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4월 21일 주일 설교
누가복음 24:44~49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저는 교회를 몇 년 다니면서도 부활절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진짜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믿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런 걸 믿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같은 분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는 않는데, 다들 그랬다니까 믿는 척하거나 하니면 그러려니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부활 신앙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가와 부활의 증인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부활의 증거 1
– 기독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첫번째 증거는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입니다.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축을 차지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시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름 충성스럽고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실의와 좌절, 분열과 갈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독교가 현대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아니 가늘게라도 명맥을 유지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질적인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뛰어난 교주가 특별한 가르침과 기이한 기적을 행해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죽었습니다. 교주가 마련한 기반 위에 뛰어난 후계자들이 세력을 키워서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님이 물론 탁월한 가르침을 베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로마의 사형수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할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로마의 사형수를 믿는 종교일 뿐입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최후가 비참합니다. 그런 분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한가지 가능성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부활하셨다고 거짓말로 모의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기독교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맞섰다는 점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멸절하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다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10대 박해로 정리합니다. 1대 박해인 네로 황제의 박해(AD 54~68년)에서부터 10대 박해인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AD 284~305년)까지 250년 이상을 박해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이보다 심한 박해를 이토록 오랫동안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숨죽이고 있던 그들을 이토록 맹렬하고 담대한 사자들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요? 위협과 채찍, 감옥과 고문,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이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던 바로 그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엄청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열두 명의 보통 사람들이 용맹한 사자들이 되어 목숨을 걸고 증언하도록 만든 설명이 불가능한 변화와 역동적 능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콜로세움 아기 한 사형수를 믿는 종교가 제자들도 별볼일 없는 종교가 로마 제국이 멸절하려던 종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 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불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천년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존재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증거 2
– 성경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두번째 증거는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예언된 사건이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에 관한 예언은 구약의 족장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때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조와 함께 잔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깨어날 것을 암시하는 부활의 신앙을 내포하는 것이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무덤)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라고 예언하였습니다.그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충분한 증거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추상적이거나 환상적인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왕상17:22)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32~36) 그리고 엘리사의 시체에 던져졌던 시체가 살아났던 사례도 있다.(왕하13:20~21) 단순히 예언만했다면 어쩌다가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나야만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라고 말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리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점말입니다. 부활을 하나의 독립된 기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고, 고난을 받으셔야 했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를 연속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기록이 이 연속적인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 필연성을 알려줍니다. 단순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거나 실제로 죽었지만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 오셔야만하고 대신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고 죽으셔야만 하고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연속적인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의 증거 3- 교회
예수님 부활의 세번째 증거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을 정보습득, 지적동의, 자기확신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인다거나 존재를 확신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데 그 사실을 사탄은 더 잘 인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믿음은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까지 심겨진 감사와 감격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한가지 방법 외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의 인격적인 만남은 오직 한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그것은 죄의 각성입니다.
죄의 각성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고난받으심,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적으로 깨달아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의 각성은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것을 의미하지만, 그 전에 자기자신을 보는 자기성찰력이 생깁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인 로버트 키건(Robert Kegan)과 리사 라스코 라헤이(Lisa Laskow Lahey)는 정신의 발달(development)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마다 주변 현상과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다. 그런데 정신이 얼마나 성숙했는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의 수준이 다르다. 단순한 공식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상황과 근거를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고려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정신복잡도(mind complexity)라 한다.
정신복잡도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사회적 정신(Socialized Mind)**은 규율을 따라 다른 사람들과 팀으로 일할 수 있는 단계이다. **자기 통제적 정신(Self-authoring Mind)**이 되면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일할 수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변혁적 정신(Self-transforming Mind)**은 여러 가지 사고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세상이 어떤 곳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학교에 입학하면 행동 기준이 친구들로 바뀌게 되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된다. 타인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회적 정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복잡도의 단계는 자기 변혁적 정신이다. 자신만의 관점은 있지만 필요에 따라 그 관점을 잠시 벗어두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관점에 왜곡된 부분이나 잘못된 가정이 있지는 않은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모순된 관점을 가진 사람과 만나도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통합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완성도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위대하고 고등한 사고는 자기 객관화’**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경지에 이른 분들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대를 뛰어넘어서 여전히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에너지입니다.
부활의 증인이다
증인은 증인으로 살려고 하지 않아도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