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0:01~11
2018년 01월 07일 주일 설교
[핵심 구절]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과거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십니다
[개요]
신년입니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느라 바쁠 때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셔야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0.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계절로는 봄이 왔지만 인생살이는 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비슷하게 새해가 왔지만, 새해같지 않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는 달력이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도 새해를 가져도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새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인생의 새해는 하나님만이 인생의 새해를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생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이 어떠게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1~3. 노역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 읽은 이사야 40장 2절을 보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겨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한다고 미리 선고를 하셨읍니다. 여기서 ‘노역의 때’는 70년 포로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해는 무작정 오지 않습니다. ‘노역의 때’를 채워야 옵니다. 그 기간을 바르게 보내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가끔 범죄 생활을 하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들은 경험이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면 그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범죄를 행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성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공부하고 청교도와 조직신학을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이게 성화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길에 들어 서기는 했지만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지은 존 뉴톤이 노예 상인이었잖습니까?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도 범죄 조직에서 있다가 회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 뉴톤은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 나라 범죄자들과 다르게 일생동안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존 뉴톤은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글로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약 1년 6개월 정도를 깊이 회개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존 뉴톤의 편지]
선생님, 그 당시의 나를 보실 수만 있다면…죽음의 밤 속에서 나는 고독 가운데 우수에 담겨 암석 위에 나의 셔츠 하나를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젖은 땅 위에 그것을 놓아서 잠자는 동안에 내 등을 말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불쌍한 그 모습을 보실 수 있다면…배에 딸린 보트 하나가 그 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만 숲속으로 도망쳐 버려서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었습니다. 나의 행동, 나의 중심,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런 외적 행위들보다 더욱 어두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시다면; –사도가 언급하였던(딛3:3)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라고 말하기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피심과 감당할 수 없는 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상상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There was at that time but one earnest desire in my heart which was not contrary and shocking both to religion and reason: that one desire, though my vile licentious life rendered my peculiarly unworthy of success, and though a thousand difficulties seemed to render it impossible, the Lord was pleased to gratify.
그 때에 신앙과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부딪히지 않는 진지한 열망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 열망을 주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도 합당치 못한 사악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오고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산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But this favor, though great, and greatly prized, was a small thing, compared to the blessings of his grace; he spared me, to give me “the knowledge of himself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하지만, 이 호의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분의 앞으로 보여주실 자비로우심과 비교하게 되면 너무나 적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을 나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In love to my soul, he delivered me from the pit of corruption, and cast all my aggravated sins behind his back. He brought my feet into the paths of peace.
나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부패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사 나의 모든 엄청난 죄악들을 당신의 뒤쪽으로 내 던져 버리셨습니다.그리고는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This is indeed the chief article, but it is not the whole.
이것이 물론 주요한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은 아닙니다.
When he made me acceptable to himself in the Beloved, he gave me favor in the sight of others.
하나님께서 그 사랑스러운 예수님 안에서 당신에게 나를 용납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호감을 받게 하셨습니다.
He raised me new friends, protected and guided me through a long series of dangers, and crowned every day with repeated mercies.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고 여러 가지 위험들 가운데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자비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출처] Letters on His African Hardships and His Conversion by John Newton, 존 뉴톤의 아프리카시절의 고난과 회심간증
위와 같은 말을 하면, 이렇게 반발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이제는 고난이 끝날 때가 되이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 전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난이 끝나고 잘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 빗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복이 함께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신앙도 좋아지고 복도 받은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세례 요한처럼 고행만 하다가 목이 잘려 죽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2. 4~8. 그리스도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선행은총이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개혁신학의 선행 은총이 인본주의(알미니안)적인 선행 은총과 다른 점은 하나님 주도적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인간의 노력이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권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선행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나간 부분이 어디냐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방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요한의 세례’ 다음에 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하고 동일시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이 감격적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선행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각성이 강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노역의 때’가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게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으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가장 아름다운 보석만이 가슴 속에서 빛을 발할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 ‘예언’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3. 9~11. 그리스도의 시대가 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능력으로 오십니다. 참았던 화를 폭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능력, 그리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영광으로 가득찬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실 때 이 땅의 작은 권력, 영광에 취했던 사람들은 냉혹한 심판에 슬퍼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림 예수님의 겸손을 알고 그분을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주실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시면서 노역의 때를 지나시기 바랍니다.
[결론]
노역의 때를 채우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