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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2 신천지가 공략한 한국교회 약점3: 근본주의, 비상식
김세윤, 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 못지않게 근본주의 신학도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며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이란 성경의 문자적·율법적 해석에 기반을 둔 신학을 말한다. 한국 교회는 성경의 정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율법적으로 적용하려는 근본주의 신학으로부터 성숙해서 나와야 한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릴까 봐 성경 비평을 꺼리는 근본주의 경향이 한국 교회에 팽배해 있다. 성경의 본문들이 그들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황 속에서, 그리고 그 본문이 나타나는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또는 문학적 틀 속에서, 무슨 뜻을 가진 것인가를 고찰하지 않고, 그냥 그들만 뚝 떼어 기록된 문자대로만 읽고, 그것을 율법적으로 적용한다. 성경을 이렇게 읽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할 수 없어 기독교 신앙을 통해 겨우 전래된 교리 몇 가지를, 그것도 그 뜻을 깊이 새기지 못한 채 몇 가지 ‘하기’와 몇 가지 ‘안 하기’를 실천하는 정도의 신앙생활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올바른 영성을 증진하며, 이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그렇게 많고, 그들 중 상당수는 세상적으로 보면 상당한 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인하여 기독교적 정신과 윤리를 나타내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힘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 노릇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의 본문들 몇 개를 임의로 뽑아 서로 짜맞추어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어긋나는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이단들의 밥이 되기 쉽다. 그런 이단들이 성경 본문들을 들이대면서 그렇게 만들어 낸 자신들의 교리를 설명하면, 평소 성경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도록 가르침 받고, 성경의 본문들을 그저 문자적으로, 율법적으로만 읽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그들의 교리를 거부하기가 어렵다. 그 교리가 이단들이 제시하는 대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쓰여 있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단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근본주의적 교회에서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읽도록 훈련된 그리스도인들을 노린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한국의 성도들이 이단들의 제물이 되고 있는가?! 한국 교회의 강단을 돌아볼 때 성경의 문자적, 율법주의적 해석과 함께 알레고리적 해석의 경향도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사들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과 알레고리적 혹은 영해적(靈解的)인 해석, 이 양 극단을 편의에 따라 왔다 갔다 하면서 해석하고 설교한다. 과거 한국 교회는 알레고리적 설교에 치중했다. 목사들이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으면서 그것은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한 가지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문제점은 한국 교회의 예화 중심적 설교의 문제다. 목사가 성경 몇 구절들을 읽고는 그것을 강해는 하지 않고, 온갖 그럴듯한 예화들, 때로는 본문과 아무런 관련성도 없는 것들, 또 때로는 조작된 인상을 주는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설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알레고리적 설교나 예화 중심적 설교도 목사들이 결국 신학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을 습득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들이다. 목사들이 감동을 주어 (한국 개신교의 언어로 말하자면, ‘은혜로워서’)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를 하여 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깊고 바른 영성 위에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능력과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갖추어 가기를 바란다.
20200301 [징조] 시대를 분별하자 2
0. 왜 한국교회는 신천지보다 정부를 미워할까?
코로나19에 관한 외부의 시선_포린폴리시
생각 노예
우상 숭배
요한복음 0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1.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바리새인: 노예임을 모름
한국교회
독재시대의 노예
생각의 노예임을 모름
2.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한국교회가 노예인 증거
신천지보다 정부를 더 미워함
전광훈 집단을 옹호
3.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4. 자기객관화는 죄의 각성
2018.05.27_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본문
요한복음 7:37~39
설교 듣기
# 핵심 구절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한줄 요약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갈급함을 해갈해 주십니다.
# 개요
지난 주는 성령강림절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인격을 만들고, 예수님의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0. 우물을 파는 사람
“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그 우물물을 마시기 위해 오늘도 우물을 판다.”
이것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낸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이어령 전장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른들은 늘 한 우물을 파라고 했지만 나는 거꾸로 여기저기 새 우물을 파고 다녔다.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바로 나의 갈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물을 파다가 작은 물방울만 비쳐도 나는 금시 또 다른 갈증을 찾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이고 여기저기 전전해 온 내 직업들이다.”
이어령 박사는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이어령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나이 들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다 누렸을 때, 그는 자신이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는 수없이 실패의 우물을 파며 처절한 영혼의 광야를 통과한 후, 비로소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샘물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암에 걸려서 간절하게 아버지에게 전도했고, 비로소 그가 복음에 마음을 연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비슷한 책으로 중국의 석학 임어당이 지은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임어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달콤하고 고요한 생각의 초원을 걸었고 아름다운 계곡들을 보았다. 유교 인본주의의 대저택에 한동안 기거했고, 도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그 장관을 보았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 이후에야 나는 최고봉에 해당하는 기독교 신앙에 올라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85쪽)” 대저택(유교)과 산봉우리(도교), 안개(불교)를 품고 햇빛(예수님)을 바라본다.
이어령 박사나 임어당은 자신에게 어떤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해갈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국 예수님 안에서 생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을지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첫째, 목마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이스라엘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의 마지막 날을 의미합니다. 초막절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큰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성전 제단에 물을 붓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일종의 기우제였는데,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가져와 제단에 부었습니다. 그때에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유대인들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의 ‘호산나’를 외치면서 물 붓기 행사에 참여하였다.
초막절이 끝나면 곧이어 바쁜 농사철이 시작되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이스라엘에서는 적당한 때에 비가 내려야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적당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신 11:14).
그런 점에서 ‘명절 끝날’은 일주일 동안의 초막절 절기와 앞으로 다가올 농사철에 필요한 비를 구하는 공식적인 기우제 예식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 의무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풍요로운 삶의 근거인 비까지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신앙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여도 내면적으로는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께로 오려면 먼저 자신이 얼마나 목마른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안에 있는 생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생수의 강
둘째, 생수를 먹어야 합니다.
‘배’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일리아’로 우리 몸인 ‘배’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역시 같은 의미의 ‘베텐’이다. 이것은 신체 부위를 들어서 영적 의미를 추구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독특한 표현기법 중 하나였습니다. ‘배’는 영적으로 내면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배’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생명은 중심의 변화입니다. 그런 변화된 삶의 중심에 생수의 근원 되시는 예수이 들어와 함께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강’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지역이므로 1년 내내 물이 흐르기만 하면 ‘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연중 물이 흐르는 ‘강’은 시작이 지하수 샘인 강입니다. 만일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많지 않다면, 어느 정도 흐르다가 주변의 고온 건조한 기후에 의해 곧 마르고 맙니다.
주님께서 하신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즉,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수 근원이 우리들 안으로 들어와 우리들 삶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갇혀 있거나 도중에 증발돼 버리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자신을 넘어서서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넘쳐흐르는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3. 믿는자들이 받을 성령
셋째, 생수를 얻을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저술 중에 하나가 김준곤 목사님의 ‘예수 칼럼’입니다. 성령에 관한 어떤 책보다 이 책을 읽을 때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성령 성령한다고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령 충만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00. 해갈
예수 칼럼 중에서 ‘생수의 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소개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크리스천은 영원한 소년, 젊은 독수리의 비상(飛翔), 날마다 새 것을 잉태하는 처녀성, 다함 없는 생수의 샘터를 영혼 속 깊이 지녔다. 병들고 가난한들 어떠랴. 장미가 쓰레기에서 피고,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며, 역경에서, 고통에서 모세가 광야의 반석을 쳐서 생수가 터지게 했듯이 전혀 그럴 수 없을 때 그럴 수 없는 곳에서, 사막의 반석 같은 처지와 환경 속에서 쿨쿨쿨 생수의 강이 터지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라. 생수의 강, 성령의 강이 죽음 같이 깊은 곳에서 터지게 하라.
믿는자에게는 성령께서 생수의 강을 터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찬양과경배. 124 내 주의 은혜 강가로
2018.04.15_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본문
요한복음 21:15~19 / 2018년 04월 15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돈보다 중요한 것은?
뉴스에서 어느 여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누가 갑질을 해서 사과시켰나?’ 궁금한 마음으로 클릭해 보았습니다. 장애인을 자녀로 둔 어머니가 장애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무릎꿇고 호소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댓글들도 장애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비난하는 내용이 우세한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비난하지만, 자기 일이 되면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논리가 결국은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면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 돈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블랙홀처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로 뭉치쳐서 같은 목소리를 내게 하는 강력한 힘이 바로 돈인 것 같습니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주의의 중심이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돈이 그렇게 강력한데도 돈에 맞서는 힘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뭘까요? ‘사랑’인 것 같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여성이 아파트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게한 힘이 바로 장애인 자녀에 대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이 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돈으로 뭉친 사람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주민들이 생겼습니다. 바라보기만 하던 여론을 바꾸어 놓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 전에 그런 사진이 올라 온 이유가 기자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닐까요?
돈은 물질만능주의의 화신입니다. 사랑은 정반대에 있습니다. 가장 정신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냐 돈이냐를 선택하라고 하면 돈을 선택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돈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을 갈구할까요?
돈을 즐거워하지만,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또다른 사랑의 힘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을 바꾸어놓는 힘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1.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십니다. 우리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 좋으면 궁핍하고 가난하게 살 것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가난하고 궁핍한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일종의 훈련입니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처럼 영혼을 훈련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은 영혼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트레이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로 인해서 운동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은 생각이 달라져서 운동을 즐기는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기 몸이 균형 잡히고 건강해 지는 것을 보며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훈련을 즐기는 사람 말입니다. 이번에 발령난 우석제 실장님하고 작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에서 좋은 훈련을 받고 떠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다른 건 다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밑에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면 분노가 생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부분이 잘 훈련되어서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과정은 쉽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자주 부딪혔는데, 전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격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인격의 훈련을 받을 때, 부딪힘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격이 성장합니다.
저도 생각해 보니까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 표현이 부적절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걸 이해하고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면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필요를 아십니다. 불필요한 궁핍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영혼을 누구보다 배부르고 풍성하게 먹이기 원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풍요로움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이라는 동기로 예수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신앙 생활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를 보면, 정확하게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상태로 돌아간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화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합니다. 계획도 짜고, 운동도 하고, 가지 계발 서적도 읽고 나름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에 부딪히면 어떻게 하냐면 원위치합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요.
왜 그럴까요? 가장 쉬운 선택이고 그게 좋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 예를 들어서 이단에 빠진 사람을 왜 구하지 못할까요? 근본적으로 그 사람은 그것이 좋아보이기 때문입니다. 안 좋은 걸 좋아합니다. 그 사람한테는 그게 좋아보입니다.
좋은 것이 좋아보여야 좋은 쪽으로 변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의 기쁨을 알려줍니다. 영원을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에서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거룩한 것을 기뻐하는 마음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투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지에 따라서 우리가 속할 나라를 결정됩니다. 갈등이 없으면 안될까요? 갈등이 없으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갈등 속에서 갈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그 과정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3. 내 양을 먹이라
사랑하면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제가 가장 부끄럽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는 없고, 말씀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능력이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능력이나 은사가 있으니까 자기를 섬기라고 하고 자기를 살찌웁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 받았으니까 이제 좀 누리면서 살겠다는 겁니다. 이게 번영주의입니다. 이미 마음이 오염되었습니다.
어떤 변명을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냐 번영주의의 길이냐? 그 본질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적으로 도착할 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하늘로 연결되지만, 번영주의의 길은 멸망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반드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대략적인 방향을 알고 있어야 네비게이션이 오류가 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성령님의 인도를 바르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고 말은 안해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너무 강력해서 저항하지 못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 무엇이든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 사랑. 그 사랑이 물질만능주의을 이기고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주셨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2018.04.08_와서 조반을 먹으라
본문
요한복음 21:1~14 / 2018년 04월 08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한줄 요약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장면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인생의 목표를 심어준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개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십 일 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그 사십 일은 이 세상에서 아니 전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감동적인 변화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0. 인간은 변하는가?
현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예전에 심리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하고 성격이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거짓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행동의 원인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갈등이 깊어지는 이유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시험이 끝나면 빠따를 때리셨습니다. 한 문제 틀리면 한 대씩 때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성적이 오르냐면 별로 오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지리 선생님이 지리를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리를 열심히 공부해서 전국에서 학교별 지리 성적이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체벌이 교육 효과가 매우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게 때릴수록 부작용이 커집니다. 약한 체벌과 강한 체벌이 효과 면에서 차이가 없고, 부작용을 생각하면 약한 체벌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2년 미국 콜롬비아대의 엘리자베스 게르쇼프 박사는 1940년부터 62년 동안 이뤄진 체벌에 관한 연구 88개를 분석한 논문을 미국 심리학자가 발행하는 ‘심리학 회보’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게르쇼프 박사는 부모의 체벌을 받고 자란 아이의 행동 특성에 대해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체벌은긍정적인 면에서 효과가 거의 없는 반면 부정적인 효과는 많다. – 과학동아 2010년 10월호
또, 선생님에게 혼나고 문을 세게 닫고 가는 학생이 영화같은데 보면 나오는데, 예전에는 그게 100%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반항심만 있는 게 아니라 자책감도 포함되어 있는 거였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지?’, ‘나는 왜 이러나?’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인상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났나?’ 싶은데, 알고보니 자책감인 경우가 있습니다. 즉, 지각을 했거나 일 처리를 잘 못해서 스스로에게 화가 난 상태인 데 옆에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으면 서로 오해하고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오해와 혼란, 감정적인 낭비, 그리고 갈등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함께 해야 하는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과연 변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답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그 질문에 관한 답이 될 것 같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전처럼 목숨바쳐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다혈질이고 행동파였던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책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힘들 때 곁을 지키지 못했고,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내면에서 떠바치던 자긍심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면목이 없었습니다. 신이 나지 않았고,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상태를 경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경험하셨다면, 어떨 때 경험하셨습니까?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아직도 극복 못하셨다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베드로가 심리적으로는 안좋은 상태일지 몰라도,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상태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영적으로 좋은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동기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베드로를 이끌어간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그의 열정을 이끌어갔습니다. 성공과 야망이 사라지자 베드로는 의욕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십니다. 기초가 잘못된 건물을 지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꾸 무너뜨리고 다시 지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기초를 잘 세우고 있느냐입니다. 처음에 기초를 잘 세우지 못하면 나중에는 고칠 수 없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격하십니다.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 무너뜨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걸 알고 미리 알려주셨잖습니까? 베드로가 무너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인간적인 열정을 무너뜨리겠다 그 후에 하늘의 열망을 넣어주겠다고 말입니다.
2.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진정한 열망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순전한 열망을 말입니다. 참된 열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나의 잘못된 열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낙담하게 되고, 마침내 배터리가 방전된 가전제품처럼되고 맙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플러그를 연결해서 충만한 전원을 공급하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가 소명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서 다가갔습니다.
(출 3:2~3)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은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요즘 ‘열정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월급을 안주거나 조금 주고 일을 시키면서 그것을 ‘열정’이라고 표현하는 걸 말합니다. 기업은 사람을 키우거나 성장시키여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나 부품으로 생각합니다. 열심히 일하게 했다가 필요 없으면 자르거나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활용하면, 기업과 다를 게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 간판을 단 기업입니다. 본질 만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신 사실은 사람을 도구나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정면에서 반박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고 의욕이 없습니다. 사용할 수 없는 도구입니다. 고쳐쓰는 것보다 다른 도구를 쓰는 게 이득입니다. 사람을 도구로 보면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의욕을 잃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게 좋은 상태이고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격려하고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교회의 본질이고 사람의 성장이 교회의 최고 목표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3. 책망대신 조반을
예수님이 베드로를 격려하고 소명을 새롭게 하신 방법은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대신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아침을 대접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배려 깊은 사랑이 담긴 행동입니다.
이 한끼 식사를 통해서 베드로의 마음이 안심하고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가면서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떠나는 것이 반항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기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셨고 그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통해서 베드로는 새롭게 열망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건물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에 본질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나 긍정적 사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가장 소중한 삶을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본질적인 믿음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책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조반을 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야망이나 성공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아는 것. 여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떤 간판을 달고, 어떤 고상한 목적을 내세워도, 성령을 입에 달고 살아도 말입니다. 사람을 전도하는 도구, 봉사하는 도구, 출석하는 도구로 보면 기업입니다. 교회를 도구로 보면 신앙인이 아니라 기업인입니다. 교회를 인간관계의 도구, 성공의 도구로 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인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고 닮고자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나머지를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7.07.30_성령님은 누구신가? 2
2017년 07월 30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14:15~31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한줄 요약]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갖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개요]
1. 성령님은 또다른 예수님이십니다. – 또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2. 성령님은 신자 안에 거하는 분이십니다.
3.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결론] 성령님과 함께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행하는 제자가 되자.
2017.07.23_성령님은 누구신가? 1
2017년 07월 23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14:15~31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한줄 요약]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갖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개요]
1. 성령님은 또다른 예수님이십니다. – 또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2. 성령님은 신자 안에 거하는 분이십니다.
3.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결론] 성령님과 함께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행하는 제자가 되자.
2017.06.25_참된 자유 2
2017년 06월 25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08:31~59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한줄 요약]
소극적 자유는 해방되는 것이지만, 적극적 자유는 가장 고상한 것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입니다.
[개요]
1. 자유를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치한 것의 노예가 됩니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2. 스스로 고상한 것을 위해 얽매이는 것이 적극적 자유입니다
3.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스스로 계명에 얽매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자유입니다
2017.06.18_참된 자유 1
2017년 06월 18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08: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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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한줄 요약]
소극적 자유는 해방되는 것이지만, 적극적 자유는 가장 고상한 것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입니다.
[개요]
1. 자유를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치한 것의 노예가 됩니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2. 스스로 고상한 것을 위해 얽매이는 것이 적극적 자유입니다
3.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스스로 계명에 얽매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자유입니다
2017.05.21_참된 믿음 2
요한복음 14:01~14
참된 믿음 2
2017년 05월 21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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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요약]
믿음은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예수를 바라보는 것. 히 12:2)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개요]
1.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2.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3.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신데,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론] 어느 때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2017.05.07_참된 믿음 1
요한복음 14:01~14
참된 믿음 1
2017년 05월 07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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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예수를 바라보는 것. 히 12:2)입니다.
[개요]
1.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연결된다는 의미로, 성경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표현합니다.
3. 성령님은 예수님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분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2017.04.30_참된 예배 2
요한복음 04:01~26
참된 예배 2
2017년 04월 30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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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요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개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알아야만 드릴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사역은 대속, 인격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 대속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예배의 시작입니다.
2017.04.23_참된 예배 1
요한복음 04:01~26
참된 예배 1
2017년 04월 23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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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개요]
예배가 무엇인지 알고 바르게 예배합시다.
- 예배 – 예배는 ‘~ 손에 키스하다, 엎드리다, 절하다'는 의미로,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최상의 존재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드리는 것’입니다.
- 영으로 – 하나님은 형상으로 전락할 수 없고. 한 곳에 제한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영이십니다.
- 진리로 –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을 기초로 예배해야 합니다.
[결론] 영이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드립시다
2016.03.06_갈릴리 호수의 대화 2
요한복음 21:15-25
갈릴리 호수의 대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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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21:17)
[한줄 요약]
내면의 믿음이 외부로 표현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갈5:6, 딤전1:5).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개요]
-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베드로가 아침 식사를 마친 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웃 사랑 -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
예수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로 연결되어야 함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 - 예수님의 가르침
선한 사마리아인(눅10:27 이하)
지극히 작은 자를 섬김(마 25:40 이하)
[결론] 예수님을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표현하자
2016.02.21_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2
요한복음 21:01-14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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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 21:9)
[한줄 요약]
예수님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와서 그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개요]
-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옴 - 제자들의 마음
예수님 돌아가실 때 끝까지 신의를 지키지 못함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짐 - 예수님의 마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용서는 절망보다 강하다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은 없다
2016.02.14_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1
요한복음 21:01-10
“갈릴리 호수의 아침 식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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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 21:9)
[한줄 요약]
예수님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와서 그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개요]
- 이 말씀이 주어진 상황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옴 - 제자들의 마음
예수님 돌아가실 때 끝까지 신의를 지키지 못함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짐 - 예수님의 마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용서는 절망보다 강하다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