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w02_지혜와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소망의 하나님,
선물로 주신 첫 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마침 내린 눈은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하나님의 박수처럼 생각됩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그것이 쌓여 올 한 해가 지난 해보다 더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올 해는 경제적으로 소망을 회복하는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기 침체, 청년 실업, 조기 은퇴, 직업 불안 등 경제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국민들이 좌절감으로 인해서 도박, 주식, 가상 화폐 등 위험한 투자에 나서지 않게 하시며, 정당한 노동을 통해 얻은 수익에 자부심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구하오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좋은 기회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시옵소서. 실수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력을 주시고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는 긍정성을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어울리게 하시고 악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하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다행히 북한이 태도를 바꾸어 선수단, 임원,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올림픽을 위해 내려온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지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계기를 갖게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여 주시고, 사회주의 독재 체제를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종식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고통받는 주민들, 각종 수용소 수감자들, 그리고 지하 교회 교인들이 하루 속히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과도하게 오른 물가가 보도되면 올림픽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관련 사업자들이 적절한 이윤만을 추구하게 하시고, 돌아선 국민들이 다시 올림픽을 응원하도록 마음을 다독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평창 동계올림픽이 우리 나라와 세계의 기쁨과 평화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우리 나라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예수님께 고정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뜨거워지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14일 이사야 55:01~13, [신년]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는 기회

다른 설교

2018.01.14_[신년]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는 기회

이사야 55:01~13
2018년 01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55:1~13

[핵심 구절]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줄 요약]

인생에서 기회는 지속적으로 오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요]

새해부터 가상화폐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누가 얼마 벌었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등등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고 초조해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0. 기회는 계속 옵니다

지금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이라고 해서 인터넷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산업 국가의 주식 시장이 급속한 상승 한 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이다. IT 버블, TMT 버블, 인터넷 버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관련 기업 주식이 폭등해서 한 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그 전으로 돌아가보면 강남 개발을 시작하던 70~80년대에 부동산을 가지고 한 순간에 부자가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회는 주기적으로 계속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복기를 했다가 다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1~5. 기회는 내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만날만한 때에 여호와를 만나라고 하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할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불신이 깊던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미리 예언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께 나오라고 초청합니다.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잘 준비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시간이 없고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큰 발전을 이룬 강의가 그런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모든 강의가 다 도움이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식이 쌓이니까 도움되는 강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 강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저와 인생의 교차점이 많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2. 6~9. 하나님이 더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수는 고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으면 하수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서출판 열림원, 1998)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갈 중요한 기회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10~13. 하나님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앞으도 또 옵니다. 크고 작은 기회들이 계속 올 것입니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잘 준비하고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흘려보내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돈 버는데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좀더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의 성품에도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좀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복음을 가르치신 이유도 비슷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어떤 옷을 입고 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기회가 옷을 갈아입고 오더라고 알아보는 시각을 갖추자

2018.01.07_[신년] 새로운 시대가 오는 방식

이사야 40:01~11
2018년 01월 07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과거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십니다

[개요]

신년입니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느라 바쁠 때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셔야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0.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계절로는 봄이 왔지만 인생살이는 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비슷하게 새해가 왔지만, 새해같지 않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는 달력이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도 새해를 가져도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새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인생의 새해는 하나님만이 인생의 새해를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생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이 어떠게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1~3. 노역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 읽은 이사야 40장 2절을 보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겨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한다고 미리 선고를 하셨읍니다. 여기서 ‘노역의 때’는 70년 포로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해는 무작정 오지 않습니다. ‘노역의 때’를 채워야 옵니다. 그 기간을 바르게 보내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가끔 범죄 생활을 하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들은 경험이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면 그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범죄를 행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성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공부하고 청교도와 조직신학을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이게 성화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길에 들어 서기는 했지만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지은 존 뉴톤이 노예 상인이었잖습니까?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도 범죄 조직에서 있다가 회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 뉴톤은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 나라 범죄자들과 다르게 일생동안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존 뉴톤은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글로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약 1년 6개월 정도를 깊이 회개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존 뉴톤의 편지]

선생님, 그 당시의 나를 보실 수만 있다면…죽음의 밤 속에서 나는 고독 가운데 우수에 담겨 암석 위에 나의 셔츠 하나를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젖은 땅 위에 그것을 놓아서 잠자는 동안에 내 등을 말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불쌍한 그 모습을 보실 수 있다면…배에 딸린 보트 하나가 그 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만 숲속으로 도망쳐 버려서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었습니다. 나의 행동, 나의 중심,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런 외적 행위들보다 더욱 어두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시다면; –사도가 언급하였던(딛3:3)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라고 말하기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피심과 감당할 수 없는 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상상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There was at that time but one earnest desire in my heart which was not contrary and shocking both to religion and reason: that one desire, though my vile licentious life rendered my peculiarly unworthy of success, and though a thousand difficulties seemed to render it impossible, the Lord was pleased to gratify.

그 때에 신앙과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부딪히지 않는 진지한 열망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 열망을 주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도 합당치 못한 사악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오고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산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But this favor, though great, and greatly prized, was a small thing, compared to the blessings of his grace; he spared me, to give me “the knowledge of himself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하지만, 이 호의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분의 앞으로 보여주실 자비로우심과 비교하게 되면 너무나 적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을 나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In love to my soul, he delivered me from the pit of corruption, and cast all my aggravated sins behind his back. He brought my feet into the paths of peace.

나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부패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사 나의 모든 엄청난 죄악들을 당신의 뒤쪽으로 내 던져 버리셨습니다.그리고는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This is indeed the chief article, but it is not the whole.

이것이 물론 주요한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은 아닙니다.

When he made me acceptable to himself in the Beloved, he gave me favor in the sight of others.

하나님께서 그 사랑스러운 예수님 안에서 당신에게 나를 용납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호감을 받게 하셨습니다.

He raised me new friends, protected and guided me through a long series of dangers, and crowned every day with repeated mercies.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고 여러 가지 위험들 가운데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자비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출처] Letters on His African Hardships and His Conversion by John Newton, 존 뉴톤의 아프리카시절의 고난과 회심간증

위와 같은 말을 하면, 이렇게 반발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이제는 고난이 끝날 때가 되이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 전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난이 끝나고 잘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 빗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복이 함께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신앙도 좋아지고 복도 받은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세례 요한처럼 고행만 하다가 목이 잘려 죽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2. 4~8. 그리스도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선행은총이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개혁신학의 선행 은총이 인본주의(알미니안)적인 선행 은총과 다른 점은 하나님 주도적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인간의 노력이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권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선행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나간 부분이 어디냐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방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요한의 세례’ 다음에 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하고 동일시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이 감격적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선행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각성이 강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노역의 때’가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게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으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가장 아름다운 보석만이 가슴 속에서 빛을 발할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 ‘예언’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3. 9~11. 그리스도의 시대가 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능력으로 오십니다. 참았던 화를 폭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능력, 그리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영광으로 가득찬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실 때 이 땅의 작은 권력, 영광에 취했던 사람들은 냉혹한 심판에 슬퍼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림 예수님의 겸손을 알고 그분을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주실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시면서 노역의 때를 지나시기 바랍니다.

[결론]

노역의 때를 채우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일 기도_18w1]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새로운 해를 항상 이처럼 맑고 깨끗한 계절에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온갖 더러움이 꽁꽁 얼어붙어서 한없이 깨끗해진 이 계절에 저희도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새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지혜의 하나님,
미처 다하지 못한 숙제를 남기고 떠나는 것같이 등떠밀려 또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도도하고 부지런히 흐르는데, 저희는 부족한 지혜와 어설픈 재능이 돌부리가 되어서 걸음을 비틀거리게 됩니다. 주님 부디 저희에게 지혜와 재능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시간을 앞서 나아가 여유를 갖고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또한 기도하오니 올 한 해 항상 저희와 동행하셔서 아쉬움도 후회함도 없는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충만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오래 간직해 온 소망들이 이루어지는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평창 동계 올림픽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여러 차례 도전하여 가까스로 올림픽을 유치했으나 러시아가 약물 사용에 대한 징계로 불참하게 되었고, 다른 나라들도 북핵 위협 등으로 인해서 불참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바라옵기는 대상 국가들의 정책이 변화되고 많은 나라들이 흔쾌하게 참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평창과 강원도 일대의 숙박비와 식사비가 과도하게 올라서 을림픽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관련 사업자들의 마음을 섭리하셔서 그들이 적절한 이윤을 추구하여 전세계적인 축제에 기쁘게 동참하였다는 자부심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북한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들이 더이상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과 주변 국가를 자극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핵 개발을 저지하여 주시고, 잔악한 독재가 종말을 고하여 더이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같은 대한민국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의 부흥을 내려주시옵소서.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비로소 만나는 감격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01월 08일 이사야 40:01~11, [신년] 새로운 시대가 오는 방식1

다른 설교

주일 기도_12w5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마음을 실어 소리내어 읽어주세요)

순결한 함박눈같은 은총으로 허물을 덮으소서

 

하나님,
마지막 남은 하루를 붙들고 주님 앞에 섰습니다. 이 하루를 예배로 채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새해 첫날 바라볼 때는 까마득했던 날들이, 뒤돌아보니 순간인 것 같습니다. 가끔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와보니 분주함만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2017년, 바쁘게 살았다지만 만족보다 회한이 크고, 자부심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시간들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어두운 새벽, 세상을 덮은 순결한 함박눈처럼 저희의 허물을 주님의 은총으로 덮어주시옵소서.

 

이 시간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저희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을 용서하오니,  저희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더불어 새해에는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새해에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부지런한 여유를 가지고 일년을 살아가게 하시며, 후회하지 않을 사랑으로 사계절을 물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대 간, 지역 간, 정치 성향 간 나누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시고, 주님 앞에 겸손한 민족, 주님을 향해 열심인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경제 회복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오니, 청년 실업, 영세 자영업자, 조기 퇴직과 노인 빈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국민들이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눔의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교회가 절망만 가득하던 이 땅의 소망이었던 시절의 겸손, 섬김, 열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없이 높은 예배당이 아니라 한 없이 낮은 마음이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이 됨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의 아픈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정신과 마음과 몸을 모두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매일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거룩한 치료의 기름을 부어주시옵소서.

 

영원한 소망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31일 사도행전 07:30~60, [송년] 과거를 통해 보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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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_[송년] 과거를 통해 보는 미래

사도행전 7:30~60
2017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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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한줄 요약]

스데반을 구약 성경과 과거 역사에 정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개요]

송년입니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더 알기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0.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저는 과거가 미래에 반복된다는 사실을 바둑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둑에서 지면 분한 마음에 한 판 더를 외치면서 자꾸 새로운 바둑을 많이 두려고만 했습니다. ‘내가 그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면서, 새로운 판을 두면 지금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바둑을 두게 되는데, 바둑이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지게 됩니다. 바둑을 새롭게 두더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래가 새롭지 않고, 과거의 반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엉뚱하게도 바둑 실력이 가장 많이 늘게된 계기는 새로운 판을 빨리 많이 두어서가 아니라 복기를 배우면서부터입니다. 복기란 바둑을 한 판 끝낸 다음에 지금 둔 바둑을 다시 두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난 바둑을 다시 두면서 내가 그때 왜 여기에 두었는지 생각해 보고, 상대방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달르게 전개된 것은 무엇인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바둑 실력이 늘어갑니다. 다른 사람이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기보 몇 개는 기본적으로 외웁니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도 복기를 통해서 실력을 향상 시킨다고 합니다. 요즘은 오답 노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오답 노트는 전에 틀린 문제를 따로 적어놓고 주기적으로 다시 풀어보는 노트입니다. 틀린 문제는 또 틀리기 때문입니다. 기억에서 지워진 후에 틀렸던 문제를 풀어보면 놀랄만큼 똑같이 틀립니다.

다른 측면이지만 사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이 있어납니다. 아웃도어 판매하는 매니저님한테 들었는데 등산복을 사는 사람이 또 산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등산복 한 두 벌 사면 더 안사지 않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매번 산에 갈때마다 다른 등산복 입고 가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시더라구요.

보험도 한 번 들은 사람이 또 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기 당하는 사람도 한 번 사기 당했으니까 안 당하는게 아니라 또 사기당하는 경우가 많고 이단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은 또 이단 교회를 가거나 건전하지 않은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러 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과거에 했던 일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새롭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아지 못하고 익숙한 과거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 30~53. 스데반은 과거에 정통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초창기 교회의 집사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성령에 충만했던 분이 스데반입니다. 이분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 성경, 즉 과거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내용은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기 전에 했던 마지막 설교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대하2:6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그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것이 구약 시대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구약 시대라고 해서 성전에서 제사지는면 구원을 받는게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의지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들 통하지 않고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조상들처럼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즉, 조상들도 성령을 거스렸는데 당신들도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는 단어를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성령님을 아무리 칭송해도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모욕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성령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면 됩니다.

2. 54~60. 스데반은 바울을 통해서 미래를 살았습니다

한편, 과거가 과거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열어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가장 먼저 순교한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과 은사, 그리고 인격이 너무나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과거로 묻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의 삶을 대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교회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런 상황을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내 집 마련하듯이 내 예배당을 마련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더 알아가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스데반도 그렇고 모든 분들이 번듯한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으면 무엇을 남겼을까요?

바른 믿음, 바른 생각, 바른 행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바른 믿음과 생각과 행실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집착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 믿음과 생각과 인격이 바르지 못한 것을 봅니다. 구약 시대도 그랬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우리 교회가 그냥 해산된다고 해도 남는 것이 없을까요?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건물이 아니라 계속해서 영향력을 주게 될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3. 과거를 통해 미래를 봅시다

오늘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은 우리가 좀전에 기도한 것처럼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합시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복기할 것은 철저하게 복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감옥에 넣은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현대의 이순신 장군은 또 감옥에 넣고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고 그분만이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본질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을 정립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송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과거를 바르게 성찰함으로 미래를 준비합시다

주일 기도_12w4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작아지고 작아져서 한 아기가 되시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저희는 동방의 박사들은 아니지만, 저마다 마음 속의 별을 따라 이곳에 온 순례자들입니다. 이 천년 전 베들레햄 소박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오늘 저희들 마음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오심으로, 짙은 어둠에 잠겼던 밤은 도리어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절망, 슬픔, 아픔이 깊을수록 주님이 오심으로, 그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영원히 변화될 것을 소망합니다. 저희들의 소망을 주님의 은총으로 응답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지난 주간에도 아까운 생명들이 덧없이 스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기를 잃은 부모들과 화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또한 저희가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이없이 잃지 않도록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게 하여주시옵소서.

능력의 하나님,
전쟁의 기운이 여전히 우리 나라 주변에 감돌고 있습니다. 저희는 북쪽 악한 세력과의 전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타협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최초의 선택이 되기보다는 최후의 선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김정은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속히 국제 사회의 감시 감독을 수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불어 이 겨울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시고, 지하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굳세게 지켜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그대 그리스도와 함께 누구이며, 그대 그리스도 없이 누구인가?”라는 순례자들의 오래된 질문을 되뇌이며, 비록 가진 것 없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행복한 부자가 되어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영원한 소망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17년 12월 24일 누가복음 02:21~35, [성탄절] 근원 치료를 위해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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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4_[성탄절] 근원 치료를 위해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 02:21~35
2017년 12월 2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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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개요]

성탄절은 모든 명절 중에서 가장 기쁜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의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근원을 알고 나면 성탄절의 기쁨은 훨씬 더 커집니다. 오늘은 성탄절의 의미를 알고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0. 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들은 과학 발전, 제도 개선, 윤리 교육 등을 통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들도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은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안티 기독교 운동들에도 그런 경향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는 운동이 이미 있었고 대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합니다.

대실패를 겪은 운동이 뭐냐면 공산주의 입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나라에도 큰 비극을 남겼고 지금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시작은 원래 하나님 없이 인간이 천국을 만들겠다는 이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문명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차별이 심해지는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 것입니다. 그들은 귀족과 천민,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등의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고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상에 많은 지식인, 양심적인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문제의 원인 중에 하나가 기독교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는 기득권을 변호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없어져야 할 악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천국을 만들겠다는 인본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 전무후무한 지옥을 펼쳐놓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천국을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은 지옥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1. 인간의 오류

1996년 8월 25일 <사람아! 아, 사람아!(人啊,人!)>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중국 여작가 다이허우잉(戴厚英)이 상하이 자신의 집에서 피살돼 전세계의 독자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그녀를 살해한 범인이 바로 그녀가 힘겨운 살림에도 원고료를 모아 물심양면 학업을 도와주던 고향 출신 학생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일기 기록에서 단서를 찾아 범인을 검거했는데 고향의 한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돼 후원해 주던 학생이었다. 범인은 다이허우잉이 시장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그녀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다가 그녀가 돌아오자 놀란 나머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허우잉의 삶은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치열하고 파란만장하다. 다이허우잉은 1938년 3월, 중국 안훼이(安徽)성의 작은 시골에서 3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1960년 상하이의 화둥(華東)사범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상하이작가협회 문학연구소에 배속되어 문학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1968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저명한 시인 원지에(聞捷)를 검은시인 우파로 심문하다가 그의 시에 매료됐고 결국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이 문화혁명(문혁)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그녀도 반동으로 몰려 수난을 당해야 했으며 1971년 남편 원지에는 자살하고 만다. 다이허우잉은 요동치던 시대의 비극적 사랑을 그녀의 처녀작 <시인의 죽음(詩人的死)>에서 소설화하며 작가로서의 길에 들어선다.

1980년대 초 <사람아! 아, 사람아!>를 발표하는데 중국문단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더욱 유명해져 세계 8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다. 우리나라에도 신영복 작가에 의해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인간의 피와 눈물의 흔적을 썼고, 비틀려진 영혼의 고통스런 신음을 썼고, 암흑 속에서 솟아오른 정신의 불꽃을 썼다. ‘영혼이여, 돌아오라!’고 외치며 무한한 환희와 더불어 인간성의 회복을 기록했다.”

<사람아! 아, 사람아!> 저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이허우잉의 작품은 문혁 기간 동안 자신이 경험한 치열한 삶과 그 상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인간 내면의 섬세한 감정과 문양들을 뛰어난 통찰과 냉철한 분석으로 형상화내 휴머니즘문학과 상흔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진실이 조작되어 거부 당하는 것이 일상으로 벌어지던 시대, 찢어진 사진처럼 싫긴 하지만 잊을 수는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암흑 속에서 진리를 고뇌하던 한 인간의 불꽃같은 삶이 여전히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제가 다우허우잉에 대해서 좀 길게 소개한 이유는 그가 쓴 책 ‘사람아, 아 사람아’의 제목에 이끌려서 입니다.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공산주의 지도부들의 권력투쟁의 한 모습이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이 다우허우잉입니다.

자를 대고 직선을 그었는데, 비뚤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잘 대고 그렸는데 또 비뚤어졌습니다. 다시 그려도 비뚤여졌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이 뭐냐면, 자가 비뚤여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은혜의 시작

사람에게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서 마땅히 해야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서 내 삶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신앙은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이란 분은 예수님의 사역을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마음에 관한 사역입니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찾으러 오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2:17에서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시니라”고 말씀합니다.

3. 믿음이란?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수술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수술 방법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데 힘쓰는 것의 10분의 1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기독교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21:9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설더라”고 하십니다.

[결론]

성탄절에 예수님이 나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017.12.16_예수님이 나의 새언약이 되십니다

창세기 03:01~24
2017년 12월 16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롬16:20
  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개요]

대강절에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다양한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0. 복음의 씨앗

창세기 3장은 실질적으로 성경이 시작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고, 성경의 핵심이 모두 들어있는 장 중에서 가장 처음 나온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나 장이 여러 부분 있지만,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 창세기 3장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창세기 3장에 나온 핵심을 절대 잊지 말고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제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해도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데, 영어는 앞부분을 기억하고 있어야지 뒤로가면서도 이해가 쉽더라구요. 그래서 영어가 앞부분에 대문자로 시작한다고 하는 분이 있더라구요. 비슷하게 성경도 창세기 3장을 항상 머리속에 기억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그렇게 해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의 어떤 점이 성경의 핵심일까요?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3:1~7 인간의 계약 위반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계약 위반입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 명백한 배신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의 우월한 지위는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모든 영광과 존귀를 잃어버렸습니다.

2. 2:8~21 하나님의 재계약

하나님은 사탄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다시 주지 않으셨지만 감사하게도 인간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탄의 유혹 때문에 범죄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로 주신 기회가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담의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가죽옷이라는 말은 다른 생명의 희성, 즉, 다속을 통해서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과 21절이 그것입니다. 네델란드의 개혁파 신학자 주에 게할더스 보스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쓴 성경신학이라는 책을 보니까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을 복음의 씨앗이라고 표현하셨더군요. 씨앗은 생명을 가진 가장 작은 단위아닙니까?

여자의 후손+가죽옷은 중보자+대속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대신한 누군가가 이 땅에 와서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할 것이라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좀 가볍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오래된 비유는 고도로 압축된 언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3. 2:22~24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가죽옷이라는 복음의 씨앗을 주고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이게 인간은 이 씨앗을 가지고 살면서 구원의 길을 발결해야 합니다. 이 씨앗을 가지고 생명의 싹을 틔운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썩게 내버려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 구원의 씨앗을 마치 이어달리기 선수들이 주고받는 바통처럼 전달됩니다. 복음의 싹을 틔술 수도 있고 썩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 언약이 사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이 사실들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는 일입니다.

[결론]

복음의 싹을 틔웁시다.

주일 기도_12w3

읽으면 기도가 되오니 되도록이면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하나님,
산도 들도 거리의 사람들도 두꺼운 외투를 두르고 무겁게 입을 다문, 고요한 풍경을 지나 이곳에 왔습니다. 이제 가진 것은 기다림 밖에 없는 가난한 계절에 저희는 오히려 다가오는 성탄을 기대하며 부요한 자들이 됩니다.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에 오시고, 귀족이 아니라 목동의 인사를 받으신 예수님. 그 마음을 생각하라고 이러한 계절에 오셨음을 깨닫습니다. 현대 문명의 안락함을 누리더라도 마음만은 항상 낮은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서 맥아더 장군의 기도에 저희 마음을 실어 기도드립니다.

“오, 주님! 제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정직한 패배 앞에 당당하고 태연하며, 승리의 때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이끌지 마시고, 자극받아 분발하도록 고난과 도전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모진 비 바람을 견뎌내게 하시고, 실패한 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이 깨끗하고 높은 이상을 품은 사람, 남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웃을 줄 알면서도 우는 법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도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들 외에 그에게 유머 감각을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항상 진지하면서도 결코 지나치게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진정한 위대함은 소박하며, 진정한 지혜는 열려 있고, 진정한 힘은 너그럽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그 애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 때 저는 감히 그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사랑의 하나님,
저희 안에 기도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특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한국 교회와 열방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자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 할 수 있는 전도의 열정과 가난하고 소외된 영혼들을 보살펴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성탄의 사랑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두운 세상에 참빛의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17일 창세기 03:01~24, [대강절3] 예수님이 나의 새언약이 되십니다

[다른 설교 듣기]

주일 기도_12w2

*읽으면 기도가 되니, 소리내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거룩한 기다림의 기간, 대강절에 예배의 자리에 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면서 겨울을 견디기 위해, 가로수들이 한때 무성했던 잎들을 떨구고 빈 손과 진실한 마음으로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도 그들처럼 모든 장식품을 버리고 빈 손과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쌀쌀해져가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짙어지는 것을 봅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교육이 고도화되면 곧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답답해 하는 한숨처럼 보입니다.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옵기는, 우리 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없는 사회 발전이 없고, 죄의 각성 없는 인간 행복이 없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발전과 성장 만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고등학교 실습생이 중인 현장 실습 중에 사망하고, 낚시배가 침몰하여 여러 명의 가장들이 삶을 마감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하시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이루어져 사람을 어이없이 잃는 일이 없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몸이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교회 어르신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분들의 정신을 맑게 하시고 관절을 부드럽게 하시며 모든 혈관과 세포 조직을 깨끗하게 유지해 주시옵소서. 더불어  중장년, 젊은이, 아이들에게도 주님의 건강한 생기를 매일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여 다시 우리 나라의 희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임을 깨달아 적극적으로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헌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눈덮인 겨울 들판처럼 고요하지만 그 밑에 소망의 싹을 간직한 교회들을 지켜주시고 그곳에서 진리를 사모하는 참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준비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10일 창세기 02:01~25, [대강절2] 예수님이 나를 변화되게 합니다

[다른 설교 듣기]

2017.12.10_[대강절2] 예수님이 나를 변화되게 합니다

창세기 02:01~25
2017년 12월 10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한줄 요약]

예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개요]

대강절에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다양한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0. 돈보다 소중한 것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의 힘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하지만, 돈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입니다.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사랑은 충족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그것 자체로 충족한 개념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의 파괴적인 속성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으로 이끌어갑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면,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p101) 이 선언 이후에 그는 마지막 종류의 사랑인 ‘자비’로 이끌어간다. 이 사랑은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도움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사람들이 ‘사랑’를 매우 갈망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특히 창세기 2장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언약’이라고 생각합니다.

 

1. 2:1~7 인간, 언약할 수 있는 존재가 되다

지난 시간에 저는 인간이 존귀한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존재 가치’보다 ‘관계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데 인간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자기 스스로 독립된 인격을 갖추고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2:8~20 하나님과 언약을 맺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입니다. 이것은 호세아 6:7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인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언약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가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은 일종의 ‘고용 계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조건 일을 시키신 것이 아니라 정당한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따라서 일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 ‘언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언약 위반입니다. 죽음이라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하는 위반입니다.

 

3. 2:21~25 언약은 결혼입니다

창세기 2장 후반부에 남자와 여자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언약의 최종 모습이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언약은 상호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서 합니다.

[결론]

언약의 최종적인 모습은 결혼으로 표현됩니다

2017.12.03_[대강절1] 예수님이 나를 존귀하게 합니다

창세기 01:01~31
2017년 12월 03일 주일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창 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되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개요]

인간은 무엇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존귀할까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간 중에서 더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더 귀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늘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왜 가치있고 존귀한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0. 이승엽 선수 홈런볼의 가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야구 선수가 이승엽 선수입니다. 중요한 경기마다 홈런을 쳐서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 일이 여러 번입니다. 이 선수의 홈런볼이 얼마 정도하는지 아십니까?

이승엽 선수의 600호 홈런볼의 금전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미국의 예로 1998년 마크 맥과이어의 시즌 70호 홈런볼이 300만 5000달러(약 33억원)에 거래되었다고 해요. 2003년 이승엽 선수 본인이 기록한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볼은 국내에서 약 1억여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고 같은 해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5호 홈런볼은 경매가가 1억 2500만원까지 치솟았지만 실제 거래가 성사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 이승엽 선수의 600호 홈런볼도 가치를 매겨본다면 제 생각엔 적어도 1억원은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구공의 판매가가 8천원에서 1만원 정도한다고 합니다. 원가는 여기에 못미치겠죠? 그렇다면, 야구공 자체의 가치를 1만원이라고 한다면 9천9백만원의 가치는 야구공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야구공 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구공의 가치를 생각해 봅시다. 야구공 자체의 가치, 이것을 ‘존재 가치’라고 한다면 이것은 1만원 밖에 안합니다. 하지만, 야구공이 단순히 야구공으로써가 아니라 몇 백호 홈런이라든지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갖는 가치, 다른 말로 ‘관계 가치’는 수억을 합니다. ‘존재 가치’하고는 비교할 수 없으 만큼의 가치가 ‘관계 가치’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 한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할까요?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비행기 사고라든가 교통 사고 같은 사고로 죽게되면 보험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숫자로 그 사람의 가치를 적어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든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여러분의 가족, 그러니까 부모님 혹은 자녀들이라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그 한 사람의 가치가 이 지구 아니 우주보다도 더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일단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즉, 어떤 것의 가치라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보다는 그것이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느냐에 ‘관계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응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 든가 잘났다든가 하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난 것의 가치는 그렇게 대단한게 아닙니다. 원숭이가 조금 더 똑똑하거나 잘난 것이 얼마나 더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어차피 원숭이일 뿐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난다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를 대단히 높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되고 안똑똑하고 못났다고해서 좌절해도 안됩니다. 그것이 큰 가치의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은 누구와 관련을 맺느야에 달려있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가장 가치있는 사람이 됩니다.

 

1. 1:26~28 사람이 존귀한 이유

창세기 1:26~28을 보면, 인간이 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나와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대신 다스리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관리인입니다. 관리인은 주인하고 말이 통하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고 생령을 주셨습니다.

인간도 육체는 동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양’입니다.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하나님을 닮은 부분’ 때문에 인간은 존귀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불구가 되고 치매에 걸리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도 인간은 존귀한데 그 이유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한없이 낮아져도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데서 오는 ‘관계 가치’는 그대로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 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도 존재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2. 2:17 사라진 존귀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말은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남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는 말도 안되게 낮아졌습니다. 그 말도 안되게 낮아진 가치만 해도 이정도지만 원래의 가치에 비하면 너무나도 형편 없게 되었습니다.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낮아진 사람의 존귀함을 회복시키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3. 3:15 다시 존귀하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존귀한 자로서의 가치를 되찾게 됩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그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왕도 있고 거지도 있습니다. 번영을 누린 사람도 있고 비참하게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의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었습니다.

인간들이 볼 때 성공한 삶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좇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새겨진 또다른 이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행해서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이 되자

12월 1주_다시 불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많은 계획과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한해가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나무처럼 어느덧 한 달만 남았습니다. 하오나 그 가지 위에 쌓인 첫눈같은 은총이 저희들 마음에도 내릴 것을 기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금 제 자신을 돌아보고, 너무나 쉽게 내어버린 시간들을 후회합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 주님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라는 가르침을 잊고, 불평으로 지내버린 마음들을 회개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무엇보다 깊어가는 겨울 날씨 속에 몸, 혹은 마음, 혹은 환경이 추운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주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하여 작은 불씨라도 그들에게 전해지도록 섭리해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나라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속히 악한 독재자를 멸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지하 교회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의 불같이 연단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흥의 하나님!
대강절 기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처럼 교회가 다시금 부흥을 기다리게 하시고, 목회자들과 성도가 거룩한 사명으로 불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대강절 아침, 예배를 통해서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주님을 기다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2월 03일 창세기 01:01~31, [대강절 1] 예수님이 나를 존귀하게 합니다

[다른 설교 듣기]

2017.11.27_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1~31
2017년 11월 27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요]

두란노에서 출판된 ‘제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친 아르헨티나의 목회자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매우 쉬운 말로 설명하셨는데,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천국문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할까요?
성경 시험, 교리 문제 등 어떤 것을 물을까요?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를 내지 않고 청진기를 가져와서 가슴에 대 보고 너는 심장이 뛰고 있구나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 그것은 우리 내면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도록 하려는데 있다는 점말입니다.

1. 1~7 : 지식이 아니라 생명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2. 8~20 : 다시 종이 되지 말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시 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3. 21~31 : 아브라함의 예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기도 했는데,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

내가 예수님의 생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1월 넷째 주_첫눈같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창조주 하나님!
어느새 절정을 이루던 단풍이 하나 둘 떨어지고 단풍 대신 첫눈이 빈 가지 위에 쌓인 것을 봅니다. 이 아침, 저희들의 말라비틀어진 욕심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첫눈같이 거룩한 주님의 은혜가 내릴 것을 확신합니다.

겨울의 길목에서 눈과 낙엽으로 덮인 길을 걸으며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변덕스런 사람들의 마음에 낙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위해 기쁘게 섬김을 실천하셨던 예수님처럼, 저희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지진이 일어난 포항 지역의 상황을 온 국민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놀라고 손실을 입은 영혼들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또한 한 주간 연기된 수능을 마친 수험생들의 마음도 지켜주시옵소서. 어떤 결과를 얻든지 그들이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하시고 좌절, 낙심하지 않도록 소망을 불어넣어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청년 실업, 고용 불안, 부의 양극화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많아지는데 사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저희는 사랑 없는 과학 발전과 경제 성장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먼저 저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사랑을 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재정 비리, 성적 문란, 교회 세습 등으로 손가락질 받는 현실을 회개합니다. 잘못한 목회자가 통회하게 하시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교인들도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혜롭되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1월 26일 갈라디아서 04:01~31,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다른 설교 듣기]

11월 셋째 주_빈들을 보며 기도합니다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계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풍요로웠던 가을 들판이 어느새 빈들이 되었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빈들같은 저희들 마음을 스쳐가지만, 저희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저희는 빈들이 아니라 그 위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건물, 멋진 옷,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스스로 빈들에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세례 요한을 생각하며 주님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400년 전 안락한 고국을 버리고 오직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열망으로 신대륙으로 나아간 청교도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결단이 오늘날 미국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얼마나 큰 복이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추수감사절’을 지킨 그들의 감사를 저희도 갖기 원합니다. 옳은 길을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수능을 준비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진으로 인해 시험 일자가 변경되었지만, 반석이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동요하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프거나 지각, 착각, 실수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기대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특히 몸이 아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아주신 예수님,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영혼들에게 치료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기가 저희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생기를 더욱 불어넣어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시간에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년 11월 19일 시편 50:01~23, 감사는 예배의 전부입니다

 

[다른 설교 듣기]

11월 둘째 주_성전에서 생수를 보내소서

*읽으면 기도가 됩니다.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주세요.

 

하나님,

차가운 기온은 들판의 푸름을 앗아가고 있지만, 산마다 단풍으로 물들어 또다른 아름다움을 주심을 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 오늘 저희를 불러 예배하게 하신 이 시간 스스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게 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깨어나고 성장 성숙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소망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주시옵소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권능을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 권능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처럼 내일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안된다고 좌절하지 않도록 종일 소망을 주시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절박한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공의의 하나님!
오늘도 ‘잠자는 나’ 보다는 ‘깨어 있는 나’로 살기를 원하고, ‘미워하는 나’ 보다는 ‘용서하며 사랑하는 나’로 살기를 원합니다. 항상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땅에서 참 사랑을 몸소 보이시고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처럼 주님을 본 받아 온전히 사랑하며 섬기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편지로 읽혀지는 삶을 살게 하시고, 사랑의 삶, 나눔의 삶, 섬김의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배 속에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부어주시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우리 속에 함께하심을 믿시오니 주님의 사랑 속에 거하며 주님의 구원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죽었던 모든 생물을 살리듯이 저희 안에 흐르는 성령님의 생수가 죽어 있는 저희를 살리고 나아가 저희 이웃 또한 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년 11월 12일 갈라디아서 03:06~29,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다른 설교 듣기]

2017.11.19_감사는 예배의 전부입니다

시편 50:01~23
2017년 11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한줄 요약]

아삽은 구약 시대에 이미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개요]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늘은 시편 50편을 통해서 추수감사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50편은 맨 마지막 구절이 찬양 가사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을 다 아시는 분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은 감사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독특한 시편이면서 당시 상황에서 생각하면 놀라운 시편입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시편 저자가 생각하는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0. 아삽에 대해서

먼저, 이 시편의 저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삽은 다윗의 3악사 중 한 사람(대상 5:17, 19, 16:5)으로, 다윗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고 성가대를 지휘하고 시편을 편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시편에 12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삽은 찬양팀장이었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다윗 동반자였습니다.

아삽의 첫 등장은 다윗 왕이 법궤를 옮길 때였습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에게 빼앗결다가 돌려받은 법궤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놓여있었습니다. 사울은 별 관심도 없었고 20년이 흘렀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가 거기 있는 것이 내내 속상했기 때문에 왕궁 한곳에 성막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가 성막으로 돌아오던 날, 다윗 왕은 마치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바로 그날, 아삽이 등장합니다(대상 5:17, 19, 16:5).

법궤는 레위 지파 외에는 누구도 옮길 수 없습니다. 손조차 대서도 안 됩니다. 다윗 왕은 레위 지파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뽑힌 사람들은 성막과 법궤를 지키고,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하게 된다. 레위 지파의 존경받는 어른들은 많은 사람을 추천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으로 헤만, 에단과 함께 아삽을 추천했습니다. 아삽은 찬양대에서 놋제금(구리 심벌즈)을 쳤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날, 아삽과 찬양대는 환호성을 지르는 이스라엘 군중 사이로 행진하며 연주를 했습니다. 법궤가 안치된 후 레위 지파로 꾸려진 찬양대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찬양대장이 바로 아삽이었다.

아삽의 역할은 다윗 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때도 아삽과 찬양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금과 비파, 수금, 나팔을 연주하는 제사장만도 120명이나 됐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차서 제사장들이 서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아삽 자손들은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에 등장합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는 모압과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었습니다. 그때 무기력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상기시키며 용기를 북돋우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이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됐을 때는 성전이 황폐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전 왕들이 성전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과 함께 성전 문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들도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귀환하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훼방꾼들의 방해 공작을 견뎌 내고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했을 때, 성벽 봉헌식의 나팔수로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 역시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실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맡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속도에 발맞추는 영광스러운 삶이었고, 그의 자손들 역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때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습니다.

1. 1~6 : 하나님의 재판정

그런 아삽이 쓴 이 시편은 예언적인 시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재판정을 열고 심판을 준비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재판정을 여시는 모습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2:19에서

[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라는 말씀처럼 천사들과 함께 아합 왕을 심판하려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재판정에 참가해서였습니다.

[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의 재판정 모습이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4장입니다.

[4:2~4]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나 나라를 심판하실 때 즉흥적,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 하십니다.

2. 7~21 : 두 가지 기소 제목 – 형식적 신앙과 위선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죄를 지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시가 쓰여진 3천년 전에는 잘 이해가 안되었을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재판정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검사가 재판장 앞에서 죄인의 죄를 들추어내고 그래서 어떤 벌을 받아야 한다고 기소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죄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죄인데,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죄인데, 위선으로 사람들을 대한 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절을 보면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제물을 물질적인 면에서 욕심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4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감사’하는 마음이 제물에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22~23 : 감사로 제사 드리라

세 번째 부분은 결론이면서 권면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구약 시대였기 때문에 제사의 형식을 매우 중요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담한 주장을 했다는 것은 아삽이 아무리 다윗의 측근이라고 해도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대하게 감사가 제사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아삽은 제사가 결국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레 7: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레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 사람들도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삽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충격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삽을 중용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아삽만큼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참된 예배를 드립시다.

<인용 -곽선희 ‘이 사람의 감사’>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예화를 듣고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정확하게 어떤 점에서 은혜를 받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참을 생각해 보니, 진정한 감사는 자신을 보게 될 때 터져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고 편안할 때보다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느낄 때 더 진실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됨, 어리석음, 연약함을 똑똑하게 보게 되면 그럼이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2017.11.12_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갈라디아서 03:15~29
2017년 11월 12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요]

성경은 해 이래 새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425년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 경에 쓰여진 수메르 점토판에 나온 기록인데, 거기에도 젊은 이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변해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죄’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우리 인간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변해도 세상의 근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의 시간 간격이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문제와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의 문제는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문제인데,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 + a’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다른 말로 갈라디아주의는 오늘날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전도운동, 율법주의적 성령운동, 율법주의적 영성운동 등으로 말입니다. 매우 좋은 주장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율법주의가 있는 운동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겉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동일한데 율법주의는 언제나 예수님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합니다. 언제나 인격이 아니라 의식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지면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나쁜 행동을 해도 예배에 잘 참석하거나 교회에 충성하면 그것이 상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비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있는데 본인은 오히려 신앙이 매우 좋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문제의식 없이 교회다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태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최순실 씨 딸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한 일이 밝혀진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보면 정유라 때문에 원래 이화여대에 합격해야 했지만 합격하지 못해서 다른 대학에 들어간 여성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화여대 학장, 총장, 담당교수 모두 별로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부정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언론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면접에 참여한 교수들도 부정을 저질렀죠? 제가 생각할 때는 만약에 제가 그런 입시 부정을 지시 받았다면 사표를 내는 한 있더라도 거부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회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건 제 기준으로는 선을 많이 넘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왜 기독교 대학에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가 의아합니다.

1. 갈 02:06~14 : 양심이 살아있어서 의를 위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김세윤 교수님은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높여주면서 정작 술, 담배보다 훨씬 더 큰 죄인 부정, 부패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합니다. 사회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고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있는 것이지요.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주의는 여기서 전도나 성령운동, 영성을 결합한 것입니다. 사회에서 나쁜 행동을 해도 전도를 열심히 하거나 방언을 열심히 하거나 영성을 기르면 된다는 식으로 이끄는 일이 바로 갈라디아 주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혼란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 답이 오늘 두 번 읽은 구절입니다.

먼저,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어요. 그러면 안되지만 입시 부정을 했다고 치세요. 주일 성수 잘하거나 전도 열심히 하거나 방언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죽게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해도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들려다보고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어떤 길을 갈지는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몇가지 가능성을 말씀드리자면, 뒤늦었지만 그 일을 바로 잡으려고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상사들을 설득하든지 언론사에 제보하든지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번에는 얼떨결에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무런 결정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청교도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양심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양심이 살아있어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2. 갈 02:15~22 : 율법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알려줍니다

십계명에는 분명하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어떻게 하냐면, 단순히 율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을 면죄부로 사용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여러분께서 고민하다 보면 알게 되시겠지만 양심을 죽이지 않으려면 전진해야만 합니다. 한 두 번은 부정을 저질르고 고민만 하다가 지나갈 수 있지만 계속 양심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안그러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소경, 영적으로 감각이 마비된 나병환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정에 머물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해결해야 할 많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법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불법 프로그램도 몇가지 썼었는데, 그것이 저를 고민하기 만든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거의 다 정품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윈도우 프로그램 라이센스를 얼마전에 구입했습니다. MS 오피스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습용으로 주는 라이센스를 받았고, 인디자인은 월정액을 내고 쓰고 있습니다. 단지 한글 프로그램은 정품을 안샀는데 제가 한글을 안 쓰지만 한글 파일을 받으면 그것을 복사해서 다른 프로그램에 옮기기 위해서 깔아놓고만 있습니다.

이렇게 저도 느리지만 전진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살다보니까 알게 된 것이 무엇이냐면, 양심이 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우리 나라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셨을지 모르는데, 제게는 큰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겉으로 성장하는 것 같지만 생명은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요. 여러분도 양심이 죽지 않도록 고민하다보면 저절로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갈 03:23~29 : 예수님을 닮고자 애쓸때 열망이 생겨나고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의를 추구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예수님을 닮도록 인도하는 영이고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성령 운동이 이상합니다. 뉴코아에는 교회 안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에서 좀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분들 중에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TV에 잠깐씩 나오는 목사님들 중에 얼굴만 봐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인데, 능력 있다는 분들이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부터 뜨끔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친절하고 지혜롭고 때로는 강인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사람인가 또 그렇게 보이는가를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령 충만하다 능력 있다는 말은 안했으니까 하고 합리화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목요일에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갔었는데, 거기서 로제타 홀 여사의 전시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오, 기도하오니 저도 충성되게 하시고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게 하소서.” 성공이 중요하지만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는 것보다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휘감고 거룩한 불씨를 던져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