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1장 | 의가 된 믿음 | 선행은총, 노력, 구원

개요

창세기 15장 강의를 시작하겠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비로소 의로 인정받았다.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경해석가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매우 좋았던 것처럼 설명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믿음이 창세기 15장에서 비로소 ‘의’로 인정받았다면, 그전에는 아브람의 믿음이 ‘의’가 아니었다고 해석해야한다. 그전에는 아브람의 믿음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다. 앞의 설명과 모순이 된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믿음이 ‘의’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창세기 12장에서 15장 5절까지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 아브람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말이다. 이게 가능한? 성경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가능하다. 이걸 현대에 적용하면, 신앙생활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 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서에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6:15절을 보자.

마태복음 16:15-16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 정도 함께한 시기이다. 예수님 돌아가시기 6개월 전이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졸업시험이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잘못된 대답을 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단순히 뛰어난 선지자가 아니라 창세기 3:15에서 예언된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이심을 맞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들은 이후 비로소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6:21을 보자.

마태복음 16:21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단순히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인류를 위해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죽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제자들은 이때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3년 간 예수님과 동행했고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 의에 이른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이 온전해진 건 예수님의 부활 이후이다.

우리는 흔히 복음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는 걸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은총을 받았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을 가진 상태가 아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다.

‘나는 예수님 영접했고, 구원의 확신도 있어. 예배 안빠지고, 성경공부 많이 하고, 전도도 열심히 했어.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은게 확실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구원받은 단계가 아니라 선행은총의 단계에 있는 걸 수 있다. 이론만이 아니라 경험을 보아도 그렇다. 많은 교인이 바른 믿음 혹은 구원의 체험을 갖지 못한채 착각에 빠져있다. 음식 냄새를 오래 맡으면 마치 먹은 것처럼 배가 부른다. 구원받았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 실제와 상관 없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교인을 이용하고 속이려는 무리가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들 때문에 구원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하게 막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문제부터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한다.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는 개혁주의를 배우지만, 교회에서는 인본주의를 가르친다.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이 인본주의인 것도 모른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상황을 선행은총의 단계라고 가르쳤다. 주의할 점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르치는 선행은총은 인본주의적 선행은총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인본주의적 선행은총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도 있고 안받을수도 있다는 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선행은총은 인간이 구원을 추구(seeking)해야 한다는 말일 뿐,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적으로 인도하고 주도하신다는 말이다. 구원을 추구하는 단계가 선행은총의 단계이다. 정리하면, 선행은총이라는 단어를 ‘인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신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구원을 확신하지 말기 바란다. 선행은총의 단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의로 인정받았다는 구절에 이런 주제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강의를 들으면 좋겠다. 창세기 15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따라서 요절도 두 절을 택했다. 15:4-6과 17이다. 먼저, 4-6을 보자.

요절 1. 창세기 15:4-6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인정받은 이유를 알아보자. 아브람의 심리를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 아브람은 앞장에서 큰 사건을 겪었다. 소돔 지역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납치된 조카 롯을 구출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물리쳤다. 완벽한 승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복의 위협을 느꼈야했다. 삶이 불안정해졌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후계자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물려줄 자식이 없다는 사실에서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안심시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이런 추측의 근거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안심시키셨다. 또, 아브람의 몸에서 난 자식이 후계자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실감나게 설명하셨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 상황이 중요하다. 왜 이 상황에서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을까? 이유는 한 가지이다.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비약이라 생각할 수 있다. 문맥에 명시적으로 아브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하나의 책으로 보면 비약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면 그건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 구절이 어떻게 아브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까?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 12장과 13장에서 아브람의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아브람은 창세기 3: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을 믿고 있었다. 또, 그분이 셈의 자손으로 오실 것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신에게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단순히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자손으로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이 이해된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올 수 있다는 사실까지 이해되었다. 아브람은 자신이 자식을 갖게 되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사건임을 알게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만 한다.

아브람은 현재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낳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하지만,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여자의 후손이 오실 수 있다. 즉, 아브람은 자식이 태어날 것을 믿는 것과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을 믿는 것이 중첩된 상황에 놓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식이 많아질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있다. 지금까지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던 아브람이 이제서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따라서 아브람의 믿음이 의롭게 여겨진 것이다.

요절 2. 창세기 15:7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지난 시간에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인정받은 이유를 설명했다. 아브람은 구원계시의 핵심인 ‘구원자의 대속’을 믿었다. 객관적 진리에 관한 믿음이다. 이것이 주관적 믿음으로 완성된 순간이 15:6이다. 아브람은 생명과 재산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 몰렸다. 자식이 없어 허무감이 커졌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순간 아브람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믿음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내면화되는 것을 느꼈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되었다. 구원의 순간이다.

구원에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다. 좁은 의미의 구원은 구원의 순간을 의미한다. 구원의 순간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전적으로 유효하다. 인간의 공로가 구원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넓은 의미의 구원은 구원의 순간을 둘러싼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구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아브람 언약에 관해서 알아보겠다. 아브람 언약에 관한 내용은 자료가 많다. 중복되는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이 강의의 목적대로 핵심 세가지만 짚어보겠다. 첫째, 언약을 왜 하는가? 둘째, 왜 이 시점에 언약을 했는가? 셋째, 이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언약을 왜 하는가?를 알아보자. 예전에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었다”, “이 언약은 어떤 의미가 있다”라고 배웠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깨달았다. 애초에 왜 언약을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애초에 하나님은 왜 언약을 하는 것일까? 창세기 2장 강의에서 설명했으니 그것도 참조하기 바란다. 언약을 하는 이유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아무리 친해도 계약관계에 있지 않으면 남남이다. 죽고 못살것 같은 연인사이도 헤어지면 남남이다. 영원히 우정이 변치 말자던 절친도 사이가 틀어지면 남남이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갑자기 사라져도 찾을 방법이 없다. 휴대폰 위치추적을 하려고 경찰서에 찾아가도 남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렇다. 사람은 결국 남남이다. 남이 남이 아니기 위해서는 계약이 필요하다. 계약의 종류에 따라 관계가 결정된다. 결혼계약을 하면 부부가 된다. 채무계약을 하면 채무관계가 된다. 노동계약을 하면 고용관계가 된다.

계약이 있어야 남의 생활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계약이 없으면, ‘너나 잘하세요, 남이사 무슨상관이요’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둘째, 왜 이 시점에 언약을 맺었을까? 어렵지 않다. 특별한 시기라서 그렇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념일을 ‘시간에 매듭을 짓는 것’이라고 했다. 밋밋한 밧줄은 붙잡기 어렵지만, 중간에 매듭이 있는 밧줄은 붙잡기 쉽다. 시간이라는 것도 밧줄처럼 이어진다.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매듭이 있어야 의미있는 시간을 기억으로 붙잡아 둘 수 있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매듭을 지어놓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이 시점에 아브람과 언약을 맺은 이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영적 생일잔치를 벌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낭만이 있다. 당연하다. 낭만을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니까. 잊지 말아야할 건,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나님과 풍성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이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모두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언약이다. 그중에서 본문의 언약은 그 방법으로 가나안이라는 땅을 특별하게 구별한다. 앞으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가나안 땅은구원계시의 배경이 된다. 이 땅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즉, 가나안 땅은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앞으로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과 언약을 하신다. 그때는 범위가 넓어져서 가나안 땅이 아니라 전세계가 배경이 된다. 가나안 땅을 배경으로 가르친 내용이 전세계에 확장해서 적용된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창세기 15장의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하고, 17장의 언약을 ‘할례언약’이라고 한다.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경륜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계획표이자 진도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구원계획, 다시 말해서 여자의 후손이 어떻게 오실 것인지 설명하신다. 한꺼번에 설명하지는 않고, 점진적으로 설명하신다.

언약식에서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원래는 계약의 당사자가 다 지나가야한다고 한다. 하나님과 아브람이 둘 다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횃불 즉, 하나님만 지나가셨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 언약을 이루겠다는 의미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신본주의이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다. 감사하자.

정리

두 가지를 알아보았다. 첫째, 아브람이 삶의 위기 순간에 회심했다. 롯을 구출하면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물리쳤지만, 보복의 걱정해야 했다. 생명과 재산이 위태로웠다. 하나님은 당신이 방패와 상급이라고 하시며 위로하셨다. 상속자가 없어 인생의 허탈해하는 아브람에게 자식을 약속하면서 별을 보여주며 실물교육하셨다. 아브람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 곧 여자의 후손이 오시는 것과 중첩되는 사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식이 태어날 것을 믿으면서 동시에 여자의 후손이 오실 것을 믿었다. 객관적 진리가 주관적 믿음으로 심어졌다.

둘째, 이 날을 기념해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생일잔치처럼 이 날을 축하해주신 것이다. 언약은 관계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 언약을 횃불언약이라고 부르는데, 가나안 땅이 장차 복음의 배경이 될 특별한 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창세기 15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자

적용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힘든데 내가 왜 살아야 되지?”라는 고민을 하게될 수 있다. 극단적인 얘기인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당신이 바르게 복음을 향해 간다면 이런 순간까지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이 말을 기억하라. ‘나는 바르게 가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필자도 그런 순간을 겪었다. 그때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 아닌 번영주의였다. 번영주의자는 ‘니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니까 그렇게 힘든 거야’라고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자는 신앙생활을 평균은 했다. 성경공부, 예배출석, 기도, 금식, 전도 등등 중간 이상은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주장에 반박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까? 신앙생활 잘하면 복받는다는 거짓을 의심없이 믿으며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다.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제자들이 바닥까지 내려간 일을 기억하기 바란다. 제자들은 능력이 봉인된 채 자기 불의가 폭로되는 걸 보게 된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조롱과 멸시 그리고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고통하게 된다. 그들은 그 바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인생은 고해이지만, 인생이 고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의미를 발견할 때까지 조금만 견디기 바란다. 홀연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영혼에 각인되고, 기쁨이 항상 고통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은 아브람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길지 않으니까 창세기 12장에서 15장까지를 읽으며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20200209[생각] 다르게 살고 싶다 | 생각을 바꾸자

0. “죽고 싶어” → “다르게 살고 싶은 거겠지”

1. 다르게 살려면 생각을 바꾸자.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생각을 넓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누구도 생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생각은 바꾸는게 아니라 넓히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을 포괄해라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연설 “우리는 절박함 속에 미(美)를 사랑하며 탐닉함이 없이 지(知)를 존중한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지만, 이것은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함일 뿐, 어리석게도 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일신의 가난을 인정함을 수치로 여기지 않지만,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함을 깊이 부끄러워한다. 이곳 아테네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은 조용함을 즐기는 자로 여겨지지 않고, 시민으로서 무의미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기쁨, 슬픔, 자랑, 자책, 용기, 좌절 이유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생각을 내가 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닐 수 있다. 독재 국가 사람들이 수령님을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섬뜻한 이유는 그들이 하는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세뇌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공부를 못하면 부끄러워하는데, 그런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니다. 감정이나 마음도 생각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백락청 교수의 ‘이방인’ 평론. 부조리에 관한 글이었지만, 식민지 사람에 대한 무시를 깔고 있었다.

2.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 생각이 넓어진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해 보자

진화론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다. 힘이 정의고 선이다.

정의롭고 선한 신이 없다면 정의도 선도 없다. 정의가 승리할 것이고 선한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희미하게나마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진화론의 가장 큰 난제는 삶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 사는가? 그냥 산다. 살기 위해 산다. 살았다가 죽었어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의미가 없다.

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라고 하는 시간, 공간의 시작 이전에 하나님이 존재했다는 의미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지켜보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다면 그 외로운 분투를 인정해 줄 존재가 있다는 의미

4. 다르게 살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왜 죽고 싶은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

좁은 생각, 모호한 생각,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20200119 창세기 15:01~07, [신년] 어떻게 변할까?

창세기 15:01~07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0. 변하고 싶은데 잘 안돼요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증세다”
“​The definition of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but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Albert Einstein

‘누구나 처음엔 걷지도 못했다'(고영성)에서 핵심습관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볼링에서 킹핀을 맞추면 다른 핀들이 쓰러집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습관을 발견해서 그것을 바꾸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강조하신 것도 한 가지 습관의 변화였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습관입니다. 언약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습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1. 도전 후에 오는 침체

아브라함은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조카 롯이 납치되었을 때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318명을 이끌고 전투에 뛰어들어 롯을 되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침체에 빠진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로 바꾸어서 조직 폭력배에게 조카가 납치되었는데, 조직 폭력배를 공격해서 조카를 구출해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조카가 납치된 상황에서는 정신없이 행동하겠지만, 일이 끝난 뒤에는 후환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사건을 경험하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암 진단을 받거나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차분해집니다.

어쨌든 도전을 시도한 후에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울증 증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2. 안보이는 것 보기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에 의존하다보면 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쇠퇴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흥할 때가 있고 쇠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이는 것을 의지하면 언제나 실망할 때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심어주려하신 핵심습관은 언약을 의지하는 습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습관이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감정의 기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하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3. 의로 인정받은 믿음

아브람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구절을 보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뭇별을 보여주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문맥에 감추어진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은 처음 부름받을 때, 이미 비슷한 언약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그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내 사래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상태였고, 자신도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소망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기적이 아니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가진 정도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아이를 낳아야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다는 언약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1~22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 #4. 결론: 핵심 습관을 바꾸자

그리스도인의 핵심 습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습관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볼 때, 외모, 재산 같이 보니는 것으로 분별하지 않고, 인격, 성품 등 보이지 않는 것에 따라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습관이 익숙해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데,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려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20200105 창세기 08:20~22, [신년]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

창세기 8:20-22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도입:

새해가 주는 활력 새해가 되었습니다. 예전보다는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것이 떠들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둔감한 사람이라도 새해가 되면 마음 속으로 한 두 가지 결심을 하거나 몇 가지 목표를 세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아도 조심스럽게 기대를 품어 보기도 할 것입니다.

새로운 해는 어떻게 생각하면 똑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이 불과한데도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상을 일깨우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뭔가가가 있습니다. 그니까 새해가 되면 힘들게 해돋이를 보러 산으로 바다로 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사람도 해가 바뀌면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결심을 하고 기대를 갖습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해가 바뀌는 건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해가 바뀌게 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번제를 드렸더니

20절은 배경입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짐승을 죽여서 불로 태우는 의식입니다. 대속을 상징합니다. 대속이란 다른 생명이 대신 죽음으로써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음에서 구원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린 것을 통해서 노아가 대속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대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대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해석을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라고해서 예외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둘째: 그 향기를 받으시고

21절은 전환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이유는 번제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뒤에 무지개 언약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대홍수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대홍수 심판은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등 모든 자연이 함께 고통을 받은 심판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심판은 대홍수 심판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생각을 바꾸셨습니까? 번제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때문입니다. 장차 있을 심판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만족된 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 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뿐입니다.

셋째: 쉬지 아니하리라

22절은 약속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변화된 환경에 놀랐을 것입니다. 홍수 전에는 자연이 살기에 적절한 자연환경이 지속되었지만, 홍수 후에는 보호막이 사라지고 살아가기 혹독한 자연환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화를 약속으로 주신 이유는 변화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이 “때가 차매”오셨다고 증언합니다. 한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오는 것처럼, 한 해가 지나면 다른 해가 오는 것처럼, 때가 차면 새로운 시대가 옵니다.

마찬가지로 때가 차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진리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신자는 때가 차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신약시대 신자도 때가 차는 것을 보면서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 때가 차매

2019년이 차고 202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목표, 결심, 기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때가 차매” 오셨던 예수님을 돌아보고 “때가 차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0181021 노아의 권위

본문

창세기 09:20~27 / 2018년 10월 21일 주일설교

(창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창 9: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설교 듣기

핵심 구절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한줄 요약

노아는 구원 계시의 전달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하나님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0. 권위와 권위주의

노아가 술을 먹고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아들 중에서 함은 노아의 실수를 떠벌렸고, 셈은 덮어주었습니다. 이 내용은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단순히 목회자의 실수를 떠벌리면 안된다. 혹은 목사를 비판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바른 해석은 무엇일까요?

이 내용에서 의문점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노아의 실수는 무엇인가?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는가? 셈이 칭찬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노아가 자기 방에서 술을 먹고 옷을 벗었는데, 그것이 왜 큰 실수일까요? 함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마지막으로 셈의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권위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영향력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는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필요한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은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1. 노아의 실수는 무엇인가?

첫째, 노아의 실수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고 추측해 보겠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은 속옷을 입고 하체를 가려야 했습니다. 하체를 보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노아도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의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왜 하체를 가렸을까요? 당시 가나안 이방 종교에서는 옷을 벗고 음란한 행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죄를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할례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또 제사장에게 하체를 가리라는 말씀도 특별히 더 음란한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하체를 가리지 않은 것이 실수입니다. 그는 음란한 죄를 범해서는 안되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하체가 놀림이나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었습니다.

2. 가나안이 저주받은 이유는?

둘째, 함이 잘못했는데, 왜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노아가 하체를 벗었어도 함이 그것을 발설하지 않았으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은 그것을 발설했고 노아의 실수는 알려졌습니다.

함의 죄는 계시의 전달자인 노아의 권위를 훼손해서 그가 전하는 말씀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데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다른 건 다 용서해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못하게 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성령 모독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함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예를 보면 명백합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울은 정식으로 기름부음받은 왕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건,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받은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제사장, 왕,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제사장과 동등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할 때 보여준 존중은 함이 노아에게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함이 잘못했는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의 계보로는 이후로 구원 계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이 믿음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말은 함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3.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셈은 다윗이 사울에게 보여준 것과 동일한 존중을 노아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리스도를 존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셈의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셈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믿음이 확증된 것입니다.

오늘날 권위가 실종되고 권위주의만 남았습니다. 권위주의란 권위가 없는데 권위가 있는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합당합니다.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권위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게 막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고, 성령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권위와 권위주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닮지 않았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동일하게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깨끗하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비판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하지만, 권위는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권위는 그리스도를 알도록 인도하고 도와주고 만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권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20180909 꿈을 좇아가서 소망을 잡아라

창세기 9:14~15 / 2018년 09월 09일 주일 설교

본문

(창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창 9: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한줄 요약

무지개는 붙잡을 수 없는 곳에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증언해 줍니다. 꿈을 쫓는 삶은 허탈해지지만, 소망을 품은 인생은 기쁨을 누립니다.

개요

무지개는 아름답지만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무지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0. 무지개같은 꿈

교리 설교를 하는 도중이지만, 지루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중간에 다른 설교를 끼워넣어서 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인생관 혹은 사고방식에 관해서 주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편하게 들으시면 됩니다.무지개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어렸을 때는 무지개를 제법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지개하면 생각하는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 전기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어릴 때의 얘기입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저 무지개를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친구들이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고 했지만, 나폴레옹만은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잡으려고 무지개를 보고 뛰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뛰었습니다. 무지개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먼 길을 달려 기진맥진하여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친구들이 비웃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나는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먼 길을 달려갈 수 있었다.”

나폴레옹 뿐만 아니라 무지개를 본 사람은 누구나 무지개를 가까이 가거 보거나 만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간절하게 바라는 꿈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도 그랬던 것처럼 무지개를 잡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지개같다’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인 동시에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오늘 하나님은 노아에게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를 통해서 알려주시려고 한 교훈 세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1.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하나님

첫째, 무지개 언약은 다른 사람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라는 교훈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정신적인 충격을 치료하려고 하신 약속입니다. 의학과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몸에 난 상처 뿐만 아니라 정신에 난 상처도 상처로 인정합니다.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 충격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상처를 받는 사람이 많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버지니아주 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퇴역군인의 40%가 우울증을, 25%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20%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하루 22명의 참전용사가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구요. 사회 적응도 어려워서 2012년 퇴역군인 6만 2천 여 명이 노숙을 했는데. 이는 전체 미국 성인 노숙인의 13%에 이르는 수준입니다. [출처] KBS 뉴스, 2014.4.8

군인이 아니지만, 소녀시대의 써니가 3살 때 이라크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급거 귀국한 것은 물론, 현재도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을 위험에 놓인다거나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 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비만 오면 정신적 충격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비가 홍수 때처럼 오랫동안 내리지는 않더라도 두려움을 가졌을 법합니다.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주신 이유는 무지개가 비가 그친 후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치고 나타나는 무지개를 보면서 노아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사건이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없는데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잘 살펴보면 어렸을 때의 경험이 크건 작건 영향을 끼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한국인이 김치를 좋아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 알게 모르게 김치를 맛보았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 외국에 입양된 사람들은 겉모습은 한국인이어도 입맛은 외국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헤아리는 섬세한 분이십니다. 이런 점은 다른 종교에서 보여주는 신과는 다른 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달라집니다.요즘에는 사람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소모품 취급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기 불편하니까 도로를 개선해 달라고 청원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참고 다니지 왜 그래.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하나님과는 다른 성품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일반적인 인간 사이의 간격이 클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인간과 장애인의 차이가 클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가 더 큽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장애인의 호소를 무시하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냉철하게 그것이 사실인지 점검해 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병폐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적용이 잘못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호소를 들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듣자고 설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맞아 맞아”하면서 각자가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들으려고 노력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붙들고 당신 왜 내 호소를 안들어 하는 일이 벌어질까요? 그리스도인은 내가 다른 사람의 호소를 들어야지 라고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호소를 들으라고 강요할 것입니다.

2. 꿈을 좇아가라 그러나

두번째로, 무지개 언약은 꿈의 실상을 알려줍니다. 무지개가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체를 잡기 어렵습니다.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힐링을 주제로 하는 TV프로그램에서 한 철학자가 연기자 지망생에게 조언을 해주는걸 들었다. 그 철학자는 당신이 진정으로 배우를 원한다면 꿈을 버리지 말고 더 노력을 해야 하며 그리고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끈기가 부족해서 일수도 있으니 대학로든 어디든 당신이 연기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론 짧은 TV강연에서 그 철학자의 조언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난 그 조언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자칫 오해를 하면 세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을 덜했거나 끈기가 없어서일 꺼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 영 마음이 불편했다. …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난 영화계에 입문해서 마흔이 넘어서야 가족을 건사할 수 있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난 꿈을 버리지 않고 영화계에서 끈기 있게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가 되었다고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야 하는데 한번도 후배나 동료들에게 내 사례를 들어서 더 노력하고 끈기 있게 꿈을 이뤄나가라고 조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나는 ‘꿈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개그맨지망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을 웃기는걸 좋아했고 대학 다니면서도 개그맨의 꿈을 키워왔다. 그래서 대학 때는 개그오디션이나 개그맨공채시험에도 응시하려고 했으나 코미디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걸 알았다. [출처]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한국일보. 014.2.13

위의 글은 영화계에서 나름 성공한 축에 속한 분이 쓴 글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성공했으니까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본인의 꿈은 그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꿈을 이루지 못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드물게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도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쓴 글을 보았습니다. “가장 허무할 때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해서 이룬 것이 진짜 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할 때이다.”

정말 드물게 자기가 원했던 꿈을 이룬 경우가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버나드 쇼의 고백에 이르릅니다.

내게 두 가지 절망이 있다. 하나는 무슨 일들이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고, 하나는 마음대로 된 이후에 오는 절망이다(버나드 쇼).

큰 꿈을 꾸라는 압력을 받고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렇게 해서 꿈을 이루었지만, 진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래서 꿈을 이루지 못한 좌절을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박명수가 “꿈은 없구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했답니다. 저는 공감하지 않지만, 그 말에 공감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박명수의 말에 공감하지는 않지만 씁쓸합니다.

왜냐하면, 돌이켜보니까 큰 꿈을 갖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착실하게 그것을 준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이 꿈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것입니다. 의사, 판사, 회계사 등 사자 들어간 직업을 원합니다. 적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공부 잘해서 그런 직업을 선택합니다. 남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스스로 어떤 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을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꿈을 좇지 말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을 일을 찾고 그것을 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지개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형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꿈도 비슷합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정말 이것이 최고의 삶일까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세상의 한편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좌절과 낙심으로 가득차 있고,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의혹과 당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꿈은 아무에게도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지개처럼 바라볼 때는 황홀하지만 다가갈수록 형체가 없습니다.

3. 소망을 붙잡자

세번째로, 무지개 언약은 소망이 기쁨을 준다고 알려줍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는 동안에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가 그친 후에 나타난 무지개를 보면서 큰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가 내릴 때 느꼈던 공포감 이상의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무지개는 일종의 자연현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자체의 가치보다는 외적으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현재 가장 비싼 그림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님 초상화더라구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를 다시 썼다. 500여년 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15일(현지시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5천30만달러(약 4천978억9천만원)에 낙찰됐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긴급 보도했다. (중략) 지금은 최고의 몸값을 받는 자리에 있지만, 그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럽 귀족들의 손을 거치며 심한 덧칠 등으로 손상됐고,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채 수백 년을 떠돌았다. [출처] 연합뉴스, 2017.11.16

▣ 크리스티 뉴욕 2017년 11월 전후 & 현대 미술품

그림이 훼손이 심했고, 컴퓨터 시대에 사진을 찍어서 복사하기도 쉽습니다. 왜 이 그림이 이렇게 비쌀까요? 그림 자체의 가치가 아닙니다. 이 그림에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비싼 것입니다. 내 자녀가 특별합니까? 내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특별한 겁니다.무지개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를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무지개는 자연현상으로 일종의 허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 무지개를 쫓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무지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꿈이 깨어지고 목표를 얻지 못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꿈이라는 것은 무지개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꿈은 멀리서 바라볼 때 기쁜 것이지 가까지 다가갈수록 좌절과 낙심, 그리고 괴로움만 더해 줍니다.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잡지 못했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지개는 잡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증표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호소를 들으셨고 지금도 우리의 호소를 듣고 계신다는 증표입니다. 그러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중보적인 역할을 합니다.

무지개를 잡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언제나 기쁨이 슬픔을 능가합니다. 슬픔이 더 크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슬픔보다 기쁨이 언제나 더 큽니다. 마치 튜브를 물에 넣으면 튜브가 물에 뜨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의 실패에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산 사람도 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바로 이것을 알려줍니다. 성공도 하고 하나님도 만나면 가장 좋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공평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지혜로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저울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공의를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무지개 언약은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물 외에 다른 것으로 심판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인데 가을이 오면 농부는 추수를 합니다. 논과 밭 그리고 과수원의 과일을 추수합니다. 직장인들은 연말이 되면 연말 결산을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봅니다. 한 해 농사 혹은 한 해 일한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모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심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무지개는 우리에게 일종의 테스트가 됩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를 말입니다.

꿈은 이루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꾸라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도 이루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간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꿈이 깨어졌어도 성공하지 못했어도 좌절과 낙담으로 점철된 인생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소망을 가지십시오. 꿈이 아니라 소망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20180902 계절도 변하고 인생도 변한다

본문

창세기 08:22 / 2018년 09월 02일 주일 설교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설교 듣기

한줄 요약

계절의 변화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고 이러한 변화를 주셨습니다.

개요

9월입니다. 길었던 여름도 이제 끝을 보입니다. 릴케라는 시인은 이렇게 여름의 끝을 노래했습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출처]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중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계절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번 여름이 너무 덥고 길다보니까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겨울이 무척 추우면 겨울이 없었으면 좋겠다 혹은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계절이 변하게 하셨을까요? 여름과 겨울을 주셨을까요?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0. 변화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 계절의 변화를 주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첫째, 활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세계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이 활기가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도 많고 문화도 발달했습니다. 여름이 거의 대부분인 중동 지역에는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가 있습니다.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삶이 지루하고 늘어진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남쪽에 위치한 스페인도 낮잠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을 개선하려는 논의가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통상 오전 9시에 업무(일과)를 시작해 정오께 짧은 커피타임을 갖고 오후 2시까지 일한 뒤 4~5시까지 이어지는 긴 점심식사를 즐긴다. 이어 업무에 복귀해 오후 8시 또는 더 늦게까지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근로 패턴이 이렇다보니 하루 11시간가량을 회사에 머물게 된다. 늦은 귀가로 저녁은 오후 9시께 먹게 되고,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줄며, 자정 넘어 잠자리에 드는 이들이 많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삶이 늘어지고 지루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노인과 청년을 구분하는 법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를 떠나서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면 청년이고 하던 일만 계속하면 노인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될 때, 요금이 비싸다고 바꾸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카카오톡을 주변 사람들이 다 쓰니까 뒤늦게 스마트폰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좀 과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어릴 적이 동네에 전화가 몇 대 없어서 공동으로 썼습니다. 그때는 집집마다 전화기를 놓는다는 걸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설치비도 비쌌고 전화요금도 아까워서 놓을 생각을 못했습니다.

시대가 지나서 집집마다 전화기를 하나씩 놓았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집에 전화 있는데 휴대폰이 왜 필요하냐고 주장하던 분들이 기억납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나왔고 여지없이 스마트폰이 왜 필요하냐는 분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구입하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변화를 따라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바다에 온갖 쓰레기가 흘러드는데 썩지 않는 이유는 달이 바다를 끌어당겨서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게 해서입니다. 바다는 계절은 없지만, 밀물 썰물이 있어서 활기를 유지합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데 변화를 계속 따라갈 수 있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만 포기하면 나태해지고 활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변화를 주십니다. 그 변화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제 인생에는 3년에서 5년 정도 주기로 계절이 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변화를 잘 발견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2. 둘째,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문제가 있는 사람은 뭔가 변화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저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더 잘사는 경우를 봅니다. 저야 어차피 돈을 벌려고 목회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 질투가 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야 살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잘나가는 사람, 못 나가는 사람 정해지면 변화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 전에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였습니다. 오바마의 인생을 보면 여름과 겨울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두 살때 어머니가 케냐인 아버지와 이혼했습니다. 다시 인도네시안인하고 결혼해서 인도네시아에서 10살까지 살다가 미국에 와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졸업 후 시카고에서 빈민을 위한 인권 변호사를 하다가 다시 하버드 대학원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에 입문해서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오바마를 보면서 저도 위로를 받고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미국의 흑인, 빈민들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성공할 기회가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계속 차별받고 돈도 없이 살아야 한다면 그들이 범죄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살아갈 힘을 잃고, 소망이 없는 사회는 범좌가 증가합니다.

소망은 현재 삶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변화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소망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네 인생을 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돈이 없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죽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글이 있더라구요. 죽고 싶다라고 말하지 말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라.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이렇게 바꾸어서 이야기 하세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변화된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죽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으면 이렇게 바꾸십시오. 하나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은 변화에 응답하십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자면, 오바마가 똑똑하지만 본인이 잘나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이 기회를 주셨고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또 열렬한 지지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바마의 삶에 좋은 계절을 주지 않으셨으면 그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에 계절이 있다는 말은 우리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한 섭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노력이나 능력과 상관 없이 좋은 기회가 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3. 셋째,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그 사이 즉, 계절이 변할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할 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치 여름날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을 옮기느라 일을 쉬게 되거나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 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갈 것인지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시간에 그런 쉬는 시간을 마련해 주십니다.

버포드 텔레비전사의 튼튼하고도 눈부신 성장으로 기대한 부를 축적한 44세의 밥 버포드에게 성공의 공포가 찾아왔다. 내 인생에 목적을 부여해주는 가치기준은 무엇인가? 내 삶을 이끌어 갈 중요한 비전은 무엇인가? 가장 유용한 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황하며 고민하던 밥 버포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빛이요 인도자로 영접하였고 그분께 최고의 충성을 드리기로 작정한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그의 상속자요 계승자인 전도가 유망한 청년 외아들 로스가 리오그란데 강을 헤엄쳐서 건너던 중 익사하였고 넉달 후 강 하류 16㎞ 지점에서 로스의 시신을 찾게된다. 아들의 죽음은 밥 버포드의 인생 전반기를 마감케 하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는 하나님께만 온전히 매달리며 아들 로스가 지금 살고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한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할 일을 합시다. 생각합시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이 말씀은 8장 20절에서 노아를 제사를 받으신 후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보류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을 통해서 구원 받을 사람이 없어질 때 이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지집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재앙이 일어나는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쉬는 시간을 주는 이유는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라는 의미입니다.

2018.07.01_[교리] 두 세계에 속한 인간

# 본문

창세기 1:24~31 / 2018년 07월 01일 주일 설교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한줄 요약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관리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인간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성경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진단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왜 사는지 그 답을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0. 두 세계에 속한 인간

아메리카 인디언에기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흰 개와 검은 개가 있는데, 흰 개가 강해지면 착한 일을 하고, 검은 개가 강해지면 악한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개가 강할까요? 먹이를 많이 먹는 개가 강해진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이 야기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착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습니다. 인간은 때로는 고상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고 때로는 반대로 비열하고 잔악한 행동을 합니다. 한 사람 안에 반대되는 마음이 있고, 한 사람이 전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인간의 역할 :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세상을 계획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먼저 해, 달, 별 같은 배경을 만들고 나중에 그 무대에서 살아갈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생물들 가운데 가장 마지막 날에 창조된 생물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을 세상의 관리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관리자입니다. 다른 말로는 대리통치자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이 인간을 대리통치자로 임명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은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두 가지 성격을 설명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관리자는 주인과 세입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인과 세입자의 전화번호를 둘다 가지고 있다가 둘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면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과 통하기 위해서 인간은 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과 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물질도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과 물질 두 가지를 함께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은 영이 없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동물도 종교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하나님과 만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동물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원합니다. 이 모순된 상황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줍니다. 인간은 동물적인 삶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2. 인간의 목적 : 나는 왜 사는가?

인간은 왜 살까요? 본문을 통해서 답을 찾아보면, 땅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땅을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과 교제할 권리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땅을 다스리면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 기쁩니다.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땅을 다스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은 일을 잘 하고 싶어하고 일을 잘 할 때 즐겁습니다. 그러나 일만 잘하면 공허합니다. 하나님께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간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일을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삽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은 참된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을 잘하는 것, 교회에서 예배를 잘 드리는 것, 가정을 잘 유지하는 것 모두가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잘 드리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갖추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3. 인간의 선택 : 어디에 속할 것인가

인간은 중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도 아니고 물질도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영원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합니다. 동물처럼 본능에만 충실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관리자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역할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인간이 이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역할을 적절하게 할 수 있는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도와주십니다.

물질은 반드시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아무리 튼튼한 나무도 돌도 강철도 썩고 파괴되고 녹슬어 분해됩니다. 형체를 잃고 사라집니다. 인간도 물질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라집니다. 인간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야 합니다. 인간이 물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하며 살아갈 때 영원한 하나님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물질에 속할 것인지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인지 선택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 00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가자

인간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합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갈등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018.06.17_[교리] 전능하고 신실하신 하나님

# 본문

창세기 1:1~2, 신명기 7:9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창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한줄 요약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신실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은 감탄을 자아내고 신실한 성품은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0. 갑질의 유혹 :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

우리 나라에 갑질 문화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때 유행했던 조폭 영화도 비슷합니다. 조직 폭력배가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갑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비난을 받아서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그런데,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전지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의미이고 전능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입니다. 이 짧은 선언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어찌어찌 대충 만든 세상이 아닙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기계같은 세상입니다. 그것은 어떤 기계를 만들었지만, 스스로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구성 요소와 작동 원리 그리고 그 결말까지 완전하게 알고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소에 성질을 부여하셨고, 모든 행성에게 원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책이 출판될 때는 이미 결말이 지어진 상태에서 출판됩니다. 영화가 상영될 때는 이미 결말까지 완성하고 상영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이미 세상의 시작과 끝이 완성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속속들이 정해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완성된 책이나 영화 속의 인물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결말이 지어진 책이나 영화라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긴장감을 자아내고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말을 감추십니다. 신비 속에 그 결말을 감추십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2.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ᅟ한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는 변덕스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를 만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든 원리를 함부로 어기지 않으십니다. 자기가 원리를 만들고 자기가 원리를 어기는 것은 사람이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함부로 원리를 어기지 않으십니다.

성숙한 인격은 신실합니다. 자기 행동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미성숙한 인격입니다. 어떤 일을 진행하다보면 처음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성숙한 인격입니다. 성숙한 인격은 행동을 하기 전에 충분히 다양한 상황을 예상하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행동은 꾸준히 진행합니다.

우리가 기적와 달리 하나님께서 기적에 인색한 이유도 신실한 성품 때문입니다. 기적이 많이 일어나면 좋을 것 같지만, 기적이 많아지면 삶이 불안해집니다. 돈이 많아지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경제 활동이 불안해지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적이 많아지면 기적을 바라면서 일탈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일상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 삶의 기초이고, 신앙의 근원입니다.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성실하게 할 일을 하는 사람을 존경하게 됩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우리를 감탄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존경을 자아냅니다.

‘힘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가 아니라 ‘힘이 있어도 신실해야 한다’로 바뀌어야 합니다. 힘이 있다고 원리 원칙을 무시하고 변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을 때 더욱 원리 원칙을 지키면 존경받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한 번 세운 원칙을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성숙한 인격은 신실합니다. 쉽게 변하지 않고 바꾸지 않습니다.

3. 유능하고 신실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고 신실한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자신을 높이는데 사용하지 않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신실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에만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는 하나님의 전지전능 뿐만 아니라 신실하심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우리에게 감탄을 일으킨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러한 능력과 신실하심이 가장 잘 드러난 곳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생활에서 유능해지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더 닮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탄과 감격

조폭 영화를 보면 조직 폭력배가 법으로 응징할 수 없는 혹은 법으로 응징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상황에서 나쁜 사람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줄 때 통쾌함을 줍니다. 하지만, 조직 폭력배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통쾌해 하거나 감탄할거나 부러워할 수는 있지만, 존경은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리석어 보여도 오랫 동안 원칙을 지킨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우리를 굴복시키고 감탄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감탄하고 신실하신 성품에 감격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유능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과경배. 100 하나님 한 번도 나를

2017.12.16_예수님이 나의 새언약이 되십니다

창세기 03:01~24
2017년 12월 16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롬16:20
  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개요]

대강절에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다양한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0. 복음의 씨앗

창세기 3장은 실질적으로 성경이 시작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고, 성경의 핵심이 모두 들어있는 장 중에서 가장 처음 나온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나 장이 여러 부분 있지만,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 창세기 3장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창세기 3장에 나온 핵심을 절대 잊지 말고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제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해도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데, 영어는 앞부분을 기억하고 있어야지 뒤로가면서도 이해가 쉽더라구요. 그래서 영어가 앞부분에 대문자로 시작한다고 하는 분이 있더라구요. 비슷하게 성경도 창세기 3장을 항상 머리속에 기억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그렇게 해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의 어떤 점이 성경의 핵심일까요?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3:1~7 인간의 계약 위반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계약 위반입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 명백한 배신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의 우월한 지위는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모든 영광과 존귀를 잃어버렸습니다.

2. 2:8~21 하나님의 재계약

하나님은 사탄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다시 주지 않으셨지만 감사하게도 인간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탄의 유혹 때문에 범죄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로 주신 기회가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담의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가죽옷이라는 말은 다른 생명의 희성, 즉, 다속을 통해서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과 21절이 그것입니다. 네델란드의 개혁파 신학자 주에 게할더스 보스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쓴 성경신학이라는 책을 보니까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을 복음의 씨앗이라고 표현하셨더군요. 씨앗은 생명을 가진 가장 작은 단위아닙니까?

여자의 후손+가죽옷은 중보자+대속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대신한 누군가가 이 땅에 와서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할 것이라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좀 가볍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오래된 비유는 고도로 압축된 언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3. 2:22~24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가죽옷이라는 복음의 씨앗을 주고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이게 인간은 이 씨앗을 가지고 살면서 구원의 길을 발결해야 합니다. 이 씨앗을 가지고 생명의 싹을 틔운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썩게 내버려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 구원의 씨앗을 마치 이어달리기 선수들이 주고받는 바통처럼 전달됩니다. 복음의 싹을 틔술 수도 있고 썩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 언약이 사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이 사실들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는 일입니다.

[결론]

복음의 싹을 틔웁시다.

2017.12.10_[대강절2] 예수님이 나를 변화되게 합니다

창세기 02:01~25
2017년 12월 10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한줄 요약]

예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개요]

대강절에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다양한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0. 돈보다 소중한 것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의 힘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하지만, 돈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입니다.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사랑은 충족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그것 자체로 충족한 개념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의 파괴적인 속성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으로 이끌어갑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면,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p101) 이 선언 이후에 그는 마지막 종류의 사랑인 ‘자비’로 이끌어간다. 이 사랑은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도움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사람들이 ‘사랑’를 매우 갈망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특히 창세기 2장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언약’이라고 생각합니다.

 

1. 2:1~7 인간, 언약할 수 있는 존재가 되다

지난 시간에 저는 인간이 존귀한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존재 가치’보다 ‘관계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데 인간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자기 스스로 독립된 인격을 갖추고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2:8~20 하나님과 언약을 맺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입니다. 이것은 호세아 6:7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인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언약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가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은 일종의 ‘고용 계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조건 일을 시키신 것이 아니라 정당한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따라서 일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 ‘언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언약 위반입니다. 죽음이라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하는 위반입니다.

 

3. 2:21~25 언약은 결혼입니다

창세기 2장 후반부에 남자와 여자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언약의 최종 모습이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언약은 상호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서 합니다.

[결론]

언약의 최종적인 모습은 결혼으로 표현됩니다

2017.10.01_제사, 왜 지낼까? 2

창세기 04:01~07
2017년 10월 0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한줄 요약]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방법을 알려주는 의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1. 제사는 효도 방법이 아닙니다

제사 때문에 명절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제사로 인해서 가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좋은 풍습인 것 같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데일리 김영수 기자] 명절 전후 이혼 신청이 평소에 비해 3배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태섭 의원(더불어민주당·서울 강서갑)이 27일 법원행정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하루 평균 298건의 이혼신청이 접수된 반면, 설날과 추석 전후 10일간은 하루 평균 979건으로 3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이혼신청 중 22.5%가 명절 전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절 직후 3~4일간 이혼 접수가 매일 700~800건으로 가장 많았다. 평소 쌓였던 부부간, 가족간 갈등과 각종 스트레스가 명절기간 폭발하면서 평소에 비해 이혼소송 접수 건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0년간(2008~2017.8.) 월평균 2만6143쌍이 결혼하고 9564쌍이 이혼하고 있으며 다섯쌍 중 네쌍은 협의이혼, 한쌍은 재판이혼을 하고 있다.

금태섭 의원은 “부부갈등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명절갈등’을 특별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출처] https://getpocket.com/a/read/1905115127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았습니다. 공자의 무책임한 제사 발언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깨어진 예입니다.

장손 집안입니다. 조상덕은 보지도 못해서 명절마다 해외여행은 커녕 차례상에 성묘에 고생 고생 고생… 그리고 저희 집안도 역시나 명절과 제사는 항상 술과 싸움으로 끝나는 대단한 집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아버지들 모시고 차례와 기제사 그만 지내겠다고 폭탄을 날렸습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었죠. 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이 그렇게 많은지 그때 알았습니다. 당연히 저는 근본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되었구요 작은 아버지들이 저와 계속 말다툼 하시더니 본인들이 제사를 모셔가겠다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습니다. 당황하던 작은 어머니들의 표정을… 작은아버지가 제사 가져간 첫 해에는 제사모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제사 안지낸다고 하시더군요. 제사와 차례를 안지내니 명절도 당연히 친척이 다 모이지 않고 저희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즐기고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어머니께서 종종 말씀하십니다. 니 덕분에 명절을 명절답게 보낸다고….

[출처] https://getpocket.com/a/read/1908667535

제사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이유는 제사가 조상을 공경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2.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주는 의식입니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기 전에 저는 가인의 제사가 거절되었다는 말씀을 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고 또 우리 나라는 농경 국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인의 제사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는 단순히 정성으로 나아가서는 안되고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비유입니다. 비슷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유할 수는 없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유한 것인데, 예수님의 십지가는 우리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피가 흘려지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는 말씀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때로는 기쁘게 즐겁게 힘차게 살아가지만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 때문에 항상 노이로제에 걸려서 살 수는 없지만 가끔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바로 명절이고, 제사 드릴 때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3.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주는 의식입니다

제사는 대속을 통해서 살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속을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요. 그래야 우리는 대속이 얼마나 힘들 일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속을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필요합니다. 첫째는 능력입니다. 그 사람이 망쳐놓은 일을 책임지고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는 능력말입니다. 둘째는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부족합니다.

죄를 위한 대속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격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사람만이 죄인들 대속할 수 있습니다.
대속을 실천할 때,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속을 실천하며 삽시다. 명절 제사를 보면서 제사의 참된 의미와 예수님의 대속을 기억합시다

[결론]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방법을 알려주는 의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명절에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공경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2017.01.15_일, 낙원의 일부

창세기 01:31-02:03
일, 낙원의 일부

2017년 01월 1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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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요약]
최초의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도 일하셨고 아담도 일했습니다.

[개요]
1. 멜라카. 일하시는 하나님
2. 타락 전부터 일과 쉼은 낙원의 일부였습니다
3. 직업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4. 예수님은 직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셨습니다

[결론]
우리는 직업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2장

하나님은 아담과 고용 계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이런 일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계약’을 맺고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계약의 의미

‘계약’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제약이 생기는 것 같아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계약이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계약은 당사자들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하게 해 주기 때문에 의견이 엇갈릴 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맡기시면서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담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를 알아보겠습니다. 그 근거는 호세아서에 있습니다.

호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말함으로써 아담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창세기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신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계약도 안하고 혹은 계약에도 없는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었지만, 공정한 계약서를 쓰고 그 한도 내에서 임무를 주셨습니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명확한 계약서를 쓰고 일을 시키는 것은 그가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봄봄’이라는 소설에서는 자기 딸을 주겠다는 불명확한 약속을 내세워서 무료 봉사하게 만드는 장인이 나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계약서가 없어서 제대로 된 항의조차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도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약이 왜 중요한 지 알아야 합니다. 계약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계약자의 인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명백한 계약은 강자의 횡포를 막고, 약자를 보호합니다. 따라서, 강자가 명확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약자의 피해를 방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명확한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 매우 고매하고 훌륭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둘째,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자기 마음대로 데려다가 키우지만 계약을 맺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으셨다면 계약을 맺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대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법적인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법적으로는 남남입니다. 즉,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따라서, 친구가 갑자기 떠나도 그를 붙들어 둘 수 없고, 그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계약 관계라면 다릅니다. 합법적으로 붙들어두고 그의 삶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고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둘 수 있습니다. 또 운동 선수들도 구단과 계약이 끝나지 않으면 마음대로 다른 구단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계약은 하나님과 인간을 남남이 아닌 관계로 이끌었습니다.

 

계약의 의미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고용 계약의 내용은

  1. 권리 :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자기 재량대로  마음껏 행동할 수 있으나
  2. 의무 : 선악과는 먹으면 안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편의점에서 종업원에게 “편의점 물건을 마음껏 사용하되 금고 안에 돈은 훔치지말라”고 계약을 맺은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이 감히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강요하지 못하고 뱀으로 변신해서 유혹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담은 사단보다 능력있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호기심에 못이긴 아이가 부모님의 말씀을 어긴 것같은 유치한 행동이 아니라 고용 계약을 맺은 성인이 자기 행동의 결과를 알고도 약속을 어긴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자신이 ‘대리통치자’ 자리에서 해고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3장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대리통치자’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이제 실업자가 된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잃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새로운 계약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는데 실패한 아담을 보면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예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아담의 모습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었지만 그 계약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계약을 성공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세기 1장

인간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made by GOD’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하신 일은 하나님 대신 이 세상을 관리할 ‘관리인’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Made by GOD

그러나 세상의 ‘관리인’은 시키는 일만 단순하게 수행하는 ‘마당쇠’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비서’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복’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또, ‘관리인’은 영이신 하나님과 물질 세상을 역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과 물질이 혼합된 ‘중간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세상의 관리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통치자’ 역할을 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이 세상의 ‘대리통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세상의 ‘대리통치자’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구절은 애초에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바로 그 임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중보자’로 오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신 것은 애초에 아담이 해야 할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은 아담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실패했고, 예수님이 다시 시작하셨으며, 우리가 예수님의 영과 함께 완성해야 할 일입니다.

 

아담을 대신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담이 해야 했지만 실패한 일을 성공적으로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며 이 일을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2015.12.06_[대강절 2] 여자의 후손

창세기 3:15-21
[대강절 2] 여자의 후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한줄 요약]
인류가 죄의 유혹에 빠진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방법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인류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음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방법을 주심
2    여자의 후손
인류의 구원은 ‘구원자’를 통해서 이루어짐
그분은 여자의 후손(?)이심
3    가죽옷
가죽은 짐승이 죽어야 생김
대속’을 통한 구원을 의미

[결론]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 방법은 ‘구원자의 대속’을 통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