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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성령님에 관한 오해
기독교는 성령님이 내려오시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님이 예수님과 바통 터치하면서부터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부터 교회가 급격하게 성장합니다. 기적이 있어나고 신자가 늘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성령 받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번주부터는 이런 성령님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수정하겠습니다.
사도행전 01:01-05
1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1. 오해. 성령 세례는 갑자기 받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령을 받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에 집중하는데, 이게 완전히 초점이 빗나간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받는 건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복음서를 봐야합니다.
모내기를 생각하면 좋습니다. 모판에서 모를 키운 다음에 모를 논에 옮겨심습니다. 모를 처음부터 논에 심으면 어린 모가 쉽기 죽기 때문에 생산량이 적어집니다. 어린 모를 실내에서 키워서 튼튼해진 다음에 논에 옮겨심으면 모 하나하나가 잘 성장하게 되어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비슷한 패턴이 구약 성경에도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가문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한 가정에만 집중하죠. 그러다가 이 가족이 급격하게 수가 능가해서 출애굽기에서는 한 민족이 됩니다. 창세기는 모판이고, 출애굽은 모내기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복음서가 모판이고, 사도행전이 모내기입니다. 창세기와 복음서는 개인에 관해 기록하고, 출애굽기와 사도행전은 공동체에 관해서 기록합니다.
믿음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출애굽기가 아니라 창세기를 봐야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된 부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세례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복음서를 봐야합니다. 신약 시대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부분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게 믿음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어떻게든 성령만 받으면 된다면 성경이 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긴 이유는 길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연장이고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죠.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갑자기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간략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확장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 성장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설명된 걸 반복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성령 셰례를 받는 것이 갑작스러운 것 같아도 전후 사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2. 오해. 성령 세례는 능력받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능력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첫번째 오해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게 부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자기가 볼 수 있는 좁은 부분만 보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한 권의 책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해석하려고 해도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령님은 예수님과 바통터치하신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한마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성령은 능력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복잡미묘합니다. 단순히 만나기만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격이 비슷해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우리를 변화시켜가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빨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가정 먼저 예수님을 닮은 인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능력을 받고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고난 중 형통의 훈련을 먼저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번영주의로 빠질 수도 있고 복음주의의 길을 계속 갈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 과정을 예수님께 훈련 받았기 때문에 바로 사역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훈련 받지 않은 우리는 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3. 오해. 성령 세례는 기도해서 받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가 중요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많이하라고 강조합니다. 또 오늘날 은사로써의 기적은 사라졌지만, 기도로 인한 기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기도 만능주의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성령 세례는 기도 많이해서 받는 게 아니라 은혜로 받습니다. 기도 혹은 금식 같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주장에는 공로주의가 숨어있습니다. 돈을 내고 무엇을 사는 것처럼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성령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도 땅의 것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적당한 가격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인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타락합니다. 기도 많이 해서 혹은 금식 많이 해서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타락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항상 공로주의를 주의해야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교환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로 하나님이 가진 물건을 사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자비를 구하는 호소입니다. 받을 권리가 없는 것을 겸손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해서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간절히 기도해야 성령 세례 받을 수 있습니다.
4. 결론
복음서를 읽고 사도행전을 읽어야 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과정을 통과해야 사도행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성령의 순서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무조건 사도행전을 여러 번 읽고 기도하면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혼연히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