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03:06~29
2017년 11월 0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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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참고: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개요]
개인적으로 허리가 아픈 적이 있었는데, 그 경험 이후에 허리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을 보아도 무심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이 눈에 잘 들어오게 되었고, 그런 병원이 왜 그렇게 많은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경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가 혹은 어떤 기도 응답을 체험했는가하고 다른 이야기입니다. ‘죄의 각성’이 아닌 다른 체험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죄’의 문제를 다루는데, ‘죄’는 다른 말로는 ‘불의’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살인, 강도 같이 나쁜 행동을 범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해 해야하는일인데 행하지 않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갈 02:06~14 : 아브라함은 율법이 생기기 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내세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롬4:11
창세기 15:6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로마서 4:11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손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언약에 대해서 전인격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막연한 믿음을 이삭의 출생이라는 문제와 연결시켜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많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번이라도 확실한 체험을 해야 하고 그 체험이 예수님과 연관되어야만 근본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로마서 4:19~24은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히11:11, 히11:12, 창17:17, 창18:11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1:6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고전10:11, 딤후3:16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 갈 02:15~22 :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까지만 유효합니다. 안내자는 안내를 하면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기 전에 의롭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야만 의롭다고 판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드러내지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3~4에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율법을 참고하라는 말씀이 이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갈 03:23~29 :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으라는 얘기는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말입니다. 청교도들을 인용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신앙서적을 읽자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 보면 그 모든 것의 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2) 다양하게 기도하자
로이드 존스는 새벽기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기도하기 전에 신앙서적을 읽어서 마음을 뜨겁게 한 다음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은 되도록 시간을 정해서 지속적으로 하자. 그러나 다양한 기도를 시도하자. 새벽기도 뿐만 아니라 순간기도, 산책기도, 쓰는기도 등
(3)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자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by 조나단 에드워즈)
– 어떤 은혜의 수단이라도 지식 없이는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 지식 없이 사랑도 없습니다. 또한 지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살아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먼저 이해되어야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지식 없이 성례전의 효과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성례전도 지식 전달 없이는 합당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표지로 어떤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지가 지시해 주는 대상에 대해 아무 지식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무지한 이교도와 다를 바 없다.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교도들이 깊은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신학적 진리를 배우지 못해서 신학적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듣고 살아가고 있다면 복음 설교가 우리에게 신학을 더 많이 알게 해 줌으로써 우리를 이교도와 드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사람들에게 이런 지식이 없다면, 사람 안에 있는 이성적 기능은 전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함입니다.
(4)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자
예배는 종합 비타민과 같다. 단순히 설교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려는 나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다. 행동이 곧 마음이기도 하니까.
[결론]
믿음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