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갈라디아서 1:11~24
2017년 10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줄 요약]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도입
가을입니다. 가을은 철들는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철’의 원래 의미는 계절의 변화를 가르키는 말(겨울철 , 봄철,등)로서 동양에서는 흔이 ‘지혜’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들다’라는 말은 ‘무르익다’ 혹은 ‘들어섰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철 들었다” 하면, “지혜가 들어섰다” “지혜가 무르익었다”는 말입니다.
철들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어렵고 힘들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끝까지 해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의존성에서 벗어나서 홀로 서게 됩니다.
저는 신앙인들 모두가 신앙의 철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이니까 당연히 옳겠지요”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태도는 신앙을 가장한 영적 게으름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받기에 딱 좋은 말씀입니다.
철이 안들었다고 악하다고 하는 것은 좀 심한 이야기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악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충격을 주는 내용입니다.
1960년 5월, 세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아이히만은 나치 집권 당시 국가공안본부 제4국(일명 게슈타포)의 유대인 담당부서를 실무적으로 책임졌던 자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숨어 살던 중이었다.
아이히만은 이듬해(1961년) 4월부터 예루살렘의 법정에 섰다.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사형판결을 확정받고 이틀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직후부터 아렌트는 ‘뉴요커’에 이 세기적 재판에 관한 특집기사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듬해 그 기사에 에필로그와 후기를 가필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한 독일인이 예루살렘에 끌려와 재판받은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종전 후 홀로코스트 책임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아이히만도 바로 그 대상자 중에 한 명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완전소각’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으나, 종전 후에는 아예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이제 그것은 나치가 대략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 숫자는 당시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 전 세계 유대인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나치에게 이 학살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이렇게 대량학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사례는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런 만행이 정교한 관료조직과 과학기술에 의해 매우 체계적으로 실행된 점도 전대미문이다. 아이히만은 바로 그런 거대한 범죄의 실무급 책임자였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은 악마와 같은 희대의 살인마였다. 하지만 아렌트가 책에서 묘사한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의 정신 상태를 하고 있었고, 가족을 챙기는 부족함 없는 아버지이며, 자기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주어진 (나치의) 법을 잘 수행하는 시민이었다. 다만 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몰랐으며, 자신이 행하는 일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고 그저 맡겨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행한 일의 결과는 엄청난 악이었지만, 그 악의 뿌리는 오히려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에게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책에서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의원은 그의 책 ‘남영동’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문하는 와중에 걸려온 딸의 전화를 다정히 받았고 아들의 진학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다고 말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를 슬픔과 분노로 휩싸이게 만든 ‘어금니 아빠’의 여중생 살인 사건도 비슷합니다. 어금니 아빠의 딸이 자신의 친구를 불러서 수면제를 넣은 음료수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경찰은 그 딸이 아버지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었고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적었더라구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전혀 하지 않고 행한 순종이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고 그 학생이 죄없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한 칼럼이 있는데, 그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그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대학살의 주역은 매우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 없이 성실한 사람, 생각 없이 순종하는 사람, 생각 없이 열심인 사람이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이히만의 주장은 재판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잘못된 가르침에 성실하고 순종하고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사람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배워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의 신적 기원(1:11~24)
바울은 복음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복음을 전해 받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다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배운 부분이 있고 하나님께서 직접 깨닫게 해 주신 부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우리가 배우지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 ‘죄의 각성’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 생각에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자신도 죄인임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그 부분이 또 깨달아지고 또 깨달아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죄인임을 깨달아가면서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이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계속 막히는 부분이 생깁니다. 신앙 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가 있으려니 하면서 억지로 신앙 생활을 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죄의 각성은 의의 각성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죄를 흉악 범죄라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는 의에 미치지 못한 것이 다 죄입니다. 이러한 의와 죄의 개념은 로마서와 같습니다. 의를 생각하고 의에 도달하려고 해야합니다. 그럴 때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죄에 담대한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스스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결론]
복음을 바르게 깨달아서 스스로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가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