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6 [신년] 어떻게 바라볼까?

0. 있는 그대로 보기

예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지하철 아저씨

관점이 달라지면 똑같은 사실도 달라보입니다. 어느 날 스티븐 코비가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아주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아이들의 소란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만 있었다. 참다못한 코비는 남자에게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아이들을 좀 어떻게 해 보시는 게 좋지 않겠소?” 그제서야 남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코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 말이 맞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 전에 저 아이들의 엄마가 수술실에서 사망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나자, 코비에게 그 남자와 아이들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 남자는 교양이라곤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는 아내에 대한 애정이 깊은 남편으로 보이게 되었고, 지금까지 버릇없고 막돼먹은 것으로 보였던 아이들은 엄마를 잃은 가엾은 천사로 보이게 되었다.

신년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답답하고 변화가 없다면, 올해에는 지금까지 보던 것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요?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했으면 합니다. 본문인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01:01-05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1. 꿈꾸지 않은 요셉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에 관한 설교를 찾아보면, 흔히들 요셉이 꿈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요셉은 꿈의 사람이나 비전의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이가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자라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중국에는 한 자녀 정책으로 인해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이가 이기적으로 자라 문제를 일으킨 예는 유명합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요셉이 나쁜 아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눈치가 없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요셉이 차별 받는 형들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어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요셉을 꿈의 사람 즉 비전의 사람으로 잘못 이해하고 설교한 것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설교자가 잘못된 설교를 생각 없이 따라한 것 같습니다. 본문을 매우 여러번 보았을 텐데도 잘못된 관점을 선택한 순간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본문을 끼워맞추어서 읽게 된 것입니다.

2. 꿈을 주신 하나님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그렇다면, 요셉이 꾼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요셉이 비전이 있었으니까 꿈을 꾼 것이 아닐까요?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본문을 따라가 보면,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대해서 요셉을 제외한 형제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후에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볼 때 그 분노가 얼마나 컸을 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은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셉이 꿈을 꾼 것입니다. 이 꿈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 꿈으로 인해서 요셉에 대한 형들의 분노가 커져서 요셉을 죽이는 일을 실천하게 됩니다. 요셉의 인생 행로가 바뀐 것입니다.

이집트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예상과 달리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요셉이 상사의 인정을 받는 센스 있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되돌아보면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으며 살던 상황이 야곱에게도 요셉에게도 요셉의 형들에게도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형제들 간에 미움이 극에 달해서 살해를 할 정도로 갈등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그 상황을 변화시켰습니다. 비극에 빠질 위기에 처한 언약 자손의 가정을 구출했고, 요셉을 위대한 신앙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야곱의 신앙을 회복했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큰 민족을 이루는 구속사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준신 꿈이 이 모든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비전을 갖자”는 식의 흔하디 흔한 인본주의적 교훈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의 섭리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게 된 불행이 구속사의 발전을 위한 한 걸음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처럼 비전을 갖자” 가르침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아이러니를 설명할 수 없고, 그 가운데서 울고 웃는 우리 마음을 어루 만질 수 없습니다. 성경을 자기에게 익숙한 관점으로 끌어내셔서 그럴 듯한 해석을 곁들이는 것으로는 참된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3.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큰 꿈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이라도 인생이 기대한대로 진행되는 일은 드물 것입니다. 어리석고 실수가 많은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꾼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추구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인본주의적인 번영이 아니라 섭리적 은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행·불행에 담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이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퍼즐 한 조각을 가지고 전체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4.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새해를 시작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신앙도 세상도 선입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00202[관계] 다르게 살고 싶다 | 만나는 사람부터 바꾸자

0. “죽고 싶어” → “다르게 살고 싶은 거겠지”

막 01:16-20. 어부들을 부르시다(마 4:18-22; 눅 5:1-11)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 다르게 살려면 만나는 사람부터 바꾸자

“지금까지 만나던 사람을 만나지 말라”구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만나던 사람 계속 만나십시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을 내서 다음 네 가지를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1) 관심 없던 사람: 유명한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과 만남을 가져보세요.

(2) 개인적인 만남: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나기만 했던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나자

(3) 자연스러운 만남: 생일, 승진, 머리모양 바뀌었다

(4) 끝이 있는 만남: 미리 약속 시간, 장소 정하고 헤어지는 시간도 정하고 만나자

2. 가장 중요한 건 예수님을 만나는 것

성경을 보자

다른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자기 시각으로 다시 보자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만나자

3. 죽고 싶을 때, “다르게 살고 싶다”라고 말합시다.

20200119 창세기 15:01~07, [신년] 어떻게 변할까?

창세기 15:01~07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0. 변하고 싶은데 잘 안돼요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다”
“​The definition of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but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Albert Einstein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고영성)에서 핵심습관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볼링에서 킹핀을 맞추면 다른 핀들이 쓰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습관을 발견해서 그것을 바꾸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강조하신 것도 한 가지 습관의 변화였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습관입니다. 언약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습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1. 도전 후에 오는 침체

아브라함은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조카 롯이 납치되었을 때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318명을 이끌고 전투에 뛰어들어 롯을 되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침체에 빠진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로 바꾸어서 조직 폭력배에게 조카가 납치되었는데, 조직 폭력배를 공격해서 조카를 구출해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조카가 납치된 상황에서는 정신없이 행동하겠지만, 일이 끝난 뒤에는 후환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사건을 경험하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암 진단을 받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차분해집니다.

어쨌든 도전을 시도한 후에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울증 증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2. 안보이는 것 보기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에 의존하다보면 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쇠퇴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흥할 때가 있고 쇠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이는 것을 의지하면 언제나 실망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심어주려하신 핵심습관은 언약을 의지하는 습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습관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정의 기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하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3. 의로 인정받은 믿음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구절을 보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뭇별을 보여주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문맥에 감추어진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처음 부름받을 때, 이미 비슷한 언약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그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상태였고, 자신도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소망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기적이 아니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가진 정도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아이를 낳아야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는 언약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2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 #4. 결론: 핵심 습관을 바꾸자

그리스도인의 핵심 습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습관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볼 때, 외모, 재산 같이 보니는 것으로 분별하지 않고, 인격, 성품 등 보이지 않는 것에 따라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습관이 익숙해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데,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려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20190112 [신년] 어떻게 시작할까?

창세기 12:01-0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도입: 시작이 안돼요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주도 새해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작년에서 신년 설교를 이사야서를 본문으로 했습니다. 올해는 창세기를 본문으로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새해가 되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분들을 위해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계획도 세우고 목표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잘 안잡히고 시간만 지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 있으시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원인과 해결책을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늦은 시작

아브람은 칠십 오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 삶을 자세하게 안나옵니다. 본격적인 시작이 칩십오세라고하면 늦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뭐냐면,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입니다. 갈 곳을 정해주신 것이죠. 갈 곳이 정해지는 것 방향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 방향이 정해져야 시작인 겁니다. 열심히 뛰었는데, 반대방향으로 뛰었다면 시작도 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개척교회 목회를 했지만 어느 순간 성경공부를 가르치는게 내가 가야할 방향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방향이 정해지니까 저도 삶이 정돈이 되더라구요. 제가 지금 영상을 올리는 것도 성경공부를 가르쳐야겠다는 그 방향설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저커버그 등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방향설정을 제대로 하면 삶이 정돈되고 에너지가 바르게 사용됩니다. 아브람도 칩십오 세에 비로소 갈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올 한해를 통째로 투자해서 내가 갈 곳이 어디인가? 하고 싶은게 무엇인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그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믿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방향을 알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제단은 번제를 드리는 곳입니다. 즉, 아브람은 구원자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알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오셔서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믿는자를 구원할 것이라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노아의 믿음이 아브람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믿음은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이어받듯이 이어받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노아의 믿음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모르는데 나만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백퍼센트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부터 구원자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알려주셨고, 그 복음이 믿음의 후손을 통해서 이어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고 동행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도 동행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바른 방향을 설정해 주기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셋째: 성장을 위한 시행착오

여기까지는 좋은데, 성경의 줄거리는 우리 예상을 벗어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에 갔지만, 위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원래살던 곳과 비슷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위대한 일을 찾아서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실수를 범하는 내용 전까지만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요? 왜 가라고 하신 땅에 가기만 하면, 위대한 일이 일이 일어날 것처럼 하시더니 아무 일도 없고, 큰 실수까지 범하게 하셨냐는 것이죠. 그 이유는 이것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고가 많이 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과도하게 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독설을 하기도 합니다. 힘 조절이 안되고, 감정 조절이 안되어서 그런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에 미숙해서 시행착오를 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짝사랑을 하기도 하고 카드 빚을 지기도 합니다. 과거에 실수한 일을 되뇌이면서 고통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실수라는 단어대신 시행착오라는 단어를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실수가 오랫동안 심리적인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남에게 말하지 않지만 부끄러움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실수라고 생각하마시고, 시행착오라고 생각하세요.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진통입니다. 앞으로 남밤으로 옮겨간 아브람은 비겁하게처신해서 아내를 빼앗기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브람에게는 평생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브람은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행착오를 허락하십니다.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만이 실수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이없는 실수 말도 안되는 잘못을 저지를 사람을 보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바리새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위대한 일을 맡기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을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성장을 위한 시행착오말입니다.

결론

서두에서 새해가 되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분들을 위해서 말씀을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계획도 세우고 목표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잘 안잡히고 시간만 지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원인과 해답을 주겠다고 했죠. 아브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칠십오 세에 비로소 갈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있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교차하는 곳이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을 향해 가는동안 시행착오를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기쁨과 보람을 발견할 것입니다.

20200105 창세기 08:20~22, [신년]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

창세기 8:20-22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도입:

새해가 주는 활력 새해가 되었습니다. 예전보다는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것이 떠들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둔감한 사람이라도 새해가 되면 마음 속으로 한 두 가지 결심을 하거나 몇 가지 목표를 세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아도 조심스럽게 기대를 품어 보기도 할 것입니다.

새로운 해는 어떻게 생각하면 똑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이 불과한데도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상을 일깨우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뭔가가가 있습니다. 그니까 새해가 되면 힘들게 해돋이를 보러 산으로 바다로 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사람도 해가 바뀌면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결심을 하고 기대를 갖습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해가 바뀌는 건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해가 바뀌게 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번제를 드렸더니

20절은 배경입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짐승을 죽여서 불로 태우는 의식입니다. 대속을 상징합니다. 대속이란 다른 생명이 대신 죽음으로써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음에서 구원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린 것을 통해서 노아가 대속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대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대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해석을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라고해서 예외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둘째: 그 향기를 받으시고

21절은 전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이유는 번제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뒤에 무지개 언약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대홍수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대홍수 심판은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등 모든 자연이 함께 고통을 받은 심판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심판은 대홍수 심판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생각을 바꾸셨습니까? 번제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때문입니다. 장차 있을 심판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만족된 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 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뿐입니다.

셋째: 쉬지 아니하리라

22절은 약속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변화된 환경에 놀랐을 것입니다. 홍수 전에는 자연이 살기에 적절한 자연환경이 지속되었지만, 홍수 후에는 보호막이 사라지고 살아가기 혹독한 자연환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화를 약속으로 주신 이유는 변화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이 “때가 차매”오셨다고 증언합니다. 한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오는 것처럼, 한 해가 지나면 다른 해가 오는 것처럼, 때가 차면 새로운 시대가 옵니다.

마찬가지로 때가 차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진리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신자는 때가 차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신약시대 신자도 때가 차는 것을 보면서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 때가 차매

2019년이 차고 202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목표, 결심, 기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때가 차매” 오셨던 예수님을 돌아보고 “때가 차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019.01.13_영웅시대의 숨은 영웅

영웅 시대의 숨은 영웅

본문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룻 1: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룻 1: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룻 1: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우울한 시작

새해가 되었습니다. 연말에도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분이 많았는데, 연초에도 연초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눈이 오지 않은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사회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다보니 연말 혹은 연초라고 해서 긴장을 풀거나 여유를 즐길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새해같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기침체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마음이 위축되고 살아가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오늘날과 비슷한 시대가 성경에도 여러번 나옵니다. 룻기의 시대가 오늘날과 비슷한 그런 시대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룻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교훈을 얻었으면 합니다.

룻기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현실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들이 고함을 쳤답니다. “도대체 바다가 어디있냐?”고 말입니다. 바다 속에 살고 있다 보니까 바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오히려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만해도 자기 얼굴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자기자신이었습니다. 깨끗한 거울이 보급되기 전에는 자기 얼굴을 볼수가 없었으니까요. 어쩌다가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면 ‘이게 내 목소리 맞아?’하고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목소리는 공기를 통해서 전달되는데, 자기 목소리에는 자기 몸을 통해서 울리는 소리가 대해진다고 합니다. 공기를 통해서 전달된 목소리만 듣게 되는 다른 사람이 듣는 소리와 조금 달라지는 것이지요. 결국 자기가 듣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 듣는 목소리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잘 모르게 될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자기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고 이해하는 것과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나 얼굴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에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멋 훗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룻기의 시작부분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객관화하고 재발견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웅 시대의 현실

룻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사사시대는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영웅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는 말은 “영웅이 많이 있던 시대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고, 일부만 그렇게 불렀지만 말입니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 같은 사람을 경제계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부 있습니다. 정치계는 더 논란이 있지만 일부에서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구절입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이 많으면 매우 행복하고 살기좋을 것 같은데 현실은 반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이 있습니다. 전쟁 기간 즉 난세에 활동했습니다.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사실은 혼란스럽고 살기 어려운 시대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시대니까 영웅이 필요하고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니까요. 영웅이 많은 시대가 살기좋은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되니까 존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매우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 매우 큰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고 신앙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니었습니다.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자 믿음에 따라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갔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구절에서 왕은 단순히 왕정제도를 통해서 왕으로 뽑힌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갔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 같은 사람을 추종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 같은 주장을 따라간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압지방으로 가족이민을 갔습니다. 그 가족 구성원의 생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나쁜 선택이라고 생각했으면 가족이민을 갔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에 신앙적 경제적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요즘 이단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봅니다. 전에는 위축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포교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시대적으로 보면, 지난 시대 기독교에 원인이 있습니다. 지난 시대에 기독교가 행한 일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이 있는 목회자가 기독교 지도자가 많다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사시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시대의 구원자라고 생각한 사람이나 그들을 추종한 사람들이 조금도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이유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본받아라”가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르 본받는 나를 본받으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의 행사에 갔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을 우상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인도 교인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 혹은 교회성장을 보면서 나는 이 정도 존경은 받을만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런 우상화와 대형화를 통한 마케팅 효과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런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같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저럴 수 없을 텐데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라는 책에서 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지 세가지 이유를 적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세가지 이유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은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인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고 생각에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위대해 보이고 능력 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시대입니다. 사사시대 엘리멕렉 가족이 그러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들의 선택은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택의 결과

이스라엘 사람은 모세 시대 하나님과 언약을 통해 얻은 땅, 이스라엘을 떠나면 안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떠나면 안됩니다. 엘리멕렉 가족이 그 사실을 몰라서 그랬는지 혹은 알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은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항상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줄기도 죽습니다. 잘못된 역사 위에서면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잘못된 삶을 살게 됩니다.

구속사에 사 즉,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최선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섣부르게 그들이 겪은 비극이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유는 욥기에 잘 나와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즉각적인 응보를 하기 보다는 많은 경우에 심판을 유보하시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면,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을 말입니다. 외삼촌에게 바둑을 배울 때 최선을 다해서 한수한수 두었는데 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최선을 대했는데 지고 나니까 최선을 다해서 둔 한수한수가 패배로 가는 수만 둔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해서 두지 않는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냐면 더 크게 진다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걸 한계라고 해야겠죠.

자기 최선을 대했다고 해서 바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하나님은 성경을 주셨고, 진리를 명백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명백한 진리를 거절한다는데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옳은 주장인지 누가 바른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데카르트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데카르트가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물건들이 확실해 보이지만 그것이 나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고민 끝에 발견한 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였습니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건 언제나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는 기독교에서 가장 확실한 게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어떤 사람은 전도, 어떤 사람은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다 아는 얘기 같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들은 배리칩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사실 제는 한참동안 왜 그게 문제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의 666 표식을 베리칩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베리칩을 몸에 심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이 아니라 베리칩에 있다는 말입니다. 양보해도 예수님 플러스 베리칩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베리칩교입니다. 자신이 베리칩교를 믿고 있는데 베리칩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율법주의가 베리칩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다른 어떤 것이 예수 그리스도 대신 구원의 근거가 되거나 예수 그리스도 플러스 어떤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잘못된 선택으로 돈을 잃고 건강을 잃는 것도 비극이지만, 가장 큰 비극은 영혼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영웅 시대의 결말

영웅들의 시대가 어떻게 마무리 될까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끝판왕 영웅이 나와서 적들을 모두 물리치면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입니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사시대의 마지막에 삼손이 나오니까요. 삼손은 다른 사사와 다릅니다. 탄생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특별한 인물에게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무후무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사사였습니다. 이 사사가 사사시대를 마무리했을까요?

사람이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렇게 지었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손은 사사시대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자아실현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자기 성공을 위해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재능을 받은 줄 알고 말입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결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 즉, 영웅시대의 결말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최고의 영웅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믿음의 사람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바로 룻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선택하신 이유는 룻이 전혀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녀가 영웅적인 일을 할 거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좀더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 혹은 엄청난 은사를 받은 목회자가 나타나면 교회가 부흥하고 기독교가 흥왕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 기대가 계속될 때 오히려 진정한 부흥과 기독교의 흥왕은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영웅적인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반대로 영웅적인 사람을 기대하고 추종하고 있으니 엇박자가 납니다. “다윗같은 사람도 있지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다윗이라는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도구였습니다.

그런 해석의 근거가 사실 룻기에서 비롯합니다. 룻기는 오늘 읽은 5절에서 완전한 절망을 줍니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주인공이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시작하자마자 5분 안에 다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시청자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갈까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영웅시대의 완전한 종말입니다. 영웅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위대한 신앙인이 나타나서 이 세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세속 역사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벌어졌던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있었습니다. 기사들이 중심이 된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끝낸 사람이 다름아닌 잔다르크입니다. 잔다르크가 관련된 세부적인 것은 해석이 필요하지만, 대략적인 면에서 보자면 기사가 아닌 여인이 기사들의 전쟁을 끝내다는 의외의 결말을 알려줍니다.

절망이 주는 소망

영웅 시대는 숨은 영웅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마무리됩니다. 룻기가 그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우울하게 시작된 새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에 숨은 영웅입니다.

2019.07.14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앵콜)

2019년 07월 14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13:1-2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편으로 가면 배다리 호수가 있고, 그 호수 뒤편으로 눈에 띠는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웅장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배다리 호수가 산책로를 잘 꾸며놔서 사람들이 산책을 하러 자주 나오고, 도서관도 있어서 학생들도 많이 다닙니다. 도서관 맞은 편, 산책로 바로 옆에 있으니까 매우 좋은 위치입니다. 그 건물이 무슨 건물이냐면, 하나님의 교회 건물입니다. 이단교회 건물이 아주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위치가 좋아서 그런지 제가 지나다니면서 보면 고급차가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그 교회를 지나가면 위축감이 느껴집니다. 이단교회라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신천지 때문에 교회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교회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신천지 때문에 교회에 새로운 성도가 오는 것을 무조건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신천지가 침투할까봐 새로운 성도를 경계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작은 교회는 신천지가 관심이 없어서 문제가 안되는데, 노회 큰 교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택역에서 흰 티를 입고 복음성가 비슷한 걸 입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선천지였습니다. 밝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전도하는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

이단이 이단이라고 해서 무시했고, 스스로도 움츠러들어서 몰래 전도했는데, 이제는 뒤바뀌어서 대놓고 전도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큰 틀에서 보자면 정통 교회가 권위를 잃은데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가 권위를 잃으니까 이단이나 정통 기독교나 그게그거다 생각하게 되고 기독교인도 명분을 잃었습니다. 이단도 정통 기독교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제가 생각하는 것은, 정통 기독교가 실수한 일이 무엇일까? 입니다. 번영주의, 힘으로 찍어누르려는 전도법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도법이 잘못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큰 교회, 건물을 보여주면서 웅장한 건물로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교회 건물이 전도 방법이다. 예배당을 잘 지어놓는 것이 가장 좋은 전도법이다 라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웬만한 정통교회 예배당보다 크고 멋있는 건물을 지은 이단교회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쁜 의도로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에서 십 여년 전에 했던 것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할 수 없어요. 큰 예배당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예배당을 지었고, 웅장한 건물은 하나님의 은혜고 복받은 증거라고 줄기차게 말했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우리는 외형적인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츤 건물, 많은 사람들의 지지, 인기, 명성, 평판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통교회에서 주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실 때, 제장 중 하나가 예수님께 예수님 이 건물 멋있지 않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본문 1절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예수님이 맞장구 쳐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치가 없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맞장구 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뚤어진 분이 아니였습니다. 이게 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절

굉장히 섬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웅장한 건물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AD 1년입니다. 40여년 후인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수살렘을 침략해서 성전을 파괴하고 지역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모든 건물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람들이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때가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초기입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게 1948년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정부가 수립할 때 모였습니다. 그 오랜 세월을 민족으로 남았다는게 기적입니다.

어쨌든, 성전이 다 파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초고층빌딩 들어가시면 위축되시잖아요. 엘리베이터도 초고속입니다. 명품매장도 있고, 차들도 많이 다니고, 주차장도 넓고, 어떻게 이런 건물을 만들 수 있을까? 감탄하게 합니다.

일반 건물도 위축감을 주는데, 종교 건물은 얼나나 위축감을 주겠습니다.

분당의 요한 성당, 서울의 명동 성당만 봐도 얼마나 웅장합니다. 그런 건물만 봐도 종교심이 우러나는데, 유럽의 대성당들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종교심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물 안에서 미사가 드려질 때, 수준 높는 성가대가 단정하게 예복을 입고, 성가를 부르면 없던 종교심도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런 종교심을 깨뜨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종교심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굉장히 강하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니네들 그런 것 의지하지 말아라. 그런 식으로 생겨난 종교심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시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어요. 약간 방향은 다르지만, 무엇이냐면, 엘리트주의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공부를 잘해야 한다. 신앙인이 높은 지위에 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걸 보고 교회에 다니게 된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트주의도 좋은 의도지만,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이걸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웅장한 건물도 있고, 평판있는 사람도 있고 그래야 전도도 되고 믿음도 생겨나지 않을까?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건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단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사회에서 비난을 받으니까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고, 목회자가 공격을 당하니까 걱정을 하고 기독교의 위기라고 말씀하시는데,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위기 아니니까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비난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목회자가 안 되려고 할 테니까. 목회자는 그렇게 화려한 직업이 아닙니다. 화려함보다는 화려하지 않은 경우가 99%입니다.

교회도 비난을 받는데, 비난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이익단체처럼 되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고 어거지를 부립니다. 사회전체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고난받을 강해졌고, 비난받을 때 정결해졌습니다. 교회가 비난을 받는다고 걱정하거나 겁을 내는 것은 그 애정은 감사하지만, 불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잘모르고 하는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에 대해서 칭찬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꺽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 눈에 보이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존경하십니까? 젊었을 때는 성공한 사람들 존경하잖아요.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게 존경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니까 존경심이 사라졌습니다.

불법과 사기를 서슴치 않고, 경쟁자를 꺾으면서 세운 왕국이더라구요.

경험이 쌓이다보니까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존경스럽더라구요.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속에 남는 사람은 생각을 깨우쳐준 사람이더라구요. 제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비신앙으로는 백낙청교수가 있고, 신앙인으로는 마틴 루터 킹, 앤드류 머레이, 로이드 존스 같은 분이 있습니다.

백낙청 교수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평론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사랑의 힘이라는 설교로 생각을 깨우쳐 주었고,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라는 책으로 마음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다들 진리의 한 조각을 가기고 있다가 전달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본질

시간이 지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낡아지고 희미해집니다. 썩어집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변치 않는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들의 사상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때로는 엑기스를 먹으면 맛을 못느낍니다. 희석된 것을 먹어야 맛을 알게 됩니다. 커피를 먹는데, 처음에는 믹스커피가 그렇게 맛있더라구요.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야 원두커피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진리의 핵심은 뭐냐면 대속의 사랑입니다. 대속은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살면서 왜 힘들었냐면 대속을 실천하기 싫어서 힘들었습니다. 아내가 잘못한게 명백하면 기가 삽니다. 니가 잘못했잖아.

아무리 고상한 척 하는 사람도 대속은 실천하지 못합니다. 니가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냐. 니 잘못은 니가 해결해라.

대속은 어렵습니다. 인격이 돼야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이냐면, 대속의 제사가 드리지는 곳입니다. 동물이 대속 제물로 죽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이 대속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건물을 보았잖아요. 인간적으로는 얼마든지 이해가 됩니다. 제자들은 성전에서 인간이 지은 건물의 웅장함과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봄으로써 생겨난 종교심에 들떴습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인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종교심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 성전에서 보아야 할 것은 웅장한 건물과 그 건물로 보고 생겨난 종교심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대속을 보았다면 마음이 들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쁜게 아니라 슬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쓴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왜냐하면, 대속은 우울하고 고민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으려고 할 때 우리는 기쁜게 아니라 슬프로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복받고 잘 살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제가 아쉬운 점은 이것입니다. 정통 기독교가 잘 나갈 때 이걸 가르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정말 잘 나갈 때 많은 웅장한 예배당이 세워질 때 건물에 건물이 복받은 증거라고 가르치지 말고, 대속의 사랑을 보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말입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부침이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도 그렇고 이단도 그렇습니다. 잘 나갈 때가 있고 쇠퇴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건과 건물들의 운명입니다. 잘나가는 이단들도 쇠퇴할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고 감동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이것이 참된 진리라고 깨달은 사람은 외형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기독교를 믿은 사람은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외적인 사건, 건물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보게 됩니다.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 초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겉보기에 위대해 보이는 어떤 것들을 보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성전을 보고 느꼈던 그 감탄, 예수님은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거 무너질 거야. 무너질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위대한 것들을 보고 믿음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을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비난하고 욕할 때가 오게 됩니다.

대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존엄성을 잃을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지능 높은 동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류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대속의 사랑이야 말로 인간의 정신세계에 들어온 하나님의 보석같은 선물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늘의 신비입니다.

2019.05.12_우리는어디를 향해 가는가?

2019년 05월 12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03

(신 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줄 요약]

5월입니다. 2019년이라는 해가 낯설다가 이제 조금 익숙해졌습니다. 날씨도 풀리고 새해에 가졌던 의욕도 아직 남아 있어서 열심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좋은 시간입니다. 올해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다면 이제 몰입해서 그 일을 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에 몰입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입니다. 방향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심히 일했지만 불필요한 일을 하는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가 비슷한 상황에서 설교된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광야 40년을 요약한 설교집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에 두고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내용입니다. 목적은 제가 좀전에 말씀드린대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광야를 지나왔는데, 그 광야를 지나 온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우리가 해 왔고 앞으로도 할 것인데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지나왔습니까? 우리가 지나온 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개요]

##1.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

1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적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목적이 있는 걱 여행이고, 목적이 없으면 방황이라고 합니다.

창조론은 목적론적 세계관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에 있는 물건은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건 어떤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목적은 성공과는 다릅니다. 성공은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고 번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적은 있어야 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청소를 하다보니까 못보던 것이 떨어져 있었는는데 작은 나사못이 이었습니다.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버렸습니다. 나중에 아이 장난감 자동차를 보니 건전지를 덮고 있는 플라스틱판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사못이 풀려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사못이 작은 것이라서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나사못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수퍼 컴퓨터 첨단 신세품이라도 값싼 부품이 필요합니다. 작은 부품이 없으면 고장을 일으킵니다. 비싸고 안 비싸고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라는과점에서 보면 꼭 필요한 제품이 있습니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성공이 아니라 필요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화려한 모래성이 아니라 투박한 벽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려한 모래성은 금방 지을 수 있고 얼마든지 멋을 부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벽돌성은 더뎌보이지만, 하나하나가 쌓이면 튼튼하고 오래가는 건물이 됩니다. 우리가 조급한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방향이 올바르면 한걸음을 가도 전진이지만, 방향이 어긋나면 만걸음을 가도 헛수고입니다.

2.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이 어렵고 막막하더라도,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2절에서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3.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결론. 광야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2019.04.21_부활의 증거

2019년 04월 2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44~49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저는 교회를 몇 년 다니면서도 부활절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진짜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믿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걸 믿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분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는 않는데, 다들 그랬다니까 믿는 척하거나 하니면 그러려니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활 신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와 부활의 증인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부활의 증거 1

– 기독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첫번째 증거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입니다.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축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시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름 충성스럽고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와 좌절, 분열과 갈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현대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니 가늘게라도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질적인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뛰어난 교주가 특별한 가르침과 기이한 기적을 행해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죽었습니다. 교주가 마련한 기반 위에 뛰어난 후계자들이 세력을 키워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이 물론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로마의 사형수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할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사형수를 믿는 종교일 뿐입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최후가 비참합니다. 그런 분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한가지 가능성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거짓말로 모의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독교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맞섰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멸절하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다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10대 박해로 정리합니다. 1대 박해인 네로 황제의 박해(AD 54~68년)에서부터 10대 박해인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AD 284~305년)까지 250년 이상을 박해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이보다 심한 박해를 이토록 오랫동안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던 그들을 이토록 맹렬하고 담대한 사자들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위협과 채찍, 감옥과 고문,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열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용맹한 사자들이 되어 목숨을 걸고 증언하도록 만든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와 역동적 능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콜로세움 아기 한 사형수를 믿는 종교가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종교가 로마 제국이 멸절하려던 종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불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천년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증거 2

– 성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두번째 증거는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예언된 사건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에 관한 예언은 구약의 족장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조와 함께 잔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깨어날 것을 암시하는 부활의 신앙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무덤)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라고 예언하였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충분한 증거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추상적이거나 환상적인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17:22)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32~36)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에 던져졌던 시체가 살아났던 사례도 있다.(왕하13:20~21) 단순히 예언만했다면 어쩌다가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나야만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라고 말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리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점말입니다. 부활을 하나의 독립된 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고,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연속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기록이 이 연속적인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 필연성을 알려줍니다. 단순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거나 실제로 죽었지만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 오셔야만하고 대신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고 죽으셔야만 하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연속적인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의 증거 3- 교회

예수님 부활의 세번째 증거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을 정보습득, 지적동의, 자기확신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인다거나 존재를 확신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데 그 사실을 사탄은 더 잘 인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믿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심겨진 감사와 감격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한가지 방법 외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의 인격적인 만남은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그것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고난받으심,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적으로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의 각성은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것을 의미하지만, 그 전에 자기자신을 보는 자기성찰력이 생깁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여전히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에너지입니다.

부활의 증인이다

증인은 증인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9.03.10_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

2019년 03월 10년 주일 설교

마태복음 11:02~14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같은 예루살렘의 주류 종교인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적극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을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으로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진실한 삶 때문에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받은 존경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처럼 평판과 명성 혹은 직책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했기 때문에 얻어진 밑으로부터의 존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례 요한도 죽음을 앞둔 순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이 든 것입니다. 왜 세례 요한은 혼란에 빠졌을까요? 이유는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오해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면 바로 심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위선적 종교지도자들을 심판하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3:7~12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마 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의 뜨거운 열정과 불같은 성격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빨리 심판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면 엄청난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군사적인 메시아,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당연히 로마군대를 패퇴시키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후에 타락한 제사장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를 심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패퇴시키기는 커녕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은 한가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는 예언이 많습니다.

(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메시아의 초리시 사역과 재림시 사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메시아는 처음 오셨을 때는 구원을 가져오시고, 두번째 오실 때는 심판을 하러 오십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성경을 보면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만, 편견을 가지고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5절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이유는,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행할 사역을 정확하게 예언했고 그 일을 예수님은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신 것입니다. 내가 메시아가 맞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사역을 그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변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엉뚱한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변호입니다. 한때 세례 요한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성급한 비난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는 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칭송하던 말이 가시돋힌 비난으로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야를 기억해 주십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의 현재 모습을 보지 않고,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던 시절의 세례 요한을 추억하신 것입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거부했고, 왕궁이 아니라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이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인생을 남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위해서 변명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위해서 변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최후에 변론해 주실 분은 예수님 뿐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격을 알기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한 일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헤롯을 추종하거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헤롯을 메시아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가 대립할 때 외교적인 감각을 가지고 로마 편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성전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인 힘을 추종하던 사람에게는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위선으로 가득찬 가르침을 가르쳤지만, 엄격해 보이는 모습이 호감을 주었습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세례 요한의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의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라는 개인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 실패했다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갖는 이유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를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례 요한을 붙드는 굳건한 근거입니다.

기독교는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용서받고 스스로 구원 받는 셀프구원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물론,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기 믿음을 믿는 믿음주의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탄원이고 요청일 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에 근거합니다.

R.C. 스프롤도 구원의 확신이 유익하지만, 구원의 확신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합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좁은 의미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동시에, 넓은 의미의 구원, 즉, 그 전후의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후쿠마의 가르침은 저의 오랜 의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주류에 속한 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처럼 위선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하지만 거룩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강조하지만 셀프 구원이라는 인본주의를 강화할 뿐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면서 입에 거짓이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류 종교인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 또한 불의한 자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의를 추구함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헌신과 그들이 변심할지라도 그들의 광야를 기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광야를 기억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언제나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께 매혹되는 것이고 매료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8.12.25_[성탄절] 거룩한 낭비

2018.12.25 성탄절

본문

마태복음 01:21~23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현대인의 두려움 – 낭비

성탄절하면 별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 박사에 관한 말씀도 그렇고, 누가복음에서 밤새 양떼를 지킨 목자들도 그렇고 둘다 별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생각하는 말이 있습니다. 칼 세이건이라는 미국의 천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64억 km 떨어진 곳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을 보고 한 말입니다. 그 사진에는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에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는 말입니다.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우주에 지구만 있다면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낭비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마음 먹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칼 세이건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낭비를 싫어합니다. 낭비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동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랜드 사목을 할 때, 이랜드에서 강조한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줄임말로 ‘인, 지, 낭’이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 낭비제거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 중에서 세번째 낭비제거가 나머지 두가지에 비해서 한단계 격이 낮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인재경영, 지식경영은 거창한 것 같은데, 낭비제거는 좀 쪼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착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낭비제거를 위해서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작은 낭비에는 신경을 안쓰는 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기업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조금만 낭비를 제거해도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낭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국가든, 학교든, 가정이든 무언가를 낭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노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낭비하지 말자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낭비의 역설

낭비를 반대하지만, 낭비에 관한 두 가지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낭비하지 않느려고 하면 더 낭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 청년이 있었습니다. 깜깜해서 스마트폰 불빛을 비추고 일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헤드랜턴을 잃어버리고도 하나 더 달라는 말을 못했답니다. 2인 1조로 일했으면 컨테이어 벨트를 비상멈춤 해줄 수 있었는데, 그걸 해 줄 사람이 없었서 숨졌다고 합니다. 저는 회사에서 일부러 악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회사 경영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용절감 목표를 정해주면, 그 목표 안에서 낭비를 제거합니다. 그러다보면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낄 건 안아끼고 아끼지 않아야 될 건 아끼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헤드랜턴이나 2인 1조 작업에 드는 비용을 줄이려다가 더 큰 비용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하루만 작업이 멈춰도 헤드랜턴이나 인건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낭비하지 않으려다 더 낭비하게 된 셈입니다.

낭비에 관한 또하나의 역설은 낭비인 줄 알았는데,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대부분 에펠탑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에펠탑은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습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세계 박람회의 출입 관문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높이 324m로 81층에 해당합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 골목길로 다녔다는 소설가 모파상은 탑 안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는 그곳이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1892년 미국에서 출판된 한 문서(윌리엄 왓슨, <파리 만국 박람회: 토목공학, 공공 토목 공사와 건축>)는 에펠탑이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도시 미관을 위협하고 있’으며 탑을 ‘철판으로 엮인 역겨운 기둥의 검게 얼룩진 역겨운 그림자’라고 폄하했다. 이 문서에는 프랑스의 저명인사들이 적잖게 서명했는데 그중에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도 끼어 있었다.

백 여년이 지난 지금 낭비의 상징이었던 에펠탑은 파리의 자존심으로 변했고, 매년 수 백만 명이 방문하는 유료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에펠탑 뿐만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이익이 된 예는 많습니다. 고기집 종업원이 주인이 미워서 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손님들에게 고기를 막 퍼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망하기는커녕 장사가 더 잘됐답니다.

낭비와 사랑

그래도 낭비 자체가 싫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를 막으려다가 더 큰 낭비가 생길 수 있고, 낭비가 이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눈 앞에서 낭비가 일어나는 건 싫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확실한 이득을 근거로 낭비를 합리화하지 말라, 낭비는 나쁘고 말합니다.

그런데, 낭비에 관한 특히한 예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자고 할 때는 한 단어가 빠졌다는 점입니다. 즉, ‘낭비하지 말자’는 말 앞에 ‘나말고’가 숨어있습니다. 남의 낭비에 관해서 죄악시하는 사람들도 자기 낭비에 관해서는 관대합니다. 원가 절감, 낭비 제거를 강조하는 경영자도 양복을 수 백만원 , 시계도 수천 만원, 자동차는 수 억원 짜리를 구입합니다.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고 항변하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낭비가 분명합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자기는 낭비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남이 낭비하는 것은 싫지만, 나는 낭비하고 싶는 욕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낭비의 결과입니다. 어렸을 때 평상에 누워서 별을 본 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은 일, 이른 새벽에 산책한 일, 가족들과 중국 여행 가서 거리를 걸었던 일,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일, 성탄절에 마트에서 아이들 선물을 샀던 일 등.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비생산적인 일 투성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낭비의 기억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었답니다. 그런데 예상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요한 인생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말했다.

이를테면 어느 해변에서 저녁 노을을 감상하던 순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린 일, 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일, 예정에 없이 1박 2일로 미지의 장소로 짧은 여행을 간 일 등을 꼽았다. 결혼이나 사업 성공, 자녀의 성취, 혹은 유럽 일주 여행 같은 큰 일들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에 새겨진 순수한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생산적인 일, 혹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인 일 다시 말해서 낭비에 가까운 순간을 떠올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낭비한 일을 아름답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기꺼이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는 낭비를 허락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 먹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지출입니다. 담배 피는 사람에게도 담배는 낭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지출입니다.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당연한 지출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지만, 스스로는 낭비라고 생각조차 못합니다. 또 사랑하는 연인, 가족, 자녀에게 낭비합니다.

낭비에 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낭비할 수 있는 대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다.”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낭비

하나님은 왜 광대한 우주 공간을 낭비하면서 수 많은 별을만드셨을까요? 그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칼 세이건이 보기에는 그 불합리가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엄청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정도 공간 낭비는 기꺼이 감사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큽니다. 옛 사람들은 별이 천장에 보석을 매달아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의 스케일이 그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우주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찬란한 별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보다 더 큰 낭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당은 얼마일까요? 무한대입니다. 현재 인간 중에서 일당이 가장 높은 사람은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입니다. 일당이 무려 2억 5천만원이랍니다. 한 번 축구를 할 때마다 2억 5천만원을 받는 축구선수가 최저임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낭비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일당이 아무리 높아도 무한대에 비하면 0에 수렴합니다. 0에 수렴한다는 말은 0이라는 말입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최고의 낭비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고의 낭비가 일어난 날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그 가치를, 그 능력을 한 인격 안에 제한하셨습니다. 즉, 낭비하셨습니다. 왜 이런 낭비를 감행하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처럼 말할 수 없는 무한대의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구속사에서 구속은 잡아가둔다는 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값을 지불해야 할까요? 수억원, 수백 억, 수천 억 아니요, 무한대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하면 지구와 우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의 지혜를 왜 하나님의 능력을 낭비하십니까? 왜 인간을 구원하는데 그렇게 낭비를 하십니까?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다른 데 쓰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제 자신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 제 아이들을 보면, “하나님, 하지만 저를 위해서는 낭비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서도 우주와 과학을 생각하면 신앙이 약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확고하게 들어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직행통로입니다. 신자는 내 안에 계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확고하게 연결된 사람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려고 자기 확신을 가지지 말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을 명확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사실 ‘거룩한 낭비’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입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인데 어쨌든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구절을 택해서 거룩한 낭비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낭비는 바로 오늘 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무한한 낭비를 감행하신 성탄절에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낭비가 우리를 살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배도 낭비일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낭비를 알기에 이 자리게 왔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하는 낭비는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것입니다. 낭비를 합리화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있는 대상을 위해서는 거룩한 낭비를 실천해 봅시다.

공짜

박호현(초등학생)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가시는 것 공짜

말- 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는 보는 것 공짜

나이 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초등학생 시 “공짜”.jpg 사진

예배 장소 변경 안내(2018년 9월 16일)

미리 알려드린 대로 2018년 9월 16일 주일예배 장소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주 예배 장소는 평택 뉴코아 아울렛이 아닙니다.

  • 장소 : 고덕 두란노교회
  • 시간 : 오전 11시
  • 주소 : 평택시 고덕면 고덕로 33 / (구주소) 평택시 고덕면 해창리 211-2
지도 크게 보기
2018.8.18 | 지도 크게 보기 ©  NAVER Corp.

2018w35_인생의 계절을 섭리해 주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섭리의 하나님,
태풍 ‘솔릭’이 지나쳐 안도하던 사이에 폭우가 이 땅을 덮었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위력을 실감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왔습니다. 
 
이번에 내린 폭우는 여름이 쉽게 물러가지 않으려고 고집부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계절도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머물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변화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계절과 날씨를 섭리해 주시옵소서.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결실하는 가을이 찾아오듯이 저희 인생도 무더위가 지나고 결실하는 가을이 찾아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변화하는 세상에 살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물질만능 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물질보다 소중한 그리스도를 신뢰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새로운 일을 맞이할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피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화를 주도하시는 주님을 늘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주의 길을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화해와 이해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되 다른 사람의 신념 또한 존중는 예의를 갖추게 하시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되 오기와 억지가 아니라 근거를 제시하여 설득하는 수고를 감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제 안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돈이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빈부 격차를 줄이고, 청년 실업, 조기 은퇴, 노인 빈곤 등의 문제도 지혜롭게 해결하는 사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평택 뉴코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택 뉴코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게 하시고, 좋은 소문이 퍼져 매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보람과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2018w31_지구 온난화를 회개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신실하신 하나님,
햇볕이 따갑게 피부를 찌르고 순식간에 땀이 솟아납니다. 근래에 찾아보기 힘든 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이유는 견딜 수 있는 능력 또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회개하기 원합니다. 올해 기록적인 더위는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오랜 시간 동안 태양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해서 일정한 온도를 만들어 주셨지만,  저희는 환경을 오염시켜 온난화를 일으켰습니다. 
 
주님께 세들어 사는 지구를 깨끗하고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잘못을 회개합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한 개발을 방관한 잘못을 회개합니다. 환경 오염에 둔감했던 마음을 회개합니다. 신음하는 지구를 잘 보살필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열대야로 인해서 잠 못자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충분히 휴식하지 못하고 일터로 나아가오니 피로로 인해서 사고가 나지 않게 보호해 주시고, 몸이 약한 사람들과 회복 중인 사람들의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운전, 택배, 우편, 배달에 종사하는 분들과 외부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이 안전 수칙 대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시옵소서. 전국민이 폭염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배려하여 큰 사고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주시옵소서. 
 
저희는 세상은 잠시 있다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열심히 살되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같이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그 이후에 살게 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283 마음이 상한 자를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정체된 남북 관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남북한과 미국 , 중국이 연내에 종전 선언을 하고 평화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관계 당국 관련자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사회가 남녀 대립, 노사 대립 등 갈등과 분열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고, 폭력은 폭력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물러나듯이 폭력을 이길 힘은 사랑에 있습니다. 
 
두려움과 비겁함을 포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문제를 끌어안고 진정으로 변화를 일으키려는 용기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경제 안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최저 임금 인상으로 인해서 편의점을 비롯한 영세 사업자들의 부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도록 경제 관료과 해당 부서가 속히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적절한 지원과 보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평택 뉴코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택 뉴코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게 하시고, 좋은 소문이 퍼져 매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보람과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295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2018w29_그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은혜의 하나님,
땀에 젖은 몸을 말려주는 시원한 산들바람같은 은혜를 사모합니다. 달궈진 공기를 식혀주는 소나기같은 임재를 간구합니다. 예배로 주님께 나아가오니 저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더위를 피할 그늘이 무척 고마운 계절입니다. 그늘은 아름드리 나무가 한낮의 뙤약볕을 대신 맞아준 대가입니다. 저희가 그늘의 고마움을 아는데 그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나아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이 더워 하루가 버거운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시옵소서. 마음과 환경에 짓눌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뜻밖의 선물을 보내주셔서 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이름없는 풀들이 땅 속 생수에 뿌리를 내리고 더위를 견딥니다. 저희도 주님의 말씀에 뿌리내리고 여름을 극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일 신선한 생수를 저희들 영혼에 보내주시고, 소나기같은 은혜를 모두에게 부어주시옵소서.

경배와찬양 : 225 우리 함께 기도해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 사회의 화합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남녀 대립을 부추기고 혐오스러운 행동에 앞장서는 극단적인 여성 단체의 행동을 제어해 주시고 건전한 세력이 여성 운동의 주도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화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소서.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고, 폭력은 폭력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빛이 들어와야 어둠이 물러나듯이 폭력을 이길 힘은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제 안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최저 임금 인상으로 인해서 편의점을 비롯한 영세 사업자들의 부담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도록 경제 관료과 해당 부서가 속히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적절한 지원과 보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난민을 위해 기도합니다.
제주도에 체류 중인 예멘 난민들에 관한 난민인정심사가 진행 중입니다.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해 봅니다. 또 입장이 바뀌었을 때 어떤 마음일지 생각해 봅니다.

난민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할까 염려하는 지역 주민의 우려를 감안하여 관련 기관이 법과 절차에 따라서 바르게 판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전후 사정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평택 뉴코아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택 뉴코아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게 하시고, 좋은 소문이 퍼져 매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보람과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과 잃은 자를 향한 긍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와찬양 : 295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w15_겨울을 이긴 꽃들이 신비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마음을 실어 소리 내 읽어주세요.

섭리의 하나님!
싱그러운 벚꽃 가득한 길을 걸어 예배의 자리로 나왔습니다. 활짝 핀 꽃은 추위를 이긴 생명이 내는 기쁜 웃음소리 같습니다. 이렇게 여린 몸으로 겨울을 이겨낸 저들이 신비합니다.

이 부활의 계절 4월에 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연약한 우리가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힘을 주십니다. 슬플 때 우리를 위로하시고, 기쁠 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언제나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 영혼에 넣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려고 우리를 세상에 두셨으니 흔들리지 않고 주님 가신 길을 가게 하소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마음속 그리스도의 영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섭리를 늘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하루를 살되 영원을 바라보게 하시고, 최선을 다하되 여유를 갖게 하소서. 사명을 위해 살아갈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하소서. 주님의 일을 주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환경 오염, 미세 먼지, 쓰레기 문제에 관해 기도합니다. 그동안 파괴적인 개발과 무분별한 쓰레기 배출을 계속한 대가를 비싸게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깨끗하게 보존하지 못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각자에게 매우 적은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모여 전 지구를 신음하게 했습니다. 작은 죄가 모여 큰 비극을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을 깨끗하게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하기 원합니다. 더 늦기 전에 불필요한 포장을 줄이고,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며, 환경 보존을 위한 제도를 만들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소망으로 가득 찬 봄을 맞이했습니다. 이 봄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 주시고, 우리도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2018.02.25_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13:10~17

2018년 02월 2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한줄 요약]

복음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드러냅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두번째 주간에는 이사야서가 인용된 마태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 비싼 선물이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간절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사순절 묵상을 하고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이유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어떤 면에서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항상 문 앞까지만 가도 “어서 오십시오”하던 식당이 어느날 갑자기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분위기로 바뀐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복음은 쉽다, 믿음은 단순하다, 구원은 공짜다”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듣는데, 반대의 말씀도 성경에는 많습니다. “복음은 어렵다, 믿음은 복잡하다, 구원은 비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 정확하게 의미를 알고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악하게 살다가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아무하고나 결혼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면서요? 왜 사람 차별합니까?”라고 반발한다면 그 반발하는 사람이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닙니까? 평등하다는 말이 동등한 결혼 상대자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결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아무나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합당한 조건을 갖추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악하게 살다가도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구원는 손쉽게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의 결혼하는 것은 원하기만 하면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속된 말로 ‘구원은 싸구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주보를 보십시오. 두란노에서 나온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라는 책에서 스캔한 그림입니다. 제가 주보에 싣고 있는 것도 이 책입니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너무 비싸서 사람들이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싸구려 물건은 받기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너무 값진 물건은 아무나 주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줄 사람을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주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1. 10~12.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예수님이 비유로 진리를 가르치신 이유는 재미를 위한 목적도 있고, 보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보는 것에 빗대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미 설교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복음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는 의도입니다. 비유는 잘 생각하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싫어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수동적이고 간절하지 않은 사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설명을 낯설어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려고 하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최대한 쉽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셨을 거야. 어렵게 생각 안해도 네네만 계속하면 구원받을 수 있게 말씀하시는 분이야”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전화로 보험 가입할 때, 형식적으로 설명을 듣고 ‘네, 네’만 해주면 큰 문제 없이 보험에 가입되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되었습니다. 다른 본문을 볼 것 없이 오늘 본문을 보면 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복음을 믿겠다고 하면 구원을 주시는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네, 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참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참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2. 13~15. 보아도 보지 못하게(반어법)

우리가 두 번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싸구려’처럼 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13: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 진정한 의미를 숨기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복음에 대해서 잘 아는데요?”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질문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드린다고 생각하시죠? 하지만,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죄에 대한 각성을 체험하셨습니까?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조금의 변명도 없이 인정하십니까?”

제가 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유신론자에 불과합니다. 즉,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은 하나님이다” 정도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도 대단하지만 그 하나님과 확실하게 연결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성경 속의 인물이 아니라 살아 숨쉬고 개성과 인격을 가진 실체로서 영혼에 확실하게 조명됩니다. 그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해 주는 것을 느낍니다. 단순히 유신론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압니다.

3. 16~17. 너희는 복이 있다

반대로 복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똑똑하지 않고 재산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간절함과 열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시면 그 의미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예수님께 알려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합니다. 그들은 실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감싸주셨습니다. 끝까지 그들을 붙드셨고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왜 그들에게는 복이 있었을까요? 복음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불한 댓가가 구원을 받기에 턱 없이 부족했지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정도가 되지 못했지만 구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등가 교환이 아닙니다. 즉, 산 게 아닙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던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비싼 선물’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해도 구원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추구할 때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홀연히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습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하려고 하는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그래도 구원을 살 수는 없지만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3:7~14]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결론]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라 비싼 선물입니다. 주면 받고 안주면 말겠다는 태도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자, 즉,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비싼 선물을 주십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비싼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댓가를 치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를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을 두려움 없이 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길 끝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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