름붓기-송강호와-봉준호.html

3년 전, 패기 넘치는 두 청년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재선(27)·표시형(26) 대표인데요. “꿈을 향해 달리는 청년들 위해 힘을 실어주자”고 결심, 동기부여 콘텐츠를 제작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컨텐츠가 ‘열정에 기름붓기’입니다.

저는 번영주의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열정에 기름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이나 하면 된다는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허풍만 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불신앙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혼동해도 안되고, 그 사고가 기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도할 뿐입니다. 신앙과 거짓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정에 기름을 부은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1. 떡을 축사하시고 주시니 – 기도

첫째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가 아니고 밥을 사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능력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만 금식 기도하십시오. 남한테는 금식 기도하라고 하지 마세요.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책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몇 몇 구절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밥 먹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하면 금식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금식 기도는 밥 먹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을 만큼 절실할 때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밥을 주시면서 기도할 때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인간적인 필요를 채워줄 때 마음이 열리고 기도가 강력해 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 기도를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놀기 좋아한다고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금식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잔칫날 금식하거나 일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해야 할 때는 금식하셨고,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하셨습니다. 주로 홀로 계실 때 금식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억지로 금식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2. 성경을 풀어 주실 때 – 말씀

말씀을 바로 알아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정통 기독교 교리가 주는 감동을 영혼의 중심을 태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제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는 이 우주보다 크고 인간의 마음보다 깊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어떤 사상과 철학보다 고상합니다. 어떤 시보다 숭고하고 어떤 소설보다 충격적입니다.

이 교리를 위해서 인생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단 교리를 듣고 좋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딧불을 보고 밝다하고, 태양을 보고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보고 마음이 이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예루살렘에 돌아가 – 교제

열정이 살아나기 위해서 필요한 세 번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교제입니다. 다들 아시듯이 모닥불을 보면 나무가 하나 있을 때는 꺼지기 쉽지만, 여러개 모여 있으면 잘 안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의리로 서로를 속박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집착이 되고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가는 동행의 의미입니다. 제가 가는 목표가 여러분과 비슷하다면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결론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정을 받아야 합니다. 세 가지를 통해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교제입니다. 신앙의 베이직입니다. 신앙의 베이직에 힘쓸 때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8.04.22_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본문

누가복음 24:13~27 / 2018년 04월 22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좌절감에 휩싸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방법으로 새로운 소망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실패는 없고, 시행착오만 있다

좌절감은 요즘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굶어죽는 사람보다 좌절해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일지 모릅니다. 20대 청년 실업자, 30대 직장인, 40~50대 명퇴 대상자들이 모두 좌절감이 싸여 있습니다.

좌절감은 뜻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 마음이 꺾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류콤플렉스, 일등주의, 성공지상주의에 빠진 이유 중에 하나는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좌절감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도전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좌절감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쓰러진 일은 시행착오가 됩니다.

에디슨이 전구들 만들 때 실패한 일은 유명합니다. 에디슨은 필라멘트에 적합한 물질을 찾기 위해 다양한 재료들을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부터 머리카락, 옷감, 백금 등 수많은 재료들을 사용하여 무려 1,000여 번이 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에디슨은 실험을 머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실험실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일본산 부채 하나가 에디슨의 눈에 들어왔다. 에디슨은 그 부채의 부챗살을 가늘게 잘라 필라멘트로 만들었고, 그 부챗살로 만든 필라멘트는 1,500시간을 넘게 버터주어 마침내 상용화할 수 있는 전구를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에디슨이 몇 백 번쯤 실험을 하다가 포기하였다면 전구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나 다른 발명가의 손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며, 어쩌면 아직까지도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에디슨의 성공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디슨의 성공 비결인 ‘포기하지 않는 것’을 성공 확률이 100%인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좌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좌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대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가 계속되면 사람은 좌절하게 됩니다. 이런 좌절이 두 제자를 휩싸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갔다면, 이들은 좌절감 때문에 고향으로 내렸갔습니다. 그들이 좌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은 17절과 23~24절 두 부분입니다.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여기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슬퍼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3~24절을 보면

(24:23~2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증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데도 고향으로 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습니다. 마음이 꺾여서 좌절한 것입니다.

좌절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불 꺼진 난로, 시동 꺼진 자동차 같습니다. 한숨만 쉬고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납니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의 기력도 빨아들여서 함께 무기력하게 만드는 늪같이 됩니다. 이처럼기대가 꺾이고 실패가 쌓여서 좌절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은 어떻게 변화시키셨을까요?

2.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 오해

사람이 좌절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처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는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어떤 오해를 했습니까? 예수님을 능력있는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4: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4:23~2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여기까지는 오해가 아닙니다. 오해는 바로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24:20~21)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속량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군사적인 승리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로마 군대 철수, 강력한 국가로 성장 등이 이들이 바란 속량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량은 이들의 마음에 없었습니다.

두 제자의 사고 방식은 이겁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반대자를 물리치고 굴복시켜서 자기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각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고 방식은 정반대였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약한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대신해서 그들이 받을 벌을 대신 받을 능력이 있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인류를 굴복시키는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넣어주려는 마음입니다.

3.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해결

예수님은 그들의 사고 방식을 하나씩 교정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해도 성경 지식만 늘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잘못된 생각이 고쳐지지 않으면, 좌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시대가 좌절에 휩싸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거짓된 신화와 과장된 광고 때문입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데 성공해야 할 것처럼 경쟁으로 몰아갑니다. 반칙으로 승리한 것을 위대한 업적인 것처럼 과장합니다.

[교회에서마저 성공, 번영, 기적을 최고의 목적으로 가르칩니다. 교역자를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교체합니다. 다른 교회 교인에게 전도합니다. 방언을 연습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역자가 성령 충만을 주장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물의를 일으키는 목회자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그 사람에게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물의를 일으켜도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추종자들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성공의 길을 안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청해서 고난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려고 하면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고난 속에서 형통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하나하나 고쳐주십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버리게 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복음의 길을 가야한다고 설득하십니다. 그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

좌절감은 요즘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성공과 번영으로 몰아가려는 풍조가 좌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 구조인데 경쟁을 과열시키고 모두가 번영할 수 없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헛된 마음을 불어넣습니다.

좌절감을 극복하는 길은 ‘고난 중 형통’이라는 복음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린 마음을 되돌려서 복음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공의 길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섬김의 삶을 살면 그리스도의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2018.04.15_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본문

요한복음 21:15~19 / 2018년 04월 1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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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돈보다 중요한 것은?

뉴스에서 어느 여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누가 갑질을 해서 사과시켰나?’ 궁금한 마음으로 클릭해 보았습니다. 장애인을 자녀로 둔 어머니가 장애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꿇고 호소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댓글들도 장애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우세한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비난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논리가 결국은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면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 돈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블랙홀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로 뭉치쳐서 같은 목소리를 내게 하는 강력한 힘이 바로 돈인 것 같습니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의 중심이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돈이 그렇게 강력한데도 돈에 맞서는 힘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뭘까요? ‘사랑’인 것 같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여성이 아파트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게한 힘이 바로 장애인 자녀에 대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이 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돈으로 뭉친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주민들이 생겼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던 여론을 바꾸어 놓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 전에 그런 사진이 올라 온 이유가 기자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돈은 물질만능주의의 화신입니다. 사랑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가장 정신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냐 돈이냐를 선택하라고 하면 돈을 선택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돈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을 갈구할까요?

돈을 즐거워하지만,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또다른 사랑의 힘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바꾸어놓는 힘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1.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십니다. 우리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 것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가난하고 궁핍한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일종의 훈련입니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처럼 영혼을 훈련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영혼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트레이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로 인해서 운동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은 생각이 달라져서 운동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기 몸이 균형 잡히고 건강해 지는 것을 보며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훈련을 즐기는 사람 말입니다. 이번에 발령난 우석제 실장님하고 작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에서 좋은 훈련을 받고 떠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다른 건 다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밑에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면 분노가 생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부분이 잘 훈련되어서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은 쉽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자주 부딪혔는데, 전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격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인격의 훈련을 받을 때,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격이 성장합니다.

저도 생각해 보니까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 표현이 부적절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걸 이해하고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필요를 아십니다. 불필요한 궁핍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영혼을 누구보다 배부르고 풍성하게 먹이기 원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풍요로움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이라는 동기로 예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신앙 생활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를 보면, 정확하게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상태로 돌아간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화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합니다. 계획도 짜고, 운동도 하고, 가지 계발 서적도 읽고 나름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에 부딪히면 어떻게 하냐면 원위치합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요.

왜 그럴까요? 가장 쉬운 선택이고 그게 좋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 예를 들어서 이단에 빠진 사람을 왜 구하지 못할까요? 근본적으로 그 사람은 그것이 좋아보이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걸 좋아합니다. 그 사람한테는 그게 좋아보입니다.

좋은 것이 좋아보여야 좋은 쪽으로 변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의 기쁨을 알려줍니다. 영원을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에서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거룩한 것을 기뻐하는 마음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투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지에 따라서 우리가 속할 나라를 결정됩니다. 갈등이 없으면 안될까요? 갈등이 없으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갈등 속에서 갈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그 과정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3.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면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제가 가장 부끄럽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는 없고, 말씀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능력이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능력이나 은사가 있으니까 자기를 섬기라고 하고 자기를 살찌웁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 받았으니까 이제 좀 누리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게 번영주의입니다. 이미 마음이 오염되었습니다.

어떤 변명을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냐 번영주의의 길이냐? 그 본질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적으로 도착할 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하늘로 연결되지만, 번영주의의 길은 멸망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반드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대략적인 방향을 알고 있어야 네비게이션이 오류가 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성령님의 인도를 바르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고 말은 안해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너무 강력해서 저항하지 못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 무엇이든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 그 사랑이 물질만능주의을 이기고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주셨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2018.04.08_와서 조반을 먹으라

본문

요한복음 21:1~14 / 2018년 04월 0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인간은 변하는가?

현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예전에 심리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하고 성격이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거짓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행동의 원인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갈등이 깊어지는 이유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시험이 끝나면 빠따를 때리셨습니다. 한 문제 틀리면 한 대씩 때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성적이 오르냐면 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지리 선생님이 지리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리를 열심히 공부해서 전국에서 학교별 지리 성적이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체벌이 교육 효과가 매우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게 때릴수록 부작용이 커집니다. 약한 체벌과 강한 체벌이 효과 면에서 차이가 없고, 부작용을 생각하면 약한 체벌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2년 미국 콜롬비아대의 엘리자베스 게르쇼프 박사는 1940년부터 62년 동안 이뤄진 체벌에 관한 연구 88개를 분석한 논문을 미국 심리학자가 발행하는 ‘심리학 회보’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게르쇼프 박사는 부모의 체벌을 받고 자란 아이의 행동 특성에 대해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체벌은긍정적인 면에서 효과가 거의 없는 반면 부정적인 효과는 많다. – 과학동아 2010년 10월호
또, 선생님에게 혼나고 문을 세게 닫고 가는 학생이 영화같은데 보면 나오는데, 예전에는 그게 100%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반항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책감도 포함되어 있는 거였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나는 왜 이러나?’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인상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났나?’ 싶은데, 알고보니 자책감인 경우가 있습니다. 즉, 지각을 했거나 일 처리를 잘 못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난 상태인 데 옆에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으면 서로 오해하고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오해와 혼란, 감정적인 낭비, 그리고 갈등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하는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답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 질문에 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전처럼 목숨바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혈질이고 행동파였던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책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힘들 때 곁을 지키지 못했고,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내면에서 떠바치던 자긍심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신이 나지 않았고,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상태를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험하셨다면, 어떨 때 경험하셨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아직도 극복 못하셨다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베드로가 심리적으로는 안좋은 상태일지 몰라도,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상태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영적으로 좋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동기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베드로를 이끌어간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그의 열정을 이끌어갔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사라지자 베드로는 의욕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십니다. 기초가 잘못된 건물을 지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꾸 무너뜨리고 다시 지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기초를 잘 세우고 있느냐입니다. 처음에 기초를 잘 세우지 못하면 나중에는 고칠 수 없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격하십니다.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 무너뜨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걸 알고 미리 알려주셨잖습니까? 베드로가 무너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인간적인 열정을 무너뜨리겠다 그 후에 하늘의 열망을 넣어주겠다고 말입니다.

2.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진정한 열망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순전한 열망을 말입니다. 참된 열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나의 잘못된 열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낙담하게 되고, 마침내 배터리가 방전된 가전제품처럼되고 맙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플러그를 연결해서 충만한 전원을 공급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서 다가갔습니다.

(출 3:2~3)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은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요즘 ‘열정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월급을 안주거나 조금 주고 일을 시키면서 그것을 ‘열정’이라고 표현하는 걸 말합니다. 기업은 사람을 키우거나 성장시키여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나 부품으로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게 했다가 필요 없으면 자르거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활용하면, 기업과 다를 게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간판을 단 기업입니다. 본질 만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실은 사람을 도구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정면에서 반박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의욕이 없습니다. 사용할 수 없는 도구입니다. 고쳐쓰는 것보다 다른 도구를 쓰는 게 이득입니다. 사람을 도구로 보면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의욕을 잃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상태이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격려하고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교회의 본질이고 사람의 성장이 교회의 최고 목표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3. 책망대신 조반을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소명을 새롭게 하신 방법은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대신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아침을 대접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배려 깊은 사랑이 담긴 행동입니다.

이 한끼 식사를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이 안심하고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가면서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떠나는 것이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셨고 그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서 베드로는 새롭게 열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건물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에 본질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나 긍정적 사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삶을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본질적인 믿음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야망이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 여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떤 간판을 달고, 어떤 고상한 목적을 내세워도, 성령을 입에 달고 살아도 말입니다. 사람을 전도하는 도구, 봉사하는 도구, 출석하는 도구로 보면 기업입니다. 교회를 도구로 보면 신앙인이 아니라 기업인입니다. 교회를 인간관계의 도구, 성공의 도구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인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고 닮고자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나머지를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4.01_[부활절]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본문

이사야 25:08 / 2018년 04월 0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사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한줄 요약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 영국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서로서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한 글입니다.

개요

부활절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부활절을 맞이하니까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난주간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덕분인지 부활절이 더 상쾌하게 느껴집니다.오늘은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0. 죽음의 죽음 – 부활죽음의 죽음이라는 말은 영국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이 쓴 책 이름입이다.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죽기 전에는 어쨌든 희망이 있는데, 죽음은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맙니다. 그 무자비한 죽음이 죽는다는 말이 주는 기쁨과 통쾌함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죽음이란 삶이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벽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살아 있는 졸병이 죽은 황제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혼자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겠지요. 혼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스칼은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삶이 연구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범위는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인데 불신자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애써 담담하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종착점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죽음의 불안을 해소해 줍니다.

저는 기독교 사상이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이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활만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모두 인간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데 있습니다. 이 기독교 사상을 생각할 때마다 매료되고 매혹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고 인간 세상에 비극이 생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세상을 고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 모든 설명의 결과로서 부활을 제시합니다.

부활은 삶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비로소 빛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비로소 삶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로 인해서 삶은 가장 큰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선물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을 가지고 살아가면 삶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1. 사망을 멸하시며

먼저 성경은 부활이 사망을 멸한다고 합니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땅에서 뽑힌 것이 사망입니다. 나무는 땅에서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무가 시들어 죽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나무가 완전히 죽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땅에서 뽑혔을 때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사망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체는 백 년 정도 살다가 죽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이미 죽음이 정해져 있습니다.

요즘 가끔 돌연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도 생명이 떠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체 기관이 존재한다고 해서 생명이 자동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최초의 시동을 걸어주어야 합니다. 현대 의학으로 아직 그 최초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이상이 없지만 생명이 떠난 상태를 고치지 못합니다.

생명의 원인은 영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생명의 공급이 단절되면 우리는 죽게 됩니다. 육체로는 백 년 정도 더 살지만 죽음이 예정된 삶일 뿐입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멸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 육체 말고 새로운 육체로 변모합니다. 그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줍니다. 생명을 다시 공급해 줍니다.

2. 눈물을 씻기시며

로마서 1장 8절에 의하면 사망은 불경건과 불의로 이어집니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눈물은 잘못된 선택을 후회할 때 나오는 것 같습니다. 후회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일을 돌아볼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 잘못된 일을 예수님이 돌이켜 주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슬픔이 모두 씻어집니다.

3. 수치를 제하시며

불의는 수치를 가져옵니다. 유교는 수치, 즉 부끄러움을 들추어서 사람을 조종합니다. 우리 민족 마음에 수치가 있어서 왜곡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부끄러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수치를 이해하시고 수치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결과로 수치를 제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수치가 모두 제거됩니다.

결론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적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짓누르던 죽음을 완전히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사망, 눈물, 수치도 극복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어야 삶은 삶으로서 빛날 수 있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018.03.25_[고난주간] 예수님의 인격, 겸손

본문

스가랴 9:9 / 2018년 03월 25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한줄 요약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 왜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개요

사순절 여섯 번째 주간입니다. 이번 주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고, 내일부터는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오는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토요일을 지나 주일에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 주일이 부활절이 됩니다.

0. 왜 겸손해야 할까?

얼굴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하면 쉽게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물건을 들고 있는지, 어느 장소에 있는지 등을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은 앞으로 구원자가 앞으로 오실 텐데 어떤 기적을 보여줄 것이고, 어떤 가르침을 베풀 것이고, 어떤 인격을 가질 것이다라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을 믿으니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가 메시아인지가 좀 헷갈리는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거든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구절을 보면서 대조를 해 보아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헤롯 대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말도 안돼요”라고 말하시겠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헤롯 대왕이라는 사람이 헬라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투쟁하던 이스라엘을 지켜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해서 영웅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자기가 사는 시대에 매몰되어버립니다. 당시에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추종하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우상으로 자리잡으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헤롯 대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예언과 대조해 보면 헤롯 대왕이 메시아가 아닌 것이 드러납니다. 그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격이 잔인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스가랴 말씀은 메시아 구별법 중에서도 인격을 통한 구별법을 알려줍니다. 사실 기적이나 가르침보다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메시아가 겸손한 인격을 가진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스가랴서에서는 메시아가 겸손한 분이라고 그 인격에 관해서 못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메시아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 후보에서 제외입니다. 물론 겸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은 이 사람이 ‘메시아’라는 핵심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기 때문에 메시아 구별법을 적용하면 합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입니다. 메시아가 겸손하다는 말씀은 곧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왜 겸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할 수 있는 근거를 우리 마음 속에 마련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피조물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부흥을 이끌었던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의 책 중에 ‘겸손’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머레이 목사님은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로 세 가지를 애기합니다. 첫째 피조물이기 때문에, 둘째 죄인이기 때문에, 셋째 성도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겸손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이 우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과학을 믿는 사람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더 인정할 것입니다. 사람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요.

사람은 우주, 즉 자연에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마치 신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 넣은 ‘오염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마음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 똑똑하고, 능력있고, 돈이 많으면 신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무시하고 조종하려고 말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우월이 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월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사람은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은 하나의 공동운명체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진 가족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족 위에 군림하고 가족을 짓밟는 행동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 마음 속에도 마치 제가 신처럼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 마음이 오염된 것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이 오염인 것을 알아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주의 일부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2.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불의를 의미한다고 로마서를 인용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의’이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불의’라고 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주위 모든 사람에게 불의합니다. 살인, 사기를 치는 것은 당연히 불의이지만, 부모로서 자녀로서 남편, 아내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마땅히 나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한다는 기준말입니다. 그것이 어긋날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무시하고 심지어 잡아먹어도 나쁜게 아닙니다. 사람이 동물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강자가 더 강해지는 것이 선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도 정의와 평등을 외칩니다. 강자의 횡포를 불의하다고 항의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기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 누가 그 기준을 넣어두었는지 몰라도 그 기준이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알지만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의로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불의에서 건져줄 어떤 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불의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전제로써 필수적입니다.

3. 성도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다음에는 교만해도 될까요?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나오는 의문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한번 하고 마는 이벤트가 아니라 영원한 변화가 시작된 지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겸손을 추구하게 될 때, 예수님과 연합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은 자연인은 겸손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잠시 겸손이라는 가면을 쓸 수는 있지만, 겸손이 인격의 일부로 스며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성도라면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성도의 겸손은 지금까지의 겸손과 다르게 적극적인 모습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겸손은 ‘섬김’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겸손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겸손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의 자기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의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적극적인 행동이었고,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론

겸손은 예수님 인격의 핵심입니다. 겸손은 피조물인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의롭지 못해서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서로를 끌어내리는 진흙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겸손 없는 세상은 강자가 우대받는 정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고 진리일 수 밖에 없고 진리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겸손을 포기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겸손을 포기한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섬김을 실천함으로 겸손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깊이 만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3.18_[사순절] 상한 마음 다스리기

본문

민수기 21:04~09 / 2018년 03월 1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한줄 요약

놋뱀을 쳐다보면 살게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해 좁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에는 민수기 2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의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 신약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12:2이고, 구약에서는 민수기 21:9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헬.아포라오: 주의 깊게 생각하다, to consider with the eyes)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히.나바트: 주목하다, 숙고하다)

두 구절에 모두 ‘보다’라는 공통된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다’는 슬쩍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생각하면서 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구약 성경에서 ‘믿음’에 관한 이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우리 현실에서 믿음을 활용해서 상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0. 뒤돌아보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이 상하십니까?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여러 가지 있겠지요. 사업이 어려울 때, 맡은 일이생각만큼 성공적이지 못할 때, 자녀가 부모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등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는가?”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마음이 상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 상한 마음을 해소하는가?”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소하십니까? 답변하기 곤란하시죠? 시간 끌지 않고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없고 해답만 있습니다. 폴 트루니에의 책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폴 트루니에는 스위스의 내과의사이자 기독교 상담학자입니다. 우리 마음이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나무의 줄기 부분은 땅 위에 드러나 있고 뿌리 부분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마음을 줄기라고 한다면, 안 드러난 마음을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폴 트루니에 ‘강자와 약자’

인간은 동일한 내면의 고통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반응을 보인다. 강한 반응이란 자신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자신 있고 적극적인 모습을 띠며, 자신의 두려움을 덮기 위해 다른 사람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자신의 나쁜 면을 감추기 위해 좋은 면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약한 반응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약점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것을, 강자는 은폐하는 것으로 반응하는 반면 약자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약자의 절망과 강자의 불안, 그리고 이 둘의 불행 이면에는 거대한 착각이 있다고 믿는다. 그 거대한 착각이란 인류에게는 강자와 약자, 두 부류가 따로 있다는 그 생각 자체다. 그 둘 속에는 똑같은 내적 인간성이 감추어져 있다. 외적인 가면, 즉 외적인 반응은 약자뿐 아니라 강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기만한다.사실,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약한 존재다.

사람은 강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약하게 반응하기 마련이고, 그 둘 사이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돌아서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으셨다. 두려움 중에 죄가 되는 것은 날마다 버려야 하지만, 두려움이 주는 자극을 잘 간직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 약자는 약한 반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용기를 회복하게 되고, 강자는 강한 반응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교만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설명을 드리면, 마음이 상했을 때 화를 내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우울해 지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극복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문제를 정직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강자라고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향의 차이일 뿐입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가지 반응의 뿌리에 공통적으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 트루니에는 모든 인간은 약자라고 말합니다. 인간 중에 강자는 없습니다.

이러한 논증이 폴 트루니에의 큰 공로입니다. 성경적인 심리분석의 방향을 잘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반응이나 약한 반응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두려움에 주목하고 그 두려움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참고 견디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재로 마음을 다스리는 열쇠가 됩니다.

1. 4~5절. 마음이 상하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두려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 마음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펴보겠습니다.

[21:4~5]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원망’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원망은 ‘뒤돌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라고 나와 있으니까요. 이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믿음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인데, 이들은 뒤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앞 일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한데, 또 길을 멀리 돌아서 가야하니까 고달픕니다. 두려움이 증폭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뒤돌아 가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줄기를 보지 마십시오.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뿌리를 바라보십시오. 뒤돌아보는 이유는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내면의 불안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여 해결하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이 만들지 않은 하늘, 땅, 공기, 물이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불안정합니다.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들어갈 여지가 생깁니다.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고 깨달아야 믿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의존적인 존재인 인간이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하나님 품에 안겨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이 근본적이 부분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품에 안겨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2. 6~7절. 고통 속에 기도하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도 기도와 동일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자기 존재의 불안정과 거기서 비롯된 두려움을 깨달은 정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를 해도 내용은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하게 기도하는 강한 반응이나 원망하는 약한 반응에 속으면 안됩니다. 표면적인 마음에 머물지 말고 그 마음 밑에 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 존재를 의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기도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자신의 비서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자신의 성공을 도와주는 도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세게 한다고 기도가 강력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하나님께 순복해야 기도가 강력해 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믿음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깊은 곳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줄기만 볼 뿐 감추어진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줄기를 잘라내고 억누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뿌리를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뿌리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서 그분과 연합하고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흡수할 때 마음 줄기도 건강하게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가면과 포장을 벗겨내려는 의도입니다.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같은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소한 일에 크게 화를 내시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오늘 구절은 매우 압축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반응하시는 내용이 있는데, 대부분 압축된 핵심 가르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배성들이 믿음에서 정반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멸망 밖에 길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비상 개입을 하십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극약 처방입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3. 8~9절. 바라보면 산다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뱀이 예수님을 비유하는게 맞는냐는 점입니다. 네, 맞습니다. 성경에서 뱀을 좋게 비유한 부분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이고 하나는 마태복음 10:10에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성경은 단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예수님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뱀은 무조건 사탄이고 금은 무조건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 영해’라는 부흥회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골탕먹이려고 이렇게 ‘이스터 에그’를 숨겨두셨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쳐다본즉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주의깊게 생각하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단순하게 믿자”라는 구호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성경과는 반대입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 중에 믿음의 심층으로 도달한 일이 없습니다.

깊은 사고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청교도는 대학 총장도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학교는 커녕 부인한테 글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고 역작인 천로역정을 지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마음이 거짓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초등학교도 못나왔어도 정직하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때문에 슬퍼하고 사람 때문에 고민하다보면 사람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 깨달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성경에 귀기울이면 믿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대한 요약입니다. 더불어 우리 인생에 대한 요약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상했을 때, 공격적으로 반응하거나 소극적으로 반응하거나 과도하지 않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것이고,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건 정직한 성향이 강한 것이라고 폴 트루니에를 인용해서 알려드렸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마음 더 깊은 곳, 즉, 마음의 뿌리에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느냐 교만하게 원망하고 뒤돌아가느냐가 진짜 문제가 됩니다. 두려움을 포장하지 말고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하나님께 은혜를 탄원하십시오. 두려움이 해소되고 포장된 반응들이 자연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면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인격을 신뢰하십시오. 그 바라봄이 영원히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018.03.11_요나의 표적이 주는 교훈

본문

마태복음 12:38~45, 요나 3:5 / 2018년 03월 1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3: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한줄 요약

요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알려줍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간에는 요나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표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을 ‘표적’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오토’, 헬라어로는 ‘세메이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에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적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일’을 의미합니다. 표적은 ‘기적’을 포함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표적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첫째,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기적, 은사, 능력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병이 치료되거나 귀신이 쫒겨나는 것, 성령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둘째, 기도 응답입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라도 기도 응답이 표적이 됩니다.셋째, 시대의 표적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본문하고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표적입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그 표적을 분별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0. 병원갈까, 기도할까?

요즘도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병원가고 기도하십시오. 병원간다고해서 믿음 없는 것이 아니고 병원 안간다고 믿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병원갈까, 기도할까? 고민하는 이유는 병원으로 대표되는 과학과 기도로 대표되는 신앙이 서로 반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학과 신앙이 반대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과학과 상식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도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기적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기적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믿을 만한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오늘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들어가 있다가 살아난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설명하면,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무조건 믿어라”라고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예수님이 왜 부활하셔야 하는지도 설명합니다. 이런 배경을 설명한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한 후에 그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성경이 우리의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부활이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믿을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 안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런 분께는 죄송한데, 그게 믿는게 아닙니다. 그냥 믿는다고 생각하는 거고 믿고 싶은 거일 뿐입니다. 그런 자세는 좋지만, 다 됐다고 생각하는 건 큰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을 진심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편견 없이 보니까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라는 공식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믿음 없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믿음을 갖도록 차근차근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잘 따라오지 못하고 엇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엇나갔는지 아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1. 38~40절.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서 몇 사람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말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 진짜 큰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주셨냐면,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12: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건 표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여주어도 깨닫지 못한 이유는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면 안돼!’라고 근거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보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표적을 보여주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부활의 표적에 대해서 예고하고 다른 표적은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표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표적 알아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주셔도 알아채지 못했느냐면,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면 안돼! 하나님도 기적을 일어키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잘못된 거야!”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가진 안식일과 같은 편견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선한 양심에 귀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12: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선한 양심과 어긋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현대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난 없는 형통, 희생 없는 영광, 거룩 없는 성령, 섬김 없는 은사가 바로 번영주의입니다.

기도만 많이하면 형통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누리려고만 합니다. 성령을 강조하는데 말과 행동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하무인으로 행동합니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물의를 일으킨 목회자가 건재하는 이유는 그를 추종하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판적으로 교회에 다니는데요”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책임을 져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2. 41~42절. 요나의 기적이 알려주는 의미

예수님이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이유는 이 이상의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살던 시대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믿지 못한다면 설명이 무의미합니다.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더 잘 볼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 사람이나 남방 여왕 처럼요.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교회 안 다니는 사람한테 “이 교회하고 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어때 보이세요?”하고 물어보면 어느 정도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 많이하고 봉사도 열심히해서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데, ” 그 교회 사람들 엄청 이기적이예요”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도도 봉사도 잘 못해서 힘 없이 다니는데, “그 교회 사람들 순수하고 겸손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요새 카톡으로 구국기도회니 하는데 참여하라는 문자가 가끔 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그걸 주도하는 분들 얼굴이나 말투를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애들한테 “얘들아, 이 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닮은 것 같니?”라고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생각해 봅니다.

분노와 광기에 가득찬 얼굴로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어떤 대답을 내 놓을까요? 아이들은 존경스럽다고 할까요?

다들 소신과 근거를 가지고 나름대로 믿음으로 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소신과 근거, 믿음이 어디에선가 오염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채려면 자기 마음의 오염을 제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광기가 아니라 겸손과 평안 가운데 해야 합니다..

3. 43~45절. 나중에 전보다 심해진다

표적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없으면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내가 선택하는 길이 곧 내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면 잘못된 길을 가게되고 잘못된 길을 가면 마음이 더 잘못됩니다. 악순환에 빠집니다.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첫걸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걸음은 단지 한걸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걸음 이후에 걸을 수 많은 걸음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첫생각이 중요합니다. 정직과 거짓의 갈림길에서, 공의와 불의의 갈림길에서, 고난과 번영의 갈림길에서 첫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옳은 길을 선택하면 힘들고 고생할 것 같지만 고난 중 형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선순환에 들어섭니다. 반대로 옳지 않은 길을 선택하면 번영할 것 같지만 환난에 빠집니다. 예수님과 멀어지고 악순환에 빠집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은 우리를 힘든 길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정직, 공의, 희생은 상대적으로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옳을 길을 가면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 끝에 예수님이 활짝 웃으며 여러분을 기다리실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켜는 일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없어집니다. 선한 양심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우면 어리석음이 떠나갑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를 아는 빛나는 지식으로 내면을 채웁시다.

결론

요나의 표적은 우리에게 부활이 믿기 어렵지만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 내면이 정결해 져야 합니다. 표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편견과 분노, 광기에서 벗어나 평안과 확신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밝은 빛처럼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의 인격을 묵상하십시오. 언제든지 그것이 최우선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지켜질 것입니다.

2018.03.04_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본문

누가복음 10:25–37, 신명기 6:4~5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한줄 요약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간에는 신명기서가 인용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율법은 가이드(a guide)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벽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또다른 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즉,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벽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잘 깨닫는 것도 힘들지만,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교육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까 답은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대가가 성경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교육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많자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맞춤형 단계적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르셨고, 단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영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하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율법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26~28. 영생을 얻는 방법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변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앞에서 하신 말씀과 대답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상이었습니다.

[14:5~6]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 두 제가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못지 않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은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는 가르침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맞춤형 교육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던 말씀을 대상에 관계없이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율법학자가 신명기 6:4~5절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이 말씀을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끄집어 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인격성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데만 힘썼지 율법의 정신을 지켜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태도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법률에 충성했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은 거부했습니다.

2. 29~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인격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생겼는데,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몰래 피해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생각을 고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양심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데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 주일 성수는 잘하는데 직원들 착취하는 장로, 술 담배하지 않는데 돈 떼어먹는 집사,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청년, 건전하지 않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헛똑똑이 교인 등입니다.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냐면, 어떤 한 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철처하게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양심이 없는데 뭔가 충성하니까 자기 스스로 신앙 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인 예를 들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관련 뉴스를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편들고 어리석은 주장을 일삼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이웃이 아니라 교회 안다녀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던 불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3. 37.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 말씀의 절정은 37절입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단계적 교육입니다.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직 그 단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비슷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말로만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또 교회 안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교회 안에서만 충성,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서 강자의 횡포에 항의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손해를 보아도 공의를 지지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떨리게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헛된 충성을 믿음의 증표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온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지키다가 손해를 보고 좌절했을 때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을 깨달을 것이고 깊은 확신 속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율법학자는 오늘날 교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의 양심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신앙 생활 잘하고 있지요? 저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배웠고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율법학자의 선한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보다 악한 삶을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율법학자의 몫입니다. 그가 어떤 길로 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선한 일반인 즉,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신앙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문제가 있든지 그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논리와 사변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헛된 확신에서 벗어나서 의를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려운 길을 가라고 권유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가라고 이끄십니다. 헛된 확신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2.18_너는 작을 지라도

미가 5:2

2018년 02월 18일 주일 설교

핵심 구절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한줄 요약

나는 미약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나와 관계를 맺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나도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첫번째 주일입니다. 영어로는 관사없이 ‘Lent’라고 합니다. 부활절 전 46일을 가리킵니다. 사순이면 40일인데 46일인 이유는 주일을 빼고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빼는 이유는 주일에는 금식 혹은 고행을 중지하고 기쁘게 보내자는 취지입니다. 예전에는 사순절에 금식 혹은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일만은 그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우리가 절기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신앙 습관을 형성하려는 의도입니다. 좋은 습관이 인생을 바꿔주듯이 좋은 신앙 습관도 인생을 바꿔줄 수 있습니다.

0. 자존심이 아니라 자경심

사회가 경쟁이 심해지고 스트레스가 늘어나면서 심리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심리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심리적인 처방을 내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처방 중에 하나가 ‘자존심’ 혹은 ‘자존감’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존감이 낮아서 우울증이 걸리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고 합니다.

김미경이라는 강사의 자존감 강연도 있었지만,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인생에 어느 정도 도움은 됩니다. <자존감 수업>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용

‘자존감 수업’은 자존감의 정의부터 짚고 넘어갑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나를 존중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명확하게 자존감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Self-esteem)’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존.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어떻게 하면 끌어올릴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 남의 눈이 항상 두려운 사람, 감정싸움으로 쉽게 지치는 사람, 항상 공허함에 시달리는 사람 등

저자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의과대학을 다닐 때 유급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낙방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학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적도 있고, 대학입시에도, 심지어 재수학원 입시에도 떨어졌다. 의과 대학 낙제는 그중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의 경로 자체를 수정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나는 매일 술을 마셨고, 담배와 게임에 빠져 지냈다. 후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생각을 하니 암담했고, 스스로에게 창피해서 가족들도 피해 다녔다. 아침이 되면 친구들은 학교로 가고 나는 PC방으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면 몰래 귀가했다. 당구장에서 밤을 보내거나 친구들과 포장 마차를 전전하다가 동이 틀 무렵 고양이처럼 들어오길 반복했다. - page 10 쪽

part7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다섯가지 실천

*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하기"
* 자신을 사랑하기
*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기
* '지금, 여기' 에 집중하기
* 패배주의를 뚫고 전진하기

저자가 말하길,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여러 심리학책을 탐독하며 보편화(‘나만 이런게 아니었구나’), 죄책감 탈피(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수만은 요인을 알게된다), 지식화 (감정으로 느끼던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의 과정을 겪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존감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경심’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너는 작을지라도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경심은 자신을 존경하라는 말인데,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존경하라는 의미입니다.

내 아이가 소중한 이유는 가장 잘나서가 아닙니다.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은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자경심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장소를 예언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이스라엘의 제사장, 서기관들이 오늘 본문을 인용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베들레햄은 다윗 왕의 고향이었지만, 대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신약 시대까지 작은 도시로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기로 결정하셨고, 뿐만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랑하는 것들을 거부한다는 메시지말입니다.

사람들은 명문가 출신, 멋있는 외모, 좋은 학벌 등을 자랑합니다. 오늘날에는 자랑이 돌고돌아서 출신 가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금수저를 즉,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가장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랑거리를 거부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셨지만, 부가적인 자랑거리는 조금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갈릴리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

[마 2: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도 나사렛은 아주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나사렛이 그만큼 가치 없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만큼 경멸하고 낮추어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쉽게 말하면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시골뜨기 예수’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한 번씩 ‘나사렛 예수’라고 표현한 것은 ‘너희들이 천히 여긴 시골뜨기 예수’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복음 2장 23절 말씀 “…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 선지자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리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인데, 그곳이 바로 이사야 11장 1절이다. 그런데 정작 이사야 11장 1절을 펴보면 ‘나사렛’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나온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사야 11장 1절 중에 ‘가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음으로 ‘네쩨르’라는 단어를 썼고,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바로 ‘네쩨르’라고 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나사렛’이란 단어의 원단어가 ‘네쩨르’라는 ‘가지’에서 나왔기에 그 의미로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한다고 번역했던 것이다. ‘네쩨르’는 번역하면 ‘뿌리에서 나온 아주 가늘고 볼품없는 연한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이 ‘네쩨르’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사렛 예수’로 불리신 것은 예수님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만약 예수님이 화려한 하늘 왕권을 가지고 강력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세상에 기댈 것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가까이 가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 모습으로 오셨다. 그렇기에 오히려 힘 있고 화려하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가까이하거나 만나기 꺼려지는 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3. 영원으로 이어주는 예수님

예수님이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모조리 거부하신 이유는 인간의 참된 가치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잘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존감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지만,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자존감은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은혜의 시작은 인간은 죄악 덩어리, 죄의 장아찌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의 길에서는 자존감이라는 갈대 지팡이가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서 있다가는 참된 은혜의 길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무가치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가치 있다는 생각은 모세의 지팡이와 같습니다. 결코 부러지지 않고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합니다. 자존감을 너머 영원한 나라로 말입니다.

결론

자존감은 근본적으로 자신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존중하도록 권유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 처방이지 근원 치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의 길을 갈때 방해가 되고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자경심은 우리 자신에게서 가지를 발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가치있게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길에 항상 동행하는 진리의 지팡이가 됩니다.

베들레햄아 너는 작을지라도.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가치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순례자여 그대 그리스도와 함께 누구이고 그리스도 없이 누구인가?

2018.02.11_수님이 부르시는 그곳

갈라디아서 06:01~18

2018년 02월 11일 주일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줄 요약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사람은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뿌린 모든 것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개요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에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는 복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복음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살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오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어떤 삶인지 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0. ‘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삶을 생각할 때 주의 해야 할 것은 단어의 오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슬프다’는 단어만으로는 전혀 슬프지 않고, 구체적으로 슬픈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런데, 슬프다는 말을 듣고 슬픈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996

2012년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에 세들어 살던 세 모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동반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입니다.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사과하는 글에는 슬프다는 말이 들어있지 않지만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2011년에는 안양구 석수동 월세집에서 예비 시나리오 작가 최 아무개 씨가 홀로 죽었는데, 죽기 며칠 전에 이웃집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2228.html#csidx42c556d70778d24bbaf0e6c34e064df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한다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1. 1~10. 성령님의 인도, 십자가

우리 시대에 십자가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십자가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더 큽니다. 마치 중세 시대와 비슷합니다.

당시에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팔아서 대성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것이 교리적으로 무척 잘못되었고 교회와 사회, 윤리적인 타락의 근원이었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면죄부 사놓지 뭐”, “대성당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럴 수도 있지”, “잘못되었지만 너무 세력이 강하니까 어쩔수 없지”

소수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카톨릭에서 매장하고 사람들도 외면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제가 성령 운동 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이 성령 세례라는데 방언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연습해서 방언을 해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양심이 불량한데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대형 교회를 세습하면서 십자가를 물려준다고 십자가를 모독해도 충성을 바칩니다.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교회에서 쫓겨나도 여전히 추종자들이 따라다닙니다.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 시대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2. 11~15. 인생의 자랑, 십자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느 시대나 힘듭니다. 십자가는 항상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시대의 주류가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부흥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6:8~9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삶이고, 영원한 나라에 기록되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3. 16~18.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손해, 손실,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다가 입는 피해를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을 지키다가 가난하게 되거나, 실패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흔적’은 가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몸에난 상처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트라우마일 수도 있습니다.

카톨릭은 ‘예수의 흔적’을 잘못된 영성으로 인도합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시스코의 상흔에 관한 일화인데, 성프란시스코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몸에 못자국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런 영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상흔은 비역사적인 상흔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역사적인 무언가입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미국으로 건나갈 때 많은 가족, 동료들을 잃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고생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행동에 의한 피해가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상흔입니다.

넓은 길로만 가면 고생할 일도 없고, 상처날 일도 없습니다. ‘예수의 상흔’이 없습니다. 있다면 비역사적인 환상에 의한 상흔만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서기도 힘들 뿐더라 칭찬을 듣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분들은 명백하게 불편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을 ‘예수의 흔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예수의 상흔’은 ‘영광의 상처’로 변할 것입니다.

결론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의 주관자 마귀는 우리보다 머리가 좋습니다. 교묘하게 신앙인들을 십자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박해가 아니라 오염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박해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결국에는 영광의 상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분을 향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