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회심 1

John Wesley’s thoughts before his conversion

     회심 전에 가지고 있었던 웨슬리의 자기이해

http://www.e-n.org.uk/2003-06/2194-‘Strangely-warmed’.htm

 

John Wesley was born on June 17 1703 in Epworth, Lincolnshire. 존 웨슬리는 1703년 7월 링컨셔의 엡워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It was on May 24 1738 that Wesley received assurance of salvation in a momentous experience of conversion. It lit the fire of evangelistic zeal in his heart which continued until his death in 1791. 웨슬리가 회심의 경험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은 1738년 5월24일이었다. 이 경험은 1791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가슴에 복음전도의 열정을 불붙어 있게 하였다.

 

Before his conversion, he had met Peter Bohler, a Moravian missionary, and had been convinced by him that salvation is by faith alone. 그가 회심하기 전에 그는 모라비안계통의 선교사였던 피터 뵐러를 만나서 구원이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It is interesting to read two letters John Wesley wrote just prior to his Aldersgate experience. 회심을 체험한 알더스게이트 사건 바로 직전에 웨슬리가 보냈던 두 통의 편지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The first is to William Law, who for 12 years had been his mentor and whose Serious Call and Christian Perfection he had previously studied avidly. 첫번째 것은 윌리엄 로에게 보낸 것인데, 로는 12년 동안 웨슬리의 영적 지도자였었고 로의 책, <진지한 요청과 기독교인의 완전 Serious Call and 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책을 웨슬리는 열심히 탐독하였었다. The second is to an unidentified friend, who, like Wesley, was seeking salvation. 둘째 편지는 신원불명의 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인데, 이 친구는 웨슬리처럼 구원을 추구하는 구도자이다.

 

 

역주: 윌리엄 로는 알미니안주의신학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기독교인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쓴 그의 저작은 거의 고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편지를 보면 윌리엄 로의 책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신랄하게 통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비판없이 윌리엄 로의 책이 추천되고 있는 것을 고려할 이런 편지의 공개는 참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윌리엄 로에게 요한 웨슬리가 편지를 보낸 싯점은 바로 그가 회심을 경험하기 바로 10 입니다. 그리고 무명의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회심하는 당일 오전중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서 나의 영혼의 상태를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To William Law/ 윌리엄 로에게
    [London, May 14 1738]

 

 

Reverend Sir,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It is in obedience to what I think to be the call of God that I, who have the sentence of death in my own soul, take upon me to write to you, of whom I have often desired to learn the first elements of the gospel of Christ. 영혼의 사망선고를 받은 저로서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제가 생각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서 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첫째 요소를 배우기를 때때로 소망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If you are born of God, you will approve of the design, though it may be but weakly executed. If not, I shall grieve for you, not for myself. For as I seek not the praise of men, neither regard I the contempt either of you or of any other. 선생님께서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셨다면 그렇게 태어나게 하신 계획을 또한 인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계획이 비록 아주 미세하게 실시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탄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람의 칭찬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선생님께서 저를 모욕하시든, 다른 어느 누구가 모욕하든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For two years (more especially) I have been preaching after the model of your two practical treatises; and all who heard have allowed that the law is great, wonderful and holy. But no sooner did they attempt to fulfil it, but they found that it is too high for man, and that by doing ‘the works of the law shall no flesh living be justified’. 저는 (더욱 특별하게) 최근 2년 동안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실제적인 모델에 따라서 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율법이란 위대하고 기묘하며 거룩한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율법을 성취하려고 애쓰자 마자 그것은 사람들이 성취하기에는 너무 고상한 것과 “율법의 행위를 따라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To remedy this, I exhorted them, and stirred up myself, to pray earnestly for the grace of God, and to use all the other means of obtaining that grace which the all-wise God hath appointed. But still, both they and I were more and more convinced that this is a law by which a man cannot live; the law in our members continually warring against it, and bringing us into deeper captivity to the law of sin. 이런 문제점을 수정하기 위해서 저는 그들에게 또한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열심으로 구하여야 하고 또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지명해 놓으신 모든 방편들을 사용하도록 권면하였고 또한 나 자신도 그렇게 실행하였습니다.

 

Under this heavy yoke I might have groaned till death, had not an holy man, to whom God lately directed me, upon my complaining thereof, answered at once: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with all thy heart, an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to thee. This faith, indeed, as well as the salvation it brings, is the free gift of God. But seek, and thou shalt find. Strip thyself naked of thy own works and thy own righteousness, and fly to Him. For whosoever cometh unto Him, He will in no wise cast out.’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인도해 주신 거룩한 어떤 분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 무거운 멍에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신음할 뻔 했었습니다. 그 분은 제가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너의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어떤 일도 너에게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값없으신 선물이다. 하지만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너의 모든 행위와 너 자신의 의로움을 벗어제쳐 버리고 그 분에게로 도망하라. 그 분에게로 가는 자마다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Now, sir, suffer me to ask: How will you answer it to our common Lord that you never gave me this advice? 이제, 선생님, 질문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런 조언을 전혀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의 주가 되시는 분에게 어떻게 설명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Did you never read the Acts of the Apostles, or the answer of Paul to him who said, ‘What must I do to be saved?’ Or are you wiser than he? 선생님께서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간수의 질문에 사도바울이 한 답변을 읽어보지 않으셨나요? Why did I scarce ever hear you name the name of Christ? 왜 저는 선생님의 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 드문 것일까요? never, so as to ground anything upon ‘faith in His blood’? ‘그의 피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어떤 것을 기초하는 것으로서 언급하신 것 말입니다. Who is this who is laying another foundation? 다른 기초를 놓고 있는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If you say you advised other things as preparatory to this, what is this but laying a foundation below the foundation?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들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하신다면 그 기초 아래에 놓여져야 할 참된 기초 외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Is not Christ, then, the first as well as the last? 마지막이 되실 뿐만 아니라 처음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니던가요? If you say you advised them because you knew that I had faith already, verily you knew nothing of me; you discerned not my spirit at all. 만약 제가 믿음이 있는 줄을 선생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런 조언들을 하셨다고 하신다면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저의 영혼의 상태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I know that I had not faith, unless the faith of a devil, the faith of Judas, that speculative, notional, airy shadow, which lives in the head, not in the heart. 저는 믿음이 전혀 없었더랬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면 단지 마귀도 가질 수 있는 믿음, 유다의 믿음, 그 사변적이고 관념적이며 공중에 그림자일 뿐인, 곧 머리 속에만 있지 마음에는 없는 그런 믿음이었을 뿐입니다. But what is this to the living, justifying faith in the blood of Jesus? the faith that cleanseth from sin, that gives us to have free access to the Father, to ‘rejoice in hope of the glory of God’, to have ‘the love of God shed abroad in our hearts by the Holy Ghost’ which dwelleth in us, and ‘the Spirit itself bearing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하지만, 예수의 보혈을 믿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산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죄를 씻어주고, 아버지에게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믿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비춰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믿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성령 그 분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서 증거하는 그런 믿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입니까?

 

I beseech you, sir, by the mercies of God, to consider deeply and impartially, whether the true reason of your never pressing this upon me was not this – that you had it not yourself; whether that man of God was not in the right who gave this account of a late interview he had with you – ‘I began speaking to him of faith in Christ: he was silent.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선생님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한 번도 이런 조언을 해주시지 않은 참된 이유가 선생님께서 전혀 그런 것을 모르셨던 것은 아닌지, 선생님과 대담을 나눴던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선생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기 시작하자 선생님께서는 침묵만 하셨다”고 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을 과연 진실되지 않은 것인지를 참으로 깊히 그리고 공정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Then he began to speak of Mystical matters. 그리고 그 사람은 신비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I spake to him of faith in Christ again: he was silent. 제가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말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그 사람이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Then he began to speak of Mystical matters again. 그는 저에게 신비한 일들을 다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I saw his state at once.’ And a very dangerous one in his judgement, whom I know to have the Spirit of God. 저는 당장에 그의 상태를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아주 위험한 일이겠지만, 제가 보기로는 그렇게 간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Once more, sir, let me beg you to consider whether your extreme roughness, and morose and sour behaviour, at least on many occasions, can possibly be the fruit of a living faith in Christ. If not, may the God of peace and love fill up what is yet wanting in you! – I am, reverend sir, 한 번 더 선생님께 간청합니다. 여러 경우에 보여주시는 선생님의 그 극단적으로 거친 행동, 그리고 우울함과 매서운 행동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살아있는 신앙의 열매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열매들이 아니라면, 선생님 안에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것들을 평강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존경하는 선생님, .

 
Your humble servant 선생님의 비천한 종일 뿐입니다.

 

 

  1. To a friend 친구에게
    [London, May 24 1738]

Oh why is it that so great, so wise, so holy a God will use such an instrument as me! Lord,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wilt Thou send the dead to raise the dead? Yea, Thou sendest whom Thou wilt send, and showest mercy by whom Thou wilt show mercy! Amen! Be it, then, according to Thy will! If Thou speak the word, Judas shall cast out devils.오 왜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도구로 삼으시는 것일까! 주님,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죽은 자를 보내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보낼 자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비를 나타내실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아멘! 그러면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될지어다. 만약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유다도 귀신들을 쫓아낼 것입니다.

 

I feel what you say (though not enough), for I am under the same condemnation. I see that the whole law of God is holy, just, and good. I know every thought, every temper of my soul ought to bear God’s image and superscription. But how am I fallen from the glory of God! I feel that ‘I am sold under sin’. I know that I, too, deserve nothing but wrath, being full of all abominations, and having no good thing in me to atone for them or to remove the wrath of God.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말한 것을 느끼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도 너와 같은 저주의 상태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거룩한 것이고 의롭고 또한 선한 것임을 알고 있어.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기질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계명을 드러내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거든. 하지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는가! “나는 죄아래 팔렸다”고 느껴. 나도 또한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어. 저주받을 것들로 넘치는데 그것들을 처리할 만한 것,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어떤 선한 것이 내 안에는 전혀 없단 말이야.

 

All my works, my righteousness, my prayers need an atonement for themselves. So that my mouth is stopped. I have nothing to plead. God is holy; I am unholy. God is a consuming fire; I am altogether a sinner, meet to be consumed. 나의 모든 행위, 나의 의, 나의 기도는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야. 내 입술로는 할 말이 없어. 무엇도 탄원할 만한 것이 없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데, 나는 불결해.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길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야, 소멸당하기에 딱 맞는 그런 죄인이란 말이야.

 

Yet I hear a voice (and is it not the voice of God?) saying, ‘Believe, and thou shalt be saved. He that believeth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지만 나는 한 목소리를 듣고 있어(이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 소리는 나에게 말하기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Oh let no one deceive us by vain words, as if we had already attained this faith! By its fruits we shall know. Do we already feel ‘peace with God’ and ‘joy in the Holy Ghost’? Does ‘His Spirit bear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the children of God’? Alas! with mine He does not. Nor, I fear, with yours. O Thou Saviour of men, save us from trusting in anything but Thee! Draw us after Thee! Let us be emptied of ourselves, and then fill us with all peace and joy in believing; and let nothing separate us from Thy love, in time or in eternity! 헛된 말로 속임을 당하지 말자구나. 이런 믿음을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 열매로 우리가 안다고 하지 않니.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과 ‘성령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고 있”는가? 어쩌나! 나의 영과 더불어 그 분이 증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데. 염려가 되는 것은, 너의 영과 더불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쟎나.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오직 당신만 신뢰할 수 있도록 구원하소서! 우리들을 주께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비우게 하시고 믿음 중에 평화와 기쁨으로 채워주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우리를 나눠지지 않게 하소서. 이 생에건 영원 속에서이건!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칼빈의 회심

아래의 글은 칼빈의 시편주석의 서문(기록년대:1557년)에 나와있는 칼빈자신의 회심에 대한 간증입니다. 여기서 그는 1523에서 1535년도까지의 일들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자신의 회심을 살짝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은 칼빈자신은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연구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여러가지 설명들을 하게 합니다.

 

아래의 시편주석서문에 나와있는 칼빈의 회심간증을 분석하면서 Alexander Ganoczy라는 로마천주교회측의 연구자는 그의 “갑작스러운 회심”을 칼빈 자신의 회심의 과정에 대한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강조하였던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회심, 곧 기적으로서의 회심(conversion as miracle)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표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the Young Calvin, Edinburgh: T& T Clark, 1987, p.252-266). 옳은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다”(sudden)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상의 순간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에 의한 회심이란 뜻입니다.

 

그런 면을 감안하면서 아래의 칼빈의 간증을 음미해야 합니다. 그가 어린시절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공부를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억지로 신학공부하였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칼빈의 전기를 처음으로 썼던 그의 제자 베자(T.Beza)는 칼빈이 신학공부를 하던 그 당시 칼빈의 마음은 “completely absorbed in theology”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전에 일련의 발전의 과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심에 이르기까지 그 내부에서 복잡한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이 글을 루터의 회심과 함께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이렇게 칼빈이 “신학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자신을 그 당시에 “회심하였었다”고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신학에 심취해 있었던 시절은 자신의 지적 즐거움이나 종교심의 발로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개입을 체험하게 된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회심”의 때였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아래의 회심기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너무나 간략하게 서술합니다. 어쩌면 감추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을 극히 조심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정이나 체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시편을 주석하면서 이 시편이야말로 인간심리의 박물관이라고 묘사 한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탄식과 불안, 회의와 좌절, 공포와 의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내면세계의 흐름에 대해서 칼빈은 너무나도 명민하게 간파하고 실감나게 주석합니다. 칼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쩜 그의 시편주석을 칼빈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칼빈의 마음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칼빈이 우리들에게 바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Jean Calvin: conversion experience

 

Jean Calvin, Commentary on the Psalms (1557), Corpus Reformatorum (Opera Calvini), ed. G. Baum, E Cunitz and E. Reuss (59 vols, Braunschweig (Brunswick), 1863-80) vol lvix cols 22-4.

 

 

 

When I was still a small boy, my father had destined me for the study of theology.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내 부친께서는 신학공부를 하기를 원하셨다. But afterwards, when he perceived that the legal profession was usually financially advantageous to its members, this prospect induced him suddently to change his mind. 하지만, 얼마 뒤에 법률계통의 일을 하게 되면 보통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질 것을 아시고는 갑자기 그의 마음을 바꾸셨다. So it came to pass that I was withdrawn from the stuyd of arts, and transferred to the study of law. 그래서 일반문예과목들 공부하는 것이 취소되고 나는 법률공부로 옮기게 되었다. I endeavoured faithfully to apply myself to this course, in obedience to the will of my father. 나는 부친의 뜻을 존중해서 이 공부에 성실하게 임하기로 하였다. But God, by the secret guidance of his providence, at length gave a different direction to my life.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비밀하신 섭리의 운행을 따라서, 마침내 내 인생에 다른 경로를 허락하셨다. And first, since I was too obstinately devoted to the superstitions of Popery to be easily extricated from so profound a labyrinth, God, by a sudden conversion changed my mind from one which had been more definitively made up than my years warranted into something more receptive . . . .처음에는 교황제도의 미신에 너무 고집스럽게 집착하고 있어서 그 깊은 미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심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바꾸셔서, 여러 해 동안 보장되어 왔던 고집스럽던 마음에서 더욱 수용적인 마음이 되게 하셨다….. Being of a retiring disposition and preferring leisure and obscurity, I then sought a quiet retreat . . . .물러서 있으려는 기질을 가지고 있고 여유와 숨어있는 것을 보다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당시 조용히 뒷전에 머물러 있고자 했다….. Certain wicked and lying pamphlets were circulated . . . .사악하게 거짓말하는 유인물들이 나돌고 있었다. It appeared to me, that unless I opposed them to the utmost of my ability, my silence could not be cleared of the charge of cowardice and treachery. 나로서는 내 힘을 다해서 그것들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면 나의 침묵은 비겁함과 배신의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던 것 같았다. This was the consideration which induced me to published my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기독교강요를 기술하기 시작하였었던 것이다. When it was published, it was not that copious and laborious work which it now is, but only a small treatise contained a summary of the principal truths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it was published with no other design than that men might know what was the faith held by those whom I saw basely and wickedly defamed by those base and treacherous flatterers . . .그것이 출판되었을 때는 지금 것처럼 부피가 두꺼웠던 것이 아니라, 짧게 기독교신앙의 주요진리를 요약한 것이었다; 그것을 출판한 것은 단지 저열하고 간사한 농간자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불명예를 당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고 하였던 것뿐이었다.

 

 

영어번역본 출처 http://www.st-andrews.ac.uk/jfec/cal/reformat/theologb/biofrag1.htm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마틴 루터의 회심

 

 

 

 

Martin Luther’s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마틴 루터의 회심간증

 

 

 

by Martin Luther (1483-1546)

 

 

마틴 루터

 

http://homepage.mac.com/shanerosenthal/reformationink/index.htm

 

The following selection is taken from the Preface to the Complete Edition of Luther’s Latin Writings. It was written by Luther in Wittenberg, 1545. This english edition is availble in Luther’s Works Volume 34, Career of the Reformer IV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60), p. 336-337. In the first few lines of this selection, Luther writes, “during that year;” the immediate context indicates he is refering to the year of Tetzel’s death (July, 1519). This puts the date for Luther’s conversion, in his own view, two years after the posting of the ninety-five theses.

 

아래의 글은 루터의 라틴저작 전집에 대한 서문에서 가져온 것인데, 1545년 비텐베르그에서 루터가 쓴 것이다. 영어번역본은 루터전집 34권(Carreer of the Reformer시리즈 IV, St.Louis: Concordia Publsihing House, 1960)의 336-337쪽에 실린 것이다. 이 글의 첫부분에 보면 루터가 “그 해에”(during that year)라는 말을 하는데, 앞뒤 맥락을 보면 “그 해”란 테쩰이 죽은 해(1519년 7월)를 가르킨다. 이것은 루터 자신이 자신의 회심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그 날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95개조조항을 작성하고 나서 2년이 지난 때이다(한글역주: 루터의 회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설교에서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기가 95조개조항 작성 2년 뒤라고 하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다고 할 수 있는 95개조항, 이미 그 안에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또한 가장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이 95개조항을 작성하였으면서도 루터는 아직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놀래야 할 일이다. 한글로 이것을 번역하는 역자로서, 목사가 된 지 5년 뒤에야 회심을 하였다는 간증을 하게 되면 어떤 분들은 믿어지지 않는다 하거나, 어떤 특별한 체험 정도로 그 의미를 희석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터의 회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회심하던 시기는 아래의 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해서 대학에서 이미 강의까지 하던 시기였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아직 회심이 무엇인지 “참으로” 알지 못하였던 때였다는 것이 도대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참된 회심은, 배움의 적고 많음, 깊고 얕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보다 더 강조되고 음미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번역하게 된다).

 

Meanwhile, I had already during that year returned to interpret the Psalter anew. I had confidence in the fact that I was more skilful, after I had lectured in the university on St. Paul’s epistles to the Romans, to the Galatias, and the one to the Hebrews. I had indeed been captivated with an extraordinary ardor for understanding Paul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But up till then it was not the cold blood ab out the heart, but a single word in Chapter 1,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that had stood in my way. For I hated that word “righteousness of God,” which, according to the use and custom of all the teachers, I had been taught to understand philosophically regarding the formal or active righteousness, as they call it, with which God is righteous and punishes the unrighteous sinner.

 

그러던 중 나는 이미 그 해에 시편해석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대학에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에 대한 강의를 끝냈었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더욱 (해석문제에 있어서) 숙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었다. 물론 이미 로마서에서의 바울을 이해하기 위한 특별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내 앞에서 놓여져 있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1장의 한 마디,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그 말을 증오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교사들의 용례와 관습에 의해서 나는 그 말을 형식적 의, 혹은 적극적인 의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받아 왔었다. 그 교사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불의한 죄인들을 그 의로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Though I lived as a monk without reproach, I felt that I was a sinner before God with an extremely disturbed conscience. I could not believe that he was placated by my satisfaction. I did not love, yes, I hated the righteous God who punishes sinners, and secretly, if not blasphemously, certainly murmuring greatly, I was angry with God, and said, “As if, indeed, it is not enough, that miserable sinners, eternally lost through original sin, are crushed by every kind of calamity by the law of the decalogue, without having God add pain to pain by the gospel and also by the gospel threatening us with his righteousness and wrath!” Thus I raged with a fierce and troubled conscience. Nevertheless, I beat importunately upon Paul at that place, most ardently desiring to know what St. Paul wanted.

 

나는 수도사로서 흠없이 살아왔었지만, 극도로 혼란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채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었다. 나는 나의 (수도사로서의 흠없는 삶을 통한) 만족스럽게 살아오는 것으로 그가 만족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 미워하였던 것이다. 비밀스럽게, 공공연하게 불경스럽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엄청나게 불평하면서 하나님에게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불행한 죄인들이 원죄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잃어진 바 되어서 십계명의 율법에 의해서 모든 종류의 재난들로 짓이겨지는 것에도 만족치 않으시는 것 같으셔! 그것에다가 복음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시고 또한 그 복음에 의하여 당신의 의와 진노로 우리들을 위협하시다니!” 그래서 나는 맹렬하면서 혼란스러운 양심으로 분노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곳에서(역주: 롬1:17) 우연스럽게도 바울과 만났던 것이고, 가장 열정적으로 바울이 원하였던 것을 알고 싶어했었다.

 

At last, by the mercy of God, meditating day and night, I gave heed to the context of the words, namely,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as it is written,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 There I began to understand tha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at by which the righteous lives by a gift of God, namely by faith. And this is the meaning: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by the gospel, namely, the passive righteousness with which merciful God justifies us by faith, as it is written, “He who through faith is righteous shall live.” Here I felt that I was altogether born again and had entered paradise itself through open gates. There a totally other face of the entire Scripture showed itself to me. Thereupon I ran through the Scripture from memory. I also fount in other terms an analogy, as, the work of God, that is what God does in us, the power of God, with which he makes us wise, the strenght of God, the salvation of God, the glory of God.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밤낮으로 묵상을 하는 중에, 이 말들, 곧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이 나오는 그 맥락에 주의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곧 믿음으로 살게 되게 하는 그런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렇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의해서 나타나(곧 계시되어지)는 것인데, 곧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수동적 의이며, 그래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꺼번에 거듭나게 되고 활짝 열려진 문들을 통해서 천국 그 자체에 들어간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나에게 전체 성경의 전적으로 다른 얼굴이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구절 위에 그때까지 암송하고 있던 다른 성경구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또한 다른 용어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같은 용어들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의 비유를 발견하였다.

 

And I extolled my sweetest word with a love as great as the hatred with which I had before hated the word “righteousness of God.” Thus that place in Paul was for me truly the gate to paradise. Later I read Augustine’s The Spirit and the Letter, where contrary to hope I found that he, too, interpreted God’s righteousness in a similar way, as the righteousness with which God clothes us when he justifies us (Augustine passage included below). Although this was heretofore said imperfectly and he did not explain all things concerning imputation clearly, it nevertheless was pleasing that God’s righteousness with which we are justified was taught.

 

그리고 나는 이전에 그렇게도 증오하였던 단어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제는 가장 열정적인 사랑으로 나의 그 가장 달콤한 단어, “하나님의 의”를 극찬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 안에 있는 그 장소는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극락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다. 후에 나는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나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도 또한 하나님의 의를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게 해주실 때에 우리들에게 의로 옷입혀 주신다는 식으로 그도 해석하고 있었다. 비록 그 당시로서는 불완전하게 표현되어지고 또한 (의의) 전가에 관하여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하였다.

 

Selections from Augustine’s The Spirit and the Letter to which Luther Refers: 루터가 언급하고 있는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로부터의 인용글

 

Chapter 15 [IX.] – The Righteousness of God Manifest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15장-율법과 선지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

 

Here, perhaps, it may be said by that presumption of man, which is ignorant of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wishes to establish one of its own, that the apostle quite properly said,” For by the law shall no man be justified,”46 in as much as the law merely shows what one ought to do, and what one ought to guard against, in order that what the law thus points out may be accomplished by the will, and so man be justified, not indeed by the power of the law, but by his free determination.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해서 자신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단지 사람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 행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의 율법이다. 그래서 그 율법이 가르키는 것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게 한 그런 율법이다. 그래서 당연히 율법의 권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의해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게 되는 그런 율법 말이다. But I ask your attention, O man, to what follows. “But now the righteousness of God,” says he, “without the law is manifested, being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47 Does this then sound a light thing in deaf ears? 하지만, 오,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이 그 다음에 곧 이어 말하는 것에 주목하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 율법 없이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니라.” He say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 그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Now this righteousness they are ignorant of, who wish to establish one of their own; they will not submit themselves to it.48 His words are, “The righteousness of God is manifested:” he does not say, the righteousness of man, or the righteousness of his own will, but the “righteousness of God,” – not that whereby He is Himself righteous, but that with which He endows man when He justifies the ungodly. 지금 이 의에 대해서 무지해서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도의 말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한다. 인간의 의나 인간 자신의 의지의 의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를 인간에게 허락하셔서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하는 그런 의를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This is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in other words, the law and the prophets each afford it testimony.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를 받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율법과 선지자들이 각각 그것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The law, indeed, by issuing its commands and threats, and by justifying no man, sufficiently shows that it is by God’s gift, through the help of the Spirit, that a man is justified; and the prophets, because it was what they predicted that Christ at His coming accomplished. 물론, 율법은 그 명령과 위협을 선포함과 어떤 인간도 의롭게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취하실 것을 예언하였기 때문에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Accordingly he advances a step further, and adds, “But righteousness of God by faith of Jesus Christ,”49 that is by the faith wherewith one believes in Christ for just as there is not meant the faith with which Christ Himself believes, so also there is not meant the righteousness whereby God is Himself righteous. 따라서 바울 사도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이것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어떤 사람이 믿게 되는 그 믿음을 말한다. 그리스도 그 분께서 믿으시는 그런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께서 의로우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의로우심을 의미하는 것도 또한 아니다. Both no doubt are ours, but yet they are called God’s, and Christ’s, because it is by their bounty that these gifts are bestowed upon us. 의심할 것도 없이 이 둘은 모두 우리들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선물들이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n is without the law, but not manifested without the law; for if it were manifested without the law, how could it be witnessed by the law?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율법 없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율법 없이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 율법에 의해서 어떻게 그 의가 증거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That righteousness of God, however, is without the law, which God by the Spirit of grace bestows on the believer without the help of the law, – that is, when not helped by the law.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성령에 의해서 율법의 도움 없이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곧 율법의 도움 없이도 주시는 것이다. When, indeed, He by the law discovers to a man his weakness, it is in order that by faith he may flee for refuge to His mercy, and be healed.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피난처를 삼도록 도피하게 되어 치료를 받게 되는 순서이다. And thus concerning His wisdom we are told, that “she carries law and mercy upon her tongue,”50 – the “law,” whereby she may convict the proud, the “mercy,” wherewith she may justify the humbled. 그래서 그 분의 지혜에 관하여 말하기를, “지혜가 율법과 자비를 그 입으로 전하느니라”고 한다. “율법”이라 함은 지혜가 그것으로 교만한 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며 “은혜”라 함은 그것으로 지혜가 겸비해 진 자들을 의롭게 하는 것이다. “The righteousness of God,” then, “by faith of Jesus Christ, is unto all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for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51 – not of their own glory.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이르게 되는데,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그들 자신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For what have they, which they have not received?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Now if they received it, why do they glory as if they had not received it?52 그것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마치 그들이 전혀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Well, then, they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 now observe what follows: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53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온가 주의해 보라. It is not, therefore, by the law, nor is it by their own will, that they are justified; but they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 not that it is wrought without our will; but our will is by the law shown to be weak, that grace may heal its infirmity; and that our healed will may fulfil the law, not by compact under the law, nor yet in the absence of law.그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들의 의지가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회복된 의지가 율법을 이루는 것이지, 율법 아래에서의 계약에서 의해서나 율법이 전혀 없는 채로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다.

 

Chapter 16 X.] – How the Law Wa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제 16장-어떻게 율법이 의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닌가?  

 

Because “for a righteous man the law was not made;”54 and yet “the law is good, if a man use it lawfully.”55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또한 “율법을 선하게 사용하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Now by connecting together these two seemingly contrary statements, the apostle warns and urges his reader to sift the question and solve it too.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이 두 말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사도바울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면서 또한 그것에 답을 제공하고 있다. For how can it be that “the law is good, if a man use it lawfully,” if what follows is also true: “Knowing this, that the law is not made for a righteous man?”56 만약 어떤 사람이 율법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면 그 율법은 선하다고 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 사실을 알면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참일 수 있단 말인가? For who but a righteous man lawfully uses the law? 의로운 사람 외에 어떤 사람이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Yet it is not for him that it is made, but for the unrighteous. 하지만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Must then the unrighteous man, in order that he may be justified, – that is, become a righteous man, – lawfully use the law, to lead him, as by the schoolmaster’s hand,57 to that grace by which alone he can fulfill what the law commands? 그러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곧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하여서 자신을, 마치 몽학선생의 손에 인도함을 받아 그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바로 그 사람 자신이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은혜에 이를 수 있어야만 된단 말인가? Now it is freely that he is justified thereby, – that is, on account of no antecedent merits of his own works; “otherwise grace is no more grace,”58 since it is bestowed on us, not because we have done good works, but that we may be able to do them, – in other words, not because we have fulfilled the law, but in order that we may be able to fulfill the law. 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값없이 되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의 이전의 어떤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선한 행위를 행하였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들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Now He said, “I am not come to destroy the law, but to fulfil it,”59 of whom it was said,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60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 왔노라”고 하셨고 그 예수님에 대해서 사도요한은 “우리들이 그 영광을 보았는데,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This is the glory which is meant in the words, “All have sinned, and 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61 and this the grace of which he speaks in the next verse,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62 바로 이 영광이 “우리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의 그 영광이며 은혜는 바로 다음 구절에 나오는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말의 그 은혜이다. The unrighteous man therefore lawfully uses the law, that he may become righteous; but when he has become so, he must no longer use it as a chariot, for he has arrived at his journey’s end, – or rather (that I may employ the apostle’s own simile, which has been already mentioned) as a schoolmaster, seeing that he is now fully learned. 불의한 사람은 그러므로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의롭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그 율법을 전차수처럼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여행 종착지에 이미 도착했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언급했던 사도바울의 비유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미 충분하게 성장한 몽학선생으로서 그 율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How then is the law not made for a righteous man, if it is necessary for the righteous man too, not that he may be brought as an unrighteous man to the grace that justifies, but that he may use it lawfully, now that he is righteous? 어떤 사람이 불의한 사람으로서 그를 의롭게 하는 은혜로 인도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제 의롭게 된 사람으로서 그것을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Does not the case perhaps stand thus, – nay, not perhaps, but rather certainly, – that the man who is become righteous thus lawfully uses the law, when he applies it to alarm the unrighteous, so that whenever the disease of some unusual desire begins in them, too, to be augmented by the incentive of the law’s prohibition and an increased amount of transgression, they may in faith flee for refuge to the grace that justifies, and becoming delighted with the sweet pleasures of holiness, may escape the penalty of the law’s menacing letter through the spirit’s soothing gift? 의롭게 되어진 사람이 율법을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가 불의한 사람을 그 율법을 사용하여 경계함으로 어떤 비상한 욕망의 질병이 그들 속에서 금지하는 율법의 자극에 의하여 축적되고 또한 범죄의 양이 증가되어서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자신들을 의롭게 하는 은혜로 믿음을 갖고 도피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달콤한 즐거움을 주는 거룩함을 기뻐하게 되고 협박하는 율법의 문서가 요구하는 형벌로부터 도피하여 영의 달콤한 선물들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인 것이 아마도, 아니, 확실한 것이 아닐까? In this way the two statements will not be contrary, nor will they be repugnant to each other: even the righteous man may lawfully use a good law, and yet the law be not made for the righteous man; for it is not by the law that he becomes righteous, but by the law of faith, which led him to believe that no other resource was possible to his weakness for fulfilling the precepts which “the law of works”63 commanded, except to be assisted by the grace of God. 이런 방식으로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의로운 사람조차도 합당하게 선한 율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법, 곧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행위의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그 계명들을 성취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는 그 믿음에 의해서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그 계명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어거스틴의 회심

어거스틴의 회심 간증

http://sdcmd.egloos.com/75491

성경에 기록된 회심사건 외에 교회사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회심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어거스틴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끼친 신학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회심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 그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회심사건 또한 특별해서 우리들과는 무관한 것일까? 그의 회심을 특별한 것이라고 치자.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요소가 있다. 그 요소를 우리는 발견해 내면서 우리들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 것은 일종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그의 회심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는 그 고백록의 구조를 음미해보는 것은, 우리들의 회심과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의 자화상을 비춰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회심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을 번역해 올린다. 그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간단히 고백록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1장: 어린시절.

2장:청소년기

3장:카르타고 유학중의 방탕생활/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 마니교에 입교.

4장:수사학교사가 됨/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또한 미와 비율에 관한 책을 저술함.

5장:마니교에 실망하고 대신 신플라톤주의에 빠짐/밀란에서 수사학교사

6장:밀란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계속 듣게 됨.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해소해 감.

7장:악의 문제를 고민하는 중 신플라톤주의적 해결방식시도/사도바울의 글을 읽기 시작함

8장: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빅토리아누스의 회심과 이집트의 성자 안토니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밀란의 집 뒷뜰에서 아이들의 노래소리를 듣는 중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폄. 그리고 회심.

9장: 세례받음. 아프리카로 돌아감. 어머니 모니카 죽음.

10장:참된 행복이 무엇인가? 육체의 유혹에 저항하는 법 등에 대한 회상

11장-13장: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설명

 

그의 회심사건이 있었던 시점은, 그가 철학적 종교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싯점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가 마니교의 이교적 사상에서 악의 기원과 같은 종교철학적 주제들에 대해서 탐구하던 싯점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악의 기원 같은 주제는 실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밀란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싯점도 그의 회심의 싯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싯점이고, 계속적으로 교회당에 출석하던 때인데도 그는 자신이 회심하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고뇌 중에 있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과연 어느 싯점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규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기록한 뒤에 11장-13장에서 창세기1장의 창조사건을 해석하고 있는가? 그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꼭 풀어보아야 할 과제이다.

 

이런 질문이 그의 회심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회심기록의 가장 결정적인 부분을 번역해 본다(역자:
손성은).

 

이것 또한 좋은 묵상 자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자료출처: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aug-conv.html

 

Augustine: Account of His Own Conversion

Book Three

CHAPTER I

 

  1. I came to Carthage, where a caldron of unholy loves was seething and bubbling all around me. 나는 카르타고로 갔다. 그곳에서는 불결한 사랑의 가마솥이 펄펄 끓으면서 거품을 내 주변에 품어내고 있었다. I was not in love as yet, but I was in love with love; and, from a hidden hunger, I hated myself for not feeling more intensely a sense of hunger. 그렇다고 어느 누구와 사랑에 빠져든 것은 아니지만, 사랑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한 굶주림 속에서 그 굶주림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I was looking for something to love, for I was in love with loving, and I hated security and a smooth way, free from snares.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Within me I had a dearth of that inner food which is thyself, my God–although that dearth caused me no hunger. 내 안에서 나는 영혼의 음식인 당신, 곧 나의 하나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결핍 때문에 굶주림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And I remained without any appetite for incorruptible food–not because I was already filled with it, but because the emptier I became the more I loathed it. 이미 그것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빈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그 불멸의 음식에 대하여 어떤 구미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Because of this my soul was unhealthy; and, full of sores, it exuded itself forth, itching to be scratched by scraping on the things of the senses. 이것 때문에 나의 영혼은 건강치 못하였다;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차서 온 몸에 근질거리는 그 무엇을 가려워 하면서 내 영혼은 스스로를 발산하고 있었다. Yet, had these things no soul, they would certainly
    not inspire our love. 하지만, 이런 감각들에 영혼이 없었다면 분명히 사랑을 전혀 고무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To love and to be loved was sweet to me, and all the more when I gained the enjoyment of the body of the person I loved.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달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육체의 즐거움을 탐닉하였다. Thus I polluted the spring of friendship with the filth of concupiscence and I dimmed its luster with the slime of lust. 그래서 참된 사랑의 우물을 불결한 정욕으로 더럽혔고 그 참된 사랑의 빛들을 거짓된 사랑의 악취들로 혼잡케 하였다. Yet, foul and unclean as I was, I still craved, in excessive vanity, to be thought elegant and urbane. 그렇게 나는 더럽고 불결하였음에도 여전히 엄청난 허영 가운데서 여전히 고결하고 세련된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And I did fall precipitately into the love I was longing for.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도 찾고 있었던 그 사랑 속으로 급전직하 떨어졌던 것이다. My God, my mercy, with how much bitterness didst thou, out of thy infinite goodness, flavor that sweetness for me! 자비로우신 나의 하나님께서, 참으로 참으실 수 없는 비탄을 느끼시는 중에도, 당신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인하여, 그 달콤함을 나를 위하여 맛보게 하셨던 것이다! For I was not only beloved but also I secretly reached the climax of enjoyment; and yet I was joyfully bound with troublesome tics, so that I could be scourged with the burning iron rods of jealousy, suspicion, fear, anger, and strife. 왜냐하면 나는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은밀하게 그 즐거움의 최절정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움 중에 누리는 문제성 많은 발작들을 즐거워하면서, 질투와 의심, 두려움, 불안, 그리고 싸움의 뜨겁게 달구어진 벌건 쇳조각에 데어지기를 원하였던 것이다”EN-US” xml:lang=”EN-US”>.

 

CHAPTER IV

 

Among such as these, in that unstable period of my life, I studied the books of eloquence, for it was in eloquence that I was eager to be eminent, though from a reprehensible and vainglorious motive, and a delight in human vanity. 이런 일들 가운데서 나는 안정되지 않은 생활들 속에서 수사학책들을 공부하였다. 왜냐하면 이 영역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헛된 허영이 그 깊은 동기였었지만 그 인간의 허영을 즐거워 하였던 셈이다. In the ordinary course of study I came upon a certain book of Cicero’s, whose language almost all admire, though not his heart. 공부하는 중에 키케로의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키케로의 책은 비록 그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 표현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This particular book of his contains an exhortation to philosophy and was called Hortensius. 그 책에서 그는 호르텐시우스의 철학을
추천하였다. Now it was this book which quite definitely changed my whole attitude and turned my prayers toward thee, O Lord, and gave me new hope and new desires. 이제 아주 분명하게 나의 인생의 태도를 바꿔서 당신을 향하여 기도하게 하고 새로운 희망과 열망을 갖게 하였던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Suddenly every vain hope became worthless to me, and with an incredible warmth of heart I yearned for an immortality of wisdom and began now to arise that I might return to thee. 갑작스럽게 모든 헛된 소망들이 나에게 헛되게 여겨졌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지혜를 열망하면서 당신에게 돌아설 수 있기 시작했다. It was not to sharpen my tongue further that I made use of that book. I was now nineteen; my father had been dead two years, and my mother was providing the money for my study of rhetoric. 이 책을 이용하는 것은 나의 말솜씨를 다듬기 위한 것이 더 이상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나의 나이는 19이었다.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고, 어머니께서 나의 수사학공부를 위해서 돈을 마련하셨다”EN-US”>. What won me in it [i.e., the Hortensius] was not its style but its substance. 호르텐시우스의 책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스타일이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1. How ardent was I then, my God, how ardent to fly from earthly things to thee! 그 때, 나의 하나님, 제가 얼마나 열심을 가졌었는지요, 얼마나 진심으로 지상적인 것에서 당신을 향하여 날아가고 싶어했는지요! Nor did I know how thou was even then dealing with me. 저는 그 당시에도 당신께서 저를 다루시고 계셨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For with thee is wisdom. 지혜는 당신께 있습니다. In Greek the love of wisdom is called “philosophy,” and it was with this
    love that that book inflamed me. 그리스어로 지혜의 사랑을 “철학”이라고 불렀는데, 그 책이 나에게 불붙여준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었다. There are some who seduce through philosophy, under a great, alluring, and honorable name, using it to color and adorn their own errors. 철학을 통해서 위대하고 매혹적이고 존경할 만한 이름을 사용해서 자신의 오류를 감추고 오히려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And almost all who did this, in Cicero’s own time and earlier, are censored and pointed out in his book. 키케로가 살던 당시 그리고 그 이전에 이런 짓을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책에서 비판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BOOK V

CHAPTER XIII

23.And to Milan I came, to Ambrose the bishop, famed through the whole world as one of the best of men, thy devoted servant. 나는 밀란으로 되돌아갔다. 주님의 헌신된 종이면서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밀란의 주교 암브로우시스에게로 되돌아 간 것이다. His eloquent discourse in those times abundantly provided thy people with the flour of thy wheat, the gladness of thy oil, and the sober intoxication of thy wine. 그의 유창한 설교는 그 당시 주의 백성들에게 주님에게 속한 곡물의 먹을 것과 주의 기름의 유쾌함, 그리고 주의 포도주의 톡 쏘는 맛들을 풍성하게 제공해 주었다. To him I was led by thee without my knowledge, that by him I might be led to thee in full knowledge. 주께서는 나를 그에게로 나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로 주님께로 이제는 충분히 의식한 채로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xml:lang=”EN-US”>. That man of God received me as a father would, and welcomed my coming as a good bishop should. 그 하나님의 사람은 나를 마치 아빠가 자식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리고 훌륭한 목사라면 그렇게 해야할 것처럼 내가 돌아온 것을 환영하였다. And I began to love him, of course, not at the first as a teacher of the truth, for I had entirely despaired of finding that in thy Church–but as a friendly man.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진리의 교사로서가 아니라, 친절히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그러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nd I studiously listened to him–though not with the right motive–as he preached to the people. 그리고 그가 설교할 때에 옳은 동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열심으로 그에게 집중했다. “EN-US”>I was trying to discover whether his eloquence came up to his reputation, and whether it flowed fuller or thinner than others said it did. 나는 그의 유창함 때문에 그의 평판이 높은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더 유창한지 아니면 아닌지 등등을 발견해 보려고 했다. And thus I hung on his words intently, but, as to his subject matter, I was only a careless and contemptuous listener. 그래서 그의 말에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가 무엇을 전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주의하지 않았고 단지 얕잡아보면서 설교를 들었을 뿐이었다. I was delighted with the charm of his speech, which was more erudite, though less cheerful and soothing, than Faustus’ style. 그의 설교는 매력적이었고 학식이 풍부했지만, 파우스트의 스타일과 비교하면 유쾌한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As for subject matter, however, there could be no comparison, for the latter was wandering around in Manichean deceptions, while the former was teaching salvation most soundly.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하지만 주제에 관해서면, 비교할 만 하지가 않았다. 파우스트의 것은 마니교의 기만에 관한 것이었고 암브로시우스의 것은 구원에 관하여 가장 건전하게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But “salvation is far from the wicked,” such as I was then when I stood before him. Yet I was drawing nearer, gradually and unconsciously. 그렇지만, “구원은 사악한 자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앞에 서있었지만, 구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그리고 알지 못하는 채로 그것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BOOK VIII

CHAPTER XII

  1. Now when deep reflection had drawn up out of the secret depths of my soul all my misery and had heaped it up before the sight of my heart, there arose a mighty storm, accompanied by a mighty rain of tears. 깊히 묵상하는 중에 내 영혼의 비밀스러운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나의 불행스러움이 생각나면서 내 마음의 눈 앞에 쌓아져 있는 것을 볼 때에, 그곳으로부터 엄청난 광풍이 몰아치면서 나의 눈에서는 폭우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That I might give way fully to my tears and lamentations, I stole away from Alypius, for it seemed to me that solitude was more appropriate for the business of weeping. 나의 눈물과 애통함에 충분히 젖어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알피우스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혼자 있는 것이 울기만 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I went far enough away that I could feel that even his presence was no restraint upon me. 나는 충분히 멀리 도망쳐서 심지어는 알피우스가 전혀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데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This was the way I felt at the time, and he realized it. 이러함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도 또한 그것을 느꼈었습니다. I suppose I had said something before I started up and he noticed that the sound of my voice was choked with weeping. 숨으려고 하기 전에 내가 무언가를 말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때 내 목소리는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고 그는 느꼈었습니다. And so he stayed alone, where we had been sitting together, greatly astonished.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앞서 있었던 그곳에 혼자 머물러 있으면서 무척이나 당황했었다고 합니다. I flung myself down under a fig tree–how I know not–and gave free course to my tears. 나는 어떤 무화과나무 밑에 덜썩 주저 앉았습니다 – 어떻게 앉았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EN-US”>– 그리고는 마음껏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The streams of my eyes gushed out an acceptable sacrifice to thee. 눈물의 펑펑 쏟구쳐 나와서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And, not indeed in these words, but to this effect, I cried to thee. 그리고 실상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요지의 기도를 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And thou, O Lord, how long? How long, O Lord? Wilt thou be angry forever? Oh, remember not against us our former iniquities.” “오 주님,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더 오랫도록 참으시겠습니까? 주께서 저에게 영원토록 노하시겠나이까? 오, 저의 이전에 저질렀던 악행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For I felt that I was still enthralled by them.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그런 악행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I sent up these sorrowful cries. 이런 슬픈 탄식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How long, how long? Tomorrow and tomorrow? Why not now? Why not this very hour make an end to my uncleanness?” “얼마나 오랫도록, 얼마나 오랫도록? 내일 그리고 또 내일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왜 지금은 안되나요? 왜 지금 바로 이 시간 저의 이 불결함을 씻어주시지 않으십니까?”

 

  1. I was saying these things and weeping in the most bitter contrition of my heart,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가장 비통스러운 마음 속의 아픔 가운데에 통곡하고 있는 중에, when suddenly I heard the voice of a boy or a girl I know not which–coming from the neighboring house, chanting over and over again, 어디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바로 이웃집 담벽을 넘어서 어떤 남자아이인가 여자아이가 자꾸만 반복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갑작스럽게 듣게 되었습니다. “Pick it up, read it; pick it up, read it.” [“tolle lege, tolle lege”] “집어 들어서 읽어, 집어 들어서 읽어.” Immediately I ceased weeping and began most earnestly to think whether it was usual for children in some kind of game to
    sing such a song, but I could not remember ever having heard the like. 곧 나는 울기를 멈추고는 가장 심각하게 이 말이 아이들이 놀이 중에 하는 그런 노래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소리를 이전에 들어보았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So, damming the torrent of my tears, I got to my feet, for I could not but think that this was a divine command to open the Bible and read the first passage I should light upon. 그래서 나는 쏟구쳐 나오는 눈물을 막으면서 벌떡 일어났다. 이 소리는 바로 성경을 열어서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For I had heard how Anthony, accidentally coming into church while the gospel was being read, received the admonition as if what was read had been addressed to him. 이전에 성자 안토니가 우연히 어떤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마침 복음서가 읽혀지고 있었는데, 그 읽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선포되고 있는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Go and sell what you have and give it to the poor, and you sha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and follow me.”COLOR: red”>” 가서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러면 너는 천국에 보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와서 나를 따르라.” By such an oracle he was forthwith converted to thee. 이런 말씀을 따라서 그는 그것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So I quickly returned to the bench where Alypius was sitting, for there I had put down the apostle’s book when I had left there. 그래서 급하게 나는 알피우스가 앉아있는 벤치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곳에서 떠났을 때 사도의 책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I snatched it up, opened it, and in silence read the paragraph on which my eyes first fell 그것을 재빨리 집어 들고는 열어서 말없이 내 눈에 처음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Not in rioting and drunkenness, not in chambering and wantonness, not in strife and envying, but put on the Lord Jesus Christ, and make no provision for the flesh to fulfill the lusts thereof.”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I wanted to read no further, nor did I need to. “COLOR: red;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For instantly, as the sentence ended, there was infused in my heart something like the light of full certainty and all the gloom of doubt vanished away. 왜냐하면 곧장, 그 문장이 끝나자마자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분명하게 확실한 빛이 주입 되어지면서 의심의 흑구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역주: 중간중간에 ‘습니다’체와 ‘였다’체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자신의 회심을 기술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독백의 방식으로 취하면서도 간혹 자신을 객관화시키면서 서술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http://blog.daum.net/londonhorace/9269021

[그중심 묵상] 마태복음 서론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첫번째 성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부분 마가복음일 것이라는데 동의합니다. 그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요점만 말씀드리면 가장 짧고 단순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는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대상으로 썼는가가 글의 성격과 동기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마태복음은 모태신앙인이나 어려서부터 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말이 됩니다. 또, 이 말은 구약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읽는 것이 좋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앞에 배치된 이유도 구약 성경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구약 성경을 충실하게 공부한 다음에 읽어야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믿음의 후손들이 복음을 계승하고자 그토록 애쓴 수고가 드디어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에서는 마태복음을 가르칠 때, 세 가지에 중점을 둡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 입학 시험’이라 할 수 있는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입니다.

이 질문은 별표를 다섯 개는 그려야할 정도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기점으로 복음서가 둘로 나누어 지는데, 이 질문 앞부분은 ‘예수님은 누구인가?’가 주제이고, 뒷부분은 ‘예수님은 왜 오셨는가?’가 주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전개를 보일 때가 가끔 있는데, 이 부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수시니까 하수인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전개를 하지 않으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세주로 확실하게 인정하는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서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심하게 꾸중을 듣는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나가서 기도 응답도 받고 신앙 체험도 해서 이제는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한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좋은데, 반대로 “어는 이제 고생하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시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마 머리 끝까지 화가 날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잘 믿으면 형통하고 성공하는 일만 생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예수님이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비슷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설교하면 교회 안나갈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하고 형통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가르침이고, 성공하고 형통하지 못하면 기도를 많이 안했거나 능력을 못받았기 때문이라고 핀잔을 듣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일견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표출입니다. 성경은 예수 잘 믿으면 고난받고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믿음 좋은 사람들은 고생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형통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동시에 기도 많이하고 능력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인격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해가 안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의문의 답을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믿음이 좋을수록 고생하는 것이 정상이고 제대로 길을 들어 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 이후에 베드로는 ‘무능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히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보다 능력이 없어지고,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상황까지 추락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에서 회복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자기 발견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사도행전을 복음서의 연장으로 보는데,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육체로 동행’하신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영으로 동행’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령’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실제로 ‘성령 충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비인격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예수님처럼 능력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친절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성령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고도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성령=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생각하면 문제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대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는 건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따로 논증하기로 하겠습니다. 기억하셔야 할 점은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베드로가 걸어간 ‘무능의 길’ 다른 말로는 ‘자기 발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교육은 ‘표준 교육 과정’입니다.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이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신 것입니다. 왜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이 비인격적이고 눈쌀찌푸려지는 언행을 할까요? 예수님의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없이 스스로 성령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번영주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교육 과정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나름대로 바르게 신앙 생활했는데 고난이 계속되는 분들은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을 능력 없다고 무시한 사람이 사실은 잘못된 길, ‘번영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단, 혼란으로 인해서 갈지자로 걷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목표를 알고 가야만 침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약 성경과의 유기적 연결에 중점을 둡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은 구약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 중에서도 성경 전체를 유기적으로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셋째,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중점을 둡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공부에서 구약을 공부할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를 말씀드렸습니다. ‘5선’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 ‘5선’이 예수님께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과 신약의 성취

구약의 메시야 예언과 성취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

플로이드 헤밀톤이라는 학자는 “기독교신앙의 기초”라는 책을 통하여 구약성서 안에는 예수님의 성취에 대한 예언이 332개가 있다고 합니다. 또 페인(Payne)이라는 학자는 성경에언의 백과사전이라는 책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191개의 예언성취를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일단 그렇게 많은 예언과 성취에 대해서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언과 성취에 대해서 약 60개의 자료를 올려 드립니다.

(1)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남

예언: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성취: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2) 처녀로부터 태어남

예언: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취;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눅1:35)

(3) 하나님의 아들

예언: 시 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성취: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16:16, 막9:7, 눅9:35, 행13:30-35)

(4) 아브라함의 씨

예언: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성취: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5) 이삭의 아들

예언: 창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성취: 눅3:23-34, 마1:2
“예수…. 그 이상은 이삭이요”

(6) 야곱의 아들

예언: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성취: 예수께서….. 요셉의 아들이니…..(눅3:23, 34, 마1:2, 눅1:33)

(7) 유다족속

예언: 창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성취: 예수 ……유다의 자손(눅3:23, 33, 마1:2, 히7:14)

(8) 이새의 가계

예언: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성취: 예수….. 이새의 아들(눅3:32, 마1:6)

(9) 다윗의 집

예언:  렘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성취: 예수… .다윗의 아들…..(눅3:31, 마1:1, 9:27, 15:22, 20:30, 막9:10, 10:47, 눅18:38, 행13:22, 계22:16)

(10) 베들레헴에서 태어남

예언: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성취: 마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 예물을 드리다

예언: 시 72: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성취: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헤롯이 어린아이들을 죽이다.

예언: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성취: 마2:16-18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3) 선재성

예언: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성취: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요17:5, 24, 계1:1, 2, 1:17, 2:8, 8:58, 22:13)

(14) 그가 주라고 불릴 것이라

예언: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성취: 마 22:43-46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15) 임마누엘이 되리라

예언: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성취: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6) 한 선지자가 될 것이라

예언: 신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성취: 마 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7) 제사장

예언: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성취: 히 5:5-6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18) 하나님의 심판자

예언: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성취: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19) 왕

예언: 시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성취: 요 18:3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20) 성령이 강림하심

예언: 사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성취: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12:17-21, 막1:10-11, 눅4:15-21)

(21) 성전을 향한 그의 열심

예언: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성취: 요2:15-17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2) 전령이 길을 예비함
예언: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성취: 마3:1-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23) 갈릴리에서 시작하는 사역

예언: 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취: 마4:12-16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24) 기적의 사역

예언:사35:5-6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성취: 마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9:32-35, 막7:33-35, 요5:5-9)

(25) 비유의 선생

예언: 시 78: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성취: 마13:34-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6) 성전에 들어오다

예언: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성취: 마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27)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다.

예언: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성취: 마21:4-7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8) 거치는 돌

예언: 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성취: 벧전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29) 이방의 빛

예언: 사 6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성취: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30) 부활

예언: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성취: 행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1) 승천

예언: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하심이로다

성취: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32) 하나님의 우편

예언: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성취: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막16:19, 행2:34)

(33) 배반

예언: 시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성취: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18)

(34) 은 30세겔

예언: 슥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성취: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35) 성소에 던져진 돈

예언: 슥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성취: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36) 토기장이의 밭에 주어진 값

예언: 슥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성취: 마 27: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37) 흩어지는 제자들

예언: 슥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성취: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8) 거짓증인들에게게 고소됨

예언: 시 35:11-12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성취:마 26:59-60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39) 고소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함

예언: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성취: 마 27: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40) 상함과 찔림

예언: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성취: 마 27: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41) 매맞고 침뱉음을 당함

예언: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성취: 마 26: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42) 조롱당함

예언: 시 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성취: 마 27:39-42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43) 찔린 손과 발

예언: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성취: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44)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

예언: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성취: 마 27: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45) 그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함

예언: 사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성취: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46) 그 자신의 백성들에 위해 거절당함

예언: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성취: 요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47) 이유없이 미움 받음

예언: 시 69:4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성취: 요 15:24-25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함이니라

(48) 멀찍이 떨어져 서있던 친구들

예언: 시 38:11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성취: 눅 23:49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49)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다.

예언: 시 109:25
나는 또 저희의 훼방거리라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성취: 마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50) 응시했다.

예언: 시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성취: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51) 제비뽑아 나눈 옷

예언: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성취: 요 19:23-24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52) 갈증을 겪다.

예언: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성취: 요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53) 쓸개즙과 초

예언: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성취: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54) 버림받음에 대한 부르짖음

예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취: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55)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함

예언: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성취: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56) 부러지지 않은 뼈들

예언: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성취: 요 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57) 그의 찔린 옆구리

예언: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성취: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58) 땅 위에 임한 어둠

예언: 암 8: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성취: 마 27: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59) 부자의 묘에 묻힘

예언: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성취: 마 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출처] http://www.sjhla.org

예수님이 옳으셨다

예수님이 옳으셨다
● 내게 상처 준 사람에 대해 험담하기보다 그를 품는다. 나는 관계가 회복될 때의 기쁨을 안다. 아니, 적어도 깨끗한 양심의 기쁨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 몰래 숨겨 두고 싶던 돈을 헌금한다. 나는 더 많이 베푸는 기쁨을 안다. 아니, 적어도 인색해지지 않을 때의 마음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 나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지만, 단순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진실할 때의 기쁨을 안다. 그 결과 나는 예수님이 진정 옳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집을 짓는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집’이라는 단어를 ‘성격’이나 ‘영혼’으로 대체해 보라. 우리가 하는 선택의 질은 우리의 성격과 영혼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어리석은 건축자들에게 확실한 기초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분의 지혜를 나눠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이해 위에 집을 세운다면 예수님의 옳으심을 알게 될 것이며, 결코 실망할 일이 없을 것이다.
– 「누더기 하나님」/ 존 오트버그

주님만이 저의 지혜시고 의로움이시고 거룩함과 구원이십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좇지도 말게 하시며, 영원한 지혜이신 주님만을 붙들게 하시며 주님의 말씀위에 삶을 세워지게 하소서 주님만이 옳으심을 고백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아멘

 

[출처] by graced | 2007/10/17 ♥오늘의 묵상과기도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

누구나 한 번쯤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년, 짧으면 겨우 하루 24시간 정도라 할까요. 독자들은 그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합니다. 이 경우 주인공에겐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행동반경이 엄격하게 제한되는 죄수는 그러므로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내가 만약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어떤 사건이나 경험, 관계들로 채워야 할까요?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행복한 기억은 무엇이고 후회스러운 일은 또 무엇일까요?

이따금씩 생각해봅니다. 매일매일 내일 당장 죽을 사람처럼 사는 것도 아주 좋은 일이라고요. 그러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록새록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부드럽고 활기차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하지만, 우리 앞에 많은 날들이 끝없이 펼쳐질 거라 생각할 때에는 그런 마음을 종종 잃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쾌락주의 좌우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젠가 확실히 닥쳐올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삽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마지막 순간에 행운의 여신에게 구원을 받곤 하는데, 대게의 경우 구원은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삶의 의미와 그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또는 살았던 사람들이 매사에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걸 우리는 자주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건 아직 나와는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사람일수록 죽음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 또한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살날만 창창하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데 정신이 팔려 삶 자체에는 무심하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한 무심함이 우리가 가진 재능과 감각의 쓰임새를 한정적으로 특징지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아는 사람은 귀머거리뿐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소경밖에 모릅니다. 특히 후천적인 이유로 청각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면 더욱 감각의 소중함을 정실히 깨닫습니다. 하지만 시각이나 청각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은 그 능력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집중하지도 않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풍경이며 온갖 소리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무릇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병에 걸린 다음에야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는 법입니다.

누구나 막 성년이 되었을 즈음 며칠 동안만이라도 소경이나 귀머거리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어둠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깨워줄 것이며, 정적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나는 가끔 두 눈이 멀쩡한 친구들에게 그들이 보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실험을 해봅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 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봄이 오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첫 신호인 어린 새순을 찾아 나뭇가지를 살며시 쓰다듬어봅니다. 꽃송이의 부드러운 결을 만지며 기뻐하고, 그 놀라운 나선형 구조를 발견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와 같이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도 즐겁지만 수북하게 쌓인 솔잎이나 푹신하게 깔린 잔디를 밟는 것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반갑습니다. 계절의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벅찬 드라마이며, 그 생동감은 내 손가락 끝을 타고 흐릅니다.

때로 내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집니다.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런데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더군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마 인간일 겁니다. 이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수단이 아닌,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만약 대학 총장이라면 ‘눈을 사용하는 법’이란 강의를 필수 과정으로 개설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들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즐거울지를 알게 해주는 강의가 되겠지요. 말하자면, 나태하게 잠들어 있는 기능을 일깨우는 겁니다.

 

내가 만일 단 사흘만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면, 가장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내 눈을 어떻게 써야 할까?” 셋째 날이 저물고 다시금 어둠이 닥쳐올 때. 이제 다시는 자신을 위한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자. 이제 사흘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여러분의 눈길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까?

당연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어둠 속에 있는 동안 내게 소중했던 것들입니다. 여러분 또한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그 후에 닥쳐올 어둠 속으로 그 기억을 가져가고 싶으실 겁니다.
다시 암흑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을 셋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먼저, 어린 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메이시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또한 선생님의 눈빛 속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강한 개성과 내게도 자주 보여주셨던 전 인류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도 보고 싶습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지만, 나는 친구의 마음을 눈을 통해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만져지는 얼굴의 윤곽을 느낄 뿐입니다. 웃음과 슬픔,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감정들도 손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만져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냅니다. 하지만 표정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이나 내게 취하는 행동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격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을 지켜보고, 여러 가지 표현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을 관찰하고, 그들의 눈빛이나 안색이 돌변하는 것을 주시해서 그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겐 없습니다.

내가 가까운 친구들을 그나마 잘 아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 달 여러 해를 나와 함께 보내면서 자신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다지 가깝지 않은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을 맞잡았을 때의 감촉, 말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었을 때의 느낌, 내 손바닥에 와닿는 촉감을 통해서 얻은 것들입니다.

표정의 미묘한 변화, 근육의 떨림, 손의 흔들림 같은 걸 보고 사람의 본성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한편 볼 수 있다고 해서 과연 친구나 지인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얼굴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은 가장 친한 친구 다섯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가능한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시험삼아 나는 남자분들에게 자기 아내의 눈동자 색깔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가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며 모른다고 대답하더군요. 하긴 새 옷이나 모자를 사도, 집안의 가구를 옮겨놓아도 남편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는 아내들의 불평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일상적 환경에 쉽사리 익숙해지기 때문에, 실제로 놀랍거나 멋진 것을 보더라고 금방 싫증을 내고 맙니다. 법원의 기록을 살펴보면 증인들의 목격담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이 목격자와 수만큼이나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보는 사람은 간혹 있겠지만, 그래도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걸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내게 사흘 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꼭 보고 싶은지 얘기하는 중이었군요. 그럼 계속 해야겠지요?

첫째 날은 아주 바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그들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의 외적인 증거를 가슴에 새길겁니다. 또한 아기 얼굴 위에 오래도록 시선을 둔 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을 아직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내 충직하고 믿음직한 개 두 마리의 눈도 들여다보렵니다. 스코티 종 다키는 용감하고 빈틈없는 친구요, 건장하고 유순한 그레이트데인 종 헬가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재미있는 친구여서 내게 많은 위안을 준답니다.

그토록 바쁜 첫째 날에, 내 작고 아담한 집도 돌아보고 싶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양탄자의 따뜻한 색깔, 벽에 걸린 그림들,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있을 친밀감 넘치는 장식물들도 보고 싶네요. 내 눈은 내가 읽은 점자책들 위에 경건하게 머물 것입니다. 그것들은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읽는 인쇄된 책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겁니다. 기나긴 밤과도 같았던 내 인생에서 누군가 읽어준 책과 내가 읽은 책은 인간의 삶과 영혼의 깊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등대였기 때문입니다.

첫째 날 오후, 나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그리고 눈이 보이는 사람들에겐 끝없이 펼쳐져 보이는 자연의 장대한 영광을 단 몇 시간 안에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침 가까운 농장이 있어서, 끈기 있게 발을 가는 말들과(어쩌면 트랙터만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흙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신선한 즐거움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거기에 더해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놀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합니다.

자연이 어둠을 선언했을 때도 인간의 천재성은 인공적인 빛을 만들어 세상을 계속해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리면 나는 비로소 인간이 만든 빛의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기쁨을 두 배나 누리게 될 겁니다.

 

첫째 날 밤, 나는 하루 동안의 기억들로 머릿속이 가득차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겁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 둘째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습니다. 태양이 잠든 대지를 깨우는 장엄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이로울까요.

나는 이날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이라는 시대의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싶은 바람이랄까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하루만에 보느냐? 박물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나는 가끔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가서 거기 전시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만져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지구의 압축된 역사와 그 주민들 – 원시 자연환경 속에 그려넣은 동물이며 인간들을 내 눈으로 직접보고 싶었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두뇌는 막강한 인간들이 나타나 동물의 왕국을 정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지구를 누비고 다녔던 공룡이나 마스토돈의 거대한 화석들과 동물의 진화 과정을 실감나게 표현한 전시물 그리고 인간이 이 지구를 안전한 거주지로 만드는 데 사용했던 도구들, 그 외에 자연사의 다른 수많은 측면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 중 그 흥미로운 박물관의 놀라운 전시물들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럴 기회가 없었던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기회가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분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참으로 눈여겨봐둘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입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몇날 며칠이고 그곳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사흘동안만 빛을 허락받은 사람은 겨우 슬쩍 훑어보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입니다. 자연사박물관이 이 세계의 물질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인간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예술적 표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과 주거, 종족번식의 욕구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이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넓은 전시실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의 영혼이 녹아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고대 나일 강 유역을 거닐던 신들과 여신들을 내 손의 감촉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과르테논 신전의 부조 복사품도 몇 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아테네 전사들의 율동미 또한 이미 느껴본 바 있습니다. 아폴로와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상은 내 손가락 끝의 친구들이랍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호메로스의 주름진 얼굴 생김새가 특히나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역시 장님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로마와 그 다음 세대의 조각품들을 어루만지며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또 미켈란젤로의 영감이 깃든 당당한 모세 상을 더듬기도 했습니다. 로댕의 힘을 더듬으며 고딕 목각품에 깃든 헌신적인 정신에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예술품들은 내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보다는 눈으로 보기에 적합하게끔 창조된 것들은 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감추고 말기에 나는 그에 대해서는 다만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 화병의 단순한 선에 감탄할 수는 있지만, 거기 새겨진 무늬에 대해서는 통 알 수가 없더군요.

이런 이유로 해서, 나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색하는 일에 둘째 날을 바치고 싶습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알던 것들을 나는 이제 눈으로 봅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경건한 종교적 헌신을 의미했던 미술이 근대에 이르러 열광적인 비전으로 승화된, 이들 회화의 세계가 그 웅장한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나는 라파엘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렘브란트의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볼 것입니다. 또한 베로네제의 따뜻한 색조로 눈호강을 하고, 엘그레코의 신비를 탐색하고, 코로의 풍경화에서는 자연주의의 새로운 비전을 감지 해보겠습니다. 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각 시대의 예술품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건가요?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는 그 짧은 기간만으로는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예술의 세계의 극히 적은 한 부분도 제대로 찬찬히 감상했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저 피상적인 인상만 받아 가질 수 있을 뿐. 예술가들은 진정으로 예술을 깊이 감상하려면 보는 눈을 길러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선과 구성과 형태와 색의 장점을 이해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만약 내가 볼 수 있어 그런 환상적인 공부에 뛰어들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렇지만 내 주위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술의 세계를 그저 캄캄한 밤처럼, 빛이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이야기들 하더군요.

아름다움은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데, 그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매우 섭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기 위해 굳이 메트로폴리탄까지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똑같은 열쇠가 그보다 더 작은 미술관이나 또는 도서관의 서가에 꽂힌 책들 속에도 있는걸요. 하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나마 사흘밖에 볼 수 없기에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보물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이곳 메트로폴리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날 저녁은 연극이나 영화를 보며 지내고 싶습니다. 지금도 나는 온갖 연극을 보러 다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친구가 손바닥에 써줘야만 알 수 있답니다. 그러니 햄릿의 매력적인 모습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희극적 인물을 대표하는 뚱보 폴스타프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햄릿의 우아한 동작와 폴스타프의 쾌활한 걸음걸이를 눈으로 쫓을 수 있다면! 그런데 주어진 시간 동안 볼 수 있는 게 단 한 편뿐이라면, 이만저만 고민이 아닐 수 없겠군요. 꼭 보고 싶은 연극이 너무 많거든요. 여러분처럼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연극을 언제든 보겠지요.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나 멋진 경치를 보면서 그 색채와 우아함과 율동을 즐길 수 있는 시력의 기적을 고마워한 분들이 얼마나 계시는지요?

나는 내 손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의 율동미 밖에는 즐길 수가 없습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진동을 통해 리듬의 즐거움을 조금 알고 있긴 하지만, 안나 파블로바1881~1931.러시아의발레리나의 우아한 발레 동작은 그저 어렴풋하게 상상이나 해볼 뿐입니다. 율동적인 움직임이야말로 상상하건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광경 중 하나일 겁니다. 나는 대리석상의 윤곽선을 더듬어보면서 그 율동미를 조금이나마 느낀답니다. 정적인 우아함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동적인 우아함을 보는 건 얼마나 감동적일까!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 중 하나는 조지프 제퍼슨이 사랑스러운 립 밴 윙클w. 어빙 작<더 스케치 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연기하며 나에게 자기 얼굴과 손을 만지도록 해준 일입니다. 나는 그때 연극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연극 공연을 보는 보통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 데서 누리는 기쁨을 보고 들을 수 없는 내가 온전히 맛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딱 한편의 연극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직접 읽거나 수화 알파벳으로 전해 들었던 수백 편의 연극들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될 겁니다.

하여 둘째 날 밤에는 희곡작품 속의 위대한 인물들이 내 눈에서 잠을 걷어내겠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새로운 기쁨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또다시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겐 매일매일 밝아오는 새벽이 영원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의 계시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날은 내가 볼 수 있는 셋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군요. 비록 상상으로 만들어낸 기적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후회나 아쉬움 따위로 낭비할 시간이 내겐 없답니다. 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거든요. 첫날은 친구들과 가까운 동물들에게 바쳤습니다. 둘째 날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느라고 보냈습니다. 오늘은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낼까 합니다. 그러자면 뉴욕만큼 활동이 왕성하고 수많은 상황이 연일 벌어지는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뉴욕을 행선지로 정하겠습니다.

롱아일랜드의 포리스트힐 근교에 있는 내 집에서부터 시작하렵니다. 푸른 잔디와 숲과 꽃으로 둘러싸인 이곳엔 도시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쉼을 주는 마치 낙원과도 같은 작고 깨끗한 집들이 있고, 집집마다 그 집의 안주인과 아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떠드는 행복한 목소리가 넘쳐납니다. 나는 이스트리버로 뻗은 레이스 모양의 철제 구조물을 지나 강력하고 창의적인 인간 정신이 빚어낸 새롭고 놀라운 광경을 바라볼 것입니다. 선박들이 바쁘게 강을 오르내리고, 모터보트는 쾌속으로 질주하고, 예인선은 느릿느릿 증기를 뿜어냅니다. 만약 내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중 많은 날들을 이 강 위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보내고 싶습니다.

눈앞에 뉴욕의 매력적인 고층 빌딩들이 솟아 있습니다. 동화책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도시입니다. 얼마나 멋진 광경인지요! 반짝이는 뾰족탑, 돌과 철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제방, 신의 손으로 빚어낸 듯한 조각들, 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은 수백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시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들의 눈엔 이 멋진 광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죠.

나는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로 급히 올라가겠습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비서의 눈을 통해 본 적이 있답니다. 상상하던 모습과 현실을 비교하는 것이 조금 두렵군요. 하지만 내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의 광경일 테니까요.

이제 나는 도시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우선 아주 번화한 곳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미소를 보고 행복을 느낍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낍니다.

나는 5번가를 천천히 걸어갑니다.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지 않고, 만화경처럼 물결치며 흘러가는 색채들을 그냥 지나치며 걷습니다. 군중 속에서 움직이는 여자들의 드레스 색깔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할 테지요.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나도 대부분의 다른 여자들처럼 드레스의 재단이나 스타일에 신경 쓰느라 대중 속에 녹아든 화려한 색채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을 겁니다. 또한 진열장을 가득 메운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눈이 즐거울 테니, 나는 윈도우 쇼핑에 흠뻑 맛을 들이게 될 겁니다.

이제 5번가에서 나온 나는 파크 애비뉴, 슬럼가, 공장지대,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공원 등을 들러보며 시내관광을 합니다. 외국인 거주지역도 방문해서 외국에 여행가서 민박하는 기분도 맛보렵니다. 내 눈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 모두에 주목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더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나 행복과 불행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내 마음속은 사람들과 물건들의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또한 내 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눈길이 머무는 것마다 놓치지 않고 붙잡기 위해 나는 애를 씁니다.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광경들도 있지만,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광경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행하고 비참한 광경에 눈을 감고 외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눈감는 것은 마음과 정신에 눈감는 것이니까요.

광명이 주어진 셋째 날이 이제 끝나갑니다. 남은 몇 시간 동안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것들이 아직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날 저녁에 나는 아주 신나는 코미디 공연이 한창인 극장으로 달려가야만 할 것 같군요. 그래서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희극적인 요소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자정이 되어 암흑으로부터의 유예 기간인 사흘이 마침내 끝나면, 나에겐 다시 영원한 밤이 이어지겠지요. 물론 그 짧은 사흘 동안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볼 순 없습니다. 어둠이 다시 내린 후에야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빠뜨리고 보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멋진 기억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빠뜨린 것에 대해 아쉬워할 겨를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부터는 만지는 것마다 사흘의 기적이 가져온 멋진 기억들이 따라와서 그 물건의 모습을 떠올려줄 테니까요.

이상, 내게 주어진 광명의 사흘을 어떻게 보낼지를 계획해보았습니다. 이 짧은 계획은 만약 여러분이 갑자기 장님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울 프로그램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신하건대, 여러분이 실제로 그런 운명에 처해진다면 여러분의 눈은 이전엔 결코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이며, 다가올 기나긴 밤을 위해 그 기억들을 저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할 것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당신의 눈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을 어루만지고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제대로 보게 될 것이며, 새로운 미의 세계가 당신 앞에 그 문을 열 것입니다.

나는 장님이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힌트 – 시각이란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답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다른 감각기관에도 똑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일 귀가 안 들리게 될 사람처럼 음악 소리와 새의 지저귐도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연주를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촉각이 모두 마비될 사람처럼 그렇게 만지고 싶은 것들을 만지십시오. 내일이면 후각도 미각도 잃을 사람처럼 꽃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해보십시오.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세요. 자연이 제공한 여러 가지 접촉방법을 통해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영광을 돌리세요.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축복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요약

제 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1. 감정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감정이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을 가진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기능은 2가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영혼이 바라보는 사물을 인정하고 기쁘고 애착을 가지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싫어하고 거절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감정과 격정을 종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 ‘감정’이라는 말은 ‘격정’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다. 감정은 의지와 성향이 모두 왕성하고 생생하게 활동하는 것에 사용한다. 그러나 격정은 본능에 미치는 효과가 더 갑작스럽고 격렬하며 충동적인 상태가 되어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에 사용한다. 전자의 경우는 사랑, 갈망, 기쁨, 감사, 희망이 있고 후자에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이 있다.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마음이 열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하는 것은 마음에 행한 할례의 참된 열매이며, 생명의 약속이 있는 참된 거듭남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세상적인 일에서 세상적 감정이 인간의 추구와 행동의 근원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 문제에서도 종교적 감정이 행동의 근본인 것이다. 감정 없이 교리 지식과 분별할 수 있는 지식만 가진 사람은 진지한 신앙생활이 힘들다.

성경은 믿음을 사랑이라는 감정 즉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사모함과 주림과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갈망을 참된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 성경은 거룩한 기쁨 역시 참된 믿음에서 큰 부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기쁨은 믿음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자주 권면되고 진지하게 요구된다. 종교적인 슬픔, 애통함 그리고 상한 마음 역시 참된 믿음의 큰 요소로 자주 언급한다. 이것은 참된 성도를 구별해주는 특질이며 그 특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참된 믿음이 역사하는 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른 감정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다. 그리고 성경은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를 참된 믿음의 크고도 본질적인 요소로 자주 말씀한다. 열정도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믿음의 아주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한다.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자신을 주실 때에 마음에 품고 계셨던 위대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성경은 모든 감정의 원천이며 그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랑 안에 참된 믿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믿음과 경건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었다. 다윗의 경우 시편에서 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며,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뿜어내고 있다.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믿음과 경건 역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인 분위기가 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고 활력을 주며 사로잡아서 그들을 강렬한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의심이 필요 없는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 속에 존재한다.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마가복음3: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에 완악하기 때문이다(에스겔3:7).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에 완고하면서 악하기 때문이다(역대하36: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에스겔11:19;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이와 반대인 부드러운 마음은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시야왕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열왕기하 22:19에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기술되어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팍함과 연결시킨다.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이제는 몇 가지의 추론적 결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우리는 모든 신앙감정을 믿을 수 없거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사람들의 오류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당시에 이 땅에 영적 대각성기에 위대한 신앙감정을 가졌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올바른 성향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들이 감정적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졌을 때에 많은 오류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높이 고양된 감정들이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당연하게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교묘한 술수를 보게 된다. 사단은 신앙감정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보았고,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과 그 감정들이 참된 것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고 잘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오류는 결국 사람이 감정이 없는 형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람들이 모든 신앙감정들을 경멸하고 얕잡아 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심령 속에서 모든 참된 믿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철저하게 파멸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고상한 감정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 안에 고상한 감정들이 있을 수가 없다. 신앙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신앙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경멸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런 감정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만일 참된 신앙이 대부분 감정에 있다면 감정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는 경향성을 지닌 수단들을 힘써 구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서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에 참된 유익을 주지 못하는 수단들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방법들이 감정들을 감정을 자극할 수는 있더라도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이나 은혜를 향하는 감정을 자극하지는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에 속한 일들을 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기 위해 그 방법들을 본성에 적합하고 참된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그 방법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감정을 더 많이 일으키게 되며 그럴수록 그 방편들은 더 나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참된 믿음의 대부분이 감정 아에 있다는 것이 옳다면, 우리가 믿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감정이 더 이상 자극받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당혹스러워해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정을 주신 목적은 그들에게 영혼의 모든 다른 기능들과 원리들을 주신 목적과 같다. 그 목적은 감정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큰 목적 즉 사람의 본분에 봉사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갖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 때문에 외면적인 쾌락을 위해, 명예와 명성을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그들의 소망은 강렬해지고 욕망은 타오르며 그들의 사랑은 불이 붙고 열정은 강렬해진다. 그러나 과연 영원한 세계인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감각하고 심령이 굳어져 있으며, 강퍅해져 있는지! 그들의 열정은 식어있고 그들의 갈망은 미지근하며, 그들의 감사는 얼마나 부족한지!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든 사용해야 한다면 그리고 쓸모없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감정은 감정의 작용이 가장 합당하게 쏟아야 할 대상을 향해 발휘대고 행사되어야 한다. 복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우리의 칭찬과 감탄과 사랑의 대상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성육신 하시고, 무한한 사랑이 있으시며,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고 또 죄인을 위해 죽으신 구속주의 얼굴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주를 위해서 열정적이고 강렬하게 사랑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첫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강도

신앙감정이 단지 크게 높아 졌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오류가 없는 성경은, 매우 높아졌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감정이 있음을 분명히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갈라디아서 4:15). 11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한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하다.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그들이 크게 감화되어 찬송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자신의 놀랍게 나타나심을 보고 크게 감동했고, 거룩한 언약을 세울 때 관심을 보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잊어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시대는 어떠한가? 그가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 때에는 찬송하며 소리쳤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고 조롱과 가시 면류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결국은 신앙감정이 높다고 하더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2. 두 번째 소극적 표지: 몸의 격렬한 반응

모든 감정은 어떤 것이든 어떤 점에서든 또는 어느 정도로든 몸에 영향을 준다. 몸은 심리적 작용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몸의 체엑 특히 본능은 마음의 변화와 심리적 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몸에 미치는 영향들은 그 영향을 초래한 감정들이 영적 감정인지 일반적 감정인지를 판단해 주는 표지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상적인 일들에서도 몸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감정으로 높아졌음을 나타내시려고 영적인 감정과 전혀 맞지 않는 것들과 사단의 교묘한 흔적들 그리고 웅덩이의 더러운 냄새를 끝없이 풍기는 것들을 아름다운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하신다고 생각지 않는다.

3. 세 번째 소극적 표지: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풍부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이유 때문일 수도 있고 나쁜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한 감정들로 가득 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에 쌓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된 감정들은 그 강도가 같다면 참된 감정들보다 더 심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본질이 바로 겉으로 드러내고 과시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 이 현상들의 증거다.

4. 네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사람이 지정된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향상시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자 기대한다는 것은 타당치 못한 교만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 채 사람들의 마음에 구원하는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열광주의적인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악한 영에게서 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이지만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비롯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신체가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 또는 뇌가 약하거나 여러 가지 생각과 인상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과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과 상상은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그 원인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같은 이유로 해서 영적인 인상에서도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잠자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사단에게는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 그래서 사단은 사람의 마음속에 성경 말씀을 표현하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인 타락한 이단의 교사들이 성경 말씀을 악용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베드로후서3:16). 우리는 그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본문이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성경 본문을 악용하도록 허용되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영혼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기들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마귀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려고 성경을 악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어리석음과 부패함 역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소극적 표시: 사랑의 피상적 표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함없이’라는 말은 원문에 ‘부패함 없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어도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일곱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정도

거짓된 믿음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온전함과 조화가 없지만, 매우 다양한 거짓 감정들을 합하면 은혜로운 감정과 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거짓이 있다.

회심하기 전 상태에서 사람들이 신앙감정과 유사한 모든 감정 가운데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유사한 감정을 동시에 함께 체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자주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올라갈 때 다른 많은 거짓된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8. 여덟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체험 순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2가지의 매우 다른 상태에 있게 된다. 처음에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에는 칭의와 축복의 상태이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지성과 이성에 맞게 다루신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이 두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한 합당한 듯하다. 먼저 그들은 정죄의 상태 속에 있는 자신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여 자신들이 심각한 재난과 두려운 비참함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어서 그들은 구원과 행복의 상태를 체험해야 한다. 즉 그들은 먼저 그들이 처해 있는 절대적으로 극심한 빈곤의 상태를 체험하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그리스도를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나타나시기 전에 그들이 좌절하는 상태가 되어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 편으로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감과 각성을 경험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꼭 회심하는 것이 순서가 확실히 수학 공식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회심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참된 회심자들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죄의 자각과 위로를 어떤 방법과 순서대로 하나씩 경험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서 보게 된다.

진정한 회심은 그 일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일의 영적이고 신적인 본질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다.

9. 아홉 번째 소극적 표지: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우리는 예배를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의무적으로 하다못해 어쩛 수 없이 드린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이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정말 혐오스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외식하는 자를 경계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경험상, 우리는 거짓된 신앙의 사람들도 신앙적인 일들을 외적으로 많은 열심을 내며 행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안다. 그들은 그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게 되고, 다른 삶은 생각하지를 않는다. 결국엔 은둔자가 되어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0. 열 번째 소극적 표지: 찬송을 열심히 부름

가장 확실한 한 예를 들자면 출애굽시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들은 분명히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는 주님을 향해 찬송을 불렀다. 그러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의 일들을 잊어버렸다.

소망과 위로 가운데 무가치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자비하심 때문에 감화되어 이 값없는 은혜를 크게 높이며 찬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혜로운 감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에게 위대한 감정과 존경심으로 찬양하며 높였다. 이방의 느부갓네살 왕과 다리오 왕도 그러했다.

11. 열한 번째 소극적 표시: 자신의 구원 확신

확신이라는 것은 어떤 비상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을 받고,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된다(베드로후서1:5-8).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신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신자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비난을 받을 이유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위선자에게도 이런 확신은 있는데 그것이 확고해지면 참된 성도들은 종종 의심하는 일에서도 자기가 품은 소망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된다. 첫째로, 그는 마음이 신중해야 하고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며 자신이 속고 있다는 두려움이 없다. 둘째로, 위선자는 참된 성도에게 있는 자기 자신의 소경 됨에 대한 지식과 자기 마음의 거짓됨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신의 지식이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된 깨달음과 감정으로 기만당하는 사람들은 더 쉽게 자신들에게 있는 빛과 지식을 더 크게 자만하게 된다.

셋째로, 마귀는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소망은 공격하지만 위선자들의 소망은 공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그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심령 속에 은혜를 더욱 내리시고, 깊이 품도록 하시고, 삶 속에서 더 엄격하고 부지런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거짓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성도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보는 것 같은 시각이 없다. 반성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에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된 깨달음과 고상함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전자는 알마니안주의자들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을 폄하하며 대가 없는 은혜를 많이 말한다.

12.열두 번째 소극적 표시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개연적인 신앙의 모습을 발견 할 때,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로서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다. 그러나 외형적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을 얻을 수준으로 아름답고 밝아 보일 때는 제일 수준이 높은 사람들 조차도 속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신앙을 고백하던 성도라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신앙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일이 교회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신 원리와 말씀들에 만족하고 자신들의 원리를 버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남이 인정한다고 우쭐하거나 자팩할 거 없다.

제 3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구별해 주는 표지들

1. 첫 번째 적극적 표지: 성령의 내주

우리는 참된 성도들 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을 신약 성경에서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사람인 것은 그들이 가진 고유의 자질이라고 말하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영구적으로 거하실 처소인 참된 성도들 안에 거주하신다. 그래서 성도를 자신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2:20).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로서 성도와 연합한다.

성도들과 그들에게 있는 미덕들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성도들의 영혼 속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역사하시고 자신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영의 본성인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성령 또는 거룩한 영이라고 부른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셨다고 선포한다는 것과 그것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이 참되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2. 두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식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들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본질은 참된 성도에게 있는 영적인 감정에서 제일 중요하고 근본적인 객관적 기초가 된다고 주장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 때문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 등을 사랑해야지, 자신들의 얻게 될 가상적인 이득이나, 받은 또는 받을 혜택이나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었기에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 속에 참되고 거룩한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먼저 알고 나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영광을 먼저 경험하고,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런 생각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나중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사랑과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도의 감정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달콤한 영광을 즐거워하는 성도는 자신을 바라보거나 뒤돌아 볼 시간이 없다, 그리고 교만하거나 태만하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

3. 세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인식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아는 일반적인 형태의 도덕의 의미는 아니다. 거룩함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이나 척도와 무관하고 거룩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질들과 관계없는 본성 자체로서 본성을 완성하거나 본성에 어울리는 선을 뜻한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란 의미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속성이나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선하고, 의롭고, 한없이 마땅하고 사랑스러우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시고, 영원하시고, 편재하시며, 장엄하고 두려운 위엄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기뻐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속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거룩성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위대하심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4. 네 번째 적극적 표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본체의 아름다움이며,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신성이시며(베스트 오브 베스트)(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선의 무한한 근본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악이 될 것이다(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또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

믿음에 대한 참된 체험적 지식은 영적 아름다움을 아는 데에서 생긴다. 믿음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여러 은혜 중에서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사역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 전체를 알지 못한다.

영적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의 눈이 열려서 성경의 참된 의미 속에 담겨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항상 그 안에 담겨있던 영광스러운 일들의 놀라운 영적 탁월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이 사랑스럽고 밝게 드러난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 탁월하며 합당함을 아는 것이며, 성경의 계명들과 약속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것이다.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

합리적인 확신은 참된 증거에 기초한 확신이다. 또는 확신할 만한 좋은 이유나 정당한 근거를 기초한 확신이다.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탁월성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느낌으로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런 확신이 생길 때, 비로소 복음에 속한 위대한 일들의 신성과 진실성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되면 복음에 있는 내용이 거룩하다는 확신이 직접 마음에 생긴다. 왜냐하면 이 영광 그 자체가 복음의 신성함을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영광을 분명하게 보거나 이 초 자연적 감각이 상당할 정도로 생길 때 더욱 그러하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봄으로써, 복음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하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확신하게 된다.

2.이런 신적인 영광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가 진리라는 확신을 더 간접적인 방식이 있음을 말한다. 1)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립하는 마음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증거 되는 말씀에 설득되어 마음이 녹아지게 함으로써 그런 확신을 심어준다. 2) 신적인 영광에 대한 관점은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해 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성을 돕는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그 대상들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그 대상들의 상호 관계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6. 여섯 번째 적극적 표지: 참된 겸손

복음적인 겸손의 본질은 자신이 엄청나게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은혜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피조물임을 아는 겸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경멸스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겸손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일반적으로 대단한 겸손을 가장해서 나타나지만, 영적인 교만을(아마도 보편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발견하고 구별하게 해 주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런 영적 질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신앙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이 탁월한 성도이며, 성도 가운데 아주 원숙한 사람이고, 자신이 특별히 선하고 위대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로, 사람이 자신의 겸손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된 체험은 보통 가짜 겸손을 동반한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바로 거짓된 겸손의 본질이다. 거짓된 신앙감정은 일반적으로 그 감정을 체험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자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평가한다.

7. 일곱 번째 적극적 표지: 성품의 변화

회심은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않는다. 회심하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내적에 있는 본성 때문에 죄에 계속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은 심지어 이런 죄들에 대해서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비록 은혜는 악한 본성적 기질을 완전히 뿌리를 뽑지를 못하지만, 은혜의 강한 능력과 효과로 악한 본성적 기질을 고칠 수 있다. 처음 회심 때 체험하는 영적 깨달음과 감정과 마찬가지로, 회심한 후에 사람들이 체험하게 되는 모든 깨달음과 감정들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8. 여덟 번째 적극적 표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감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 같은, 비둘기 같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성경이 많이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본질적이고, 탁월하게 복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본질이며, 참된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정에는 그런 정신이 속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정신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두려움과 소망, 슬픔과 기쁨, 확신과 열정에 대한 본질적 성향인 것이다.

9 아홉 번째 표지: 하나님을 두려워함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아담이나 하와나 가인 같이 그렇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마음의 부드러움은 우리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심에서 아름답게 예시 되어 있다. 어린 아이는 살만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부드럽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쉽게 움직이며, 쉽게 영향을 받으며, 쉽게 굴복한다. 영적인 일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음도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의 말씀을 경건하고 받드는 것이다. 무서워하는 것은 죄를 지어 무서워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서워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10. 열 번째 적극적 표지: 신앙의 균형

성도들이 지닌 진정한 거룩한 감정에는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의 전체가 각인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성도들 안에 있다. 은혜의 걸맞는 은혜가 있다는 말이다.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형상이 있으며, 이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걸맞다. 그 형상은 참된 형상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가 있다. 특징에 걸맞는 특징이 있고, 지체에 걸맞는 지체가 있다.

하나님의 작품에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꼐서 만드신 자연적인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1. 열한 번째 적극적 표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참된 성도가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사랑하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그가 죄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그는 죄를 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에게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한다. 그가 죄를 더 애통해할수록,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싶어지며, 그의 심령이 더 상할수록 심령이 더욱더 상하기를 갈망한다. 그가 하나님과 거룩함을 더 목말라하고 더 갈망할수록, 그는 더 갈망하고 하나님을 매일 찾게 된다.그럴수록 은혜의 불꽃이 타 올라서 온 몸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한다.

12. 열두 번째 적극적 표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이 말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세상에서 성도의 행위나 실천은 기독교의 원리에 전체적으로 일치해야 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둘째, 성도는 그런 거룩한 행위를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성도는 이 땅에서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한다.

거룩함에는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전적으로 순종적이라는 평가르 받기 위해서는 그의 순종은 금지의 명령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헌신하고 있는 일과 같이 그리고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한 사업과 같이, 신앙생활과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아주 진지하고 부지런하게 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세 번째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나게 되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전적인 순종의 길과 부지런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지속해 나간다. 참된 성도들은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대한 섬김에 진저리가 날 정도까지는 결코 타락할 수 없다. 즉 더 이상 전적으로 순종할 수 없을 정도로는 결코 변절되지 않는다.

은혜로운 감정은 그리스도인의 행에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그리스도인의 행함으로 행사되고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은혜로운 감정들의 가장 주된 객관적 근거가 신적인 일들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질에 있는 것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거룩하게 행동하게 하는 이유는 모든 거룩한 감정의 토대인 신적인 일들에서 보이는 탁월성 즉 신령한 일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탁월성 또는 아름다운 거룩함에 있는 듯하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실천적인 경향성과 결과를 갖는 것은, 감정들이 신적인 일들이 실재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기 때문이다.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행위는 온전히 변하지 않는다.

거룩한 감정들이 이와 같이 실천적으로 행하고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이유는 거룩한 감정들이 겸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은 순복적이고 복종적이며, 순종적인 마음이다.

은혜로운 감정들이 엄격하고 전반적이며 지속적인 순종을 동반하게 하는 이유는 온유함 때문이기도 하다. 온유한 심령은 참된 성도들의 감정에서 드러나며 도덕적인 악의 존재와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 속에 빠르고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은혜로운 감정들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전반적이고 지속적이며 끈기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에서 흘러 나오는 행위는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룩한 감정들이 거룩한 행위를 향한 진지함과 행동과 헌신과 인내를 통해 표현되고 드러내는 이유는 신앙생활에서 더 큰 성취를 얻고자 하는 영적 욕구와 갈망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참된 감정을 동반하며 퇴보하지 않고 점점 증가한다.

우리의 삶은 비타민C 같다고 할 수 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은혜를 갈망하며 그 분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신앙이 퇴화하고 죄를 짓는 옛날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늘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나누게 되면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단 15분만이라도 하나님의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것이 내겐 유익하다.”

우리도 역시 이런 주님이 주신 달콤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출처] changmoolee.tistory.com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1. 무엇을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자기 연민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으며 삶이 항상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2. 스스로 ‘독립성’을 유지한다남에게 휘둘리지도 남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상사가 나를 짜증 나게 해”라고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과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하기보다 유연함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변화는 불가피하며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4.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교통체증, 이미 잃어버린 수하물 등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열 받지 않는다. 그 보다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나 상황에 집중한다.

  5. 모두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때때로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6. 예측 가능한 리스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 리스크가 현실로 닥쳤을 때 어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지 철저히 평가한 뒤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행동으로 옮긴다.

  7.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아 옛날이여’라며 과거에 얽매여있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배웠다고 여기고 현재와 미래에 집중한다.

  8. 실수는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반드시 책임을 진다. 따라서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9.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축하하고 인정할 줄 알며 질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성공을 위해 묵묵히 일한다.

  10. 한 두 번의 실패로 포기하지 않는다. 실패는 성장을 위한 기회로 이용하며 제대로 해낼 때까지 시도한다.

  11. 혼자 있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과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홀로 보내는 시간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보낸다.

  12. 세상이 자신에게 무언가 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을 바탕으로 성공할 기회를 노릴 뿐이다.

  13.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 변화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할 뿐 조급해하지 않는다.
    [출처] 에이미 모린/심리학 강사

조영남의 ‘대작’ 사건을 통해 본 세태

중견 가수 조영남 씨가 다른 사림이 그린 그림을 자신이 그렸다고 속여서 비싼 가격에 팔았다는 ‘대작’ 사건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습니다.

조영남 씨는 논란이 일자 이러한 ‘대작’이 미술계의 관행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발언했고, 미술계에서는 이 발언에 대해서 찬반으로 나뉘어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검찰에서 수사 중이기 때문에 결론을 어떻게 내릴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을 통해 보게 된 우리 시대의 현실이 씁쓸합니다. 어떤 점이 씁쓸하냐면요,

첫째, 실력보다 명성이 더 중요했다는 점입니다. 누가 보아도 가수 출신 조영남 씨보다는 미술 영재 출신 송기창 씨가 더 미술 실력이 뛰어나지만, 조영남 씨가 수 백만~수 천만원에 판 그림을, 송기창 씨는 고작 10만원에 그렸다니 말입니다.

둘째, 효율이 탐욕으로 변했다는 점입니다. 최소 투자로 최대 수익을 거두는 것이 효율이라지만, 그림 한 점 당 10만원은 물감 가격 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원가절감은 효율이 아니라 탐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 돈에 대한 추구가 끝이 없다는 점입니다. 조영남 씨는 3년 전 방송에서 65억 짜리 187평 호화빌라에 사는 모습을 공개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인색하게 굴면서까지 돈을 더 벌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하버드보다 뛰어난 그 대학의 커리큘럼

“100권의 인문고전을 읽고 토론한 세인트 존스 대학의 졸업생들은 아이비리그 졸업생들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로즈 장학생에 선발되고, 저명한 과학자와 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지성, < 리딩으로 리드하라> 중에서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는 기독교 고전학교 연합ACCS, Association of Classical & Christian Schools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초중고 12년 동안 < 성경>과 인문고전을 공부하는 게 주 교육과정인 기독교 고전학교 150곳과 기독교 고전교육 홈스쿨링 연합 25곳이 가입해 있다고 합니다.

국영수 중심의 교육과정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좀 당황스러운 단체입니다. 목사나 인문학자를 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도 아닌데, 초중고 12년 동안 < 성경>과 인문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게 주 교육과정이라니 말입니다.

제가 강의장이나 사석에서 이 단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대학은요, 대학입시는 어떻게 하고요?”

그럼 저는 이런 대답을 들려줍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이 단체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같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단체 출신 학생들의 대학입시 성적은 SAT 상위 10~15퍼센트 이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 고전학교 졸업생들의 SAT 성적은 상위 5퍼센트 이내라고 합니다.”

미국의 대학들 중에도 기독교 고전학교 연합과 비슷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학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교가 말버러, 뉴, 리드, 세인트 존스입니다. 워싱턴D.C. 대학정보원 설립자이자 미국 최고의 대학교육 평가 전문가인 로런 포프는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에서 이 네 대학이야말로 미국 최고의 지성적인 대학으로서 하버드, 스탠퍼드, 예일보다 뛰어나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 세인트 존스가 으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최고의 대학교육 평가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우리에겐 생소한 세인트 존스 대학이 하버드, 스탠퍼드, 예일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인트 존스 대학의 신입생들 중에서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10퍼센트 이내에 든 사람이 전체 학생의 20~3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아이비리그는 전체 학생의 95퍼센트 이상이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10퍼센트 안에 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비리그와 비교하면, 세인트 존스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들이 들어가는 대학인 것입니다.

하지만 4년 뒤에는달라집니다

로런 포프의 보고에 따르면 대학 4년 동안 인문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한 세인트 존스 출신들은 아이비리그 출신들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로즈 장학생에 선발되고, 저명한 과학자와 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비율 또한 아이비리그 출신들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저는 세인트 존스의 비결을 인문고전 독서의 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문고전 독서는 두뇌에 특별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물론 처음에는 고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렵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진도가 일주일 또는 한 달씩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어느 지점을 넘기면 고통은 기쁨으로 변한다.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천재들이 쓴 문장 뒤에 숨은 이치를 깨닫는 순간 두뇌는 지적 쾌감의 정점을 경험하고 그 맛에 중독된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뻔한 꿈밖에 꿀 줄 모르고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인문고전 저자들처럼 혁명적으로 꿈꾸고 천재적으로 사고하는 두뇌로 바뀌기 시작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세인트 존스 대학의 주 교육과정은 4년 동안 인문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세인트 존스 학생들이 제가 <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제시한 대로 독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도 두뇌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인문고전 독서가들이 흔히 빠지는 ‘읽기를 위한 읽기’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최고의 대학교육 평가 전문가 로런 포프가 밝힌 분명한 사실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그들 중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하버드 출신보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시카고 대학의 사례는 인문고전 독서가 두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뒷받침해줍니다.

미국의 대부호였던 존 D. 록펠러가 설립한 시카고 대학은 한때 미국 최하의 삼류 대학이었습니다. 1929년 어느 날 이 대학에 로버트 허친스(Robert Hutchins)라는 사람이 총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힘을 광적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시카고 플랜’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인문고전 100권을 두뇌에 인이 박히도록 읽지 않은 학생은 졸업시키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플랜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시카고 플랜’의 혜택을 받은 학생들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노벨상 왕국’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1929년부터 2000년까지 시카고 대학이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는 무려 68명에 달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백악관 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는 <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을 노벨상 왕국이라고 한다. (..) 시카고 대학이 노벨상 왕국이 된 데는 항존주의 교육철학의 시조인 로버트 허친스 총장의 공적이 컸다. 1890년에 창설된 후 별 볼일 없는 대학으로 1929년까지 유지되어오던 시카고 대학은 로버트 허친스 박사가 총장이 되면서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고전 100권을 각 분야에서 읽도록 했다. (..) 그러한 교양교육의 성과로 시카고대 동문 교수 중에서 엄청나게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나라 대학의 인문고전 독서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한때 우리나라에 인문학 열풍이 불었습니다. 이때 많은 대학들이 인문고전 100권 읽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 운동을 보면서 ‘이제야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인문고전을 읽게 되었구나. 이제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멋진 미래가 열리겠구나’ 하는 생각에 참 많이 기뻤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독서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탓에 인문고전 독서를 마치 입시 공부하듯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황희철 차이에듀케이션 대표와 함께 수도권 대학 스무 곳의 학생들을 선발, 인문고전 독서 동아리와 인문학 교육 봉사 동아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두 동아리가 ‘학점’과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즈음에 대학가의 인문고전 독서 운동도 시들해졌습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에 대학가를 향해 이런 쓴소리를 내뱉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은 한때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인문고전 독서에 열심이었다. 교수가 수업시간에 인문고전을 원서로 강독하고, 선배가 후배에게 철학고전을 권하고, 대학 4년 동안 고전 100권을 돌파하겠다며 각오를 다지는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 그런데 알다시피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인문고전 독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인문고전을 원서로 읽으라는 숙제를 내주던 교수도, 신입생에게 플라톤과 < 논어>를 권하던 선배도,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죽어라 인문고전을 읽던 학생도 다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베스트셀러를 읽으라는 숙제를 내주는 교수, 신입생에게 재테크 서적을 권하는 선배, 무협 판타지 소설을 애독하는 학생들이 들어섰다. 물론 베스트셀러, 재테크 서적, 무협 판타지 소설이 나쁘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세 가지는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다. 나는 인문고전 독서가 사라진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학가의현실은 어떻습니까?

인문고전은커녕 베스트셀러, 재테크 서적, 무협 판타지 같은 책도 읽지 않고 있습니다. ‘학점’과 ‘취업’이라는 명분 아래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대학 시절부터 노예의 삶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나라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헬조선일 것입니다.

저는 대학생들에게 감히 제안하고 싶습니다. 폴레폴레와 차이에듀케이션의 꿈을 함께하자고 말입니다. 폴레폴레와 차이에듀케이션은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에 인문고전 독서 동아리와 인문학 교육 봉사 동아리를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 아동 센터와 고아원 등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빈민촌에 대학생 인문학 교육 자원봉사자를 파견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젊은이의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폴레폴레와 차이에듀케이션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인트 존스 대학 고전 100권 목록 바로 가기

[출처] 다음 스토리펀딩, ‘리딩으로 리드하라’ 5화 하버드보다 뛰어난 그 대학의 커리큘럼 중에서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만 버릇이 없을까요? 이 말이 언제부터 나왔는지 아시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어디에 갔다 왔느냐?”
“아무 데도 안갔습니다”
“도대체 왜 학교를 안 가고 빈둥거리고 있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왜 그렇게 버릇이 없느냐? 너의 선생님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항상 인사를 드려라. 왜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지 않고 밖을 배회하느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오거라.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땔감을 잘라오게 하였느냐?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쟁기질을 하게 하고 나를 부양하라고 하였느냐?
도대체 왜 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냐?”

-BC.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부모에게 대들고,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스승에게도 대든다”

– BC. 425년경, 소크라테스

 

“요즘 대학생들 정말 한숨만 나온다. 요즘 대학생들은 선생들 위에 서고 싶어하고, 선생들의 가르침에 논리가 아닌 그릇된 생각들로 도전한다. 그들은 강의에는 출석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 1311년, 알바루스 펠라기우스

 

[출처] 나무위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습관은 매우 중요하다

잘 한다는 것은 반복적인 훈련과 습관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모든 행동도 결국은 습관의 산물입니다. 좋은 성품을 맺고 싶거든 좋은 생각과 좋은 언어를 계속 사용하십시오, 거룩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닮고 싶은 사람을 정하여 실제로 그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십시오, 처음에는 힘이 들지만 점차 그것이 나의 삶으로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따라 판명된 존재다. 따라서 우수성이란 단일 행동이 아니라 바로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입니다.

[출처] CBS 1분 묵상

터무니없다고 비웃음을 사던 “최저임금 시간당 15달러(약1만7천250원)”가 실현된 과정 되짚어보기

2012년 11월, 뉴욕 맥도날드에서 시간당 8달러를 받으며 일하던 점원 앨터리크 홀(Alterique Hall) 씨가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한 최초의 시위에 다른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직원 200명과 함께 참여했을 때, 많은 사람은 시간당 15달러가 웬 말이냐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후 3년 반이 흐른 지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손가락질받던 그들의 요구는 미국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2022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의 시간당 최저 임금을 15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주의회로부터 승인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31일 뉴욕 주지사도 2018년까지 뉴욕시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고 2021년까지는 이를 뉴욕시 근교로 확대하며 뉴욕 주 전체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12.5달러로 올릴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저임금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전국 고용법안 프로젝트의 폴 손(Paul Sonn)은 캘리포니아와 뉴욕이 움직이면,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습니다.

뉴저지 주에서는 민주당 주의회 의원들이 최저 임금 15달러 인상안을 공화당 소속 주지사인 크리스 크리스티가 막아설 경우 이를 선거 이슈로 쟁점화해 유권자들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DC 시장 역시 이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 주의회 역시 이 아이디어를 심도하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최근의 변화는 특히 미국에서 노동조합의 힘이 계속 약화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놀라운 것입니다. 미국 민간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 중에서 노동 조합원의 비율은 6.7%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디애나, 미시간, 웨스트버지니아, 그리고 위스콘신 주에서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약하는 법안들이 2011년 이후 잇따라 통과되었습니다.

조지타운의 역사학자인 마이클 카진(Michael Kazin)은 말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친 노동자, 친 노동조합 정서가 남아있습니다. 무엇보다 소득 불평등은 우리 시대의 큰 이슈입니다. 오늘날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자는 운동이 가지는 의미는 시민 평등권 운동이 1960년대에 가졌던 의미와 비슷합니다. 피할 수 없는 이슈라는 것이죠. 정치인들, 적어도 민주당 정치인들은 올바른 역사의 편에 서고 싶어 하죠.”

59%의 미국인이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84%, 무당파의 58%, 그리고 심지어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도 32%가 이를 지지합니다.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리는 데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변화한 이유는 트럼프와 샌더스가 이번 선거에서 많은 지지를 확보한 이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즉,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고 소득 불평등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5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시간당 15달러 이하를 법니다. 많은 미국인은 수백 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지고 대신 저임금의 서비스 산업 일자리만 생겨난 데 분노합니다. 샌더스 후보는 15달러 최저임금을 적극 지지하고 있지만, 트럼프 후보의 경우는 임금이 너무 높다며 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최저 임금을 12달러로 올리고 만약 주 정부가 15달러로 하고 싶어 하면 이를 허용하는 방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최저 임금 인상을 외치며 뉴욕에서 시작된 시위는 현재 150개 이상의 도시로 퍼졌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최근의 최저임금 인상 시위는 지난 수십 년간 있었던 여러 노동 문제 관련 시위 중 가장 대규모이며 대학생부터 노인 요양병원 간병 보조원에 이르기까지 지지 세력도 다양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시애틀 근교 도시인 시택(SeaTac)에서 최초로 시간당 15달러 최저임금을 통과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패서디나와 같은 도시들에서도 같은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5달러 최저임금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서비스 노동자 국제 조합의 매리 헨리(Mary Henry) 회장은 말합니다. “실제로 몇몇 도시에서 15달러 최저임금이 통과된 것은 사람들에게 이게 실현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줬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15달러 최저임금은 사람들의 요구사항에서 하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15달러 최저임금이 가능한지가 아니라 얼마나 그걸 빨리 쟁취하는가의 싸움이 됐습니다.” 그녀는 민간기업인 네이션와이드 보험, 페이스북, 그리고 피츠버그의 가장 큰 병원 체인인 UPMC도 15달러 최저임금을 채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두 개의 노동조합이 2021년까지 15달러 최저임금을 채택하는 주민 투표를 준비해 왔습니다. 유권자들이 분열되고 양 진영에서 많은 돈을 쏟아붓는 상황을 우려해서 주지사 제리 브라운은 서둘러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2022년까지 15달러 최저임금을 채택하되, 사업주들에게 적응 기간을 충분히 주자는 것입니다. 26명 이하의 직원을 가진 사업장은 15달러 최저임금 채택을 1년 미룰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만약 캘리포니아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주지사는 이 법안 시행을 중지시킬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기업인들과 몇몇 경제학자들은 15달러 최저임금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소상공인 연합회장인 빌 돔프로우스키(Bill Dombrowski)는 말합니다. “15달러 최저임금은 소상공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올 것입니다. 온라인 상거래가 이미 많은 소상공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법안은 또 다른 어려움을 더하고 있는 셈이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경제학과의 데이비드 노마크(David Neumark) 교수는 최저임금 15달러로 인상 운동이 가장 덜 숙련된 노동자들의 고용을 5~10% 정도 줄일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번 법안으로 고용주들이 더 빨리 자동화를 도입하는 동시에 생산품 가격 역시 올릴 수밖에 없어 매출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더 빨리 일자리를 잃게 되리라 예측했습니다. 노마크 교수는 말합니다. “최저임금 인상의 도움을 받는 사람의 수가 피해를 받는 사람 수보다 많은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의 마이클 라이쉬(Michael Reich)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는 큰 영향이 없을 거라고 전망합니다. 그는 몇몇 분야에서는 자동화가 늘어나고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어 매출이 감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효과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상쇄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는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미미하리라는 겁니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있는 버거킹에서 시간당 10달러를 받으며 일하는 홀리 다이어스(Holly Dias) 씨는 최근 주 정부의 결정을 반기며 말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기 분유나 기저귀를 살 것인지, 월세를 낼 것인지, 아니면 버스 월 정액권을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던 날이 많습니다. 엄마들이 이런 상황에 놓이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다이어스 씨와 그녀의 5개월 된 아들은 정부로부터 식료품 할인 구매권과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 메디케이드를 지원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덧붙였습니다. “최저임금이 15달러로 오르면 제가 정부 보조를 받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뉴욕타임스)

 

[출처]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 뉴스페퍼민트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진다고요? 걱정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미래에 로봇,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프트웨어와 자동화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질 것을 걱정합니다. 미국의 일자리 절반이 20년 안에 자동화 때문에 사라질 거라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고요.

하지만 단순한 작업을 기계가 대신하는 일은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상당 부분 이미 일어난 일이죠. 오늘날 제조업에 종사하는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8%로, 50년 전에 비해 이미 3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건설업, 광업, 농업과 같이 몸을 써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전체의 6%에 지나지 않습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미국인의 상당수가 몸담았던 분야인데 말이죠. 오늘날 미국인 대다수는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기계에 의한 자동화가 서비스업 종사자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소비자가 인간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선호하며, 다른 인간과의 교류를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의 바리스타가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커피 자판기는 오래 전에 등장한 물건이고, 조금만 기술을 손 본다면 나머지 메뉴를 판매하는 기계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스타벅스가 바리스타를 전원 해고하고 자동 판매기를 설치할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사람이 만들어주는 커피를 받아서 마시는 일련의 과정이 스타벅스가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경험”의 핵심이니까요. 70년대에 비디오테이프라는 물건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이 요가나 에어로빅 강사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갑니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과 자신의 거실에서 TV 화면을 보면서 운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스타벅스의 가치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편의성입니다. 스타벅스 건너편에 또 다른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는 농담이 있을만큼, 스타벅스는 점포수를 늘이는데 역량을 모았습니다. 소비자들이 언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식료품점도 비슷한 전략을 택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식료품점은 80년 전에 비해 50배나 많은 품목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 십년 간 바코드를 비롯한 여러 점포 운영 기술이 등장했습니다. 식료품점은 이런 기술을 활용해 취급 품목수는 그대로 두고 인건비는 줄이면서 오히려 물건 값을 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식료품점 업계는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오히려 취급 품목수를 크게 늘였습니다. 물건의 가격이 전체적으로 조금 비싸도 한 가게 안에서 선택의 폭이 크게 넓어지는 것을 소비자들이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제조업의 경우, 공장이 자동화되면 공장주는 비용이 절감되어 좋고 소비자는 물건값이 내려서 좋습니다. 하지만 서비스업의 경우 “자동화”란 일부에만 국한되고 종종 소비자에게 오히려 일을 떠넘기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자동응답 고객 상담 서비스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기계 음성이 시키는대로 수 많은 번호를 눌렀는데 원하는 서비스는 받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와 처음부터 통화를 시작해야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대형 마트에 도입된 셀프 계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끔찍한 일이겠지만, 숙달된 판매원 대신 어설프게 바코드를 직접 찍는 일이 더 괴로운 사람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대부분 점포에서는 계산원을 셀프 계산대로 전면 교체하지 않고 있는 이유죠. 어쩌면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이 계산을 해주는 서비스가 귀한 것이 되어, 고급 상점에서는 오히려 셀프 계산대를 쓰지 않는 현상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길 일이 없으니 기뻐하면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 경제가 일자리를 자동화시킴으로서 발전해왔다는 것입니다. 20세기에 걸쳐 우리는 인구의 20%만이 제조업에 종사하면 사회 전체의 물질적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80%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되었죠. 앞으로도 우리 경제가 계속 발전하려면 이제는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노동집약적인 분야에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웨이트리스가 어느날 갑자기 서빙을 두 배로 하거나, 교사 한 명이 두 배로 많은 학생들을 돌보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발전이 있지만, 대대적인 발전은 아닙니다. 식료품점이 취급하는 요구르트의 종류가 늘어난다거나, 병원의 환자 기록이 전산화되는 식이죠. 이런 상황에서 경제 성장은 어려운 과제가 되었고, 성장을 측정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요구르트 선택지가 5개에서50개로 늘어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를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비용으로 요구르트 생산량을 20% 늘였다”는 식의 성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복스)

[출처]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 뉴스페퍼민트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에 이르기 위해 구도자가 할 수 있는 열 가지 방편’

  1. 구도자는 자신의 정욕의 외적인 극대화로부터 절제할 수 있다.
  2. 구도자는 어떤 악한 과정과 실천을 개혁할 수 있다.
  3. 구도자는 이웃에 대한 외적인 의무들을 수행할 수 있다.
  4. 구도자는 성경을 읽을 수 있다.
  5. 구도자는 모든 공예배나 기도회에 참여할 수 있다.
  6. 구도자는 자신의 입술을 신앙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다.
  7. 구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 즉, 악한 생각에서 생각을 돌려 신적인 일들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8. 구도자는 신앙적인 일들에 자기 시간을 구별해 사용할 수 있다.
  9. 구도자는 주어진 신적인 도움ㅡ즉, 성령의 감동ㅡ을 활용할 수 있다.
  10. 구도자는 자신의 다른 일을 하듯이 이런 일들에 자신의 온 힘을 기울일 수 있다.

[출처] 조나단 에드워즈 [Persons Ought to Do What They Can for Their Salvation], http://goo.gl/DJgJdX에서 재인용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

하나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담담히 수용할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시고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둘 중 어떤 경우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옵소서.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진지하게 보내게 하시고
순간순간을 누리게 하옵소서.

여러 어려움들을 평강으로 가는 오솔길로 여기게 하시고
죄 많은 세상,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지 말고
주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 끌어안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면
주께서 모든 것을 잘 되게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게 하사
이 세상 살아가면서 저희들 그런대로 행복하게 하시고
다음 세계에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최고의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하옵소서.

 

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s as the pathway to peace;
Taking, as He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He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His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Him
Forever in the next.

 

[출처] http://prok.org/gnu/bbs/board.php?bo_table=c_01&wr_id=33412

아버지의 기도 – 맥아더 장군

주여,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스스로를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워질 때 자신감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당당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승리의 때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노력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섬기며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깨닫게 하소서.

바라옵건대,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자극받아 분발하게 고난과 도전의 길로 이끄소서.
폭풍우 속에서도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도록 하여 주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마음이 깨끗하고 높은 이상을 품은 사람,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도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에 더하여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또한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함에 있음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버지인 저도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고백할 수 있도록 하소서.

 

 

A Father’s Prayer – General Douglas MacArthur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Build me a son whose wishes will not take the place of deeds;
A son who will know Thee–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that fail.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and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 이 기도문은 태평양 전쟁 당시, 아들에게 영적인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1964년에 그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한 다음에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평화의 기도 – 성 프란시스코

주님!

저가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두운 곳에 당신의 빛을

그리고 설움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많은 것을 구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Prayer of St. Francis”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uni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error, tru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