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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공부하는 많은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 구속사의 목적
구속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님 자신이며, 성경의 주제 또한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등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의 기록을 해석해 준 것입니다.
[눅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대통령을 가지고 있지만, 그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을 보고도 보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면 그 평가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성경을 보아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성경을 보는 관점을 알려주시고, 성경을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관점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을 ‘교리’라고 부르는데, 성경을 배우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 교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만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상은 “자기 교리 만을 믿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교리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성경 해석 관점, 즉 교리는 구속사적 관점이기 때문에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워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께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배운 후에야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셔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눅 24:30-32]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워야 눈이 열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관점, 자기 교리로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 출세, 복 등 자기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옆에 계셔도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눈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눈도 열려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예수님이 인격적인 실체로서 영혼 속에 선명하게 조명되어야 하는데,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옆에 계셔도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홀연히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 믿음을 갖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왜 그렇게 두꺼울까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 혹은 ‘소책자’를 통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두꺼운 성경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단순한 구호, 짧은 소책자, 감동적인 간증 등으로 믿음이 생긴다면 좋겠지만,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볼 때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반드시 성경 공부가 필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돌려보내서 형제들에게 전도하고 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거절 이유는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전도해도 소용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형제가 돌아와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면, 그 사실을 믿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고민이라도 해 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눅 16:27-31]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을, 정보 습득이나 불확실한 사실에 대한 선택, 개인적인 신념 혹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것들이 믿음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만으로는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이 성령님의 조명에 의해서 선명하게 깨달아지고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우리 영혼의 중심을 뒤흔들어 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 자신도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보거나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체험이 믿음을 갖도록 인도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는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부자의 부탁이 거절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믿음은 정보 습득이나 선택, 혹은 결단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승복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
하거나 결단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선택이나 결단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론에 항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 된 현실과 그 원인, 그리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 등 세상의 문제점과 부조리함에 대한 하나님의 변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고, 납득한 후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의할 점은, ‘인간의 결단이나 선택’ 아닌 ‘순종과 굴복’이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믿음은 인간 주도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주도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변론을 요청하십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우리는 그 변론 가운데로 들어가서 승복한 이후에야 참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사실에 대해서 모험을 거는 결단이나 사실에 대한 동의,?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변론을 통해서 굴복하고, 설득되고, 감동해서 하나님의 해답,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앞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드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속사만이 하나님의 변론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려 줄 수 있습니다.
넷째, 믿음이 성장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더 일찍 오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만을 신봉하는 우리가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언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언하심으로써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한 두 번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은 예언과 성취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관해서 확신을 심어줍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은 성경 예언 성취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믿음을 갖도록 훈련시키기 위해서 수 천 년의 기간이 필연적으로 필요했다 할 수 있습니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한편, 하나님의 구속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이유도, 성경을 배우는 사람의 믿음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공부하다 보면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믿음의 기초가 다져지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구속사가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성경을 배우는 우리 믿음이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격 속에서 믿음이 구체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모습을 보여주는 세밀한 비유와 상징들을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점진적으로 발전되고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따라가면 우리 지정의가 하나님의 논리에 승복하고, 믿음도 함께 성장해 가며, 일상의 구체적인 사건에 믿음을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째, 이단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르던 하나님의 말씀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는 사람은 믿음의 계보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속사는 믿음의 역사인데 마치 이어달리기와 같습니다.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건네주듯이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에게 믿음을 전해주면서 구속의 역사는 진행됩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 구속 역사는 창세부터 시작되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으며, 종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을 종합하여 넘겨주신 믿음의 바통은 사도-속사도-교부-종교개혁자-개혁파 신자로 계승되며, 믿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주도하시고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에 의해서 믿음이 계승되도록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시대 에스라는 포로귀환 시 백성들의 족보를 조사해서 족보에 나와있지 않은 제사장들이 제사장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입니다.
[라 2:62]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성경에는 믿음의 족보가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믿음은 인격적으로 계승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혈통을 따라서 믿음이 계승되었지만, 신약시대에는 혈통과 관계 없이 전도를 통해 계승됩니다. 사도 바울이 해산의 수고로 제자를 가르치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한 이유도 믿음의 족보를 이어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따라서, 성경을 보는 관점, 즉 교리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지 않고 홀로 아무도 몰랐던 새로운 교리를 발견한 사람은 믿음의 계보에 들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치 제단에 다른 불씨를 가져온 나답과 아비후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 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구속사는 믿음의 계보를 따라서 성경을 배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구속사를 배울 때,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나만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왜 이단이고,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구속사를 배움으로써 믿음의 계보를 계승할 수 있습니다. ?
1-2. 구속사의 의미
이 장에서는 ‘구속사’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를 가진 용어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자유를 박탈하다’가 아니라 ‘대가를 치렀다’
‘구속사’라는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단어지만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용어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속사에서 ‘구속’이라는 단어는 신문이나 뉴스에서 가끔 나오는 “검찰에 구속(拘束)되어 자유를 박탈당하다”는 의미의 구속이 아닙니다. 한자로는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데, ‘구할 구(救)’, ‘살 속(贖)’자를 써서 ‘값을 주고 구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아폴뤼트로시스’를 사용합니다. ‘아폴뤼트로시스’는 ‘노예를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지불하는 돈’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시대에는 노예제도가 있었고,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영어로는 ‘뤼뎀션(redemption)‘을 씁니다. 구원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 셀베이션(salvation:구원)을 사용하지 않고 ’뤼뎀션(redemption:구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뤼뎀션에 ‘(돈을) 지불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조나단 에드워즈의 ‘A History of the Works of Redemption’ 참고).
‘구속’이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는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값을 지불한 구원’이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값’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 그 중에서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냥 ‘구원’과 ‘값을 지불한 구원’이 사소한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때로는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잘못된 복음주의(‘복음주의’와 다름)의 영향으로 인기 없는 공짜 선물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 즉 ‘값을?지불한?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곧이어 “왜?값을?지불해야?했으며,?그?값은?어느?정도인가?”라는 의문을 불러 일으키게 되고 복음의?세계로?한 걸음?다가서도록 이끌게 됩니다.
‘점’이 아니라 ‘선’
구속사에서 ‘사(史)’라는 단어도 중요합니다. 역사(history)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구속’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하여 ‘구속사(The history of redemption)’라고 할 때는 성경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주제를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성경을 대충 볼 때는 다양한 시대, 인물, 사건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어서 그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바느질 실이 한 땀 한 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도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도 개별적인 사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합니다.
‘사(史)’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연속성’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을 연속적인 이야기로 이해하고 볼 때 성경의 참된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배워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곧 소멸해 버린다면, 그 원인은 연속성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느 부분을 배우더라도 성경 전체의 무게를 느껴야 능력이 나타나는데,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복싱 선수의 예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싱 선수의 주먹을 상대방이 한 주먹만 맞아도 다운될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 이유는 그 주먹에 온몸의 체중이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한 주먹에 온몸의 체중을 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연속성을 이해하고 배워야 성경의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와 어우러져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구속사’에서 ‘사(史)’라는 단어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는, 성경이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유기적으로 쓰여진 책이므로 그것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구속’과 ‘사’에 담긴 의미를 합쳐서 정리하면 구속사는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관된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방법’을 의미하게 됩니다.
[눅 24:44~48]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지식’이 아니라 ‘만남’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기 위함 입니다(요20:31).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구속사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방편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만들었고, 그대로 완성했을 때 회막에 가득 찬 영광을 보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구속사를 따라 성경을 배울 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영광으로 가득 찬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출 40:32~35]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또 하나, 구속사적 성경 공부의 목적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배우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속사는 “믿음이란 무엇이며,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누구인가?”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결국 한 가지 단어로 합쳐지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을 ‘교회’라고 부르기에 두 가지 질문의 답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구속사입니다.
필자는 성경을 공부하는 관점으로써 구속사적 방법을 제안하면서, 구속사의 거장인 게할더스 보스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술을 참고했습니다. 또한,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구하신 유도순(신구약파노라마, 머릿돌), 김영철(선으로 본 구속의 역사, 코람데오), 정병우 목사님 등의 업적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행여나 위 분들의 사상과 어긋난 내용이 있다면 필자의 잘못이며 언제든지 수정할 용의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3. 구속사와 설교
예수님께서는 설교에 능하셨습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에 권위와 능력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청중을 즐겁게 했고,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인생을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예수님 같은 설교자가 되는 것이 모든 목회자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 첫걸음이 구속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첫째, 구속사적 설교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사적 설교가 따로 존재할까요? 지금까지 설교해 왔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구속사적 설교 방법을 배워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자체가 구속사적으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본문에 충실하게 설교를 해 온 목회자라면 이미 구속사적 설교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명확하게 구속사의 맥을 잡지 못했다면 통일성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속사적 설교는 지금까지 해 왔던 설교를 구속사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 떨어져 있는 옷감들을 모아서 한 벌의 옷을 만드는 것처럼 구속사라는 실을 사용해서 그리스도라는 옷을 만드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옷감은 많으나 실이 없어서 좋은 옷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구속사의 맥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본문 중심의 설교를 했지만, 구속사적 설교라는 옷을 만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구속사를 배우면, 설교를 통일성 있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속사는 설교를 재미, 감동, 능력 있게 합니다.
구속사적 성경공부는 설교를 풍성하고 다양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하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살렘왕 멜기세덱으로, 이삭을 대신해서 예비된 양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로, 반석을 뚫고 솟아난 생수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유와 사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매우 다양한 비유와 사건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을 봅니다. 들에 핀 백합화와 하늘을 나는 새가 모두 설교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동전을 잃은 여인도, 양을 잃은 목자도,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는 생생한 예화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가 매우 풍성하고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재판정의 모습을 들어서 칭의 교리를 가르치고, 에베소서에서 로마군인의 무장을 빗대어서 영적 무장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 경주의 예를 들어서 믿음의 경주를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구속사에 정통할수록 다양한 사건과 인물, 비유를 통해서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살아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속사는 성경을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려는 억지 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하고 다양한 가르침을 내면화시켜서 창조 세계의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사실을 가르치도록 돕는 방법입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우면 모든 정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교할 수 있는 관점을 갖추게 됩니다.
섯째, 구속사는 설교를 체계적으로 하도록 돕습니다.
구속사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교도 체계적으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의 설계도가 완벽하게 그려져 있으면, 부분 부분 공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건물로 완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워 두면 부분 부분 설교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완전하게 체계가 잡힌 설교가 됩니다. 설교를 해 갈수록 퍼즐이 맞추어져 가는 것처럼 구속사의 전체 모습이 보이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성경 전체를 염두에 두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워 두면, 자연스럽게 성경 전체의 설계도가 그려지게 되어서, 설교가 하나의 체계화된 전체로 완성됩니다.
넷째, 구속사는 설교에 통일성을 줍니다.
성경은 다양한 가운데 통일성이 있습니다. 통일성은 똑같은 것만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가운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의 다양성이 구슬이라면, 구슬을 꿰어주는 실이 구속사입니다. 구속사라는 실이 있어야 성경의 다양성이 빛을 발하고 보배로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구속사는 성경을 연결하는 일관된 관점이기 때문에 구속사라는 실을 가지고 있으면, 성경 어디를 설교해도 성경 전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통일성을 유지하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째, 구속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로 인도합니다.
구속사와 설교에 관해서 주의할 점은 구속사적 성경공부는 성경공부 방법이지 그 자체가 설교 방법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설교는 상황과 청중, 설교자에 따라서 달라져야 하기 때문에 한 가지 설교 방법만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의 목적은 청중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인도하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다양성과 풍부함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청교도들은 대체로 교리적인 설교 방법을 애용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에 익숙했으며 교리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능통한 조직신학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스펄전 같은 설교자는 주제 설교를 통해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펄전은 자유롭게 성경 전체를 옮겨 다니면서 설교했고, 어떤 구절을 통해서도 성령의 불꽃을 피워 올렸습니다. 정반대의 경우는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강해 설교를 강조했고, 본문을 꼼꼼하게 주해하면서 진리를 날카롭게 드러냈습니다. 청교도, 스펄전 그리고 로이드 존스는 모두 다른 설교 방법을 활용했지만 동일하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구속사적 성경 공부는 구속사적 설교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설교 방법을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어떤 설교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결국은 청중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설교의 목적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기초를 놓아 주는 구속사적 성경 공부를 고집할 뿐입니다.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 설교로 인도하는 교과서이기 때문에 구속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중심 설교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1-4. 구속사와 경건
다음으로 교회사에 나타난 주요 인물들을 통해 그리스도 체험이 어떻게 신자를 경건한 삶으로 이끌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경건’이라는 용어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영성’이라는 용어를 대체한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
어거스틴(AD. 354-430, 북아프리카)
어거스틴은 카톨릭과 개신교 두 진영에서 사도 바울의 전승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고 평가 받는 인물입니다. 신학적으로 온전했고, 신앙적으로 성령 충만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죄의 각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철저하게 깨달았기에 그는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를 잘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클레르보의 버나드(AD. 1090-1153, 프랑스)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중세의 영적 혼란을 뚫고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소수의 인물 중 한 명으로서,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수도사입니다.
버나드 신학의 특징은, 그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께 대한 감격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매료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중세의 영적 부패 상황에 오염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AD. 1628-1688, 영국)
존 번연은 청교도의 일원으로서 ‘천로역정’의 저자입니다. ‘천로역정’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 체험을 비유적으로 묘사해 놓았습니다. 멸망의 도성을 떠난 크리스천이 해석자의 집을 거쳐 갈보리 십자가를 체험하는 과정은, 그리스도 체험의 교과서라 할 수 있을 만큼 신자의 영적 여정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가 온갖 고난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조지 휫필드(AD. 1714-1770, 영국)
조지 휫필드는 강렬한 회심의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회심은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으며, 루터처럼 죄로 인해 깊은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철저한 회심을 체험했기에 그의 설교에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심령을 꿰뚫는 날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8세기 각성운동의 주역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휫필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는 한 조지 휫필드의 이름은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바란다”고 했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놀라운 능력의 근원이 그리스도께 대한 열정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AD. 1703-1758,미국)
미국이 나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철학자, 청교도로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나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결심문 63, 자서전)라고 고백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삶과 사역과 신앙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소원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또한 앞서 소개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의 각성에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 체험을 철저하게 경험했습니다.
위와 같이, 2000년 교회사 속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높은 평가를 받는 위대한 신앙인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적인 ‘그리스도 체험’을 경험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죄와 심판에 대한 각성은 깊고 철저했으며, 그 체험 이후로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열심으로 인해서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인 경우는 있지만, 최소한 습관적으로 욕을 했다거나 금전적, 성적 문제로 일반인의 비난을 받은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전 세계에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맥도날드 같은 회사는 지역에 관계없이 일정한 서비스를 고수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맥도날드 햄버거 체인점은 동일한 맛과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도 나라와 민족과 시대에 관계 없이 동일한 수준의 그리스도인을 배출하십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성령님께서 예외적으로 욕 잘하고 돈에 집착하며 성적으로 타락한 그리스도인을 허락하셨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영적 혼란은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끌어서 내면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미혹의 영’을 분별하지 못해서입니다. 따라서 바른 성령 체험을 위해서라도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경건한 삶과 그리스도
기독교 역사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매료된 사람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찼고, 성령 충만했으며, 하나님 나라를 질적으로 전진시켰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들이 성령님을 체험하는 데에는 공통적인 단계가 있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구원의 서정’이라 불리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8장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성령님의 바른 인도하심을 알아야 미혹의 영에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8장을 요약하면, ‘죄의 각성 → 심판의 정당성 인정 → 믿음→ 그리스도와 연합 → 성령 충만’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필자는 ‘그리스도 체험’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 과정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체험’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 체험’의 시작은 로마서 1~3장에 나와있듯이 죄의 각성과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난 사람은 죄를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순복하게 된 후 죄인의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 사건이 깨달아집니다. 그 분이 이루어놓은 완전한 구원 앞에 감격하고 구원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각성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각성은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죄에 대한 감각을 살려주시는 것으로써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야만 죄의 비참한 본성에 대해서 바르게 통찰할 수 있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감각을 가진 사람이 뜨거운 불 위에 손을 넣고 버틸 수 없는 것처럼 죄의 감각이 살아난 사람은 죄 속에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성경에서 나병환자의 예를 들어서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유는 나병환자의 특징이 감각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죄의 각성을 일으키십니다. 죄의 각성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합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죄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인간적인 후회나 반성의 수준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자기 수준으로 낮추는데 열중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반면에, 죄의 각성은 자연스럽게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합니다. 죄의 각성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혹하고 부당한 것이라 생각하던 사람이 죄의 각성이 일어나면 죄의 파멸적인 속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죄가 진멸되고, 죄인이 심판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고에 승복하게 됩니다.
다음은 믿음을 간구하는 단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고에 전적으로 승복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때 비로소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죄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 그만큼 더 그리스도께 감격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은 성령님의 역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맨 앞에 둘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죄의 각성과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쳐 회심한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할 수 없는 감격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능력, 신비, 그것은 영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인 것입니다.
다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단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는 죄악 된 옛사람이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항복할 때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단계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항복하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흘러나오도록 일하십니다.
성경적인 단계를 알게 되면, 일반인의 기준에도 미달하는 천박한 말과 행동을 오랫동안 지속하면서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고 판단 할 수 있습니다. 능력과 은사가 나타나더라도 그는 정작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죄의 각성조차 체험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겠지만, 그 안에서 그를 이끌어가는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 버림받은 거짓 선지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은사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의 각성에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명목으로 불법과 거짓말, 잘못된 선동을 유도하는 것은 예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은사를 받아 하나님을 위해 사용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그를 알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성령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서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신자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먼저 갖추시고, 그 인격을 통해서 능력이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격 없는 능력과 은사는 영혼 없는 몸처럼 공허한 것일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미혹되지 않고 바르게 성령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배워 참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배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 구속사와 성령
최근에는 성령에 관해 다양한 주장과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겠지만, 서로 엇갈리는 주장들 때문에 혼란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 될까 싶어 주저되지만, 구속사적 측면에서 성령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언급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성령에 관한 논의에서도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고백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필요한 교리문답의 첫 질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핵심개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웁니다. 심지어, 성령님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십니다(요14:2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에 믿음을 주시어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영혼 속에서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성령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을 생각할 때에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 이시듯이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49-51). 우리는 성령님께서 오신 목적이 신자를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격을 떠올리면서 성령님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고 성령
개혁파 신학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1-23에서 불법을 행한 자들이 버림받은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님과 만남의 체험입니다. 세상에는 성령 외에 다른 영들도 있기 때문에 영적 체험이 모두 성령체험은 아니며, 사탄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신자를 미혹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고후 11:13-15]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영적인 현상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혹은 미혹의 영에 의한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 분별의 기준은 그러한 체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도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개혁파 신자들이 성령론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열망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자 간구하도록 이끄는 영이 바로 성령님이시므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존 칼빈 “우리가 칭의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와 연합』은 ‘가장 높은 수준의 중요성’을 갖는 교리입니다.” (기독교강요, 1:737)
존 머리 “『그리스도와 연합』교리는… 전체 구원 교리 중 핵심적 진리입니다. 이것은 그저 구속의 적용이 갖는 한 단면이 아니라, 구속의 모든 영역의 기초인 것입니다.” (구원-성취와 적용, 이어먼즈, 1955. pp. 201, 205)
안토니 후크마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개념에 눈을 뜨면, 신약성경의 모든 영역에서 이 교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은혜로 얻는 구원, 이어먼즈, 1989. 64)고 말합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의 ‘그리스도인의 영성: 성화의 다섯 가지 관점’(IVP, 1989. 58)에 보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왜 성화의 기초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우리는 그분의 행하심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과 연합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교리는 개혁신학의 성화론을 이루는 기본 토대입니다. 그것은 인간성과 인간이 성취한 거룩이나 성화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과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신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은 개혁파 신학 성령론의 핵심 개념으로써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선명하게 깨달아지도록 조명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열망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하고 싶도록 우리에게 거룩한 불씨를 심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셨던 일을 대신해서 행하시는 것이며, 성령 사역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역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하셨던 사역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분기점으로 둘로 나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앞부분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가르치는데 집중하셨고,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셔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의 신앙고백 뒷부분은 ‘그리스도는 왜 오셨는가?’를 가르치는데 집중하셨고, 기사와 표적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제자의 자세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 가르치심으로써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성령께서는 먼저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죄의 각성으로 인도하셔서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가?’를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을 대표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성령님께서는 성령의 충만과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반기에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사역을 행하셨는데,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역이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눅 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그러나 성령의 충만과 은사만으로는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기에 부족한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제자들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구약 성경 사울의 모습을 보면 이것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울은 기름부음 받고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 확실하지만 하나님께 버림받고 맙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큰 능력을 소유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데 실패했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데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할 수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를 알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왜 오셨는가?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리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지를 알리는 사역이 성령의 사역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십자가 체험’을 고백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 체험’을 통해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죄악 된 인간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세례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롬6:1~3). 따라서,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체험을 의미합니다. 소위, ‘십자가 체험’ 혹은 ‘자아의 죽음’이 성령 세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묘사한 체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령 세례를 단지 방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참된 성령 세례를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죄악 된 인간을 조금도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령 세례는 죄악 된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선하거나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 시킵니다. 십자가 외에는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곧 성령 세례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어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각종 은사와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 세례는 항상 성령 충만을 동반하지만 성령 충만이 항상 성령 세례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으로써 도구가 된 사람의 신앙 수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발람과 사울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버림받았지만 성령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이 구원의 표지, 신앙의 성숙도, 하나님의 호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 세례 없는 성령 충만은 불완전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 이후에야 온전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진실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는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하고 전적인 은혜를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은혜의 방편
전적 무능력을 인정하고 전적인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방편을 주셨습니다. 개혁파 교회에서는 말씀과 기도와 성례전(성찬과 세례)을 중요한 은혜의 방편으로 가르칩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8, 대요리문답 154). 그래서 우리가 바르게 말씀을 공부하고, 바르게 기도하고, 바르게 예배 드리고, 바르게 성찬에 임하고, 바르게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무능력을 인정하고, 은혜를 간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은혜의 방편을 습관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조명되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하지만,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방편을 겸손하게 순종해 가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가운데 홀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심령을 뒤흔들고, 영광의 하나님이 선명하게 깨달아지는 부흥이 임할 것입니다.