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0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3 | 관점을 바꾸라 | 눅 24:13-35

0. 지금 나는 어떤 시기인가?

지금 시기는 2천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기간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기에 처해있으십니까?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끌려다니지 말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금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시기에 있던지 간에 예수님이 가르치려고 하신 그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4:13-35

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1. 무엇에 집중할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재교육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관점은 안경과 같고 잘못된 관점은 색안경과 같기 때문에 아무리 색안경을 벗고 깨끗한 안경을 써야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본질적인 변화를 주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방법을 알려주라는 말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든 다른 어떤 학문을 배우든 가장 중요한 건 관점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웠는데 이단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악한 사람 밑이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오랫동안 연구했는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보만 많이 배우고 잘 외우는게 공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지난 날 광화문에서 열심히 시위하던 태극기 부대에 신학자, 목회자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바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한국교회사를 쓰는 사람이 이 시기를 되돌아보면, 이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한 우상숭배자들과 같이 취급될 것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게 아닌데 왜 잘못된 행동을 했냐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점을 고치려면 그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자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어떤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요? 번영주의입니다. 번영주의를 다 나쁘다고 하지만 정작 자기가 번영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기도 많이하면, 금식 오래하면, 능력 받으면, 전도 여러 사람하면, 교회 봉사 많이하면 그러면 형통한다 복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번영주의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말이 잘못된 게 없는 것 같죠? 그러니까 번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주의는 기도 많이하고, 금식 오래하고, 능력 받고, 전도 여러 사람하고, 교회 봉사 많이해도 고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관점입니다. 왜요?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발전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고난을 필수로 주시냐면, 그게 없으면 줄 수 없는게 있기 때문입니다. 초코렛을 포장할 때 은박지를 사용해야 잘 안녹습니다. 초콜렛을 휴지로 포장하면 엉겨서 먹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포,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그래프를 통해서 설명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요셉과 제자들의 예를 들어서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2. 고난 중 형통한 사람들

요셉의 경우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일을 잘했으나 죄수가 됨

다윗의 경우

골리앗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나 사울에게 쫓김

예수님의 경우

제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심

3. 하나님은 리더를 만드신다

보스와 리더의 차이

보스는 자기한테 잘보이기만 하면 되지만, 리더는

하나님은 리더시고, 우리도 리더가 되기 원하신다

사람은 보스가 되고 싶어한다. 리더가 되려면 고난이 필수이다.

고난은 생각을 넓혀준다: 다른 처지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난은 생각을 명확하게 해준다: 대충하는게 아니라 절절하게 알게 한다.

고난을 생각을 높여준다: 생각의 찌꺼기를 제거한다.

20200503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일2 | 관점을 바꾸라 | 눅 24:13-35

1.우선순위 –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지난 시간,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일이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우리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지려는 제자들을 불러모아서 성경을 보는 관점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경 보는 관점을 세워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무조건 많이 읽는 게 잘하는 게 아닙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많이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닌 것처럼요.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바르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예수님한테 직접 배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받고 영광을 받아야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여러 번 죽었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강조하셨고, 성경에도 그런 예언이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음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2. 각성 –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이 문제가 아니라 물을 가공하는 주체가 중요합니다. 색안경을 끼면 어떤 풍경을 보아도 색안경의 색으로 덮입니다. 풍경이 문제가 아니라 색안경이 문제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르쳐도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고쳐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자기 관점이 명백하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고 관점을 바꾸려고 하면 고쳐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불러모아 재교육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던 제자들이 자기들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사건이 있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이런 기회에라야 관점을 바꿔줄 수 있습니다.

3. 관점 – 고난을 통과한 영광

예수님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주의 관점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관점입니다. 왜 제자들이 이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받아들이기 싫어서입니다.

“기도하면 고난을 받지 않는다. 금식하면 형통한다. 능력받으면 물권, 인권, 영권이 따라온다”라는 주장을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이 센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복받고 구원받는다”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건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자기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게 기독교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교인은 유신론자일 뿐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성경의 관점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까요? 제가 강의할 때 사용하는 그래프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래프

4. 위기는 기회 – 번영주의에서 벗어날 때

능력 있다는 교회, 설교가 좋다는 교회, 성령 충만하다는 교회, 영성이 있다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기를 당하고, 가정이 불화하고, 결혼을 잘못하고 등 여러 경우를 보았습니다. 고난을 피하려다가 더 큰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불행했습니다. 아니 교회 안 다니는 사람보다 형편이 더 나빠보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번영주의의 말로입니다.

번영주의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합니다. 형편이 나쁠 때가 기회입니다. 내 생각이, 내 관점이 틀렸구나라고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내 안의 감추어진 번영주의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시작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0223 [징조] 시대를 분별하자 1

0. 신천지, 코로나19, 전광훈

코로나19로 인해서 영상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미 올해 2020년부터 유튜브로 영상설교를 시작했고 유튜브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생각했지만, 유튜브와 영상제작에 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망설였고, 또 이런 시도를 비난하지나 않을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설교를 시작하고 보니, 코로나19가 유행하게 되었고 다른 교회에서도 영상을 통해서 설교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걱정하던 것들이 사라지게 되어서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영상설교로 인도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는 그 이유를 꼭 이루겠습니다. 영상을 통한 설교 혹은 예배는 단순히 설교나 예배를 영상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빠르고, 감각적이고, 흥미를 요구하는 세대들의 요구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이런 요구에 결합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할 일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루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동참하고 격려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오늘은 시대의 징조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심하고, 사회적으로 코로나19가 신천지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상황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시대를 분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성경과 교회사입니다. 성경과 교회사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적절한 구절은 누가복음 12:54-57입니다.

누가복음 12:54-57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1. 외식하는 자여

예수님께서 자연현상을 보면서 날씨를 예측하는 것처럼, 시대를 상황을 보면서 미래를 예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어딜까요?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느냐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 즉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성경 해석을 독점하면서 자신들의 성경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으로는 거짓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오늘날로 비교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요? 신천지는 이단이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돌려말하지 않겠습니다. 요즘 광화문에서 정치집회하는 정치 종교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 정확하게 바리새인들과 일치합니다. 종교지도자는 독재에 대항한다면서 자신들이 독재를 합니다. 추종자들은 그런 종교지도자를 추종하면서 거짓과 악독에 가득차 있습니다. 자신들의 성경해석만이 옳다는 독선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들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할 때 잘 기억했다가 멀리해야 합니다.

2.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지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인데, 왜 분별하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너무 가까이 있으면 분간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건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보기 힘듭니다. 자기 목소리도 자기한테만 다르게 들립니다. 다른 사람은 공기를 통해서 전달된 소리만 듣지만, 자신은 몸의 진동으로 전달된 소리도 듣기 때문입니다. 예전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로 지구에 가까이 그러니까 딱 붙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분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떨어져야 합니다. 좀 떨어져서 보는 것을 객관화라고 합니다. 물건이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물러서서 보고, 자기 목소리를 알고 싶으면 녹음해서 들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도 달에 비친 둥근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지구가 둥글다고 유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는 객관화가 가능해야 가까이에 있는 것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외식하는 자 즉 바리새인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합니다. 객관화가 매우 힘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자기 시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본문 앞 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특정한 종교행위는 잘 준수하지만, 전체적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특히 돈에 관심이 많아서 십일조를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돈에 대한 몰입이 더 중요한 공적인 의무는 무시하도록 했습니다.

3. 우리나라 교회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독재정권 시대에 보수교회가 민주화 운동을 한 예가 전혀 없었습니다. 70-90년대에는 정 정권도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니 순종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지금 광화문에서 집회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정당한 투표로 선출된 정권에 대해서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전처럼 고문당하고 감옥갈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정권에서 시위하지 말라고 했으면, 지금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참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일관성 있는 행동입니다.

요즘은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신천지의 공격이 심각하지만, 가까이는 세월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구원파로부터 정명석, 통일교, 천부교 등 강력한 이단이 끊임없이 일어났었고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앞으로도 또다른 이단이 동일한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교회는 잘 극복해 왔습니다. 따라서, 공포에 휩싸이면 안됩니다. 새로운 사회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교회지도자들이 공포을 조장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하면 안됩니다.

4. 결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 시대의 문제는 교회의 타락입니다. 엄밀하게는 바리새인들의 특징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종교행위는 엄격하게 지키지만, 비상식적인 행동은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타락을 감추기 위해서 반정부운동이라는 정치적인 이슈에 뛰어들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쇠락하는 건 이단이 기승을 부리는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나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교회의 타락이라는 내부 요인이 교회의 쇠락을 가져왔습니다. 해결책은 하나입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종말에 자연재해와 사건사고가 있어나는 이유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신 이유도 자신을 바라보라는 자기 객관화의 촉구였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옳은 것을 분별하십시오. 과몰입되어 있는 영역이 있다면 한 발짝 떨어져서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남을 비난하는데 해결책은 없습니다. 내 자신을 개혁하는데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04.21_부활의 증거

2019년 04월 2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44~49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저는 교회를 몇 년 다니면서도 부활절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진짜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믿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걸 믿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분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는 않는데, 다들 그랬다니까 믿는 척하거나 하니면 그러려니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활 신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와 부활의 증인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부활의 증거 1

– 기독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첫번째 증거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입니다.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축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시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름 충성스럽고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와 좌절, 분열과 갈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현대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니 가늘게라도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질적인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뛰어난 교주가 특별한 가르침과 기이한 기적을 행해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죽었습니다. 교주가 마련한 기반 위에 뛰어난 후계자들이 세력을 키워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이 물론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로마의 사형수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할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사형수를 믿는 종교일 뿐입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최후가 비참합니다. 그런 분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한가지 가능성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거짓말로 모의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독교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맞섰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멸절하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다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10대 박해로 정리합니다. 1대 박해인 네로 황제의 박해(AD 54~68년)에서부터 10대 박해인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AD 284~305년)까지 250년 이상을 박해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이보다 심한 박해를 이토록 오랫동안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던 그들을 이토록 맹렬하고 담대한 사자들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위협과 채찍, 감옥과 고문,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열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용맹한 사자들이 되어 목숨을 걸고 증언하도록 만든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와 역동적 능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콜로세움 아기 한 사형수를 믿는 종교가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종교가 로마 제국이 멸절하려던 종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불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천년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증거 2

– 성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두번째 증거는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예언된 사건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에 관한 예언은 구약의 족장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조와 함께 잔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깨어날 것을 암시하는 부활의 신앙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무덤)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라고 예언하였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충분한 증거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추상적이거나 환상적인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17:22)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32~36)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에 던져졌던 시체가 살아났던 사례도 있다.(왕하13:20~21) 단순히 예언만했다면 어쩌다가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나야만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라고 말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리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점말입니다. 부활을 하나의 독립된 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고,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연속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기록이 이 연속적인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 필연성을 알려줍니다. 단순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거나 실제로 죽었지만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 오셔야만하고 대신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고 죽으셔야만 하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연속적인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의 증거 3- 교회

예수님 부활의 세번째 증거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을 정보습득, 지적동의, 자기확신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인다거나 존재를 확신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데 그 사실을 사탄은 더 잘 인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믿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심겨진 감사와 감격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한가지 방법 외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의 인격적인 만남은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그것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고난받으심,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적으로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의 각성은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것을 의미하지만, 그 전에 자기자신을 보는 자기성찰력이 생깁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여전히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에너지입니다.

부활의 증인이다

증인은 증인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81111 예수님, 베드로를 만나주시다

2018년 11월 1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5:1~11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눅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

0. 만남

만남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현재는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책이지만,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톤레사프’는 캄보디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여인의 말은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지금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몬순이 닥치면 엄청난 폭우가 몰아쳐서 집이며 세간을 모조리 휩쓸어버리죠. 그러면 사람들은 공동으로 뗏목을 만들어서 몇 집이 함께 살아요. 비가 내리면 여기저기서 뗏목이 모습을 보이고,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죠. 바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저는 해마다 6개월 동안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모두 옆집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표정이군요. 하지만 이웃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상대방에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누구를 만난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 앞서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면 아직도 새학기가 되면 기대에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하고 말입니다. 반 아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기대합니다. 기성 세대는 워낙에 힘들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만남이 기쁠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만남에 관해 기대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만남이 기피해야 할 일이 된 이유는 만남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면 만남도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기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그래서 그의 삶이 기쁨과 기대로 가득차게 되었을까요?

1. 다가오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본문과 병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 4:18~20)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만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자 마자 모든 것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간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본문과 연계해서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기에 충분할 만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후에 따라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갔던 일을 생각하면 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법은 은밀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찾아온 줄로 오해할 정도로 말입니다. 신앙이 내가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지만, 좁은 생각일 수 있습니다.

만약 혹독한 고문을 당해서 신앙을 부인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신앙을 지켜왔지만, 고문이 너무 심해서 신앙을 부인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매우 편안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신앙 생활한 사람보다 실제로는 믿음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비합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니까 사람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해야 합니다.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쿠마는 좁은 의미의 구원 그러니까 구원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전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신비롭게 상호작용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잘난체하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반대로 한편으로는 깊은 안도감을 줍니다. 내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도 기댈 곳이 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지구는 멈춰있고 하늘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지구는 멈춰있고, 해가 도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도는 것은 해가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의 주변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대하며 신중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됩니다.

2. 부르시는 예수님

다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결단의 계기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말입니다. 결단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결단할만한 근거도 주십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말씀은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가라는 권유입니다. 그냥 놔두면 우리는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쁠때는 속삭이시고, 기분이 안좋을 때는 양심에 조용히 말씀하시지만, 고통중에 있을 때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기적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해야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번에 헌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무죄 판결 난 것이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을 체험했다. 기도 응답을 체험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확실한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확실한 체험일까요?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한 체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 체험입니다. 성령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사역은 죄의 각성 사역,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도록 조명하시는 사역,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죄인은 보통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양심이 악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한 양심의 자연적 작용으로도 때로는 통렬한 후회와 자책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변화는 오직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안이 열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 (고후 3:18) 나타납니다.

깊은 곳은 외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내면을 비추고 그 빛을 통해서 내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 깊은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잘 살게 해 주어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성을 깨달았을 때 감격하게 됩니다.

신문 기사에서 한 어머니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당신들은 댓글 한 줄 썼지만, 내 딸은 목숨을 버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댓글 때문에 삶을 마감한 딸을 둔 어머니였습니다. 댓글 한 줄도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악도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악의 불씨를 보아야 하고 그 비극성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인간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지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악이 있는 이상, 이 세상에는 비극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악의 불씨가 제거되지 않으면 어디나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죄악의 문제를 발견하고 슬퍼하고 붙들고 씨름한 사람만 그리스도께 감격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절망을 체험해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조명됩니다.

3. 만나주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세 번째이유는 베드로에게 영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말씀 잘 듣고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떻습니까?

본문과 같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건 기적을 체험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데 머물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자신을 보는 일이 일어납니다. 빛이 비치면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거룩하신 분을 만나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됨을 보게 됩니다. 구약 시대 이사야가 체험한 일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 하늘나라 재판정에 불리워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됩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더니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사야가 그전에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우리도 동일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는 이익 단체나 사교 장소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그런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염려할 필요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자신이 선택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교회, 진정한 교회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출처] 장영학,어서 와! 리더는 처음이지?

자기를 보는 것은 가장 높은 정신적 단계입니다. 하지만, 신앙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베드로는 이런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경황 없는 중에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다시피 예수님께서 다시 그를 찾아 와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에 이끌려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서 믿음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오셨고, 깊은 곳으로 가자고 권유하셨고,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러 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십니다.

2018.10.07_[교리] 예수님의 거룩

본문

눅 4:33~37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한줄 요약

예수님도 하나님처럼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은 이 땅에서 어떤 능력으로 나타났을까요?

개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0. 거룩이라는 항생제

성경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사람이셨으나 동시에 죄가 없으셨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천 사가 마리아에게 주님의 성육신을 고지했다.
–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 를 입증해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히 9:14) “죄를 범하지 아 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 라.”(요일 3:5)
주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참으로 사람이셨다고 주장하나 결코 육신에 속한 존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육욕은 타락의 결과이며 첫 아담은 창조될 때에 결코 육욕적이지 않았다. 그분은 참으로 사람이었지만 죄는 없으셨다.

 

발가락이 까져서 오래된 밴드를 붙이고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정도 지나니까 얇게 딱지는 생겼는데 무척 간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소독약을 찾아서 소독을 했더니 거품이 나면서 몹시 아팠습니다. 다음 날 다시 소독을 했더니 간지럽지 않고 낫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조금 까진 상처 때문에 오랫 동안 고생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나 노약자들은 어이없이 생명을 잃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항생제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병균이 우리 몸에 들어와도 그 병균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고생한 것입니다. 다행히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몸이 이겨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버티지 못한 것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변균이 강하면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발생한 페스트 때문에 인구의 30~50%가 죽었다고 합니다. 숫자로는 7,500만 명에서 2억 명 정도라고 하니까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오랫동안 큰 피해를 겪었습니다. 아이들이 오래 살지 못할까 봐 이름을 짓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전염병에 약하기 때문에 아이를 잃었을 때 슬픔을 줄이려고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전염병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이유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푸른 곰팡이가 병균을 죽이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인류는 몸 속에 침투한 병균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고 전염병을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몸 밖 상처에 있는 병균을 죽이는 약을 소독약이라고 하고, 몸 안에 침투한 병균을 죽이는 약을 항생제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병균이 침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의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떤 부분이 병을 죽이는 항생제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마음의 병균 : 더러운 영

성경은 영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영, 다른 말로 귀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영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영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병균이 몸에 침투하면 열이 나거나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거나 하는 증상이 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을 보고 병균이 침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영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비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영이 우리 마음에 침투하면 어떤 증상이 일어날까요?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더러워진다’라고 말입니다.

눅 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요즘에는 상처가 나면 가장 먼저 소독을 합니다. 소독만 잘해도 상처가 덧나지 않습니다. 소독을 안하면 상처가 덧나고 곯마서 나중에는 그 부위가 썩어들어갑니다. 소독은 더러운 균을 죽이는 것입니다. 더러운 균은 우리 몸을 썩게하는 균입니다.

영도 더러운 영이란 건, 우리 마음을 썩게하고 부패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영이란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중독입니다. 뭔가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마음입니다. 여기에 더러운 영이 침입하면, 중독이 됩니다. 알콜 중독, 도박 중독같이 마음이 중독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썩어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움하는 마음도 필요한 마음입니다. 나쁜 사람, 나쁜 일을 미워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악한 영이 침투하면 미움이 자기를 파괴하고 남도 파괴합니다.

더러운 균은 우리 몸의 건강한 세포를 곯게 해서 파괴합니다. 더러운 영도 우리 마음의 건강한 감정을 곯마서 파괴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더러운 영에 영향을 받은 마음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롬 1:29~31)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말씀 앞에 두 가지 더러운 행동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것과 동성애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악한 영의 영향입니다. 악한 영은 보이지 않고, 통증을 일으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더 큰 사람의 인생과 사회에 비극을 일으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이 더러운 영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마음의 항생제 : 거룩

마음에 항생제를 놓아야 합니다. 마음의 항생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거룩입니다.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악한 영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병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독약입니다. 항생제입니다.

어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빛이 입니다. 어둠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대포를 쏘아도 끄덕 없습니다. 잠시 총이나 대포가 반짝하는 동안 주춤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빛이 없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소독약, 항생제는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어떤 능력 있다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는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이 안 나가면 귀신한테 엄청 욕을 한답니다. 그러면 나간데요. 제가 놀란 이유는 이런 말을 듣고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해서 답답합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입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상처가 생겼는데 소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천으로 닦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상태가 안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귀신이 나가는 척 해주는 것이지 나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상태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입니다. 거룩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거룩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성품 앞에 거룩이라는 말을 붙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 하나님의 인내는 거룩한 인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셨기 때문에 말 한 마디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사도들을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했기 때문에 동일하게 말로 악한 영을 쫒아냈습니다. 하지만, 악한 영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가장 강력한 항생제이고 가장 강한 능력입니다. 가장 강한 귀신도 거룩한 사랑에는 견디지 못합니다.

안이숙 사모님의 죽으면 죽으리라에 보면, 감옥에서 미친 만주 여자를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주의 가난한 집에서 감자 한 부대에 팔려 10살 때에 중국 농부에게 시집을 갔다가 어떤 총각과 눈이 맞아 함께 공모하여 남편을 토막 내어 죽이고 도망치다 잡혀온 것이었다.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왔는데 쇠고랑에 묶여 고문을 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졌습니다. 옷도 더러고 몸에서 악취가 나서 사람들이 접근을 안했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안했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이 그 여인이 불쌍해서 자기 밥을 주고 꽁꽁 얼은 더러운 발을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날이 지나니까 이 여인이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오랜 기간 진심의 정성과 하나님의 사랑은 92번 그녀의 얼었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말도 없이 깊은 고민에 잠기어 그녀는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머리를 잡아 뜯고 가슴을 때리며 통회하고 있었다. 92번 그 모질고 악한 살인범이었던 그녀가 마치 무슨 아름다운 초상화 같이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이숙 여사를 통하여 그녀는 예수님을 보고 있었다. 검고 긴 머리는 뒤에 늘어지고 맑고 흰 얼굴에는 수심이 끼고 그 눈은 애원하는 불안의 눈이었지만 그렇게도 아름답게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92번의 사형집행일이 다가왔다.
“92번 나와!”
“아휴 어떻게 어떡하니 어떻게… 선생님 나 무서워요. 나 죽는 게 무서워요. 나 살려 주세요. 나 살려 주세요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 예수님이 널 사랑하셔. 언제나 네 옆에 계실거야 언제나 너와 함께 하실 거야.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예수님께 부탁해서 저를 꼭 남편 있는 곳에 가게 해 주세요. 가서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고 싶어요.”
“예수님이 항상 너를 인도하실 거야. 무서워하지 마.”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뵐게요.”

3. 치료의 결과 : 상하지 않음

항생제를 바르게 사용하면 건강해집니다. 예수님의 치료도 귀신들린 사람을 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회복시켰습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건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잠잠하도록 하셨습니다. 귀신과 대화하거나 물어보면 안됩니다. 마가복음에 대화하신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설교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윽박지르고 소리 높이는 등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고, 마음에 거룩한 사랑도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 식으로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깊이 회개했을 때 제 머리가 맑아지고 감정이 변화되고 몸의 경직이 풀렸습니다. 몸에 실질적인 회복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가 마땅한 존재라는 깨달음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깨달아졌을 때 결박이 풀어졌습니다. 청교도가 그렇게 주장한 일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거룩한 영은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긴가민가하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상처 없이 온전하게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본 받아 행할 때 동일하게 온전한 회복을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00. 이 말씀을 하신 이유

세상은 인간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병균으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 병균은 마음에 침투해서 악한 마음을 같게 하고 악한 행동한 하게 합니다. 양심을 마비시키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 병균은 죄입니다. 이 병균은 페스트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이 죄라는 병균을 죽이는 항생제가 없으면 인간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죄를 이길 수 있는 항생제가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항생제를 알고 바르게 사용합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립시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과경배

292 내일 일은 난 몰라요

2018.08.19_이 시대에 구속사가 필요한 이유(김영철 목사)

이번주는 평택 두란노 교회 김영철 목사님께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3:33~43, 2018년 08월 1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눅 23: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눅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눅 23: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눅 23: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눅 23: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눅 23: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눅 23: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눅 23: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눅 23: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눅 23: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눅 23: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2018.06.03_[교리] 보는 건 같아도 해석은 다 다릅니다

# 본문

누가복음 24:44~45

# 설교 듣기

# 핵심 구절(눅 24:44~45)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한줄 요약

사실을 보고 해석하는 방법을 관점이라고 하는데,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바른 관점을 배워야합니다. 성경을 보는 바른 관점이 교리입니다.

# 개요

교리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을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의 시작은 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0. 사람은 모두 관점이 다르다

한 살 차이로 세 자녀를 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자녀들을 키울 때 하루 종일 바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음악을 듣게 하며 노래를 불러 주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며 재우기까지 세 아이를 정신없이 키웠다.

이제 어른이 다 된 자녀들이 어린 시절을 간혹 기억해 냈다. 첫째는 어렸을 때 들은 동화를 기억하고 있었고, 둘째는 음악을, 셋째는 그림 그린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 자녀 모두가 여름날 개울에서 가재 잡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엄마는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똑같은 행동을 보아도 사람마다 기억에 남고 인상을 받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해석의 차이가 옵니다. 이런 해석의 차이를 관점이라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관점은 모든 사람이 다 다릅니다.

성경을 볼 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같은 성경을 보아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하게 됩니다. 세상 일이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불량한 교회, 이단이 나옵니다.

“나는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 믿는다”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관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나는 내 마음대로 믿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가진 관점이 바른지 그른지 확인하고 그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수정한 다음에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1. 교리를 가르치신 예수님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경을 보는 관점을 가르쳐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교리 교육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무작정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교리라고 하면 무언가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반성할 일입니다. 좋은 것이라도 강요하고 억압적으로 가르치면 안됩니다.

하지만, 교리가 무엇인지 알면 교리의 필요성을 알게 됩니다. 교리는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관점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객관화하고 검증한 관점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관점입니다.

2. 교리를 모르는 이유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정답이라고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번틀린 문제를계소속 틀리는 이유가 여기 다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원인은 두뇌의 경제성에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생각을 적게 하려는 경향이 있답니다. 생각을 적게 하려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고 마는것입니다. 자기 생각, 경험, 지식에 익숙한 대로 해석하려는 경향 때문에 바르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낯설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고난, 죽음, 부활을 가르치셔도 제자들의 생각은 그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무조건 교회다니면 복받는다는 왜곡된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복 받는 거 아닌가요?”
“무조건 복받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야 복받습니다. 그리고 복은 무조건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 형통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교회 다닌다고 복받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입니다. 아부한다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복주는 분이 아닙니다.

영국 ‘청교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는 “자신의 깊은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열심을 낼 수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누구를 비난하기 위해서 이 말은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복음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고 참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의 죄성을 경계하면서 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3. 교리는 곧 예수님

교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이 말은 교리에 따라서 바르게 성경을 공부하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닮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목회자 후안 까를로스 오리띠즈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참 신자입니다’라는 책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가 신자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지식으로 알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바른 교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교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00. 바른 관점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람마다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 또한 달라집니다. 따라서 성경만을 믿겠다는 말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자기 관점을 점검하지 않고 객관적 관점을 배우지 않으면 자기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른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교리를 통해서 지식을 쌓지 마시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도구로 활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5.13_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본문

누가복음 24:36~48 / 2018년 05월 13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한줄 요약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체험이 동반된 전인격적인 사건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성경을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깨달음은 전인격적인 사건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이 작용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체험입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을 다시 가르치신 이유는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성경을 배울 준비가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을 통해서 인격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때에야 깨달을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도 예수님께 성경을 많이 배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보고 그 사건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깊은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백한가지 이야기’를 보면 처음에 나오는 간디의 신발 얘기가 나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인도해방운동 지도자 간디(Mohandas K. Gandhi, 1869-1948)가 어느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출발에 임박해서 급히 기차에 뛰어 올랐습니다. 너무 서둘러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의 신발 한 짝이 플랫폼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신발은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평민이 가지기는 힘든 것이었습니다. 기차는 이미 출발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기차 밖으로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줍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 때 간디는 다른 쪽 발에 신고 있던 신발을 급히 벗어 기차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이 급작스러운 행동을 본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습니다. 신발 한 짝이 떨어진 것만 해도 아까운데 다른 한 짝을 고의로 벗어 기차 밖으로 던져 버리다니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을까요?

사람들은 간디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까운 신발을 어찌 그렇게 던져 버리십니까?” 그러자 간디는 웃음을 지으며 “어떤 가난한 사람이 떨어진 내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신발 한 짝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될 것이니 기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간디가 신발 한 짝이 벗겨졌을 때 다른 한 짝을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건 간디가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된 계기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사상을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발전시켰습니다. 간디는 성경에 매우 정통했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성경을 잘 따랐던 사람이 간디입니다. 그의 삶이 성경에서 힘을 얻었고 그가 독립운동을 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전략을 따랐습니다. 그는 힌두교인이었지만, 힌두교를 따르지 않고 성경을 따른 덕분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도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간디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놀라운 일을 행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제국 로마를 복음화했습니다. 그들이 로마를 복음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성경은 세 가지 방법을 알려줍니다.

1.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자

먼저, 불필요한 두려움과 의심을 해결해야 합니다.

(눅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두려움과 의심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면 속사람이 자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귀신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귀신이 있다면 하나님도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성품을 알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래키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배려심이 깊고 섬세하십니다.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더 나아가 의심하는 마음도 꾸짖지 않고 풀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도마를 꾸짖으신 이유는 믿을만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비뚤어진 마음을 꾸짖으신 것이지 의심 자체를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2.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자

두 번째로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눅 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께서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영이라면 음식을 먹지 못할 텐데 잡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은 바르게 이해하지만,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방송과 뉴스를 보십시오. 매우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옳은 것인지 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현실을 바르게 보는 눈은 조금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몇 달 전에 프로야구가 개막한지 얼마되지 않알을 때 어떤 성도님과 식사하면서 어떤 팀을 응원하냐고 물어보다가 한화 이글스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한 팀을 응원하지 않고 매년 돌아가면서 응원하는데, 올해는 한화하고 롯데를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제가 한화가 앞으로 잘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한화가 연패를 당해서 분위기가 안 좋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신 있게 앞으로 잘 할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한화가 경기하는 것을 보니까 선수들 정신력과 실력이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냉철하게 보고 내린 예상이었습니다. 지금은 한화가 3등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사람마다 어떤 부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떤 면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사람이 약한 사람은 자신의 바람, 편견, 감정, 어리석음에 휩쓸려서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봅니다.

속사람이 강해지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3. 고난 중 형통을 받아들이자

세 번째로 고난 중 형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항상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부활은 자동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고난을 달게 받아들이고 고난을 통한 성장을 기대하지 못하면 속사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야는 쉽게 돈벌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구원받고 쉽게 능력받고, 쉽게 형통한다는 말이 사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치러야할 댓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십시오. 형통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보십시오. 고난 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고난 중 형통할 것입니다.
고난 중 형통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최고의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결론

스탠리 존스라는 인도 선교사가 간디를 만난 일화를 책에 소개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간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꺼냈지요. “마하트마 간디, 저는 인도에서 기독교가 생활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외국 사람 또는 외국 정부와 동일시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빨리 기독교가 인도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인도의 정신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인도를 구원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간디는 제 말을 듣고 아주 엄숙하고도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우선 여러분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혼으로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면서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종교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지 말고 타협을 하지 말 것을 제안합니다.”

간디의 조언은 계속되지요. “세 번째로 저는 여러분이 사랑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 정신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을 해 내는 강력한 원동력으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도덕적 세계에서 실제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간디는 그 기독교의 사랑이 개인들 사이와 집단들 사이, 인종과 나라들 사이에 적용되길 바라지요. 그 사랑이 세계를 통합시키고 구원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의 의미에 너무나 민감한 영혼을 지니고 있던 간디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 주었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를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비기독교 종교와 문화 속에 있는 장점들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그들에게 접근할 때 보다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간디가 객관적인 시각에서 기독교가 부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성경을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경의 깊은 세계로 인도받을 것입니다.

찬양과경배. 298 주 품에 품으소서

2018.04.29_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랴

본문

누가복음 21:28~35 / 2018년 04월 2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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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한줄 요약

예수님은 좌절감에 빠져서 마음이 차가워지고 무기력해진 제자들에게 참된 말씀으로 마음을 뜨겁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열정에 기름붓기

http://www.10puzzle.com/piece/25991-열정에-기름붓기-송강호와-봉준호.html

3년 전, 패기 넘치는 두 청년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재선(27)·표시형(26) 대표인데요. “꿈을 향해 달리는 청년들 위해 힘을 실어주자”고 결심, 동기부여 콘텐츠를 제작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컨텐츠가 ‘열정에 기름붓기’입니다.

저는 번영주의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열정에 기름붓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이나 하면 된다는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허풍만 치고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불신앙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사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혼동해도 안되고, 그 사고가 기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도할 뿐입니다. 신앙과 거짓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정에 기름을 부은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1. 떡을 축사하시고 주시니 – 기도

첫째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가 아니고 밥을 사주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금식 기도가 능력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만 금식 기도하십시오. 남한테는 금식 기도하라고 하지 마세요.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책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몇 몇 구절이 기억에 남는데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밥 먹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하면 금식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금식 기도는 밥 먹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을 만큼 절실할 때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밥을 주시면서 기도할 때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인간적인 필요를 채워줄 때 마음이 열리고 기도가 강력해 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 기도를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놀기 좋아한다고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금식 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잔칫날 금식하거나 일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해야 할 때는 금식하셨고, 기도해야 할 때는 기도하셨습니다. 주로 홀로 계실 때 금식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억지로 금식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도록 권면하셨습니다.

2. 성경을 풀어 주실 때 – 말씀

말씀을 바로 알아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정통 기독교 교리가 주는 감동을 영혼의 중심을 태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제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는 이 우주보다 크고 인간의 마음보다 깊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어떤 사상과 철학보다 고상합니다. 어떤 시보다 숭고하고 어떤 소설보다 충격적입니다.

이 교리를 위해서 인생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단 교리를 듣고 좋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딧불을 보고 밝다하고, 태양을 보고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보고 마음이 이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예루살렘에 돌아가 – 교제

열정이 살아나기 위해서 필요한 세 번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교제입니다. 다들 아시듯이 모닥불을 보면 나무가 하나 있을 때는 꺼지기 쉽지만, 여러개 모여 있으면 잘 안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입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의리로 서로를 속박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집착이 되고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가는 동행의 의미입니다. 제가 가는 목표가 여러분과 비슷하다면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결론

좌절감에 빠진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정을 받아야 합니다. 세 가지를 통해서 영적인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교제입니다. 신앙의 베이직입니다. 신앙의 베이직에 힘쓸 때 열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8.04.22_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본문

누가복음 24:13~27 / 2018년 04월 2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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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좌절감에 휩싸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방법으로 새로운 소망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실패는 없고, 시행착오만 있다

좌절감은 요즘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굶어죽는 사람보다 좌절해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일지 모릅니다. 20대 청년 실업자, 30대 직장인, 40~50대 명퇴 대상자들이 모두 좌절감이 싸여 있습니다.

좌절감은 뜻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서 마음이 꺾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류콤플렉스, 일등주의, 성공지상주의에 빠진 이유 중에 하나는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좌절감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도전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좌절감입니다. 다시 일어나면 쓰러진 일은 시행착오가 됩니다.

에디슨이 전구들 만들 때 실패한 일은 유명합니다. 에디슨은 필라멘트에 적합한 물질을 찾기 위해 다양한 재료들을 실험에 사용했습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조각부터 머리카락, 옷감, 백금 등 수많은 재료들을 사용하여 무려 1,000여 번이 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에디슨은 실험을 머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실험실에 굴러다니던 싸구려 일본산 부채 하나가 에디슨의 눈에 들어왔다. 에디슨은 그 부채의 부챗살을 가늘게 잘라 필라멘트로 만들었고, 그 부챗살로 만든 필라멘트는 1,500시간을 넘게 버터주어 마침내 상용화할 수 있는 전구를 발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에디슨이 몇 백 번쯤 실험을 하다가 포기하였다면 전구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나 다른 발명가의 손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며, 어쩌면 아직까지도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에디슨의 성공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디슨의 성공 비결인 ‘포기하지 않는 것’을 성공 확률이 100%인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1.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좌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좌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대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가 계속되면 사람은 좌절하게 됩니다. 이런 좌절이 두 제자를 휩싸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갔다면, 이들은 좌절감 때문에 고향으로 내렸갔습니다. 그들이 좌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은 17절과 23~24절 두 부분입니다.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여기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슬퍼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3~24절을 보면

(24:23~2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증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데도 고향으로 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습니다. 마음이 꺾여서 좌절한 것입니다.

좌절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불 꺼진 난로, 시동 꺼진 자동차 같습니다. 한숨만 쉬고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납니다. 에너지가 있는 사람의 기력도 빨아들여서 함께 무기력하게 만드는 늪같이 됩니다. 이처럼기대가 꺾이고 실패가 쌓여서 좌절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은 어떻게 변화시키셨을까요?

2.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 오해

사람이 좌절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처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사람이 좌절하는 이유는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어떤 오해를 했습니까? 예수님을 능력있는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4: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4:23~2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여기까지는 오해가 아닙니다. 오해는 바로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24:20~21)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속량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군사적인 승리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 로마 군대 철수, 강력한 국가로 성장 등이 이들이 바란 속량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량은 이들의 마음에 없었습니다.

두 제자의 사고 방식은 이겁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반대자를 물리치고 굴복시켜서 자기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각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고 방식은 정반대였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약한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대신해서 그들이 받을 벌을 대신 받을 능력이 있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인류를 굴복시키는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넣어주려는 마음입니다.

3.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해결

예수님은 그들의 사고 방식을 하나씩 교정해 주셨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공부해도 성경 지식만 늘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잘못된 생각이 고쳐지지 않으면, 좌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시대가 좌절에 휩싸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거짓된 신화와 과장된 광고 때문입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데 성공해야 할 것처럼 경쟁으로 몰아갑니다. 반칙으로 승리한 것을 위대한 업적인 것처럼 과장합니다.

[교회에서마저 성공, 번영, 기적을 최고의 목적으로 가르칩니다. 교역자를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교체합니다. 다른 교회 교인에게 전도합니다. 방언을 연습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역자가 성령 충만을 주장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 교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물의를 일으키는 목회자가 뉴스에 나올 때마다 그 사람에게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물의를 일으켜도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추종자들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성공의 길을 안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청해서 고난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살려고 하면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고난 속에서 형통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하나하나 고쳐주십니다. 복음이 아닌 것을 버리게 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복음의 길을 가야한다고 설득하십니다. 그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결론

좌절감은 요즘 사람들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성공과 번영으로 몰아가려는 풍조가 좌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두가 성공할 수 없는 구조인데 경쟁을 과열시키고 모두가 번영할 수 없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헛된 마음을 불어넣습니다.

좌절감을 극복하는 길은 ‘고난 중 형통’이라는 복음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린 마음을 되돌려서 복음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성공의 길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섬김의 삶을 살면 그리스도의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2018.03.04_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본문

누가복음 10:25–37, 신명기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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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한줄 요약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좇으면서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절 세번째 주간에는 신명기서가 인용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0. 율법은 가이드(a guide)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많은 벽을 만났는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또다른 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즉, 가르치는 문제에 대한 벽이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잘 깨닫는 것도 힘들지만, 그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교육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해서 고민하다 보니까 답은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가르침의 대가가 성경에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침, 교육의 대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많자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맞춤형 단계적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르셨고, 단계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영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하신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율법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고, 율법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율법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26~28. 영생을 얻는 방법

율법학자 한 명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답변은 의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단순하게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앞에서 하신 말씀과 대답이 다를까요? 그 이유는 대상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대상이었습니다.

[14:5~6]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열 두 제가는 아니었지만, 제자들 못지 않은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은 사람은 율법학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과는 가르침이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맞춤형 교육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던 말씀을 대상에 관계없이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율법학자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율법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율법학자가 신명기 6:4~5절 말씀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이 말씀을 율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정답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끄집어 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인격성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지키는데만 힘썼지 율법의 정신을 지켜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태도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그들은 비인격적인 법률에 충성했을 뿐 인격적인 하나님은 거부했습니다.

2. 29~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인격성을 강조하셨다는 것은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게 생겼는데,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몰래 피해갔습니다. 또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고 생각을 고정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양심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데 온갖 거짓말을 일삼는 목사, 주일 성수는 잘하는데 직원들 착취하는 장로, 술 담배하지 않는데 돈 떼어먹는 집사, 하나님 음성 듣는다고 하는데 자기밖에 모르는 청년, 건전하지 않은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는 헛똑똑이 교인 등입니다.

제가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표현하려고 했냐면, 어떤 한 가지 원칙을 나름대로 철처하게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선한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양심이 없는데 뭔가 충성하니까 자기 스스로 신앙 생활 잘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도 극단적인 예를 들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관련 뉴스를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을 편들고 어리석은 주장을 일삼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회 다닌다고 이웃이 아니라 교회 안다녀도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에 더 근접했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던 불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3. 37.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 말씀의 절정은 37절입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으니 그것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단계적 교육입니다. 율법학자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나를 믿어야 하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직 그 단계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도 비슷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이 있으니까 홈페이지에서 찾아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말로만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또 교회 안의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만 하고 교회 안에서만 충성, 봉사, 헌신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에서 강자의 횡포에 항의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손해를 보아도 공의를 지지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을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 떨리게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헛된 충성을 믿음의 증표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온 세상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지키다가 손해를 보고 좌절했을 때 비로소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성령 충만을 깨달을 것이고 깊은 확신 속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맞춤형 단계적 교육을 실시하셨습니다. 본문의 율법학자는 오늘날 교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깊은 곳의 양심은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신앙 생활 잘하고 있지요? 저는 확실하게 구원 받았지요?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배웠고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 율법학자의 선한 양심을 일깨우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경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 사마리아인보다 악한 삶을 살면서 영생을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일은 율법학자의 몫입니다. 그가 어떤 길로 갈지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은 선한 일반인 즉, 교회 안다니는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신앙이 좋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문제가 있든지 그들이 문제가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선한 양심의 문제입니다. 논리와 사변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헛된 확신에서 벗어나서 의를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어려운 길을 가라고 권유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가라고 이끄십니다. 헛된 확신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7.12.31_[송년] 과거를 통해 보는 미래

사도행전 7:30~60
2017년 12월 31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한줄 요약]

스데반을 구약 성경과 과거 역사에 정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개요]

송년입니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더 알기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0.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저는 과거가 미래에 반복된다는 사실을 바둑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둑에서 지면 분한 마음에 한 판 더를 외치면서 자꾸 새로운 바둑을 많이 두려고만 했습니다. ‘내가 그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면서, 새로운 판을 두면 지금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바둑을 두게 되는데, 바둑이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지게 됩니다. 바둑을 새롭게 두더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래가 새롭지 않고, 과거의 반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엉뚱하게도 바둑 실력이 가장 많이 늘게된 계기는 새로운 판을 빨리 많이 두어서가 아니라 복기를 배우면서부터입니다. 복기란 바둑을 한 판 끝낸 다음에 지금 둔 바둑을 다시 두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난 바둑을 다시 두면서 내가 그때 왜 여기에 두었는지 생각해 보고, 상대방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달르게 전개된 것은 무엇인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바둑 실력이 늘어갑니다. 다른 사람이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기보 몇 개는 기본적으로 외웁니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도 복기를 통해서 실력을 향상 시킨다고 합니다. 요즘은 오답 노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오답 노트는 전에 틀린 문제를 따로 적어놓고 주기적으로 다시 풀어보는 노트입니다. 틀린 문제는 또 틀리기 때문입니다. 기억에서 지워진 후에 틀렸던 문제를 풀어보면 놀랄만큼 똑같이 틀립니다.

다른 측면이지만 사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이 있어납니다. 아웃도어 판매하는 매니저님한테 들었는데 등산복을 사는 사람이 또 산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등산복 한 두 벌 사면 더 안사지 않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매번 산에 갈때마다 다른 등산복 입고 가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시더라구요.

보험도 한 번 들은 사람이 또 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기 당하는 사람도 한 번 사기 당했으니까 안 당하는게 아니라 또 사기당하는 경우가 많고 이단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은 또 이단 교회를 가거나 건전하지 않은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러 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과거에 했던 일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새롭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아지 못하고 익숙한 과거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 30~53. 스데반은 과거에 정통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초창기 교회의 집사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성령에 충만했던 분이 스데반입니다. 이분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 성경, 즉 과거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내용은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기 전에 했던 마지막 설교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대하2:6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그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것이 구약 시대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구약 시대라고 해서 성전에서 제사지는면 구원을 받는게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의지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들 통하지 않고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조상들처럼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즉, 조상들도 성령을 거스렸는데 당신들도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는 단어를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성령님을 아무리 칭송해도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모욕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성령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면 됩니다.

2. 54~60. 스데반은 바울을 통해서 미래를 살았습니다

한편, 과거가 과거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열어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가장 먼저 순교한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과 은사, 그리고 인격이 너무나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과거로 묻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의 삶을 대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교회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런 상황을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내 집 마련하듯이 내 예배당을 마련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더 알아가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스데반도 그렇고 모든 분들이 번듯한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으면 무엇을 남겼을까요?

바른 믿음, 바른 생각, 바른 행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바른 믿음과 생각과 행실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집착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 믿음과 생각과 인격이 바르지 못한 것을 봅니다. 구약 시대도 그랬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우리 교회가 그냥 해산된다고 해도 남는 것이 없을까요?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건물이 아니라 계속해서 영향력을 주게 될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3. 과거를 통해 미래를 봅시다

오늘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은 우리가 좀전에 기도한 것처럼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합시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복기할 것은 철저하게 복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감옥에 넣은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현대의 이순신 장군은 또 감옥에 넣고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고 그분만이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본질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을 정립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송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과거를 바르게 성찰함으로 미래를 준비합시다

2017.12.24_[성탄절] 근원 치료를 위해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 02:21~35
2017년 12월 2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개요]

성탄절은 모든 명절 중에서 가장 기쁜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의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근원을 알고 나면 성탄절의 기쁨은 훨씬 더 커집니다. 오늘은 성탄절의 의미를 알고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0. 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들은 과학 발전, 제도 개선, 윤리 교육 등을 통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들도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은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안티 기독교 운동들에도 그런 경향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는 운동이 이미 있었고 대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합니다.

대실패를 겪은 운동이 뭐냐면 공산주의 입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나라에도 큰 비극을 남겼고 지금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시작은 원래 하나님 없이 인간이 천국을 만들겠다는 이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문명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차별이 심해지는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 것입니다. 그들은 귀족과 천민,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등의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고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상에 많은 지식인, 양심적인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문제의 원인 중에 하나가 기독교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는 기득권을 변호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없어져야 할 악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천국을 만들겠다는 인본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 전무후무한 지옥을 펼쳐놓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천국을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은 지옥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1. 인간의 오류

1996년 8월 25일 <사람아! 아, 사람아!(人啊,人!)>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중국 여작가 다이허우잉(戴厚英)이 상하이 자신의 집에서 피살돼 전세계의 독자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그녀를 살해한 범인이 바로 그녀가 힘겨운 살림에도 원고료를 모아 물심양면 학업을 도와주던 고향 출신 학생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일기 기록에서 단서를 찾아 범인을 검거했는데 고향의 한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돼 후원해 주던 학생이었다. 범인은 다이허우잉이 시장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그녀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다가 그녀가 돌아오자 놀란 나머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허우잉의 삶은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치열하고 파란만장하다. 다이허우잉은 1938년 3월, 중국 안훼이(安徽)성의 작은 시골에서 3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1960년 상하이의 화둥(華東)사범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상하이작가협회 문학연구소에 배속되어 문학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1968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저명한 시인 원지에(聞捷)를 검은시인 우파로 심문하다가 그의 시에 매료됐고 결국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이 문화혁명(문혁)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그녀도 반동으로 몰려 수난을 당해야 했으며 1971년 남편 원지에는 자살하고 만다. 다이허우잉은 요동치던 시대의 비극적 사랑을 그녀의 처녀작 <시인의 죽음(詩人的死)>에서 소설화하며 작가로서의 길에 들어선다.

1980년대 초 <사람아! 아, 사람아!>를 발표하는데 중국문단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더욱 유명해져 세계 8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다. 우리나라에도 신영복 작가에 의해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인간의 피와 눈물의 흔적을 썼고, 비틀려진 영혼의 고통스런 신음을 썼고, 암흑 속에서 솟아오른 정신의 불꽃을 썼다. ‘영혼이여, 돌아오라!’고 외치며 무한한 환희와 더불어 인간성의 회복을 기록했다.”

<사람아! 아, 사람아!> 저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이허우잉의 작품은 문혁 기간 동안 자신이 경험한 치열한 삶과 그 상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인간 내면의 섬세한 감정과 문양들을 뛰어난 통찰과 냉철한 분석으로 형상화내 휴머니즘문학과 상흔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진실이 조작되어 거부 당하는 것이 일상으로 벌어지던 시대, 찢어진 사진처럼 싫긴 하지만 잊을 수는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암흑 속에서 진리를 고뇌하던 한 인간의 불꽃같은 삶이 여전히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제가 다우허우잉에 대해서 좀 길게 소개한 이유는 그가 쓴 책 ‘사람아, 아 사람아’의 제목에 이끌려서 입니다.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공산주의 지도부들의 권력투쟁의 한 모습이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이 다우허우잉입니다.

자를 대고 직선을 그었는데, 비뚤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잘 대고 그렸는데 또 비뚤어졌습니다. 다시 그려도 비뚤여졌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이 뭐냐면, 자가 비뚤여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은혜의 시작

사람에게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서 마땅히 해야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서 내 삶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신앙은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이란 분은 예수님의 사역을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마음에 관한 사역입니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찾으러 오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2:17에서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시니라”고 말씀합니다.

3. 믿음이란?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수술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수술 방법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데 힘쓰는 것의 10분의 1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기독교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21:9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설더라”고 하십니다.

[결론]

성탄절에 예수님이 나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017.05.14_좌절감의 치유

누가복음 24:13~35
좌절감의 치유

2017년 05월 1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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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한줄 요약]
뜻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좌절감에 빠진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셨을까요?

[개요]
1. 첫째, 좌절감은 잘못된 전제를 버릴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 번영주의
2. 둘째, 예수님의 큰 그림을 알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 고난 – 십자가 – 부활.
3. 셋째 –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알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 친밀한 교제

[결론] 예수님 안에서 좌절은 소망으로 변합니다.

2016.11.20_[추수감사절] 감사하는 믿음

2016년 11월 20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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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한줄 요약]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인격을 신뢰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따라서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제자도를 가르치시던 때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 고쳐주심
2.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신 이유
제사장이 나병이 치료된 것을 검증해야 정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
주도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습관을 키워주기 위해
3. 감사한 이방인 한 사람
다른 유대인 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 감사가 없었음
감사는 인격적 존재에 대한 감정. 그래서 믿음임

[결론] 감사는 믿음의 충분조건이다.

2016.09.04_복음의 기쁨

2016년 09월 04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3:32-43, 히브리서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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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가 가져올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
    좌우에 두 강도가 함께 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2. 예수님이 옳으셨다
    내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 험담하기보다 그를 품는다.
    나는 관계가 회복될 때의 기쁨을 안다.
    몰래 숨겨 두고 싶던 돈을 기부한다. 나는 더 많이 베푸는 기쁨을 안다.
    나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만, 단순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진실할 때의 기쁨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론]십자가 고통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신 예수님이 옳으셨다

2016.04.17_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016년 04월 17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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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

[한줄 요약]
믿음을 깆기 위해서 합리적인 의심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 은혜에 대한 선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육체로 나타나심
    육체로 부활하지만 영광스럽게 변한 육체를 갖게 됨
  2. 육체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면서 신적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영혼과 몸이 분리될 수 없는 전인격을 이룹니다
  3. 합리적 의심과 믿음
    훌륭한 신앙인은 모두 최고의 지성인(자기객관성을 가진 사람)
    믿음은 아부나 아첨이 아니라 신앙의 가치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믿는 자가 됩시다

2016.04.10_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2016년 04월 10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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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한줄 요약]
마음이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르게 보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개요]

  1.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따라가심
    두 제자들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심
  2. 마음이 뜨거워지려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른 관점은 역사적, 교리적 방법입니다
  3. 식사 교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식사 교제를 통해서 마음이 열립니다

[결론] 예수님을 만나서 뜨거운 마음을 체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