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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08일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01:01~24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개요]
도입
안타깝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이단이 범람하고 있고 이단이 아니더라도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복음을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설교 스타일을 바꾸어서 강론식으로 설교를 늘이기로 결정한 이유도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면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성도들의 사고 능력이 발전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 교회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교인’이 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인은 많은데 성도는 드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인’입니까? 아니면 ‘성도’입니까?
성도는 한 교회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 전체를 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또 성도는 교회의 규모보다는 교회가 참된 진리 위에서 서있고 또 서있고자 하는지를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라디아서는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빠르게 강해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00년 전 10월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갈라디어서가 오늘날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을 주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매우 좋아했고, 그 중에 갈라디어서를 가리켜서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신약 성경의 교과서라고 여겼습니다. 로마서는 짧은 기간에 강해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먼저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판단 기준을 세우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1. 01~05 인사
사도 바울은 서신 첫 부분에서 자신이 예수님께 세움 받은 사도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에 특히 강조해서 그런 내용을 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도 듣는 사람이 “당신이 뭔데 훈장질이요?”라고 반발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행9:6
당시에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또 전도하러 떠나고 해서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기는 했지만, 개척하고 바로 떠났기 때문에 초창기 멤버가 아닌 사람은 바울을 잘 모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커지고 다른 목회자가 교회를 지도하면 그 목회자의 영향력이 바울보다 커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지금으로 비유하면, 바울은 외국에서 오래 사역한 선교사지만 국내에 들어오면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없는 한 명의 선교사일 뿐이고 갈라디아 교회같은 경우에는 대형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한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신임 밖에 없습니다. 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제가 20년 전 그러니까 1997년 8월에 직장 생활을 하다가 여름 휴가 때 신대원을 갈 것인지를 놓고 삼일 금식 기도를 했었습니다. 별 기대감이 없이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 응답을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습니다. 삼일 금식 기도하고 내 맘대로 해야겠다는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식 이틀째에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이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솟아나더니 머리를 꽝 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하여튼 이 경험이 저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우리 나라에서 목회자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 방정식’을 따르지 않게 된 것도 이 경험이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작은 교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를 잘 따르지 않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큰 교회를 따라가지 않는냐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교회가 크다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인데도 큰 교회를 따라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압력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저의 어떤 부분이 필요해서 부르셨으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사도 바울과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강력한 메세지를 보낼 때 비슷한 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니까 강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와서 한국 교회에 대해서 날선 비판을 하면 사람들이 “네, 좋은 말씀입니다. 바로 고치겠습니다”라고 할까요?
글쎄요.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당신 교회에 몇 명이나 모이오?”라고 물을 겁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집단 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오류의 가능성이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집단 지성이 잘 안통하는 분야가 몇 군데 있는데, 진리와 관련된 분야가 그렇습니다. 수학, 과학, 신학 이런 분야는 다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논리가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부터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한 명의 개인이지만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인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그 논리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06~10 전체 주제
6절부터 10절까지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왜 어렵냐면 사람들이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유일하다는 말이 뭘까요? 단 하나라는 말입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갖게된 이유가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내가 결단하고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선택해서 교회에 다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에 들어가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지만, ‘죄의 각성’은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뒤에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제가 매우 많이 말씀 드렸지만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신앙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믿음을 갖기 위해서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죄의 각성이 없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집사, 장로, 목사, 아니 그 이상이 되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약하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방언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못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뭔가 경쟁해서 남을 이기거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고 하면 잘하는데, 경쟁하지 말로 스스로 성장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른 것을 추구하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더군다나 진리의 영역에서는 반칙이나 짝퉁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교인들은 방언이 성령 세례라고 하면서 방언 받고 욕을 해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죄의 각성이 없으니까 판단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부르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판단을 못합니다.
3. 11~24 복음의 신적 기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은혜라는 점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른 설교를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 예배, 기도, 성찬, 세례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