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9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3

2017년 09월 19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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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었는가?”라고 말입니다.
(1) 내가 왜 이것을 위대하다고 생각했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웅장함, 화려함, 힘에 도취되어서 위대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착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의 종말을 보면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어렸은 적에 통행금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통행금지가 해제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 속으로 통행금지 해제되면 간접 천국이 될텐데라고 생각하면서 겁을 먹었습니다. 통행 금지 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라고 생각했니다. 그러면서 통행 금지가 해제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제 바람과는 달리 통행 금지는 해제되었고, 더불어 간첩 천국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머리 회전이 빠르지는 않지만 과거를 복기하는 일은 잘하는데, 이 일로 인해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무엇이냐면, 통행 금지를 해제하자던 사람들이 빨갱이가 아니라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통행 금지가 있을 때는 불편함 없이 살았는데, 통행 금지가 해제되고 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거의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은혜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나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백락청 교수나 마틴 루터 킹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단점들이 있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질 때가 있슸니다

(2) 내 마음 속의 우상을 발견해야 합니다

위대하지 않은 것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 마음 속에 우상이 있어서 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대한 것들이 무너질 때 동시에 마음 속 잘못을 버리지 않으면 강력한 우상이 됩니다. 다미 선교회,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런 길을 갔습니다.

교회에서도 우상 숭배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겔 8:14~16) 1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15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6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애곡하고 교회에서 우상을 위해서 예배할 수 있습니다.

(3)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사람과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체된다고 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 것도 남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다니면서 변화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남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영원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확실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건물은 몇 백년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천년 전의 예수님은 지금도 제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오랫동안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교회가 해체된다고 해도 이곳에서 영향을 받아서 정신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측면에서 성장한 여러분은 남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더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결론]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우리 마음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2017.09.10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2

2017년 09월 10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3:01~02

설교 듣기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한 줄 요약]

마음 속에 위대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요]

1. 우리 마음 속에는 전설과 신화 등의 우상이 들어있습니다

많은 걸그룹, 보이그룹들이 등장하면 여지없이 많은 팬들이 생겨나고 그들을 응원합니다. 그들을 TV 등 미디어를 통해서 알뿐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알게 된 것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열광이 논리적인 것도 인격적인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걸, 보이그룹의 팬들이 더 적극적이고 열광적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행동을 보이지만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열광을 성경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표현합니다. 연예인들을 아이돌 스타라고 하느데, 아이돌이 영어로 우상이라는 뜻아닙니까? 그러나 우상 숭배는 다양합니다. 종교적인 우상, 정치적인 우상, 사회적인 우상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종교적인 우상 숭배는 이단 종교고 정치적인 우상 숭배는 극우극좌 운동입니다. 사회적인 열광은 연예인,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 특정 기업 등에 대한 열광으로 표현됩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자신들의 마음 속에 나름 대로의 우상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징은 논리적 혹은 합리적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각자에게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 영원하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노틀담 드 파리를 통해서 위대해 보이는 것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추악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화려한 것들이라고해서 반드시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1831년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발표한 장편 소설로, 꼽추이자 추한 외모를 지닌 노트르담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끝내 파멸하는 사제(司祭)의 뒤틀린 사랑을 중심으로 15세기 파리의 인간군상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트르담 드 파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7366) [Notre-Dame de Paris] (두산백과)

일반적으로 <노트르담 드 파리>는 낭만적이고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속에 마녀 재판을 통한 폐쇄적이며 배타적 사회적 편견의 고발, 중세 교회 권력의 이중성과 위선, 기득권 세력과 소외 계층,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미와 추,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삶의 근본적인 대립 점들이 망라되어 형상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종교적인 우상이 무너져도 그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단에서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안식일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그런 경우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apos;다미 선교회&apos;가 있습니다.

1844년 10월 22일 윌리암 밀러의 종말론 실패(대실망의 날)

찰스 테이지 러셀 여호와의 증인, 엘런 화잇이 제칠안식일교로 갈라짐.
여호와의 증인 1914년 여호와의 왕국 지상 건설 주장 –> 공중건설로 변경.

다미선교회 근황 2002년 20년 특집

중앙일보에서 20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오늘’에 대해 26일 보도했다.
‘다미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자정 휴거(携擧)가 온다고 주장했던 사이비 단체다. 그날 당연히 휴거는 일어나지 않았고, 다미선교회 전국 173교회 8천여명의 신도들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이들은 자살하거나 직장을 사직하고,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했으며 가출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휴거가 일어나지 않은 후 이들은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에서는 날짜를 계속 수정해 가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이 언론은 밝혔다.
또 당시 다미선교회를 이끌던 이장림(65)을 비롯해 ‘어린 선지자’로 지목된 권미나(39), 해외선교 담당 장만호(74), 분파였던 이만성(56), 다미선교회 출신으로 다베라선교회(1992년 10월 10일 휴거 주장)에서 활동한 하방익(37) 등의 근황을 추적했다. 이장림은 휴거 날짜로 지정된 1992년 10월 28일 한달 전 사기 혐의로 이미 구속됐었다.
이장림은 1993년 출소 후 새로운 삶을 살겠다며 ‘이답게(사람답게라는 뜻)’로 개명했고, 서울 서교동에 새하늘교회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3년 건강상 이유로 활동을 접었지만, 지난해 8월 신도들 요청으로 다시 다미선교회 본부가 있던 성산동에 C교회를 세우고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답게’는 더 이상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1992년 이후 쓴 저서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잘못됐음을 뼈아프게 느꼈다. 시한부 종말론이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다. 그는 현재 건강 문제로 기도원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방익은 시한부 종말론을 회개한 후 총신대학원을 나오는 등 정통 신학으로 건너갔고, 현재 경기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선지자’ 권미나도 부산과 대구 등지에서 종말 신앙을 전하다, 최근 일반 장로교회에 정착했다.
그러나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 본부에서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던 장만호는 아직도 휴거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출간된 <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역사(크리스천리더)>가 그의 책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 책의 저자는 ‘장 죠셉’이라 소개돼 있다. 장만호는 취재진에게 “베리칩이 모든 사람들 몸에 심겨지는 2013-2016년 사이 휴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0년부터 온라인 동영상으로 종말 신앙을 전하다 경남 거제 J교회에서 시무중인 이만성도 “2013년 제3차 세계대전이 휴거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처]중앙일보, 2012년 10월 26일 기사

3.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마음 속 우상을 &apos;투사&apos;한 것입니다. 즉,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우상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위대해 보이는 것이 무너질 때, 내 마음 속 우상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위대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각성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하고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결론]

건물로 된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우리 마음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2017.09.03_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1

2017년 09월 03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13:01~02

설교 듣기

[핵심 구절]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1~2)

[도입]

마음 속에 위대한 것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요]

  1. 우리 마음 속에는 전설과 신화 등의 우상이 들어있습니다.
  2. 각자에게 위대해 보이는 것들이 무너질 때,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 영원하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3.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론]

성전이 무너져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우리 마음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2017.08.27_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3

2017년 08월 27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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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신 8:5~6) 5 당신들은, 사람이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을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십시오. 6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하십시오.

[도입]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설교 요약]
오늘은 5절과 6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은 훈련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길을 가게 하신 이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갈 수 있는 훈련을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천국의 모형일까요?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천로역정을 보아도 해석자의 집을 지나야 십자가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배워야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라는 것이 행위적인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방편이라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마련해 놓은 구원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홀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 오늘날 가나안은 직업과 소명입니다 –창 1:28, 12:1

하나님은 광야를 가더라고 방향 없이 가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목표를 정해주고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모든 신자에게 공통되면서도 다릅니다. 그것은 직업이라는 소명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직장이 아니라 직업입니다.

여러분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직장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 두면 여러분은 다른 일을 하게 될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직장은 있지만 직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 내가 일생동안 발전시키고 계발해야 할 나만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에 매진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람에게 통치자라는 직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직업은 인간의 타락 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단지 난이도가 높아졌을 뿐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져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 매우 작게 세분화되어 있지만 우리 모두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작게 세분화된 직업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역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현재에는 직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찾으십시오.
교회에서 젊은이들에게 직업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직장에 들어갈 것인가에 목 매달지 말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고민하게 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그곳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 오늘날 광야는 바로 인생 자체입니다 – 계 7:14

광야는 곧 인생 자체입니다.

(계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시록 7:14에서 큰 환란는 ‘테스 세오슬립스 테스 메갈레스’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the great tribulation’이라고 합니다. 원어나 영어를 알 필요까지는 없는데, 한 가지 한국어가 갖는 한계 때문에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큰 환란’이 아니라 ‘그 큰 환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종말 때에 있을 대환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다르게 해석하는데, 여기서 흰옷입은 사람들은 종말때 대 환란을 거쳐서 들어가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환란이 있기 전 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겪은 그 큰 환난은 무엇일까? 저는 각자의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지난 주에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스캇 펙이 ‘인생은 고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게 불교식 용어이기 때문에 ‘인생은 환란이다’라고 고치고 싶습니다. 인생은 환란입니다. 스캇 펙의 말처럼 인생을 환란이라고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환란을 헤쳐나갈 힘을 비로소 얻게 됩니다.

  • 오늘날 만나와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요 6:51, 고전 10:4

그러나 환란을 헤쳐나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도를 만나는 일입니다. 광야는 힘든 곳이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생수를 마신 일은 모두 그리스도를 체험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번영주의적 사고를 버리면 됩니다.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부흥사들이 많아지고 방언이 일반화되고 영성이 들어오기 전에 오히려 기도 응답이 더 많았습니다. 힘들 현실 속에서도 분투하면서 겸손하게 신앙 생활 할 때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저는 지금 더 많은 기도 응답을 체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동행하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번영주의에서 벗어나니까 예수님을 더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영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기도, 방언, 영성 등으로 빨리 환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나를 훈련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라고 이해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그리스도를 만날 것입니다.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2017.08.20_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2

2017년 08월 20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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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한줄 요약]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인생은 광야와 같은 일상으로 이루어져있으면 그 일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개요]

  1.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분몬은 신명기이며, 모세가 광야의 의미에 대해서 나중에 회고한 내용입니다. 광야를 왜 지나야 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은데,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1.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1. 광야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2017.08.13_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1

2017년 08월 13일 주일 설교
신명기 08:01~10

설교 듣기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한줄 요약]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요? 인생은 광야와 같은 일상으로 이루어져있으면 그 일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개요]

광야는 외적 현실이 아니라 내적 상태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분몬은 신명기이며, 모세가 광야의 의미에 대해서 나중에 회고한 내용입니다. 광야를 왜 지나야 했으며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실이 광야와 같은데,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고통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2절에서 모세는 광야를 지나게 된 목적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알려줍니다. 기독교계에서 아니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으로써 스캇 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신경증, 즉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는데 있다고 칼 융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물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가끔 보게되는데 그 근본 원인은 문제를 회피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삶이 힘든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문제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부딪쳐서 해결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영원히 장애가 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면서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이다. 우리가 우리 행동에 책임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행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다. 책임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매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삶이란 온통 개인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임을 알아야 한다. 완전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자유로워진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각자는 영원히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가 그들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일상의 광야로 인도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광야의 목적이 내적인 성장로 이끄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3절에서 알수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광야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즉,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인 것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진정한 목적은 가나안 입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요 6:49~51)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10:1~4) 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가나안이 불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다.

우리는 일상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이 불필요합니다.

(빌 4:11~1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건너는 것도 좋지만 광야 중에서도 우리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 하나를 성취하면 그 다음 단계로서 하나의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고 자신을 타이른다. 대학을 들어가면, 돈을 볼면, 결혼을 하면..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대부분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얼마 안 가 원래의 기본적인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 평소에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 해도 얼마 안가 부정적인 느낌들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해서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인격이 부족해서 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겠다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으로 가는 바른 방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_지금의 우리는 반복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_. 따라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책저자의 주석-내가 하루 6시간씩 스쿼시 경기와 운동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나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려고 경기장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자동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광야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제가 많은 기독교 서적 혹은 기독교적 서적을 보면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이점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님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광야는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광야의 만나와 생수가 모두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떻게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자. 그러기 위해서

[머리] 성경을 공부하자. 가능하면 낭독하자.
[가슴] 기도하자. 기도문.
[배] 겸손하자. 자기 성찰.
[손] 글을 쓰자. 일기, 결심문, 자서전, 컬럼
[발] 봉사하자. 가족, 이웃, 교회를 위해.

[결론] 힘든 일상을 빨리 벗어나는데 중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와 동행합시다.

2017.08.06_성령님은 누구신가? 3

2017년 08월 06일 주일 설교
마태복음 03:16~04:11

설교 듣기

오늘은 구체적으로 성령님은 우리 인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듬으시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인도하는 분입니다.

‘고난 중 형통’을 통해서 다듬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 밀어넣으시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동일한 성령님께 이끌려서 광야로 가게 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 4: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능력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지혜와 성렴님의 인도에 대한 확신으로 시험을 극복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자들이 신앙 고백 이후에 고난을 통해서 무능력을 경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을 예수님께서 이미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능력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믿음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시험을 이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곳은 고난의 장소이고 낮아짐의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처럼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능력이 아니라 바른 믿음과 바른 인격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수 천명을 회개하게 한 것에 열광합니다. 바울이 일으킨 기적에 흥분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난은 성령님께서 신자를 인도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에게 고난 중 형통을 주는 분이십니다.

본문 4장 3절에서 10까지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멋지게 대답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14장에서 알아본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대답할 말을 생각하게 하시는 분, 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에게 지혜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만 주시지 않고 고난 중에 형통도 주십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부분인데, 성령님은 고난을 벗어나게 하지는 않시고 고난 속에서 형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힘들어 지칠 때면 피할 길을 주십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구약 성경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물이 없어서 힘들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주십니다.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시고요. 왜 병주고 약주고를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너무나 힘들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번째 사실을 고난을 겪는다면 우리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번영주의에 속으시면 안됩니다. 형통이 아니라 고난이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나서 고난 중 형통을 주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고난을 주시지만 동시에 고난 중 형통도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 중에 있다면 고난 중 형통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는 점입니다. 일상의 고난 중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그 원망하지 말고, 고난을 넉넉하게 감당할 능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다시 구약 성경 민수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했습니까? 그들의 광야 생활은 단지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장차 있을 가나안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노예로 수 백년을 살아온 민족에 전쟁을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제식 훈련을 하셨습니다.

마치 다윗이 양을 지키면서 돌팔매질 연습을 한 것이 나중에 골리앗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골리앗을 충분히 이길 능력을 훈련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훈련하고 성장시키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고 동시에 고난 중 형통을 주십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그 고난 속에서 형통을 주는 분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본문 4:11에서 천사들이 와서 수종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주시는 영광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진정한 영광을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영광은 진정한 영광 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하늘 나라에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면 하늘 나라에서 참된 영광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발견한 한 구절이 제 가슴에 깊은 인상으 남겼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무형한 사람이 많고, 이 땅에서 무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많다

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내면과 외면이 모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우리를 힘들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18에서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롬 8:17~18)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얻기를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바르게 아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2017.07.30_성령님은 누구신가? 2

2017년 07월 30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14:15~31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한줄 요약]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갖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개요]
1. 성령님은 또다른 예수님이십니다. – 또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2. 성령님은 신자 안에 거하는 분이십니다.
3.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결론] 성령님과 함께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행하는 제자가 되자.

2017.07.23_성령님은 누구신가? 1

2017년 07월 23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14:15~31

설교 듣기

[핵심 구절]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한줄 요약]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갖도록 도우시고,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개요]
1. 성령님은 또다른 예수님이십니다. – 또다른 보혜사 ‘알로스 파라클레토스’
2. 성령님은 신자 안에 거하는 분이십니다.
3.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분이십니다.

[결론] 성령님과 함께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행하는 제자가 되자.

2017.07.16_영적 세계에 대한 오해와 성경적 답변 3

2017년 07월 16일 주일 설교
마가복음 05:01~20

설교 듣기

오해 7. 악한 영을 쫓아내기 위해서 악한 영과 대화해야 한다

[성경] 악한 영과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막 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3:11~12)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막 5: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막 8:22~26) 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해 8. 전생 혹은 윤회가 있다

[성경]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결론] 우리 인생도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아쉬움이 있지만, 인생은 일종의 예선이고 본선은 하늘 나라에서 계속됩니다.

2017.07.09_영적 세계에 대한 오해와 성경적 답변 2

2017년 07월 09일 주일 설교
에베소서 06:10~24

설교 듣기

영적 세계에 대한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 모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관심을 가집시다.

[핵심 구절]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엡 6:11)

[개요]
오해 1. 우리 나라에는 처녀 귀신, 외국에는 흡혈귀가 있다 –> 성경: 영은 형체가 없습니다.
오해 2. 악한 영은 미래를 알 수 있다 –> 성경: 미래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오해 3. 악한 영은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한다 –> 성경: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결론]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합니다.

2017.07.02_영적 세계에 대한 오해와 성경적 답변 1

2017년 07월 02일 주일 설교
에베소서 06:10~24

설교 듣기

영적 세계에 대한 과도한 관심 혹은 과도한 무관심 모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관심을 가집시다.

오해 1. 악한 영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 성경.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관자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오해 2. 악한 영은 밤에 강해진다 –> 성경. 동일합니다. 낮과 밤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해 3. 한을 품고 죽으면 귀신이 된다 –> 성경. 죽으면 심판대로 갑니다. 그것은 ‘familiar spirit’입니다.

[결론] 하나님만이 인생은 심판하십니다.

2017.06.25_참된 자유 2

2017년 06월 25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08:31~59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한줄 요약]
소극적 자유는 해방되는 것이지만, 적극적 자유는 가장 고상한 것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입니다.

[개요]
1. 자유를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치한 것의 노예가 됩니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2. 스스로 고상한 것을 위해 얽매이는 것이 적극적 자유입니다
3.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스스로 계명에 얽매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자유입니다

2017.06.18_참된 자유 1

2017년 06월 18일 주일 설교
요한복음 08:31~59

설교 듣기

[핵심 구절]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한줄 요약]
소극적 자유는 해방되는 것이지만, 적극적 자유는 가장 고상한 것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입니다.

[개요]
1. 자유를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치한 것의 노예가 됩니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2. 스스로 고상한 것을 위해 얽매이는 것이 적극적 자유입니다
3.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스스로 계명에 얽매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자유입니다

2017.06.12_영웅 시대의 숨은 영웅들

2017년 06월 12일 이랜드 경영설명회 설교
룻기 01:01~05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개역개정)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새번역) 1[엘리멜렉과 그 가족의 모압 이주] a사사 시대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한 남자가, 모압 지방으로 가서 임시로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a 또는 ‘사사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사사 또는 재판관 : 왕 제도가 있기 전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지도자들) 2그 남자의 이름은 b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c나오미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d말론과 e기룐이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가문 사람인데,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살았다.(b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 c ‘기쁨’ d ‘질병’ e ‘황폐’) 3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4두 아들은 다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f한 여자의 이름은 g룻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h오르바였다. 그들은 거기서 십 년쯤 살았다.(f 히,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이고, 또 한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다’. 말론과 룻, 기룐과 오르바의 부부 관계의 혼란을 막으려고 기록. 순서를 바꿈(4:10 룻은 말론의 아내임) g ‘아름다움’, ‘친구’ h ‘이마 갈기’, ‘후방’) 5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설교 듣기

도입

방선기 목사님과 다른 사목님들을 도와 ‘말씀따라살기’ 큐티집을 편집하고 있는데, ‘말씀따라살기’를 잘 애용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심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설교를 듣고 도움이 되셨다면, ‘말씀따라살기’를 잘 활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권투 선수들의 펀치는 덩치가 아무리 큰 사람도 KO시킬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들의 펀치가 강력한 이유는 먼저 펀치를 내지르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펀치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서 때리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큐티와 성경 통독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큐티를 하는 것이 펀치를 사용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경을 통독하는 것은 펀치에 체중을 싣는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큐티와 함께 성경 통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따라살기는 통독과 큐티의 균형, 그리고 직장에서의 적용을 목적으로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성경 통독의 관점에서 룻기를 해석해 보고, 통독과 큐티가 결합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풍성한 유익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큐티를 오랫동안 해 왔는데 만약에 성경 통독을 병행한다면 큐티로 다져진 말씀의 기교에 성경 전체의 무게가 실려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룻기를 성경 통독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룻기는 사사기 다음, 사무엘상하 앞에 있는 짧은 성서입니다. 전쟁 영웅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사사들의 이야기와 다윗이라는 걸출한 영웅 사이이 끼어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는 성서이기도 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마침 오늘 큐티 본문이 룻기 1장이기도 합니다.

성경 통독의 관점에서 룻기를 묵상하면 다음과 같은 풍성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룻기는 사사기의 결론 –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혼란을 끝낸다

첫째 룻기는 사사기의결론입니다. 룻기가 사사기의 결론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혼란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완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에는 전쟁 영웅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영웅들에게 사람들은 환호하고 열광합니다. 그런 영웅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혼란스러운 전쟁의 시대를 끝내주기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대와 좀 다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는 전쟁의 시대를 끝내는 길은 매우 강력해서 다른 영웅들을 압도할 수 있는 최강의 영웅이 나타나면 마무리될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의진행은 어떻습니까? 사사기의 후반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사기의 후반부에는 삼손이 등장합니다. 삼손은 그 앞의 어떤 사사들보다 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아이들 용어로는 ‘끝판왕’입니다. 하지만, 삼손이 전쟁의 시대를 종식시키지 못합니다.

끝판왕 삼손이 실패하면 다음에는 또 어떤 영웅이 등장할까 궁금해하는데,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영웅이 나옵니다. 바로 룻기의 영웅들입니다. 나오미와 룻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영웅들의 시대에 전혀 영웅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민에 실패해서 가족을 잃는 비극적인 여인 나오미와 외국인 며느리 룻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들이 전쟁의 시대를 끝내게 됩니다.

만약 “그런 일은 성경에만 나오는 얘기 아닙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예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1337~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127년 동안 싸운 일명 백년 전쟁을 끝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당시는 진짜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앞서서 전쟁을 주도하던 시대였는데, 놀랍게도 ‘기사의 끝판왕’이 아닌 ‘평범한 여인’ 잔다르크가 기사들의 백년 전쟁을 끝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성경 혹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의 역사 속에 명백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룻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각 개인의 각성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줍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기독교 선교를 확산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킨 주역은 무명의 평신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룻기를 통해서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 다윗이 진정한 왕이 된 이유를 설명 – 하나님의 축복은 고난으로 포장되어 있다

둘째로 룻기는 다윗이 진정한 왕이 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룻기는 사사기의 결론이면서 사무엘서의 서론입니다. 룻기 다음에는 사무엘서가 오는데,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 족보를 보면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속해 있고 그 중에는 왕들도 많이 있지만 왕이라고 불린 인물은 다윗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다윗만이 진정한 왕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책이 룻기입니다.

얼핏보면, 사사기의 사사들과 다윗은 매우 비슷합니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도 사사기의 연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왕이 되고 사사들은 사사로 머물고 말았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이 룻의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경우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서 배달이 되는데, 그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감싸인 축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 안목을 가졌던 여성이 룻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을 통해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통독의 관점에서 그의 증조 할머니 룻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왜 하나님의 축복이 고난으로 포장되어야 하는지 그 필연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치료하고 인도할 사람은 자신이 직접 그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왕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입은 치료자’에서 육신의 의사는 다른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임상 실습을 하지만, 영혼의 치료자는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임상 실습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고 동시에 그 고통을 치료할 영혼의 의사가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자기 몸으로 상처받고 치료하는 임상실습을 해야만 합니다.

자기 몸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믿음의 백신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필연적으로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서 배달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사사 시대에 그것을 시험을 처음으로 통과한 사람이 룻이었고, 그 룻의 유전자는 다윗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그래서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라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입니다. 룻기의 마지막이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족보를 알려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룻이 다윗의 믿음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치입니다.

셋째, 숨은 영웅들 –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

통독의 관점에서 본 룻기의 세번째 교훈은 룻기가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준다는데 있습니다. 제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분들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룻이 무슨 대단한 일을 했는가?” “룻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다른 신앙 위인과 같은 반열에 오늘만큼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합당한가?” 같은 의문들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에 룻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데서 우리는 룻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높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우리의 평가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한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는지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그의 출발점이 어딘지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수저론이 있지 않습니까? 금수저, 은수저, 스탠수저, 흙수저 말입니다.

룻은 말하자면 흙스저 중의 흙수저입니다. 룻은 이방이었고, 여인이었고, 과부였습니다. 루저 중에 루저입니다. 그녀가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도달한 지점이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평범한 것들입니다.

비유하자면, 100m 달리기를 하는데 룻은 출발점 100m 뒤에서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그녀가 엄첨한 스피드로 달려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지만, 그녀가 도달한 지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출발점에 불과했던 것과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도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 평가도 초점은 출발점이 아니라 성공에 맞춰져 있습니다.

불리한 출발점에서 시작해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우리는 룻을 보면서 불리한 조건과 어쩔 수 없는 환경, 뜻하지 않은 불운을 공정하게 평가해 주실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게 됩니다.

언젠가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쓴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을 읽다가, 군대에서 행군하던 도중 이름모를 산에서 보았던 들꽃처럼 제 마음을 뒤흔드는 문장을 발견했었는데, 그 문장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 중에 하늘 나라에서 무명한 사람이 많고, 이 세상에서 무명한 사람 중에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룻은 이 땅에서 무명한 사람이었지만, 하늘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리한 출발점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고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을 인정받고 싶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좌절하기도 하고 반칙을 쓰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버리고 비우라고 말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자주 들으면 오히려 변형되거 잠재될 뿐입니다.

저는 해결책으로 이렇게 권유하고 싶습니다. 그 욕망을 버리지 말고 업그레이드 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불과 몇 십년에 불과한 이 땅의 명성을 추구하지 말고 룻처럼 영원한 나라에서 명성을 추구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결론

말씀을 마치고 싶습니다. 사막에서 홀로 걷는다고 해도 분명한 방향과 목적지를 알고 있다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다른 사람들을 확신을 가지고 이끌 수 있는 산 지식이 될 것입니다.

룻을 묵상하면서 우리 각 개인이 각성해야 하고 또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한 것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정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가 겪은 시련들을 통해서 어쩌면 이랜드 그룹과 이랜드 리테일에 룻과 같은 숨은 영웅들이 잉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생생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가운데 내면에 믿음의 백신을 생성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숨은 영웅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만든 믿음의 백신을 통해서 이랜드 그룹과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다윗의 시대와 같은 찬란한 영광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느 직장인의 기도문

매일 아침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시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나로 인하여
남들이 얼굴 찡그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상사와 선배를 존경하고 아울러 동료와 후배를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아부와 질시를 교만과 비굴함을 멀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루에 한번쯤은 하늘을 쳐다보고
넓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고
일주일에 몇 시간은 한 권의 책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보낼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한가지 이상의 취미를 갖게 하시어
한 달에 하루쯤은 지나온 나날들을 반성하고
미래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일에도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과
큰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지니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용기와
남의 허물을 따뜻이 감싸줄 수 있는 포용력과
고난을 끈기 있게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더욱 길러 주옵소서.
직장인 홍역의 날들을 무사히 넘기게 해주시고
남보다 한발 앞서감이 영원한 앞서감이 아님을 인식하게 하시고
또한, 한걸음 뒤처짐이 영원한 뒤처짐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반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시고
늘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매사에 충실하여 무사안일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매일 보람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직장을 그만 두는 날
또한, 생을 마감하는 날에
과거는 전부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모든 사람들이 살며시 미소짓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06.11_참된 사랑 2 – 사랑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2017년 06월 11일 주일 설교
고린도전서 13:01~13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한줄 요약]
믿음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사랑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개요]
1. 사랑에 대한 세 가지 단어 :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2. 사랑에 대한 오해 :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3.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능동적인 태도입니다.
4. 사랑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론] 좋아하기 보다는 사랑하자

2017.06.04_참된 사랑 1 – 사랑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1~13
참된 사랑 1 – 사랑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2017년 06월 04일 주일 설교

설교 듣기

[핵심 구절]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한줄 요약]
믿음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사랑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개요]
1. 사랑에 대한 세 가지 단어 :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2. 사랑에 대한 오해 :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3.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태도입니다.
4. 사랑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2017.05.28_참된 믿음 3

민수기 21:04~09
참된 믿음 3

2017년 05월 2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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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한줄 요약]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문제의 원인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개요]

  1.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광야길은 인생길을 의미합니다.
  2. 인생길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고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3. 놋뱀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문제의 원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4. 십자가 대속은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키는 거룩한 역설입니다

2017.05.21_참된 믿음 2

요한복음 14:01~14
참된 믿음 2

2017년 05월 21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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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요약]
믿음은 예수님과 연결되는 것(예수를 바라보는 것. 히 12:2)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개요]
1.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2.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3.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신데,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론] 어느 때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2017.05.14_좌절감의 치유

누가복음 24:13~35
좌절감의 치유

2017년 05월 1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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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구절]
(눅 24: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한줄 요약]
뜻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좌절감에 빠진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셨을까요?

[개요]
1. 첫째, 좌절감은 잘못된 전제를 버릴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 번영주의
2. 둘째, 예수님의 큰 그림을 알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 고난 – 십자가 – 부활.
3. 셋째 –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알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 친밀한 교제

[결론] 예수님 안에서 좌절은 소망으로 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