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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요한계시록 14:7 / 2018년 06월 24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계 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 한줄 요약
모든 일에는 마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고 결산하시는 분입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0. 모든 일에는 마감이 있다
자연은 봄에 싹이 나서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추수합니다. 모든회사도 매월 마감을 하고 연말에는 결산을 합니다.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하지만, 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배우기는 했는데, 얼마나 배웠는지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월드컵도 서로 실력을 겨루는 일종의 테스트이고 결산입니다. 세상 만물이 결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도 결산할 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결산하신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준비를 잘 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지 않지만, 준비를 잘 못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습니다. 어떻게 인생의 결산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 두려우신 분 : 진노
하나님은 진노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당연합니다. 거룩은 홀로 고고하고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거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진노를 포함합니다.
> 증오란 정당한 것이다. 부정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 -로망 롤랑
부정을 미워해야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부정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정을 두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정한 사람을 좋아하고 두둔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동일하게 부정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을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이것은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능한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야 혹은 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이야 라고 결론을 내리면 안됩니다.
하지만, 이 원리를 가지고 스스로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불의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언젠가는 모든 불의를 불태우는 심판을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2. 심판의 시간 : 공의
만약에 이 세상에 악인이 득세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대로 놔두어야 할까요? 억울한 일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창조자인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감을 갖고 세상에 대한 심판을 하는 것이 공의일 것입니다.
>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하나님은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재판정을 열고 심판을 진행하십니다. .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하나님의 심판은 재판장이 재판하는 것처럼 법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재판관의 판결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이 땅에 재앙이 일어납니다.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회개하는 자들이 구원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의 이르게 됩니다.
3. 심판받지 않는 방법 : 그리스도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지만, 심판을 받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미리 심판을 받기 때문에 다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그 사실을 짊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다 압니다. 이렇게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체험에 근거한 믿음이있어야 합니다.
막연한 낙관론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서 막연한 낙관론과 믿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 가르침에 동의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만, 그것이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잘 모르지만, 불신자들도 구원의 확신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 불신자들도 죽어서 좋은 곳에 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은 안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감은 있지만, 안일함과 나태로 인해서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로 덮어 놓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불신자들이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막연한 낙관론과 비슷한 것인데 믿음인 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막연한 낙관과 믿음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에베소서 2:1~3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2:1~3)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자신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종이고, 진노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내가 죄인이고 반드시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생생하게 알게 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처철한 자기 발견이 있어야만 믿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 00 죽어야 산다
기독교는 죽어야 산다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막연한 낙관을 갖는 것은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아야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죽음을 아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