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5_성령의 열매 VS 육체의 일

2018년 02월 05월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0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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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한줄 요약

성령님을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개요

지금은 헐벗었지만, 봄이 되면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우리는 그 열매의 단맛을 즐기면서 잠시동안 행복에 잠길 것입니다. 열매는 단맛을 줄 뿐만 아니라 땅이 떨어지면 그 열매 속에 담겨져 있는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날 것입니다.

0. 씨와 열매

열매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나무의 번식을 위해서 필수적인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열매는 사람과 나무 모두를 이롭게 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오늘 성령의 열매에 대한 내용을 설교하려고 하는데, 성경에서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열매가 모두를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18. 두 마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사는 것에 대해서 오해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로봇처럼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로서 나는 항상 존재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항상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육체의 소욕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이 항상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영어성경에서는 the sinful nature 죄악된 본성 혹은 the desires of the flesh 육의 소욕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두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마음 중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한번에 죄악된 마음을 없애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책임이 독립된 인격의 본성입니다. 선택과 책임을 다할 여건이 없으면 자유의지는 있으나마나합니다. 개혁파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는 회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회심하지 못합니다. 애5:21절의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과 같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돌이킴의 원인은 하나님입니다(행11:18, 딤후2:25). 비록 회심이 중생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중생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만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33:1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돌이키라고 할 때 사람의 행동으로 돌이킴을 훨씬 많이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돌이키다’는 의미를 지닌 구약의 ‘슈브’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74번 사용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돌이킨다는 의미로는 5번만 사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크마는 그런 의미로 중생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심은 사람의 사역이라고 구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189)

회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에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신비하게 맞물려서 진행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고통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육체의 소욕에게 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롬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2. 19~24. 두 결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우리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자기 점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과 나무가 사과를 맺으려고 노력해서 사과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버티면 열매가 저절로 맺힙니다. 뿌리가 어디에 뻗어있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성령님께 연결되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육체에 연결되어 있으면 육체의 일이 맺힙니다. 이 두 가지의 대조되는 결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열매는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생명의 재생산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감동을 남기고 떠나셨지만 그 감동은 제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감동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는 재생산됩니다.

반대로 육체의 일은 악하고 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회적입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 병을 낫게 했다거나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보다는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도 저런 능력을 받아서 유명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신이 성령님을 바르게 따르고 있는지 점검하는 자기 점검 목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기 점검표를 만들어서 매일 자신을 점검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서 구체적으로 진단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조지 휫필드의 매일자기점검표
1. 나는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각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있게 행했는가?
9.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며 친절했는가?
10.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11.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았으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며, 잠자는 일에 있어서 절제가 있었는가?
12.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13.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는가?
14.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15. 나의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3. 25~2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성령님은 겸손한 분이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높이십니다. 그분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필요합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의 영광을 생각하고 훈련을 견딥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달게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서 영광을 받을지 대상을 바르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영광을 받기 원하면, 다투고 경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 경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 여건과 환경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휫필드는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다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고 말했다. 그는 한 교파나 교단의 창시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의 영광보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사모했습니다.

[결론]

성령님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사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열린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판단의 주체로서 ‘나’는 존재합니다. 나를 포기하지 말고 나를 육체가 아닌 하나님께 드리려고 힘써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기 점검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성령을 따르고 있는지 이 열매들과 비교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신앙 생활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2018.01.28_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05:01~15
2018년 01월 2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믿음을 입증합니다

[개요]

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합니다. 1절에 5장의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는 메지 말라’는 짧은 구절이 큰 감동을 줍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의문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신앙이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주일에 교회 안가도 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봉사, 기도 등 모든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알려주는 자유로운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0. 피아노 치기 혹은 피아노 연주하기

저는 아이들하고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고 말장난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이들한테 “아빠는 피아노 잘 친다”고하면, 아이들이 “아빠 피아노 못 치잖아”하고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피아노를 쿵쾅쿵쾅 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게 뭐가 잘 치는 거야”하고 아우성을 지릅니다.

제가 쓸데 없는 장난을 한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피아노를 잘 누른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더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면, ‘자유’와 ‘자율’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즉, 피아노를 잘 두드리기만 해서는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잘 두드려서 되지 않습니다.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피아노를 눌러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숙달된 결과입니다. 피아노를 막 두드리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고, 피아노를 악보에 따라서 누르는 것은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자기 마음대로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입니까? 피아노 두드리기는 훈련 없이 가능하지만, 피아노 연주하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된 자유를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은 힘들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율’은 뭔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자율’을 의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5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자율’이라는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지침을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갈라디아서 5장 뒷부분에서는 이 결론을 논증하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6.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훈련된 자유’입니다. 무엇에 따라 훈련되어야 하냐면, ‘사랑’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훈련하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들만 지키라고 주신 특별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부분에서 이미 그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입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리고나서 율법은 모세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안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살던 사람이라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안지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예증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받은 시대의 사람들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모세 시대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명, 즉, 사랑을 따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의미가 깊은데,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잘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5:6]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has any valu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성경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7~12.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매우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계속 막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과 생각을 계속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한때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지고 감동이 옅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걸림돌은 할례였습니다. 우리는 ‘할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구원의 확신’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할례가 있어야 ‘구원 받았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만, 할례는 포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할례를 믿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반발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정통 기독교 어디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아니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그렇게 가르쳤다면, 가르친 분이 오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인격에 감격하고 그 분을 닮고자 열망하는 가운데 홀연히 선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구원은 나의 믿음의 자동적인 결과나 구원의 확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또 하나는 ‘방언’인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방언이 구원을 주지도 않고 구원을 보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게 하신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그 이름 그대로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사역에 대해서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령 운동, 예수님을 닮지 않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성령님의 은사, 기적, 능력을 결코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사모하는 분들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의 걸림돌을 치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3. 13~15. 사랑할 자유를 누리라

악보를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훈련을 해야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따라 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라 쇳덩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가 예배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예배 속에 가장 잘 담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그거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를 들어드리는 것이고, 적용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랑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원칙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어도 괜찮지만,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으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결론]

자율은 훈련된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훈련될 때 아름답니다. 개인의 자유가 그의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프레드릭 윌리엄 파라). 자유가 자신의 속박을 잃을 때는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속박이 된다(칼리 지브란)

스스로 사랑이라는 계명에 따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고려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동을 주는 것도 그것이 고된 자기 훈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사랑이라는 악보를 가장 잘 연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8.01.21_[신년] 끝을 생각하는 시작

이사야 66:01~24
2018년 01월 21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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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야 66:1~24

[핵심 구절]

[66: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여움을 나타내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책망하실 것이라

[한줄 요약]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면 불필요한 낭비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개요]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새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회사에서 나누어주는 다이어리를 쓰는 분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다이어리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무슨 플래너라는 이름으로 다이어리와는 차별성을 가지며서 비싼 값에 팔리는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이제 유명해졌고 이랜드 출신이 설립한 3P플래너도 있고, 윈키아 플래너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플래너와 다이어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가격이 비싸고 디자인이 좋은 것을 플러너라고 할까요?

이번 시간에는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을 통해서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0.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

다이어리와 플래너의 차이점은 목표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이어리는 단순히 계획, 일정을 쓰는 것이지만, 플래너는 목표를 정하고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계획과 일정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플래너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생의 목표를 먼저 적고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서 일정을 조정하도록 유도합니다.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일상이 의미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라는 말은 플래너 뿐만 아니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에서도 강조된 말입니다. 일곱가지 습관 중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었습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기 원하는지를 생각하면서 매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즉,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걸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성공이나 성취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성공의 대가로 훨씬 더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건강을 잃어버린 경우, 사회에서 성공했지만 가족과 관계가 안 좋은 경우, 치열한 경쟁으로 높는 지위에 올랐지만 인격을 상실한 경우 등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지막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닥치는대로 살다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조금씩 다른 길을 가게되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최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최후 순간에 후회하게 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우리의 영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최후의 순간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끝을 생각하면서 시작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1. 1~6. 하나님의 초점 : 행위가 아닌 마음

이사야서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알려줍니다.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은 수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훌륭한 예배당이 중요한게 아니라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멋진 성전을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전세계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이보다 특별한 건축물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건축물을 건축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의 신앙도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이 성전은 무너집니다. 성전의 그릇들도 모두 약탈당하고 맙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이방인의 손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래도 이게 중요하지 않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진정한 깨달음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을 살인하는 것처럼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한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성경을 가지고 성공을 가르치고 예배를 통해서 번영주의를 전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이용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 7~14. 하나님의 방법 : 고난 중 형통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 중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산을 하지만 진통하는 즉시 해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낳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빨리 해산한다고 해도 진통이 전혀 없기는 힘들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난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마다 어지럽고 힘들게 하느니라.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인생의 고난에 대해서 이 정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쌀 수 밖에 없는 선물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아니라 포장지 자체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무의미한 고난은 고생일 뿐이지만 의미있는 고난은 영광이 됩니다.

3. 15~24. 하나님의 성품 : 자비와 심판

하나님은 자비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지만 심판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계획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일년의 계획을 세울 때, 신앙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시기 바랍니다. 너무 바빠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을 위해서 바쁜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궁극을 생각하면서 일년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일년 계획을 세울 때 영혼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자.

2018.01.14_[신년]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는 기회

이사야 55:01~13
2018년 01월 1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본문]

이사야 55:1~13

[핵심 구절]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줄 요약]

인생에서 기회는 지속적으로 오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요]

새해부터 가상화폐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누가 얼마 벌었다느니 위험하다느니 등등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고 초조해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0. 기회는 계속 옵니다

지금같은 일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이라고 해서 인터넷이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산업 국가의 주식 시장이 급속한 상승 한 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이다. IT 버블, TMT 버블, 인터넷 버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 관련 기업 주식이 폭등해서 한 순간에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그 전으로 돌아가보면 강남 개발을 시작하던 70~80년대에 부동산을 가지고 한 순간에 부자가 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회는 주기적으로 계속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복기를 했다가 다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1. 1~5. 기회는 내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만날만한 때에 여호와를 만나라고 하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생활을 할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불신이 깊던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징계라고 미리 예언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께 나오라고 초청합니다.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잘 준비되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시간이 없고 마음이 편치 않아도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할 때 큰 발전을 이룬 강의가 그런 상황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모든 강의가 다 도움이 되었는데 나름대로 지식이 쌓이니까 도움되는 강의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된 강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저와 인생의 교차점이 많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하나님께서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 같습니다.

2. 6~9. 하나님이 더 고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수는 고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으면 하수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류시화 시인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도서출판 열림원, 1998)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하나님께 나아갈 중요한 기회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10~13. 하나님은 목적을 이룰 때까지 기회를 주십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앞으도 또 옵니다. 크고 작은 기회들이 계속 올 것입니다.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기 때문에 못 알아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잘 준비하고 있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흘려보내주시는 분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돈 버는데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좀더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의 성품에도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좀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복음을 가르치신 이유도 비슷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고,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어떤 옷을 입고 오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기회가 옷을 갈아입고 오더라고 알아보는 시각을 갖추자

2018.01.07_[신년] 새로운 시대가 오는 방식

이사야 40:01~11
2018년 01월 07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과거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때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십니다

[개요]

신년입니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느라 바쁠 때입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보내주셔야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0.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지만 봄같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계절로는 봄이 왔지만 인생살이는 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비슷하게 새해가 왔지만, 새해같지 않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해는 달력이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도 새해를 가져도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이 새해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인생의 새해는 하나님만이 인생의 새해를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생의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이 어떠게 그럴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1~3. 노역의 때를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 읽은 이사야 40장 2절을 보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겨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한다고 미리 선고를 하셨읍니다. 여기서 ‘노역의 때’는 70년 포로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노역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해는 무작정 오지 않습니다. ‘노역의 때’를 채워야 옵니다. 그 기간을 바르게 보내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가끔 범죄 생활을 하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간증하는 것도 여러 번 들은 경험이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면 그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서 다시 범죄를 행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석했냐면, 성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 공부하고 청교도와 조직신학을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이게 성화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길에 들어 서기는 했지만 아직 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곁길로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지은 존 뉴톤이 노예 상인이었잖습니까? 그가 나중에 회개하고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도 범죄 조직에서 있다가 회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존 뉴톤은 앞에서 말씀드린 우리 나라 범죄자들과 다르게 일생동안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존 뉴톤은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글로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약 1년 6개월 정도를 깊이 회개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존 뉴톤의 편지]

선생님, 그 당시의 나를 보실 수만 있다면…죽음의 밤 속에서 나는 고독 가운데 우수에 담겨 암석 위에 나의 셔츠 하나를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젖은 땅 위에 그것을 놓아서 잠자는 동안에 내 등을 말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불쌍한 그 모습을 보실 수 있다면…배에 딸린 보트 하나가 그 섬에 도착했을 때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만 숲속으로 도망쳐 버려서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었습니다. 나의 행동, 나의 중심,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런 외적 행위들보다 더욱 어두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시다면; –사도가 언급하였던(딛3:3)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라고 말하기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보살피심과 감당할 수 없는 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상상하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There was at that time but one earnest desire in my heart which was not contrary and shocking both to religion and reason: that one desire, though my vile licentious life rendered my peculiarly unworthy of success, and though a thousand difficulties seemed to render it impossible, the Lord was pleased to gratify.

그 때에 신앙과 이성에 반대되지 않고 부딪히지 않는 진지한 열망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 열망을 주님께서는 들어 주셨습니다. 비록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나도 합당치 못한 사악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오고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산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But this favor, though great, and greatly prized, was a small thing, compared to the blessings of his grace; he spared me, to give me “the knowledge of himself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하지만, 이 호의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그 분의 앞으로 보여주실 자비로우심과 비교하게 되면 너무나 적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그 분 자신에 대한 지식”을 나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In love to my soul, he delivered me from the pit of corruption, and cast all my aggravated sins behind his back. He brought my feet into the paths of peace.

나의 영혼을 사랑하셔서 부패의 구덩이에서 건져 내사 나의 모든 엄청난 죄악들을 당신의 뒤쪽으로 내 던져 버리셨습니다.그리고는 나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This is indeed the chief article, but it is not the whole.

이것이 물론 주요한 사항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은 아닙니다.

When he made me acceptable to himself in the Beloved, he gave me favor in the sight of others.

하나님께서 그 사랑스러운 예수님 안에서 당신에게 나를 용납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호감을 받게 하셨습니다.

He raised me new friends, protected and guided me through a long series of dangers, and crowned every day with repeated mercies.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고 여러 가지 위험들 가운데서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계속되는 자비로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출처] Letters on His African Hardships and His Conversion by John Newton, 존 뉴톤의 아프리카시절의 고난과 회심간증

위와 같은 말을 하면, 이렇게 반발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저도 교회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이제는 고난이 끝날 때가 되이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 전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난이 끝나고 잘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꾸 빗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으로 복이 함께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신앙도 좋아지고 복도 받은 사람이 있지만, 반대로 세례 요한처럼 고행만 하다가 목이 잘려 죽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후회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2. 4~8. 그리스도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은 언제나 회개입니다. 선행은총이라고 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개혁신학의 선행 은총이 인본주의(알미니안)적인 선행 은총과 다른 점은 하나님 주도적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이고 인간의 노력이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결정권이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선행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디쯤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나간 부분이 어디냐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방언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요한의 세례’ 다음에 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하고 동일시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과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이 감격적이기 위해서는 그 전에 선행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각성이 강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노역의 때’가 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게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은 ‘방언’이나 ‘예언’으로 빗나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가장 아름다운 보석만이 가슴 속에서 빛을 발할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 ‘예언’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3. 9~11. 그리스도의 시대가 옵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예수님은 능력으로 오십니다. 참았던 화를 폭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능력, 그리고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 못할 영광으로 가득찬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실 때 이 땅의 작은 권력, 영광에 취했던 사람들은 냉혹한 심판에 슬퍼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림 예수님의 겸손을 알고 그분을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주실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시면서 노역의 때를 지나시기 바랍니다.

[결론]

노역의 때를 채우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017.12.31_[송년] 과거를 통해 보는 미래

사도행전 7:30~60
2017년 12월 31일

설교 듣기

[핵심 구절]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한줄 요약]

스데반을 구약 성경과 과거 역사에 정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개요]

송년입니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미래를 더 알기 원합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0.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과거는 미래에 반복됩니다. 저는 과거가 미래에 반복된다는 사실을 바둑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둑에서 지면 분한 마음에 한 판 더를 외치면서 자꾸 새로운 바둑을 많이 두려고만 했습니다. ‘내가 그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면서, 새로운 판을 두면 지금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바둑을 두게 되는데, 바둑이 똑같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지게 됩니다. 바둑을 새롭게 두더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래가 새롭지 않고, 과거의 반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엉뚱하게도 바둑 실력이 가장 많이 늘게된 계기는 새로운 판을 빨리 많이 두어서가 아니라 복기를 배우면서부터입니다. 복기란 바둑을 한 판 끝낸 다음에 지금 둔 바둑을 다시 두어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난 바둑을 다시 두면서 내가 그때 왜 여기에 두었는지 생각해 보고, 상대방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달르게 전개된 것은 무엇인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바둑 실력이 늘어갑니다. 다른 사람이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기보 몇 개는 기본적으로 외웁니다.

시험을 보는 수험생들도 복기를 통해서 실력을 향상 시킨다고 합니다. 요즘은 오답 노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오답 노트는 전에 틀린 문제를 따로 적어놓고 주기적으로 다시 풀어보는 노트입니다. 틀린 문제는 또 틀리기 때문입니다. 기억에서 지워진 후에 틀렸던 문제를 풀어보면 놀랄만큼 똑같이 틀립니다.

다른 측면이지만 사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이 있어납니다. 아웃도어 판매하는 매니저님한테 들었는데 등산복을 사는 사람이 또 산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등산복 한 두 벌 사면 더 안사지 않나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매번 산에 갈때마다 다른 등산복 입고 가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시더라구요.

보험도 한 번 들은 사람이 또 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기 당하는 사람도 한 번 사기 당했으니까 안 당하는게 아니라 또 사기당하는 경우가 많고 이단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은 또 이단 교회를 가거나 건전하지 않은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러 가지 영역에서 우리는 과거에 했던 일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새롭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아지 못하고 익숙한 과거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 30~53. 스데반은 과거에 정통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초창기 교회의 집사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성령에 충만했던 분이 스데반입니다. 이분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 성경, 즉 과거에 정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내용은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기 전에 했던 마지막 설교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대하2:6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그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것이 구약 시대의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구약 시대라고 해서 성전에서 제사지는면 구원을 받는게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의지하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들 통하지 않고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조상들처럼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즉, 조상들도 성령을 거스렸는데 당신들도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는 단어를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성령님을 아무리 칭송해도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것이 성령을 모욕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성령님이라는 단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면 됩니다.

2. 54~60. 스데반은 바울을 통해서 미래를 살았습니다

한편, 과거가 과거로 그치지 않고 미래를 열어갈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가장 먼저 순교한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 믿음과 은사, 그리고 인격이 너무나 아까운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과거로 묻히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그의 삶을 대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교회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이런 상황을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내 집 마련하듯이 내 예배당을 마련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더 알아가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스데반도 그렇고 모든 분들이 번듯한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남기지 않았으면 무엇을 남겼을까요?

바른 믿음, 바른 생각, 바른 행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바른 믿음과 생각과 행실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집착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 믿음과 생각과 인격이 바르지 못한 것을 봅니다. 구약 시대도 그랬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우리 교회가 그냥 해산된다고 해도 남는 것이 없을까요?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짜입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건물이 아니라 계속해서 영향력을 주게 될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3. 과거를 통해 미래를 봅시다

오늘는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은 우리가 좀전에 기도한 것처럼 잊을 것은 잊고, 용서할 것은 용서합시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복기할 것은 철저하게 복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의 반복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정통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감옥에 넣은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현대의 이순신 장군은 또 감옥에 넣고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이고 그분만이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본질입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을 정립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송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과거를 바르게 성찰함으로 미래를 준비합시다

2017.12.24_[성탄절] 근원 치료를 위해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 02:21~35
2017년 12월 2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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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개요]

성탄절은 모든 명절 중에서 가장 기쁜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의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근원을 알고 나면 성탄절의 기쁨은 훨씬 더 커집니다. 오늘은 성탄절의 의미를 알고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0. 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들은 과학 발전, 제도 개선, 윤리 교육 등을 통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인들도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은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안티 기독교 운동들에도 그런 경향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는 운동이 이미 있었고 대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합니다.

대실패를 겪은 운동이 뭐냐면 공산주의 입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나라에도 큰 비극을 남겼고 지금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시작은 원래 하나님 없이 인간이 천국을 만들겠다는 이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문명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차별이 심해지는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 것입니다. 그들은 귀족과 천민,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등의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고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상에 많은 지식인, 양심적인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문제의 원인 중에 하나가 기독교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는 기득권을 변호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없어져야 할 악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천국을 만들겠다는 인본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에 전무후무한 지옥을 펼쳐놓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천국을 만들려는 인간의 노력은 지옥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1. 인간의 오류

1996년 8월 25일 <사람아! 아, 사람아!(人啊,人!)>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중국 여작가 다이허우잉(戴厚英)이 상하이 자신의 집에서 피살돼 전세계의 독자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그녀를 살해한 범인이 바로 그녀가 힘겨운 살림에도 원고료를 모아 물심양면 학업을 도와주던 고향 출신 학생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일기 기록에서 단서를 찾아 범인을 검거했는데 고향의 한 교장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돼 후원해 주던 학생이었다. 범인은 다이허우잉이 시장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그녀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왔다가 그녀가 돌아오자 놀란 나머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허우잉의 삶은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치열하고 파란만장하다. 다이허우잉은 1938년 3월, 중국 안훼이(安徽)성의 작은 시골에서 3남 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1960년 상하이의 화둥(華東)사범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상하이작가협회 문학연구소에 배속되어 문학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1968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저명한 시인 원지에(聞捷)를 검은시인 우파로 심문하다가 그의 시에 매료됐고 결국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이 문화혁명(문혁)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그녀도 반동으로 몰려 수난을 당해야 했으며 1971년 남편 원지에는 자살하고 만다. 다이허우잉은 요동치던 시대의 비극적 사랑을 그녀의 처녀작 <시인의 죽음(詩人的死)>에서 소설화하며 작가로서의 길에 들어선다.

1980년대 초 <사람아! 아, 사람아!>를 발표하는데 중국문단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지만 해외에서는 오히려 더욱 유명해져 세계 8개 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된다. 우리나라에도 신영복 작가에 의해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인간의 피와 눈물의 흔적을 썼고, 비틀려진 영혼의 고통스런 신음을 썼고, 암흑 속에서 솟아오른 정신의 불꽃을 썼다. ‘영혼이여, 돌아오라!’고 외치며 무한한 환희와 더불어 인간성의 회복을 기록했다.”

<사람아! 아, 사람아!> 저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이허우잉의 작품은 문혁 기간 동안 자신이 경험한 치열한 삶과 그 상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인간 내면의 섬세한 감정과 문양들을 뛰어난 통찰과 냉철한 분석으로 형상화내 휴머니즘문학과 상흔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된다.

진실이 조작되어 거부 당하는 것이 일상으로 벌어지던 시대, 찢어진 사진처럼 싫긴 하지만 잊을 수는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암흑 속에서 진리를 고뇌하던 한 인간의 불꽃같은 삶이 여전히 아름다운 감동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제가 다우허우잉에 대해서 좀 길게 소개한 이유는 그가 쓴 책 ‘사람아, 아 사람아’의 제목에 이끌려서 입니다.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혁명’이라는 것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공산주의 지도부들의 권력투쟁의 한 모습이면서 공산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이 다우허우잉입니다.

자를 대고 직선을 그었는데, 비뚤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잘 대고 그렸는데 또 비뚤어졌습니다. 다시 그려도 비뚤여졌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이 뭐냐면, 자가 비뚤여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은혜의 시작

사람에게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서 마땅히 해야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서 내 삶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은혜의 시작입니다.
신앙은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이란 분은 예수님의 사역을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마음에 관한 사역입니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찾으러 오셨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2:17에서 ”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시니라”고 말씀합니다.

3. 믿음이란?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수술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수술 방법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데 힘쓰는 것의 10분의 1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기독교는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21:9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설더라”고 하십니다.

[결론]

성탄절에 예수님이 나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017.12.16_예수님이 나의 새언약이 되십니다

창세기 03:01~24
2017년 12월 16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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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1.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롬16:20
  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개요]

대강절에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다양한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0. 복음의 씨앗

창세기 3장은 실질적으로 성경이 시작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고, 성경의 핵심이 모두 들어있는 장 중에서 가장 처음 나온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나 장이 여러 부분 있지만,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 창세기 3장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창세기 3장에 나온 핵심을 절대 잊지 말고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제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해도 조금씩 공부하고 있는데, 영어는 앞부분을 기억하고 있어야지 뒤로가면서도 이해가 쉽더라구요. 그래서 영어가 앞부분에 대문자로 시작한다고 하는 분이 있더라구요. 비슷하게 성경도 창세기 3장을 항상 머리속에 기억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그렇게 해야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창세기 3장의 어떤 점이 성경의 핵심일까요?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3:1~7 인간의 계약 위반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계약 위반입니다. 단순히 호기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 명백한 배신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의 우월한 지위는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모든 영광과 존귀를 잃어버렸습니다.

2. 2:8~21 하나님의 재계약

하나님은 사탄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다시 주지 않으셨지만 감사하게도 인간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탄의 유혹 때문에 범죄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로 주신 기회가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담의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가죽옷이라는 말은 다른 생명의 희성, 즉, 다속을 통해서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과 21절이 그것입니다. 네델란드의 개혁파 신학자 주에 게할더스 보스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쓴 성경신학이라는 책을 보니까 여자의 후손과 가죽옷을 복음의 씨앗이라고 표현하셨더군요. 씨앗은 생명을 가진 가장 작은 단위아닙니까?

여자의 후손+가죽옷은 중보자+대속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대신한 누군가가 이 땅에 와서 대속이라는 방법으로 구원할 것이라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좀 가볍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오래된 비유는 고도로 압축된 언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3. 2:22~24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가죽옷이라는 복음의 씨앗을 주고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이게 인간은 이 씨앗을 가지고 살면서 구원의 길을 발결해야 합니다. 이 씨앗을 가지고 생명의 싹을 틔운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썩게 내버려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 구원의 씨앗을 마치 이어달리기 선수들이 주고받는 바통처럼 전달됩니다. 복음의 싹을 틔술 수도 있고 썩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 언약이 사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이 사실들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는 일입니다.

[결론]

복음의 싹을 틔웁시다.

2017.12.10_[대강절2] 예수님이 나를 변화되게 합니다

창세기 02:01~25
2017년 12월 10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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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요약]

예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로 연합하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개요]

대강절에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다양한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0. 돈보다 소중한 것은?

지금 세상 사람들은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돈의 힘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하지만, 돈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입니다.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사랑은 충족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그것 자체로 충족한 개념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애정과 우정, 그리고 에로스의 파괴적인 속성이 상대방을 구속하고, 다른 이를 분리시키는 악한 이기적 집단이 되고,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으로 이끌어갑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면,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p101) 이 선언 이후에 그는 마지막 종류의 사랑인 ‘자비’로 이끌어간다. 이 사랑은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도움으로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사람들이 ‘사랑’를 매우 갈망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특히 창세기 2장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언약’이라고 생각합니다.

 

1. 2:1~7 인간, 언약할 수 있는 존재가 되다

지난 시간에 저는 인간이 존귀한 이유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존재 가치’보다 ‘관계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중요한데 인간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자기 스스로 독립된 인격을 갖추고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2:8~20 하나님과 언약을 맺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입니다. 이것은 호세아 6:7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하신 말씀인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언약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가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은 일종의 ‘고용 계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조건 일을 시키신 것이 아니라 정당한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따라서 일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 ‘언약’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편,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언약 위반입니다. 죽음이라는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하는 위반입니다.

 

3. 2:21~25 언약은 결혼입니다

창세기 2장 후반부에 남자와 여자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언약의 최종 모습이 결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언약은 상호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서 합니다.

[결론]

언약의 최종적인 모습은 결혼으로 표현됩니다

2017.12.03_[대강절1] 예수님이 나를 존귀하게 합니다

창세기 01:01~31
2017년 12월 03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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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창 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줄 요약]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되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개요]

인간은 무엇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존귀할까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인간 중에서 더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더 귀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늘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이 왜 가치있고 존귀한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0. 이승엽 선수 홈런볼의 가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야구 선수가 이승엽 선수입니다. 중요한 경기마다 홈런을 쳐서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 일이 여러 번입니다. 이 선수의 홈런볼이 얼마 정도하는지 아십니까?

이승엽 선수의 600호 홈런볼의 금전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미국의 예로 1998년 마크 맥과이어의 시즌 70호 홈런볼이 300만 5000달러(약 33억원)에 거래되었다고 해요. 2003년 이승엽 선수 본인이 기록한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볼은 국내에서 약 1억여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고 같은 해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5호 홈런볼은 경매가가 1억 2500만원까지 치솟았지만 실제 거래가 성사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 이승엽 선수의 600호 홈런볼도 가치를 매겨본다면 제 생각엔 적어도 1억원은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구공의 판매가가 8천원에서 1만원 정도한다고 합니다. 원가는 여기에 못미치겠죠? 그렇다면, 야구공 자체의 가치를 1만원이라고 한다면 9천9백만원의 가치는 야구공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야구공 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구공의 가치를 생각해 봅시다. 야구공 자체의 가치, 이것을 ‘존재 가치’라고 한다면 이것은 1만원 밖에 안합니다. 하지만, 야구공이 단순히 야구공으로써가 아니라 몇 백호 홈런이라든지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갖는 가치, 다른 말로 ‘관계 가치’는 수억을 합니다. ‘존재 가치’하고는 비교할 수 없으 만큼의 가치가 ‘관계 가치’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 한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할까요?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비행기 사고라든가 교통 사고 같은 사고로 죽게되면 보험 회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숫자로 그 사람의 가치를 적어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든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여러분의 가족, 그러니까 부모님 혹은 자녀들이라면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그 한 사람의 가치가 이 지구 아니 우주보다도 더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일단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즉, 어떤 것의 가치라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보다는 그것이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느냐에 ‘관계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응용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다 든가 잘났다든가 하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난 것의 가치는 그렇게 대단한게 아닙니다. 원숭이가 조금 더 똑똑하거나 잘난 것이 얼마나 더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어차피 원숭이일 뿐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난다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를 대단히 높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되고 안똑똑하고 못났다고해서 좌절해도 안됩니다. 그것이 큰 가치의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핵심은 누구와 관련을 맺느야에 달려있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가장 가치있는 사람이 됩니다.

 

1. 1:26~28 사람이 존귀한 이유

창세기 1:26~28을 보면, 인간이 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나와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대신 다스리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관리인입니다. 관리인은 주인하고 말이 통하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고 생령을 주셨습니다.

인간도 육체는 동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양’입니다.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하나님을 닮은 부분’ 때문에 인간은 존귀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불구가 되고 치매에 걸리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도 인간은 존귀한데 그 이유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존재 가치’는 한없이 낮아져도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데서 오는 ‘관계 가치’는 그대로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 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도 존재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2. 2:17 사라진 존귀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말은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남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는 말도 안되게 낮아졌습니다. 그 말도 안되게 낮아진 가치만 해도 이정도지만 원래의 가치에 비하면 너무나도 형편 없게 되었습니다.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낮아진 사람의 존귀함을 회복시키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3. 3:15 다시 존귀하게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 존귀한 자로서의 가치를 되찾게 됩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그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왕도 있고 거지도 있습니다. 번영을 누린 사람도 있고 비참하게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의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었습니다.

인간들이 볼 때 성공한 삶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좇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새겨진 또다른 이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행해서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이 되자

2017.11.27_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1~31
2017년 11월 27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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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요]

두란노에서 출판된 ‘제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친 아르헨티나의 목회자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매우 쉬운 말로 설명하셨는데,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천국문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할까요?
성경 시험, 교리 문제 등 어떤 것을 물을까요?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를 내지 않고 청진기를 가져와서 가슴에 대 보고 너는 심장이 뛰고 있구나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 그것은 우리 내면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도록 하려는데 있다는 점말입니다.

1. 1~7 : 지식이 아니라 생명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2. 8~20 : 다시 종이 되지 말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시 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3. 21~31 : 아브라함의 예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기도 했는데,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

내가 예수님의 생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017.11.19_감사는 예배의 전부입니다

시편 50:01~23
2017년 11월 1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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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한줄 요약]

아삽은 구약 시대에 이미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제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개요]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늘은 시편 50편을 통해서 추수감사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50편은 맨 마지막 구절이 찬양 가사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을 다 아시는 분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은 감사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독특한 시편이면서 당시 상황에서 생각하면 놀라운 시편입니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시편 저자가 생각하는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0. 아삽에 대해서

먼저, 이 시편의 저자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삽은 다윗의 3악사 중 한 사람(대상 5:17, 19, 16:5)으로, 다윗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고 성가대를 지휘하고 시편을 편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시편에 12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삽은 찬양팀장이었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다윗 동반자였습니다.

아삽의 첫 등장은 다윗 왕이 법궤를 옮길 때였습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에게 빼앗결다가 돌려받은 법궤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놓여있었습니다. 사울은 별 관심도 없었고 20년이 흘렀습니다.

다윗 왕은 법궤가 거기 있는 것이 내내 속상했기 때문에 왕궁 한곳에 성막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궤가 성막으로 돌아오던 날, 다윗 왕은 마치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바로 그날, 아삽이 등장합니다(대상 5:17, 19, 16:5).

법궤는 레위 지파 외에는 누구도 옮길 수 없습니다. 손조차 대서도 안 됩니다. 다윗 왕은 레위 지파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뽑힌 사람들은 성막과 법궤를 지키고,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하게 된다. 레위 지파의 존경받는 어른들은 많은 사람을 추천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으로 헤만, 에단과 함께 아삽을 추천했습니다. 아삽은 찬양대에서 놋제금(구리 심벌즈)을 쳤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날, 아삽과 찬양대는 환호성을 지르는 이스라엘 군중 사이로 행진하며 연주를 했습니다. 법궤가 안치된 후 레위 지파로 꾸려진 찬양대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찬양대장이 바로 아삽이었다.

아삽의 역할은 다윗 왕의 뒤를 이은 솔로몬 왕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건축하고 법궤를 성전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때도 아삽과 찬양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제금과 비파, 수금, 나팔을 연주하는 제사장만도 120명이나 됐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구름이 성전에 가득 차서 제사장들이 서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아삽 자손들은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에 등장합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는 모압과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었습니다. 그때 무기력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상기시키며 용기를 북돋우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이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됐을 때는 성전이 황폐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전 왕들이 성전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과 함께 성전 문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들도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귀환하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훼방꾼들의 방해 공작을 견뎌 내고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했을 때, 성벽 봉헌식의 나팔수로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들 역시 아삽 자손들이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가실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직책을 맡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속도에 발맞추는 영광스러운 삶이었고, 그의 자손들 역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때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불어넣었습니다.

1. 1~6 : 하나님의 재판정

그런 아삽이 쓴 이 시편은 예언적인 시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재판정을 열고 심판을 준비하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재판정을 여시는 모습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2:19에서

[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라는 말씀처럼 천사들과 함께 아합 왕을 심판하려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도 하나님의 재판정에 참가해서였습니다.

[6:1~3]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의 재판정 모습이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4장입니다.

[4:2~4]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나 나라를 심판하실 때 즉흥적, 감정적으로 하지 않고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 하십니다.

2. 7~21 : 두 가지 기소 제목 – 형식적 신앙과 위선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죄를 지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시가 쓰여진 3천년 전에는 잘 이해가 안되었을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재판정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검사가 재판장 앞에서 죄인의 죄를 들추어내고 그래서 어떤 벌을 받아야 한다고 기소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죄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죄인데,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죄인데, 위선으로 사람들을 대한 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절을 보면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제물을 물질적인 면에서 욕심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4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감사’하는 마음이 제물에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22~23 : 감사로 제사 드리라

세 번째 부분은 결론이면서 권면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을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구약 시대였기 때문에 제사의 형식을 매우 중요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담한 주장을 했다는 것은 아삽이 아무리 다윗의 측근이라고 해도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대하게 감사가 제사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아삽은 제사가 결국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레 7: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제물과 함께 그 예물로 드리되
[레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구약 시대 사람들도 제사를 드려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삽은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충격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삽을 중용한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아삽만큼도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참된 예배를 드립시다.

<인용 -곽선희 ‘이 사람의 감사’>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예화를 듣고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정확하게 어떤 점에서 은혜를 받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한참을 생각해 보니, 진정한 감사는 자신을 보게 될 때 터져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고 편안할 때보다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느낄 때 더 진실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죄악됨, 어리석음, 연약함을 똑똑하게 보게 되면 그럼이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핵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2017.11.12_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갈라디아서 03:15~29
2017년 11월 1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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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요]

성경은 해 이래 새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425년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 경에 쓰여진 수메르 점토판에 나온 기록인데, 거기에도 젊은 이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변해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죄’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우리 인간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변해도 세상의 근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의 시간 간격이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문제와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의 문제는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문제인데,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 + a’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다른 말로 갈라디아주의는 오늘날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전도운동, 율법주의적 성령운동, 율법주의적 영성운동 등으로 말입니다. 매우 좋은 주장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율법주의가 있는 운동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겉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동일한데 율법주의는 언제나 예수님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합니다. 언제나 인격이 아니라 의식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지면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나쁜 행동을 해도 예배에 잘 참석하거나 교회에 충성하면 그것이 상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비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있는데 본인은 오히려 신앙이 매우 좋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문제의식 없이 교회다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태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최순실 씨 딸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한 일이 밝혀진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보면 정유라 때문에 원래 이화여대에 합격해야 했지만 합격하지 못해서 다른 대학에 들어간 여성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화여대 학장, 총장, 담당교수 모두 별로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부정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언론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면접에 참여한 교수들도 부정을 저질렀죠? 제가 생각할 때는 만약에 제가 그런 입시 부정을 지시 받았다면 사표를 내는 한 있더라도 거부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회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건 제 기준으로는 선을 많이 넘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왜 기독교 대학에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가 의아합니다.

1. 갈 02:06~14 : 양심이 살아있어서 의를 위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김세윤 교수님은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높여주면서 정작 술, 담배보다 훨씬 더 큰 죄인 부정, 부패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합니다. 사회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고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있는 것이지요.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주의는 여기서 전도나 성령운동, 영성을 결합한 것입니다. 사회에서 나쁜 행동을 해도 전도를 열심히 하거나 방언을 열심히 하거나 영성을 기르면 된다는 식으로 이끄는 일이 바로 갈라디아 주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혼란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 답이 오늘 두 번 읽은 구절입니다.

먼저,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어요. 그러면 안되지만 입시 부정을 했다고 치세요. 주일 성수 잘하거나 전도 열심히 하거나 방언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죽게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해도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들려다보고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어떤 길을 갈지는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몇가지 가능성을 말씀드리자면, 뒤늦었지만 그 일을 바로 잡으려고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상사들을 설득하든지 언론사에 제보하든지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번에는 얼떨결에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무런 결정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청교도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양심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양심이 살아있어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2. 갈 02:15~22 : 율법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알려줍니다

십계명에는 분명하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어떻게 하냐면, 단순히 율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을 면죄부로 사용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여러분께서 고민하다 보면 알게 되시겠지만 양심을 죽이지 않으려면 전진해야만 합니다. 한 두 번은 부정을 저질르고 고민만 하다가 지나갈 수 있지만 계속 양심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안그러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소경, 영적으로 감각이 마비된 나병환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정에 머물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해결해야 할 많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법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불법 프로그램도 몇가지 썼었는데, 그것이 저를 고민하기 만든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거의 다 정품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윈도우 프로그램 라이센스를 얼마전에 구입했습니다. MS 오피스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습용으로 주는 라이센스를 받았고, 인디자인은 월정액을 내고 쓰고 있습니다. 단지 한글 프로그램은 정품을 안샀는데 제가 한글을 안 쓰지만 한글 파일을 받으면 그것을 복사해서 다른 프로그램에 옮기기 위해서 깔아놓고만 있습니다.

이렇게 저도 느리지만 전진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살다보니까 알게 된 것이 무엇이냐면, 양심이 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우리 나라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셨을지 모르는데, 제게는 큰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겉으로 성장하는 것 같지만 생명은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요. 여러분도 양심이 죽지 않도록 고민하다보면 저절로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갈 03:23~29 : 예수님을 닮고자 애쓸때 열망이 생겨나고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의를 추구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예수님을 닮도록 인도하는 영이고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성령 운동이 이상합니다. 뉴코아에는 교회 안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에서 좀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분들 중에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TV에 잠깐씩 나오는 목사님들 중에 얼굴만 봐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인데, 능력 있다는 분들이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부터 뜨끔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친절하고 지혜롭고 때로는 강인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사람인가 또 그렇게 보이는가를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령 충만하다 능력 있다는 말은 안했으니까 하고 합리화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목요일에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갔었는데, 거기서 로제타 홀 여사의 전시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오, 기도하오니 저도 충성되게 하시고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게 하소서.” 성공이 중요하지만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는 것보다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휘감고 거룩한 불씨를 던져주실 것입니다.

2017.11.05_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1

갈라디아서 03:06~29
2017년 11월 0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참고: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개요]

개인적으로 허리가 아픈 적이 있었는데, 그 경험 이후에 허리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을 보아도 무심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이 눈에 잘 들어오게 되었고, 그런 병원이 왜 그렇게 많은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경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가 혹은 어떤 기도 응답을 체험했는가하고 다른 이야기입니다. ‘죄의 각성’이 아닌 다른 체험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죄’의 문제를 다루는데, ‘죄’는 다른 말로는 ‘불의’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살인, 강도 같이 나쁜 행동을 범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해 해야하는일인데 행하지 않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갈 02:06~14 : 아브라함은 율법이 생기기 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내세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롬4:11

창세기 15:6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로마서 4:11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손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언약에 대해서 전인격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막연한 믿음을 이삭의 출생이라는 문제와 연결시켜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많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번이라도 확실한 체험을 해야 하고 그 체험이 예수님과 연관되어야만 근본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로마서 4:19~24은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히11:11, 히11:12, 창17:17, 창18:11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1:6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고전10:11, 딤후3:16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 갈 02:15~22 :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까지만 유효합니다. 안내자는 안내를 하면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기 전에 의롭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야만 의롭다고 판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드러내지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3~4에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율법을 참고하라는 말씀이 이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갈 03:23~29 :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으라는 얘기는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말입니다. 청교도들을 인용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신앙서적을 읽자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 보면 그 모든 것의 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2) 다양하게 기도하자

로이드 존스는 새벽기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기도하기 전에 신앙서적을 읽어서 마음을 뜨겁게 한 다음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은 되도록 시간을 정해서 지속적으로 하자. 그러나 다양한 기도를 시도하자. 새벽기도 뿐만 아니라 순간기도, 산책기도, 쓰는기도 등

(3)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자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by 조나단 에드워즈)
– 어떤 은혜의 수단이라도 지식 없이는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 지식 없이 사랑도 없습니다. 또한 지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살아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먼저 이해되어야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지식 없이 성례전의 효과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성례전도 지식 전달 없이는 합당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표지로 어떤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지가 지시해 주는 대상에 대해 아무 지식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무지한 이교도와 다를 바 없다.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교도들이 깊은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신학적 진리를 배우지 못해서 신학적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듣고 살아가고 있다면 복음 설교가 우리에게 신학을 더 많이 알게 해 줌으로써 우리를 이교도와 드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사람들에게 이런 지식이 없다면, 사람 안에 있는 이성적 기능은 전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함입니다.

(4)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자

예배는 종합 비타민과 같다. 단순히 설교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려는 나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다. 행동이 곧 마음이기도 하니까.

[결론]

믿음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17.10.29_율법을 참고해서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2

갈라디아서 02:15~03:05
2017년 10월 29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한줄 요약]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만, 율법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개요]

1. 의와 죄 :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먼저, 의와 죄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의는 하나님의 기준을 의미하고, 죄는 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신앙인이 더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단순히 교회에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거나 충성,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행위들로 의롭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런 행위들이 좋은 것 아닙니까?” “어쨌든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교회에는 도움에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지도자들과 교인인들의 비윤리적인 혹은 비상식적인 언행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이유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데, 정통 교회가 윤리적인 우월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어진 것도 큰 이유가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가 의롭지 못한데, 의롭지 못한 것을 행위로 감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헌금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말도 동일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예수님으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 나빠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좋아보이기 때문에 버리기 힘듭니다. 구분하기도 힘들고요. 하지만, 결코 복음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이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당시 사람들이게 율법의 행위는 할례와 안식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보면 나쁠 것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들이 자신을 의롭게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이런 행위를 했으니까 하나님께 의로운 행위를 했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적인 행동을 많이 했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의로운 할례, 안식일, 금심 등으로 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전도를 많이 하거나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거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위선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의로운 행위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갈라디아 교회 지도자들의 생각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의로워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동일한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미 양심이 마비되어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이지요.

2. 15~21절 : 복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보다 훨씬 복잡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무엇이 의로운 삶인지 고민하면서 실천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쉽고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려운 것 같지만 쉽기도 합니다.

이때 율법을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율법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참고하면 자기 중심적 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3:1~5절 : 성령을 받는 것도 예수님을 믿어서 받는 것일뿐 율법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유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적 성령운동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은사를 받지만,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행위가 자신을 의롭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은사를 점차 사라지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끊어집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을 압니다. 그래서 더 율법주의에 집착합니다. 은사자들이 이상해지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결론] 결국 율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참고는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참고하되 율법이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예수님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니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2017.10.22_율법을 참고해서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1

갈라디아서 2:1~21
2017년 10월 2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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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2:16)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만, 율법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개요]
1~10절 : 베드로, 요한 같은 사도들이 바울도 사도라고 인정했습니다.
11~14절 : 바울은 복음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15~21절 : 복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 결국 율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참고는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17.10.15_예수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2

갈라디아서 1:11~24
2017년 10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줄 요약]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도입

가을입니다. 가을은 철들는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철’의 원래 의미는 계절의 변화를 가르키는 말(겨울철 , 봄철,등)로서 동양에서는 흔이 ‘지혜’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들다’라는 말은 ‘무르익다’ 혹은 ‘들어섰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철 들었다” 하면, “지혜가 들어섰다” “지혜가 무르익었다”는 말입니다.

철들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어렵고 힘들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끝까지 해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의존성에서 벗어나서 홀로 서게 됩니다.

저는 신앙인들 모두가 신앙의 철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이니까 당연히 옳겠지요”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태도는 신앙을 가장한 영적 게으름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받기에 딱 좋은 말씀입니다.

철이 안들었다고 악하다고 하는 것은 좀 심한 이야기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악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충격을 주는 내용입니다.

1960년 5월, 세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아이히만은 나치 집권 당시 국가공안본부 제4국(일명 게슈타포)의 유대인 담당부서를 실무적으로 책임졌던 자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숨어 살던 중이었다.

아이히만은 이듬해(1961년) 4월부터 예루살렘의 법정에 섰다.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사형판결을 확정받고 이틀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직후부터 아렌트는 ‘뉴요커’에 이 세기적 재판에 관한 특집기사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듬해 그 기사에 에필로그와 후기를 가필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한 독일인이 예루살렘에 끌려와 재판받은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종전 후 홀로코스트 책임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아이히만도 바로 그 대상자 중에 한 명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완전소각’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으나, 종전 후에는 아예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이제 그것은 나치가 대략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 숫자는 당시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 전 세계 유대인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나치에게 이 학살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이렇게 대량학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사례는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런 만행이 정교한 관료조직과 과학기술에 의해 매우 체계적으로 실행된 점도 전대미문이다. 아이히만은 바로 그런 거대한 범죄의 실무급 책임자였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은 악마와 같은 희대의 살인마였다. 하지만 아렌트가 책에서 묘사한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의 정신 상태를 하고 있었고, 가족을 챙기는 부족함 없는 아버지이며, 자기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주어진 (나치의) 법을 잘 수행하는 시민이었다. 다만 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몰랐으며, 자신이 행하는 일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고 그저 맡겨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행한 일의 결과는 엄청난 악이었지만, 그 악의 뿌리는 오히려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에게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책에서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의원은 그의 책 ‘남영동’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문하는 와중에 걸려온 딸의 전화를 다정히 받았고 아들의 진학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다고 말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를 슬픔과 분노로 휩싸이게 만든 ‘어금니 아빠’의 여중생 살인 사건도 비슷합니다. 어금니 아빠의 딸이 자신의 친구를 불러서 수면제를 넣은 음료수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경찰은 그 딸이 아버지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었고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적었더라구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전혀 하지 않고 행한 순종이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고 그 학생이 죄없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한 칼럼이 있는데, 그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그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대학살의 주역은 매우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 없이 성실한 사람, 생각 없이 순종하는 사람, 생각 없이 열심인 사람이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이히만의 주장은 재판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잘못된 가르침에 성실하고 순종하고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사람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배워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의 신적 기원(1:11~24)

바울은 복음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복음을 전해 받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다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배운 부분이 있고 하나님께서 직접 깨닫게 해 주신 부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우리가 배우지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 ‘죄의 각성’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 생각에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자신도 죄인임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그 부분이 또 깨달아지고 또 깨달아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죄인임을 깨달아가면서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이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계속 막히는 부분이 생깁니다. 신앙 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가 있으려니 하면서 억지로 신앙 생활을 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죄의 각성은 의의 각성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죄를 흉악 범죄라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는 의에 미치지 못한 것이 다 죄입니다. 이러한 의와 죄의 개념은 로마서와 같습니다. 의를 생각하고 의에 도달하려고 해야합니다. 그럴 때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죄에 담대한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스스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결론]

복음을 바르게 깨달아서 스스로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가집시다

2017.10.08_예수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1

2017년 10월 08일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01:01~24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개요]

도입

안타깝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이단이 범람하고 있고 이단이 아니더라도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복음을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설교 스타일을 바꾸어서 강론식으로 설교를 늘이기로 결정한 이유도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면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성도들의 사고 능력이 발전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 교회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교인’이 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인은 많은데 성도는 드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인’입니까? 아니면 ‘성도’입니까?

성도는 한 교회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 전체를 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또 성도는 교회의 규모보다는 교회가 참된 진리 위에서 서있고 또 서있고자 하는지를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라디아서는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빠르게 강해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00년 전 10월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갈라디어서가 오늘날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을 주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매우 좋아했고, 그 중에 갈라디어서를 가리켜서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신약 성경의 교과서라고 여겼습니다. 로마서는 짧은 기간에 강해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먼저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판단 기준을 세우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1. 01~05 인사

사도 바울은 서신 첫 부분에서 자신이 예수님께 세움 받은 사도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에 특히 강조해서 그런 내용을 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도 듣는 사람이 “당신이 뭔데 훈장질이요?”라고 반발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행9:6

당시에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또 전도하러 떠나고 해서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기는 했지만, 개척하고 바로 떠났기 때문에 초창기 멤버가 아닌 사람은 바울을 잘 모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커지고 다른 목회자가 교회를 지도하면 그 목회자의 영향력이 바울보다 커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지금으로 비유하면, 바울은 외국에서 오래 사역한 선교사지만 국내에 들어오면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없는 한 명의 선교사일 뿐이고 갈라디아 교회같은 경우에는 대형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한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신임 밖에 없습니다. 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제가 20년 전 그러니까 1997년 8월에 직장 생활을 하다가 여름 휴가 때 신대원을 갈 것인지를 놓고 삼일 금식 기도를 했었습니다. 별 기대감이 없이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 응답을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습니다. 삼일 금식 기도하고 내 맘대로 해야겠다는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식 이틀째에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이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솟아나더니 머리를 꽝 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하여튼 이 경험이 저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우리 나라에서 목회자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 방정식’을 따르지 않게 된 것도 이 경험이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작은 교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를 잘 따르지 않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큰 교회를 따라가지 않는냐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교회가 크다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인데도 큰 교회를 따라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압력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저의 어떤 부분이 필요해서 부르셨으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사도 바울과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강력한 메세지를 보낼 때 비슷한 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니까 강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와서 한국 교회에 대해서 날선 비판을 하면 사람들이 “네, 좋은 말씀입니다. 바로 고치겠습니다”라고 할까요?

글쎄요.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당신 교회에 몇 명이나 모이오?”라고 물을 겁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집단 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오류의 가능성이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집단 지성이 잘 안통하는 분야가 몇 군데 있는데, 진리와 관련된 분야가 그렇습니다. 수학, 과학, 신학 이런 분야는 다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논리가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부터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한 명의 개인이지만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인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그 논리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06~10 전체 주제

6절부터 10절까지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왜 어렵냐면 사람들이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유일하다는 말이 뭘까요? 단 하나라는 말입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갖게된 이유가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내가 결단하고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선택해서 교회에 다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에 들어가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지만, ‘죄의 각성’은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뒤에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제가 매우 많이 말씀 드렸지만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신앙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믿음을 갖기 위해서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죄의 각성이 없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집사, 장로, 목사, 아니 그 이상이 되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약하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방언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못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뭔가 경쟁해서 남을 이기거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고 하면 잘하는데, 경쟁하지 말로 스스로 성장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른 것을 추구하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더군다나 진리의 영역에서는 반칙이나 짝퉁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교인들은 방언이 성령 세례라고 하면서 방언 받고 욕을 해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죄의 각성이 없으니까 판단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부르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판단을 못합니다.

3. 11~24 복음의 신적 기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은혜라는 점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른 설교를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 예배, 기도, 성찬, 세례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2017.10.01_제사, 왜 지낼까? 2

창세기 04:01~07
2017년 10월 01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한줄 요약]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방법을 알려주는 의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1. 제사는 효도 방법이 아닙니다

제사 때문에 명절 스트레스가 생기고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합니다. 제사로 인해서 가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좋은 풍습인 것 같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데일리 김영수 기자] 명절 전후 이혼 신청이 평소에 비해 3배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태섭 의원(더불어민주당·서울 강서갑)이 27일 법원행정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하루 평균 298건의 이혼신청이 접수된 반면, 설날과 추석 전후 10일간은 하루 평균 979건으로 3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이혼신청 중 22.5%가 명절 전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절 직후 3~4일간 이혼 접수가 매일 700~800건으로 가장 많았다. 평소 쌓였던 부부간, 가족간 갈등과 각종 스트레스가 명절기간 폭발하면서 평소에 비해 이혼소송 접수 건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10년간(2008~2017.8.) 월평균 2만6143쌍이 결혼하고 9564쌍이 이혼하고 있으며 다섯쌍 중 네쌍은 협의이혼, 한쌍은 재판이혼을 하고 있다.

금태섭 의원은 “부부갈등을 줄이기 위한 정책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명절갈등’을 특별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출처] https://getpocket.com/a/read/1905115127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았습니다. 공자의 무책임한 제사 발언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깨어진 예입니다.

장손 집안입니다. 조상덕은 보지도 못해서 명절마다 해외여행은 커녕 차례상에 성묘에 고생 고생 고생… 그리고 저희 집안도 역시나 명절과 제사는 항상 술과 싸움으로 끝나는 대단한 집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아버지들 모시고 차례와 기제사 그만 지내겠다고 폭탄을 날렸습니다. 당연히 난리가 났었죠. 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이 그렇게 많은지 그때 알았습니다. 당연히 저는 근본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되었구요 작은 아버지들이 저와 계속 말다툼 하시더니 본인들이 제사를 모셔가겠다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습니다. 당황하던 작은 어머니들의 표정을… 작은아버지가 제사 가져간 첫 해에는 제사모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제사 안지낸다고 하시더군요. 제사와 차례를 안지내니 명절도 당연히 친척이 다 모이지 않고 저희 집안 식구끼리만 먹고 즐기고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어머니께서 종종 말씀하십니다. 니 덕분에 명절을 명절답게 보낸다고….

[출처] https://getpocket.com/a/read/1908667535

제사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이유는 제사가 조상을 공경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2.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주는 의식입니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기 전에 저는 가인의 제사가 거절되었다는 말씀을 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고 또 우리 나라는 농경 국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가인의 제사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는 단순히 정성으로 나아가서는 안되고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비유입니다. 비슷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유할 수는 없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유한 것인데, 예수님의 십지가는 우리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피가 흘려지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는 말씀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때로는 기쁘게 즐겁게 힘차게 살아가지만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 때문에 항상 노이로제에 걸려서 살 수는 없지만 가끔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바로 명절이고, 제사 드릴 때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3. 제사는 예수님의 대속을 알려주는 의식입니다

제사는 대속을 통해서 살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속을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요. 그래야 우리는 대속이 얼마나 힘들 일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속을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필요합니다. 첫째는 능력입니다. 그 사람이 망쳐놓은 일을 책임지고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는 능력말입니다. 둘째는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부족합니다.

죄를 위한 대속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격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사람만이 죄인들 대속할 수 있습니다.
대속을 실천할 때,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전인격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속을 실천하며 삽시다. 명절 제사를 보면서 제사의 참된 의미와 예수님의 대속을 기억합시다

[결론]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방법을 알려주는 의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명절에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공경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2017.09.24_제사, 왜 지낼까? 1

창세기 04:01~07
2017년 09월 2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창세기 4:1~7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그리워 하는 마음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설레고, 명절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명절이 반갑기 보다는 우울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명절 스트레스에 더하여 제사 스트레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부터는 제사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제사를 지내면 안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이렇게 하는지 원래 이유를 모르면 불필요한 관습을 답습하게 됩니다. 영국 판사들이 쓰는 가발의 기원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판사에 임용된 어느 젊은이는 이런 의문을 가졌다. “왜 판사들은 하얀 가발을 쓰고 재판을 하는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는 무척 더운 나라여서 가발을 쓰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판사들은 두꺼운 법관복까지 입고서 하얀 가발을 쓰다니, 젊은 판사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꽤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예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모른다는 대답들뿐이었다.

그는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왜 가발을 쓸까?” 알고 보니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얻고서 ‘아하, 그렇군.’이라고 반응하며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았겠지만, 그 젊은 판사는 달랐다. 그는 다시 “그렇다면, 왜 영국에서는 판사들이 가발을 쓰는 걸까?”란 질문을 던졌다. 판사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얀 가발을 썼다는 설이 있었지만 그가 알아낸 것은 의외의 사실이었다.

영국의 법관들은 대개 나이가 많았고 그 때문에 대머리들이 많았다. 게다가 영국의 법정은 천장이 높아서 매우 추웠다. 결국 하얀 가발은 권위의 상징물이 아니라, 그저 방한용이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사용하던 가발을 적도 바로 위에 위치한 싱가포르에서도 써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관성’은 지독히도 생명력이 질겨서 아직도 싱가포르 법정에서는 가발 쓴 판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책, ‘틀을 깨라’는 창조적 발상이 젊은 판사가 품은 ‘왜?’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왜 그것이 여기에 존재하는 걸까? 왜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끝없이 던지고 해답을 탐구하는 자가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머리가 비상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견문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디어 창조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실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출처: http://infuture.kr/1036 [인퓨처컨설팅 & 유정식]

우리 나라에서는 조상들에 대한 제사가 일반적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거부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민족이든지 원래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드렸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 ‘수릿날’과 10월 ‘계절제’를 고구려의 ‘동명’, 신라의 ‘팔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한국의 신화·전설·가요가 구체적으로 불린 자리에 제천 의식이 있었고, 서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생활 모습으로서 무속 신앙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86%8D_%EC%8B%A0%EC%95%99)(巫俗信仰), 곧 샤머니즘 (https://ko.wikipedia.org/wiki/%EC%83%A4%EB%A8%B8%EB%8B%88%EC%A6%98)을 가지고 있었다. 또 수렵 경제에서 농업 경제로 넘어오면서 집단적인 부족 회의와 공동적인 제전으로 제천 의식을 열고, 생명의 근원인 창조신과 더불어 곡신(穀神)을 제사지냈다.

출처:위키백과 ‘한국의 제천 행사’ 중에서

2. 공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를 조상 숭배로 왜곡했습니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조상 숭배로 바꾼 사람이 공자입니다. 공자는 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했을까요?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조상이 돌아가신 날이나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한국에서 제사 지내는 풍습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민속학자가 연구할 일이기에, 저는 공자가 제사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공자는 제자가 귀신과 사후 세계에 관해 물었을 때, ‘사람의 일도 아직 잘 모르는데 귀신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 또 살아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는데 죽어서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잘 모르는 일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은 사람이 해결해야 하고, 사람이 세상일을 해결하는 이데올로기로 ‘인(仁)’이라는 사상을 만들게 됩니다.

공자는 인(仁)을 실행하는 방법으로 ‘예(禮)’를 말하고, ‘예(禮)’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강조합니다. ‘관혼상제’에서 상제(喪祭)는 조상이 죽었을 때 어떻게 제사를 지낼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공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하면서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성껏 제삿밥을 만들었는데, 정작 제삿밥을 먹을 조상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묵자(묵가를 만든 제자백가 중 한 사람)는 귀신도 없는데 제사를 지내라는 공자가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비판합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공자가 ‘재여’라는 제자와 부모에게 제사 지내는 문제로 논쟁한 내용이 있습니다. 공자는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이유는 부모가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준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3년을 품에 품고 지내기에 자식도 부모님에게 보답하기 위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시묘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말하는 제사는 조상의 사후 귀신을 모시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낳고 키워준 조상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공자의 답변에 ‘재여’가 다시 질문합니다. 부모가 죽은 후 3년 동안 시묘를 하면 생활에 피해가 생긴다며,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해 먹고 살아야 하는데, 3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으면 뭘 먹고 사느냐고 항변합니다.

‘재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기”곡례편’에 나오는 ‘예는 서민에게 내리지 않는다’는 구절로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예(禮)’를 실천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일반 서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공자가 살았던 봉건시대의 사회 계급은 위로 ‘천자’가 있고 그 아래로 땅을 하사받은 ‘경대부’가 있고 ‘경대부’ 아래에 행정관료 역할을 담당하던 ‘사(士)’가 있었습니다. ‘사(士)’를 선비라고도 해석하는데 조선 시대 양반에 해당하는 계급입니다.

결론적으로 공자가 말한 제사는 ‘양반’이상의 계급에만 해당되는 거고, 일반 서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출처 : 김기동의 ‘중국문화기행’ 7, 오마이뉴스 2017.3.28.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 출판  | 2001년 11월 30일 출간)나 북경대학교 리링 교수가 쓴 <논어, 세 번 찢다>(글항아리 펴냄)에서 모두 공자가 기존 통치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제사가 하늘에 드리는 것이었는데, 공자에 의해서 조상 숭배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효도’라는 윤리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것’을 ‘효도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위에서 인용한 글을 마저 보면 중국 사람들의 조상 숭배가 나옵니다. 그들의 제사는 우리 나라와 달리 단촐하고 실용적입니다.

작년 구정에 중국친구 초대로 시골에 있는 중국 친구 아버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설날에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상이 단출합니다. 튀긴 닭고기 한 접시와 튀긴 물고기 한 마리 그리고 과일이 있습니다. 물만두도 한 그릇 있네요. 당연히 술도 있고요. 다른 친척이 와서 절을 할 수 있게 제사상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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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중국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제사상을 이렇게 차렸다고 생각할 수 있어, 중국 친구를 소개합니다. 중국 친구는 나이가 쉰셋이고 한국으로 치면 중소도시 국립인민병원 의사이고, 대학에서 강의도 합니다. 중국 친구 부인은 중국공상은행에 근무하는데 직위가 한국으로 치면 부장급입니다.

중국에서는 6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내는데, 하나의 제사상으로 한꺼번에 제사를 지냅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표인 ‘지방’은, 개인별 이름표를 가진 우리나라와 달리 단체 이름표를 사용합니다. 제사상 앞에 있는 ‘단체지방'(제가 만든 단어입니다) 족자에 6층 건물 그림을 그리고 맨 아래부터 1대, 2대 ~~ 순으로 조상의 이름을 적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도 간단한데, 단 한 번 절하고 제사를 끝냅니다. 공자의 말처럼 조상귀신이 없으니, 제사를 지내는 동안 문을 조금 열어 조상귀신을 모시는 절차도 없습니다. 중국사람은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일 보다, 친척들이 모인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습니다.

출처 : 김기동의 ‘중국문화기행’ 7, 오마이뉴스 2017.3.28.

3. 부모님을 공경하되 제사는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명절 스트레스 문제가 나온지 매우 오래되었는데, 고쳐지지 않는 이유도 제사 문제와 비슷합니다. 즉, ‘효도’라는 문제와 맞물려서 생각에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김경일 교수는 유교를 죽은 사람 섬기다가 산 사람 죽이는 종교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그렇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의 아버지 김춘교 선생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큰 교훈을 줍니다.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경기도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능내리에 살던 무렵 아들 김용기가 세 살 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그의 어머니는 크게 근심했다. 아무리 용한 무당을 데려다가 밤을 새면서 굿을 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또 점쟁이에게 물어보면 좋은 약 처방을 받을까 하여 그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점쟁이 앞에 정성을 다해 아이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 점쟁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이 아이는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린 용기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용기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려고 하는 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머니는 전도지를 주면서 이 길로 10리 정도 나가면 용진교회가 있으니 계속 걸어가라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어머니는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아이가 크게 숨을 쉬더니 엄마를 부르면서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기에 가까운 주막집에서 잠깐 쉬면서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을 얻어 주고 그 아주머니가 준 전도쪽지를 읽어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용기 엄마는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해’라며, 그 발걸음을 재촉하여 용진교회를 찾았고 이후 계속 출석하게 됐다. 그렇게 용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출처: 한국장로신문, 농민운동가 김용기 장로, [제1200호] 2009년 10월 3일]

김춘교 선생은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사상을 차리고 동네 어른들을 잘 섬겨서 인심을 얻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던 삼촌이 갓을 쓰고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4.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줍니다. 이것은 평생에 걸쳐 묵상해야 할 주제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기까지 하려고 합니다. 제사는 하늘에 지내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제사드리는 것이 바른 제사인지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