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06:01~18
2018년 02월 11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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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줄 요약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사람은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뿌린 모든 것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개요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복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에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는 복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다른 복음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살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향해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오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 어떤 삶인지 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0. ‘슬프다’는 말은 슬프지 않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삶을 생각할 때 주의 해야 할 것은 단어의 오해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슬프다’는 단어만으로는 전혀 슬프지 않고, 구체적으로 슬픈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런데, 슬프다는 말을 듣고 슬픈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 아주머니께…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1996
2012년 송파구 단독주택 지하에 세들어 살던 세 모녀가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동반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입니다.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사과하는 글에는 슬프다는 말이 들어있지 않지만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2011년에는 안양구 석수동 월세집에서 예비 시나리오 작가 최 아무개 씨가 홀로 죽었는데, 죽기 며칠 전에 이웃집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2228.html#csidx42c556d70778d24bbaf0e6c34e064df
십자가라는 단어를 말한다고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가르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1. 1~10. 성령님의 인도, 십자가
우리 시대에 십자가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십자가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 더 큽니다. 마치 중세 시대와 비슷합니다.
당시에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팔아서 대성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것이 교리적으로 무척 잘못되었고 교회와 사회, 윤리적인 타락의 근원이었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면죄부 사놓지 뭐”, “대성당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그럴 수도 있지”, “잘못되었지만 너무 세력이 강하니까 어쩔수 없지”
소수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카톨릭에서 매장하고 사람들도 외면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 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제가 성령 운동 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않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이 성령 세례라는데 방언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연습해서 방언을 해도 별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이 양심이 불량한데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대형 교회를 세습하면서 십자가를 물려준다고 십자가를 모독해도 충성을 바칩니다. 범죄 행위를 저질러서 교회에서 쫓겨나도 여전히 추종자들이 따라다닙니다.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 시대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2. 11~15. 인생의 자랑, 십자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은 어느 시대나 힘듭니다. 십자가는 항상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시대의 주류가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부흥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6:8~9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분명한 것은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삶이고, 영원한 나라에 기록되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3. 16~18.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
십자가의 삶을 살면 손해, 손실,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다가 입는 피해를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을 지키다가 가난하게 되거나, 실패하거나,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흔적’은 가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몸에난 상처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트라우마일 수도 있습니다.
카톨릭은 ‘예수의 흔적’을 잘못된 영성으로 인도합니다. 예를 들면, 성 프란시스코의 상흔에 관한 일화인데, 성프란시스코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몸에 못자국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그런 영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상흔은 비역사적인 상흔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역사적인 무언가입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미국으로 건나갈 때 많은 가족, 동료들을 잃었고, 미국에 도착해서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고생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행동에 의한 피해가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상흔입니다.
넓은 길로만 가면 고생할 일도 없고, 상처날 일도 없습니다. ‘예수의 상흔’이 없습니다. 있다면 비역사적인 환상에 의한 상흔만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 앞에 서기도 힘들 뿐더라 칭찬을 듣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분들은 명백하게 불편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불편을 ‘예수의 흔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예수의 상흔’은 ‘영광의 상처’로 변할 것입니다.
결론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의 주관자 마귀는 우리보다 머리가 좋습니다. 교묘하게 신앙인들을 십자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우리 시대의 십자가는 박해가 아니라 오염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목숨의 위협을 받는 박해를 받는다는 심정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결국에는 영광의 상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분을 향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