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부르시는 그곳

갈라디아서 06:01~18

2018년 02월 11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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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줄 요약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사람은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뿌린 모든 것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개요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에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는 복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복음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살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오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어떤 삶인지 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0. ‘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삶을 생각할 때 주의 해야 할 것은 단어의 오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슬프다’는 단어만으로는 전혀 슬프지 않고, 구체적으로 슬픈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런데, 슬프다는 말을 듣고 슬픈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996

2012년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에 세들어 살던 세 모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동반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입니다.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사과하는 글에는 슬프다는 말이 들어있지 않지만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2011년에는 안양구 석수동 월세집에서 예비 시나리오 작가 최 아무개 씨가 홀로 죽었는데, 죽기 며칠 전에 이웃집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2228.html#csidx42c556d70778d24bbaf0e6c34e064df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한다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1. 1~10. 성령님의 인도, 십자가

우리 시대에 십자가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십자가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더 큽니다. 마치 중세 시대와 비슷합니다.

당시에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팔아서 대성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것이 교리적으로 무척 잘못되었고 교회와 사회, 윤리적인 타락의 근원이었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면죄부 사놓지 뭐”, “대성당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럴 수도 있지”, “잘못되었지만 너무 세력이 강하니까 어쩔수 없지”

소수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카톨릭에서 매장하고 사람들도 외면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제가 성령 운동 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이 성령 세례라는데 방언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연습해서 방언을 해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양심이 불량한데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대형 교회를 세습하면서 십자가를 물려준다고 십자가를 모독해도 충성을 바칩니다.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교회에서 쫓겨나도 여전히 추종자들이 따라다닙니다.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 시대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2. 11~15. 인생의 자랑, 십자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느 시대나 힘듭니다. 십자가는 항상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시대의 주류가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부흥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6:8~9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삶이고, 영원한 나라에 기록되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3. 16~18.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손해, 손실,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다가 입는 피해를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을 지키다가 가난하게 되거나, 실패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흔적’은 가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몸에난 상처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트라우마일 수도 있습니다.

카톨릭은 ‘예수의 흔적’을 잘못된 영성으로 인도합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시스코의 상흔에 관한 일화인데, 성프란시스코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몸에 못자국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런 영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상흔은 비역사적인 상흔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역사적인 무언가입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미국으로 건나갈 때 많은 가족, 동료들을 잃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고생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행동에 의한 피해가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상흔입니다.

넓은 길로만 가면 고생할 일도 없고, 상처날 일도 없습니다. ‘예수의 상흔’이 없습니다. 있다면 비역사적인 환상에 의한 상흔만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서기도 힘들 뿐더라 칭찬을 듣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분들은 명백하게 불편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을 ‘예수의 흔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예수의 상흔’은 ‘영광의 상처’로 변할 것입니다.

결론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의 주관자 마귀는 우리보다 머리가 좋습니다. 교묘하게 신앙인들을 십자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박해가 아니라 오염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박해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결국에는 영광의 상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분을 향해 나아갑시다.

성령의 열매 VS 육체의 일

2018년 02월 05월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0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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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한줄 요약

성령님을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개요

지금은 헐벗었지만, 봄이 되면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여름이 되면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우리는 그 열매의 단맛을 즐기면서 잠시동안 행복에 잠길 것입니다. 열매는 단맛을 줄 뿐만 아니라 땅이 떨어지면 그 열매 속에 담겨져 있는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날 것입니다.

0. 씨와 열매

열매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나무의 번식을 위해서 필수적인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열매는 사람과 나무 모두를 이롭게 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오늘 성령의 열매에 대한 내용을 설교하려고 하는데, 성경에서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열매가 모두를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6~18. 두 마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사는 것에 대해서 오해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로봇처럼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판단의 주체로서 나는 항상 존재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항상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육체의 소욕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육체의 소욕이 항상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영어성경에서는 the sinful nature 죄악된 본성 혹은 the desires of the flesh 육의 소욕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두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 마음 중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한번에 죄악된 마음을 없애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선택과 책임이 독립된 인격의 본성입니다. 선택과 책임을 다할 여건이 없으면 자유의지는 있으나마나합니다. 개혁파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는 회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회심하지 못합니다. 애5:21절의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과 같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돌이킴의 원인은 하나님입니다(행11:18, 딤후2:25). 비록 회심이 중생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중생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서만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회심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우리의 일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33:1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하실 때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돌이키라고 할 때 사람의 행동으로 돌이킴을 훨씬 많이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돌이키다’는 의미를 지닌 구약의 ‘슈브’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74번 사용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돌이킨다는 의미로는 5번만 사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후크마는 그런 의미로 중생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회심은 사람의 사역이라고 구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189)

회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에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신비하게 맞물려서 진행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고통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육체의 소욕에게 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롬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2. 19~24. 두 결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우리 선택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자기 점검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과 나무가 사과를 맺으려고 노력해서 사과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버티면 열매가 저절로 맺힙니다. 뿌리가 어디에 뻗어있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성령님께 연결되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육체에 연결되어 있으면 육체의 일이 맺힙니다. 이 두 가지의 대조되는 결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열매는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생명의 재생산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감동을 남기고 떠나셨지만 그 감동은 제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감동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는 재생산됩니다.

반대로 육체의 일은 악하고 추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회적입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 병을 낫게 했다거나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보다는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자신도 저런 능력을 받아서 유명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신이 성령님을 바르게 따르고 있는지 점검하는 자기 점검 목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기 점검표를 만들어서 매일 자신을 점검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서 구체적으로 진단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조지 휫필드의 매일자기점검표
1. 나는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각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있게 행했는가?
9.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며 친절했는가?
10.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11.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았으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며, 잠자는 일에 있어서 절제가 있었는가?
12.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13.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는가?
14.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15. 나의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3. 25~2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성령님은 겸손한 분이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높이십니다. 그분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필요합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의 영광을 생각하고 훈련을 견딥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달게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서 영광을 받을지 대상을 바르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영광을 받기 원하면, 다투고 경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면 경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 여건과 환경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휫필드는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라. 다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고 말했다. 그는 한 교파나 교단의 창시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의 영광보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사모했습니다.

 

[결론]

성령님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사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열린 태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판단의 주체로서 ‘나’는 존재합니다. 나를 포기하지 말고 나를 육체가 아닌 하나님께 드리려고 힘써야 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기 점검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성령을 따르고 있는지 이 열매들과 비교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신앙 생활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율적인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05:01~15
2018년 01월 2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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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믿음을 입증합니다

[개요]

갈라디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합니다. 1절에 5장의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는 메지 말라’는 짧은 구절이 큰 감동을 줍니다. 이 말씀은 바꿔 말하면,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의문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신앙이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주일에 교회 안가도 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봉사, 기도 등 모든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알려주는 자유로운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0. 피아노 치기 혹은 피아노 연주하기

저는 아이들하고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고 말장난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아이들한테 “아빠는 피아노 잘 친다”고하면, 아이들이 “아빠 피아노 못 치잖아”하고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피아노 앞으로 가서 피아노를 쿵쾅쿵쾅 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게 뭐가 잘 치는 거야”하고 아우성을 지릅니다.

제가 쓸데 없는 장난을 한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아이들한테 교육을 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은 그야말로 ‘피아노를 잘 누른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더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냐면, ‘자유’와 ‘자율’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즉, 피아노를 잘 두드리기만 해서는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잘 두드려서 되지 않습니다.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피아노를 눌러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훈련을 통해서 숙달된 결과입니다. 피아노를 막 두드리는 것은 ‘자유’라고 할 수 있고, 피아노를 악보에 따라서 누르는 것은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자기 마음대로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악보에 따라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입니까? 피아노 두드리기는 훈련 없이 가능하지만, 피아노 연주하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된 자유를 ‘자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율’은 힘들지만 아름다움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율’은 뭔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자율’을 의미합니다.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자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5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은 ‘자율’이라는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지침을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도록 훈련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갈라디아서 5장 뒷부분에서는 이 결론을 논증하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6.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훈련된 자유’입니다. 무엇에 따라 훈련되어야 하냐면, ‘사랑’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훈련하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들만 지키라고 주신 특별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부분에서 이미 그 말씀을 하셨는데, 확인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입니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리고나서 율법은 모세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법이었다고 알려줍니다.

이 말씀 바로 앞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안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살던 사람이라서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안지켜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예증이 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받은 시대의 사람들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모세 시대부터 예수님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율법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명, 즉, 사랑을 따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은 의미가 깊은데, 그 이유는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잘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5:6]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has any valu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성경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2. 7~12.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매우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계속 막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영혼과 생각을 계속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한때 은혜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흐려지고 감동이 옅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걸림돌은 할례였습니다. 우리는 ‘할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구원의 확신’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할례가 있어야 ‘구원 받았다’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지만, 할례는 포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할례를 믿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반발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정통 기독교 어디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주지 않습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에서 그렇게 배웠는데요? 아니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그렇게 가르쳤다면, 가르친 분이 오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인격에 감격하고 그 분을 닮고자 열망하는 가운데 홀연히 선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구원은 나의 믿음의 자동적인 결과나 구원의 확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또 하나는 ‘방언’인 것 같습니다. 방언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방언이 구원을 주지도 않고 구원을 보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지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믿는 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게 하신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은 그 이름 그대로 거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령 사역에 대해서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령 운동, 예수님을 닮지 않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성령님의 은사, 기적, 능력을 결코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사역을 사모하는 분들이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요인들이 오늘날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십자가의 걸림돌을 치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3. 13~15. 사랑할 자유를 누리라

악보를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훈련을 해야 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따라 사는 훈련해야 합니다. 종은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라 쇳덩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않으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 중에 하나가 예배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예배 속에 가장 잘 담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는 것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순히 “그거 하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를 들어드리는 것이고, 적용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랑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 원칙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사 음식을 먹어도 괜찮지만,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으면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결론]

자율은 훈련된 자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훈련될 때 아름답니다. 개인의 자유가 그의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프레드릭 윌리엄 파라). 자유가 자신의 속박을 잃을 때는 그 자체가 더 큰 자유의 속박이 된다(칼리 지브란)

스스로 사랑이라는 계명에 따르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고려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신앙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감동을 주는 것도 그것이 고된 자기 훈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사랑이라는 악보를 가장 잘 연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4:1~31
2017년 11월 27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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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한줄 요약]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요]

두란노에서 출판된 ‘제자입니까?’라는 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친 아르헨티나의 목회자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매우 쉬운 말로 설명하셨는데, 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죽어서 천국문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천국문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당신에게 어떤 질문을 할까요?
성경 시험, 교리 문제 등 어떤 것을 물을까요? 오르티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를 내지 않고 청진기를 가져와서 가슴에 대 보고 너는 심장이 뛰고 있구나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 그것은 우리 내면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도록 하려는데 있다는 점말입니다.

 

1. 1~7 : 지식이 아니라 생명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2. 8~20 : 다시 종이 되지 말라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다시 종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3. 21~31 : 아브라함의 예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체험하기도 했는데,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

내가 예수님의 생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2

갈라디아서 03:15~29
2017년 11월 1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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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24.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요]

성경은 해 이래 새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연관해서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원전 425년 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 경에 쓰여진 수메르 점토판에 나온 기록인데, 거기에도 젊은 이에게 “제발 철 좀 들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세상이 변해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죄’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우리 인간 내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변해도 세상의 근본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의 시간 간격이 있지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의 문제와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의 문제는 비슷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문제인데,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 + a’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 다른 말로 갈라디아주의는 오늘날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주의적 전도운동, 율법주의적 성령운동, 율법주의적 영성운동 등으로 말입니다. 매우 좋은 주장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율법주의가 있는 운동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겉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동일한데 율법주의는 언제나 예수님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합니다. 언제나 인격이 아니라 의식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지면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나쁜 행동을 해도 예배에 잘 참석하거나 교회에 충성하면 그것이 상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비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있는데 본인은 오히려 신앙이 매우 좋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문제의식 없이 교회다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태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최순실 씨 딸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에 부정입학한 일이 밝혀진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보면 정유라 때문에 원래 이화여대에 합격해야 했지만 합격하지 못해서 다른 대학에 들어간 여성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화여대 학장, 총장, 담당교수 모두 별로 반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부정을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언론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면접에 참여한 교수들도 부정을 저질렀죠? 제가 생각할 때는 만약에 제가 그런 입시 부정을 지시 받았다면 사표를 내는 한 있더라도 거부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회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건 제 기준으로는 선을 많이 넘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왜 기독교 대학에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가 의아합니다.

 

1. 갈 02:06~14 : 양심이 살아있어서 의를 위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김세윤 교수님은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이 술, 담배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이 좋은 것으로 높여주면서 정작 술, 담배보다 훨씬 더 큰 죄인 부정, 부패에는 무관심하다고 지적합니다. 사회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지르고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있는 것이지요. 이게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 주의는 여기서 전도나 성령운동, 영성을 결합한 것입니다. 사회에서 나쁜 행동을 해도 전도를 열심히 하거나 방언을 열심히 하거나 영성을 기르면 된다는 식으로 이끄는 일이 바로 갈라디아 주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혼란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 답이 오늘 두 번 읽은 구절입니다.

먼저,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했어요. 그러면 안되지만 입시 부정을 했다고 치세요. 주일 성수 잘하거나 전도 열심히 하거나 방언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죽게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이 정도만 해도 성공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들려다보고 고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어떤 길을 갈지는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몇가지 가능성을 말씀드리자면, 뒤늦었지만 그 일을 바로 잡으려고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상사들을 설득하든지 언론사에 제보하든지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번에는 얼떨결에 넘어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아무런 결정을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청교도들은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양심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양심이 살아있어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2. 갈 02:15~22 : 율법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알려줍니다

십계명에는 분명하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어떻게 하냐면, 단순히 율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서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을 면죄부로 사용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여러분께서 고민하다 보면 알게 되시겠지만 양심을 죽이지 않으려면 전진해야만 합니다. 한 두 번은 부정을 저질르고 고민만 하다가 지나갈 수 있지만 계속 양심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의로운 삶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안그러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영적으로 눈이 먼 소경, 영적으로 감각이 마비된 나병환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정에 머물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해결해야 할 많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법 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컴퓨터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불법 프로그램도 몇가지 썼었는데, 그것이 저를 고민하기 만든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거의 다 정품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윈도우 프로그램 라이센스를 얼마전에 구입했습니다. MS 오피스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학습용으로 주는 라이센스를 받았고, 인디자인은 월정액을 내고 쓰고 있습니다. 단지 한글 프로그램은 정품을 안샀는데 제가 한글을 안 쓰지만 한글 파일을 받으면 그것을 복사해서 다른 프로그램에 옮기기 위해서 깔아놓고만 있습니다.

이렇게 저도 느리지만 전진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살다보니까 알게 된 것이 무엇이냐면, 양심이 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제가 우리 나라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셨을지 모르는데, 제게는 큰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겉으로 성장하는 것 같지만 생명은 사라져가고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요. 여러분도 양심이 죽지 않도록 고민하다보면 저절로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갈 03:23~29 : 예수님을 닮고자 애쓸때 열망이 생겨나고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고 의를 추구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예수님을 닮도록 인도하는 영이고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성령 운동이 이상합니다. 뉴코아에는 교회 안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중에서 좀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분들 중에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TV에 잠깐씩 나오는 목사님들 중에 얼굴만 봐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인데, 능력 있다는 분들이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부터 뜨끔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친절하고 지혜롭고 때로는 강인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사람인가 또 그렇게 보이는가를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령 충만하다 능력 있다는 말은 안했으니까 하고 합리화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목요일에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갔었는데, 거기서 로제타 홀 여사의 전시관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오, 기도하오니 저도 충성되게 하시고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게 하소서.” 성공이 중요하지만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공이 예수님 닮기보다 앞서는 것보다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성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휘감고 거룩한 불씨를 던져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1

갈라디아서 03:06~29
2017년 11월 0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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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참고: 롬13:14, 엡4:24)

[한줄 요약]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개요]

개인적으로 허리가 아픈 적이 있었는데, 그 경험 이후에 허리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을 보아도 무심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허리 편한 병원’이 눈에 잘 들어오게 되었고, 그런 병원이 왜 그렇게 많은지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죄의 각성’을 경험해야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나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경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가 혹은 어떤 기도 응답을 체험했는가하고 다른 이야기입니다. ‘죄의 각성’이 아닌 다른 체험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죄’의 문제를 다루는데, ‘죄’는 다른 말로는 ‘불의’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살인, 강도 같이 나쁜 행동을 범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연해 해야하는일인데 행하지 않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불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갈 02:06~14 : 아브라함은 율법이 생기기 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내세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롬4:11

창세기 15:6절에 대해서 설명하고 로마서 4:11 이하를 보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손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언약에 대해서 전인격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막연한 믿음을 이삭의 출생이라는 문제와 연결시켜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 드렸지만, 많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두번이라도 확실한 체험을 해야 하고 그 체험이 예수님과 연관되어야만 근본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로마서 4:19~24은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히11:11, 히11:12, 창17:17, 창18:11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1:6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고전10:11, 딤후3:16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 갈 02:15~22 :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까지만 유효합니다. 안내자는 안내를 하면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기 전에 의롭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야만 의롭다고 판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드러내지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3~4에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율법을 참고하라는 말씀이 이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갈 03:23~29 : 그리스도로 옷입읍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으로 옷 입으라는 얘기는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말입니다. 청교도들을 인용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신앙서적을 읽자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 보면 그 모든 것의 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2) 다양하게 기도하자

로이드 존스는 새벽기도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기도하기 전에 신앙서적을 읽어서 마음을 뜨겁게 한 다음에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원칙은 되도록 시간을 정해서 지속적으로 하자. 그러나 다양한 기도를 시도하자. 새벽기도 뿐만 아니라 순간기도, 산책기도, 쓰는기도 등

(3)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공부하자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by 조나단 에드워즈)
– 어떤 은혜의 수단이라도 지식 없이는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 지식 없이 사랑도 없습니다. 또한 지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살아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먼저 이해되어야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지식 없이 성례전의 효과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성례전도 지식 전달 없이는 합당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표지로 어떤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지가 지시해 주는 대상에 대해 아무 지식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무지한 이교도와 다를 바 없다.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교도들이 깊은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신학적 진리를 배우지 못해서 신학적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듣고 살아가고 있다면 복음 설교가 우리에게 신학을 더 많이 알게 해 줌으로써 우리를 이교도와 드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만일 사람들에게 이런 지식이 없다면, 사람 안에 있는 이성적 기능은 전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함입니다.

(4)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자

예배는 종합 비타민과 같다. 단순히 설교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려는 나 자신의 의지도 중요하다. 행동이 곧 마음이기도 하니까.

[결론]

믿음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율법을 참고해서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2

갈라디아서 02:15~03:05
2017년 10월 29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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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한줄 요약]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만, 율법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개요]

1. 의와 죄 :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먼저, 의와 죄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의는 하나님의 기준을 의미하고, 죄는 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만, 신앙인이 더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단순히 교회에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거나 충성,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그런 것들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행위들로 의롭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런 행위들이 좋은 것 아닙니까?” “어쨌든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교회에는 도움에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지도자들과 교인인들의 비윤리적인 혹은 비상식적인 언행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단이 극성을 부리는 이유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데, 정통 교회가 윤리적인 우월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어진 것도 큰 이유가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가 의롭지 못한데, 의롭지 못한 것을 행위로 감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헌금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말도 동일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예수님으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 나빠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좋아보이기 때문에 버리기 힘듭니다. 구분하기도 힘들고요. 하지만, 결코 복음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이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당시 사람들이게 율법의 행위는 할례와 안식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보면 나쁠 것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들이 자신을 의롭게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이런 행위를 했으니까 하나님께 의로운 행위를 했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위선적인 행동을 많이 했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의로운 할례, 안식일, 금심 등으로 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전도를 많이 하거나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거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위선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의로운 행위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갈라디아 교회 지도자들의 생각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의로워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동일한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미 양심이 마비되어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이지요.

 

2. 15~21절 : 복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보다 훨씬 복잡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무엇이 의로운 삶인지 고민하면서 실천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쉽고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려운 것 같지만 쉽기도 합니다.

이때 율법을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율법의 정신을 생각하면서 참고하면 자기 중심적 독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3:1~5절 : 성령을 받는 것도 예수님을 믿어서 받는 것일뿐 율법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성경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유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적 성령운동에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은사를 받지만,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행위가 자신을 의롭게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은사를 점차 사라지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끊어집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을 압니다. 그래서 더 율법주의에 집착합니다. 은사자들이 이상해지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결론] 결국 율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참고는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참고하되 율법이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예수님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니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을 참고해서 예수님을 닮아갑시다 1

갈라디아서 2:1~21
2017년 10월 22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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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2:16)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만, 율법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개요]
1~10절 : 베드로, 요한 같은 사도들이 바울도 사도라고 인정했습니다.
11~14절 : 바울은 복음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를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15~21절 : 복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 결국 율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참고는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2

갈라디아서 1:11~24
2017년 10월 15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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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줄 요약]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도입

가을입니다. 가을은 철들는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철’의 원래 의미는 계절의 변화를 가르키는 말(겨울철 , 봄철,등)로서 동양에서는 흔이 ‘지혜’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고 합니다. ‘들다’라는 말은 ‘무르익다’ 혹은 ‘들어섰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철 들었다” 하면, “지혜가 들어섰다” “지혜가 무르익었다”는 말입니다.

철들면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어렵고 힘들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끝까지 해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의존성에서 벗어나서 홀로 서게 됩니다.

저는 신앙인들 모두가 신앙의 철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이니까 당연히 옳겠지요”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태도는 신앙을 가장한 영적 게으름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받기에 딱 좋은 말씀입니다.

철이 안들었다고 악하다고 하는 것은 좀 심한 이야기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악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충격을 주는 내용입니다.

 

1960년 5월, 세계가 깜짝 놀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아이히만은 나치 집권 당시 국가공안본부 제4국(일명 게슈타포)의 유대인 담당부서를 실무적으로 책임졌던 자이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해 숨어 살던 중이었다.

아이히만은 이듬해(1961년) 4월부터 예루살렘의 법정에 섰다.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사형판결을 확정받고 이틀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직후부터 아렌트는 ‘뉴요커’에 이 세기적 재판에 관한 특집기사를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듬해 그 기사에 에필로그와 후기를 가필하여 단행본으로 간행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한 독일인이 예루살렘에 끌려와 재판받은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종전 후 홀로코스트 책임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아이히만도 바로 그 대상자 중에 한 명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본래 ‘완전소각’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으나, 종전 후에는 아예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이제 그것은 나치가 대략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 숫자는 당시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 전 세계 유대인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나치에게 이 학살은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이렇게 대량학살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사례는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이런 만행이 정교한 관료조직과 과학기술에 의해 매우 체계적으로 실행된 점도 전대미문이다. 아이히만은 바로 그런 거대한 범죄의 실무급 책임자였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은 악마와 같은 희대의 살인마였다. 하지만 아렌트가 책에서 묘사한 아이히만은 지극히 정상의 정신 상태를 하고 있었고, 가족을 챙기는 부족함 없는 아버지이며, 자기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공무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주어진 (나치의) 법을 잘 수행하는 시민이었다. 다만 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줄 몰랐으며, 자신이 행하는 일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고 그저 맡겨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행한 일의 결과는 엄청난 악이었지만, 그 악의 뿌리는 오히려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에게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책에서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의원은 그의 책 ‘남영동’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문하는 와중에 걸려온 딸의 전화를 다정히 받았고 아들의 진학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다고 말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를 슬픔과 분노로 휩싸이게 만든 ‘어금니 아빠’의 여중생 살인 사건도 비슷합니다. 어금니 아빠의 딸이 자신의 친구를 불러서 수면제를 넣은 음료수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경찰은 그 딸이 아버지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었고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적었더라구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전혀 하지 않고 행한 순종이 끔찍한 범죄로 이어졌고 그 학생이 죄없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한 칼럼이 있는데, 그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그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대학살의 주역은 매우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 없이 성실한 사람, 생각 없이 순종하는 사람, 생각 없이 열심인 사람이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이히만의 주장은 재판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잘못된 가르침에 성실하고 순종하고 열심을 내는 것이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사람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배워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의 신적 기원(1:11~24)

바울은 복음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복음을 전해 받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다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배운 부분이 있고 하나님께서 직접 깨닫게 해 주신 부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우리가 배우지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 ‘죄의 각성’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 생각에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자신도 죄인임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그 부분이 또 깨달아지고 또 깨달아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죄인임을 깨달아가면서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이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계속 막히는 부분이 생깁니다. 신앙 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가 있으려니 하면서 억지로 신앙 생활을 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죄의 각성은 의의 각성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죄를 흉악 범죄라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죄는 의에 미치지 못한 것이 다 죄입니다. 이러한 의와 죄의 개념은 로마서와 같습니다. 의를 생각하고 의에 도달하려고 해야합니다. 그럴 때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죄에 담대한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스스로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결론]

복음을 바르게 깨달아서 스스로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가집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1

2017년 10월 08일 주일 설교
갈라디아서 0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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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한줄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개요]

도입

안타깝게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이단이 범람하고 있고 이단이 아니더라도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목사님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복음을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설교 스타일을 바꾸어서 강론식으로 설교를 늘이기로 결정한 이유도 “성도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해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면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지만, 성도들의 사고 능력이 발전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 교회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교인’이 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인은 많은데 성도는 드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인’입니까? 아니면 ‘성도’입니까?

성도는 한 교회의 이익을 수호하는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에서 교회 전체를 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또 성도는 교회의 규모보다는 교회가 참된 진리 위에서 서있고 또 서있고자 하는지를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라디아서는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빠르게 강해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00년 전 10월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갈라디어서가 오늘날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을 주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매우 좋아했고, 그 중에 갈라디어서를 가리켜서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신약 성경의 교과서라고 여겼습니다. 로마서는 짧은 기간에 강해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먼저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판단 기준을 세우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1. 01~05 인사

사도 바울은 서신 첫 부분에서 자신이 예수님께 세움 받은 사도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에 특히 강조해서 그런 내용을 씁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도 듣는 사람이 “당신이 뭔데 훈장질이요?”라고 반발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행9:6

당시에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또 전도하러 떠나고 해서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기는 했지만, 개척하고 바로 떠났기 때문에 초창기 멤버가 아닌 사람은 바울을 잘 모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커지고 다른 목회자가 교회를 지도하면 그 목회자의 영향력이 바울보다 커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지금으로 비유하면, 바울은 외국에서 오래 사역한 선교사지만 국내에 들어오면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없는 한 명의 선교사일 뿐이고 갈라디아 교회같은 경우에는 대형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무슨 말을한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신임 밖에 없습니다. 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제가 20년 전 그러니까 1997년 8월에 직장 생활을 하다가 여름 휴가 때 신대원을 갈 것인지를 놓고 삼일 금식 기도를 했었습니다. 별 기대감이 없이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 응답을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습니다. 삼일 금식 기도하고 내 맘대로 해야겠다는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식 이틀째에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이 내면에서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솟아나더니 머리를 꽝 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하여튼 이 경험이 저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우리 나라에서 목회자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 방정식’을 따르지 않게 된 것도 이 경험이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작은 교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를 잘 따르지 않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큰 교회를 따라가지 않는냐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는 교회가 크다고 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인데도 큰 교회를 따라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압력을 견딜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저의 어떤 부분이 필요해서 부르셨으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사도 바울과 비교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강력한 메세지를 보낼 때 비슷한 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니까 강하게 말할 수 있었겠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와서 한국 교회에 대해서 날선 비판을 하면 사람들이 “네, 좋은 말씀입니다. 바로 고치겠습니다”라고 할까요?

글쎄요.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당신 교회에 몇 명이나 모이오?”라고 물을 겁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집단 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오류의 가능성이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집단 지성이 잘 안통하는 분야가 몇 군데 있는데, 진리와 관련된 분야가 그렇습니다. 수학, 과학, 신학 이런 분야는 다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논리가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부터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사도로 임명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한 명의 개인이지만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인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그 논리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06~10 전체 주제

6절부터 10절까지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왜 어렵냐면 사람들이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유일하다는 말이 뭘까요? 단 하나라는 말입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갖게된 이유가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내가 결단하고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선택해서 교회에 다닐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에 들어가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죄의 각성’을 의미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지만, ‘죄의 각성’은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뒤에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제가 매우 많이 말씀 드렸지만 ‘죄의 각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뭔가 신앙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믿음을 갖기 위해서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죄의 각성이 없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집사, 장로, 목사, 아니 그 이상이 되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약하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방언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못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뭔가 경쟁해서 남을 이기거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고 하면 잘하는데, 경쟁하지 말로 스스로 성장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른 것을 추구하라고 하면 잘 못합니다. 더군다나 진리의 영역에서는 반칙이나 짝퉁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 교인들은 방언이 성령 세례라고 하면서 방언 받고 욕을 해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죄의 각성이 없으니까 판단을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부르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판단을 못합니다.

3. 11~24 복음의 신적 기원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은혜라는 점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른 설교를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 예배, 기도, 성찬, 세례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